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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한국사 왕권과 신권 평가C아쉬워요
    .왕권과 신권.1)조선초기 정치체제의 정비고려말 공민왕대에 이르게 되면 명이 건국되어 원의 수도인 연경을 함락하는 등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크게 변모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도 친원 친명파간의 갈등이 나타나게 되는데, 애초 고려조정에 우호적이었던 명이 공민왕의 시해 이후 고려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고려의 반발을 사게 되고, 마침내 철령위 문제를 기화로 하여 고려는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최영이 유배되었으며, 이성계 일파는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공양왕이 즉위한다. 애초 1367년(공민왕 16)의 성균관 중영(中營)을 계기로 이색을 중심으로 결집된 신흥사대부들은 창왕 옹립 때부터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정몽주가 이성계일파의 독주에 반발하여 구세력에 가까워지자 이방원이 주축이 되어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이성계와 급진개혁파의 역성혁명이 성공하였다. 이후 조선의 정치와 관학은 급진개혁파 계열이 주도하게 되고, 온건개혁파 계열은 낙향하여 훗날 사림파와 학맹을 혈성시켰다.조선의 기본적통치체제는 태종대에 기초가 놓여지고 세종대의 보완과 세조대의 재정비를 거쳐 성종대에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일단락 되었다. 조선초기 중앙정치의 기본기구는 의정부-육조-속아문체제로 짜여져 있었다. 의정부는 최고위직의 회의기관으로, 백관과 서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육조는 국왕과 의정부의 명령을 분담하여 집행하는 기관이었으며 그 아래 사(司)를 두어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속아문은 실질적으로는 독립아문이나 그 역할에 따라 육조에 각각 나누어 소속되어 있었다.의정부와 육조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즉 의정부서사제가 시행될 때에는 의정부가 육조의 보고를 받고 국정전반을 총괄한 반면, 육조직계제가 시행될 때에는 육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보고하여 왕의 하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였다. 육조직계제는 왕권이 강할 때에 나타났으나 [경국대전]단계에 이르러 의정부서사제로 정착되었는데, 이 두 가지 운영방식은 조선초기 왕권과 신권의 상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정치운영의 주요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승정원이 있었는데 육조에서 올라오는 각종 사안은 왕에게 올리고 왕명을 하급기관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국왕과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언론기구로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언관권 이외에 서경권이 있었다. 문예기구로서는 교서관, 예문관, 승문원,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이 있었다.지방 행정제도를 보면 전국을 팔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 부 목 군 현을 두어 각각 관찰사(감사) 부사 목사 군수 현령으로 하여금 행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고 이하 수령들의 임기는 5년이었다.그리고 고려시기까지 존속하던 차별적 행정구역인 향 소 부곡은 모두 없어졌다.2)조선중기 붕당정치의 성립과 전개사림은 선비 혹은 독서인층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종대를 시발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김종직을 중심으로 사림파라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사림파 가문은 재지세력으로서 주로 여말선초에 군현의 이족(吏族)에서 사족으로 성장하였고, 중소지주로서의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유향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이들은 [소학]을 매우 중시하면서 성리학의 정주학계열의 학문내용을 정통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학맥적으로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온건개혁파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며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 계통과 닿아 있었다.이들이 제기한 주장들은 크게 보아 정주학적 가치관과 정치 사회체제론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도학정치의 구현과 [소학]실천운동 향약 유향소복립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것들은 양반 중심의 향촌공동체의 자치적 측면을 강화하고 전제왕권과 권신의 발호를 억제하여 위로는 군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천리로 이해한 도덕률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이러한 사림파의 학문적 정치적 경향은 정치현실 속에서 이전의 관행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훈구파의 부정을 탄핵하면서 기성의 집권세력인 훈구파와의 충돌을 야기하였다. 이리하여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사화의 발생은 그 구체적인 계기는 각각 다르지만,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보다 거시적인 정치관의 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즉 양반지주가 중심이 되고 성리학적 교의를 잘 반영하는 새로운 정치체제 즉 붕당정치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다.그러나 사림파의 모집단인 재지사족이 경제적으로 지주-전호제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향약과 유향소 서원 등을 통하여 그 영향력을 계속 증대시켜 나가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정치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대세였다.그리하여 마침내 선조대에 이르게 되면 사림이 정권을 주도하게 된다. 이 때의 정치는 이념적으로는 도학정치, 정치적 모집단을 두고 말하면 사림정치, 정치집단의 양태를 두고 말하면 붕당정치, 정치적 충원과 의사결정이란 측면에서는 공론정치라 규정할 수 있다.붕당이란 본래 동류(同類) 동지(同志)의 뜻인 붕(朋)과, 이해관계로 모인 소인의 집단을 뜻하는 당(黨)이란 상반된 뜻을 지닌 두 글자의 합성어이다.최초의 붕당은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에서 나타났다. 이후 동인은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모반사건(기축옥사)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을 받은 2년 후 서인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한 사건으로 서인이 축출되면서 그 처벌의 강온을 두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었다.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게 되고,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되었다. 반면 서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하자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하게 되었다.이처럼 선조대 이후의 정국은 각 붕단간의 대립을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효종이 청에게 당한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북벌운동을 전개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저명한 인사들을 대거 산림으로 초빙함으로써 붕당간의 대립은 더욱 학문적인 배경하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양상이 잘 드러난 것이 예송(禮訟)이다.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점차 새로운 정치구조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조선중기의 붕당정치는 사림의 정치참여를 보장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정치운영 원리와 권력구조를 구조화하였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성종대의 언관권의 강화와 중종대 낭관권의 강화이다.한편 언론을 통한 견제활동에 한계를 절감한 사림들은 점차 각 부서 내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증대하려 노력하였다. 이 결과 의사결정에서의 낭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하고 고위직인 재상들을 견제할 수 있는 낭관권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낭관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랑권이다. 이조의 낭관인 전랑들은 당하관청요직에 대한 인사권과 자천권, 요직 진출권, 학행이 있는 선비 특히 성균관 학생을 천거하는 낭천권 등을 가지고 있어서 명실상부한 참하직 최고의 청요직이었으며, 현실적으로 삼사의 언론활동까지도 좌우하는 재하 공론의 주도자였다.붕당정치기에 확립된 또 다른 변화는 천거제의 확산에 따른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이다. 향촌에서 천거를 받은 사람들은 주로 산림이라고 불려졌는데, 이후 점차 이들이 부임하는 관직의 격이 높아졌다.다음으로 이 시기 정치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공론정치의 활성화와 이에 따른 정치 참여층의 확대를 들 수 있다. 당시의 관념에서는 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천심을 가지고 통치해야 하는데, 현실에서의 천심은 곧 인심인 공론을 통해 발현된다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공론정치의 원리 하에 언론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실제 공론을 형성하거나 공론형성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아울러 재야사림들도 점차 공론형성층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스스로 향론을 모아 연명상소를 통해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공론의 주체는 어디가지나 관료와 재지사족이어서 일반민들의 의사까지 적극적으로 포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었다.3)탕평정치와 왕정체제의 강화견제와 균형을 원리로 하면서 나름으로 세련되고 안정적인 정치운영을 보였던 붕당정치도 숙종대에 이르게 되면 대규모의 살상을 동원하는 붕당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변질되어 붕당정치의 고유한 정치틀이 붕괴되어 나갔다.즉위 전에 신하들의 싸움으로 임금이 결정되던 상황을 목도한 영조는 더 이상 정계의 혁신적 변화를 기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유지될 수 없겠다는 위기감 속에서 무신란이 진압되자 기유대처분을 통하여 탕평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탕평이라는 말은 임금의 정치가 최상의 이상적 상태에 도달했음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탕평추구에는 이전 시기와는 다른 정치적 목표와 방법이 깔려 있었다.
    인문/어학| 2001.12.02| 5페이지| 1,000원| 조회(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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