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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 평가B괜찮아요
    Ⅰ. 서언『로마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독자 여러분, 이것을 다 읽고 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나의 친구 가 되었습니까?”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으나 마키아벨리즘 으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독하게 비열한’사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시오노 나나미의 마지막 말이 그것을 단편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흔히 권모술수의 창시자, 부도덕의 교사자로서 마키아벨리를 칭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를 부도덕의 교사로 인식되게 한 것은 그의 정치 사상을 카드린 드 메디치 등의 후세 사람들이 실제 정치권력 행사에 적용, 악용한 탓이 컸다. 물론 『군주론』등 그의 저작이 스스로 부정적 평가의 원인을 제공하기고 있기도 하며 실제로 부도덕한 교훈을 다소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한편 그는 『로마사론』이나 『피렌체의 역사』를 집필함으로써 역사가로써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실주의적 사상을 역사인식에도 적용시키어 역사서술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역사를 정치적인 요소만을 고려하여 해석,악용하려 했다는 혹평 또한 받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정치 사상가로, 역사가로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현실주의 사상가로 끊임없는 논란을 제공하고 있는 인물이다.그렇다면 과연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사상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현실주의적 사상은 어떠한 시대적 영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본고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탄생하기까지의 시대상황을 근저로 하여 사상가로서의 마키아벨리를 정치 사상과 역사가로서의 마키아벨리의 역사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시대배경한 사상은 그것이 나온 시대적 상황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바꾸어 말하로 승부를 걸어오는 통일국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고, 결국 밀라노, 피렌체 등의 도시국가는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프랑스의 지나친 세력확장에 위협을 느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의 견제로 샤를 8세의 진격은 중단되지만, 이제 이탈리아는 여러 강대국들의 세력 대결장이 되어버렸고,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도시국가는 지금까지 부만을 키웠을 뿐 그 부를 지켜낼 만한 힘을 키우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퀘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시공사, 2001) 신현승 역, 이후 M으로 표기함. 18p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대는 그가 스물아홉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관직에 오른 1498년부터일 것이다. 이때는 이미 프랑스의 침공으로 메디치가가 시민들로부터 추방되고(1494) 공화정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이자 산마르코의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8년 4월 초 반역죄로 체포되면서 정부 요직에 있던 사보나롤라 지지자들이 줄줄이 해임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공석이 된 제2서기관직에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마키아벨리가 6월 19일 대의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된다.원래 피렌체의 제2서기관직의 공식 임무는 피렌체 영토 내의 행정과 관련된 여러 서신들을 취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제1서기관에 소속된 여섯 비서중 한명 자격으로 공화국의 외교를 책임지는 10인 위원회의 업무를 겸해야 했다. 이것은 10인 위원회를 대신하여 외국에 나가 대사의 비서 역할을 하며 추가로 외교 문제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일이었다.{) M. 23p마키아벨리는 1500년 7월부터 이러한 외교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496년부터 진행된 피사와의 전쟁을 돕기 위해 급파된 프랑스 병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바람에 전쟁에서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에게 이번 전쟁결과가 피렌체의 허물이 아니라 것이었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등이 통일된 국가형태로 진전되어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지 못하고 분열만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분열된 도시국가로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르네상스를 이끈 이탈리아의 수준 높은 문화도, 거대한 부도 통일국가가 가진 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이탈리아가 강대국의 틈바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 자신이 통일국가를 이루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외부적으로 이탈리아의 통일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분열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탈리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염원했던 것이다.1510년 경 이탈리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교황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1511년 스페인과 신성동맹을 체결하더니 급기야 1512년 스페인 보병대가 프랑스 군을 밀라노 너머까지 몰아내고 피렌체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어 메디치가가 다시 도시로 재입성 했고 얼마 후 공화국은 와해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그 해 11월 7일에 공식적으로 서기관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년간 피렌체 영내 감금과 1천 플로린이라는 엄청난 보석금을 선고받는다. 또한 1513년 2월에는 비록 혐의가 풀리기는 했으나 반역이라는 혐의를 받게되기도 한다.{) M. 42∼43p마키아벨리는 이후 공직 생활에서 멀어졌으며 다시 공직생활에 복귀하기 위해 1513년 『군주론』을 집필, 메디치가에 헌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이후 그는 15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활동에 전념하게 된다.Ⅲ. 마키아벨리의 역사사상1) 르네상스 시대 역사관의 변화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운동 시기는 역사서술에 대한 강한 자극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극은 특히 자치 도시들이 발달해 있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강했다. 이들 도시들은 당시 당면하고 있었던 정치적, 지역적 상황에 대한 자체의 지역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곧도 했다. 그 중 마키아벨리가 본격적인 역사가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으로는 단연 『피렌체의 역사』를 꼽을 수 있다. 이는 그가 후일에 교황 클레멘스 7세(Klwmens Ⅶ)가 되었던 피렌체 대학의 학자이자 주교로부터 위탁을 받고 1520년에 착수하여 1525년에 8권으로 완성시킨 후 1532년에 출판했다.{) 이상신, 앞의 글, 170p이 과정에서 그는 비록 위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였고, 수사학적인 서술과 연대기적 서술형식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구성을 시도하고자 하였다.『피렌체의 역사』에서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인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첫째, 피렌체의 과거와 현재를 부패와 쇠퇴의 역사라고 보고 그 주요한 원인으로 크리스트 교를 배격하였다. 더욱이 이는 당시 기독교적 세계관에 회의하는 르네상스인들의 전반적인 경향이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서술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역사를 서술하는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적, 설명적인 역사서술을 하고자 했다. 마키아벨리 또한 그 예외는 아니어서 비단 『피렌체의 역사』뿐 아니라 『군주론』과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번째 열 권에 관한 논고』(이하 『논고』)에서도 일관되게 크리스트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특히 『피렌체의 역사』에서 종교의식의 부패를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나아가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미덕 대신 시민적 미덕을 찬양하고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려는 경향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둘째, 피렌체사를 두 개의 대립된 흐름으로 파악하며 그러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역사인식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피렌체의 역사를 사회 계급간의 대립과 정치당파간의 대립의 흐름과 헌법개혁에 관한 요구와 투쟁의 흐름 두 가지로 파악하였다{) M.Ritter, Die Entwicklung der Geschichtswissenschaft, s.138. 그에 의하면, 13세기 전반에는 구 귀족계급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했었고. 13세기 후반에는 고등 시민계급이 등장하여 귀족계급에 대해 정치권력성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에도 인간의 본성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곽차섭, '마키아벨리 역사사상', (서강대학교대학원, 1984), 65p개별적인 인간들은 변하기 쉽고 그들의 습성 또한 다양하지만 ,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다양성중에도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곽차섭, 앞의 글, 66p이는 나아가 역사를 보다 더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려하였는데 이것의 결실이 곧 국가 이성 의 발견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 파악이 가지는 실용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반면 그는 이러한 비젼 제시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은 소극적 형태에 그치며 역사 연구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론적인 발전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역사를 너무도 과도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나머지 사실을 과도하게 정치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려는 과욕을 범하였다. 이는 그가 역사를 생과 사,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영광과 몰락의 교체와 순환으로 이해하는 순환사상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순환 사관은 결국 역사를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라 생각함으로써 역사를 파악하려는 데에 대한 궁극적 목적의 소실로 인하여 역사적 개념이 결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Ⅳ.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1)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적 사고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국가이성 에 관한 것이다. 혹자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번째 열 권에 관한 논고』 (이하 『논고』)와 『군주론』의 상이함을 지적하며 마키아벨리를 일관성을 갖지 못한 정치철학자로 여기기도 하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전 저작을 통하여 국가이성 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으며 『군주론』과 『논고』 역시 이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이성적 관점에서 이전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고찰한 마키아벨리는 정치체제에 집착하지 않고 강력하고였다.
    사회과학| 2002.05.20| 8페이지| 1,000원| 조회(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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