불교의 죽음관目 次1. 일반적 죽음의 의미2. 불교에서의 존재.인생은 고이다.고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다.고는 구체적을 무엇을 말하는가3. 존재의 현실적 시공간은 고의 세계4. 불교의 죽음관1. 일반적 죽음의 의미살아 있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세계는 죽음이다. 죽음을 철저히 사색하면 할수록 삶의 모습이 그만큼 진지하며 철두철미하여진다. 1917년 프로이트는 인간에겐 생의 본능인 Eros와 함께 죽음의 본능인 Hhanntos도 있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이 Thanatos에서 죽음학이라는 Thanatology가 나왔다.지금은 죽음을 종교의 독점 영역으로 하거나 정신분석학의 관심의 대상으로 맡길 수는 없다. 죽음은 삶과 함께엮어 놓은 인생의 '밧줄'이다. 삶이 '탯줄'일진데 탯줄과 밧줄은 하나의 '줄'로 엮어져 간다. 오늘날 죽음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는 죽음이 결코 인간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종래의 피안(被岸: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의 문제가 아니고 매일 매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절박한 차안(此岸: 生死의 세계)의 문제로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서 법률을 만들었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하였지만,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있거나 건너뛸 수 없는 절박한 현실의 문제로 자각하여야 한다.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본능적 욕망과 함께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의 생각 속에서 삶을 지탱하고 있는데도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동서양의 죽음관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동서양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다면, 서양인은 어떻게 사느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기에 영혼을 잠재우는 진혼(鎭魂: 亡魂을 가라앉히는 것)이 발달되었는데 비해서 동양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쏟아오다 보니 영혼을 불러들이는 소혼( 魂)이 발달되었다.사실 우리가 살안겨다 주는 苦로 보는 허무적 세계관에서 因果의 원리에 의하여 生死觀을 형성하고 있는 불교에 대한 죽음관을 살펴보기로 하겠다.2.. 불교에서의 존재행복하고 부유한 왕자의 삶을 살았던 석가모니가 출가하게 된 동기는 사고(四苦-生老病死)에 대한 자기성찰을 가짐으로 해서이다. 출가 후 6 년간의 고행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한 석가모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된 모습을 인식시켜 죽음 등에 관한 苦의 해방을 위해 한 평생 설법에 주력하였다.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모든 사람은 죽는 존재임을 인식시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 날 것을 권유하였다. 이렇듯 부타는 죽음의 실존성을 인정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불타의 근본 가르침 가운데는 三法印이라고 하는 '세 가지 진리'가 있다. 즉,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이 그것이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諸行無常)에서 불타는 현상적 존재의 영원불변성을 부정하는 존재관을 보여준다. 諸法無我는 '현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것으로 일상적인 자아라는 존재 역시 참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무아론은 영혼이나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을 넘어선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석가모니는 변하는 자아를 인정할 수 있지만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無我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로서, 이 세계 안에는 어떤 하나의 '절대적 실체나 '초월적 본질'이란 것이 없다는 것이 다. 이 無我라는 말은 緣起(pratitya-samutpada)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이해되어왔다. 연기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일체의 존 재들은 서로 상호의존(mutual dependence)하고 있으며, 원인과 결과를 통하여 상호 관련되고 있다.이성과 신앙 제 15호 1998년 4월호, 佛敎의 救援觀(pp.41∼62), 수원카톨릭 대학 출판부. 일상적 자아라는 것은 일종의 오온(五蘊)) 인이다.윤사순, 동양사상과 한국사상, 을유문화사(1983) pp. 39∼40.이런 불교의 존재관에서 볼 때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가 없다. 生이라 해도 영원한 삶이 아니며 死라 하더라도 또한 영원한 死滅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輪廻轉生說이 나타난다.) 윤회전생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여러 종교나 사상에서 전래되어 오던 것을 수용한 것이다.배영기, 죽음학의 의미, 교문사(1992) p. 214.즉 중생은 지옥·아귀·축생·人·天·수라(蒐羅: 阿修羅의 준말)의 여섯 갈래로 나누는 바, 모든 중생은 이 여섯 갈래를 轉轉하면서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이 없다면 행위의 책임은 누가 짓게 되는 것인가? 결국 無我設에서 지속적인 자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책임성에 대한 근거가 불분명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미린다팡아' 경전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한 예를 들었다.◎ 촛불의 비유촛불은 지속적으로 빛을 주고 있으면서 그 불꽃이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존속하게 하는 무엇이 따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촛불이 탈 때 그 순간에 필요한 조건들에 의존하여 그 불꽃이 탈뿐이다. 불꽃이 지속성을 보이는 것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이어 지는 순간 순간에 인과적인 연결에 끊임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을 옮겨 붙일 때에도 어떤 영속적인 실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두 촛불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이 촛불의 비유는 영구적인 실체라고 하는 영혼이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아도 경험의 지속성과 단일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이처럼 불교에서의 삶의 연속이란 같은 영혼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그리고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생은 현재 생, 현재생은 미래생의 원인과 결과의 인과적 사슬로 묶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그의 행위에 책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영 속적인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존이 지속적인 흐름이기 緣起法(pratityasamutpada)은 불교의 핵심적 사상으로서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러므로 苦 역시 因果律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본다. 이러므로 苦 역시 因果律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본다. 그것을 붓다는 12가지로 보며 그것을 12가지 지분으로 곧 깨달음의 대상이 된다. 12지분은 1. 無明(진리에 대한 무지로서 實在性이 없는 자기를 實體로 착각하고 일시적인 형체에 집착하는 망상을 말한다.) 2. 行(무명으로 말미암아 識을 일으키게 하는 작용으로써 육체적인 행위인 身業과 口業 및 정신적인 행위인 意業을 말한다) 3. 名色(名은 정신적 작용, 色은 地水火風의 四大로 이루어진 육체적인 부분을 말한다. 태내에서 심신이 발육되고 있으나 아직 五官이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5. 六入(六處라고도 함 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 7. 受(접촉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필연적인 감수작용을 말한다.) 8. 愛(감각대상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이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탐하는 맹목적인 욕망을 가리킨다. 번뇌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본다. 無名이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라면 愛는 마음을더럽히는 번뇌라고 한다.) 9. 取(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놓칠세라 집착하는 아집을 말한다.) 10. 有(愛와 取로 말미암아 미래의 과보가 있게 되는 것. 생사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을 말하며,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11. 生(출생을 말한다. 業의 결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12. 老死(한번 태어나면 필연적 결과로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한다.) 12연기설은 인간의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를 극명하게 밝힌 것으로서,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죽음이 연기한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결국 無知는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연기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곧 불교적인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이성과 신앙 제 15호 1998년 4월호, 佛敎의 救援觀(pp.41∼62), 수 있어서 敎理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 Karel Werner, "The concept of The 'Transcendent': "Questions of Method in the History of Religions" Religion, 13 (1983), pp.311∼22. -를 폴 틸리히는 '존재자체'(esse ipsum)라는 創造主에 대한 사상인데 반해 佛敎은 니시다니 케이지의 絶對無(absolute nothingness)에서 나타나는 無槪念이다.절대무라는 것은 四聖言帝를 기반으로 하면서 '空觀'의 확립자인 龍樹의 사상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니시다니는 이것들 위에서 그의 '허무주의를 통한 허무주의의 超克'이라는 철학적 사고을 통해서 無(空)란 어떤 가정된 '實體'나 '원리'에 대한 동일화의 파괴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며 어떤 실체도 원리도 없으며, 이 世界의 모든 사물의 실재는 본질적인 假現으로서, 그것은 나타남 그 자체이지 , 나타나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 즉 指示對象物로서의 어떠한 실체도 갖는 것이 아니라 回互的相入의 관계를 통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假現으로서 '나타남'(appearance) 그 자체이지 '나타나는 그 무엇'(something that appears)이 아니다. 絶對無에 있어서 存在의 힘은 어떤 하나의 절대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각 스스로의 無自性으로 인하여 존재의 힘을 얻는다. 사물들은 본질적인 假現의 性格을 통하여 다른 사물들과 절대적인 상호관련을 맺는다.絶對無는 사물에 대한 意識(이성과 감성)은 사물의 관념(idea)과 물질성의 표상으로 나타나 사물의 主觀과 客觀이 대립되기 때문에 사물의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존재의 이유를 찾게되며, 이것은 인생를 無意味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虛無主義는 한편으로 虛無가 자각될 때 비로소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전환의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사물의 본질적 自覺을 할 수 있게 한다. 허무를 통해 사물의 실재 파악을 가능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