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 연간에 실시된 개혁.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완전한 자주적 독립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러 ·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 ·을미개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 ·시위대(侍衛隊) ·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각국의 대원수례(大元帥例)에 의하여 황제가 육 ·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 ·용병(用兵) ·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 ·포병 ·공병 ·치중병(輜重兵:군대의 화물을 담당하는 병사) ·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 ·육군법원(陸軍法院) ·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 ·발표되었다. 청국을 비롯한 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이주민을 보호하고, 도문강(圖們江:두만강) 이남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사회 경제적인 개혁으로서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궁내부(宮內府)로 이관되었고, 내장사(內藏司)는 내장원(內藏院)으로 개편되어 왕실 재정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재정상의 적자를 보완하기 위하여 시작된 백동화(白銅貨)의 주조는 화폐제도가 문란하게 되는 직하고 기술자 장려책을 강구하는 등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교육 정책으로서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산업기술을 습득시켰다. 그 결과 인공양잠전습소(人工養蠶傳習所) ·직조권업장(織造勸業場) ·한성제직회사(漢城製織會社) 등 많은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철도 ·운수 부문에서도 근대적인 기술과 기계가 도입되었다.상업의 진흥책으로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대한은행(大韓銀行) 등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교육면 역시 실업교육을 위주로 하여 체신사무 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편학당(郵便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이 설립되었고, 상공인 양성을 위한 상공업학교와 의사양성을 위해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가 설립되었다.한편으로 재판소의 위치와 관할구역이 재조정되었으며, 재판소 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개정하여 고등재판소를 평리원(平理院)으로 고치고, 황족의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특별법원(特別法院)과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의료사업으로는 광제원(廣濟院)이 설립되고 전염병 예방규칙이 반포되었으며, 진휼기관(賑恤機關)으로 혜민원(惠民院)과 총혜민사(總惠民社)가 설립되었다.그러나 이와 같이 추진되던 광무개혁도 러 ·일 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 ·을미개혁을 답습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대한제국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10월 22일까지의 조선왕조의 국명.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군주(君主)를 대군주(大君主)로, 전하를 폐하(陛下)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勅),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朕)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하였다.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898년 절영도(絶影島: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租借)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는 외국의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는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趙秉式)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함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호는 대한제국이고 정체는 전제군주제이다. 수구파 정부는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실력을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여 갔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였다.----------------------------------------------조선 멸망은 관료부패 때문이었다“경술년 7월(음력) 대한(大韓)이 망한 뒤 작위를 받은 조정의 관리가 모두 72명이었다.작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조정구(趙鼎九) 한 사람뿐이었다.그 나머지는 모두 음란한 계집이 재산을 탐하고 색을 좋아하듯이 기쁘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하늘이 이런 놈들을 왜 싫어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시종원 부경(요즘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이었던 정환덕(鄭煥德)의 회고록 ‘남가몽(南柯夢)’에 실린 이 말은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객원교수가 ‘매천야록’‘기려수필’등과 함께 구한말 비사(秘史)로 유명한 ‘남가몽’을 중심으로 당시 역사의 이면에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해설한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규장각)라는 책을 펴냈다.광운대 강사인 박은경씨도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고스란히 연결된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일제하 조선인 관료연구’(학민사)를 최근 출간했다.박씨는 이 책에서 “1909년 6월 당시 ‘한국직원록’에 수록된 조선인 관료 3천6백24명 중 67.6%인 2천4백49명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재임용됐다”고 주장했다.구한말 조선왕조의 관료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이 두 책은 지난 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도 결국 관료들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박성수교수의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는 대한민국 50년사가 조선왕조 5백년사의 축소판이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미·일·러·중 등 강대국이 각축하는 국제 환경과 함께 국내정세도 1910년 무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지배엘리트들의 실상을 실증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다.그의 연구결과 대한제국 관료의 3분의 2가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충원돼 식민정책의 대민집행관 기능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특히 조선인 관료의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도지사나 도참여관의 경우,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대한제국 관료들이 주류를 이뤘고,그외 대부분의 고등관직도 이들이 점유했다.이는 일제가 갑오개혁을 계기로 친일적인 관료들을 치밀하게 육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이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대한제국 관료 출신으로 일제 식민관료가 된 2천2백여명과 조선총독부가 직접 충원한 5백여명 조선인 관료의 이력이 실려 있다. 위정 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1.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에 의한 5불가소① 이 강화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눈 앞의 고식일 뿐 그들의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② 일단 강화를 맺으면 물자를 교역하게 되는데 저들의 상품은 모두 음사기완한 것이고 또 수공업품이므로 무한한 것이나, 우리의 물화는 필수품이며 땅에서 생산되는 유한한 것이므로 이내 우리는 황폐해질 것이다.③ 그들이 비록 왜인이나 기실은 바로 양적이므로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교의 서적들이 교역을 타고 끼어들어 와 온 나라에 퍼지고 인륜이 쇠퇴할 것이다.④ 일본인이 왕래하여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이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⑤ 왜적들은 물욕만 높을 뿐 조금도 사람된 도리가 없는 금수와 마찬가지이니 인류가 금수와 더불어 같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2. 오늘날 조선의 급선무는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어떠한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어짐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미국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돕고 공의(公義)를 유지하여 유럽 사람에게 함부로 악한 짓을 못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