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성장과 서구의 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문화적 사회적으로 혼란에 있는 사화의 젊은 우리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은 너무 즐기는 대에만 관심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여기에 속해있었다. 교양으로 들은 수업이 아니었으면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 라는 책의 제목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인 나는 서점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분야의 책들이나 개인적으로 관심이 컴퓨터 분야의 서적들만을 보고 이런 딱딱한 사회문제의 종류의 책은 관심을 한번도 가지지 안은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리포트 때문에 책을 읽기는 하였지만 읽은 후의 가장 큰 느낌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문제를 시원하게 긁어주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지만 대신 문제에 대안이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일단 책의 겉표지에는 저자의 날카롭게 보이는 사진이 무겁게 느끼게 하였다. 어찌 되었든 저자가 과거에 여러 잡지에 칼럼 형식으로 써온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었다. 그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 양식 있는 젊은 사회학자의 '균형감각'이었다.그의 비판적인 견해는 분명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는 그가 말하는 진보적인 생각이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단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달리 합리적인 '거리 두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그러한 객관적인 거리 두기는 그가 학창시절, 운동 진영 내에서도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학생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통찰이라 짐작된다. 가령 '우리는 아무리 정치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여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공기나 물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탈정치의 시대에 '정치'를 생각한다」)'라거나 '도그마가 된 유교가 조선을 망하게 하였듯이, 도그마가 된 반공주의가 우리 사회를 또 다시 질곡에 빠뜨리지 않을까 우려된다(「한국 지성의 현주소」)' 혹은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정, 내 자식 제일주의 사고는 자녀의 인격 수양, 인간됨의 육성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다(「가족 이기주의」)'는 부분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환부에 예리하게 메스를 가함으로써 빛을 발한다면 타성에 젖은 이 시기의 젊은 정치가들과 시민운동 단체, 노동자, 학생, 지식인, 교육자, 의사들이 반드시 한번은 정독해야할 글들인 「정치를 지망하는 30대에게」나 「시민운동의 위기」, 「1990년대 학생운동의 현황과 전망」, 「서울대 개편과 학벌주의 극복」 등은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들이다.또 하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대학생활에 겪었던 고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정통'이 아니면 '회색분자'로 낙인찍히던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의 교조적인 분위기와 농활을 통해 느꼈던 민중을 교화하는 학생 지식인의 이중적인 사회적 위치 그리고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학자나 작가의 생계유지와 비교된 의사들의 직업윤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진솔하게 묘사되고 있는 「진보, 생존의 논리에서 삶의 논리로」와 「민중과 지식인」, 「의사의 지위」 등이 바로 그런 글이다.서양의 역사는 지식인 그룹의 상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모양이다. 제정 러시아 사회의 행동하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와 근대 프랑스의 계몽적 지식인을 일컫는 '인터렉츄얼(intellectual)'이 그것이다. 전자는 정치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민중의 당파성을 구현하려는 변혁운동가들로, 후자는 특정한 계급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사회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는 폭넓은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태풍의 눈처럼 휘몰아친 각종 권력논쟁은 이러한 지식인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 어느 쪽이든 지식인의 양식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반성'에 의해서만 터득될 수 있다고 나는 지금까지 배워왔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일반적인 상식을 갖춘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이 땅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언론이 아전인수격으로 갖다 붙이고 있는 좌, 우 대립의 이념 문제도 아니고 빈, 부 대립의 계급 문제도 아닐는지 모른다. 그것은 '양식'의 문제다. 그러하기에 '독립된지성은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 아래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명확하게 분별하려는 저자의 성실한 노력은 진리와 허위가 뒤섞여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한 이 궁핍한 시대, 정신적 공황기에 매우 소중하고 값진 자산이 될 것이다. 올 가을 내빈약한 도서목록에 이렇게 훌륭한 사회학자가 쓰신 글을 일게 된 것은 더 추가될 듯 싶은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는가1. 어떤 영화인가..◈ 제목 : 길버트 그레이프 ( What's Eating Gilbert Grape )◈ 감독 : 라세할스트롬◈ 출연 : 죠니 뎁, 줄리엣 루이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매리스틴 버겐, 달린 케이츠◈ 영화에 대한 언론의 평가무언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면서도 막상 변화의 순간을 두려워하는 보통사람들의 영화. [개같은 내 인생]의 라쎄 할스트럼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가족 이야기다.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지만, 일말의 책임감과 연민 혹은 사랑으로 인해 머물 수밖에 없는 길버트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짚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보여준 저능아 연기는 대대적인 호평을 받은 바 있다.2. 내용 및 감상만일 삶과 꿈, 가족과 미래, 고향과 여행, 어머니와 연인, 집과 희망, 현실과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말썽을 부리며 함께 가져갈 수 없다고 싸우기 시작하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무척 어려운 질문이 될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세상은 거의 항상 그렇게 모순되는 낱말들이 쌍을 이루며 이루어져 있다. 이 영화는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한 청년의 힘든 통과제의에 관한 영화이다.이 영화의 제목인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 아이오와주, 인구 1,091명의 질식할 것만 같은 엔도라라는 한 작은 마을과 그의 가족들의 열거로부터 시작된다.길버트 그레이프(자니 뎁)는 아버지가 목매달아 자살한 이후 집안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쇼크로 걸식증에 걸려 225kg(500파운드)이나 되는 뚱보가 되었고, 정신박약아인 남동생은 의사로부터 18살 생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34살의 누나는 시집도 안가고 집안 일에 매달리고, 16살 여동생은 멋내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외모에 대한 일 외에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다. 형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따르지만 틈만 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동생 어니는 어머니의 엄청난 몸무게와 함께 집안의 골칫거리이다. 여동생 엘렌 또한 항상 불만에 쌓여 사는 길버트가의 또 하나의 골칫거리다. 이렇듯 길버트의 가족은 길버트에게 어려움만 주는 존재인 것이다.또한 길버트에게는 터커와 보비라는 두 친구가 있다. 터커는 패스트푸트 연쇄점을 개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밀크쉐이크도 많이 먹는 것이 꿈이다. 만나면 항상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보비는 장의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영구차를 운전하고 있다. 길버트는 최신식 패스트푸드 랜드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래된 램슨 씨의 식품점에서 일한다.길버트의 생활은 매우 괴상하며, 자기 생활에 크게 만족해하지 않는다.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생활, 그 속에서 길버트는 동네의 카버 부인과 불륜 관계를 갖는다.물론 카버 부인에게 이끌려 그렇게 되었지만 답답한 틀 속에 갇혀 있던 길버트는 굳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한편, 캠핑족 소녀 베키는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엔도라에 머무르게 되고, 우연히 가스탱크에 올라 가 있는 어니를 따뜻하게 대하는 길버트를 보게 되어 그의 순수한 마음에 호감을 갖게 된다. 길버트 또한 같은 또래의 여자인 베키에게 끌리게 되고 둘은 서로의 내면을 아껴 주는 순수한 사랑을 하게 된다.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시간은 흐르고 길버트의 가족들은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어니의 18번째 생일(의사가 넘기지 못할거라 했던 바로 그 날)을 맞는다.이 날 식구들은 그동안 쌓였던 갈등을 푸는 계기를 마련한다. 길버트는 베키를 어머니에게 소개시켜 주고, 베키는 다음 해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캠핑을 떠난다. 어니의 생일을 지나고 난 어머니는 평소에 쓰지 않던 침대로 가 눕는다. 식구들은 의아해 하지만, 한편으론 어머니의 변화에 기뻐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침대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며 모두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놀림감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집을 태워 어머니를 편하게 보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나 에이미와 동생 엘렌은 각자의 길을 찾아 새로운 곳을 떠나고, 길버트도 어니와 함께 베키의 도움으로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청춘을 즐기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길버트 그레이프. 그가 오로지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웃의 한 유부녀와의 정사, 그것마저도 이젠 신물이 나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봄바람과 같이 히피적인 분위기를 지닌 자유주의자 베키 가 나타나면서 그의 따분한 인생은 변하게 된다.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세상과 인생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사는 베키와 사랑을 나누면서 길버트는 이전엔 미쳐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자신만의 삶에 대한 욕구와 그리고 그의 어깨를 짓 누르는 현실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라는 기로에서 방황하던 길버트는 끝내 그의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엄마가 죽고 누나와 동생이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을 지켜본 후 에야 그는 가족의 무게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줄거리만 보면 얼핏 지루한 영화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절제된 극은 흔한 헐리우드 영화처럼 가족간의 사랑이라는 그 주제를 우리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흔히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법인 배경음악의 사용도 아주 드물고, 등장인물들이 가장 격해졌을 때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는 이가 나름대로의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배려이다. 이런 장치들은 영화를 더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설정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는 지루하지 않다. 진지한 가족 영화라는 부담에서 보지 않는다면 과장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에서 군데군데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웃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젊은 장의업소 주인의 장삿속이나 자기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젊은 남자를 불러다가 고작해야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중년남자의 어처구니없는 진지함, 어머니의 엄청난 무게로 인해 내려앉은 집을 어머니 몰래 목수 친구와 지하실에서 버팀목을 받치며 수리하는 장면 등이 주는 웃음은 개그맨들이 주는 어눌함 속의 재치를 닮기도 했다.물론 그 주제나 감독, 배우들의 면면에서 드러나듯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위에 언급한 재미에 국한되어지지는 않는다. 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의 감독 라세 할스트롬의 이 두번째 미국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의 조심스럽고 진지한 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외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온 방문객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정치적 논쟁의 개입이나 영화적 인용을 피해서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을 찾아가 평범한 한 소년의 내면 세계로 파고든다. 이 소년의 세계 중심에 있는 것은 가족이며, 그 가족은 조금씩 무너져 가는 집처럼 무기력하고 벅찬 짐일 뿐이다. 그래서 그레이프가 꿈꾸는 미래는 모두로부터 홀가분하게 떠나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정이란 말에 대한 느낌은 안식, 즐거움, 안온함, 사랑, 이해같은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삶을 꾸려나가는 생계의 차원에서는 그 가정이라는 게 무엇보다 힘겨운 대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가족에 대해서 가끔은 그런 힘겨움과 부담을 느낄 때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길버트 그레이프는 실제로 그런 힘겨움과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 소재가 되는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우리의 길버트 역시 가족에 대해 큰사랑을 베푼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거나 좌절로부터 분연히 일어서게 하는 따위의 강력한 동기로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저 ‘살아나가는’이유일 뿐이다. 그러한 점이 이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역시 ‘살아나가는’우리에게 더 크게 와닿게 하는 이유다.물론 최근 미국영화에 공식처럼 등장하는 가족의 복원’에 대한 염원은 지겨울 정도다. 우주 여행을 가도, 괴물이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와중에도, 거기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이 화해를 하고, 가족을 구출하며, 가족이라는 존재를 수호한다. 보다 가족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반가족적인 미국사회의 컴플렉스를 반증하는 듯이 보인다. 이 영화 또한 그 컴플렉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여동생들의 취직과 전학 등으로 길버트의 가족은 해체되지만 떠났던 길버트의 여자친구가 돌아와 길버트와 정박아 동생 어니를 태우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희망 섞인 해피엔딩 식의 장면은 결국 또 다른 가족의 복원이라는 헐리웃의 도식이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는 많은 실망을 하기도 했다. 베키가 돌아오지 않은 가운데의 엔딩에서도 이 영화에서의 메시지는 분명히 강렬했다.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었던 점은 이 영화의 상징성이랄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크게 두 개의 상징이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는 극중에서 세 번이나 등장하는 성냥불에 관한 묘사와 계속되는 양은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효과음이다. 미망인이 담배불을 붙일 때, 성냥불이 그어지지 않고 길버트가 성냥을 찾는 대목이 나온다. 마지막 미망인이 떠나갈 때도 그녀는 상점 안에서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 불의 상징성,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욕망의 실체, 가족들을 괴롭히는 그 고통의 근원은 마지막 집이 활활 타는 장면에서 충분히 녹아든다. 또한 계속되는 북소리 효과음은 뚱보 여자가 경찰서에서 아들을 위해 경찰을 위협할 때 책상을 쳐대는 장면과 저능아 동생이 툭하면 상을 두드리는 모의식의 행동을 은유하며 그 청각적인 효과음이 들릴 때마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길버트의 입장이 되어 답답함 속에 뛰어들게 되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