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교세 확장을 주목적으로 하며 여기에 인구 팽창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해결과 영주들이 세력 과시 등의 목적을 위해 약 2세기에 걸쳐 행해진 종교 전쟁이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실지를 회복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인류를 피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성지회복’이라는 숭고한 목적 뒤에는 너무도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베네치아 상인은 무역로를 열어 축재하려 했고 가난한 병사는 한몫잡는 기회로,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노렸다.첫 원정에 나선 1천5백명의 십자군은 4년간 무려 7만명의 예루살렘인을 학살했다.영국의 교회 사학자 폴 존슨은“이 사건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1. 십자군 전쟁의 원인1 정치적 원인1) 이슬람의 동로마 침입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했다.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 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 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하였고, 그 다음 황제 미가엘7세(1071 - 1078)가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라는 사람이 황제가 된 후 1086년 안디옥, 베데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중심 도시를 빼앗겼다. 그래서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 레고리7세는 헨리4세와 서임권 논쟁을 하느라 성공을 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2) 이슬람 세계의 분열스페인 지역에서 1034년 회교 족장들의 싸움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던 칼리 프 왕국이 멸망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스페인 지역을 탈환했다. 1060년 이후 시칠 리 섬 탈환, 기독교인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2 경제적 원인1) 당시 영주의 장남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2) 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의 노력3 종교적 원인1076년부터 성지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교회는 클루십자군)1096년 출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은둔자 베드로였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인 강 유역에 가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가 하면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반 셈족운동의 시원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이슬람 족에게 전멸당하고 은둔자 베드로만 살아 돌아온다.{2 제1차 십자군 운동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의 귀족들이 참여했다. 3개의 부대가 개별적으로 진군을 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십자군의 도덕적 영웅이었던 Godfrey였다.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거룩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운동이다.1) 로레인, 플란더스 2) 북부 프랑스 3) 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1096년 겨울에서 1097년 봄까지 도착했다. 십자군 전설에 의하면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60만명, 기사만 10만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타이어니의 책에 따르면 실제로는 8천에서 만2천명정도, 그리고 기사는 3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동방의 황제가 원한 것은 원병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와서 자신을 도와 주기를 원했지만 십자군의 목적은, 단순히 동로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1097년5월 니케아를 점령하고, 10월에는 안디옥에 이르렀다. 안디옥에 이르러서 8개월 정도 고생하다 1098년 6월에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이슬람의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1099년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람들이 점령한 다음에 이곳에 라틴왕국을 건설했다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두번째 동기는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셋째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제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했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했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바누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우르바누스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였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제1차 십자군의 경제·정치적 원인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으지 8개월 후인 1095년 11월에 우르바누스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많은 군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신께서 원하신다"며 너무 열렬히 외쳐았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인의 피로 젖었다." 성지에 머무른 십자군들은 점차 유순해지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서유럽으로부터 새롭게 밀어닥치는 무장 순례단은 계속해서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더욱이 정착한 십자군들은 지방 주민들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채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서 별개의 착취적인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1차 십자군 전쟁 이후의 십자군 운동 실패프리드리히2세의 외교정책 성공 십자군이 건설한 기독교 국가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위치한 인구가 희박하고 좁다란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탈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1144년에 이르러 최북단에 위치한 공국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하에 동방으로 온 제2차 십자군의 기독교 전사들은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술탄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그는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다시 한번 서유럽은 손실을 복구하고자 했으니 제3차 십자군이 그것이다. 제3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군을 거느리고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경쟁관계에 있던 국왕들 사이에 다시 내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노켄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십자군은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의 진로를 통제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1204년 성지로 진군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스만투르크족에게 동유럽으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이노켄티우스가 1215년 제4 주장했다. 그래서 이집트 원정을 먼저 시작했다. 베니스의 상인들과 협력해서 헝가리에서 먼저 짜라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 폭동이 일어나서 많은 베니스의 상인들이 약탈 당했는데 이것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알렉시우스라고하는 왕자가 다른 알렉시우스3세라고 하는 자에게 왕위를 빼앗겼는데, 만약에 십자군들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십자군들은 정통왕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1204부터 126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부분을 서로마 제국에서 지배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에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를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하나가 되었다. 1261년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라틴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라틴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453년 이슬람 교도들에 의하여 동로마 제국이 멸망되었다.6 소년 십자군 운동 1212년프랑스에서는 스데반이라고 하는 12살된 목동이,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고 하는 10살 된 소년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어른들과 함께 일부는 마르세이유 항구까지 도착하였다. 이 어린아이들이 생각할 때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둘로 갈라져서 성지까지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상인들에게 유혹되어서 상인들의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일부는 파선을 당하고 일부는 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얼마나 환상에 의한 것이고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7 제5차 십자군 운동(1218 - 1221)8 제6차 십자군 운동(1228 - 1229)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십자군 서약을 했다. 1229년 이집트의 술탄과 계약에 의해서 1244년까지 예루살렘을 기독교가 보유하게 되었다.9 제7차 십자군 운동(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