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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인물] 최충헌에 대하여 평가A좋아요
    {{◇ 최 충 헌 ◇{Ⅰ. 나는 왜 이 인물을 선정하게 되었는가?우선 고려사를 공부하다보니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을 지닌 최충헌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되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어떻게해서 왕까지도 폐위시킬정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왜 최충헌은 왕이 되지 못했는가하는 의문점도 들었다. 이러한 의문점들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이 인물을 선정하게 되었다.< 최충헌은 누구인가 >{본관 우봉(牛峰). 초명 난(鸞). 시호 경성(景成). 음보(蔭補)로 양온령(良令)이 되고, 1174년 (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다. 1196년 동생 충수(忠 粹)와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폐정(弊政)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 조(封事十條)를 왕에게 올렸다. 이어 왕의 측근을 몰아내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어사대 지사(御史臺知事)가 되었으며, 1197년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다.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자 창락궁(昌樂宮)에 유폐시킨 뒤 평량공(平凉公) 민 (旼:神宗)을 왕위에 앉히고 정국공신(靖國功臣) 삼한대광대중대부(三韓大匡大中大夫) 상장 군주국(上將軍柱國)이 되어 최씨 무단정권을 확립했다. 같은 해 딸을 태자(太子:熙宗)의 비(妃)로 만들려는 동생 충수와 대립, 충수를 죽이고 독재정권을 더욱 강화했다.1198년(신종 1)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을 토벌하고, 1199년 병부상서이부지사(兵部尙 書吏部知事)가 되어 군사권 ·인사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다시 김준거(金俊)의 난을 토 벌하고 1202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대위상주국(守大尉上柱國)이 되었다.이어 도방(都房)을 설치, 신변을 보호케 했으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이병부상서(吏兵部 尙書)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4년 신종 을 폐하고 태자(太子:熙宗)를 옹립,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수 태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의 아들로써 태어났으며로 외가 역시 외조인 유정선이 상장군까지 오른 무반 가문 출신의 인물이었다.최충헌은 송청의 딸을 아내로 삼아서 아들 {) 1219년 충헌이 죽자 추밀원 부사로 뒤를 이어 집권. 1222년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가 되었고,이 무렵 몽고와 대립. 1231년 몽고병이 침범소식이 전해지가 이듬해 강화 천도를 단행케 했으며, 이 공으로 진양후에 봉하여졌다. 이로부터 차츰 횡포가 심해지자 백성의 원망 의 대상이 되었다. 천도공신으로서 1262년 공신당의 벽상에 도형되었다.우와 향을 낳았고, 그는 다시 손홍윤의 아내 임씨를 강제로 아내로 삼아서 아들 성을 두었으며, 집권한 뒤에 다시 강종의 딸 왕씨와의 사이에서 구와 선사를 낳았다. 이렇듯 최충헌은 이복형제의 아들들이 많아서 자신의 뒤를 잇는 문제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충헌은 진평공 항(抗)의 조부이며, 의(誼)의 증조부이다.2. 최충헌의 권력장악원래 최충헌은 음서에 의해 벼슬길에 나간 후 도필리(刀筆吏)라는 말단 행정직 생활을 하며 문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무신란은 말단 행정직에만 만족해야 했던 그에게 새로운 변신의 기회를 준 사건이었다. 명예욕이 남달랐던 최충헌은 무신들의 권력장악에 자극을 받아 도필리직을 버리고 무신으로의 변신을 꾀하며 출세를 꿈꾸었다.최충헌은 명종 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할 때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된 후 별초보령에 뽑혔고 이어서 별장직에 오르면서 출세를 보장받는 듯했다. 하지만 야망에 비해 출세운은 크게 따르지 못했다. 이의민이 집권하자 출세에 제약을 받아 이후 20년 동안 승진도 못하고 불우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10년도 채 못되어 장군직에 올랐던 경대승과 비교해 보면 최충헌은 초창기 관운은 없었던 편이다.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그의 지위는 고작 섭장군에 머물러 있었다.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출신들이 상급자로 군립하는 것을 비켜본 최충헌은 결국 이들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안찰사직에서 파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중요한 직책은 왕으로 세워 왕권까지 장악하려 했다. 명종은 원래 최충헌이 옹립한 임금도 아니었고 아직도 전대의 신하와 장군 다수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정권을 독점하는 데 여간 귀찮지 않았던 것이다.이런 상황에 반대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말이 들려 오자 최충헌은 그의 아우 충수와 함께 1197년(명종27년) 9월 21일 별안간 군사를 풀어 여러 성문을 봉쇄한 다음 당시 명망이 높았던 두경승을 비롯한 13명의 중신과 대선사 연담, 소군 홍기 등 10여 명의 승려를 귀양보냈다.이어서 명종을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태자 수를 강화도로 보낸 뒤 평양공 민을 옹립하여 왕위에 앉혔는데 이가 제20대 황 신종(神宗)이다.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신종은 명종의 친아우로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그의 나이 이미 50을 넘긴 상태였다. 신종은 1203년 등창으로 병석에 누워 이듬해 61세로 사망할 때까지 6년이라는 짧은 치세기간 동안 최충헌의 무단정치를 지켜보며 이름뿐인 왕위에 앉아 있었다.4. 최충헌 형재의 암투명종을 몰아내고 신종을 왕으로 추대한 최충헌과 아우 충수는 신종이 즉위하던 달에 상장국 주국에 오르는 등 더욱 그 지위가 굳어져 정권은 완전히 최씨 일가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 간에 무력 충돌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최충수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 속셈으로 강제로 태자비를 내쫓았는데 최충헌이 이의민이 실각한 것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려보냈기 때문이다 는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결국 최충헌 형제는 서로 군사를 동원해 싸우게 되었고 이 때 최충헌은 조카인 박진재의 지원을 받아 흥국사 남쪽에서 최충수와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패한 최충수는 임진강 북쪽에 형이 살고 나는 그 남쪽에서 살겠다 며 임진강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파평(지금의 파주) 금강사에서 그를 추적한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신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달 10월의 일이었다.그리고 후에 최충헌은 최충수를 없애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된 최충헌의 생질 박진재도 최충헌을 제즉흥시로 유명함.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임.이규보·이공로·최자 등 당대의 문호들도 그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다.5. 희종의 즉위와 최충헌 암살 기도최충헌이 독재기반을 쌓아 나가던 무렵인 1204년 1월, 신종은 노환으로 왕위를 자신의 맏아들인 태자 영에게 물려주었는데 이가 제21대 왕 희종(熙宗)이다.그런데 희종은 앞서 무신집권자들이 옹립한 명종·신종과 달리 적통자로서 별다른 문제없이 왕위에 오른 군주였다. 따라서 정통성과 대의 명분이 뚜렷했고 이와 같은 배경은 왕권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반이었다. 게다가 희종 또한 최충헌의 독단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희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희종의 즉위년인 1204년에 급사동정 지구수의 집에서 장군 이광실 등 30여 명이 모여 최충헌을 북일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고 1209년(희종 5년)4월에는 개경 부근의 청교역리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이 때 주모자들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사찰에 가짜 공문을 띄우고 중들을 소집하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발각되었다.귀법사 승려로부터 자신의 암살기도 소식을 들은 최충헌은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붙잡혀온 청교역의 관리들이 잔혹한 고문에 못이겨 우복야 한기도 공모자라고 발설하는 바람에 최충헌은 한기와 세 아들을 잡아죽이고, 장군 김남보를 비롯한 9명도 함께 공모자로 몰아 처형하였다.그러나 모반사건이 처리된 이후에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해체하지 않고 자신의 독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기구로 삼아 버렸다. 최충헌은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을 유명무실한 권력기구로 전락시키고 대신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모든 국사를 처리해 나갔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통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배제시키고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최충헌의 서슬퍼런 독재정치 아래서도 또인 정숙첨에게 알려지면서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최충헌에게 변고가 일어났단 급보를 전해들은 이들은 내전으로 급히 달려가 최충헌을 구해냈고 최충헌의 도당들은 승려들과 엉켜 격투를 벌였다.한편, 궁궐 바깥에는 최충헌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도방 군사들이 집합해 궁궐 진입을 준비중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충헌의 생사 여부를 몰라 궁성 진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최충헌과 동행했던 노영의란 자가 내전에 있다가 대궐 지붕 위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우리 대감님이 무고하다 고 소리치므로 군사들은 그제서야 앞을 다투며 궁궐 안으로 들이닥쳤다.도당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최충헌은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죽이거나 유배시켰다. 그리고 아예 시역을 하겠다 는 김약진을 만류한 후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쫓아 버리고 이와 함께 태자 지는 인주(지금의 인천)로, 덕양후 서(희종의 아우)는 교동으로, 시녕후 위(희종의 차자)는 백령도로 각각 추방시켰다. 이로써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위된 희종은 그 후 자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노년에는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고종24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6. 강종과 고종의 즉위최충헌을 암살하려던 희종이 퇴위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한남공 우, 즉 제22대 왕 강종(康宗)이다.강종은 명종의 맏아들이며 태자시절부터 무신정권의 틈바구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1197년 부왕 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퇴위당하자 14년간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희종의 퇴위와 함께 나이 환갑에 이르러 우연찮게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하지만 강종은 희종과 달리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른데다 고령인 탓에 왕의 행세마저 제대로 못해보고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채 못된 1213년(강종 2년) 8월에 죽었다. 이에 최충헌 일당은 태자 철을 옹립하여 왕위에 앉혔으니 이가 제23대 고종(高宗)이다.고종은 강종의 맏아들로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
    사회과학| 2002.06.12| 7페이지| 1,000원| 조회(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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