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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루터파와 가톨릭의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문 연구
    루터파와 로마가톨릭의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 교리 와 개혁교회 칭의 교리의 비교Ⅰ. 서론“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이 말씀에는 개혁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이 내포되어 있다. 그 원칙은 ‘칭의 稱義’ 로서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다.’ 는 의미이며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알 정도로 강조되는 교리상의 중요한 단어이다. 이‘칭의’라는 단어는 또한 종교개혁이 발생한 배경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종교개혁이 ‘칭의’ 한가지 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며 종교개혁 발생 원인의 이면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일들로 얽혀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칭의’ 의 개념이 종교 개혁서 안에서 대립하는 두 주체인 개혁주의 교회와 로마 가톨릭에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로마 가톨릭에서는 교리적 비중 보다는 종교 개혁가들과 의견의 차이를 보인 역사적 사실의 비중이 크다는 의미이다.) 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이렇듯 칭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해 개혁주의 교회와 로마가톨릭은 첨예하게 대립하여 오며 자신들의 칭의에 대한 교리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점차로 개혁주의 교회의 일부와 로마가톨릭이 자신들의 칭의 교리와 상대의 칭의 교리에서 합일점을 찾는 작업을 통해 연합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1999년 말 루터파 교회와 로마 가톨릭 측이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본고에서는 그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 교리가 개혁주의 교회 혹은 로마 가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내용들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찾아 연구하고자 한다.Ⅰ장 서론 에서는 개혁주의 교회가 이해하는 칭의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고 또한 로마 교회가 이해하는 칭의의 개념에 대하여서 설명하여 칭의에 대한 전이해(前理解) 를 갖고자 한다. 이후 Ⅱ장 본론 에서는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 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면죄가 의인의 목적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튼 은혜의 주입을 인간 자유의지가 용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그 다음에 영혼이 처음으로 신앙을 얻게 된다."의인에 있어서 죄의 용서를 얻는 것도 주입된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의인의 태도도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 사랑이 형성시켜주는 신앙이 아니면 완전한 신앙이 아니라고 로마교회측은 생각한다. ) 이러한 로마교회의 입장은 루터가 스말칼트 신앙고백에서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율법이나 , 공로에 의해서 얻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믿어야만 한다." 고 하며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포함해서 , 인간의 어떠한 공로라 하더라도 죄를 감소 시켜 주거나 ,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의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될 만한 것은 없다." 라는 루터의 칭의 론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대하였고. 출교시키면서 스페인 트렌트에서 모인 종교회의를 통해 칭의 교리 대한 최종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16장으로 제시되었고 칭의의 과정의 3단계와 일치하는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 1부는 최초의 칭의에 대하여 서술하며 원죄와 자유의지 , 선행하는 은혜와 인간의 협동, 칭의의 본질과 원인들, 믿음, 공적(공로) 그리고 보증과 같은 주제로 채우고 있다. 이 최초의 칭의는 세례와 관계되어 있으며 사람의 신분뿐 아니라 본성까지 교정하는 의미로 묘사되어 있다. 제 2부는 소위 ‘두 번째’ 칭의로 소개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의로워진 사람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칭의의 진보이다. 개혁교회 라면 여기서 제공하는 많은 교훈들을 성화(Sanctification)의 주제 아래로 대치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제2부에서 심판의 날에 발생하는 마지막 칭의를 향하여 그의 육체를 날마다 죽이며 성화를 위한 의의 병기로 드리고 ,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말씀을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동한다고 말한다. 로마가톨릭 교회법은 개혁주의의 성도의 견인이라는 선물과 예정교리에 근거한 경솔한 전제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명령 오직 그 신뢰에 의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캐논ⅩⅣ: 만일 누군가가 사람은… 자기가 사죄 받고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자신 있게 믿기 때문에 사죄 받고 의롭다함을 얻으며… 오직 이 믿음에 의해 사죄와 칭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 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2. 개혁교회가 이해하는 칭의(稱義)칭의에 대한 개혁주의에서의 정의 ? "칭의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동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 우리에게 전가되고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그가 보시기에 우리를 의로운 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칭의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법정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그의 거룩한 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의로운 지위를 갖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속죄의 결과 혹은 그러한 측면이라 하겠다. 신약성경에 칭의와 관련한 헬라어 단어는 모두 "똑바른" 이란 기본적 의미인 디크(dik) 에서 유래한다. 물론 물리적인 똑바른 것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똑바름이 기본 개념이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못하면서 많은 혼란이 조성된 것인데 폴크너( J.A.Faulkner) 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칭의와 대조되는 것은 ‘정죄’이다. 의롭다고 할 만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거룩함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롬4:5 ;빌3:9). 하나님이 의롭다고 할 때 그가 쳐다보는 것은 그가 나누어 준 혹은 나누어 줄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속죄이다.계속하여 폴크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 그 자체가 믿음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한편, 의로운 삶이 뒤 따르지 않으면 칭의란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역설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지위’이지 특징은 아니다. … 그것은 윤리적인 개념 보다는 법적으로 공인하는 것이다.")그러나 칭의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로든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 의가 , 칭의의 근거로서 믿는 자에게 전가되었고, 그리고 이러한 전가의 결과는 첫째로 , 죄의 용서요 , 둘째로는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할 것은 " 그리스도의 적극적이고 수동적인 순종은 … 같은 것의 다른 국면 혹은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다.)Ⅱ. 본론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稱義)1999년10월31일 발표된 ‘합의문서’ 는 총44개 항목과 그에 대한 각주 및 추가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발표문은, 총A4용지로 약 12쪽에 해당되는데, 부록과 각주까지 총 20쪽에 해당한다. 먼저 그동안 양 교단의 칭의 론에 대한 간단한 역사를 서술하고( 1-7항), 칭의 론에 대한 성경적 기초( 8-12항)를 다룬다. 그리고 칭의 교리의 공동이해( 13-18항, 칭의와 관련된 인간의 죄성( 19항-21항) , 죄의 용서와 의의 성립( 22-24항) , 은혜와 믿음에 의한 칭의(25-27항), 죄인으로서 의롭게 된자( 28항-30항) , 율법과 복음 (31-33항) 구원의 확신 (34-36항) 의롭게 된 자의 선한 행위 (37-39항), 도출된 합의의 중요성과 범위(40-44항) 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다루어진 내용 가운데 먼저 칭의 론의 내용들을 살펴보겠다.1.공동선언문에 나타난 통일된 입장선언문의 결론 부분에서 양 교회는 공동선언문을 낸 목적이 루터파와 가톨릭 사이에는 " 칭의의 기본 진리에 관한 합의가 존재한다." 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40항) 그런데 그 합의란 사실상 이신칭의 교리를 공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 공동 선언은 다음의 의도를 가진다. 즉 대화의 기초 위에서 여기에 서명한 루터파 교회들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5항) 선언문은 여러 항에서 이신칭의를 인정하고 있다. " 사람은 율법에 지시된 행위들과 별도로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의 은혜에 의해 일어난다." (19항) 이 그것이며 나아가 선언문은 공로사상을 부인한다. "함께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 편에서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해 ,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을 받으며 …성령을 받는다.…."(15항) "…죄인들로서 우리의 새 생명은 하나님께서 선물로서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뿐 결코 어떤 식으로든 공로의 대가를 받을 수는 없는, 용서하시고 갱신하시는 자비에 기인한다. (17항). "…죄인들로 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칭의를 얻기 위해 공을 쌓거나 그들 자신의 능력에 의해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 하다."(19항)위와 같이 가톨릭 측의 공동 선언내용은 트렌트 회의 선언과 비교해서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 측은 중요한 점에서 합의를 보이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전히 남은 견해의 차이들이 있고 선언문에서 나타난다.2.공동 선언문에 나타난 입장의 차이점루터파와 로마가톨릭의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교리 와 개혁교회 칭의교리의 비교일반적으로 가톨릭에서는 개혁교회의 구원 얻은 신자의 삶의 변화 없음에 대하여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 복음을 값싸게 만든 것이 아니냐 하는 공격이 있어왔다. 그래서 선언문에서도 신자의 삶의 갱신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고 이것은 개혁교회에서도 중요시 하는 문제이며 종교 개혁가들인 루터와 칼빈또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에 문제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가톨릭이 죄의 용서뿐 아니라 개혁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성화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들까지도 칭의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가톨릭은 “죄의 주관하는 능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요소를 칭의의 일부로 보고 있다. (11항) 가톨릭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 칭의를 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상을 주며 이것은 오직 은혜로 , 믿음으로 )
    인문/어학| 2005.06.11| 7페이지| 2,500원| 조회(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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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영혼기원에 관한 고찰
    인간영혼의 기원에 대한 고찰Ⅰ.서론인간본성에 대한 관심은 오래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사색되어지고 연구되어지는 관심사이다. 인간본성의 문제 가운데 인간영혼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우리의 흥미를 더욱 유발시키는 내용이기도 하다. 더욱이 기독교 안에서의 영혼의 중요성과 관심이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것도 없이 크다. 이러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영혼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의견을 다루어 그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적이며 오늘날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받아들여지는 의견이 무엇인지를 잘 인지하여 우리의 신앙의 바탕을 견고히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영혼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한다. 글의 전개는 본문에서 영혼에 대한 어원적 고찰 및 영혼의 정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며 중심되게 연구하고자 하는 내용인 영혼의 기원에 대한 세 가지 의견 - 선 재설 , 유전설 , 창조설 - 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그 의견을 지지하는 여러 교부와 신학자들의 저술가운데 나타난 내용들을 살펴보아 그 내용의 이해를 도우며 영혼기원의 각 입장이 가지고 있는 오류 또한 살펴보도록 하며 결론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의 내용에 가장 부합되어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 무엇인지를 결론내리고 끝을 맺고자 한다.Ⅱ.본론1. 인간 영혼의 정의인간은 물질적 요소인 육체와 더불어 비물질적 요소인 영혼을 동시에 지닌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육체와는 달리 영존하는 인간의 궁극적 실체이다. 따라서 일반과학의 대상이기도 한 육체와 달리 영혼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한 신학적 규명이 필수적이다.) 다음에서는 영혼의 정의를 위해여 성경에 나타난 영혼의 기본개념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영(Spirit) -히브리어 ‘루아흐(???)’ 와 헬라어 ‘프뉴마 (πνευμα)’의 번역으로, 주로 인간의정신적인 면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롬 8:16) 또한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과 결합하며 성화되어 가는 영혼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하여 필히 첨가할 사항은 영혼이란 그 자신 하나의 영이신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각기 개체에 때라 다양한 존재양식을 가질 수 있으나 그 자체는 영원히 불멸하여 독립된 인격적 개체의 실체로서 존재하면서 , 영이신 하나님 자신과 교제를 나누도록 피조물 중 일부 곧 천사와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 영혼이라는 것이다. 즉 영혼은 그것을 가진 개체의 인격의 총체인 동시에, 그 역시 하나의 영이신 하나님과 접촉점을 갖도록 보장해 주는 유일한 근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하나님과 영적속성을 공유한 개체들만이 창조당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따로 부여받은 지. 정. 의 적 인격의 궁극적 실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최선임을 알 수 있다. )2. 영혼의 기원에 대한 여러 입장들동방이나 서방교회에 있어서 다 같이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복합체임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희랍철학은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기독교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혼의 본질 , 기원. 계속적인 존재 등에 관한 끊임없는 논의가 있어왔다.그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가 선재설, 유전설, 창조설 이다.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하면 오리겐으로 대표되는 선재설은 영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영혼이 자기의 죄 때문에 벌로 받은 육체보다 선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혼의 선재와 윤회에 대한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오리겐이 속한 알렉산드리아 학파 내에서만 이 견해가 인정되었다. 또 다른 견해로서 창조설이 있으며 이는 개인이 탄생할 때 하나님이 새영혼을 창조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생각은 동방교회를 지배하였고 서방교회에서도 일부지지자들이 있었다. 이외에 영혼유전설은 서방교회안에서 점차 뿌리를 내려왔으며 그 내용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인간의 본성이 그 전체성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여 창조되었으며 , 인류가 번식해 감에 따라 점차 개별화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적 이론과도 잘 어울린다. 유전설을 서술한 사람은 터툴리안이으로 유대의 랍비들이나 초대교부 오리겐(Origen)과 유대 철학자 필로(Philo) 및 근대에 와서는 비처(Beecher), 쉴러(Schiller) 와 같은 사변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 견해는 인간의 영혼이 이미 어떤 형태로 존재하다가 육체가 조성되는 어느 시점에 인간의 몸과 영혼이 결합된다고 본다. 혹자는 인간의 모든 영혼이 창조 제1일이나 제6일에 이미 창조 되었으며 . 어떤 곳에 보관되어 있다가 육체와 결합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에는 거의 무시되는 견해이다.이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그의 글 De Principiis 2권 8장 3절에 내용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오리게네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물론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성원은 천사들 내지 영들인데 이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다.오리게네스는 천사들을 하나님처럼 영원한 존재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가 생각하기에 피조물인 천사들이 없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하심을 행사할 대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는 인간도 타락한 천사로 본다. 단 . 타락한 정도가 사탄이나 악령보다 더 심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 때 천사는 영인데 원래 뜨거웠던 영이 육신 속에 들어와 차갑게 됨으로 인간이 생겼다. )(2) 선재설의 비판각 개인 영혼의 기원을 육체 창조 이전에 두고 있는 선재설은 극도의 사변적 추론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 받아왔다.선재론은 그 성경적 근거를 나면서 불구로 태어난 것이 그 자신의 죄 때문으로 본다는 점에서 찾는다.(요 9:2) 즉 태어나지 않는 자가 지을 수 있는 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영혼이 지은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 당시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질문이므로 선재설의 정확한 근거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각 개체적인 영혼이 육신과 결합하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인간에게 고통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고난이 아담의 범죄 결과이며유전설(Traducianism) 은 교부 시대 사상가들(터툴리안 , 루피누스. 그레고리)과 종교개혁기 의 신학자들 및 근세의 신학자들(Smith Shedd, Strong) 의 지지를 받는다. 이 이론은 각 개인의 영혼은 출생시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셨으며(창 2:7-8) , 하와는 영혼 창조의 언급 없이 아담의 몸에서 나왔고( 창 2:2) 그리고 그 후의 인간은 조상의 허리에서( 히 7:9,10) 생식의 법칙에 따라 번식된다는 (창 46:26) 등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이 이론은 또한 정신적 특징과 가족의 개성이 유전된다는 사실의 뒷받침을 받기도 한다.가족의 특징은 종종 신체의 유사성과 같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 수가 있는데 이와 같은 유전은 교육이나 모범 등을 통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모가 살아서 자식을 기르지 않는 경우에라도 그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몸의 문제라기보다는 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 영적 부패의 유전을 설명할 때도 최적의 기초가 된다. 유전설을 현실주의 이론과 결부시켜서 원죄를 설명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유전설을 주장하는 터툴리안의 주장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터툴리안은 인간의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최초의 결핍성이 생겼고 이 결핍성(Vitium) 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었다는 이론을 창시하였던 것이다.이 이론으로 터툴리안은 소위 유전설의 창시자가 되었다.그러나 터툴리안이 말한 결핍성은 갖 태어난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가능성이지 현실성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이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타락 후에도 자유의지가 있어서 , 선과 악을 선택할 수가 있는데 인간이 선 대신 악을 선택할 때 비로소 , 결핍성은 현실세계에 나쁜 영향을 주는 악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의 “최초의 결핍성”은 어거스틴의 “원죄”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에 있어서 원죄는 아담의 자손에게 태어날 때부터 단과 같은 면에서 완전히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유전론자들은 창조의 6일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물론 그 능력까지도 중단된 것으로 보며 이를 유전설의 가장 확고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시 창조 사역이 창조의 6일로 종결된 것은 사실이나 거의 창조능력까지 중단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제2의 원인의 활용없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 지금도 계속되며 이는 특히 인간의 중생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계속적인 창조가 없다고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전론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죄를 지음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는 모친 마리아로부터 육체와 더불어 영혼까지 물려받아야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관점에서 유전론을 선호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유전설만이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선재설이나 이어 설명할 창조설로서도 예수의 성육신은 설명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전설을 취할 때 예수의 영혼을 죄에 오염된 것으로 오해할 우려를 낳게 한다. 또한 영혼은 비물질적이며 순수한 정신적 요소이므로 분할되거나 복합될 수 없다. 때문에 부모의 영혼이 여러 자녀에게 나누어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은 자녀의 영혼이 아버지에게서 유래하는지 어머니에게서 유래하는지 혹은 양자의 것이 결합되어 분리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담의 원죄가 그 후손에게 전가되는 까닭을 유전론이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영혼이 유전되며 이것이 교리와 관련을 갖는다면 인간은 인류의 시조이며 행위 언약으로 인해 인류의 대표인 아담 뿐 아니라 모든 조상의 축적된 죄를 원죄로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려 오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말함으로써(고전 15:45) 성경은 죄의 전가가 아담에게만 있고 의(義)의 전가가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유전론은 오히려 원죄의 교리와 속.
    인문/어학| 2005.06.11| 7페이지| 2,500원| 조회(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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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바울의 율법과 복음 평가A+최고예요
    홍인규 교수의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평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울과 율법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이며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져 왔다. 하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 서로 일치에 이르지 못한 어려운 테마 중의 하나이다. 본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은 그 제목에서 알려주고 있듯이 바울의 신학 속에 녹아 있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관점을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울과 율법에 관한 내용은 몇 마디로 간략히 설명할 만큼 단순한 내용이 아닌 만큼 본서 역시 그 내용에 있어서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책에 대한 소개본서는 저자 홍인규 교수의 학위논문으로서 영국에서 먼저 “The Law in Galatian. (JSNTSup 81 ; Sheffield : JOST Press, 1993)"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후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본서는 바울의 율법 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하는 내용가운데 영향력 있는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며 그 견해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뒤이어 기술하고 있으며 그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해석의 도구로 ‘강화 분석법’ 을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연구 범위를 갈라디아서로 제한하는데 이는 율법문제의 복잡성을 감안하여 율법이 처음으로 취급되었던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연구함이 이유임을 저자는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제1장에서는 앞서 말한 ‘강화 분석법’ 이란 콜론구조에 기초를 두어 분석의 단위로 사용하며 여기서 “콜론이란 주부와 술부로 구성된 독립적인 단일 문법 구조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콜론을 잘게 나눈 뒤 콜론들을 묶어 콜론다발을 만들고 그 다발들을 묶어 단락을 만들며 단락들을 묶어 페리코프(pericope) 를 만들며 마지막으로 페리코프를 서로 묶어 연구대상 전체의 거시구조가 드러나게 하는 연구방법이다.저자는 갈라디아서를 16개의 페리코프로 나눈 뒤 페리코프를 의미론적 관계로 묶어 연구함을 보여준다.이러한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도출되는 제2장 ‘바울의 복음과 율법의 핵심적 관계’ 를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면하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이해가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펼쳐질 바울의 논증의 토대를 형성한다.” 는 저자의 진술처럼 그리스도의 사건은 언약의 저주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구속하며 유대인에 국한되지 않는 우주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스스로 저주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율법의 저주아래서 구속하셨고 이는 대표적 표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지르는 담이 허물어졌으며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새로운 언약이 수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이러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는 어디서부터 기인하였는가 하는 문제도 본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메섹 도상의 사건을 통해 이전에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이전에 알고 있던 헬라 파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바울이 자신의 복음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는 성경내용 가운데 다메섹 도상의 환상을 회심이라는 말보다는 위임이라는 말로 쓰였음을 주목할 때 바울사도의 계시적 소명을 믿게 된다. 본서 제3장의 대적 자들의 주장과 정체에서 저자는 갈라디아서의 구조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이끌어내어 설명한다. 바울은 편지 일부가 아닌 전체를 통해 대적 자들의 신학에 대한 반응을 보이며 대적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들이 갈라디아인 에게 요구한 것은 할례였다. 논쟁의 중심에는 누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인가 하는 문제가 있으며 안디옥에서 보인 베드로의 행동은 갈라디아에서 있는 선동자들과 같은 성격이다.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권이 대적 자들에게 의구심을 주었고 바울은 이를 변호하고 있다.선동자들은 모세언약시대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율법과 그리스도를 결합하여 율법에의 충성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 구조를 통해 보임을 3장을 통해 기술하고 있다.제2부 4장 ‘바울의 율법관’ 에서는 뒤이어 다루어질 율법의 세 가지 차원을 이야기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시내언약의 의무이다.”, “율법은 예속시키는 세력이다.”, “ 율법은 사랑의 표현이다.”5장 ‘시내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에서는 오직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오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 됨을 말하며 할례와 율법을 믿음의 보충물로 요구하는 것은 믿음 자체를 불충분 한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설명하며 율법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번도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의도된 적이 없음을 말하며 율법은 시내언약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으로서 칭의의 방안이 되지못함이 설명되고 있다.6장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에서는 율법과 죄, 율법의 속박,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언급하면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기 위하여 약속에 첨가되어 주어졌고, 그 결과 율법은 모든 범죄자들을 그 저주 아래 가두었음과 바울은 이 율법 아래의 감금 상태를 죄 아래, 귀신의 세력 아래, 육체 아래의 노예 상태로 연결시키고 있음을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우주적인 절망 상태를 나타낸다.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비유하였다. 몽학선생이란,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집에서 훈육을 담당하기도 하는, 철들기 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년 감시자이다. 즉 언약백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감시자는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임을 알게 하여 그를 믿게 하시려고 율법을 준 것이다. 전적 타락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죄만을 증가시켜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하여 완전한 율법 준수 자를 갈망하게 하는 직무만을 수행할 뿐임을 알 수 있다.7장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에서 나타난 갈라디아서의 대립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 그리고 율법의 노예상태와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됨 사이의 대립이지 율법 자체와 그리스도 자신의 대립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으로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의무는 사라 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은 존재한다는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령의 절대 주권적인 다스림에 전 삶을 완전히 복종시킬 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된 이웃사랑을 하도록 강권 받았고, 또한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새롭게 알게된점 과 느낀 점강화 분석법에 의한 분류가운데 ‘페리코프7’ 에 나타난 내용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3:1-53:6-93:10-123:133:14a3:14b3:1-5에서는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 으로 말미암았다는 근본적인 사실의 강조가 이루어지며여기에 대칭되는 3:14b 에서는 믿는 자들이 약속된 성령 을 받게 하려 함이다 는 내용이 이야기 되어 동일한내용의 대칭이 이루어지며 3:6-9에서는 아브라함의 의롭 다 함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았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칭되는 3:14a 에서는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복(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에 참여함을 이야기함으로써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가 대칭적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고 3:10-12에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함으로 율법의 저주아래 있음을 말함과 3:13 에서는 위의 율법의 저주에 대한 해결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음을 말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대칭구조속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그 핵심이 된다. 이와 같은 대칭구조로 분석하는 방법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져 왔지만 여기서는 대칭구조분석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도출된 페리코프의 주제를 다시 모아 전체구조를 본다는 것이 새로운 점이며 선행된 작업을 통해 (콜론 단위화 후 콜론다발 과 그 다발들을 페리코프화 하는 작업) 분석되는 과정을 새로이 알게 되었고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중요한 한 부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새로이 알게 된 개념 두 번째는 바울신학의 기초는 어디에 근원을 두는가? 하는 평소의 의문에 대한 답변이 되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 신학적인 면, 특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있어 다른 어떤 사도들 보다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예수님 승천이후 복음을 접한 바울의 신학적인 면이 그의 가말리엘 문하에 있을 당시의 유대교적 이해로부터 맥락을 하는지 생각해보지만 그의 율법의 이해는 유대교의 그것과 극과 극이기에 적합지 않다고 생각해왔으며 다른 사도들의 이해와도 다른 발전된 어떤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과 율법에 대한 이해는 우선 그가 박해자 당시의 헬라 파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던 복음과 율법에 대한 내용을 바울이 확인하면서 정착된 것이며 이러한 확인은 사도들로 부터도 아니요 유대교로부터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며 이런 그리스도의 계시아래서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케리그마 적 전통들을 재해석 한 것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문/어학| 2005.06.11| 4페이지| 2,000원| 조회(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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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일상,하나님의 신비
    일상, 하나님의 신비를 읽고요약1.산문체 세상과 빛 바랜 진리1989년 성경신학자 월터 브루거만은 예일대학교 강의에서 , 교회의 사명은 ‘산문 일색의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난ㄹ 복음은 극적이거나 예술적이지 않다. 그것은 기술의 이성에 묶인 채 구체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매주 거듭해서 복음을 듣지만 우리가 신자라는 사실때문에 들을 뿐이며 복음을 다루기 쉬운 기술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기 때문에 , 오늘 날처럼 신비와 영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구도자들은 교회를 지나쳐 버리고 다른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과거 어느때 보다도 복음의 진리가 크게 축소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산문체 세상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는 시인” 이 될 때라고 브루거만은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산문이란“정해진 공식으로 짜여진 세상 , 즉 기도와 사랑의 편지마저 공문서같이 들리는 그런 세계”를 지칭한다. 한편 시란 그보다 더욱 풍성한 어떤 것 , 즉 오늘날 너무나 흔한 표준 등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가리킨다.우리는 진리가 단순한 공식으로 크게 축소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나야 할때다.그러나 오늘날 변화된 설교하고 하면 , 그저 낡고 적실성 없는 공식이 번지르르한 새 옷을 입은 매우 적실한 공식으로 바뀐 것을 가리킬 뿐이다. 지극히 단순화된 삼위일체 강론이 이제는 그런 식으로 단순화 된 충고로 대치 되었다. 브루거만은 시적인 언어란 “ 도덕적 가르침이나 문제 해결 , 혹은 교리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아니며 , 좋은 충고나 낭만적인 포옹도 아니고 그럴듯한 유머로 사태를 무마하는 것도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시적인 설교란 어떤 면에서 청중을 놀라게 하는 것인데, 청중으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에 합류해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해 가도록 초대하는 것이다.21세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확실성과 무의미함을 내어 버리는 탄탄한 시적인 믿음을 다시 발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약적 복음에 대한 헌신을 .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분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교회 모임을 위해 기도할때에도 그분을 으레 늦게 도착하는 귀빈처럼 여기고 초청한다. 또 장래 계획과 꿈에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마치 그분이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이런 사고 방식은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우리가 정할수 있는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에 계시며 우리의 경험 세계로 들어오셨다.이제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다.많은 이들이 신성한 영역으로 분류하는 어떤 경험이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데 제약이 있다는 말이다. 한편 그와 반대로 보통 한시적이거나 세속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더 가까이 경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주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지만 우린 너무나 바빠서 그것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우리의 산문체 신앙은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이런저런 고백을 하지만 종종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갈 때가 있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개입은 결코 제한될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지각하는 우리의 인식이 제한을 받을 뿐이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눈길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창조와 성육신이다.이 두가지는 과거에 그분이 자신을 계신하신 통로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하시는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매우 창조적인 영역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 곳은 하나님-창조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복을 주시는 곳이며 , 평화 , 기쁨, 정의 , 자비 , 믿음, 사랑을 창조하시는 장소다.우리가 이 위대한 나라에 속해 있다면, 이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왜 하나님은 요술 지팡이로 모든 싸움과 증오와 불평등을 몰아내고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실까?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우리가 그 분의 동반자가 되어 사랑을 창조하고 하나님 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마음만 먹으면 어떤 천박하고 하찮은 활동도 창조적인 행위라고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활동은 두가지 주제 곧 창조 및 성육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앞에서 말한 것이다.만일 하나님이 창조적 하나님이고 그분의 나라가 바로 그분의 창조적 활동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런 활동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동반자로서 참여할수 있을지 알 수 있겠는가?대답은 바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것이다.너무나 매혹적이지만 파괴적인 어떤 행위를 저질러 놓고 그것이 마치 창조적 활동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해야 할 것이다.2. 이목 집중의 훈련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냉담함과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는 인생을 거부한 채 깨어 있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 주변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적 창조성을 가리키는 신호를 감지하고자 노력한다.만약 기도가 진정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면, 최상의 기도는 우리의 냉소적이고 지친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역사를 극적이고 굉장한 사건으로 한정시켰다. 소위 교회의 신성한 영역과 치유, 기적과 경이로운 사건에 그분을 가두어 놓은 셈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가운데 조물주의 손길이 담겨 있으며, 볼 눈이 있다면 누구나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하나님의 나라가 역사를 통틀어 확장되고 있는 만큼 하나님 역시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의 격분에 싸여 눈이 가리워지고 모든 시적인 정서가 메말라 버린다.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기술은 조물주의 손길을 찾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우리는 사무실이나 작업장 , 스포츠 경기나 영화에서는 조물주의 손길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업무 회의에 참석할해하려면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달아 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모습을 일견하는 방법은 그분이 우리를 찾는 방식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다스리시는 곳에 현존한다. 그리고 그분을 섬기기로 헌신한 이들 곧 믿음 안에서 그분께 손을 내밀어 그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주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3. 전율을 느끼며 사는 삶왜 우리는 도시 한복판을 다닐 때 보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곶 마루에 있을 때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무럼비지 강과 같은 장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우리가 석양이 지는 광경이나 보름달을 보기 원하고 강둑에서 한가로이 거닐거나 산 정상에 앉아 있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자연의 장엄한 경관이 저 우주에 우리보다 더 위대한 어떤 세력이 있을 것을 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 다. 존 칼빈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나타내신 그 영광스러운 솜씨를 간과해서도 , 감사치 않은채 경시하거나 망각해서도 안 된다고 권고한다.우리가 우주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기 중심적인 신념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승화시킬 체험 곧 경외감을 맛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동물원에 갈 기회기 있다면 무슨 동물이 가장 인기가 있는지 관찰해 보라. 예외 없이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동물 곧 사자, 코끼리, 곰 , 악어와 같은 동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우리가 무언가 부족한 존재임을 상기시켜 줄 피조물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궁극적인 권위자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보다 더 크고 강한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는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우리는 교회안에 있을때에는 모든 것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끼기가 쉽다. 우리의 필요가 강조되고 우리의 관심사가 확실히 다루어지며 특히 우리의외에 속하는가 , 아니면 그 정 반대인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택하기로 하느냐에 따라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그분에 대하여 무엇을 보여 주는지 의도적으로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주변의 모든 이야기와 전통적인 제혜를 무차별적으로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궁극적인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으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적 지혜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소위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전통적인 신화와 통속적인 이야기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고 믿지만 , 그럴 때 우리는 손에 성경을 곡 쥐고 조심스럽게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 방식에서 신비의 개념을 배제 시켜선 안된다. 여기서 신비란 합리적인 것과 상반되는 비 합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합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분임을 일깨워 주는 그런 것을 말한다. 문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문학 작품은 이처럼 소극적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과 기독굦거 이상을 표현하는 적극적 매체가 될 수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일면을 보여주는 이상적 인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보여 줄수 있다.이처럼 대중 문학에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 단 조건은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5. 시간의 종교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모습에 대하여 ‘이목을 집중하고자’ 할때 우리가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나타나실 수 있음을 좀더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연과 문학, 영화와 달빛을 통해 그분의 손길을 보여 주실수 있다는 것과 그런 계시에 대하여 열린 자시를 지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하나님이 놀랄 만한 의외의 사건들으르 통하여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낸시는 것ㅇ르 포착하
    인문/어학| 2004.11.04| 7페이지| 2,500원| 조회(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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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네편의 복음서와 한분의 예수 평가A좋아요
    차 례Ⅰ. 요 약1.네편의 복음서 ---------2page2. 사자의 포효 -마가복음의 예수님- ---------3page3.이스라엘의 선생 -마태 복음의 예수님----------4page4. 짐지고 나르는 자 -누가복음의 예수님- ----------5page5. 높이 나는 독수리 -요한복음의 예수님 - ---------6page6. 한분의 예수님? -----------7pageⅡ. 서평 ----------8~9pageⅠ. 요약1. 네편의 복음서네 종류의 초상화(肖像畵) 우리는 네 편의 복음서에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지 않고 단순한 최소 분모로 축소시켜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네 초상화에 대한 혼합은 복음서 저자들의 독창성을 신뢰할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한 예수님의 모습에 관하여 설명해 주려고 애쓰는 것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복음서란 무엇인가 ? - 장르 전통적으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기(傳記)라고 간주되었다. 1920년대 슈미트(Karl Ludiwg Schmidt)나 불트만(Rudolf Bultman) 같은 학자들은 복음서가 전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양식비평'(form criticism) 이라 불리는 접근방식으로 복음서를 연구했다. 그러나 지난 20~30년 동안 복음서 저자들을 신학자와 의식있는 문학가로 평가하는 새로운 흐름이 대두되었고 여러 종류의 장르가 제안되었지만 여전히 복음서는 전기 문학으로 간주되었다. 복음서는 설화적 형태로 이루어진 기독론이기 때문에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라는 방법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다.복음서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자료 복음서들 사이에 겹쳐지는 부분들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설명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내포한다. 그러나 복음서를 오늘날의 전기가 아니라 고대의 전기와 비교해야 하는 것처럼,현대의 학문적 기준이 아닌 자료의 사용과 자유로운 편집에 관한 고대의 관습을 염두에야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상징이다. 네 번째 복음인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날개 치고 올라가는’ 독수리로 표상된다. 각각의 복음서는 그것을 읽지 않고서도 첫머리에 나오는 상징으로 인해 인식되었다. 이미지들은 복음서의 메시지에 대한 요약으로서 사용되었다.제롬으로부터 『켈스서』 (Book of kells)에 이르기까지 -장식된 복음서들 위의 상징들은 하나님에 관한 예언적인 환상으로 시작하였고 우리가 네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상징들이 시각적 효과로 인해 네 가지 기독론을 명확히 구분하고 인식하도록 도울것이다.2. 사자의 포효 -마가복음의 예수님-사자의 생김새 -상징과 의미 마가복음의 서두는 단호하고도 직접적이다. 예수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탄생이야기도,족보이야기도 없다. 마가는 이러한 예비적인 내용을 다룰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루이스(c.s.Lewis)가쓴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용맹한 사자 아슬란(aslan)을 생각나게 한다.사자의 도약 - 마가의 문체,구조,그리고 설화 기법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거친 사자처럼 질주해 나가신다. 모든 사건들은 ‘즉시’,‘단번에’,‘곧바로’일어난다. 마가는 과거의 이야기를 서술할 때 생생한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역사적 현재’를 선호하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빠른 진행속도와 생생한 묘사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가의 문체는 요약적이고 간결하며, 추상적인 설교보다는 구체적인 활동에 집중된다. 마가는 이 모든 특징들을 통해 예수님의 활동 속도와 그 사역의 긴박성을 명확하고도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투쟁하는 동물 -저항과 사역 , 마가복음 1장-8장 사자인 예수님은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급하게 뛰어다닐뿐 아니라 자신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넓은 지역을 다닌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활동가이시며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무대에 갑자기 나타나,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선포하는 강력한 인물이다.사자와 1-8 마가복음 말미는 불가사의,공포,경외감, 등으로 가득차있다. 훌륭하고 행복한 종말로 끝을 맺는 대신 마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의문을 남길 뿐이다. 원래의 서술이 여기서 끝났든 이 근처에서 끝났든 간에, 우리가 갖고 있는 마가복음 이야기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툭 잘라낸 듯이 여기서 종결된다. 예수님의 도래(到來)에 대하여 어떤 서론이나 배경 설명이 없었듯이, 그의 떠남에 관해서도 전혀 설명이 없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기독론의 중심 이미지를 갖고 결론을 내리자면, 그 사자는, 어디엔가 존재하는 갈릴리에서 자기를 만나라고 우리를 부르면서, 달려가고, 포효하며, 또다시 달려간다.3.이스라엘의 선생 -마태 복음의 예수님-사람의 얼굴 -상징과 의미 예수님에 관한 마태의 전반적인 묘사는 훨씬 더 명백하고 분명하며 풍부한 묘사를 제공하고 있으며,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자신의 여분의 자료를 추가하고 거기에 많은 가르침들을 더해 그의 복음을 전기에 가깝게 구성하고 있다. 마태복음을 상징하는 사람의 형상은 계시와 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탄생기사 , 마태복음 1-2장 마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시작하지만 마태는 이스라엘의 선생인 이 분이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에 살았는지에 관하여 상당히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구원’임을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가르치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또다른 모세라는 점을 암시한다.또다른 모세? -사역의 시작, 마태복음 3장 -8장 1절 마태는 예수님을 또다른 모세로,새로운 이스라엘의 선생인 예수님에 관하여 주의깊고 지혜롭게 서술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선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어떠한 비밀도 없다. 예수님은 성령이 강림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산은 계시, 하나님의 임재, 경배와 종말론적 완성을 상징하는데, 이 모든 것은 마태가 제시하는 선생이신 예수님 때문에,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기 시작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이야기의 전개 예루살렘 입성에 있어서 성취에 대한 마태의 관심은, 스가랴 9장 9-10절의 예언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겸손한 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갈등의 전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성경을 성취하며 이스라엘의 영웅의 특징을 모두 갖춘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저자와 그 대상 청중이 유대교에 깊이 물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선생의 고난 - 수난,마태복음 26-27장 마태복음에서 수난기사는 예수님의 신분을 강조하는 그의 임재의 수단이다. 마가의 수난기사는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이 되지만, 마태의 그것은 기독론의 절정이다.4. 짐지고 나르는 자 -누가복음의 예수님-힘센 황소 - 상징과 의미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상징은 황소이다. 황소는 집 안에서 기르는 동물 가운데 왕 같은 존재였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에 의하여 희생제물로서 죄의 짐을 지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누가의 초상화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성전의 황소와 마구간 -유아기와 시작,누가복음 1장-4장13절 황소는 만능 일꾼같은 짐승이었기 때문에 누가가 예수님의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는 보편적인 구원과 이어지는 내용이며 성전과 마구간에 등장하는 황소에 대한 이야기는 이 복음서의 핵심주제들을 소개하고 있는것이다.소는 천천히 긴 여행을 한다. -누가복음의 문체와 구조 누가는 사건을 차례대로 기록한다.누가복음의 구조는 지리적인 차원에서 세심하게 구성되었다. 누가복음의 황소는 목표를 향하여 매우 신중하게 움직인다. 누가는 상징화된 산건의 흐름을 통하여 구약의 주제들과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에 대한 암시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상속자임을 입증하고 있다.황소 ,소떼, 소몰이꾼들 -누가의 인물묘사 복음서 이야기에는 세 부류의 핵심 주역(主役)들이 있다. 예수님 자신, 그의 제자들, 그리고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누가는 하나님을 ‘나의 구주’라고 부르 또한 최고의 끝맺음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모든 주제들은 종합된다. 이제 이방인을 위한 빛이요 계시이신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예언했던것과 같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며 역사와 지리라는 누가의 장기적인 안목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데, 그 메시지는 우리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한분이 계시다는 것이다.5. 높이 나는 독수리 -요한복음의 예수님 -독수리의 놀라운 시력 - 상징과 의미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독수리이며, 저자 요한은 독수리 발톱에 움텨잡힌 채 주님에의해 높이 들려 나르는 환상가다. 주님은 우리의 젊음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며 독수리는 순간속도를 의미하기도 하며 심판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높은 전망 -서문과 시작 , 1장 1-51절 요한은 수직적 예수님이 만물 위에 존재하여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실제 이름을 마지막까지, 즉 그가 모세보다 훨씬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와 헬라 문화 양쪽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칭호인 ‘말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이야기는 창조와 재창조를 결합하고 있다. 시공(時空)을 초월해 하나님의 높이에까지 치솟아 오른 후 요한의 서문은 갑자기 급강하해 땅으로 내려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신적인 높이와 우주적인 규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줄거리(예수님의 사명)는 동일하다. 우주의 그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 독수리는, 다른 사람들이 비판하는 동안, 민첩하게 움직여 나가면서 사람들을 그 날개 아래로 불러모은다.공중을 나는 독수리 길 -문체와 구조 요한은 예수 님의 사역이야기를 기본적으로 공관복음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시 자신만의 주제들과 어휘,그리고 연대기를 사용하여 독특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구조는 예수님의 사역과 수난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요한복음에서의 시간은 ‘지금’
    인문/어학| 2004.11.03| 9페이지| 2,000원| 조회(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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