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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과목] 스크린쿼터폐지 아직 시기상조
    스크린쿼터제 폐지 아직 시기상조국제정치경제의 관점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보호무역정책이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제라는 형태로 등장한 것은 1966년 영화법 제2차 개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 개정된 영화법은 외국영화 수입추천권을 부여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제작해야 했던 국산영화를 15편에서 2편으로 완화하는 한편, “외국영화와의 상영비율에 따라 국산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라는 스크린쿼터제를 도입하여 실질적인 국산영화에 대한 보호정책을 실행했다.한국영화 의무상영을 골자로 한 스크린쿼터제는 이후 3차례의 개정과정을 통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스크린쿼터제를 통한 국산영화의 보호책은 강온의 변화를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관점에서 볼 때, 강력한 보호무역장벽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산업의 지원제도로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최소한 1990년대 중반전까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19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의 추세와 수입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제작 비율은 위와 같은 부정적 대답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적 증거가 될 수 있다.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1970년대 말까지 30%대의 완만한 변화와 1980년대 초반 갑작스런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중반이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초반 15%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수입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제작비율을 보면 그 주요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985년 한미영화협상의 결과로 진행된 영화시장개방으로 수입영화가 급증하게 되자 그 반대급부로 국산영화의 제작비율은 감소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의 침체는 급작스런 영화산업에 있어서 무역자유화정책이 가져온 결과라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게 된다.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영화의 침체라는 명제가 모두 영화시장 개방의 결과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그러나 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영화산업이 국제영화무역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해방 이후 오랫동안 한국영화가 외화수입이라는 이권의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영화제작자들은 영화 수익을 공정한 계약관행을 통해 회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본공급의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한편, 흥행업자들은 돈벌이가 되지 않는 한국영화를 적극적으로 상영하거나 마케팅할 동기구조를 지니지 못하였기에 결국 제작부문에 자본이 투자되지 않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화수입을 통한 흥행수입은 이들에게 주요한 자본공급원이 되었다.1963년 1차로 개정된 영화법은 외국영화 수입추천권을 국산영화제작, 수출편수 및 수상실적과 연계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국산영화 제작업자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예산의 저질작품 양산의 원인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추세는 70년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잠시 부활되었던 외화수입업을 폐지시키고 외화수입권을 영화제작업자에게 부여하며 영화제작업을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꾼 1973년 4차 영화법 개정은 비록 외화의 흥행수익을 통해 한국영화 제작으로 인해 생기는 적자를 메워 주어 영화업의 영세성을 개선시켜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오히려 개인 프로덕션의 영화제작은 완전히 중단되고 영화업계가 주로 외화수입에 의존하는 구조가 심화되었다.결국, 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영화산업의 구조는 제작사가 이익이 확실한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위해 국산영화를 제작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국산영화에 대한 재투자가 없었다. 아울러, 제작자금을 흥행자본에 의존하는 터였기에 거대자본 형성은 기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국이었기에 결국 유통/흥행자본만 비대해지고 제작사의 영세성은 지속되는 구조적 모순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대체 오락매체인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과 맞물려 19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기를 기록했던 것이다.1980년대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국제영화무역은 1985년 한미영화협상의 결정으로 단행된 영화시장개방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영화시장의 개방은 한마디로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이 시기 한국경제는 1986년 9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됨에 따라 자유주의 국제경제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아래 미국 영화수출협회(MPEAA)는 두 차례의 한미영화협상을 통해 시장개방압력을 행사했는데, 1985년 제1차 한미영화협상에서는 1) 외국영화사의 국내영화업 허용, 2) 수입편수 쿼터제 및 외화수입가격 상한선 폐지, 3) 국산영화 진흥기금 자진납부제 폐지 등이 합의되었다. 이어 개최된 1988년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는 1) 외화수입심의용 영화프린트 통관 추천제도 폐지, 2) 외화수입 프린트 벌수 제한 폐지, 3) 공연윤리위원회 외화 심의절차 간소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두 차례에 걸친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은 시장개방에 대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한국영화산업은 외화수입에 치중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한국영화의 제작 경쟁력 확보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왔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두 차례에 걸친 한미영화협상의 결과 외국영화사들의 현지법인 설립과 직접 수입 배급이 가능해졌고, 1988년 3월 할리우드의 해외공동 배급회사인 UIP-CIC의 직접배급영화가 국내에서 최초로 상영되었다. 이후 1993년까지 5개의 직배사가 등록했는데, 이러한 직배사의 출현은 한국영화의 제작편수를 감소시키고 아울러 외국영화의 수입편수를 증가시켰는데, 1984년 81:25라는 한국영화편수 대 외국영화수입편수의 관계는 1988년 110:264로 역전되었으며,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영화시장개방이 영화시장에 대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투입되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 영화시장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정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물론, 영화사의 증대나 신진세력의 출현이라는 영화시장개방이 가져온 일정정도의 긍정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러한 긍정적 효과는 후에 논술하듯 1990년대 초반 이후 등장한 대기업자본의 등장과 맞물려 한국영화의 토대를 형성했다고 보는 시각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따라서 1986년 이후부터 본격화된 한국영화시장의 개방은 한편으로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 감소와 제작편수의 상대적 감소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다른 한편, 외화수입액의 증대와 로열티 송금액의 증대를 가져왔는데, 예를 들면, 외화수입총액의 경우 1984년 4,852,329 달러에 불과하던 수입총액이 1990년 약 27,100,859 달러로 상승했으며, 로열티송금의 경우도 1988년까지 최대 153,091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1990년에는 12,165,884 달러로 증가해 심각한 국부유출을 가져왔다 하겠다.결론적으로 볼 때 다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영화산업이 이제 본격적인 근대화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중반 이후 대기업자본/금융자본의 본격적인 영화산업으로의 진출과 새로운 인력의 결합 결과 나타난 영화산업의 합리화가 이제 시작단계라는 것이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도 유치산업단계에서는 그 산업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요소인 경우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시행했고, 한국의 경우도 유사한 사례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둘째, 1998/9년부터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한국영화가 이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어 시장개방에도 무난히 버틸 것으로 예상하나 이는 한국영화산업의 발전단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으로 보이는 시장점유율만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 40%를 상회한 것이 이제 불과 5년이 안되며, 여기에 스크린쿼터 축소 내지 폐지는 이러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 2004.11.29| 5페이지| 1,000원| 조회(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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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부시재선과 우리나라
    Ⅰ. 부시 집권 2기 전망부시 대통령의 재선 성공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당장은 호재이나 통상압력 고조, 북핵 등으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악재에 적지 않아 판단이 쉽지 않다. 미국 대선이라는 불확실성이 제거됐고 이로 인해 미국이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점은 분명 호재다. 특히 '불확실성이 경제의 가장 큰 적'이라는 측면에서 케리 후보의 빠른 패배선언으로 부시 재선을 확정 시켜준 것은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부시의 경기부양책은 미국경제 호조로 한국 수출에도 반사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흑자가 확대되고 있어 미국의 통상압력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대북 문제에 대한 부시의 강경자세도 심각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외국인이 한국 투자를 망설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요인이 북한 문제라는 점에서 미국의 대북 압력은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문제가 불거져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연결되면 침체 중에 있는 한국경제의 회복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삼성경제 연구소에서는 부시 집권 2기에 정책들을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부시 1기와 2기 정부의 예상되는 정책 변황1기 부시 정부2기 부시 정부외교/안보? 일방주의? 동맹국간의 마찰? 영국, 일본 중시? 수정된 일방주의한반도 정책? 다자간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 6자협상 강화경제정책? 소득세 인하 등 감세정책? 감세정책 강화? 자본/저축에 대한 세율 인하통상정책? 철강 등에 대한 무역제재? 시장개방 압력 강화? TRA 추진과 DDA협상 병행환율정책? 외국의 유연한 환율정책 촉구? 약한 달러 기조 지속모든 정책들이 중요하고 관심의 대상들이다. 이중 미국의 경제(통상정책과 환율 정책 포함)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알아보자.집권2기의 부시행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의 내용과 영향을 산업연구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내다보았다. 부시행정부의 주요 경제정책 내용 및 영향주 요 내 용영 향재정정책기본방침감세확대를 통한경제성장세 유지? 투자와 소비 촉진으로대미 수출 환경 개선주요내용? 고용창출법에 따라 해외순익에대한 법인세를 1년간 35%에서5.25%로 인하 적용? 감세정책의 항구화? 2010년까지 재정적자 절반축소(국가안보외 정부지출 억제)경쟁력강화정책기본방침제조업의 경쟁력 강화? 전통산업에서의글로벌 경쟁심화? 재정적자 축소와 제조업 경쟁력강화를 위한 달러화 약세로수출 채산성 악화 우려? 중동지역에 대한 강경일변도정책과 달러화 약세 정책에 따른고유가 지속으로 원가 부담 가중주요내용? 전통제조업과 대기업의 역할 중시(기술혁신과 비용절감 등 지원)? 근로자 교육훈련과고등교육 강화? 아웃소싱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규제완화 등을 통한친기업환경 조성? 교토협약 비준 거부통상정책기본방침자유 무역 확산이미 국익에 유리? 감세정책 영구화 등 경기부양책운용으로 대미 수출 증가세가지속 될 전망이나 증가율은둔화될 예상(미주자유무역지대 출범시대미주 수출여건 악화)(한미 FTA의 적극적인 추진을통한 교역자유화)주요내용? WTO 도하라운드와자유무역협정(FTA)적극추진? 상황에 따라서는 자국산업을보호(세이프가드 발동 등)Ⅱ. 한?미 통상관계□ 한?미 통상관계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지적재산권, 자동차 교역,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은 지속될 전망- 부시 행정부의 자유무역주의 기조는 2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GDP의 5%를 넘는 경상수지 적자누적과 산업계의 불만해소 등을 위한 조치들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 한?미간 주요 통상 이슈) >주요이슈내 용자동차교역불균형○ 미국은 자동차 교역 불균형에 대한 불만 제기- 한미 양국 자동차 교역 불균형의 원인을한국의 수입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한국의 복잡한 조세제도 등을 지목지적재산권○ USTR은 2004년 1월 우리나라를 “우선감시대상국(PWL: Priority Watch List)"으로 상향조정- 미국은 한국의 음반레코드, 서적 및 비디오-DVD 복제 등에대한 우려를 표시농산물○ 농산물 개방 및 농산물 교역 자유화는 부시행정부의 주요 정책- 미국은 한국이 대부분의 수입농산물에 고관세를 부과하고있으며, 까다로운 수입기준, 라벨링 부착의무(특히, 유전자변형식품) 및 쌀과 오렌지에 대한 시장접근제한 등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FTA 측면에서는 안보와 연계된 통상정책을 지속하여 동남아, 중동 국가와의 FTA 협상이 확대될 전망)-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우리나라는 역차별의 가능성 증대○ 한?미 FTA는 스크린쿼터 문제해소를 통한 BIT 협정의 체결, 농산물 문제가 선결 과제임)Ⅲ.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 부시의 재선은 우리 수출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큼- 금년 중 대미 수출은 미국경제의 성장세에 힘입어 1~9월중 29.2% 증가하여 지난 1999년 이후 가장 높은 증가세 시현
    경영/경제| 2004.11.29| 5페이지| 1,000원| 조회(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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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제] 오직 호주제 폐지뿐인가? 평가A좋아요
    오직 호주제 폐지뿐인가?서 론호주제 폐지 관련법{) 정부가 제출한 민법개정안(정부안)은 현재 국회 법사위 소위에 상정된 상태. 주내용은 ▦호주 규정 삭제 ▦가족 범위 확대 ▦결혼한 여자의 남편가(家) 입적 원리 삭제 ▦자녀의 아버지가(家) 입적 원리 및 부성 강제주의 삭제 ▦호주승계순위 조항 삭제 등이 올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폐지 당론을 정하고, 폐지에 소극적이던 한나라당이 최근 소속 의원 설문 결과 권고적 찬성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실상 호주제 폐지가 가시화 되는 현 상황에서 필히 호주제를 폐지하는 것만이 이 능사인가 또한 여성부가 전력을 다해 이루어낸 호주제 페지가 얼마나 큰 득실이 있을것인가에 대한 전반전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1. 호주제란 무엇인가?{) 제778조[호주의 정의] 일가의 계통을 계승한 자, 분가한 자 또는 기타 사유로 인하여 일가를 창립 하거나 부흥한 자는 호주가 된다.호주제란 사실은 대한민국 민법(民法)의 친족편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호적은 그 편제방식에 따라 가족을 단위로, 혹은 개인의 단위로 편제할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을 한 호적에 편제하는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그런 가족동적을 편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기준자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호주이고 이러한 가족동적 편제를 위해 호주를 두는 신분공시제도가 바로 호주제이다.{) 이하 절차법으로는 호적법이 있다.원래 가족제도라고 부르는것이 맞지만, 언제부터인가 호주제로 불리기 시작했다.호주제는 광복후 수차례의 민법개정으로 일제의 잔재를 쓸어내고 남녀불평등한 부분을 수정해왔다. 민법개정, 특히 90년대 민법개정을 거치지 않은 과거의 호주제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1. 호주에게 전근대적인 권리의무가 있다. 가족의 살곳을 지정하는 거소지정권, 강제분가권등, 실효성도 없고 전근대적이기만 한 권리가 있다.2. 호주상속은 강제적으로 장남자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호주는 남계혈통을 중심으로 대습상속이 되었고, 남성중심의 호주상는 여성이나 다른 차남, 삼남보다 많은 재산이 주어졌고, 땅도 주어졌다.3. 이혼시에 아이는 무조건 아버지가 키우도록 되어있었다. 여성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과거의 호주제의 문제점논자인 본인 역시 이러한 민법개정전의 과거의 호주제에는 절대 반대한다.하지만, 현행호주제에는 호주에게 아무런 가부장적이거나 전근대적인 권한이 없으며, 호주에 의해 억압받는일에 대해서는 호주제 폐지단체의 주장을 100% 받아들일수는 없는 입장이다.{) 호주제 폐지단체에서 내세우는 '피해사례'라는것은 70%정도는 이혼시 친권양육권문제로 아예 호주 제와 관계가 없는것이고, 나머지도 현재해결책이 있거나 수정이면 해결되는 것이다.물론, 현재의 호주제에 여성들이 기분나빠할 부분, 불편한 부분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호주제폐지가 쉽지도 않을 뿐더라 폐지되더라도 그것으로 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2. 호주제 폐지만으로 가능한가?(1) 호주제는 일제의 잔재?가족제도가 일제때 근대적인 법으로 성문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족을 하나의 호적에 편제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고, 戶首(戶主)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 수백년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성씨제도 역시 본관, 부부별성제{) 부부가 서로 다른성씨를 쓰고 결혼해도 바뀌지 않는것등 중국이나 일본등 주위 국가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호주라는 명칭자체에 대한 논란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또한 호주에게 주어졌던 잡다한 권리의무같이 일제가 변질시킨부분은, 거듭된 가족법 개정을 통해서 삭제해버린 상태이다. 현재의 호주제는 일제시대의 호주제와는 분명히 다른것이며, 그 기본틀인 가족동적, 호적의 기준자존재등은 수백년도 더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호주제를 일제의 잔재로 몰아 폐지하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또한 단지 일본의 잔재이기 때문에 없애야한다면 우리나라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친일파부터 쓸어버린 후에 이러한 문제를 손대도 늦지 않는다고 논자는 생각한다.(2) 호주제는 부계혈통 우선주의를 강조해 남아선호를 조장한다?여성단체에서 자주 말하는 주장이, 호주제가 남아선호사상과 여아낙태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90년부터 주장해온 그 당시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서 남자아이를 낳을때까지 아이를 3명 4명씩 낳았지만 지금의 평균출산율 1.15명이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만 낳아 키우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시대에 해당되지도 않고 또다른 반론인 첫째를 낳을때부터 성감별을 해서 여아를 낙태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호주제가 '있음에도' 남아선호사상이 완화되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여자 짝꿍 덜 모자라요" 초등생 성비 불균형 완화[중앙일보 2004-02-10 21:18]서울시내 초등학교의 '남초(男超)'현상이 점점 완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0일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시내 초등학교 취학 신입생 10만8천6백32명(예비모집 참석 아동수) 중 남학생이 5만6천5백9명으로 여학생 5만2천1백23명보다 4천3백86명이 많았다. 남자 10명당 여자 9.2명인 셈이다.이들이 시내 초등학교에 고루 배치된다고 가정하면 1개반 정원(약 40명)당 남학생 1~2명 가량이 여학생과 짝을 이루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성비의 불균형은 해마다 좁혀져 남녀 균형을 맞춰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남학생 10명당 여학생 비율은 올해 2학년에 올라가는 학생의 경우 9.17명, 3학년 9.04명, 4학년 8.81명, 5학년 8.73명, 6학년 8.93명으로 조사됐다. 학년이 낮아질수록 남녀 성비가 점점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는 것이다.시교육청 관계자는 "초등학생들의 남녀 성비 격차가 해마다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며 "두 자녀 이상을 많이 두지 않는데다 남아선호 사상도 갈수록 옅어지고 있는 것이 주원인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인구 감소와 출산기피로 인한 취학 아동수는 여전히 해 감소하고 있다.1999년 초등학교 신입생수는 13만4천3백90명이었지만 2000년 12만9천3백19명, 2001년 12만7천6백24명, 2003년 11만8천75명에 이어 올해엔 10만8천6백32명으로 매년 감소해왔다.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3) 호주제는 여성을 남성의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남성을 중심으로 호주를 승계하도록 한 조항 자체가 이미 남녀를 차별이다?과연 호주와 가족은 종속된 관계일까? 이것은 간단하게 아니라는것이 증명된다. 성인은 누구나 호주의 동의가 전혀 필요없이 분가할 수 있다. 물론 미성년자도 친권자의 동의를 얻어 분가할 수 있다. 심지어 금치산자까지도 진단서로 의사능력을 인정받고 분가해서 호주의 호적에서 나갈수 있다. 호주는 가족구성원의 호적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흔히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호주가 호적을 파내겠다고 한다면 이건 아무런 법적근거가 없는 헛소리이다.그렇다면 자기마음대로 끊고싶으면 끊는관계를 어떻게 종속관계 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호주승계순위는 폐지가 아니더라도 남녀 구분없이 수정한다든가, 임의승계조항을 추가한다든가 하는 방안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남녀차별의 문제 때문에 이 자체에 문제성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4) 이혼한 어머니와 살면서도 호적은 아버지 밑에 있는 자녀의 혼란{) 자녀의 부가 입적원리, 재혼한 어머니의 자녀가 새 아버지와 성이 달라서 받는 고통{) 부성 강제주의은 몽땅 호주제탓?이러한 사실이 모두 호주제 때문이라 하면 재이혼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 상황에서 재혼, 삼혼하는 때마다 성씨를 바꾼다면 그 아이의 정체성는 어떻게 되는것일까?또한 형제자매간 성씨가 달라지는 경우, 성씨를 변경시 친부모와의 관계는 어떻게되는것인가 하는 문제등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할것이고 재혼가정 자녀의 성씨문제는 이혼한 어머니와 살면서도 아버지밑에 호적이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재혼한 어머니의 자녀가 새 아버지와 성이 다르다고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어 나가는것훨씬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결국 성씨를 바꾸게 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땜질에 불과하는 것이다.(5) 부계성씨의 원칙은 엄연한 남녀차별?남녀의 근본적인 신체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부계성씨가 왜 생겨났을까..그것은 바로 신체의 구조상 어머니에 비해서 혈연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에 명확한 표식을 주기위해서라고 본다. 성씨를 인정한다면, 모계, 부계중 부계성씨를 쓰는 이유는 신체구조상 혈연관계가 취약한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를 감안할때, 모계와 부계를 놓고 본다면 부계가 합리적인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여성처럼 직접 아이를 배지 못하고, 낳지못하는 남성의 근본적인 신체구조를 감안하는 것이다.{민법 제844조제844조 (부의 친생자의 추정)1처가 혼인중에 포태한 자는 부의 자로 추정한다.2혼인성립의 날로부터 2백일후 또는 혼인관계 종료의 날로부터 3백일내에 출생한 자는 혼인중에 포태한 것으로 추정한다.판례"민법 제844조 제1항의 친생추정은 다른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 강한 추정이므로..."(대판 1997.2.25 96므1663)위 민법과 판례와 같이 혼인중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아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추정을 한다. 그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또한 재판을 통해서 뒤엎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친생추정-아내가 혼인중에 임신한 아이를 남편의 아이로 추정하는것.*추정-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일단 있는것으로 정해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는것. 그러나 당사자가 반 증을 들면 그 추정은 뒤엎어질수 있다.*간주-위에서 말한 추정과 달리, 반증으로 뒤엎을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는 너무나 확실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왜 미혼모는 아이가 태어났을때 아버지가 누구인지 적지 못할까?*왜 태어난 아이를 아버지의 아이로 '확정'이 아니고 '추정'을 할까?이것은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리적인 차이 때문이다. 둘중 하나를 원칙으로 삼는다고 할때, 모계보다는 부계를 원칙으로 두는것이 합리적이라는 것.
    사회과학| 2004.10.20| 6페이지| 1,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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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는종교가없다 평가A좋아요
    1. 서론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갖가지 토속신앙까지 여러 종류의 신들이 복잡할 정도로 많이 있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일본엔 크리스찬이 얼마나 있을까?’, ‘교회는 몇 개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일본에 크리스찬은 1%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보았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있는 것일까?’ 하는 계속되는 궁금증들과 함께 일본의 종교와 일본에서 성행하고 있는 엔기모노와 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일본에는 수많은 종교가 혼재되어 있어 다양한 종교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그들의 고유한 신도가 있고, 외부로부터 도입된 불교, 그리스도교가 있으며, 유교,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과 함께 독자적으로 자생한 제종교가 있다.일본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신도는 지금도 각 지역에 신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특히, 막부, 유신기에는 다수의 신도계 교단이 창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불교는 6세기 중반 경 일본에 처음으로 도입된 후 많은 종파를 형성하여 전국적으로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메이지시대 이후에도 불교교단이 계속 창설되었다.그 외에도 고대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유교와 도교는 제종교와 함께 민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그리스도교도 많은 교파가 전래되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슬람교 힌두교 등도 예외가 아니다.간단히 일본 종교인구의 신자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구 분신 자 수 (명)비 율신 도 계116,921,68454.1불 교 계87,480,87240.5그리스도계1,449,9890.7제 종 교10,131,0224.7계215,983,567100.0일본에는 크게 두 종교가 항상 지배적이었다. 그 두 종교는 신도와 불교인데, 신도는 순수한 일본의 종교이고, 불교는 중국에서처럼 외부에서 들여온 종교이다. 두 종교의 사이는 서로 복잡한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2. 일본의 종교1) 신 도(神道)신도는 일본 고유의 재래신앙으로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며, 때때로 이 가미들은 불교의 신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이러면서 두 종교는 점차 융합되어져갔다. 그래서 현재 일본에서 순수한 신도와 순수한 불교는 거의 드물게 되었다. 신도는 크게 나누어 신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신도와 막부 말기 이후에 창설된 교파신도, 신사나 교파처럼 종교단체를 결성하지 아니하고 가정이나 개인에 의하여 운영되는 민속신도로 구분할 수 있다.신사신도는 2차 세계대전 말까지 일본의 사실상 국교였다. 이 종교의 핵심은 천황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교리였다. 황제인 천황은 여신 아마데라스의 후손이다. 따라서 모든 일본인이 그녀의 신성한 의지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한다. 천황의 궁전은 곧 신사이다. 과거의 천황들의 무덤도 또한 신사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가적종교적 행사는 전설적인 신무천황에서부터 시작하는 유력한 천황들의 기념일과 연관되어 있다.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들은 팔백만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다채로우며 제신이 분명하지 않은 신사도 있다. 이러한 신사 가운데, 신궁(神宮)이라는 명칭은 황실과 관계되는 역대 천황을 모시는 신사를 말한다. 신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종교단체 중 최대의 것은 신사본청이다. 신사가 국가의 관리로부터 분리될 때, 3개의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종교 단체 결성을 추진하여 신사본청이 발족하였다.교파신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19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리에 있어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원시 의례의 흔적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산의 정상을 신들의 거주지로 여겨 숭배하는 산악신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불교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어떤 교파는 지식계층 중심이고, 어떤 교파는 대중 중심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의 하나는 1838년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그녀의 직계후손에 의해 내려오는 천리교라는 교파이다. 이 교파의 신자들은 신의 힘 또는 이성을 나타내는 천리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한다. 그들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종교의례를 행할 뿐 아니라 공공활동 대한 사상적 영향도 적다. 일본인들이 모시는 신들 가운데 가장 친숙한 신은 자기 집의 선조 혹은 혈통집단에서의 수호신인 우지가미와 또 살고 있는 지역, 토지의 신으로 우부스나가미이다. 이것들이 혈연, 지연을 상징하는 일본인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일본인이 예부터 즐기고 있는 마쯔리는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사의 제사이다. 그러므로 전국 어디에나 마쯔리가 있다 할 수 있다. 이 때 사람들은 신을 중심으로 하여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다.2) 불 교불교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538년, 조선의 백제로부터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이미 5세기에 대륙으로부터의 도래인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인도로부터 중국이라는 중앙집권국가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과 그 당시 일본이 중앙집권국가 확립의 시기였다는 것으로부터 진호(불교에 기초하여 독경과 수행의 힘으로 보호되는 국가)국가의 색체가 짙은 불교였다.일본 불교의 주요종파는 쇼토쿠태자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쇼토쿠태자 불교, 나라시대에 들어와 견당사에 의하여 당으로부터 수입된 학문불교인 나라불교, 천태종, 진언종과 슈겐도(일본 고래신앙이 불교, 도교, 샤머니즘 신도와 융합된 것)로 대표되는 귀족계급 중심의 헤이안 불교, 정토종, 정토진종 등 민중을 권하고자 하는 가마쿠라 불교 등이 있다6세기말부터 나라시대를 통해 불교는 천황가를 시작으로 유력 씨족에게 지지받으며 국교적 존재가 되었고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호류지를 시작으로 고후쿠지, 도다이지, 야쿠시지, 도쇼다이지 등 당시의 남겨진 구조로 최고의 목조건축으로서 1200~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불교는 일본에 처음으로 전해진 계통적인 사상체계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본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사상, 문화뿐만 아니라 불교는 건축, 금속공예, 게다가 의학, 농업기술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대명사였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문화문명은 그 이후 헤이안시대, 무로마치시대, 게다가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있어서는 항상 배워야하는 신문화, 신기술이었그러나 도쿠가와막부의 철저한 탄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도는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이후 일본으로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재 포교가 시작된 것은 막부 말경이다. 외국의 각 나라가 일본의 개국을 요구, 일본 내에 공관을 설치했다. 그와 함께 선교사의 일본 상륙이 시작되어 1862년에는 요코하마에 1865년에는 나가사키의 오우라에 천주장이 건립되었다.한편 프로테스탄트에서는 1859년에 미국감독교회(성공회계), 개혁파교회(칼뱅파계), 장로교회(칼뱅파계)로부터 선교사와 목사가 각각 나가사키, 가나가와에 상륙했다. 이들은 외국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전도와 포교를 하였으며, 1872년에는 요코하마에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일본 기독공회가 설립되었다.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일본 포교가 재개되었으나, 메이지 신정부는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여 메이지 원년에는 절지단아종문금제의 방문을 붙였다. 그러나 조약개정에 얽힌 국제여론 앞에 1873년에는 그리스도교 금제의 방문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방문의 철거는 그리스도교의 공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묵인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 각파의 포교활동이 한층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일본은 워낙 신도와 불교의 신앙이 강해 그리스도교의 포교가 어려운 실정이다.그렇다고 일본의 그리스도교 문제는 단순히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자의 수는 적지만 메이지 이후의 일본의 근대화에서 그리스도교 및 그 문화가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때때로 생활방식으로서 도덕으로서 윤리로서 일본인의 생활에 자리 잡고 있다.특히 여성교육과 중등교육에서 수행했던 역할이 크다. 오늘날도 미션스쿨은 약 800교를 헤아리고, 그 밖의 어떤 종교학교보다도 많다. 또한 뛰어난 사상가를 배출하였고, 사회사업의 분야에서도 그리스도교는 큰 힘을 행사했다. 그 인도주의는 사회주의운동에 관련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흐름을 만들었다.4) 제종교제종교 사람들도 있다.1989년 교단을 추종했던 변호사 일가족이 실종됨으로써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 아사하라쇼코가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독특한 선거활동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신자들은 코끼리모자를 쓰고 춤을 추거나 교조의 가면을 쓰거나 했다.교의 가운데 하나인 봐지라야나의 가르침을 보면,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악업을 쌓고 수명이 다해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은 살해한 사람과 살해된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보며, 이것은 살인마저도 선업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지극히 반사회적이며 범죄적인 사고라 하겠다.1992년에 모스크바 지부가 설립되었고, 1995년에는 지하철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신자수가 1만 여명이며, 20~30대 젊은이가 주를 이루고 있다.③ 행복의 과학1986년에 설립되어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신흥종교단체이다. 원시불교를 지향하고 다카하시신지를 교조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교조인 오카와류호는 도쿄대학 출신으로 일류회사에 근무했다. 이벤트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잘 파악해 책 출판과 강연회만으로 급성장하였다. 현재의 회원수는 약 1백 52만 명이라 한다.④ 예수의 방주1980년 예수의 방주 집단실종 수사 중이었던 경시청은 아타미에서 교조 센고쿠 예수 등 26명을 발견, 가족이 가출인 수색원을 낸 8명의 여성을 보호하였다. 젊은 여성들이 다수 입신하여 집단으로 도피행각을 계속했던 신자들은 센고쿠를 옷찬이라 부르며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육친인 가족들에 대한 불신에서 입신했다고 주장하고 있듯이, 가정의 붕괴가 이를 초래한 것이다. 성서를 배우는 공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⑤ 레유카이1919년 법화경신앙으로 결성, 도쿄에 거대한 회관을 갖고 수백만 신도들을 조직, 운영하고 있다. 릿쇼고세카이, 레유카이 모두 일본에서는 재가 불교라고 한다. 출가해서 심산유곡을 찾아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행복과 현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일본불교의 특징이다.레유카이의 교의는 니시다순조의 불소호념과 선조공양의 교의를 이어.
    사회과학| 2003.11.26| 11페이지| 1,000원| 조회(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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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경제]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경제 협력방안
    1. 變化하는 ASIA아시아는 1960년대 이후 고투자, 수출주도형 전략을 통해 중요한 경제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1960년대 일본의 경제발전, 70-80년대의 신흥공업국의 발전, 80년대 후반 이후 아세안의 부상으로 세계의 중요 경제지대로 성장했으며 현재는 일본이 선두에서 발전하고 있다.(1) 아시아 경제의 惡化1990년대말 아시아의 발전모델은 글로벌화에 대한 미숙한 대응, 역내 국가간의 경쟁으로 교역조건의 악화 등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a. 수출주도에 의한 실물부문의 발전과 금융 및 서비스산업의 발전 괴리가세계화 과정에서 문제 야기b. 아시아 국가의 수출주도형 발전이 동조적 산업구조와 수출구조를 야기해세계시장에서 교역조건의 악화를 초래c. 아시아의 경제위기 이후 과거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d. 아시아 발전의 선두에서 일본이 혁신능력의 고갈에 직면했고 장기불황으로 아시아의 시장 역할에 한계e. 수출주도형으로 역외시장에 공산품을 수출하는 신흥공업국과 아세안은 외부경제 환경에 과도한 영향을 받음f. 미국의 IT 경기퇴조로 인한 아시아 전체의 불황은 좋은 사례(2) 중국경제의 浮上일본 주도의 아시아 발전모델이 문제에 직면한 동안 중국은 고도성장 지속하고 있으며 21세기 아시아 경제구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될 전망이 나오고 있다.) http://www.seri.org/ 삼성경제연구소 자료 참조a. 중국은 70년대 말 이후 개혁과 개방을 통해 점진적으로 세계 체제로 편입하면서 비교우위가 있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확대하고 수출을 증대b. 2000년 기준 수출 2,492억 달러로 세계 7위이며 2001년 8월 기준으로는 세계 5위로 부상c. 중국의 90~2000년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13.6%, 세계 총수출에서 비중은 90년 1.8% 에서 2000년 4.0% 로 증가d. 90년대 후반기 수출증가율(연평균 10.9%) 을 지속한다면 2005년 중국의수출은 4,180억 달러 규모로 성장e. 다른 국가들도 90년대 후반기의 증가율을 유지할 세계 자원의 집중에 대한 아세안의 우려를 불식하고 공존한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것으로 오히려 생산과잉 상태의 중국 국유기업이 동남아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4) 한국- 對중국수출 및 중국시장진출의 확대중국시장의 개방 확대에 따라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 증가가 예상되고, 관세율인하 등 중국 수입시장의 개방 확대에 따른 대중 수출의 증가로 이어진다. 중국의 관세율 인하로 인한 대중국 수출의 직접적 증가분은 약 12-15억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이같은 수출 증가분은 한국 총수출액의 1% 미만이나 대중국 수출액의 7-10% 규모이고 동태적인 측면까지 고려한다면 중국의 성장 제고로 인한 수입증가와 투자활성화에 따른 수입증가 등 간접적 효과를 가지게 된다.또한 최근에는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및 중견기업들을 중심으로 대중국 투자가증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國內外 시장에서의 경합관계 심화국내시장에서는 가격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중국의 저부가가치 제품들의수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섬유, 의류, 신발, 완구 등 저가 소비재)특히 저가 중국산 농산물의 한국수입 급증으로 농업분야 타격 예상하고 있다.현재 중국시장에서의 사업은 세계적 선진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더욱 증가할 것이기에 기회의 확대 만큼 더욱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고 있고 중국시장이 머지않아세계시장으로 세계적 기업, 초일류 브랜드들과 경쟁하고 새로이 개방이 확대되는 첨단산업 분야나 서비스업종에서 우리 나라의 경쟁력은 다국적기업에 비해 하락세(5) 제3국 수출시장 : 중국제품과의 경쟁격화로 인한 수출 감소가 예상경쟁력이 제고되는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 심화로 인한 수출감소 효과가 있고 미국시자에서 중국상품에 의한 한국제품 구축현상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중국의 점유율 95년 6.1% → 2000년 8.2% 로 증가 추세·한국의 점유율 95년 3.3% → 2000년 2.3% 로 감소 추세) http://www.seri.org/db/ 삼성경제연구소 '중국경제의 방향' 자료 참조3. 중국은 우리의 선택인가(1) 중국도 부부간에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는 등 서구식 평등관계에 가깝다.) 90년대 중국경제와 2000년대 탐색 신원종譯 大宇出版社 자료 참조4. 우리경제에 대한 영향(1) 외국인 직접 투자의 전환중국의 부상으로 한국의 외국인투자 부진으로 이어질수 있다. 중국은 1990년대 개도국 중 최대의 외국인투자 유입국이다.- 1996-2000년 연평균 419억 달러 유입(개도국 전체의 21%)- 2000년 중국투자 408억 달러, 대아세안 투자 134억 달러) http://www.kiep.or.kr/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국경제 연구 자료 참조(2) 중국의 동남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최대 시장2000년부터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제2의 수출시장으로부상하고 있다. 대중수출비중 11.8%(2000)로 대일수출비중 11.1%를 상회하고 홍콩 의 대중수출비중은 40% 이상, 대일수출비중은 6%이다. 중국의 대아시아 수입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비중도 높아 지고 있다.총수입에서 차지하는 아시아비율은 중국이 42.7% 일본이 35.6%, 2010년이면 대부 분의 동남아국가의 대중수출이 대일수출 능가 중국의 높은 수입 흡수력를 체감하게 된다.(3) 경제 질서의 변화일본 중심의 아시아 경제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중국의 GDP가 일본의 GDP보다 적지만 영향력은 증대한다.중국 경제 향후 10여년간은 평균 8% 성장 가능하고 인구(10배), 성장률, 외국인직접투자 유입 등 높은 잠재력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지만 중 국을 잘 활용해야 할 처지이다.- 경기침체와 고령화로 저가의 중국제품 선호- 생산비 상승과 중국의 잠재력 때문에 대중 투자 증가(4) 아시아내 산업구조 조정 가속화일본과 신흥공업국(NICs)은 중국의 추격에 대응하기 위해 고도화 추진하고 있고 자국의 풀세트형 공업화로 일본이나 NICs의 제조업을 위협하고 있다. 제조업 고용 이 감소하고 실업 증가하고 있으며 산업구조 고도화를 추진하고 경쟁우위가 있는 산업에 집중하고 특히 고급가전, 자동차 등 평균20.8%79 95년은 13.8%소매물가상승률95년14.4%94년은 21.7%경제성장률91 95년 평균11.9%79 95년은 9.9%사기업체 비중80 95년0.5 26.3%국영기업 비중은 79년 77.6% 95년 30.9%로 축소고등학교 진학률95년48.3%한국은 95.5% 한중관계중국내 조선족 비중90년0.2%192만명중국방문 한국인수91 95년1만 5천 40만 7천명4년간 26.7배로 증가한국방문 중국인수91 95년4만 4천 8만 1천명4년간 1.8배로 증가한국의 대중국 무역액95년165억달러미국 일본 다음 3번째중국의 대한국 무역액95년170억달러일본 홍콩 미국 대만에 이어 5번째한국의 대중국 투자95년725건, 8억달러해외총투자건수의 56.4%,금액비중은 26.6%중국의 대한국 투자93 95년 합계106건, 2천 4백만달러연평균 11.7%(2) 한 중의 경제적 협력 방안a. 必要性경제적 지역주의와 세계적 개방체제가 공존하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경제는 각기 새로운 위협요인들에 부딪히고 있다고 본다. 우선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를 통한 경제협력 증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중국 가 보도했다고 한다.. 한국 중국 미국 등 아시아와 미주지역 18개국으로 이뤄진 아펙은 오는 2020년까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무역자유화를 달성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중국이 올해안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전망이 불투명함에 따라 당분간 무역기구보다는 아펙과의 경제관계에 대외무역정책의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하고 있어 중국이 올해중 무역기국에 가입할 가능성이 회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장기적으로 세계무역기구의 가입을 추진할 것이지만 아펙이라는 지역경제협력에 중점을 두어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중국이 아펙을 중시한다는 데 대해서는 반대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동북아 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데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고, 또 이를 위해 먼저 韓 中 간에 自由貿易協約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지역주의는 일정한 지역내 국가들이 협정을 매개로 상호의존 관계를 넓혀가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 유럽연합(EC),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지난해 1월 브라질의 주도아래 중남미지역에서 구성된 메르코서(Mercosur) 등이 그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협정은 흔히 역외국가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무역조치를 취하게 되며 역내교역비중은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의 화폐단일화 노력처럼 지역통합은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몇 개의 지역협정이 연합을 모색하는 등 지리적으로도 그 포괄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도 세계무역기구 이전에 나프타를 먼저 형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경제블럭별 역내교역 비중추이(단위:%)85년90년91년92년93년94년유럽연방53.559.259.761.159.960.4북미자유무역협정38.036.937.237.940.242.7이렇게 볼 때 중국과 한국은 각기 아펙이나 중미 등에 눈을 돌려 일시적으로 지역주의의 장벽을 극복하려 하기보다 먼저 韓 中 간에 自由貿易協約을 추진하여 동북아 경제협력체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b. 두만강지역 개발계획) Tume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의 경험동북아 경제협력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거나 차라리 다른 선택이 빠르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국가간에 이질성이 너무 크고 냉전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동북아의 경제협력에 대한 공동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엔개발계획(UNDP) 주도하에 추진되고 있는 두만강 개발계획은 동북아 경제협력의 좋은 사례이다.) 중국은 이미 UNDP 두만강개발계획을 깃발로 내세우면서도 중국-러시아 중국-북한간의 쌍무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김성훈. 1994, 99쪽두만강지역 개발계획(Tume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은 1990년 7월 중국의 길림성 장춘에서 열린 '동북아 경제기술발전 국제회의'라는 민간차원의 학술회의에서 처음
    경영/경제| 2003.06.06| 13페이지| 1,000원| 조회(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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