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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뉴 럭셔리 시장 분석
    IntroductionSeveral months ago, the internet sites were overflowing with debate and criticism over the fictitious Dwoenjang Girl. With even the mass media introducing the Dwoenjang Girl in numerous articles, the witch-hunt had increased to a near frenzy in criticizing the “empty-minded” antics of the vanity obsessed, satirical character. From her egocentricity in making choices that valued brand names and appearance more than conventional rational choices, many people made vitriolic remarks that she did not have the common sense to tell excrement from Dwoenjang. Marketing Analysis of Dwoenjang Girl PhenomenonHowever, from a marketing perspective, the Dwoenjang Girl is actually a creation of the typical changes in cultural values today. The values she places in Starbucks coffee may not be such a irrational choice after all. A cup of coffee is no longer just a cup of coffee and the Dwoenjang Girl anecdotes show us a perfect example of a typical middle class consumer that is willing “trade up” several categories of her lifestyle while “trading down” other categories.From the functional needs standpoint, a cup of coffee is a source of caffeine that may help give one a jumpstart when needed or a refreshment to help digestion after meals. Thus, to people that view coffee as only a functional beverage, the entire notion of Starbucks does not compute and is a waste of money. However, Starbucks coffee is not merely just a source of caffeine. The entire Starbucks experience begins with a familiar and cozy setting in which mouth-watering aromas and friendly servers help with one’s order. The pleasant music and comfortable atmosphere allow friends to freely talk to each other in an environment less rowdier and more easily accessible than a traditional conversation atmosphere such as a bar. Even when one takes a Starbucks coffe
    시장조사| 2006.11.15| 30페이지| 3,000원| 조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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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칸트 주관주의 미학
    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150567328" 들어가는 글 PAGEREF _Toc150567328 h 2 HYPERLINK l "_Toc150567329" 칸트의 취향 분석 PAGEREF _Toc150567329 h 2 HYPERLINK l "_Toc150567330" 취향 판단의 제 1계기 : 성질의 범주에 따른 고찰 PAGEREF _Toc150567330 h 3 HYPERLINK l "_Toc150567331" 취향 판단의 제 2계기 : 분량의 범주에 따른 고찰 PAGEREF _Toc150567331 h 4 HYPERLINK l "_Toc150567332" 취향 판단의 제 3계기 : 목적의 관계성 PAGEREF _Toc150567332 h 5 HYPERLINK l "_Toc150567333" 취향 판단의 제 4계기 : 대상들에 대한 만족의 양상 PAGEREF _Toc150567333 h 6 HYPERLINK l "_Toc150567334" 칸트 미학의 한계와 의의 PAGEREF _Toc150567334 h 7 HYPERLINK l "_Toc150567335" 참고문헌 PAGEREF _Toc150567335 h 7들어가는 글칸트의 미학은 르네상스 시기 이후 재발견 되어 꾸준히 연구되었던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들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국의 경험주의 등 여러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칸트는 바움가르텐이 정초한 미학의 독자적 학문영역의 가능성을 한 축으로 받아들이면서 판단력 비판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이다.이러한 비판적 시도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드러났던 것처럼 미학 사상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귀결 되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이래로 플라톤의 체계화와 바움가르텐에 걸쳐 계승된 존재론적 미학에 대한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것이었는데, 칸트의 인식론적 토대 즉,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우리 인식능력의 허용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주또는 예술의 형식적 합목적성을 판단하는 경우 이를 감성적 판단 혹은 미적 판단 Aesthetic judgment이라 한다.칸트는 쾌감과 합목적성의 원리의 결합이 미학의 영역을 이룬다고 보며 이를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판단인 취향판단에 대한 분석에서 다루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취미판단 역시 판단인 한, 범주에 따른 네 가지 계기로 구분된다.취향 판단의 제 1계기 : 성질의 범주에 따른 고찰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 즉 범주를 크게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들을 다시 각각 3개의 소 범주로 분류했는데, 차례대로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실체성, 인과성, 상호성],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12범주 이다. 이러한 범주의 구분은 칸트의 모든 작업들에서 차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취향 분석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성질의 범주부터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쾌의 감정의 존재 여부는 미적 판단의 존재 여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칸트는 이 성질의 범주에 대한 고찰을 통해 먼저 ‘쾌’의 감정이 ‘실재한다’는 상태를 경험적으로 규정하며 취향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인간이 느끼는 ‘마음에 든다’라는 인식의 구조적 분석을 따라가 보면 그것은 유용성, 도덕성, 편안함 등을 인식했을 때 동반되는 감성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 즉 interest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미적 판단과 구별된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주의 미학은 쾌적과 미를 혼동해 이를 동일시 했으며 존재론적 미학은 선과 미를 혼동해 이를 동일시했다. 반면 칸트는 최초로 쾌적과 미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interest를 미적 판단의 구별 요소로 든다. 쾌락을 주는 쾌적함, 존중되고 인정됨으로써 우리에게 쾌를 선사하는 선과 구별되게 미는 단지 우리에게 욕구와 무관한 만족만을 준다.즉, 칸트에 따르면 모든 미적 판단은 순수한 판단이다. 그것은 모든 이해관계에서이라고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미적 판단에 대해 칸트는 그 판단의 타당성이 보편적이라는 효력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개념과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칸트 미학의 과제가 발생한다.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판단이라는, 모순과도 같은 주장이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취향 판단의 제 1계기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어떤 이해관계나 연관성도 없는 상태에 느끼는 순수한 호감이다. 젊은이의 문화와 전혀 연관성을 갖지 않는 50대 성인 남성이 우연히 어떤 장소에서 잘 짜여진 힙합 댄스를 보고 ‘아름다움’을 인식했다거나, 락 음악에 무지하고 아무 판단 준거를 갖지 못한 7살 어린이가 전자 기타로 연주된 ‘캐논 변주곡’을 듣고 ‘좋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런 감정이 미적 판단의 예가 된다는 것이다.이러한 ‘무관련 상태에서의 호감’이 칸트가 주장하는 ‘칸트식 보편성’의 근거가 된다. 칸트에 따르면 ‘낯선 상태에서 대상을 판정하는 것’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라고 말하며,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로운 일치가 일어나는 경우 이것은 필연적으로 만족 즉 쾌lust 혹은 호감good feeling을 동반하기 마련이며 그 만족감을 표시하는 판단인 미적 판단은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만인에 대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종(種)적인 보편성에 의거하여 동일한 인식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국내 소설가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나가’라는 신화적 종족이 나온다. 그들은 파충류 인류인데, 변온동물이라 열대기후에서만 서식하며 열을 시각적으로 감지하고 ‘니름’이라 부르는 초음파 영역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인기있는 예술행위가 있는데 화로에 쇠막대 두개를 달구어 ‘니름’으로 노래하며 쇠막대를 이용해 춤을 추는 ‘불춤’이 그것이다. 인간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도마뱀이 침묵 속에 쇠막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 있다.그러나 미적 판단에 있어서 우리는 제 1계기에서 확인했듯이 취향판단에는 그 어떤 부가적 의도가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으로부터 욕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취향판단의 합목적성은 그 목적, 즉 어떠한 상태의 욕구나 의지가 의도하는 바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무목적성의 합목적성’이라 부른다.플라톤으로부터 기인하여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를 관통해온 예술의 주된 기능은 도덕적·교육적 효과 뿐만 아니라 심리적 보상 까지도 인식 주체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트 미학에 있어서 제작자의 동기나 욕구, 의도를 감상자에게 주입하려는 이 모든 시도는 진정한 ‘미적 인식’에 위배된다. 이때 예술은 다른 어떤 부가가치를 산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존재론적 미학의 시대에도 칸트가 이야기하는 ‘무목적성의 합목적성’이 해당되는 분야는 존재했었다. 그것은 ‘신학 혹은 철학’의 영역으로 그 어떤 부가가치도 창출하지 않으면서 오직 그것 자체만이 목적이 되는 참된 앎에의 관조를 지향한다.칸트의 미적판단의 합목적성은 무목적성 이외에도 인식 능력들 간의 일치로 규정된다. 즉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의 두 능력은 미적 판단에서는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하는 조화상태에 있을 때 ‘자유로운 유희’라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참된 앎의 영역이고 칸트의 시대에는 ‘미적 인식’의 영역으로 확장된 이러한 관조 행위와 그 분야를 우리는 ‘유희’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유희는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뿐 그것 이외의 어떤 부가가치도 산출해내지 못한다. 심지어 유희를 위한 산업 시장에서도 그것은 유희를 즐기기 위한 도구에 대한 부가가치 분야이지 유희 그 자체로 인한 생산분야는 아니다.역설적이게도 인류의 정신사에서 현대어에 따르면 ‘가장 쓰잘떼기 없는 분야’가 가장 중요한 분야였으며, 다른 어떤 목적에도 종사하지 않아야, 다시 말해 (만족을 유발하는 것 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야만 비로소 예술’고 있으며 그것은 언어로 규정될 수 없고, 미적 판단의 성립을 위해서는 규정되어서도 안 된다.그렇다면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범례적 필연성은 어떻게 확장된 주관성으로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칸트는 “공통감 sensus communis 의 전제하에서는 객관적인 펼연성으로 표상된다”고 말한다. 만족과 불만족은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로운 일치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감이란 양자간의 필연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이며 또한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로운 일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감정 능력을 말한다. 동시에 이 공통감은 비언어적 형태로서 존재한다.그렇다면 과연 이 비언어적 형태의 공통감을 만인에게 전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칸트는 인식과 판단이 전달 가능하다면, 그것이 곧 공통감을 전제할 수 있는 근거라고 이야기 한다. 인식과 판단이 종적 보편성에 의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감성적 판단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유하되 건전한 인간 지성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을 고려할 수 있다면, 감정의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감성적 판단을 반성self-reflection 하거나 공감sympathy할 수 있다. 칸트는 전자를 논리적 공통감 sensus communis logicus라고 하고 후자를 미적 공통감 sensus communis aestheticus 라고 한다.칸트 미학의 한계와 의의칸트는 미적 인식의 현상이 오로지 인식 주체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흔히 명작, master piece라고 부르는 것들은 단순한 인식 대상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도리어 감상 주체를 자극하고 도발하며 말을 건네는 유사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칸트의 주관주의 미학 그 자체만을 통해서는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없다.인간 본성의 이해에 있어서도 회의가 제기될 수 있다. 과연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창작 주체는 과연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무관심성에 의한 예술 창작은 어쩌면 허구적이거나 지나 2
    인문/어학| 2006.11.15| 7페이지| 1,000원| 조회(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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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플라톤의 존재론적 미학 평가B괜찮아요
    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147087902" 들어가는 글 PAGEREF _Toc147087902 h 2 HYPERLINK l "_Toc147087903" 플라톤의 존재론적 미학 PAGEREF _Toc147087903 h 2 HYPERLINK l "_Toc147087904" 질서와 척도로서의 미 PAGEREF _Toc147087904 h 2 HYPERLINK l "_Toc147087905" 미의 이데아 PAGEREF _Toc147087905 h 3 HYPERLINK l "_Toc147087906" 미메시스와 회화 혹은 시 미학 PAGEREF _Toc147087906 h 4 HYPERLINK l "_Toc147087907" 미메시스와 음악미학 PAGEREF _Toc147087907 h 4 HYPERLINK l "_Toc147087908" 신 플라톤주의 미학 PAGEREF _Toc147087908 h 5 HYPERLINK l "_Toc147087909" Iconic Turn PAGEREF _Toc147087909 h 5 HYPERLINK l "_Toc147087910" 플로티누스의 반향 PAGEREF _Toc147087910 h 5 HYPERLINK l "_Toc147087911" 플라톤주의의 계승자들 PAGEREF _Toc147087911 h 6 HYPERLINK l "_Toc147087912" 참고문헌 PAGEREF _Toc147087912 h 6들어가는 글미학이 독립적 탐구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타 연구 분과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바움가르텐이 (1751) 를 통해 아름다움을 학문의 분야로 편입시키는 한편, 다소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감성적 인식이 경우에 따라서 이성적 인식보다 앞설 수도 있고 때로는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이성 중심주의의 대항마로서의 의의 역시 가지는 중요한 한걸음이었다.미학의 본격적 연구의 짧은 행보와는 별도로, 아름다움에 서 그의 예술관이 심리적 효과에 주안점을 둔 기능주의적인 것이라 단언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며, 우리는 도리어 나 을 통해 전개된 완숙기의 개념들을 통해 '플라톤 미학'이라고도 불리는 '존재론적 미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플라톤의 존재론적 미학흔히 그렇듯이, 플라톤과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당대의 소피스트들은 미는 감각적인식으로부터 기인하며, 상대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에 플라톤은 미는 감각적 대상에 한정되지 으며,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속성이라고 피력한다. 아마도 그가 진정한 미와 외견상의 미를 구별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시각과 소리를 애호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음악, 색채, 형태 및 그것들이 들어간 모든 예술작품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 그 자체의 본질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 476B)질서와 척도로서의 미플라톤이 채택하여 전개시킨 피타고라스 학파의 개념에 의하면, 미의 본질은 탁시스, 척도, 비례, 협화, 조화 등에 있다. 말하자면, 미는 첫째로 부분들의 배열(배치, 조화)에 달려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되었고, 둘째로는 수(척도, 비례)로 표현될 수 있는 수적 속성으로 이해되었다.선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비례가 없을 수가 없다. 생물체의 경우에도 그런 비례를 결여할 수가 없다… 비례가 없거나 불균형의 상태가 영혼 자체와 육체 자체의 사이에 있는 상태보다 더 중요하다. (티마에오스 87C)수학적 비례에 관한 이 피타고라스적 교의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비교적 후기에 등장했지만 등장한 후에는 플라톤 철학의 영원한 특징이 되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하였을 정도이다.동물들에게는 이런 움직임에 있어서 질서나 무질서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고 우리가 리듬이나 멜로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감각도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경우 신들은 리듬과 멜로디를 지각하고 향유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법률 653E)그러나 이러한 미학이론이 곧장 형식주의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형식이 플라톤이 중년기에 옹호했던 또다른 미개념은 그의 이데아 철학에서 유래한다. 영혼은 육체보다 더 완벽하며 이데아는 육체나 영혼보다 더 완벽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부터 미학에 관련된 귀결이 따라 나왔다. 영혼과 이데아의 미는 육체의 미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210E-211D 에 따르면 그는 인간들이 아름다운 물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사고 및 행동이 신체보다는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정신적인 미는 지고한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고급한 미였다. 나아가 그것들의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미와 다르게 미의 이데아는 영원하며 보편적이다. 따라서, 존재의 속성인 이데아만이 '순수한 미'이다.플라톤의 개념은 소피스트들의 개념과는 첨예하게 대립되며 소크라테스의 견해와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의 개념과는 일치했다. 사실 그 둘은 상호보충적이기까지 했다. 정확함과 조화 말고 도대체 어디에 미의 이데아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말년에 플라톤은 자기 자신의 개념보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개념을 더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존재론적 미학 뿐만 아니라 수학적인 미학까지를 후세에 물려주었다.미메시스와 회화 혹은 시 미학고대 그리스인들은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성격의 표현과 배역의 연기를 의미하기 위해 미메시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즉 미메시스라는 용어는 음악 및 춤과 연관된 제관들의 제의적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지, 시각예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이는 플라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메시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저급한 레플리카 즉 복제나 위작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지상에 없는 천상의 개념 즉 이데아를 지상에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인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따라서 시인과 화가의 작품들은 단순한 모방일 뿐이며, 그것도 이데아의 불완전한 형태인 현상의 모방이므로 그들은 그저 복제품을 양산할 뿐 그들이 모방하고 있는 것이 가지는 참 뜻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회화와 시는 간접적이며 비현실적이론을 도출한 것이다.미메시스와 음악미학플라톤에 따르면, 미를 규정한 두 가지 본질, 즉 조화와 덕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미의 이데아를 지상에 재현하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미메시스(imago and representation)라고 보았다.그러므로 그는 예술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즉 예술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예술작품을 만들어야 하며, 선의 이데아에 따라 성격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이런 이상적 요구를 진정으로 완수할 수 있는가? 플라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초기 그리스인들의 고졸기 예술과 특히 이집트 인들의 예술에서 이미 완수했다고 생각했다.이러한 진정한 미메시스의 표현 방법으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에서 모든 음악적 예술, 즉 뮤즈 여신을 섬기는 예술들 모두를 "이데아의 재현이자 모상"이라고 칭한다. 그에게 음악은 직관을 통한 우주진리의 일차적 계시 방법이었다.신 플라톤주의 미학AD 3세기 헬레니즘 시대가 저물 무렵 플로티누스가 새로운 미학을 내놓았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즉 존재론적 토대 및 미에 대한 경험적 분석에 있어서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계승자로 간주될 정도로 플라톤의 사상과 닮아 있었지만 이미 플로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경험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끝에 살았다. 그들을 나누는 여섯 세기가 새로운 가치 평가를 낳았다.Iconic Turn플로티누스와 플라톤 모두 현상 세계와 이데아의 두 세계를 대립시켰다. 그러나 두 철학자의 미학의 차이는 플로티누스가 그의 초감각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감각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감각미에서 감각세계의 가장 완벽한 성질을 보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개별자 안에서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따라서 플로티누스 이후의 신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자연과 그 구성원인 개별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저열한 차원에서의 이데아의 복제가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제 자신을 통해 우리에게 이데아를 암시하는 다소 불충 사고의 이행이 나타난 것이다.플로티누스의 반향예술, 특히 회화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이론은 수세기동안 지속되어 중세 미학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반향은 이미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플로티누스와 중세의 주된 연결점은 위-디오니시우스라고 알려진 5세기의 익명의 저자였다. 고전적 미메시스 개념을 부정하는 플로티누스의 이론에 상응하는 예술이 수세기동안 유럽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특히 비잔틴 예술은 플로티누스의 강령이 실현된 것이었으며 서구 예술 역시 토대는 비슷했다.그의 철학 중 특히 미학에서 플로티누스는 두 시대, 즉 고대와 중세 사이에 가교를 놓았다. 그는 플라톤을 계승했고, 형식적 미학에서 그를 계승한 것은 위-디오니시우스와 신플라톤주의적 흐름이었다.`플라톤주의의 계승자들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이름 모를 후학에 의해 파훼되었을 때부터, 사유의 질서와 실재의 질서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反존재론적 세계관의 도래는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보편성과 완전성에 대한 가정은 도리어 우리 인간의 근원적 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자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아인슈타인은 사유 질서만으로 블랙홀의 존재를 증명했고 50년이 지나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주의자 히치노에서 셸링과 쇼펜하우어를 거쳐 아도르노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으로, 또한 중세의 교회음악부터 대위법에 의거한 헨델과 바흐 등 근현대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현대 음악가들의 Musica Mundana의 표현을 통해, 플라톤의 미메시스 미학의 건재함은 끊임없이 과시되고 있다.생떽쥐베리는 그의 저작 에서 야간 비행 도중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의 신비와 조화, 법칙을 생각하고, 땅에 박힌 수많은 등불들을 바라보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신비스러워 한다.비단 생떽쥐베리 뿐만이 아니다.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존재와 보편성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별들을 바라보 5
    인문/어학| 2006.11.15| 6페이지| 1,000원| 조회(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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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북리뷰] 예수는 없다 를 읽고
    예수가 없다고 무신론은 아니다.서양 문명을 이루고 있는 가장 주요한 축 중 하나가 그리스도교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면, 그들 스스로 제창하고 지금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신의 죽음’ 과 무신사상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선회’ 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들이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신의 비존재에 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부분적 무신론 즉 “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이런 부분을 나는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라는 것이거나 혹은 ‘무고한 이의 죽음’ 과 같은 실제적 경험적 사실로부터 기인한 체험적 무신론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신 존재의 온전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현대 서양 사상사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선언은 그것이 비록 “문자 자체에 집착하는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책 전체의 흐름을 출판사 측에서 다소 센세이셔널 하게 축약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종교적 반감을 잔뜩 가지고 들이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존 미국형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트의 깊은 믿음을 유지해 온 신앙인이라면, 그들의 눈에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나 ‘(기존 교회에) 예수의 부재’를 고하는 저자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기실 신학계에서 니체에 대하여 “기존 교회 권력 깊이 파고든 독을 제거하기 위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처방을 한 철학자”라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저자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겠지만 ‘무비판적 믿음에 근거한 신앙에서 탈피, 이성과 조화된 합리적이고 의지가 곁들여진 믿음을 지향’하는 기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문제에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저자를 무신론자로 분류하기엔 무리가 있다.다시 말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위대성에 대해서 비판이나 부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책은 일종의 예수 찬미론 이라고 결론 지울 수 있을 정도다. 그가 말하는 예수에 대한 비판은 예수가 이 땅에서 사라진 후 있어 온 교회의 배타적인 모습에 대한 것들이며 차분히 그리고 때로는 폭풍처럼 질타하고 있다.얼핏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저자의 주장은 실상은 이미 서양의 학문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에 불과 하다는 것은 잠시나마 가톨릭 신학을 공부해 본 나로서는 직접 체감해본 바이나, 특히 한국 개신교 측의 실정으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과감하고 직설적인 저서는 그 출판만으로도 매우 신선하고 도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이 책에서 우리의 신앙의 역사에서 서구의 그리스도교사상을 우리나 사상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는 다석 유영모나 함석헌 선생들의 소개와, 매우 이해하기 쉬운 비유들로써 강요가 아닌 우리 의 역사, 문화적 환경에서 충분히 종교 간의 화해를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이다.묵은 먼지를 털고 녹을 벗겨 합리적 신앙으로저자의 의도는 아주 명확하다. 미국식 근본주의 개신교의 자구주의(literalism)가 가지는 맹점을 비판하고, 아동기적인 무비판적 눈먼 신앙(Fides)에서 벗어나 이성(Ratio)과 관용으로 성숙된 청년기적 신앙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해체-재구성-쇄신” 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방법에 익숙치 못한 독자라면 저 해체와 재구성에 있어서 ‘새로남을 위한 방법적 해체’ 라는 도구가 그저 파괴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저자는 쉽고 재미있는 비유와 더불어 기존 개신교 체계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인다.첫째,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한 부분이다.성서는 크게는 몇 천년의 시간 간격을 둔 몇 십명의 저자가 당시의 사회상과 저자 자신의 가치관이 개입된 각 권의 독립 문서들 한데 모은 종교적, 문화적, 통계적, 문학적, 역사적 텍스트라는 현대 신학적 관점에 입각해서 경구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근본주의의 마비를 하나하나 주물러 간다. 히브리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적 문헌 해석을 통해 하나의 동일한 텍스트로만 읽혀질 수 있는 부분들을 그 기원과 종류에 따라 학문적으로 분석된 관점들을 교양서적의 수준에서 굉장히 다가서기 쉽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는 중 후반부에 가서 긴장의 언덕을 타고 넘는 역사적 인물 예수와 복음에 대한 고고학적 문헌적 연구를 소개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기존 신앙의 해체 시도를 통해 그가 주목하고 있는 바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보였던 문제점들을 근본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힌 개신교 특히 한국 교회에서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예전 중세 시대 프랑스의 파리 대학의 역사가 아직 초창기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아직 유럽으로 회귀되지 않았을 무렵, '페트로스 아벨라르도스' 라는 철학자는 성서학 담당 성직자의 세상의 이치에 대한 과도하게 성서에 근본주의적으로 기대는 경향에 맞서 Sic et Non (yes or no) 라는 책을 썼다. 이는 성서에 나타나는 동일 사상에 대한 모순적인 구절들을 장절로 조사해 상황에 맞추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들이대는 당시의 경향을 반박하는 통쾌한 책이었다. 실제로 그 책이 당시 교회 안에서도 자아 반성과 더욱 이성에 근거한 신학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안겨 준 좋은 숙제였음을 상기해 볼 때 이 책의 가치 역시 유비적으로 판단이 가능다고 본다.둘째,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비판 이다.유가 사상과 유교가 다르고 불가 사상과 불교가 다르듯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그리스도교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엄연히 시스템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종교적 체계라면 후자는 특정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가지고 제도화된 사회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조계, 경제계, 교육계, 의료계 등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 요소의 하나로서 종교계 특히 그 중 그리스도교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논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해지길 거부하는 교회에 대한 상술을 통해 방법론적 비판을 던지고 있다.사회에서 종교라는 구성요소가 하는 기능은 크게 '해당 종교를 초월한 사회 구성 요소 전체의 마음의 위안이 될것, 윤리적 계도와 모범의 기준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할 것, 정치석 색채와는 별도로 사회의 평화에 기여할 것' 정도가 될 터이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교가 저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신에 대한 관점의 단계를 설명하면서 아직 우리네 신앙적 풍토가 부족신의 관점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히브리 성경의 저자들 자체도 후대의 텍스트에서 벗어남을 보이고 있는 이 단계를 어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공격적인 가두 선교라던가, 이명박 시장이 보여주었던 (혹은 미묘하게나마 박주영 선수도 그 혐의를 받고 있는) 공과 사에 대한 종교의 탈 종교적 월권행위(정치적, 문화적) 등등 역시 사실은 그 종교의 역사나 믿음의 이해와 성숙의 정도가 사회적인 측면의 발전을 가져오거나 혹은 저해할 수도 있다는 좋은 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진정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의 mission은 저자가 이야기 하듯 “하느님 나라”의 건설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의 원리가 이 땅에 실현될 날이 있으리라는 “믿음”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믿음이 작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미력이나마 그 일을 위해 진력하는 것,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요구되는 신앙적 태도라 생각된다. 기실 오랜 교회의 전통 안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개념은 비단 사후 세계에 받을 보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의 목적은 계시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을 지상에 실현하는 것 또한 포함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그 완성을 위해 그리스도교에 헌신하는 참 신앙인은 거짓 하늘나라가 아닌 참 하늘나라의 도래를 위해 합리적이고 성숙한 신앙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5.10.09| 4페이지| 1,000원| 조회(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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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문화, 당의멸망, 양귀비, 황소, 왕선지] 인물로 본 당의 쇠퇴 -양귀비 왕선지 황소 평가C아쉬워요
    서론한 나라는 어떻게 융성하고 또 어떻게 멸망해가는 것일까. 지구상에서는 많은 국가들이 오랜 역사에 걸쳐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그러한 흥망성쇠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흥망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으며, 우리는 여러 국가들이 어떻게 하여 흥하고 망했는지 역사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국가의 흥망에는 政治, 經濟, 軍士 등 여러 부분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 '인간이 세계를 만든다가나모리 히사오, {흥망 세계경제} (서울:매경신문사,1995) pp.293-294'는 의견은 세계의 흥망에서 인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어떤 시기에 있어서 외부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할 때도 있지만, 지속적인 발전의 열쇠는 사람이었다. 인간이 좀더 넓은 시야를 갖고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 해갈 때 그 국가는 흥하게 되고, 반면, 변화하는 정세를 읽지 못하고, 과거에 안주하여 새로운 노력을 게을리 하면, 국내에 분쟁이 있으면 그 국가는 필연적으로 쇠하게 되는 것이다.역사는 동양 중세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당(唐)의 쇠퇴를 통해 특정 인물이 국운을 좌우했던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통일제국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던 나라이다. 당의 발달한 문물 및 정비된 제도를 통해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의 흥기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그러나 당의 역사에는 그 흥망의 길에 그 스스로의 영향력보다 역사의 방아쇠 역할로서의 특이점을 보여준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양귀비와 왕선.수왕의 아내로 산 것이 6년이 되던 22세의 어느 날.양옥환은 당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불려 간 곳이 당 현종의 술자리. 그녀는 그곳에서 음악 애호가 당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선보인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당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당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당 현종의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당 현종을 맞아들이기로 결심한다.시아버지의 귀비로 들어가다.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염치는 있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당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궁에서 내보내 당분간 화산에서 도가의 여도사(女道士)로 생활하게 한다. 그 사이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한다.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당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되어 현종의 비로 다시 궁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당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도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당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당 현종 치세전반기는 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먼 당 현종에게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살림살이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화청지에서의 사랑그러나 당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 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마를 운반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사가 쫓아오고 피난의 가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자 다급해진 당 현종도 별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에 따라 양귀비의 일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겼던 양귀비가 인근 절 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방치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당 현종은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역사속 여성 이야기] 양귀비, 주간한국, 2003년 10월 10일자3. 역사적 공과와 평가양귀비가 살았던 화청궁과 화청지의 모습잘못된 아름다움은 타인을 미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미인 박명'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양귀비의 예의 신비적 출신과 성격 등은 달기, 포사와 같은 그녀의 선배들과 비교할 만하다. 그녀는 매우 욕망적인 사람이었고,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 만큼 질투심 또한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는 질투심 때문에 두어 번 현종으로부터 폐출된 일도 있었다.강영수, {재미있는 중국사 여행 2권} (서울:예문당,1995) p.125어쩌면 하늘은 땅을 시험하고 싶을 때 영웅의 옆에 이러한 경국지색의 미녀들을 내려 보내는지도 모른다.양귀비의 지칠줄 모르는 사욕과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어떤 마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당을 쇠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최근에 들어서는 조금 다른 주장들로 채워지고 있다.레이 황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현종시대에는 이와 다른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도덕의 문제로 해석하려 했지만, 현종, 즉 당나라의 '밝은' 황제였던 이융기의 시대에개짓은 마치 거대한 폭탄을 움직이는 하나의 방아쇠와도 같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순을 바라보던 현명한 성군, 당 현종의 눈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의 명예도, 나라에 대한 의무도 벗어 던지게 한 양귀비의 매력은 결국 스스로의 명마저 재촉하게 하였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현명하고 바른 가치관과 함께 빛을 더 발할 수 있다.Ⅱ. "공을 보니 도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는 것 같소" - 왕선지와 황소의 난1. 선정 이유 및 문제 제기당나라는 그리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이민족에게 수도가 점령당하고도 150여 년을 더 버틴 적도 있다. 그런 당나라가 소금 밀매업자에 의해 멸망이 가속화 되었다. 당나라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 그가 바로 소금 밀매업자 출신이었다. 당시에 소금은 국가의 독점사업으로 주요한 세금 수입원이었는데, 국가에서 소금의 공급을 조절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때가 많았다.따라서 소금 밀매업은 이익이 많이 남는 만큼 위험해서 이들은 서로 비밀조직을 결성했는데, 그는 875년에 소금 밀매 조직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세력에는 소금 밀매업자뿐만 아니라, 세금과 노역을 피해 유랑하던 사람들과 유배된 외국 군인들도 가담하게 되었다.황소의 난을 보통 민변이라고 한다. 그런데 황소는 어떻게 그러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고, 또 2년 반이나 장안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의 군사력이 그렇게 약했다는 말인가? 사실 황소의 난을 잘 살펴보면 황소가 군사적인 천재였다기보다는, 관군의 무능 때문에 황소의 난이 성공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관군은 왜 그리 무능했을까? 그것은 당시에 역사적 변천을 직시한 정책이 수립되지 못했고, 보수적 경향의 이당과 자유적 경향의 우당의 경쟁이 치열했으며, 인구의 이동과 각지 사정에 맞는 세금제도의 변화를 사회가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단지 주온에게만 한정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선지도 그랬듯이, 황소도 당조가 자신에게 고위관직이 확실하게 보장만 해주었다면 언제든지 농민들을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강영수, {재미있는 중국사 여행 2권} (서울:예문당,1995) pp.169-174황소의 난건부(乾符) 원년 복주사람 왕선지가 이끄는 수천명이 장원에서 기의했다. 그는 천보평균대장군겸해내제호도통(天褓平均大將軍兼海內諸豪都統)이란 이름으로 격문을 돌리고 당조 관리들의 탐욕, 부렴의 번작과 과중, 상벌의 불공정 등을 통렬히 비판했다.건부 2년 기의군은 복주의 주성(州城)을 함락시켰고, 원구사람 황소가 수천명을 모아 호응했다. 청·제·연·운 일대에 흩어져 있던 방훈의 남은 무리 역시 그들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기의군은 산동에서 전투하였고, 과중한 조세로 괴로움울 당하던 백성들이 그들에게 모여들어 수개월 사이에 수만명의 무리가 되었다.왕선지와 황소는 모두 사염(私鹽)을 판매했다. 그들은 교통로와 정황을 잘알고 있었고, 또한 관군과 싸웠던 경험도 있었다. 건부 3년 기의군은 일차로 산동에서 전투를 하였다. 그들은 과거에 차·염사판이 가장 활발했던 회남과 형양 일대에서 적을 우회 공격하여 여(汝), 영, 복(復), 기(綺) 등의 적을 무찔렀다.당왕조는 군사 진압의 효과가 없자 환관을 파견하여 왕선지와 연결을 갖고 관직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려 하였다. 왕선지는 이에 당군과 협의했으며, 황소는 극려 반대하고 일부 기의군을 이끌고 산동으로 되돌아갔다. 이리하여 기의군은 두갈래로 분열되었다.왕선지는 당과의 협약을 위해 보낸 심부름꾼이 살해되어, 계략임을 알고 건부 5년 초 나성(羅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잇달아 당군에게 패했고, 최후에는 황해(黃海)에서 전사했다. 그의 부하중 일부는 북상하여 황소에게 귀속되었고, 일부는 남하하여 강서·호남·선흡과 절서에서 활동했다.왕선지가 죽은 후 황소는 기의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황소는 산동·하남에서 상당 기간 활동한 후다.
    인문/어학| 2004.11.02| 17페이지| 1,000원| 조회(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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