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德王知幾三事第二十七德曼.[一作万.]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 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取殺之. 百濟將軍亐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兵一千三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 王無恙時. 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 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 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 也.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蓋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 眞德, 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 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贍星臺.1. 모란꽃이야기선덕 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어느 해, 중국 당나라 태종이 자주색, 붉은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 그 꽃은 신라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어서 진평왕은 덕만 공주 (선덕여왕)를 불러 그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덕만 공주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신하들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덕만 공주에게 물었다."꽃에 향기가 없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제 말이 의심되면 뜰에다 심어서 확인해 보십시요."신하들은 그 씨앗을 궁궐 뜰에 심었다. 얼마 후 자주색, 붉은색, 흰색의 모란꽃이 궁궐 뜰 가득히 곱게 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란꽃은 꽃이 다 질 때까지도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신하들은 덕만 공주의 말대로 되자, 모란꽃이 다 진 어느 날 공주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다."어떻게 그림만 보고 향기가 없을 거라는 걸 미리 아셨습니까?"공주가 이르길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당나라 임금이 내가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2. 개구리이야기어느 겨울날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 4일 동안이나 울어댄 일이 있었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께 고한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명을 뽑아 속히 서교로 나아가 여근곡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으니 당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의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 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밑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고 활로 쏘아 죽였다. 또 후속부대 1천 3백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를 않았다.나중에 산하들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개구리는 노(怒)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병화(兵火)를 의미하는 것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성을, 여자는 음양(陰陽)으로 보면 음인데, 그 빛깔은 백색(白色)이다. 백색은 방위로 치자면 서(西)쪽이다. 그래서 적병이 서쪽에 침범한 것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무찌를 줄 알았다.”라고 하였다.백제 군사가 숨어있었다는 바로 그 여근곡이란 묘하게 생긴 곳이 경주시 건천읍 신평2리에 있다. 건천과 아화 들판 남쪽인데 주사산(朱砂山), 또는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산의 북쪽 비탈로 부산성(富山城) 아래가 된다. 지방 사람들은 점잖은 말로 소산(소山 우리 나라에서 만든 한자로 ’여근을 말함)이라고 부른다.조선 시대에는 경주에 부임해 오는 고급 관리들이 이 앞으로 지나오는 것을 꺼려하여 영천에서 시팃재를 넘어 안강을 거쳐왔다가 퇴임해 갈 때는 그 모양새나 한번 보자하고 구경하고 가기도 했다.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 점필제 김종직은 이 여근곡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옅은 골짝이니 적병 어이 숨으랴,옥문이라 천년을 두고 희롱하는 이름이여.백성들 '지기삼사(知幾三事)' 다투어 일컥어공연히 장상(將相)들이 길을 피해 가게 하네.3.죽음 예언죽을 때는 자기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라는 절이 창건(創建) 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전설이다.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도利天) 가운데 장사하라”선덕여왕(善德女王)이 아무런 병도 앓지 않을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자도리천이 어디옵니까?”하고 물었다.낭산 남쪽이니라”하고 대답하였다.부왕 진평왕(眞平王)이 50년이 넘도록 왕위에 계시다가 아들없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총명하고 덕이 있는 맏공주 덕만(德曼 혹은 德萬)을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붙였으니, 서기 632년이었다. 16년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살이를 슬기롭게 꾸려나가며 역사에 남을 큰 일들을 하다가 647년 정월 초 여드렛날 돌아가시니 유언에 따라 낭산 남쪽 등성이에 장사지냈는데, 지금도 왕의 능은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옴 의 일대기전기학에 있어서 옴의 법칙 으로 알려진 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옴은 1789년 독일에 에를랑겐 에서 태어났다.그는 학비가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에서 수학 교사가 되었다.1911년 대학에 돌아와 학위를 취득하여 모교의 강사가 되었다.1913년에는 밤베르크, 1917년에는 쾰른의 수학 교사가 되었다.이 무렵 그는 프랑스의 수학자 프리에가 쓴 열에 관한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껴 전류도 (두 점 사이를 흐르는 열의 흐름은 그 두 점 사이의 온도차와 전도율에 비례한다.) 에 대해 공부한다.그 후 1826년 그는 2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전류에 관한 포괄적인 법칙을 제공해서 전기 전도율의 역수가 저항이다. 따라서 두 점 사이를 흐르는 전류는 그 두 점 사이의 전위 차에 비례하고 전기 저항에 반비례한다 라고 하는 옴의 법칙(I=V/R)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1827년에는 갈바니 전류의 수학적 연구 를 발표하여 연역적 수학으로 제시하였다. 즉 전류는 전위 차에 비례하며 도선의 손실은 전압, 시간, 길이에 비례하고 접촉 물체는 일정한 전압 차를 갖는다. 고 하는 기본 법칙을 도출하였다. 이것은 그때 당시 G.T 페이너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함수 관계를 도출하는 실험이나 연역적인 수학 이론이 당시의 독일 학자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의 노트에 따르면 옴의 법칙에 통하는 최초의 실험을 1926년 1월 8일에 했다.실험은 먼저 지름이 일정하고(약 1.85mm),길이가 약 5 Cm 내지 330 mm 인 동선 8가닥을 준비하였다.열전 쌍의 두 끝의 온도차, 즉 전압을 같게 한 경우에는 동선의 길이를 길게 하면 길게 할수록 비틀림 저울의 흔들림, 즉 전류의 세기가 작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동선의 길이를 길게 할수록 전기저항이 커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옴의 법칙을 암시하는 실험이었다. 같은달의 11일과 15일에도 동선의 굵기를 바꿔 실험하였고, 또 동선을 황동선으로 바꿔 동일한 실험을 하여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이렇게 해서 출판된 것이 갈바니 전류의 수학적 연구 이다이 저서에서 그는 실험 결과를i=a----- (i:전류 x:금속선의 길이 a,b:상수)(b+x)이식에서 x를 크게 하면 할수록 i는 작아 지므로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일치한다. 금속선의 전기저항은 그 길이에 비례하므로 x를 금속선의 전기저항으로 생각해도 된다. b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전지의 내부저항이다.a는 전지에 따른 전압이다.또 옴은 금속의 전기 전도율을 조사했는데 처음에 구리와 아연의 볼타전지를 써서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기전력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베를린 대학의 교수인 포겐도르프(1796-1877)가 제벡의 열전 쌍을 사용하도록 권했다. 그 덕택에 전압이 안정되고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그는 비스무트(Bi)와 구리를 조합시킨 열전 쌍을 만들어 그 한 끝을 얼음이 든 물, 나머지 한 끝을 끓고 있는 물안에 넣었다. 이 경우, 양끝의 온도는 각각 0℃및 100℃ 가된다. 뜨거운 물의 온도를 가감함으로써 열전 쌍의 두 끝을 도선으로 연결하여 그 도선을 흐르는 전류를 옴은 비틀림 저울을 사용하여 측정하였다.1820년 티르스테드가 발견한 전류의 자기 작용에 관한 법칙 에 따르면, 전류로 부터 어떤 거리에 놓여진 자침은, 전류의 세기에 비례한 크기의 힘을 받아, 그것에 대응한 각도만큼 흔들린다.이 경우의 자침의 흔들림 혹은 그것에 대응한 전류에 의한 힘의 크기를 재는데 옴은 비틀림 저울을 사용한 것이다. 비틀림 저울에서는 위쪽 끝을 고정시킨 실의 아래쪽 끝에 자침을 단다. 흔들린 자침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려면 실의 위쪽 끝을 어떤 각도만큼 비틀어 주어야 한다.이 비틀림의 각도를 재면, 자침에 작용하는 전류로부터의 힘,즉 전류의 세기를 결정할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비틀림 저울의 원리인 것이다.이 비틀림 저울을 사용하여 1785년에 프랑스의 물리 학자 쿨롱(C.A.de Coulomb:1736-1806)이 전기력에 대한 쿨롱의 법칙 을 발견하였고, 또 1789년에는 앞에서 말한 영국의 캐번디시가 `만유인력 상수'를 측정하였다.옴은 처음에 여러 가지 금속의 저항 또는 전기 전도율을 비교하는 실험을 하였다. 1821년에 데이비가 도선의 전기 전도율이 단면 적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 열이나 전기의 흐름의 경우에는 단면 적을 크게 하면 할수록, 또 길이를 짧게 하면 할 수록 저항이 작아지므로 이것은 합당한 결과였다. 그 뒤에 옴은 같은 금속선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길이와 단면적이 비례하는 경우에 저항이 같아진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확인하였다. 이 것은 전기 전도율이 단면 적에 비례하고 길이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전기저항은 길이에 비례하고, 단면적에 반비례한다는 것이 된다.
모차르트의 일생...연 보* 1756년 : 1월 27일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에서 탄생.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안나 마리아(페르틀) 부부의 일곱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남아버지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였고 1757년 궁정 작곡가 칭호를 얻었으며, 음악 교육자인 동시에 [바이올린 교본]을 쓰기도 했다.* 1761년 : 최초의 작품 [미누에트](KV1) 작곡됨. 요한 에른스트 에벨를린의 [지기스문투 스]에 처음으로 출연* 1762년 : 아버지와 5년 손위 누나인 난네를과 뮌헨, 빈 연주 여행함* 1763년 : 가족과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루드비히스브르크, 슈바이칭겐, 하이델베르크, 마인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이 곳에서 열네살이였던 괴테가 모차르트의 연주 를 듣는다.), 코블렌츠, 쾰른, 아헨, 브뤼셀, 파리를 여행한다. 최초의 소나타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가 나옴* 1764년 : 계속해서 런던 여행.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만남. [런던 음악 노트]* 1765년 : 계속해서 헤이그를 여행함. 3개의 첫 [교향곡]이 나오고 계속해서 [바이올린 소나타]가 씌어짐.* 1767년 : 종교 징슈필 [제1계의 의무](3월 12일, 잘츠부르크). 라틴어 학교 오페라 [아폴 로와 히야신스](5월 13일, 잘츠부르크). 아버지, 난네를과 함께 빈을 여행. 프 란츠 1세의 위촉으로 [가짜 아가씨]작곡. 잠시 올뮈츠에 체류하며 천연두를 앓 음.* 1768년 :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 작곡. 잘츠부르크로 귀향.* 1769년 : 오페라 부파 [가짜 아가씨](5월 1일,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콘서트 마스터가 됨. 12월, 아버지와 제1차 이탈리아 여행.* 1770년 : 밀라노에 체류.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만남. 볼로냐에서 파드레 마르티 니와 만남. 계속해서 파두아와 로마 여행. 교황 클레멘스 14세에게 황금 박차 기사 훈장을 받음. 계속해서 나폴리에서 조반니 파이지엘로를 만남. 다시 로마, 볼로냐(필하머니 협회회원이 됨) 밀라노로 감. 오페라 세리아 [폰토 왕, 미트리 다테](12월 26일, 밀라노). 로디에서 최초의 현악 4중주(KV80) 작곡.* 1771년 : 8월, 아버지와 제2차 이탈리아 여행 떠남. 요한 아돌프 하세와 만남.오라토리오 [해방된 베툴리아] 작곡* 1772년 : 극적 세레나데 [시피오네의 꿈] 작곡(콜로레도 백작의 잘츠부르크 대주교 취임 식 축하곡). 유급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됨. 10월 아버지와 제3회 이탈리아 여 행. 음악극 [루치오 실라]완성(12월 26일, 밀라노).* 1773년 : 현악 4중주, 교향곡,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디베르티노멘, [세레나데]작곡게블러의 연극 [이집트의 왕, 타모스] 무대음악 작곡.* 1775년 : 오페라 부파 [사랑의 꽃다발](1월 13일, 뮌헨). 음악극 [목자의 왕](4월 23일, 잘츠부르크). [기악 음악들]과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 1776년 : [피아노 협주곡], [세레나데](하프너 세레나데외 다수), 디베르티멘토, 교회 소 나타, 미사곡 작곡.* 1777년 : 협주곡, 디베르티노멘토, 교회 음악 작곡. 잘츠부르크 궁정의 직위를 사직함.알로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지며 후에 아내가 된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 와도 만남.* 1779년 : 잘츠부르크의 대교구의 일을 다시 맡고 콘서트 마스터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됨. 오케스트라 작품과 교회음악(대관식 미사 등)작곡. 미완 오페라 [차이 데]작곡* 1780년 : [이도메네오] 작업 시작. 11월, 뮌헨 여행* 1781년 : 오페라 세리아 [이도메네오]완성(1월 29일, 뮌헨). 추기경의 명으로 빈을 여행 함. 추기경과 사이가 벌어져 빈으로 감. 이후 몇 년간 빈에서 사적, 공적 연주 생활을 함.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경연. [후궁으로부터의 도피] 작곡 시작. 기악 음악들도 작곡.* 1782년 : 징슈필 [후궁으로부터의 도피](7월 16일, 빈). 기악 음악들(하프너 교향곡외 다 수) 작곡.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8월 4일)* 1783년 : 미사 c단조, 리츠 교향곡 작곡. 미완 오페라 [카이로의 거위], [속은 사랑] 작 곡.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의 탄생과 죽음.* 1784년 : 아들 카를 토마스의 탄생. 피아노 협주곡, 무곡들 작곡.* 1785년 : 오라토리오 [회개하는 다윗](3월 13일, 빈). [피가로의 결혼] 작곡 시작. 피아 노 협주곡 , 피아노 음악, 현악 4중주, 프리메이슨 음악 작곡.* 1786년 : 음악 부수 희극 [무대 감독](2월 7일, 빈) 작곡.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 혼](5월 1일, 빈). 프라하 교향곡 작곡. 아들 요한 레오폴트 탄생과 죽음.* 1787년 : 1월, 콘스탄체와 프라하 여행. 빈으로 돌아옴. [실내악](Eine Kleine Nachtmusik-작은 소야곡 등 작곡.) 아버지의 죽음(5월 28일). 궁정 작곡가 로 임명됨. 딸 테레지아 탄생. 10월, 제2차 프라하 여행. 드라마 지오코소 [돈 조반니] 작곡(10월 29일, 프라하). 빈으로 돌아옴.* 1788년 : 딸 테레지아 사망. 최후의 세 교향곡 E b, g, c(주피터 교향곡) 작곡. 실내악 작 곡.* 1789년 : [코지 판 투테] 작곡. 클라리넷 5중주, 헨델 편곡 작품 작곡.딸 안나의 탄생과 사망.* 1790년 : 오페라 부파 [코지 판 투테](1월 26일, 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레오포 트 2세의 대관식에 참여.* 1791년 : 아들 요한 크사버 볼프강의 탄생. 최후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오페라 세리아 [티토의 클레멘차](9월 6일, 프라하). 오페라 [마적](9월 30일, 빈).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클라리넷 협주곡], [미완 레퀴엠].12월 5일 빈에서 사망함.작품세계세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여섯살 때 피아노용 미뉴에트를, 여덟살 때 교향곡을 작곡했 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모차르트는 '신동'이라는 찬사로도 부족한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 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그의 자식 7남매중 막내인 볼 프강과 넷째인 누이 난넬만 능력 있는 음악가로 장성하고 나머지 5명은 어린 시절 사망했다. 병 약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35년 10개월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 았다. 그 무렵 빈 남성 평균 수명이 30세를 약간 넘었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는 그가 요절했다 고는 볼 수 없겠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를 따라 불편한 교통 수단으로 유럽 여러 나라 를 장기 여행한 것이 그의 수명을 단축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어릴 때부터 연주 여행을 많이 다닌 모차르트는 여행지마다 새 지식과 작곡 기법을 습득하며 다 녔다. 그리고 이탈리아 적인 명랑함과 독일 적인 건강한 화성을 익힘과 동시에 고전파 시대의 중 심이 될 만한 기량을 배웠던 것이다. 그후 고향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와 궁정 악단의 악장으로 있었던 그는 25세 때 빈으로 옮긴 후 죽을 때까지 가난과 싸우며 10년을 그곳에서 활약했다.첼로용 독주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음악 분야에 걸작을 남긴 모차르트는 항상 열정이 넘치고 무 슨 일에나 푹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으며 감수성이 유난히 풍부했다고 한다. 특히 음악에 몰두하 면 다른 감각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 듯 했다는 것이 주위의 이야기이다.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심에 찬 느낌을 잘 표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독차지했다. 또한 그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음악을 만드 는 창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의 에센스'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고 풍부한 그의 선율은 녹음 기술이 없던 당시의 음악 애호가들을 애타게 만들기도 했다고.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양한 멜로디 를 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물정 모르고 아름답기 만한 음악을 만들던 모차르트 의 음악에도 밑바닥에는 애수가 흐르고 있었다.모차르트의 음악은 하이든의 그것과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숨어 있는 천재를 알아보는 재능은 부족했는지 1785년 이루어진 베토벤과의 극적인 대면 에서 그는 베토벤의 천재성을 몰라줄 정도로 매정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이같은 모차르트에게 몹 시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모차르트는 죽기 3년전부터 창작열이 폭발이라도 한 듯 최대 걸작들을 써내기 시작한다. 짧은 시일에 놀랄 만한 작품들을 발표하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명성은 드디어 높아졌으나 빈곤은 그의 생활을 점점 더 괴롭혔다. 평생 한 눈 안 팔고 작곡에만 매달렸지만, 그 대가로 받는 것이 너무 나도 적었던 그는 빈의 귀족들의 인색함에 의해 죽음의 문턱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결국 1795 년 모차르트는 35세가 되던 해에 오페라 마술 피리 를 작곡하던 중 몹시 건강을 해쳤다. 그리 고 병고와 빈곤 속에 있는 그에게 레퀴엠 의 작곡을 의뢰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고 가엾은 모 차르트는 그를 '죽음의 사자'라고 여기며 슬픔 속에서 작곡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것이 완성되기 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완전히 펼쳐 보지도 못하고 아깝게 세상을 떠 난 그였지만 인류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남겨진 1,000여곡의 곡에 의해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코지 판 투테 를 보고......처음 대하는 오페라 공연이라 기대를 하고 봤습니다. 비록 스크린이었지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음과 말이 계속 반복 되니까 슬슬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럴때 마다 약간의 재미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 덕분에 졸지는 않게 했습니다.코지 판 투테 여자는 다 그래 제목에서부터 느낄수 있듯이 아마도 이내용은 정절을 지켜야 할 여자가 원래의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그런 내용일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