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궁궐, 경복궁을 다녀오다.*목차 : 1. 경복궁에 대하여2. 답사 내용3. 답사 후기1.경복궁에 대하여..조선시대에 왕들이 살았던 곳이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경복궁은 조선의 중심지였으며, 우리나라 역사 중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를 갖춘 조선이었던 만큼 조선시대의 국정을 도맡아 해왔던 장소라 할 수 있다. 경복궁이라는 궁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고 광하문, 근정전, 경희루,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아미산, 수정전, 향원정, 자경전 등의 건물들을 총칭하는 말이며,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입지가 선택되었고 이름이 지어졌다.태조 이성계 때부터 시작하여 거의 세종대왕 때에 완공이 된 웅장한 궁궐이었으며, 조선시대 중앙집권체계의 위용을 단편에 보여주는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단지 이것이 나의 ‘추정’으로 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현재 경복궁은 훼손이 너무 심해 제대로 된 그 크기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는 대부분이 일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은 전체적으로 불에 타버렸으며 고종 때 다시 중건하였다 하고, 그 이후에는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극심한 훼손을 겪어 1990년부터 2008년까지의 상당한 장기간의 5단계로 나누어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2. 답사내용경복궁으로 향하며답사를 가기 위해 친구 한 명을 어렵사리 설득해서 함께 경기도 수원 화성을 답사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만나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지나가는 ‘광화문’행 버스를 보고 순식간에 경복궁으로 목적지를 바꾸고 무작정 올라탔다. 수원 화성으로 가든 다른 곳을 가든 애초부터 나에겐 주어진 자유였으나 내 맘대로 목적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에 왠지 모를 ‘젊은 날의 자유’를 더욱 더 커다랗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경복궁은 그저 ‘조선시대 왕들이 살았으며 사극드라마에서도 나오는 곳’으로 생각하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잔뜩 갖고 우리는 출발했다.이제까지 버스를 타고 창 너머로 보이는 광화문을 라지고 친구와 나누는 잡담이 많아진다. “광화문 저 안에 들어가 보는 거 처음이다~!” “저기 지붕 보면 왠지 최근에 지은 거 같지 않냐?” “건물이 너무 요즘 지은 티가 나서 옛날 시대에광화문을 지나 홍례문으로..왔다는 느낌이 안드네...” 일제시대에 훼손을 당했고, 아직도 복원작업이 완공되지 않았음을 몰랐던 나는 광화문의 지붕이나 앞에 있는 해태는 세월의 풍파를 겪지 않는 것인가, 과연 조선시대의 역사를 저들은 주욱 지켜 봐 왔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지은 지 채 50년도 돼 보이지 않는 이 건축물들에서 나는 내가 느끼고 싶은 조선시대보다, 그냥 현대에 물들은 다른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을 느끼며 어색함이 흐르는 광화문을 들어섰다. 일제가 마음대로 우리의 문화를 부셨다는 생각과 복원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한 광화문의 모습에 씁쓸함이 느껴졌다..근정전을 들어서며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저 멀리 근정전이 보였을 때 받은 그 웅장한 느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같이 간 친구와 이구동성으로 “우와 이 안쪽에 이렇게 큰 건물이 있네?!”라는 감탄을 자아내었다. 처음엔 근정전이 경복궁의 처음이자 끝인 줄 알았다. ‘여기가 왕이 살았던 곳이구나’ 했건만.. 근정전은 왕이 살았던 곳이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 의식을 거행하고, 관료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경복궁의 정전이었다. 경복궁을 들어서면 누구나 근정전이 경복궁의 중심건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하다. 근정전의 이름은 “어진 이를 편안히 기용한다”는 의미에서 ‘근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는데... 왕의 즉위식, 세자책봉식, 나라의 큰 일을 결정할 때 주로 이용하던 공간이었다니, 이곳에서 세종대왕의 즉위식이 있었다고 상상을 하니 대단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에 실감이 나질 않는다.근정전은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897년(고종 4)에 중건하였다. 자연스럽게 처마의 곡선을 처리하고 지붕의 네모서리를 살짝 치켜 올려 곡선미를 살렸고, 처마아다. 정면 중앙에는 지붕모양의 닫집 아래에 임금이 앉는 용상(龍床)이 있다.용상의 뒤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소나무와 바다 등이 그려진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이 있다. (참고자료 : 동아백과사전)근정전으로 들어서면 일단 보통 수학여행 때 찾아갔던 사찰들과는 다르게 모래로 되어있는 바닥이 아니라 평평한 돌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위에 보이는 것이 바로 품계석. 품계석이란 正二品등의 한문이 새겨진 비석인데, 사람들은 품계석을 옆에 두고 마치 자신이 고위급 관료인 양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나 역시 正一品비석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그 시대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재현해 보았다. 품계석에 대한 한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품계석 주변에 있는 쇠고리의 쓸모에 대한 것이었다. 쇠고리는 '차일'을 치기 위해서 바닥에 달려있는 것이다. '가릴 차'에 '날 일', 즉 햇볕 가릴 용도로 치는 대형 텐트라고 보면 될 것인데, 새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등 왕실 행사 때 햇볕이 지나치게 강할 때 차일을 치는 것이다. 이런 것 마저 없으면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 예식 중에 잘못하면 왕이며 신하들이며 단체로 일사병에 걸릴 상황도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몇 시간이나 되는 행사를 움직임 없이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니, 관료도 그리 썩 편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그리고 그 웅장한 근정전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크게 지었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건물들 중에서는 2층으로 된 건물들이 흔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근정전이 2층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근정전에 심혈을 기울여 건축을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은 대게가 저마다 지붕에 조그만 ‘잡상’이라는 동물모양의 장식용 기와가 연달아 있는데, 지붕의 장엄과 위엄을 위한 것이며 건물을 수호하는 신성한 동물로도 여겨지는 것이었다. 용, 봉황, 천마, 기건만 갈수록 계속해서 보이는 건축물들을 보며 경복궁이 넓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내시와 궁녀들이 저 벽 뒤에서 행과 열을 맞추어 왕을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경복궁이 훼손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아쉬움이 마음한구석에서 메아리친다.사정전은 어전회의를 비롯한 최고통치자로서 공식 업무를 처리한 곳이라 한다. 왕에게 보고되는 온갖 업무를 판단하는 곳이며, 왕의 대부분의 공식적인 활동은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선시대에 왕들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였고, 당파를 나누어 신하들이 서로를 헐뜯어가기도 하면서 논쟁을 벌인 장소인가? 매우 흥미로운 마음으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는데, 생각보다 사정전의 내부는 좁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에서 봐 왔듯이 세로로 좀 더 긴 내부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내부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를 장식할 때에 좀 더 현실성을 반영하여 세심하게 꾸며놓았으면 좋았을 것을...그리고 사정전 앞에 놓여있는 양부일구를 보았다. 양부일구는 조선시대에 사용한 해시계로,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한 가마솥과 같은 반구형으로 되어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세종16년에 처음 만들었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사용하기 쉽게 글자 대신에 짐승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조선 초기에 민본주의 사상이 제대로 틀을 잡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만춘전과 임금이 생활하는 강녕전그 다음 우리는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보는 편전 중 동쪽의 편전인 만춘전으로 향했다.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성현들의 책을 읽고, 신하들과 연회를 열기도 한 곳이라는 만춘전은 사정전과는 사뭇 다르게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분위기이다. 사정전이 국정을 의논하는 ‘회의실’이었다면 만춘전은 연구소이기도 하고 사색의 장소이기도 하는 도서관 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춘(萬春)이라.. 연구와 독서를 통해 국위선양과 국가가 언제나 봄날처럼 평온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었을 듯..이라는 이름은 오복 중에 하나로서, 임금이 강녕(편안할 강, 편안할 녕)한다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두루 돌아갈 것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왕을 아비처럼,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려는 마음이 배어있는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의 왕들은 정말 이곳에서 이름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였을까...?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그 신성한 곳을 지금은 누구나 들어와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갈 수 있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그 시절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어쨋든 왕의 침소였던 강녕전의 내부가 무척 궁금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강녕전 내부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굳게 닫혀있다. 왕의 침실을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는 유교적 사상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창덕궁으로 옮겨져 내부가 텅 비어있는 까닭이었다. 강녕전의 외형상 특징이라면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과 더불어 용마루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많지만 왕과 왕비는 용으로 상징되는데, 왕과 왕비 가 머무는 침전에 용마루를 두면 용 두 마리가 충돌해 좋지 않다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한다. 중국의 건축양식중의 하나라고도 하는데, 내 생각에도 역시 전자의 경우가 더 공감이 간다. 굳게 닫혀 내부를 볼 수 없어 강녕전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우리는 흠경각으로 발길을 옮겼다.자연 속에 어울리는 인조물우리는 흠경각을 둘러보고 아미산에 도착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후면의 인공정원으로 경회루 창건 당시 연못건설을 위해 파낸 흙을 옮겨다 만들었다 한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산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몰랐다. 산이라니? 산 치고는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저걸 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꾸어서 아미산이 무척 높았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조형물들의 특징은 자연과 썩 잘 어울리는 것을 강조한다. 부드러운 곡선의 기와지붕만 보아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아미산은 그 높이나 형태에 있어서 주변자연경관에 거슬리지도 않고 썩 잘 어울리는 휴.
[해로], [유로]의 황로학적 성격과 그 사상사적 의미I. 한비자와 황로학1. 한비자와 노자한비자는 ‘법치’를 주장하였고 노자는 ‘무위정치’를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비자와 노자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노자, 장자 그리고 신불해와 한비자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것은 사마천이 이들 네 사람의 사상에서 어떤 공통점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들 네 사람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도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우선, 사마천은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적 본원을 모두 ‘황로’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대인들이 생각하는 ‘도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가’와 내용이 다른데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법가 유가 등 여러 사상들의 장점들을 종합하는 이른바 ‘황로학’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사마천은 노자와 장자 신불해와 한비자를 모두 ‘황로학’이라는 하나의 공통 범주로 묶고 있는 셈이다.2. 황로학의 역사적 흐름과 「해로」, 「유로」황로한은 정확한 발생시기와 그것이 진행된 기간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 사상적 특징과 성격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하였고 논란도 많다. 그것은 아마도 선진 제가의 여러 학파와는 달리 황로학은 그것이 형성된 시기나 그 창시자가 분명하지 않기에 그것을 대표하는 사상가나 문헌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가 힘들고, ‘황로학’의 범주를 저마다 조금씩 달리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전기 황로학’은 노자의 무위 사상 위에 법가 사상을 접목시킨 정치철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황로학의 흐름은 진제국과 서한 전게 6-70년간의 전성기를 거쳐, 멀리 동한 시대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우선 진대에서 서한 초기의 중기 황로학은 여전히 치국의 문제를 중하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이 전기 황로학과는 달리 법가 사상 외에 유가적 요소도 많이 수용하고 활용한다. 서한 중기 한무제가 동중서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른바 ‘독존유술’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전 시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황로학은 중앙무대에서 쓸쓸히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곧 황로학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치 무대에서 실패한 황로학은 이후 그것에 내재된 또 다른 요소인 ‘치신’ 문제를 전면으로 등장시켜 새롭게 발전해 간다. 이 시기의 황로학은 이른바 ‘후기 황로학’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후기 황로학은 치국의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주로 치신 혹은 양생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노자상이주」를 거쳐 도교 성립의 밑거름이 된다. 이상과 같은 황로학의 역사적 변천과 사상적 흐름에서 「해로」, 「유로」는 그것이 성립된 시기나 그것에 내재된 사상적 특성상 일단 전기 황록학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해로」, 「유로」는 현존하는 「노자」 주석서 중 가장 오래된 문헌이며 노학사에서도 독득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노자」를 텍스트로 삼아 그 내용에 대해 구체적 설명을 가한 것은「해로」, 「유로」가 처음이다. 본 논문에서는 황로학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도’, ‘무위’, ‘양생과 치국’ 3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해로」, 「유로」에 내재된 황로학적 특징을 규명해 내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며 이들 황로사상이 황로 사상사에서 지니는 주요 의미를 밝힐 것이다.II. 노자의 ‘도’에 대한 계승과 개조1. ‘추상’에서 ‘구체’로한비자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이다. 「해로」에서 “도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근거이다. 하늘은 도를 얻음으로 높아지고, 땅은 도를 얻음으로 만물을 갈무리하며, 북두칠성은 도를 얻음으로 그 위엄을 이루고, 해와 달은 도를 얻음으로 그 빛을 영원히 유지하며, ... 성인은 도를 얻어 문물제도의 문명을 이루었다.” 라고 말함으로써,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를 천지 만물의 본원으로 설정하고 있다. 「노자」에서 이러한 도의 본질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가령 백서본 「노자」에서 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니 ‘미’라고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니 ‘희’라고 해야 하며, 만지려 해도 만질 수 없으니 ‘이’라고 한다. ......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요 사물 없는 형상이라 하니, 그저 황홀하다고 한다. 좇으려 해도 그 뒤를 볼 수 없고, 맞으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다.” 즉 “도라는 것은 ,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도는 지극히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비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한다. 한비자는 이런 추상적인 도를 포착 가능한 대상으로 끌어내린다. 즉 당시의 「노자」에서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하고 지극히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도를, 언급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구체적 대상으로 파악한다. 도가 비록 추상적이고 오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도의 미묘한 작용을 통해서 어쨌든 그것을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도이지만, 그것은 구체적 사물 속에서 표현되는 기능과 작용을 통해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식 가능한 ‘도’는 한비자의 사상 체계에서 형명 법술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2. ‘리’ 개념의 도입「해로」에서는 ‘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독특하게 ‘리’ 개념을 끌어들인다. 한비자가 노자의 추상적인 도를 그것이 사물 속에 작용하는 기능과 효능을 통해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하고 파악 가능한 것으로 현상계내로 끌어내렸지만, 도는 일반 사람들에게 여전히 접근하기 힘들고 파악하기 힘든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에 한비자는 도의 하위 개념으로 ‘리’를 도입하고 있다. ‘리’를 살펴보면, 이미 형성된 사물의 성질과 법칙이라고 한다. 반면에 ‘도’는 사물의 이런 구체적인 성질과 법칙이 근거하는 총 법칙이 된다. 그러므로 “도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근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도’는 개별 사물의 모든 ‘리’가 모여 있는 것이고, ‘도’가 사물에 개별적으로 드러난 것이 ‘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와 ‘리’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 혹은 보편과 특수의 관계, 즉 보편법칙과 개별법칙의 관계로 볼 수 있다.그러면 한비자가 ‘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리’ 개념을 도입한 의도는 법 이론의 확립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리’는 사물을 개별적으로 구별하고 규정하는 것이며, 이렇게 개별적으로 구별해 놓으면 사물을 다루기 쉬워진다. 이런 원리는 그대로 정치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정하는 법체계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도’는 한비자의 의해 ‘법’으로 변신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는 「황로백서」의 사상을 바탕으로, 도와 법 사이에 다리 ‘리’개념을 집어넣음으로써 ‘법’의 성격을 보다 구체화하고 명료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비자는 ‘도’와 ‘리’의 비교를 통해, ‘법’의 존재 근거와 그 성격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III. ‘무위’ 개념의 현실 사회 적용‘무위’는 다 알다시피 노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범주다, 노자 사상에서 ‘무위’의 의미는, 도 즉 자연 법칙에 따르는 삶의 방식과 행위를 말한다.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한비자는 표면상 노자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불간섭주의 성향의 무위정치를 주장하는 노자와 달리, 한비자는 통치자가 신하나 백성의 삶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법치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한비자가 자신의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히려 노자의 무위사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자 무위사상의 기본 원리 즉 자연의 객관적 이치에 따른다는 부분을 수용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그것이 현실 사회와 정치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재구성한다.1. 제도의 활용네모나 원을 그리고자 할 때 ‘직각자와 곡자’에 따라서 그리면 모든 일의 공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만물에는 모두 각각의 ‘직각자와 곡자’가 있으니 의론을 해서 계책을 내 놓는 선비는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이런 ‘직각자와 곡자’에 맞추어 본다. 성인도 항상 만물의 ‘직각자와 곡자’에 따른 뿐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공이 없으며, 그의 주장은 반드시 천하를 뒤덮게 될 것이다.“사물을 개별적으로 구별하고 규정하는 수단이 제도라고 본다. 다시 말해, 앞서 논의한 ‘리’ 개념이 인간 사회에 실용적으로 적용된 것이 바로 ‘제도’인 것이다.이 예문에서 인용된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다.” 는 노자의 무위 사상을 드러내는 여러 표현들 중의 하나이다. 한비자는 노자의 “不敢爲天下先”을 개인의 주관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그리고 개인의 주관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는 구체적 방안으로 ‘직각자’와 ‘곡자’로 표현되는 제도장치의 확립을 제시하고 있다. ‘직각자’와 ‘곡자’에 근거해 일을 처리하면 그 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의론이나 계책을 내놓은 신하뿐만 아니라 통치자도, 이 ‘직각자’와 ‘곡자’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루어 지지 않는 일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공이 없으며.”, 나아가 천하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직각자’와 ‘곡자’는 국가의 통치 구도에서 보면 제도장치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법을 의미하게 된다.한편 한비자는 이런 법제도의 활용과 관련해, 백성이 법을 어기지 않으면 통치자도 백성에게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극적 법치주의를 주장하기도 안한다.2. ‘인’의 원리의 수용노자 철학체계에서 ‘무위’는, 비록 아무리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의 본질적인 소극성을 탈피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비자는 기존의 황로학에서 제시한 ‘인’의 원리를 활용하여 ‘무위’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궁극적으로는 ‘무위’ 개념 속에 ‘유의’까지 포함 시킨다.
노자와 유가 사이:1. 서론 : 유가와 도가 - 중국 철학사의 두 중심 축죽국 철학에서 도가와 유가는 중국 철학사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던 두 중심 축이었고, 불교가 전래되고 나서는 불교와 함께 중국 철학사의 균형을 이루던 다른 두 개의 중심 기둥이었다. 학자들은 두 사상을 “명제-명제”의 관계로 받아들이면서 차이를 부각시키게 되었다. 사마천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배타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주제는 1993년 중국 호북성 형문시의 곽점촌이라는 곳에서 다수의 죽간본이 발굴되고 나서 유가와 도가 사이의 관계를 대립적 도식이 아니라 둘 사이의 근접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새롭게 인식하려는 학계의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2. 문제의 출발 : 곽점본의 출현 그리고 유가와 도가 사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1993년 10월 중국 호북성 형문시 곽점촌의 일호초묘에서는 많은 죽간들이 출토되어 16편으로 정리되었다. 이 죽간들이 정리 해독된 후, 중국 문물출판사는 그것을 1998년에 「곽점초묘죽간」이란 제목을 붙여 출판하였는데, 그 책에 들어 있는 16편 가운데 도가저작으로 분류하는 「노자와」「태일생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유가 저작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묘 주인의 특수한 입장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하므로 경솔하게 단정하기가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제자 백가가 쟁명하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가류와 유가류의 저작만이 험께 발견됨으로서 유가와 도가가 다른 학파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친밀하거나 깊은 연관을 가지고 공존하였음을 알게 해준 것이 사실이며, 발굴된 자료의 구성 자체가 이런 문제의식을 촉발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학자들로 하여금 유가와 도가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도록 촉발시킨 가장 대표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기로 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왕필본 제 19장에 해달하는 부분이다.왕필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성인이라는 이상을 끊고 지혜로운 자의 형상을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훨씬 커진다. 인의의 관념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은 효성과 인자함을 회복하게 된다. 기교와 이로움을 끊어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즉 성인이나 지혜로운 자의 형상이 백성들에게 강요됨으로서 백성들의 이익이 오히려 손상되고, 인의를 주창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이 효성과 자애로움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며, 기교나 이익을 추구하는 심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도적이 들끓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곽점본에 관한 논문을 이미 발표한 학자들이 큰 범위에서 대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진고응에 의하면 “절성기지” 나 “절인기의”와 같은 표현법은 학파간의 대립이 격화된 전국 중기 이후에 나왔고 “절지기변” 이나 “절위기사”와 같은 표현법은 학파들의 대립이 격화되기 이전인 춘추시기나 전국시기 초엽에 해당되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 인, 의를 기준으로 하여 도가와 유가를 대립적으로 이해했던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점은 제 18장에 나오는 ”인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주장된다..통행본의 구절은 일반적으로 “대도가 망가져서 인의를 제창하게 되고, 지혜가 출현하여 큰 거짓이 있게 되며,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성이나 자애의 관념이 생겨나고, 국가가 혼란하여 충신이 있게 된다.” 로 해석한다. 즉 여기서 인의는 대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다시 말하면 대도가 파괴된 모습이다. 노자의 의도를 인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곽점 죽간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조루가 나타났다. 특히 진고응은 그의 논문에서 노자가 도덕만 긍정하고 인, 의, 예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예에 대해서는 노자가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의 실질적인 의미가 사라져서 형식적으로 악화되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라고 한다. “안자가 죽간본에 들어있는 것이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의 시선을 끌었음도 분명하다. 이 장을 통행본과 달리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면 ‘안’자는 의문사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진고응은 자신의 논문에서 ‘안’자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않지만 해석된 내용을 보면 ‘安’를 의문사로 해석한 김용옥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진고응도 그것을 의문사로 해석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죽간본의 이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그러므로 대도가 폐하여졌으니 어찌 인의가 작용할 수 있으리오? 이미 육친이 불화한데 어찌 효자를 운운할 수 있으리오? 이미 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바른 신하가 설자리가 있으리오?이런 관점을 기초로 하여 어떤 학자는 곽점 죽간본 「노자」와 통행본 사이에 문자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사상 상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므로 도가를 유가에 반대해서 나온 사상으로 볼 수 없고, 나아가 유가와 도가가 조화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조심스런 진단을 내린다. 죽간본 「노자」의 출토는 우리로 하여금 주대의 덕치 사상을 계승하는 노자의 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노학 윤리 사상을 새롭게 건립할 수 있도록 넓은 길을 열어 주었다.3. 새로운 인식에 대한 비판필자는“인의”라는 범주의 유무에만 착안하여, 그 점을 근거로 죽간본 「노자」는 유가를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너무 성급하거나 , 판본상의 차이를 과장 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관점을 논증해 나가야 할 것 같다.첫째 곽점 죽간본이 특정한 목적을 염두에 둔 초본임을 인정한다면, 통행본에는 있지만 죽간본에는 없는 장절들을 죽간본 「노자」가 원본으로 삼았던 판본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라고 쉽게 부정할 수 없다. 통행본의 제 5장, 제18장, 제 38장에서는 “인”과 “의”를 노자가 주장하는 최고의 범주인 도와 덕이 결핍되거나 손상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으로 낮게 보고 있다. 특히 제 38장에서의 “인의”의 위치를 표로 만들어서 보면 노자가 “덕->인->의->예”의 순서로 내려오는 층차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둘째 내가 여기서 직접 거론한 제 5장과 제 38장에 들어있는 구절들이 죽간본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오히려 문제가 간단하지만 제 18장은 죽간본에서도 나타나고 또 내가 논박하려는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그들의 해석 방식을 비판할 필요를 느낀다.4. 유가와 도가 : 춘추전국 시대의 학술 지평에서곽점에서 출토된 유가 계열의 죽간본을 살펴보아도 유가와 도가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일정한 만큼 유지되어 있다. 다만 죽간본을 통해서 우리는 그 전에 왜곡해서 본 유가와 노자 사이의 관계가 비로소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대상과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각자의 장기나 세계관에 따라 각자의 방식을 가지고 분열되었다.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한서」에서 제기한대로 “제자가 각각 다른 관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는 관점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앙의 권력이 무너지자 중앙에서 관리하던 관학이 모두 흩어졌는데, 이 때 각자가 맡고 있던 관직의 전문 지식을 배경으로 해서 각기 다른 학파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노자도 그렇고 공자도 그렇고, 묵자도 그렇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논의한 주제는 “도가 실현되는 세상” 즉 바람직한 사회였다. 그것을 그들은 “天下有道”라고 표현하였다. “세상에 도가 실현되어 있으면, 예악체계나 정벌의 결정권이 천자로부터 나오지만, 도가 실현되어 있지 않은 세상에서는 그것들이 제후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공자의 말이나, “도가 실현되어 있는 제대로 된 세계에서는 전쟁에 쓰이던 말로 농사나 짓지만, 세상에 도가 실현되어 있지 않으면 말들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게 된다.”는 노자의 말을 통해 그들이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다양한 논의 속에 처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4-1 공자와 유가공자는 그의 학생들이 자신의 학설을 번잡한 말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거나 일관된 체계가 없다고 이해할 것을 걱정하였는지, 자신의 철학은 하나의 관점에 의해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정직이라는 덕목도 아비 자식간에는 서로의 죄를 숨겨주려는 원초적인 정서가 보장된 다음에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공자는 분명히 말한다. 아버지를 신고하는 것이 인간이 타고났을 진실한 느낌이나 진정한 정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가 보기에 이런 기본적인 정서가 보장되지 않고는 사회의 건강한 질서란 존재할 수 없다. 유가에서는 그래서 “효”를 “인”의 근본은로 강조하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인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밑바탕의 정서로서 모든 덕목들의 기초이자 근거이며 잘 유지 발현 시켜야 할 목적이다. 공자를 필두로 한 선진의 유가 체계는 바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주고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 즉 “인”을 보장하고 발양시키는 목적에 충실하도록 짜여진 범주 체계이다. 우리는 죽간본에서 나타난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의 거리를 진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곽점 죽간본의 내용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데, 그 기본적인 정서인 “인”이 “친친”이라는 덕목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발현되므로 “친”이라는 덕목과 필연적인 내외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곽점 죽간본에서 발굴된 유가 경전인 「다우지도」와 공자나 맹자 등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문제는 공자를 비롯한 선진 유가에서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가장 기본적인 정서를 근본으로 하는 까닭에 유가의 철학 체계에서 중심축은 “인간”에 있지 “자연”이나 “천명”에 있지 않다. 그래서 “성”도 유가에서는 도덕적 지극함 즉 도덕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휘된 상태인 것이다. 노자가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바르게 될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백성을 인도하는 방향은 어디로 지목되었는가? 제 9단에서 그 점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예악을 내용으로 하는 덕이다. 이것이 바로 덕치이고, 덕치란 위정자의 신교 즉 위정자의 도덕력 회복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제 10단에서 논술 되었다. 이는 공자나 맹자의 구도와 일치한다.
노자와 황로사상I. 백서 「노자」와 「황로백서」, 그리고 황로학도가 사상사에서 우리는 이른바 ‘황로사상’이라는 하나의 특별한 사상적 흐름을 만나게 된다. ‘황로’는 물론 ‘황제’와 ‘노자’의 합성어이며, 따라서 ‘황로학’은 ‘황학’과 ‘노학’이 결합된 어떤 학문적 경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또는 사상사적으로 ‘노학’의 실체는 「노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만 ‘황학’의 실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욱이 한 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황로’라는 용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황로’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다. 신도 신불해 한비자는 지금까지 법가 사상가들로 알려져 왔다. 신도 신불해는 상앙과 더불어 선진 시대의 법가 이론을 구축하였고, 한비자는 이들의 법 세 술을 하나로 종합한 법가의 집대성자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들에게 ‘황로’라는 모자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황로학은 종종 단순히 법가 계통의 도가 즉 ‘도법가’와 같은 의미로 오해되기도 하였다.본 논문에서는 「황로백서」를 백서 「노자」와 비교하는 형식을 통해, 황로사상이 노자 사상에서 받은 영향과 그 차별성, 그리고 초기 황로학의 구체적 내용과 성격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문헌이 동일한 비단 폭에 나란히 쓰여져 있다는 사실에서 양자의 비교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현재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노자」 노자 판본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자사상’ 또는 ‘「노자」문장’을 인용할 때는 인용되는 「노자」 판본을 명시할 필요성을 느낀다.II. ‘道’ 개념의 변화1. ‘추상’에서 ‘구체’로노자사상의 핵심은 당연히 ‘도’에 있다. 그런데 죽간 「노자」와 백서 「노자」를 비교해 보면 ‘도’의 개념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죽간 「노자」에는 ‘도’자의 출현이 많이 않고, 또 그 의미도 ‘삶의 방식’이나 ‘다스림의 길’ 등 일상적인 삶과 관련된 의미가 많다. 그러나 백서 「노자」에 이르면 ‘도’의 개념의 형이상학화 추상화 작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백서 「노자」에는 “도가도야 비항도야” 구절이 새롭게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지극히 추상적인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2. ‘理’ 개념의 도입한편 「황로백서」에서 ‘도 개념의 변화’는 ‘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도’ 개념을 한층 더 분화시키고 구체화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 개념은 죽간 「노자」는 물론 백서 「노자」에도 아직 나오지 않고 전국 중기이후 「맹자」,「장자」등의 문헌에서부터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황로백서」는 ‘도’ 또는 ‘사물의 이치’를 설며하는 과정에서 종종 ‘이’개념을 사용한다. 이 때 사용되는 ‘이’는 언뜻 ‘도’와 별다른 구분 없이 상호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사물이 각각 도에 합치되는 것을 이라고 말한다. 이가 있으면 ‘따른다’고 말한다. 사물 중 도에 합치하지 않는 것을 ‘이를 잃는다’고 말한다. 이를 잃은 것을 ‘거스른다’고 말한다. ‘도’가 개별 사물에 적용될 때 이것을 ‘이’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도’속에 포함되는 개념 즉 ‘도’의 하위 개념이 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현대 용어로 정리하자면 ‘도’와 ‘이’는 각각 보편 법칙과 개별 법칙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도’와 ‘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후 「한비자」에 의해 계승되어 보다 구체적으로 발전된다. 즉 「한비자」「해로」편에서는 “도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근거이고, 세상의 모든 ‘이’가 모여 드는 곳이다. ‘이’는 개별 사물을 이루는 문이고 토는 모들사물의 성립근거이다.” 라고 말하면서 ‘도’와 ‘이’를 ‘전체’와 ‘부분’또는 ‘보편’ 과 ‘특수’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3. “도생법”백서 「노자」에서 ‘도’는 다른 한편으로 만물의 생성과 관련된다. 「황로백서」에서는 백서「노자」의 이러한 “도생일”을 “도생법”이라는 독특한 명제로 전환시키고 있다.도기 법을 낳았다. ‘법’이란 ‘먹줄’에 의해 바르게 하고 굽음과 곧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잡은 자는 법을 제정하되 그것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고, 일단 법이 세워지면 함부로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먹줄’에 의해 스스로를 바르게 할 수 있으면, 천하의 실정을 환하게 보게 되어 미혹되지 않는다.“도가 법을 낳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도’는 도가에서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 본원이자 실천 근거다. 따라서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제도 규범인 ‘법’이 ‘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의 근거를 ‘도’에 둠으로써 그것의 절대적인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법’을 중시하는 ‘법제일주의’는 사실상 법가의 기본적 노선과 통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법가와 구별되는 점을 하나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법의 권위를 통치자의 권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이와 같이 도와 법을 상호 밀접하게 연계시켜 보는 사유는 전국시대 법가류의 문헌들에서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한비자」에서는 대표적으로 “태도전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도에 말미암아 법을 온전히 하면, 군자는 즐겁고 큰 간사함은 멈춰진다.” 라고 말함으로써 법체계를 완비하기 위해서는 법의 근거를 도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법’의 근거를 ‘도’에서 찾는 사유는 전국 말에 널리 유행하였던 하나의 보편적 사조였음을 알 수 있다.노자 사상에서 ‘도’ 개념의 핵심적 내용은 물론 ‘무위’다. 그러므로 이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노자는 도에 의한 무위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자식의 무위 정치는 현실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당시의 ‘천하혼란’ 상황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천하통일을 지향해가는 전국 말의 상황에서 ‘허무염담’ 하고 ‘절성기지’하며 ‘소국과민’하는 소극적 자세로는 시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황로백서」는 기본적으로 노자사상을 계승하되 그것을 보다 현실성 있는 사상으로 만들기 위해 법가 사상을 끌어들여 도가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전국 말 한초에 유행한 황로학의 실질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III. 자연무위론에서 형명무위론으로1. ‘법천도’ 개념의 변화노자사상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무위’이며 이 ‘무위’는 주로 ‘성인’의 방식과 연계되어 언급된다. 따라서 「조자」에서 자주 언급되는 ‘무위’는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법도’에 대한 충고 내지는 국가 경영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인 지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노자 무위론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법자연’ 또는 ‘법천도’ 즉 자연 질서를 본받는데 있다. 「황로백서」역시 기본적으로 노자의 ‘도’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정치론 역시 외형적으로는 ‘법천도’를 지향한다. 「황로백서」의 저자는 우선 백성이 천지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 “법천도”에 이와 같은 ‘천앙’ 관념을 도입하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가? 여기서 우리는 「황로백서」가 형벌을 중시하는 법가 정신을 그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 할 필요가 있다. 「황로백서」역시 「노자」와 마찬가지로 ‘법천도’를 중시하고 무위정치를 지향하지만 그 무위정치의 실질적 내용은 「노자」와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형명무위정치론’으로 나타난다.2. 형명무위정치론「황로백서」에서는 우선 사물이 존재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형’과 ‘명’이 드러나게 된다고 본다. 즉 어떤 사태가 존재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것의 내용인 ‘형’과 그것의 형식인 ‘명’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황로백서」에서 형명론을 제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1. 사찰건축의 역사적 형성 배경인도의 초기 가람석가여래가 생존했을 당시에 가람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었다. 석가는 갠지스 강 유역의 인도 북동부 지방을 순유하면서 설법을 베풀었고, 석가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모이고 제자들이 머무르는 장소는 어디든지 사찰이 되었다. 인도 지역의 무더운 기후를 피하기 위해 설법 장소는 거대한 나무 밑이나 숲 속이거나 자연 암굴이기도 하였다.평소에는 이런 임시 장소도 무방했지만 비가 많이 오는 우기의 안거 때는 일시적으로 거주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부우한 가정집을 이용한 아바사와 대도시 주변의 한적한 숲에 건립된 아라마 정도가 비교적 고정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라마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제왕과 귀족들이 초기 승단에 땅과 건물을 기부함으로써 생긴 초기적 형태의 사찰이다. 유명한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대표적이며, 「근본설일절유부」에 전하는 의궤에 따르면, 문과 불전, 강당, 식당, 창고, 욕실, 안수당, 첨병당과 크고 작은 승방 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 시대였으므로 불상을 모신 금당은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소박한 형태의 예배시설로 석가의 전생 생활을 묘사한 설화들을 모은 본생담과 석가의 전생 생활을 묘사한 설화들을 모은 본생담과 석가의 일생을 넷 혹은 여덟 개의 대표적인 장면들로 묘사한 사상도나 팔상도를 모신 불전이 있었다.소수의 불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들은 모두 승단이 수행하고 생활하기 위한 공단들이었다. 안수당은 깨끗한 물을 얻어 취사하기 위한 곳으로 첨병당은 병든 승려들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소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사찰은 재가 신도들의 예배용 건물이라기보다 출가 승단이 거주하기 위한 수행처로 정착되었다. 석존의 가름침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해탈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고, 부처마저도 의타해서는 안되는 자성의 불교였지만, 이런 경지는 세속을 떠나 수행만을 전담하는 출가 승려들에게만, 그것도 높은 수준에 이른 고승들만 가능하였다. 일반 재가 신도들은 스스로의 수행을 위해서라도 믿는 선종과 교종이 일체화되어 천태종이나 조계종을 형성하며, 조선시대에는 아예 유불선 3교가 하나라는 삼교일체론까지 등장할 정도였다.이러한 통불교화 현상은 주선시대에 극치를 이루어, 종파 구별이 무의미 할 정도로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이 하나의 가람 안에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불교적 상황에서도 1불1국토설의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져야 했다. 한 분의 부처와 보살들은 각자의 국토를 의미하는 별도의 전각들에 따로 안치되어야만 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가람은 전체적인 규모는 작다 할지라도 그 안에 다양한 예불용 전각들을 보유해야 했다.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파되고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지는 긴 여정중에 불교는 각 지역 토속적인 신앙들을 습합하여 불교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중앙아시아의 전통적인 명왕신앙은 불교화하여 신중신앙으로 변화되었고 중국 도교의 태극성과 칠성신앙이 변환되어 칠성각이라는 가람내의 건물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토착적인 산신신앙은 결국 불교 가람의 산신각으로 불교화 되었다. 수많은 예불용 불전들이 존재해야 하는 신앙적 필연성 외에도 수백수천 승려들이 수도하고 생활하기 위한 수행용 건물들 그리고 재가 신도들이 이용할 시설등 불교사찰은 여러 동의 건물들이 공존하는 복합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이처럼 하나의 가람 안에 다양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면, 일정한 배열의 원칙과 질서를 가져야만 불국토라는 신성한 공간을 만들 수 있고, 승가의 수행처로서 안정적인 환경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불교건축은 여러 건물들을 어떻게 하나의 가람이라는 전체로 통합하고 있는가, 이를 위해 사용된 건축적 개념은 무엇인가가 중요하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사찰들에 내재되어 있는 건축적 원리와 배치의 질서는 불교적 교리의 영향, 지형적 원리의 분석과 수용, 그리고 개별적인 사찰의 개성등 다양한 갈래에서 형성되었다.3. 한국 불교건축의 전개 과정계율학 형식시대(4~7세기 전반)우리나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파된 4세기부터 6세기 강점기에 다시 한 번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도시의 몇몇 사찰에서 불전 중심의 구성을 탈피해 대규모 강당형식으로 전환된 점이 주목된다. 이 시기에 조선 불교 교단으로 정비된 원종과 그 후신인 조계종은 근본적으로 통불교의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해방 이후까지도 조선 후기의 통불교적 형식은 계속 구축되었다.도시형 사찰건축의 시대(1960년대 이후)현재 불교교단은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등 18개의 종파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의 종지는 각각 다르며 교리적 차이 외에도 비구-대처분쟁에 뿌리를 둔 정치적 분파 요인도 작용했다. 조선시대 이전에 조성된 전통 사찰 중 대부분은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고 나머지 종단들의 사찰은 해방 이유에 조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조계종은 고려조 지눌의 조계종과는 다르다. 현 조계종은 선교합일의 전통아래에서 오히려 조선조의 통불교적 맥을 잇고 있다. 건축형식 역시 전통적인 통불교 형식을 원형으로 삼고 있다.불교는 여전히 우리나라 제일의 교제를 가진 종교이고 산중을 벗어나 도시에도 많은 사찰과 포교당을 짓게 되었다. 현재 창건된 도시 사찰 가운데 건축적 성과라고 평가할 만한 것은 아주 드물다. 다만 신흥 불교인 원불교가 실력 있는 건축가에게 의뢰해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소수의 개성있는 건축가들이 불교건축 설계에 참여하여 새롭게 완성된 불교건축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도시 사찰들은 과거의 불전 중심 형식에서 벗어나 설법과 예배를 겸한 강당 중심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과밀한 도시적 상황을 고려해 과거 평면적 구성에서 벗어나 다층형의 수직적 구성으로 전환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변화에도 불고하고 아직 현대적 시대성과 도시적 장소성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 형태와 시대적 도시적 요구 사이에서 적합한 형식을 창조하지 못한 채 형식적 실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고대의 불교건축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4세기경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등 세워지는 형식적 변화도 시도되었다.1. 익산 미륵사터백제 무왕 부부의 설화가 얽혀있는 미륵사터는 익산 용화산 아래 동서 260m, 남북 640m 약 5만여평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미륵사가 자리한 익산 금마 지역은 무왕의 출신 성장지이자. 일대에 왕궁리 절터와 제석사터, 오금산성등 국가적 역량을 쏟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무왕이 자신의 근거지인 이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설이 있고 최소한 익산 지역이 백제의 또 다른 예비 수도였다는 별도설도 제기되고 있다.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용화삼회설에 따른 가람배치를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사항은 발굴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미륵사가 창건되던 7세기 초는 삼국의 영토 경쟁이 최고조에 달한 초긴장기였다. 각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력 신장에 힘을 쏟는 한편, 불교의 힘을 이용하여 대내적 국론 통일을 꾀하였다. 바로 이러한 국가적 경쟁에서 나타난 산물이 각국에 조영된 대규모 국찰들이다. 시기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고구려의 금강사나 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 창건은 불교 진흥책 뿐 아니라 대내외적으로도 정치적 목적이 내제된 사건들이었다. 이들 사찰은 공통적으로 넓은 대지 위에 대규모 전각들을 화려하게 조성하였고, 중심에는 매우 높은 초고층 목탑들을 건립하였다.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 1금당형식의 가람 세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과 서원보다는 가운데 중원의 면적과 금제의 장인 아버지와 신라 재상 용춘이 200명의 소장들을 지휘하여 완공하였다. 높이 225cur으로 내부의 각 층은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9개층은 선덕여왕에게 조공을 바칠 아홉나라 - 왜.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 를 뜻한다고 한다. 이 목탑을 완공함으로써 신라는 국론을 통일하여 일사 분란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고 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니 애초의 건립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872년 중건할 때 안치한 [찰주본기]와 사리, 소형 탑 99기를 발굴조사 중 발견하였는데 이는 황룡사탑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합천 영암사터바위 골격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황매산 아래 넓게 펼쳐진 터에 아직 발굴조사가 끝나지 않은 폐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합천 영암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부분적인 기록과 현존하는 석조유구들의 솜씨로 미루어 대략 신라 후기인 8세기경에 조성되지 않을까 추정한다.현재 드러난 유구로만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높은 축대를 쌓아 조성한 3단의 대지를 동서축상에 일렬로 배열하였다. 석축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장대석 사이사이에 긴 팔뚝을 결구하여 석축의 구조를 보강하였다. 일명 돌못이라고도 부르는 이 부재는 머리 부분에 장대석들을 걸고 긴 몸통을 흙 속에 묻음으로써 장대석들이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는 구조재로 경주 석굴암이나 월정교터 축대 등에서 발견할 수있는 신라시대의 기범이다.가장 아랫단의 구성은 명확지 않지만 회랑을 두른 큰 영역임은 확인할 수 있다. 중간단은 중문이 있던 곳으로 축대 위에 3면으로 회랑을 둘러 폐쇄된 영역을 이루었고 마당 가운데에 석탑을 세웠다. 가장 윗 단은 금당이 있는 곳으로 전면 중앙의 석축이 돌출되어 있고 돌출부 중앙에 쌍사자석이 세워졌다. 돌출 석축 좌우에는 활처럼 유연하게 휘어진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한 쌍의 돌계단은 각기 통돌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모양의 계단이나 중심 돌출부 석축의 모습은 매우 희귀하다.금당은 전면 5칸의 크기이지만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