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지난 세기동안 도시의 팽창과 도시로의 집중은 많은 문제점을 낳아왔고, 그것이 문제를 넘어서 '생존의 위기'로 까지 인식되면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테제로 생태도시의 가능성들이 모색되어 왔습니다최근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리우 환경회의의 결정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환경을 도외시한 채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했던 종래의 도시 개발방식을 계속해선 안된다는 반성이 싹트고 있습니다.지난 96년 1월 18일, '생태도시조성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이 환경부의 주최로 열렸으며 이 심포지움에서 환경부가 입안한 생태도시 조성 국가기본계획의 세부추진 방안을 발표했습니다.환경부는 1단계로 내년부터 오는 2000년까지 5~6개 도시에 대한 생태도시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효과가 좋을 경우 2단계로 2011년까지 10개 정도의 도시를 추가하며 3단계로 전국 도시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합니다.이번에는 졸속으로 이루어진 성급한 계획안이 아닌, 진정 내실있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2. 인간과 생물 함께 하는 도시를사람을 생물종으로 치면 `도시생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세기 초 세계인구의 14%만이 도시에 살았지만 다음 세기에는 대부분이 도시에 살 전망이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66년 1백명 당 36명이었던 도시인구가 90년엔 그 2배 이상인 74명으로 뛰어올랐다.유례를 찾기 힘든 도시 팽창과 고도성장 속에 우리 나라의 도시들은 예외 없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그리고 고층아파트와 빌딩으로 가득 채워졌다. 도시는 푸른 녹음, 은빛 강변을 삼켜 회색빛 사막을 토해냈다.콘크리트가 축적했다 내뿜는 열은 서울 등 대도시를 주변의 농촌보다 3℃가량 높은 `열섬'으로 바꿔놓았다. 지난 88년 7월 12일 시드니시 중심가에서는 에어컨·유리건물·자동차가 인공적으로 내뿜은 열이 태양열의 50%나 됐다.그나마 콘크리트화된 도시도 온통 자동차로 뒤덮여 사람은 설 땅마저 찾기 어렵게 됐다. 차가 온종일 쏟아내는 굉음은 가정의 평화를 깨고 불면증과 고혈압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미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간 선진국의 도시들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논의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단계이다.유럽에서는 스트라스부르에 이어 암스테르담이 지난 92년 3월 주민투표를 실시해 도심의 차량진입을 금지시키기로 결의하고 도심을 녹지와 보행공간으로 개조하고 있다. 일본 중공업의 상징인 가와사키시는 2000년까지 전체 시 면적의 30%를 녹지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바르셀로나시는 1년에 공원 1개씩 만들기 프로그램를 진행하고 했다. 독일의 도시들은 자연을 질식시켰던 강변의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수초와 생물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강변 생태계를 복원하고 있다.런던시는 도심 6곳에 생물 서식처를 제공하기 위한 생태공원을 만들어 반경 32㎞의 도시 안에 3백14종의 척추동물들이 살고 있다.파리시 10구 시민들은 시라크 시장이 군대병원이 철수한 공터에 상가를 만들려고 하자 담을 헐고 들어가 나무를 심고 `빌맹공원'을 만들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녹색당 소속의 파리시의원 장 프랑소아 블레 교수는“중요한 것은 도시에 얼마나 큰 공원이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가까운 곳에 공원과 숲이 있느냐이다”라고 말한다.도심녹지는 휴식터 제공 외에도 아황산가스 등 대기오염물질을 흡수·확산시키고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 역할을 하며 열섬효과 및 소음을 크게 완화시켜 준다. 서울시립대 이경재 교수(환경생태학)는“도심의 녹지는 뜨거운 복사열과 고농도의 대기오염물질로 찌든 도심에 마치 오아시스처럼 찬 공기를 공급함으로써 기류를 통한 오염물질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다”며“그러나 서울 등 우리 나라 대도시는 녹지가 대부분 10시 외곽에 분포하고 있어 환경개선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사람과 야생 동·식물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도시가 이제 꿈이 아닙니다. 선진 각국에서는 요즘 도시의 구조와 기능을 생태적 원칙에 맞게 개조하는 이른바 `생태도시' 만들기가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서울대 조경학과 김귀곤 교수(사진·도시환경학)는 자연생태계를 지탱하는 원칙인 다양성·안 이 도시에는 각종 개발 모델이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의 시행착오는 전국 다른 도시의 개발에 교훈이 되고 있기도 하다.`실험도시'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마는 개발초기인 60년대 중반 도쿄의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한 `베드타운'으로 사업이 시작됐다. 분당이나 일산, 평촌 등 새도시가 그랬듯이 이 도시 역시 자연녹지의 훼손이 불가피했다. 많은 주택을 짓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고, 가장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주택이 들어서면서 녹지훼손과 더불어 주변 환경이 나빠지자 입주하는 사람들이 없어 미분양사태가 빚어졌다. 도쿄도 총무국 지역진흥과의 안토 다마 진흥계장은 “초기의 무계획적인 개발로 인한 자연훼손으로 아무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서“사업이 점차 진행되면서 녹지보호정책으로 전환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토 계장은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 완전히 도시화된 곳 등 지역특성에 맞게 매스터플랜을 작성하고 있다”면서 “아직 개발이 안된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다마시의 녹지계획은 옛날부터 있었던 숲을 보전하고, 잃어버린 숲을 회생시키고, 새로운 숲을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도쿄도 다마시 정비본부의 다니아이(47)는 “초기개발 때에는 집을 짓기 위해 구릉을 깎아내고,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 녹지를 훼손하는 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지은 주택은 낡아가지만 한번 조성한 녹지는 더욱 무성해지면서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녹지의 보존과 육성을 기본으로 한 개발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최근에 조성된 주택단지 사이에는 구릉형태의 근린공원이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띈다. 이 구릉지에 조성된 공원에선 별다른 놀이시설이 발견되지 않지만 잘 가꿔진 잔디와 원래 있던 돌이나 바위를 이용한 간단한 자연조형물들이 친숙하게 이곳저곳에 배치돼 있다.자연상태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이 기본전제이지만기 좋은 새도시로 변모했다.이런 주거환경의 변화로 최근 이 도시에는 주요한 기업체가 잇따라 들어서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애초의 `베드타운'에서 벗어나 `자족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일본 구레인구 21만명의 중소도시인 구레시는 정부가 도시경관형성 모델사업으로 선정해 정비한 대표적인 곳이다.일본 혼슈의 남쪽 히로시마 서남부에 위치한 해안도시인 구레시는 전쟁전엔 공장 창고나 군사항구로 번영했으며, 전후에는 조선·철강 등 중공업 중심 공업도시로 성장해왔다.“우리 도시에서는 활력 있는 마을 만들기, 안전하고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여유와 윤기 있는 마을 만들기를 기본방침으로 도시경관사업을 펴왔습니다.”구레시가 말하는 훌륭한 도시경관이란 보기에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본래의 기능을 충분히 채운 상태에서, 문화·역사·자연 등 그 지역의 특성과 조화하는 것이라고 구레시 공무원들은 강조했다.이런 목표아래 구레시가 가장 중점을 두고 만든 거리가 바로 시청 앞에서 해안가까지 쭉 뻗어나가면서 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구라모도통이라는 곳이다.이 거리공원은 지난 83년부터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돼 5년만인 88년에 완공됐다.재단법인 도시계획협회에서 정기적으로 펴내는 라는 잡지는 매력 있는 마을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로서 구레시를 이렇게 소개했다.“구라모도통은 중앙지구의 정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1㎞의 도시계획가로이다. 보·차도의 폭은 60m이며, 6차선의 차도를 축으로 이곳에 양쪽으로 가늘고 긴 공원이 꾸며져 있었지만 교통량 조사나 장래의 교통체계를 예측한 결과 차도쪽을 4차선으로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여기서 생기는 2차선의 여유공간을 종래의 공원과 일체화해 넓은 보행자 거리로 만들어 이곳을 구레의 얼굴, 도시 축으로서 도시경관형성 모델사업에 의해 정비한 것이다”차선축소를 통한 사업으로 공원의 너비는 평균 16m에서 배가 넘는 33m로 늘어났다. 또 곳곳에 늘어서 있는 전봇대를 모두 땅속에 묻음으로써 도시미관을 보기 좋게 했고, 개방감을 느끼도록 했다. 전봇대사와 자연, 구레시의 자취 등을 한데 어울리도록 했다고 강조했다.4. 미국 헌팅턴비치 볼사치카 습지 복원늘어선 탐방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펠리컨이 첨벙거리며 자맥질을 하는 습지 가장자리에서, 도요새들이 바쁘게 뻘속의 먹이를 쪼아대고 있다.그러나 시야를 조금 멀리 돌리면 습지대에 점점이 들어선 원유채취기와 고속도로, 그리고 주택가가 둘러서 있어 이곳이 한적한 교외가 아닌 도심을 금세 알 수 있다.로스앤젤레스 남쪽 헌팅턴비치 시내에서 3㎞ 가량 태평양 해안쪽으로 가면 미국에서 `습지생태계 복원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볼사치카 습지대가 펼쳐진다. 여의도의 약 11배인 4백45만여㎡에 이르는 이 습지가 한때 미국 7위의 원유생산지였고 아직도 기름을 퍼내고 있는 유전지대라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땅은 한 부동산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사유지이다. 쓸모 없어 보이는 바닷가 습지대의 개인땅이 지역사회의 관광산업을 꽃피우는 생태계 보고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한 민간 환경단체의 20년 가까운 끈질긴 노력과 지주·지방정부·연방정부가 함께 벌여온 협상과 타협 덕분이었다.인디언들이 약 8천년 전부터 살았던 이 해안습지에는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날아오른 새들이 해를 가릴 정도로 새가 많은 곳이었다고 알려진다. 강어귀에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풍부한 습지생태계가 지금보다 15배 넓이로 펼쳐져 있었다.자연습지의 본격적인 훼손은 1895년 부유한 사냥꾼들의 모임이 민물오리를 사냥하기 위해 이곳에 댐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바닷물의 소통이 막히면서 습지의 생태계는 크게 바뀌었다.1920년대에 들어 습지에서 기름이 발견되면서 최고 4백개의 원유채취기가 들어섰다. 습지는 도로와 파이프라인, 물웅덩이, 탱크 등으로 조각나고 황량한 잡초밭이 되어갔다.197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레이건은 땅주인인 시그널 랜드마크사와 토지소유권 분쟁을 타결 짓고, 현재 볼사치카 주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된 1백20만㎡를 국가 소유로 하는 대신 시그널사에 이보다 4배 넓은 습지와 1.3배 넓이의 고지
20세기 미술운동구성주의는 한가지 또는 여러 종류의 금속, 유리, 나무, 플라스틱 등의 재료와 함께 사용하고 양감보다는 공간이 중시되는 조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조각을 제작하는 기법은 양감을 덧붙여 주거나 깍아 내는 데에 초점을 두어 왔다. 구성주의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시도했던 입체주의의 실험적 작품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들은 회화와 콜라주에 등장하는 각진 형태들을 3차원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여 타틀린은 이러한 작품을 보고 러시아로 돌아간 후 조각사상 최초로 완전한 추상 작품의 하나로 인정되는 구성적 부조를 제작하였다20세기의 초반에 나타난 미술에서의 구성주의란 결국 러시아 구성주의와 동의어가 된다 . 과학의 합리성에 경의를 표현 이러한 작품들을 기계 시대에 테크놀로지를 수용하려는 모더니즘의 열성적인 태도가 가장 확연히 드러난 경우다구성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에 끼친 영향을 지대하다 특히 구성주의는 기법 면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주로 용접을 이용해 여러 다른 재료를 결합하는 기법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조각의 제작 방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의 보다 뜻깊은 공헌으로는 미술을 테크놀로지와 과학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거름이 되어 준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구성주의 합리적인 접근 방식은 키네틱 조각, 미니멀리즘, 미술과 테크놀로지 뿐 아니라 하드에서 페인팅과 기하학정 추상에서까지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타틀린 :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작각로서 '실제 공간에서 사물이라는 반구성의 개념을 제시했었다. 실제 사물과 주의 환경이 분리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술과 생활이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가보와 페브스너의 사실주의 선언 (1920)에 대항하여 작성된 그의 생산주의 그룹경영에서는 구성주의를 사회 및 산업 발전과정과 관계되는 기술과 이 기술을 통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미술의 실용적 측면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17년부터 4년간 예술문화연구소에서 물질에서 물질문화부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나무, 금속, 도자기 기법을 가르쳤으며 작업복 디자인, 무대 디자인과 같은 실용 미술은 물론 글라이더 등도 시험했었다▶ 로드쳉코 : 그는 새로운 예술대상으로 'proun'(예술에서 사용할 기본 단위) 이라는 신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1920년 때에는 베를린에서 구성주의 예술지를 편집, 유럽을 순회하면서 러시아 미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마야코프스키화 함께 구성주의 잡지를 디자인하는 등 실용미술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구성은 마야코프스키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뿌리를 둔 기하학적인 것이었다. 그가 지녔던 사상과 공업재료에 대한 생각은 "강철보다 프롤레타이아의 의지와 같이 강하고 유리는 프로레타리아의 의식과 같이 투명하다" 라는 말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가보 : 페브스너와 형제인 그는 공간과 시간의 형태에 닿여 깊이 연구 1920년대에 최초로 동력을 이용하여 금속막대를 회전시키는 (키네틱 구성)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키네틱 미술의 효시로 꼽히고 있는데 동생 페브스너와 같이 예술의 비정치성을 강조하는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철판 판유리 등을 재단하여 형상적 구성을 했던 그의 작품은 서구 현대 미술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개념미술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에 부상한 새로운 예술가들은 미니멀리즘을 현대의 형식주의적 원칙의 궁극적이며 논리적인 결과일 뿐 아니라, 지금은 신뢰도가 떨어졌지만 한때는 영광스러웠던 전통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간주했다. 워트게이트 사건, 인플레이션, 실업, 불경기 등으로 물든 세상에서 형식의 순수성은 이제 더 이상 최고의 권위를 유지할 수없었다. 거대한 규모의 추상작품들이 영웅적이고 숭고한 것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오히려삶으로부터의 신경질적인 도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탈미니멀 혹은포스트 모든 이라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반미니 멀리스트들은 정보와 은유, 상징, 그리고 의미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대상을 추구하면서 이제 미술에서 미니멀아트식으로 대상을 만드는 것을 일체 중단해 버렸다. 이것이 개념주의의 시작이다. 개념 주의는 미술가들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머리에 떠올린 후 그것을 물질적, 대상적 형태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학이나 기록물 그리고 계획안으로 표현할 때 작품이 완성된다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개념미술과 더불어 과정미술이 등장하였다. 과정미술은 미니멀아트의 형태들을 대기 조건이나 중력과 같은 자연의 부식력에 복속시킴으로써 그 형태들을 훼손시켜 갔다.(늘어놓기 작업, 대지작업) 일군의 작가들이 눈을 밖으로 돌려 무한한자연으로 향하고 있는 반면, 다른 작가들은 내부로 눈을 돌려 자신의 신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왜나하면 보다 친숙한 규모인 신체는 환경에서 작업하는 절하에 필적할 만한 형식적 절차를 위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몸을 미술로 만드는 작업이 퍼포먼스 미술이다. 또다른 형태의 탈미니멀작업은 사진사실주의라든가 신표현주의와 신초현실주의, 그리고 신추상등으로 나타났다."누군가 이것이 미술이다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미술"이라는 결정을 내린 개념주의는 곧퍼포먼스 미술에서부터 과정미술과 대지미술에 까지 이르는 포스트 미니멀과 '탈작업실'또는 '탈대상' 작품들과 같은 폭넓고도 자유분방한 다양성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은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유일하면서도 영구적이고 운반할 수 있는 훌륭한 상품으로서의 미술 대상 이외의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 표현한다는 점과 관념을 유례없이 강조하는 점으로 묶을 수 있다. '관념적인 개념주의 작품'은 그것을 기술하는 가운데 체험할수 있으며, 또한 무한히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아우라'와 유일 무 이성을 제거할 수 있었다.개념미술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의미가 있다. (1)'미술'이라는 개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에 대한 검토이고, (2)'개념'자체를 미술로 보는 것이다. 즉 구체적 표현에서 독립된 지적인 패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형태의 구체화에 대한 관심이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된 것이다. 종이 조각에 써 놓은 기술이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산출된작품처럼, 그리고 전통적으로 제작된 작품과 똑같은 역할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미술대상의 비 물질화였고, 관념이 전통적인 미적 대상보다 우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1970년 '정보'전을 주관했던 조셉 코수드는 "모든 미술은 본질적으로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미술을 오직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했다. 더우기 1963년어드워드 키엔홀츠가 '개념미술'이란 용어를 만들어 냈고, 그 후 미니멀리즘 조각가인 솔르윗은 자신의 격자형과 큐브로 된 작품들을 개념 주의 적인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개념미술에 있어서 관념과 개념은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모든 계획과 결정이 먼저 내려 지며 제작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일이다. 관념은 미술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된다"고 하였다.조셉 코수드(Joseph Kosuth, 1945- )는 시각적인 장벽을 허물고 미술을 대상을 넘어선 영역, 즉 그 자체 미술의 총제이자 본질임과 동시에 또한 미술의 총체와 본질로 이용되는언어와 지식, 과학, 그리고 세속적인 자료의 영역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목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이다. 이작품은 실제의 의자 하나와 그것을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의자'에 대한 사전적정의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어우러지면서 실재에서 관념으로 이르는 진행과정을보여주고 있는데, 그 결과 '의자성'의 모든 본질적인 가능성을 달성하고 있다. 그 의미에는 대상과 관련하여 시각적인 지각과 정신적인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일단 작품의 본질과 미술가의 관심이 설정되면, 이단계에서 기호론을 차용하여, 기표(지각)과 기의(개념)가 결합하여 '의자'라는 기호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코수드는 지각-기표(보통의 접는 의자)를 시지각의 대용물(사진), 그리고 정신적인 개념의 대용물(사전 정의)과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그의 분석을 예술로 전환시켰다. 그럼으로써 새롭고 한 차원높은 초월적인 기호 내지 메타기호를 창출하였다. 모더니즘 미술은 주제를 제거하려고하였는데. 역설적으로 이제 주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소멸된 미술을 나타나게 했다.이러한 아이러니를 가진 개념미술의 선조는 탁월한 아이러니스트 였던 마르셀 뒤샹이다.뒤샹은 을 통해, 창조적인 행위를 이런저런 사물이나 행동에 '예술'이라는 칭호를단순하게 부여함으로써, 예술은 장인기질이나 양식보다는 작가의 의도와 더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코수드는 뒤샹의 기성품을"현대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초"라고 보았다.개념주의자들이 관념을 표현수단으로 찾아냈던 '기록'의 여러형태 중에서 구두언어 만큼완벽하게 그 목적에 부하하는 것은 없다. 로렌스 웨이너는 "언어가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관념을 실향하느냐늬 결정을 작품의 수용자에게 맡겼다. 그는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