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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박제가-생산과 능률의 사회를 꿈꾸다 평가A좋아요
    박제가 - 생산과 능률의 사회를 꿈꾸다목 차Ⅰ. 서 론Ⅱ. 본 론①박제가의 생애 및 가계② 시대상황과 북학의 당위성③ 박제가의 『북학의』④ 그의 중심사상ⅰ. 박제가의 실학학풍의 형성과 그 배경ⅱ 이용후생(利用厚生)ⅲ.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반대ⅳ. 상업의 중시Ⅲ. 결 론Ⅰ. 서 론박제가의 학문은 박지원을 따라 실사구시의 학풍을 계승하고, 특히 이용후생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은 그의 저서인 북학의에서 볼 수 있다.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으로 나눌수 있는데 내편에서는 생산도구의 기술혁신을 다루고 외편에서는 과거제도·관료제도 등 제도 개혁을 다루었으며 전체 논지에서는 주로 상업, 해외무역, 수공업, 교통운수, 화폐유통, 과거, 국방 등에 대하여 중국의 선지된 상태를 설명하고 "무릇 이용후생하는 것이 하나라도 닦지 않은 것이 있으면 위로 正德을 해롭게 한다."는 입장에서 이용후생을 강조하여 우리나라도 대대적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창한 논책으로 되어있다. 그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지나치게 중국의 모든 것을 찬미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낙후한 이용후생 사태와 빈곤상태를 극복하려 한 애국적 입장에서 거론된 것이다.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논의한 것은 주로 이용후생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그는 실학적 학풍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실학적 학풍에 대해 알아보고 자연관과 학문관, 국방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리고 그가 북학의에서 단편적으로 다룬 사회신분제도의 개혁에 관한 것은 주로 양반, 사대부의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것뿐이다. 박제가는 그 당시 서자 출신으로 사회신분제도의 모순과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사회신분제도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 견해를 갖고 그 개혁을 주창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박제가의 단편적인 논의를 정리하고 그의 사회신분과 사회 신분제도 개혁과 동시에 그의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①박제가의 생애 및 가계박제가는 1750년 음력11월 5일 서울에서 승지(承旨) 박평의 서자가는 이미 소년기부터 사회신분제도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자라났다. 박제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났다. 그는 19세 때 박지원 밑에서 실학을 공부해 실학자로 성장하게 되었고 홍대용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박제가는 이덕무, 유등공, 이서구와 함께 1766년 시집인 을 내었는데 이것이 중국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사대가'의 하나로 알려졌다. 박제가는 1778년 사은사 체제공의 수행으로 청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네 차례에 걸쳐 중국에 다녀왔다. 그는 중국의 학자들과 만나면서 청의 문물 제도 등을 살펴보고 조선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낙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청 방문에서 박제가는『북학의』를 저술하는데 이는 홍대용과 박지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북학론을 정립시켰다. 1779년 정조의 특명으로 서자출신 중 뛰어난 인재등용책에 인하여 박제가는 규장각 서관에 임명된다. 1794년 박제가는 영평 현감으로 있던 때에 정조가 유생들에게 농책을 지어올리라는 명령을 발하자 이에 응하여 『북학의』내·외집편에서 농사와 관련된 몇 항목을 지어 추가해서 응지진북학의소 를 왕에게 바친다. 그는 1801년 네 번째로 청에 다녀온 뒤 신유정변으로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직후 55세의 일기로 별세한다.② 시대상황과 북학의 당위성효종이 즉위(1650)하면서 추진되던 북벌정책이 효종의 죽음(1659)과 함께 사실상 종식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1662)시킴으로 인하여 조선은 청을 중국의 지배왕조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대부들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이념아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여 문화적으로 고립되게 하였고, 당시 사회는 제도의 불합리한 운영과 많은 백성의 안이한 생활태도에 의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분화 현상이 만연해가고 있었다. 박제가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북쪽을 배운다'는 의미의 북학은, 일성에 의하여 구분된다. 중국이 비록 청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지만 그 문화를 행하는 주체는 중화인이며 행하는 문물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중화의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청조 문물의 선진성을 의심하거나 민족적 거부감을 지닌 지배층에게 청조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조금도 거리낄 것이 아니라고 설득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청조의 문화는 중화인들에 의하여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이므로, 이것을 배우는 것은 이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이어서 그는 설사 지금 중국에서 행해지는 문물이 청나라의 것이라 하더라도 백성에게 이로우면 배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청의 문물을 이적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조선의 유지들에게 실용적 측면에서 북학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고 할 수 있다.③ 박제가의 『북학의』그는 1778년에 사신으로 떠나는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때에 접한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엮은 책이 바로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북학의(北學議)』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 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議)는 논의한다, 거론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청나라에서 새롭게 접한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 이라 할 수 있다. 『북학의』는 1782년에 내편(內篇)이 완성되었고, 1800년에 진소본(進疏本)이 나왔다. 책머리에는 1782년에 서명응(徐命膺)이 쓴 서문, 1781년에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서문, 그리고 1778년에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 등이 실려 있다. 진소본은 이미 완성된 『북학의』 내용 가운데 농정(農政)에 대한 내용만을 가려 뽑고 필요한 사항을 보충한 것이다. 당시 정조는 농업 서적을 널리 구하고 있었고, 박제가는 그런 정조의 뜻에 부응하고자 진소본을 작성했던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내편에서는 수레, 선박, 성, 궁실, 창호, 도로, 교량, 목축, 상업, 은, 돈, 철, 목재, 의복, 의약, 도장, 종이,, 거름, 농기구, 철, 곡식, 수전(水田), 수리(水利), 종자, 농지 개량, 창고, 선박 등의 농업 관련 주제가 거론되고 있으며, 농잠총론(農蠶總論), 재부론(財賦論) 등 일종의 경제론도 전개되어 있다. 참고로, 외편은 진소본의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이 무척 많다. 외편 역시 농업 및 경제 관련 개선안과 논설, 관제 녹봉제도 개선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앞서 살핀 바와 같이, 『북학의』는 기본적으로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당시 중국의 문물제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러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혁신을 꾀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박제가가 보기에, 별다른 전란 없이 백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이 사치하지 않는데도 나라가 늘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 문물제도의 낙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낙후는 다름 아니라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학의』를 단순한 실용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요컨대 청나라에서 접한 문물을 단순히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박제가 나름의 입장이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④ 그의 중심사상ⅰ. 박제가의 실학학풍의 형성과 그 배경박제가는 서울양반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조봉건사회의 신분 계급적 차별제도로 인한 적자, 서자의 차별제도는 서자출신인 박제가로 하여금 사회모순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하게 하였으며 일찍부터 실학적립장에 서게 한 요인의 하나이다.적자, 서자의 차별이 엄격한 법적 질서로 고정화되어 서자는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품위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중요한 벼슬에 등용될 수 없었던 시대 사회 신분적 관계는 양반서자출신들이 중인계층의 이해와 공통되는 견지에 서게 하였고 일반평민대중의 기분도 반영하게 하였다. 박제가는 박지원을 선생으로 하여 박지원의 영향하에 처음부터 학문에서의 교조와 모방을 반대하고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으며 청년시절부터 실학에 대해 확고한 주견을 가져 세계정세와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식견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나라의 부강발전을 염원저술하여 자신의 사회·정치적 견해를 제기하였고 박지원과 홍대용과 함께 학문 방법과 내용에서 같은 학파인 '북학파'를 형성하였다. '북학파'는 동일한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박제가가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보다 예리하게 반영하였다.또한 그는 당시 학파를 달리하던 '남인파'의 정약용과도 관계가 깊어 공동으로 종두술(種痘術)을 연구하여 조선의학발달에도 기여하였고 정약용도 북학을 주장하도록 하기도 했다. 박제가는 1799년 영평현령으로 있으면서 농업발전에 대한 대책으로 '북학의'를 제출하며 왕이 '선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박제가는 보수적 집권파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때에 경원으로 유형 당하였다. 박제가는 수년의 유형기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1805년 10월 박지원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병석에 눕게 되었고 같은 해에 죽었다.ⅱ 이용후생(利用厚生)박제가의 『북학의』를 일관하는 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도구, 물건의 제작법, 사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북학의』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윤리, 도덕에 몰두했던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가 아닐 수 없다.박제가는 『북학의』 서문에서「대개 삶을 이롭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있으면, 올바른 덕을 해치게 된다.」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구체적인 문물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넉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리, 도덕을 바로 세우는 데에 기본이 된다는 뜻이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통적인 주자학은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그래서 그는 『북학의』 병론(兵論)에서 이렇게 말한다.「우리 나라 사람들은 실속이 없는 말(空言)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나 도무지 실천하여 구체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에는 부족하다.」이러한 이용후생의 정신은 박제가의 자연에 대한 견해, 즉 자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인 주자학에.
    인문/어학| 2003.12.04| 6페이지| 2,000원| 조회(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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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실학 개관 평가A+최고예요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실학의 정의2. 실학의 발생배경①조선후기 사회의 변화(내부적인 요인)*사회내부의 변화*사상적 배경②외부적인 요인3. 실학의 흐름①태동기②성숙기③전성기④쇠퇴기4. 실학자들의 태도①기존 주자학에 대한 회의와 극복*다양한 학문 경향의 수용*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유학으로서의 실학②민족에 대한 각성, 주체적의식5. 실학사상의 경향(3학파설을 중심으로)①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②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③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6. 실학사상의 내용과 성격Ⅲ. 결 론Ⅰ. 서론실학(實學)은 조선 후기 200년간 나타난 일련의 개혁적·주체적 사상에 대한 총칭이다.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해 현실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학문의 제기, 봉건체제 모순에 대한 새로은 개혁체제의 제안, 민중생활의 편리와 그에 기반한 강력한 국가의 형성등을 주장하면서 대두된 여러 분야의 사상을 총망라한 개념이다. 하지만 실학은 구체적인 전승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성호학파·북학파 등 계보를 구성한 일련의 학자군들도 존재하며 그 외에도 실학적 흐름에 포함되는 많은 실학자들이 있었다. 17세기 이후에 실학이 대두한 배경과 실학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실학자들의 경향과 성격 등을 전체적인 사상의 맥락과 일반적인 실학의 통설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실학의 정의본래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이학(理學) 편중에서 탈피한 개신유학' 혹은 '민족의식과 근대지향의식에 충실한 개신유학'이라는 뜻으로 전용하여 그것이 일반에 통용되는 한 괴이한 것은 아니며, 이와 같은 전의(轉意)는 이미 1930년대이래 수십 년 간 대체로 순조롭게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조선 후기 실학이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두 척도를 잃고 떠들고 있는 반면 한편 도시에서는 토지를 독점하는 벌열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 도시를 중심으로 상품화폐경제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문제점들이 발생하였다. 도 경제구조 변화에 따른 양반의 몰락 및 민중의 신분상승 욕구 등 신분체제의 변화로 조선은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재고가 요구되는 시기에 도달한 것이기도 했다.실학사상을 발생시켰던 내재적 요인의 첫번째는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와해(瓦解)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집권층의 벌열화(閥閱化), 전통적인 수취체제의 붕괴, 사회적 신분체제의 혼란, 농업 위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 등은 조선왕조 전기의 통치질서가 와해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직면한 조선왕조는 전면적으로 본질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당시 대부분의 집권층은 이에 대한 명확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다만 그들에게 보장된 특권에 안주하며 경직된 통치질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일부 진보적인 관료들과 재야의 지식인들이 국가체제를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혁정치의 이념과 방법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실학 발생의 두번째 요인으로는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농업경제 분야에 있어서 농민분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 실학자들은 농민분해 과정에서 출현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경영형 부농'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의 실학자들은 토지의 농민적 소유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으며 또 지주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작조건의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편, 실학사상은 그것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화폐 상품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의 경제적 변동은 바로 실학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학 발생의 세번째 배경은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면의 변동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으며 그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과 함께 천주교 교리서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책들은 일부 실학자들의 학문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한편 명말청초의 실학적 학술사상과 청대의 고증학도 실학 사상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명말청초의 실학사상에서는 민본이데올로기가 강력히 주장되었고 현실개혁의식도 강조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18세기 지식인들의 개혁이면에 영향을 주었고 고증학은 사상적 영향보다는 학문전개의 한 방법으로 채택되어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3. 실학의 흐름실학의 범위는 실학을 어떻게 개념짓는가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넓게 보면 율곡 이이에서부터 출발하여 개화파까지를 실학의 범위로 잡은 견해도 있어 대개의 조선 후기 학자를 실학자로 보는 애매한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에 비해 오로지 '경세치용의 학'만을 실학으로 집약시켜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적 개념들을 포괄시켜 실학의 구체적 전개를 살펴보기로 한다.① 태동기유형원 전후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가지를 준비기 또는 태동기로 설정해 볼 수 있다. 태동기는 정주학(程朱學)적 세계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며 새로운 자아각성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시기는 각 부문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전개되어 가는 초기 실학의 모습을 보여준다.② 성숙기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의 사회이다.당시 양란으로 심화된 사회혼란과 서학·양명학 등의 영향으로 사회의 전통적 지도이념의 바탕이 된 주자학의 비판이 확산되고 있었다. 반면 현실적으로 민을 위한 실용적 방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실학 풍토가 조성되어 갔다. 반계 유형원으로부터 실학사상의 학문적 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며 성호 이익에 이르러서는 '성호학파'가 형성되는 등 실학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또 사상적 측면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현실적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③ 전성기18세기 후반기에는 영·정조의 탕평책과 문운기흥책으로 실학은 크게 고무받아 국가사업에 반영되어도 있었다.실학의 연구 분야로서 두번째로 지적할 술 있는 것은 현실개혁을 위한 사회, 경제 부문에 대한 연구이다. 농업과 농민문제 개선에 대한 종합적 개혁안은 유형원(柳馨源)에 의해 처음 연구되었다. 그는 토지제도를 비롯한 사회현실의 각 부문에 걸쳐 개혁안을 제시하여 제도 문란으로 인한 민중 세계의 피폐를 막아보려 했다. 이러한 개혁 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조선왕조시대에 배출된 최고의 경세(經世)학자로 평가되는 그는 정부조직의 개편방안과 형정(刑政) 및 지방행정의 개편 방안을 연구하여 ·· 등을 저술했다. 또 등의 논문을 통해 토지제도 개혁안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경작농민을 본위로 한 것이며, 지주제를 폐지하고 독립된 자영농민을 기본단위로 삼는 국가가 되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일부 실학자들은 상공업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로는 유수원(柳壽垣)·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북학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능력에 따른 분업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직업 윤리를 제시하는 한편, 수취체제의 개혁과 중앙과 지방 행정제도의 개혁, 그리고 국방력 강화를 주장했다. 세번째로 연구분야로는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을 들 수 있다. 실학자들은 자연을 사변적이고 규범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순수존재로 파악하는 과학적인 자연관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고 또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점성학은 순수한 천문학으로 발전 할 수 있었으며, 의학은 주술적 차원과 결부되어 있던 것을 순수한 의학으로 발전했으며, 역학은 수학으로 발전했다.*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유학으로서의 실학주자에 의해 해석된 유학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 지식추구의 경향을 띠는데 대해 회의를 나타내며 원래 유학경전의 본 뜻을 직접 주체적으로 해석해 내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장애가 되는 계층적 신분구조와 생산계층을 천시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밝히는 원시유교정부·귀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부분적인 제도상의 개편으로 종래의 전통사회의 고수를 꾀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함으로써 사회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흔히 이념적인 모델을 주례(周禮)와 같은 고대중국의 제도에 두었으나 그것은 그대로 복고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부정의 한 수단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제기된 현실적인 문제의 타개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비판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포부와 이상을 그려서, 종래의 단편적인 시폐론(時弊論)을 넘어 각기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상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 중에서도 토지제도의 개편을 기본적인 것으로 여긴 것은 그들의 관념이 전통적인 토지 경제에 집착되어 있는 중농주의 사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족의 침구(侵寇)로 인한 전지(田地)의 황폐에서부터 시작되어, 전란 후에 한층 더 심해진 대토지 점유의 경향과 수취체제의 개편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부세(賦稅)의 전세화, 화폐의 악순환 등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토지문제를 더욱 긴박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회경제나 정치제도에 광범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기호(畿湖)의 양반학자 또는 전라도 지역의 학자들로 모두가 재야(在野)학자였다.②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조선후기의 실학자 중 상공업이나 기술도입론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학파.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서울에 있어서는 정부의 금압(禁壓) 하에서도 일반 자유 상인과 도고상인(都賈商人)의 활동이 공인(貢人)의 대두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도시의 서민은 양반까지를 포함해서 이제 토지경제에만 의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울의 일부 학자 사이에는 상업을 일으키고, 생산도구나 유통수단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고, 기술의 개발 내지 도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업의 진흥과 기술의 도입·개발이었다. 이들은 .
    인문/어학| 2003.12.04| 11페이지| 1,000원| 조회(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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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고조선개관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고조선의 성립과 위치 문제2. 고조선의 왕과 단군왕검3. 고조선의 전개와 발전-발굴된 유적와 유물을 중심으로-18조금법4. 고조선의 대외관계5.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멸망1위만조선의 통치조직2위만조선의 경제수단의 발달Ⅲ. 결 론Ⅳ. 참고문헌Ⅰ. 서 론일제시대에는 고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왕검을 일개 토지신으로 매수해 우리나라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없애려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조선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가로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있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라는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또한 단군신화에는 고대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 반영이 반영되어 있다. 고조선에 대한 문제를 다룰때에는 우리가 그의 자손임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며, 자긍심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가지고 고조성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Ⅱ. 본 론1. 고조성의 성립과 위치문제고조선의 성립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간군신화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굳이 단군신화인 환웅이 내려오고 곰과 호랑이 얘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에 생략하겠다. 환웅의 하강은 외래집단의 이주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으며, 따라서 단군은 유이민과 토착주민 양자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곰과 호랑이를 통해 당시의 동물숭배(토테미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환웅이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는 내용을 통해 나무를 숭배하는 수목신앙, 즉 정령신앙(애니미즘)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환웅이 인간세계로 내려오면서 데리고 온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모두 농경과 관련된 신으로, 당시가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진 사회임을 알 수 있다. 환웅이 곡식 ·형벌을 비롯한 인간의 360가지 일을 관장했다는 내용에서 360 이란 1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1년 내내 온갖 일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이를 조정하고 처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가 이미 분화하여 지배계급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권위를장으로서 실학자들과 신채호, 정인보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단군릉 발견으로 중심지의 문제가 새로이 정리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심지이동설은 앞의 두 의견을 절충한 것이다. 즉, 고조선이 초기단계에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후기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는 입장이다. 이 의견이 현재 남한학계의 주된 경향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고조선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이와같이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건대, 고조선은 대동강과 요하유역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 고조선의 왕와 단군왕검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의 통치자는 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사상을 바탕으로 한 단군신화에서 단군왕검으로 불리는 통치자가 등장하고 있다. 이 때 단군과 왕검은 각각 제사장과 정치적 통치자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므로 단군왕검은 일개인을 말하기보다는 당시 제정일치 사회에서 존재했던 집단의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는 단군왕검의 재위 기간이 무려 1908세까지였다는 기록을 이해하는 데에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오늘날 티벳의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가 대를 이어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리고 그밖에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고조선의 왕으로는 부왕(否王), 준왕(準王), 위만왕(衛滿王), 우거왕(右渠王), 장(長)이 있다.좀 더 자세히 고조선의 통치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을 찾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볼수 있다. 최초로 단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유사』이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지니고 무리 3000을 이끌며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에 내려와 세상을 다스렸다. 그 때,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왔고, 신령스러운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100일 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후 단수신과 혼인시켜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삼국유사의 것으로 단군이 곰과 환웅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의 탄생을 곰과 신의 결합이 아니라 신과 신의 결합으로 보아 보다 신성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조상이 나무라는 생각은 8-9세기에 북아시아를 제패한 회골족(回 族)의 시조신화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그에 비해, 동물을 인간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수조신화(獸祖神話)의 요소는 수렵문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요소가 동북아시아에 있는 여러 민족의 시조신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특히 퉁구스족 사이에 곰을 인간의 조상으로 하는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한국 고대의 신화에서도 후대로 갈수록 동물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제왕운기의 기록보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참고로, 조선 초의『응제시』에서는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개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 기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모두 1000년 이상의 긴 시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수명으로 볼 수는 없는 시간의 폭이다. 따라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군, 나아가 단군왕검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알아야만 하겠다.단군의 어원으로 무당을 가리키는 당굴 이나 몽고어에서 하늘(天)을 의미하는 탱그리 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부지역에서 무당을 당골 이라 부르는 것과도 통하는 것이다. 또한, 곰을 시조로 하는 퉁구스족의 영웅 다루가니라는 영웅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원나라 때 라마교 사원의 최고 성직명인 단주(壇主)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검 은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君長)을 가르키는 순수한 우리의 칭호이다. 결국, ‘단군왕검’은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왕이었던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통치자를 말하는 명칭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다면,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고조선 시기의 의 구역을 정하고 그 안에 무려 23개의 무덤 구덩이가 있는데 그 구덩이마다 여러 유골들이 묻혀 있다. 따라서 이 무덤을 주인이 죽은 후 가족과 노예들을 같이 묻어 순장한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고조선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는 의견이 있어 왔다. 그러나, 유골을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이 죽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이 무덤은 순장무덤이라기 보다는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묻힌 무덤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이와 같은 성격의 집단 무덤으로는 누상무덤, 침촌리형 고인돌 등이 있다.고조선 사회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 주된 농기구와 생활용품은 석기였다. 대신 청동으로는 도끼, 끌, 송곳 등의 작은 공구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비로소 철제 농기구가 나타나지만 이때에도 역시 주된 재료는 돌과 나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이러한 도구를 가지고 고조선인들은 벼, 조, 기장, 수수, 콩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고 농사에서 중요한 일기를 알기 위해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평안남도 용덕리 고인돌에 그려진 그림을 별자리라고 보기도 한다. 생활에서는 온돌난방이 시작되었고 음식을 쪄 먹을 수 있는 시루도 사용되었다. 베틀을 이용해 옷감을 짰는데 이미 비단과 같은 고급품도 만들고 있었다.이상과 같이 다양한 농기구를 이용해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으며, 인구도 많이 증가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잉여생산물의 축적으로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로 사적 소유가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 또 청동제 무기를 이용해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더욱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그 재산을 축적하는 방법으로 노예를 부리게 되었다.또한, 철기시대에 들어오면 농기구와 무기는 더욱 발전하여 이를 소유한 계층과 소유하지 못한 자간의 빈부격차가 훨씬 커지게 된다. 이러한 계급간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 기자가 가르치고 시행했다는 *8조법금이다. 8조법금을 통해 당시 노예제가 엄격히 존로 보인다. 즉 정복전쟁을 통해 노비를 조달해 오던 방식이 한계에 부딪히자 이제는 고조선 사회내에서 자체적으로 노비 수요를 충당하려고 했던 것이다.4. 고조선의 대외관계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는 중국의 요(堯)ㆍ순(舜)의 시대로부터 서주(西周)ㆍ춘추(春秋)ㆍ전국(戰國)ㆍ진(秦)ㆍ서한(西漢) 초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2,209년 중국의 제순(帝舜)시대에 중국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중국과 교류하며 발전하였다.그러나 춘추시대에 들어와 중국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양국간의 사신왕래가 일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연(燕)나라가 영토 확장 야욕으로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이후로 고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또한 한(漢) 대에 이르면 위만조선은 활발한 중계무역활동을 통해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시켜 나갔다.고조선과 중국과의 교류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증거로 명도전을 들 수 있다. 명도전은 전국시대 말부터 진대까지 북중국에서 사용된 화폐인데, 요동지방과 한반도의 서북부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성지나 주거지 같은 생활유적지에서 단지나 나무상자에 담겨서 담장 옆이나 외딴 곳의 구덩이에 묻혀 발견되고 있다. 이들 화폐는 당시 고조선과 인근 국가들 간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한편, 고조선은 중국 외에 중앙아시아ㆍ시베리아, 그리고 일본과도 교류를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는 강상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중에는 동남아시아나 남부 중국산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5.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멸망중국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전국 7웅 중에 연(燕)나라가 있었다. 전국시대라는 분열된 시기를 거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나라가 진(秦)나라이며 연(燕)나라도 강력한 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오래가지 않아 멸망하였고, 5년간의 혼란기를 겪은 후 다시 중국을 재통일한 것이 유방의 한(漢)나라이다. 유방은 통일 후에 지방 제후를 임명하면서
    인문/어학| 2003.11.17| 8페이지| 1,000원| 조회(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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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이승휴의 생애와 그의 사상
    이승휴의 생애와 그의 사상목 차들어가면서1. 출생 및 생애2. 이승휴와 『제왕운기』3.『제왕운기』 저술 의도 및 내용4.『제왕운기』에 나타난 이승휴의 역사인식 태도마치며...들어가면서이승휴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관료로써 우리나라의 최초의 개국에 대한 설화가 실려있는 『제왕운기』를 편찬한 역사가로써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제왕운기』는 역사서 라는 분야 외에도 민족대서사시(民族大敍事詩)로써 국문학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승휴의 이러한 업적을 알기에 앞서 그의 출생 및 성장과정과 그의 사상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겠다1. 출생 및 생애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 휴휴(休休)라 칭하며 최신무인정권의 시기였던 1224년에서부터 원간섭기인 1300년까지 76년 동안 우리의 민족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고종 39년(1252) 문과에 급제한 후 김준, 임연등의 무인정권이 몰락하는 시기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삼별초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며 원간섭기 시기에 정치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좌절하고 마침내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치게 된다. 즉 그의 일생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간섭 속이라는 복잡 다단한 국제 관계 속에서 민족적 시련을 절실히 느끼며 살다간 일생이라 평가를 내릴 수 있다.이승휴의 출신 배경을 살펴보면 가리이씨의 시조로써 가리이씨 중 이승휴 이전에는 알려진 인물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름 없는 가문의 출신 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관인 가리현과 멀리 떨어진 삼척 출신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점이나 이승휴의 종조모가 북원군부인 원씨로써 태복경 임천부의 부인이었다는 사실등을 미루어 보아 이승휴의 아버지는 중앙에서 낮은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러한 토대로 말이암아 당대의 이름있는 유학자인 신서(申 )로부터 좌전, 주역 등을 익힐 수 있었고 명문 사학(私學)인 문헌공도(文憲公徒)에 들어가 학업을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요약하면 이승휴는 무인정권기를 발판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회 세력이였고 대략 아버지대에 이르러 벼슬을 시작한 가문의 출신 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휴는 17세가 되던 해(1240) 하과장에서 수석하고 당대 최고의 문인인 최자(崔滋)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였으나 최자와 종조모 원씨가 죽어 중앙에서의 근거가 약해지게 되고 몽골의 침입과 가난 등으로 10여년 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당시의 외침과 정치적 혼란속에서 일반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맛보았다. 그리하여 후에 삼별초의 강격정책을 반대하고 몽고와의 화해책을 지지하였다는 점등은 이 당시 체험에 큰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휴는 삼척 두타산에서 용안당(容安堂)을 세우고 은거하면서 불교 관련 저술인 『내전록』과 더불어 역사서인 『제왕운기』를 찬술하였다.2. 이승휴와 『제왕운기』은거 중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편찬하였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일찍히 이승휴는 은거하게 되면 세상에 교훈이 되는 책을 저술하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낸바 있었고 이에 따라『제왕운기』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저술을 시작한 처음 뜻이 고려왕조가 처한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제왕운기』를 살펴보면 이승휴는 유교적 합리주의사관에 입각하였음을 내세우면서도, 단군신화와 같은 비합리적인 여러 설화들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교일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왕조의 창업에 얽힌 신이한 설화를 유교의 천명사상(天命思想)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유, 도, 불의 삼교의 가르침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음을 믿는 등 유연한 사상적 취향을 보여왔으므로 합리적 사관에 입각하였음에도 여러 비합리적인 설화들을 서술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과 같은 취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제왕운기』는 1287년 충렬왕 13년에 저술되었다. 이승휴가 64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이러한 역사서를 찬술한 이유는 고려의 현실에 대한 관점에서 비롯된 일 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무인정권의 붕괴 등으로 왕정이 복고되고 원과의 화친이 이루어짐으로써, 고려가 다시 태평성대를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고 믿었던 것이다.3.『제왕운기』 저술 의도 및 내용『제왕운기』의 저술 의도는 당시의 두 부류의 정치 세력(충렬왕의 측근세력과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에서의 패배로 끈질기게 국왕의 측근세력들에게 공격을 계속하고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이러한 것이 실패한 데에 대한 반발과 정치 현실에 대한 근심에서 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폐단을 시정하여 충고하는 데에는 역사가 가장 알맞은 소재이므로 역사서술이라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승휴는 처음부터 임금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읽혀 교훈을 얻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제왕운기』를 충렬왕에게 바치고자 하였다. 즉 결론적으로 왕정복고, 원과의 화친으로 얻은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에서 역사의 교훈을 빌어 충렬왕 등을 경계시키고자『제왕운기』를 찬술하였다고 할 수 있다.『제왕운기』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로 군주를 중심으로 역 사를 서술하였다. 충신, 명신과 역적, 간신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책이름이 암시하고 있듯이 어디까지나 그 중심은 군주에 있었다.두 번째로 왕조의 개창이나 중흥을 군주와 선조들의 유덕(有德)에 힘입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우리의 천손사상이나 고려왕실의 신선성을 유교의 천명사상과 연결시켜 해석하였다. 또한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한 내력을 지니는 단군(檀君)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우면서, 중국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가 이 땅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세 번째로 왕조의 쇠망은 군주의 실덕(失德)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하였다. 『제왕운기』를 살펴보면 왕조를 멸망으로 이끄는 군주의 실덕에 대한 내용이 충렬왕대의 폐단과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승휴는 무인정권기를 왕조의 존망을 가름할 위기의 시대로 보았고 따라서 충렬왕은 덕을 닦아(修德) 다시는 그런 위기를 맞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원에 대한 극단적인 칭송과 그런 상황에서의 고려에 대한 찬양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제왕운기』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것은 군주의 수덕(修德)에 대한 것인데 충렬왕의 수덕과 원의 후원을 토대로 고려왕조가 계속 번영하기를 바람에서였다.제왕운기의 사서로써의 성격을 살펴보면 『제왕운기』는 찬자개인의 관심을 자유로이 드러낼 수 있는 사찬사서(私撰史書)이면서, 관찬(官撰)으로서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우리민족의 역사범위를 확대하고, 그것을 체계화하였다. 단군신화를 수록하고 단군조선이 삼한으로 계승되고 이것이 고려에까지 계승되었다는 인식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유교에 바탕한 도덕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서였다. 역사의 교훈성등을 강조하며 허황된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사실만을 수록하였다.
    인문/어학| 2003.11.03| 5페이지| 1,000원| 조회(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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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 판화에 대하여 평가A좋아요
    < 판 화 >>♠판화에 대하여판화는 조각에 있어서 소형의 브론즈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예술작품의 복제수단으로 널리 보급되어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복제의 예술이며 기술이다. 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필요에서 불경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삽도(揷圖)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활자도 유효한 수단이었으나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의 민중에게 호소하는 데는 도상이 문자보다도 한층 유효한 수단이었으며 이런 유의 판화에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도 있으나, 대개 문화사적 기록이나 자료로서 가치 있는 것이 많다.이러한 순예술적 목적 이외의 이의적(二義的) ·종속적인 복제성 때문에 판화 일반을 회화 등의 1점 생산의 오리지널한 것에 대하여 예술성에서 다소 소극적 평가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근대 ·현대에 이르러서는 판화개념이 달라졌다. 사진의 발명으로 복제수단으로서 기능을 다하고, 판화나 회화가 기계적인 사실성 추구라는 점에서는 사진에는 미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국면을 연 것이다. 즉 휘슬러 ·고갱 ·툴루즈로트레크 ·보나르 ·뭉크 등 19세기 말에 활약한 화가들의 목판화나 석판화는 삽화적 ·설명적인 성격이 강했던 종래의 판화의 틀을 대담히 타파하였다.20세기에 들어서도 칸딘스키 ·놀데 ·키르히너 등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은 목판화에서 새로운 표현가능성을 찾았으며, 초기의 피카소 ·브라크 ·비용 등도 큐비즘적인 시점을 그대로 판화의 세계에 도입함으로써 ‘오리지널 판화’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1) 역사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판화는 868년 중국 당(唐)나라 말기에 만들어진 목판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변상도(變相圖)의 석가설교도(釋迦說敎圖)이다. 음각 ·양각의 석면(石面)에서 취하는 탁판(拓版)이며 기원 ·공양을 위한 인형식(印形式)의 소불상 등이 판화되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송(宋)나라 이후는 서적의 삽화용 목판이 성행하였고,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매우 정교해지고, 원(元)나라 때 세속적으로 성행한 연화(年畵:新年의 장식화)는, 명(明)나라를 거쳐 청(淸)나라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 2세기 초 중국에 출현한 제지(製紙)기술은 14세기에 유럽에 전하여져 동세기 말부터 15세기에 날염용 목형(木型)을 헝겊에서 종이로 진보시켜 목판화를 낳게 되었다. 남독일 ·이탈리아에서 호부(護符)의 성상(聖像)이 판화되고, 15세기 중기에 출현한 활자의 판과 결부되어 목판삽화가 되고, 처음에는 판목에 먹을 칠하여 종이를 덮고 그 위를 문지르는 프린트방식이었으나 16세기 초에는 활자인쇄기를 사용한 다색(多色)인쇄를 하게 되었다.15세기 중기부터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금속오목판[凹版]이 출현하고 마침내 이 표현에 적합한 동판이 발견되어 양감(量感) ·원근(遠近) ·명암(明暗) 등의 르네상스 사실(寫實)을 발전시켜 16세기 후기 이후는 목판을 압도하여 유럽에 있어서 판화의 전통을 만들었다. 부식법의 에칭도 뒤늦게 시도되었으나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이고 18세기에는 메조틴트[點刻版] ·아콰틴트 등이 성행하여 점차 복제기술화 경향을 낳았다.18세기 말에는 두 가지 새 기술이 생긴다. 하나는 뮌헨의 제네펠더가 소개한 석판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의 토머스 뷔크에 의한 세로[斷面]목판이다. 전자는 금속평판으로 이행되고, 후자는 볼록판[凸版]활자와 짜맞추어 1공정 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사진술 및 동력인쇄기의 출현에 의해서 복제기술의 경향을 띠고 있던 긴 판화의 역사는 인쇄공장에서 사진제판과 대량생산으로 바뀌었으나, 19세기 후반 이래 이 변화에 저항하여 화가 스스로가 판을 만들어 회화표현의 창작판화가 어느 나라에서나 생겨 지금에 이른다.2) 종류판화는 판의 종류에 따라 볼록판 ·오목판 ·평판(平版) ·공판(孔版)의 네 가지로 나뉜다. 이 밖에 볼록판의 볼록부에 물감을 칠하지 않고 덮은 종이 위에서 물감을 문지르는 형식의 탁판이 있다. 판의 재료는 매우 많으며, 벚나무 ·박달나무 ·배나무 ·단풍나무 및 합판 등을 쓰는 목판 외에, 종이 ·천 ·수지제품 ·화학제품 ·광물 등 다양하나, 볼록판형식에서는 목판, 오목판형식에서는 동판, 평판형식에서는 석판이 판 재질에 의한 대표적 호칭으로 되어 있다.목판은 판목 사용법에 따라 판면(板面)목판과 세로목판으로 나뉘고, 동판은 오목부[凹部]를 만드는 방법에 의하여, 수공적(手工的)으로는 드라이포인트 ·조각동판(彫刻銅版) ·점각판(點刻版), 약제의 부식성을 이용한 것에 에칭 ·에콰틴트 등이 있으며, 석판에는 지금까지 석재를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징크판(금속평판)이고, 공판은 판지(板紙)를 사용하는 동유지판(桐油紙版)에서 등사판 ·실크스크린 등으로 발전하였다.작가가 자기 그림을 판에 의하여 표현하는 경우를 창작판화라 하고, 기작의 그림을 양산을 목적으로 판에 의하여 복사표현하는 경우를 복사판화라고 한다. 또 단독으로 감상되는 것을 독판 또는 단판, 두 장 이상이 1조가 되는 것을 연작(連作), 그 가운데서 스토리에 의해 구성되는 것을 연속판 또는 연작판이라고도 한다.3) 제작판화의 제작은 원화 ·제판 ·쇄판(刷版)의 3단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원화는 판재(版材)에 직접 그리는 직접원화와, 종이 등에 그린 것을 판재로 덮거나 판지 등을 써서 전사(轉寫)하는 전사원화가 있고, 완성 후의 직접원화 화면은 좌우가 역위치가 된다. 복제판화에서는 이 경우, 원화를 복사한 사진을 이용하는 수가 많다. 목판 ·동판의 제판에서는 요철부를 나타내기 위해서 나이프나 철필 등을 사용한다. 동판에서는 산성(酸性) 약제에 의한 부식을 하고, 돌 또는 금속의 평판에서는 물과 기름의 반발작용이 이용된다. 공판도 수공법과 약액법(藥液法)이 있고, 이것들은 거의 병용되어 복잡한 화면효과를 낳고 있다.판화에는 단색과 다색이 있는데, 단색에서는 밝은 바닥에 암색(흑색)으로 그림을 나타내는 양각(陽刻)과 반대로 암색 바닥에 밝은(백색) 화선(畵線)으로 표현하는 음각(陰刻)이 있고, 중간의 것은 선의 강약 ·조밀 ·교차나 점의 다소 또는 선염법(渲染法) 등을 쓰며, 단색과 다색의 사이에는 판 효과를 해하지 않을 정도로 필채색을 가한 것[單色筆彩]이나 바닥에 색이 있는 종이를 쓰거나 하는 방법이 있다.다색판화에서는 필요한 색의 수대로 판을 쓰고, 프린트를 거듭하기 위해서 용지를 고정시켜 색면의 엇갈림을 방지한다. 다색판화는 원화를 보면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림의 윤곽선을 찾아, 먼저 제1의 판[主版]을 만들고, 그것에 의해 차례차례 색면판을 만드는 주판법과, 전화면에 펼쳐지는 선묘 등이 없을 경우, 각각의 색면을 떠서 다수의 색면판을 만드는 색면법이 있고, 또 미리 종이를 암색으로 하여 음각의 한 판을 명색으로 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차적으로 여러 판을 쓰는 음각법도 쓴다.제3단계의 쇄판에서는 프린트하는 도구가 중요하며, 동양의 목판에서는 부드러운 죽피(竹皮)로 만든 공을, 유럽에서는 활판교정기(活版校正機) 등을 사용한다. 동요판(銅凹版)의 경우는 원통형의 압반(壓盤)에 의하여 오목부의 잉크를 종이에 전사하는 데 적합한 원압방식(圓壓方式)이 쓰이고, 돌이나 금속의 평판에서는 판을 덮는 금속판을 강압하면서 찍는 찰과압장치(擦過壓裝置)가 일반적으로 쓰인다. 판의 물질이 엷은 공판의 경우에는 판도 압반과 함께 원통형으로 한 윤전압(輪轉壓)도 이용이 가능하다.판의 화재(畵材)에는 수성과 유성이 있는데, 목판처럼 어느 것이나 가능한 경우는 적다. 금속오목판이나 평판은 유성이고, 볼록판에서는 세로목판 ·지판(紙版) ·석고판 ·리놀륨판 등에는 유성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韓紙)가 가장 유효하게 쓰인다. 그러나 흡수성이 강하므로 특수한 경우 이외는 아교에 백반을 섞어 반수(礬水)를 발라 흡수성을 조절한다.♠판화의 일반적인 특징① 복수성(같은 그림을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다.)· 평판화의 모노타이프는 1장 판화로 예외라고 할 수 있다.② 실용성(생활에 활용할 수 있다.)③ 간접표현(판을 만든 후에 찍어낸다.)④ 좌우가 바뀜(판과 찍은 그림의 좌우가 바뀌게 된다.)공판화는 좌우가 바뀌지 않는다.⑤ 독특한 美(판재나 기법에 따라 독특한 효과를 낸다.)
    예체능| 2003.10.28| 6페이지| 1,000원| 조회(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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