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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세의 음악
    『황야의 이리』- 불멸의 음악이 신 구 (전북대)I. 머리말1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에 헤세는 스스로를 "대홍수로 인해 오늘의 대도시의 기계화된 세계 한가운데로 표류하는 한 마리의 태고세계의 동물"과 같다고 할 정도로 헤세는 문명의 극단적인 아웃사이더였다. 이 시기에 헤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삶의 최악의 위기에 서있게 된다. 동시에 헤세의 삶의 위기는 음악의 위기를 가져왔다. 헤세는 이 시대의 날카로운 音과 예술적인 것의 우주적 고요함 사이의 끔찍한 모순을 고통스럽게 느껴야만 했다. 그는 모든 예술을 거부했다. 그러나 헤세가 전쟁기간 동안 과거에 삶의 정당성과 위로를 주었던 음악을 완전히 잊고 있었을 때, 바로 모차르트 음악이 헤세에게 구원의 음악이 되었다. 모차르트 음악은 위기에 서있는 헤세에게 유머의 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유머는 불멸인의 세계로 넘어서는 다리이며 '단계'다. 모차르트 음악과 헤세와의 이러한 관계가『황야의 이리』에 잘 나타나 있다.『황야의 이리』는 1차 세계대전과 헤세의 정신질환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위기를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서전이면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기이한 작품 ein Unikum"이다.『황야의 이리』에서 묘사된 할러 Haller의 생활환경이나 습관, 째즈음악과 고전음악의 관계, 심리분석, 시민사회의 속성, 지적 정신분열로 인한 생활의 불규칙성과 심한 알콜 중독, 마술극장의 환상세계로의 몰입 등은 헤세 삶의 고백과 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이 소설, 즉 허구세계가 된 것이다.헤세는『황야의 이리』에서 문명의 아웃사이더인 할러를 통해서 이 시대의 문명과 시민사회의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헤세는 이 시대의 문명의 살인적인 면을 반영한 째즈음악을 파멸의 음악이라고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헨델 음악을 "기관지에서 나오는 가래와 갈기갈기 씹은 껌과의 혼합물"을 내뱉는 것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이 시대의 기계문명을 상당히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는 인간성의 위대함을 感知했다.『돈 죠바니 Don Giovanni』와『피가로 Figaro』에서는 "우리의 정열과 방황과 구원 가능성의 영원하고 거룩한 肖像"을 발견했다. 특히『돈 죠바니』는 인간에 의해서 작곡된 최후의 위대한 음악이라고 했다. 할러가 가장 좋아한『마술피리 Die Zauberfloete』는 불멸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어서 마음의 고향과 평화를 찾지 못해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헤세에게 정신의 안식처가 되었다.일요일 오후의 마술피리 Die Zauberfloete am Sonntagnachmittag(...)오페라의 밤에 앉자매우 좋아하는 음을 듣고 감동되어기뻐 어찌할 줄 몰라 눈물이 나의 뺨 위로 흐른다.한때 고향이었고 지금은 낯설음이 된불멸의 아름다움이마술을 걸듯 인사를 한다.(...)타미노 Tamino의 마술피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동경의 槍이 되어 자기의 가슴을 찌를 때, 그 고통이 자기를 축복해 주는 '예술의 전율'이 되어 끝내 뺨에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마술피리 입장권을 갖고서 Mit der Eintrittskarte zur Zauberfloete」라는 시에서는 마술피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경이로움을 체험해 영혼 속에서 신비스러움에 봉사하는 동방순례자가 된다고 했다.(...)여러 해 동안 여러 번이 연주를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매번 경이로움을 새로이 체험해마음속으로 조용히 맹세를 새로이 한다.그 맹세는 나를 일원으로 너희 쇠사슬로 묶어,지구상 어느 곳에나 고향을 갖지 않고,항상 새로이 은밀한 봉사자를 찾는태초의 모임 안에 동방순례자가 된다.헤세에게 동방은 '영혼의 고향, 도처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없는 곳,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된 곳' 즉 마술적 시공을 지닌 동화의 세계이다.모차르트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헤세도 동화를 수단으로 하여 영원한 가치를 반영한 오페라를 썼으나, 정신과 자연의 양극을 영롱한 무지개처럼 완전하게 연결하려고 시도했던 그 오페라가 이미『마술피리』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헤세는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3부로 된 소나타형식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헤세는 그의 소설『데미안』, 『싯다르타』,『황야의 이리』,『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소나타형식으로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황야의 이리』를 소나타형식으로 분석해 본다.헤세는『황야의 이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모든 탄생은 一體에서의 분리를 의미하며, 아울러 제한, 신으로부터의 격리 그리고 고뇌에 찬 새로운 형성을 의미한다. 一體로의 귀환, 고뇌에 찬 개성화의 지양, 즉 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영혼을 확대시켜 一體를 다시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은 정신과 자연 사이의 좁고 위험한 다리에 불과하다. 가장 깊은 내면의 운명은 인간을 정신으로, 신으로 내몰고, 그리고 가장 깊은 내면의 동경은 인간을 자연으로, 어머니로 다시 끌어당긴다.이 말은 인간이 태어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의 정신적 발전과정을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도의 운동이나 헤세의 인간형성 3단계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아울러 소나타형식의 발전과정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데미안』과『싯다르타』와 같이 구원적 신앙체험에 이르는 진정한 인간형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황야의 이리』는 헤세도 그 주제가 소나타와 같이 樂曲的으로 구성되었다고 한 편지에 언급했다. 헤세가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은 어느 면에서는 소나타 양식을 엄격하게 지키는 듯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치올코프스키 Thdodore Zilkowski는 미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작품인『황야의 이리』를 산문 소나타로 보고 있다.『황야의 이리』는 형식상「편집자의 서문 Vorwort des Herausgebers」,「하리 할러의 수기 Harry Hallers Aufzeichenungen」,「황야의 이리에 대한 논문 Tractat vom Steppenwolf」으로 구성되었고, 내용적으로는 역시 소나타형식으로 구성되었다.제시부에 해당되는「편집자의 서문」은 전형적인 현대시민의 시각으로 이리인간의 세계와 시민사회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놓았으며, 을 했습니다. 그 곡이 끝났을 때 그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 바로 앉더니 일어서서 가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냥 앉아 마지막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곡은 레거의 변주곡이었습니다. 그 음악은 다른 것보다 길고 지루한 듯 했습니다. 황야의 이리도 역시 처음에는 주의 깊고 좋은 듯 귀를 기울이더니, 거부하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음악에 빠졌으나 이번에는 행복하고 꿈꾸는 듯한 표정이 아니라 슬픈 나머지 화난 표정을 지었습니다.끝으로 편집자는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교차될 때만 인간의 삶은 실제적인 고통이 되고 지옥이 된다."라는 할러의 말을 회상하면서 할러의 수기를 소개한다. 지옥을 가로지르는 할러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이 인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처럼 구원을 위한 고통이다. 다시 말해서 소나타 두 주제의 갈등에서 오는 불협화음은 신적인 구원의 화음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헤세도 할러의 수기는 고통과 위기를 기술하고 있지만 초개성적이며 초시간적인 명랑한 신앙의 세계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절망한 자의 책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자의 책이라고 했다.할러가 남긴 수기는 이 작품의 주부이며 소나타형식의 발전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할러는 소나타의 두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잘 정돈된 시민세계와 무질서한 예술가 세계라는 두 세계를 동시에 호흡하며 산다.나는 나의 다락방 계단을 내려왔다. 그 계단은 오르기가 매우 힘든 낯선 세계의 계단이며, 철두철미하게 시민적이고 청소가 잘 되어 있는 깨끗한 계단이다. 지극히 예의 바른 세 세대가 사는 그 집의 지붕 밑에 나는 나의 은신처를 가지고 있다. (...) 나는 그 계단에서 조용함, 질서, 청결함, 예의, 온순함의 냄새를 맡기 좋아한다. 시민적인 것을 증오하면서 그 냄새는 항상 나에게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이 끝나는 내 방의 문지방을 기꺼이 넘어선다. 거기에는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 담배꽁초와 포도주 병이 있으며,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끔찍했으며 황폐했다.공간적으로 할러가 사는 집의 계늘한 微光을 응시했다. 그로부터 흐르는 냉기는 살을 에이는 듯했으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놀랄만큼 울려 퍼져나갔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나는 옛날 언젠가 한번 행복과 같은 이러한 두려움의 전율을 느껴보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한번 이 음악을 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래, 모차르트에서, 불멸의 인간에서.헤르미네는 바로 모든 대립이 지양되어 신적 화음을 이룬 아름다운 소나타의 내면공간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창녀의 모습을 한 聖女, 즉 정신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동시에 지닌 완성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파블로도 역시 정신적, 관능적 음악의 대표자이다. 현실세계에서 섹스폰을 연주하는 째즈음악가인 그는 마술극장에서는 모차르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유머의 세계를 인식하여 고전음악과 재즈음악의 대립을 드높은 차원에서 조화시킨 '숨은 聖人'이다.할러 영혼의 인도자인 헤르미네는 정신세계로의 몰두로 인해 질식 직전에 있는 할러에게 자아의 지나친 집착에서 오는 고립된 개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 준다. 그 길은 개성의 해체를 가져다주는 열광성과 야수성을 띤 디오니소스 축제인 것이다. 그녀는 할러에게 우선 유머학교의 기초과정으로 춤과 웃음, 즉 삶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노발리스와 장 파울이 있는 방에는 째즈음악이 울리면서 할러는 정신과 삶 사이의 갈등을 웃음으로 화해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진지성과 깊이가 없다했던 째즈음악이 지금 그에게는 인간을 미치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음악이 된 것이다. 계속해서 그녀는 정신세계에는 물론 할러가 무시했던 자연세계, 관능의 세계에도 신적 흔적이 있다는 것을 그녀의 분신인 마리아를 통해 가르친다. 싯다르타가 카말라를 통하여 감각의 세계로 인도되듯, 할러는 마리아를 통하여 에로스 신에 의해서 마력에 걸리듯이 감각적인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추억의 샘이 솟아오른다. 그 조각 조각난 추억의 영상은 파괴할 수 없는 삶의 가치이며 재산이자 전설이므로 고상한 것이며 영원히 반짝이는 별의 영광이자 '신의 파편 goettliches Fragme선다.
    예체능| 2001.05.28| 15페이지| 1,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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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크제국 평가C아쉬워요
    프랑크 왕국(王國) (Frankenreich)옛 게르만인 가운데 서게르만 계통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 (486-987)으로 부족국가에서 발전하여 차츰 다른 여러 게르만 부족을 정복, 통합하여 피레네산맥에서 엘베강에 이르는 서유럽 대부분을 포함하는 나라를 이루었다.4세기 이후 훈족에 의하여 촉발된 게르만민족대이동 뒤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문화적·정치적 통일을 실현한 프랑크왕국은 서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통일국가로서 이후 중세의 여러 제도 및 그리스도교 문화의 모체가 되었다.프랑크왕국의 역사는 그 지배왕조에 의하여 5세기말-8세기 중엽의 메로빙거왕조와 8세기 중엽-10세기말의 카롤링거왕조로 나뉜다프랑크족은 라인강 중·하류 동쪽 기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을 비롯하여 많은 소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집단이었다.4세기초 이래 라인강 하구에서 북브라반트에 거주하는 살리족, 쾰른을 중심으로 한 라인강유역의 리부아리족, 헨센지방을 중심으로 한 상(上) 프랑크족의 3대부족이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살리족은 5세기초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 스헬데강 유역까지 퍼졌다.이 무렵 브뤼셀 부근에 있던 데스파르궁의 소왕(小王) 메로빙거가가 대두하였다.이 가문에서 나온 클로비스 1세는 살리족을 통일하고 이어 리부아리족과 상프랑크족을 병합하여 5세기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메로빙거왕조는 486년 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인 세력을 멸망시켰으며, 500년 무렵에는 부르군트왕국·서고트왕국을 쳐서 갈리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또한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교황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그가 죽은 뒤 프랑크의 관습인 분할상속원칙에 따라 왕국은 네 아들에게 나뉘어졌다.형제는 대외적으로 협력하여 영토를 확장시켰으나, 각 분할국 사이의 이해 대립이 왕국 내분의 원인이 되어 분열과 재통일을 거듭하면서 실권을 잃어가게 되었다.메로빙거왕조는 명목상 751년까지 존속하였으나 실권은 각 분국(分國)의 궁재(宮宰)가 장악하였고, 특히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세습한 카롤링거가가 크게 대두하였강을 건너 톡산드리아로 진출하였다. 당시 프랑크족은 많은 소국(小國)으로 나누어져, 각각 소왕(小王)에게 지배되고 있었는데, 브뤼셀 부근에 있던 데스파르굼의 왕 클로디오가 세력을 떨쳐 메로빙거조의 최초의 왕이 되었다.그의 아들이 왕조 이름의 근원이 된 메로베츠이다. 또 그의 아들 힐데리히 1세 때, 이미 살리족의 통일은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던 것 같다. 481년, 그 뒤를 이은 아들 클로비스 1세는 살리족 뿐만 아니라 리브라족·카마비족까지도 병합하여서 프랑크왕국을 건립하였으며, 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인 세력을 멸망시키고(486),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왕국을 쳐 알라만족을 정복, 갈리아 남부에서 남서독일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교황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그러나 그의 사망(511) 후, 왕국은 4명의 아들인 토이데리히 1세·클로도머·힐데베르트 1세·클로타어 1세 사이에서 분할되었다.형제는 대외적으로는 협력하여 부르군트왕국을 멸망시키고 서고트왕국을 피레네산맥 너머로 몰아내어 바이에른족·튀링겐족을 복속시키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분국(分國) 상호간의 내분을 되풀이하였다.그 후 클로타어 1세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그의 사망(561) 후에는 또 다시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어, 특히 아우스트라시아분국왕(分國王) 지게베르트 1세와 네우스트리아 분국왕 힐페리히 1세와의 대립은 전국적인 내란으로까지 발전하여, 힐페리히의 아들 클로타어 2세에 의해 재통일(613)되었다고는 하나 국내 호족(豪族)들의 세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고, 실권은 호족층의 두령(頭領)인 각 분국의 궁재(宮宰)의 손에 장악되었다.특히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카롤링거가의 대두가 현저하여 피핀(中) 때에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장악했고, 그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의 싸움(732)에서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격파하여, 사실상의 프랑크왕국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이같은 기반 위에서 그의 아들 피핀(小)은 쿠데타를 감행, 최후의 메로빙거 국왕 힐데리왕조의 군주로 511년부터 프랑크 왕국의 일부인 파리 왕국을 다스렸고, 부르군트 왕국을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다.힐데베르트는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다 사이에서 태어났다.그는 511년에 아버지의 왕국이 분할되었을 때, 솜 강에서 브르타뉴까지 뻗어 있는 프랑스 북서부 지방을 받았다.520년대에 형 클로도미르의 어린 상속자들이 모두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는 오를레앙 왕국의 일부를 원래 영토와 합쳤고, 534년에는 동생 클로타르 1세와 함께 부르고뉴 왕국의 일부를 정복했으며, 537년에는 조약에 따라 프로방스 지방을 얻었다.힐데베르트는 당시 론 강에서 피레네 산맥 사이의 해안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서고트족과 531년에 한 차례 싸운 뒤, 542년에는 클로타르와 동맹을 맺고 스페인 본토를 침략했다. 이 원정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스페인 순교자인 성 빈켄티우스의 겉옷을 갖고 돌아와 파리에 신축한 건물에 안치했다.이 건물은 생제르맹데프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힐데베르트는 아들을 남기지 못했으므로 그가 죽자 클로타르가 그의 땅을 모두 차지했다.클로타르 1세 Chlotar I (500(?)-561)재위:511-561수아송의 왕(511~),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왕(558~)이며 프랑크 왕국의 패권을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로비스 1세의 막내 아들로 511년 아버지가 왕국을 분할할 때, 근대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에 위치한 잘리어 프랑크 왕국의 옛 중심지대를 차지했다.524년 형 클로도미르가 죽자, 조카들을 죽이고 힐데베르트 1세와 테오도리히 1세 등 두 형들과 함께 오를레앙 왕국을 나누어가졌다. 555, 558년 각각 테오도리히 1세의 손자 테오데발트와 힐데베르트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마침내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그가 벌인 주요군사행동으로는 523년(힐데베르트와 클로도미르와 함께)과 532~534년(힐데베르트와 함께 수행하여 마침내 프랑크족의 지배를 관철시켰음)의 부르고뉴에 대한 것과, 532년(테오도리히와 함께)과 542년(힐데베르트와 을 이어받은 다고베르트 2세 대신 자신의 아들 힐데베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이 찬탈 사건은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리모알트와 힐데베르트 부자가 결국 처형당한 뒤, 클로비스 2세는 둘째 아들을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삼았다.힐데리히는 다고베르트 2세의 어머니인 힘네힐디스와 궁정 재상 불포알트의 통제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렸다.클로비스 2세가 죽자 네우스트리아의 왕위는 힐데리히의 형인 클로타르 3세가 계승했으나, 그가 673년에 죽자,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은 힐데리히의 동생인 테오도리히 3세를 클로타르의 후계자로 맞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왕위계승 문제에 대해 에브로인에게서 아무 의논도 받지 못한 네우스트리아의 유력자들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불포알트와 힐데리히 2세에게 호소하고, 재빨리 테오도리히를 왕위에서 몰아냈다.이렇게 하여 힐데리히는 아우스트라시아만이 아니라 네우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클로타르 2세 Chlotar II (584-629)재위:584-629메로빙거 왕조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613년부터는 프랑크 왕국을 단독으로 통치했다.584년 아버지 힐페리히 1세가 암살되었을 때 갓난아기였으나, 어머니 프레데군트의 권력과 부르고뉴의 왕이던 숙부 군트람의 비호로 왕위계승권을 보장받았다.592년 사촌인 아우스트라시아-부르고뉴의 힐데베르트 2세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596년에는 오히려 힐데베르트의 어린 후계자 테오데베르트 2세와 테오도리히 2세에게서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599(또는 600)년 영토의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 다시 빼앗겼다.613년 이 두 사람이 모두 죽자, 테오도리히의 어린 아들 지게베르트 2세의 증조모 브룬힐트에 대한 아우스트라시아인의 적개심을 이용하여 클로타르는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고뉴를 모두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 영토를 재통일했다. 그는 지게베르트와 브룬힐트를 모두 죽였다. 클로타르는 614년 10월 파리 종교회의에서 성직자와의 관계를 규정한 광범위한 칙령을 발표, 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오랜 소요상태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되었으나(676), 3년 후에 살해당했다.그후 프랑크 왕국의 모든 영토는 명목상으로만 통합되어 테오도리히 3세가 지배했다.클로비스 3세 Clovis III (682-695)재위:691-695테오도리히 3세의 아들인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실권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재상인 카롤링거 가문의 페팽 2세(헤르스탈의 페팽)가 장악했다.힐페리히 2세 Chilperich II (675-721)재위:719-720네우스트리아의 왕이며 한때 프랑크 왕국의 전역을 지배했다. 힐데리히 2세의 아들인 듯한 힐페리히는 원래 수도원에서 살며 다니엘이란 종교적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715년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다.힐페리히를 좌지우지하던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라겐프리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힐페리히는 아르덴 지방의 앙블레브(716)와 캉브레 남쪽의 비네(717)에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한 뒤인 719년 아키텐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719년 아우스트라시아의 실권 없던 왕 클로타르 4세가 죽자 카를 마르텔은 자신의 권력을 법적으로 정당화시켜줄 메로빙거 왕조 출신 사람을 찾아 힐페리히를 복위시켰다. 이로써 힐페리히는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었다.힐데리히 3세 Childerich III재위:743-751메로빙거왕조의 마지막 왕이고 이름 뿐이었던 그는 피핀에게 폐위당했다. 이후 프랑크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탄생하였다.카롤링거 왕조 (王朝) (Carolingian dynasty)750-887년에 서유럽을 통치한 프랑크 왕조로서 이 명칭은 가장 유명한 샤를마뉴(카를) 대제를 비롯해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샤를(카를)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에 기인한다.계보는 메츠 주교 아르눌프 및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의 대호족 대(大)피핀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아르눌프가(家) 또는 피핀가라고도 부른다.아르눌프의 아들 안제기젤과 대피핀의 딸 베거 사이에 출생한 중(中)피핀이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어 카롤링거가 부흥의 기였다.
    인문/어학| 2000.11.15| 13페이지| 1,000원| 조회(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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