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사상사 > 르네상스Ⅰ. 르네상스1. 르네상스의 어원과 의미 및 시기르네상스는 중세와 근세사이(14∼16세기)에 일어난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르네상스의 어원인 RE (again) + NASCERE (birth)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재생 혹은 부활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볼테르의 《풍속론》에서 르네상스를 해방된 이성의 빛에 싸여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라고 한 것 처럼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키고 중세의 금욕과 절제의 암흑속에서 벗어난 인간 이성·인간성의 해방에 그 의의를 두고 있다.르네상스는 고대의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으로 처음에는 예능분야에서 시작되었으나 뒤에는 서양인의 모든 사상과 생활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즉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을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꾼 근대문화의 싹이었다.그 시기를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르네상스의 시기를 연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1307 단테 《신곡》집필1337 지오또 사망1341 페트라르카 로마에서 월계관을 받음134인 또는 결과로 작용하였고, 이질적인 경제 침입 역시 그러한 작용을 하였다. 14세기와 15세기동안 화폐유통이 증대되고, 탐욕적이며 근시안적인 군주들이 화폐 가치를 마구 전락시켜서 물가는 계속 앙등(仰騰)하였다. 이에 궁핍한 향사(鄕士)들은 이때까지 경멸해왔던 도시 고리대금 업자에게 가서 돈을 빌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저축심이 없는 귀족들의 토지와 지대 및 봉건적 권리등은 조금씩 조금씩, 돈은 칼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는 근대적인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동시에 변화하는 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군사적 조직과 기술의 발달은 사회적 특권 신분을 옹호해 주는 또 하나의 정당성을 그들에게서 앗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과거에는 싸움과 전투가 말을 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왕실의 재정이 튼튼해지자 봉건귀족의 그러한 봉사는 필요하지 않았고 13세기 이후부터 군역보충을 위한 용병의 이용이 이탈리아와 프랑다스 도시의 시민들은 귀족만이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한 농민의 해방으로 자유민의 증가는 경제력이 탄탄한 정부가 그들을 보병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고, 국가 조세의 확장과 강력한 보병 무기 및 대포의 발명등은 전쟁에서의 기사들의 주도권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부유한 대귀족들이 독립된 봉건 가신이 아니라 국왕의 정신이 되는 반면, 소귀족들은 군대에 근무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품위를 유지하기만 급급한 빈곤 속에 빠져가고 있었다. 대공국을 제외하고는, 왕실이든지, 군대가 없는 독일에 있어서는 귀족들은 용병전(傭兵戰)이나 약탈이나 혹은 양자를 겸해서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3 교회의 몰락13세기 말은 중세 교회의 역사에도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는 것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봉건 제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14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세속적인 지배자에 대해서 행사되었던 교황의 지배권이 회복할 수없는 정도로 손상되었고 그 후 2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의 통일은 공허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꼬무네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꼬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적인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꼬무네가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제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던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초기 인문주의 전통.르네상스를 서구 문화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시대, 즉 중세의 수세기간의 암흑시대 이후에 전개된 재생의 시대로 보는 전통적 관점은 바로 르네상스시대에 등장했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휴머니스트 자신들이 유럽 역사의 과정에 대한 그같은 설명의 자료를 제공했고 또한 고전적 학파에서 훈련받은 후대의 세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시대구분 구조의 자료를 제공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 할 것이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속에서 살아가던 르네상스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일종의 통합적 전체로서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시대와 과거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의 문화적 관심과 역사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관념은, 그들의 성장하는 역사적 의식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충분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문화적 부활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했지만 자신들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것에 대한 그들의 의식은 고전문학과 학문 및 예술에 국한되었다. 그들은 그처럼 한정된 분야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몇 세기 동안 인습적 유형으로 될 유럽 역사의 3단계적 시대구분을 위한 토대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작품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문화사에 대한 명백한 잠정적 평가나 개괄적 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문화에 대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있었다. 운이 좋은 도시 귀족 사회나 궁정 사회의 자제들은 점점 이 세상이 불행한 순례자의 역정(歷程)으로서 묘지까지 가는 잠시 동안의 눈물의 계곡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더우기 교양과 자신이 생기자, 그들은 교직자들이 자기를 대신해서 생각해 주고, 그들의 정부가 만족스럽게 다룰 것으로 생각하는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교회가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르네상스 전성기의 교황청은 다른 이탈리아의 궁정과 별로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교황청에서도 예술가, 문인, 용병대장, 외교관 및 궁정인들이 군주 주위에 모여서 교양있는 사회를 형성하여, 그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런 경우 군주는 사실상 기독교 세계의 종교적 수장이었으며, 그의 궁정에 집합한 대부분의 인사들은 교회의 요원이었다.그러나, 르네상스 사회의 종교적인 감정의 강도가 어떠하였든간에 한 가지 사실만은 명백하였으니, 그것은 곧 이탈리아 도시 상류 계급의 생활이 점차적으로 세속화 됨에 따라서 세속적 형식의 문학, 학문, 예술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에 이러한 세속적 보호와 관심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더듬어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로서, 그 이유는 회화나 조각에 나타난 사상은 문학이나 학문에 있어서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고, 도한 점점 커지는 세속적 정신이란 새로운 주제로서라기보다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로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의 사실주의와 15세기의 고전주의에서 고딕 예술의 종교적 정신은 점진적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지리적 요인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는 옛날 그리스 로마 문화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을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항구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동방의 색다른 문화가 쉽게 들어왔으며 13세기 이전에 봉건제도가 쇠퇴하고 항구도시가 많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도 풍부하고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아 등이 발전하였고 동서양을 이어주는 지중해 무역을 독차지하는 지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아름다움과 힘을 통합하여 조화와 율동의 공간적 질서를 드러낸 브루넬레스키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건축을 조사하며 고전적 구성미의 본질을 체득하여 그 성과를 피렌체의 교회 건축들에 적용하여 현실적으로 제한된 도시 공간에 비례와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의 작품 피렌레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붉은색 대형 돔은 르네상스 건축 가운데서 빛나는 최초의 걸작이다.조각에서는 도나텔로에 의하여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는데, 그는 조각을 건축의 부속적 지위로부터 해방시켜 고딕양식으로 회화화한 조각을 정도(正道)로 되돌렸으며,고대 연구와 아울러 인체의 사실적 추구를 거듭하여 고전 정신과 사실주의를 융합시켰다. 또한 조소예술, 본래의 양괴적(量塊的)인 입체성과 자유로운 공간성, 그리고 독립된 기념비성을 확립해 나갔다. 파도바의 일 세인트 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은 그의 투철한 자연 관찰에 의한 두드러진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치오에 의해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국제 고딕 양식 대신 피렌체 화파 본래의 힘찬 조형성이 나타났다. 부르넬레스키로부터 투시도법을 배우고 도나텔로로부터 엄격한 사실주의를 배운 그는 현실의 생명감 넘치는 인체, 합리적인 명암법과 원근법에 의한 넓고 장엄한 통일된 구도로 새 시대의 인간 존엄과 자연 공간의 예술성을 실증하였으며, 객관적 사실주의가 추구되었다.1427년 무렵 카르메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당의 외에 다섯 장면의 벽화는 조토의 조형적인 엄격성을 훌륭하게 재생·발전시킨 작품으로 당대의 수준을 능가하는 획기적인 양식이었다. 이러한 15세기 초의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파의 주도 아래 각 분야가 서로 교류하면서 인체 균형론과 원근법을 탐구하고 그러한 기법을 확대하여 자연주의적 주류 아래 주도해 나갔다.그리고 15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각각 그 지방적인 특색을 보유하면서 새 시대의 예술 운동에 참여한 유파들이 서로 그 특색을 겨루며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