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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문서] 한단고기
    『桓檀古紀』의 고고학적 증거目次{Ⅰ.서론Ⅱ.본론1. 한단고기란?2. 한인시대와 구석기문화3.한웅시대(桓雄時代)와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1)한웅과 웅호족의 관계2)신시(神市)의 위치 비정3)한웅시대의 거점 검토4.단군시대와 청동기문화Ⅲ.결론Ⅰ.서론우리의 민족은 고대로 부터는 중국의 영향을 받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역사가 왜곡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는 외세의 침입을 받으면서 고조선의 넓었던 영역이 줄어들면서 조선조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중국의 학문으로 인하여 사대주의 사관으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우리나라의 주체적인 사상이 줄어들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단고기(桓檀古紀)』란 우리의 주체적 사상을 확립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에 나라를 맏겼던 시기인 1911년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을 잃어버린 시기에 우리 민족을 다시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 같다. 이러한 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유사(三國遺事)』 활자본. 5권 2책.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이 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 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삼국유사』의 신간본(新刊本)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東京大學文學部] 의 사지총서본(史志叢書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과 계명구락부 (啓明俱樂部)의 최남선 교감본(校勘本) 및 그의 증보본(增補本)이 있으며, 그 밖에 1921년 안 순암(安順庵) 수택(手澤)의 정덕본을 영인(影印)하여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총서京都大學文學 部叢書)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古典刊行會本)이 있다. 8 ·15광복 후로는 삼중당본 (三中堂本), 1946년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高麗文1975년 교단의 교무회의에서 경전으로 공인하였으며 1983년의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3장 81자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의 연역이 360자 로 이루어진 『삼일신고』이고 『삼일신고』의 귀납은 다시 이 경전이 된다고 한다.천지장(天之章)은 대우주 생성의 원리를 다루었고, 지지장(地之章)은 만물의 생성을 다루었 고, 인지장(人之章)은 인간 궁극의 문제를 다루었다.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지닌 원리를 통해 천(天) ·지(地) ·인(人)의 삼극(三極)이 태어나[生] 자라고[長] 늙으며[老] 병들고[病] 죽는 [死]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위를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천 ·지 ·인이 한배하느님을 뜻하는 일(一)로 귀일(歸一) 또는 통일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 주의 근본이요 만유의 비롯되는 수이니 하나보다 먼저 비롯됨은 없으며, 그것을 분석하면 하 늘과 땅과 사람의 삼극이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그리하여 민족의 통일이나 인류의 세계일가(世界一家) 건설도, 천지 만유가 하나에서 비롯하 여 하나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필연을 설명한 이 경전의 우주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 이름만이 전하던 것으로서, 위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과 『삼일신고』{) 이것을 신지(神誌)가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 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가 실려 있다.「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2.한인시대와 구석기문화문헌적 검증은 반드시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한 보충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단순한 문헌상의 기록은 윤색, 에 桓仁氏의 國이 있어 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어 한인에 대한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파나류'는 알타이어계통의 말로 천산으로 통한다고 했다. 天을 '하늘'이라 하는 우리말에서 '파나류'는 '하날'과 관련된 발음으로 연상된다. 언어학적 연구가 따라야 하겠지만, 실제로 2만년전 구석기문화가 남부시베리아 일대에서 전개되었는데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곤충과 짐승의 해를 당한 때'는 구석기시대외에는 거의 없었으므로 이 기사는 매우 타당성있는 표현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부시베리아 구석기유적지에서 큰 짐승뼈와 나무가지로 기둥과 지붕을 엮은 반지하식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기록의 정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한인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남부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의 구석기유적들 중에서 한민족의 선조들이 생활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지역의 유골을 조사해 본 결과 황인종에 속하는 몽골리안인데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샘계 백인종의 유골들로 대체된다. 이러한 시베리아지역 구석기유적에 대한 발굴이 1960년대이후에 본격화되고 극히 최근에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한단고기』는 발굴성과이전에 기록된 것이므로 문헌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일치하고 있음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3.한웅시대(桓雄時代)와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1)한웅과 웅호족의 관계『한단고기』에서의 한웅(桓雄)에 대한 기록을 보자. 학계에서는 우리의 청동기문화에 북방적요소를 인정하고 고조선연구에서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시베리아와 연결된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지닌 한웅이란 일단의 세력이 신석기문화적 성격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을 동화시키는 과정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혹은 천신족(天神族)과 지신족(地神族)의 융화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뭏든 두 세력의 융합이란 차원에서는 같은데, [한단고기]는 이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한웅에 대한 내용의 거의가 한인으로부터 천부인 3가지를 받고 풍백, 우사, 운사 등과 무리려져 있다. 지질학에서는 지구에 네 번의 빙하기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간빙기(間氷期)가 있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빙하기까지를 충적세(Pleistocene期)라 하고 그 이후를 홍적세(Holocene期)라 한다. 홍적세이후 대략 1만2천년전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해수면도 아울러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한반도가 중국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일본열도는 연해주 캄챠카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구석기시대 말기 2만년전부터 남부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석기문화로 접어들기 전단계의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특히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흑룡강상류와 연해주 캄챠카지역까지 침엽수림이 들어찬 삼림지대여서 비교적 풍부한 동물군(群)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주의 초원지대 외곽을 둘러싸는 듯한 침엽수림대의 자연환경이 어로와 수렵중심의 구석기시대 말기인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었고 유적 또한 다수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다가 홍적세이후 기온이 상승하면서 인류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게 되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바야흐로 문명의 개화가 이룩된다. 기후분포를 보면 발해연안은 8천년전부터 현재보다 3∼5℃정도 높은 기온과 다습한 난온대기후의 성질을 띠고 있었으므로 일찌기 농경이 발달하기 유리한 지역이었다. 요동반도 남단 대고산(大孤山)지역의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수목(樹木)의 변화 및 발해의 해면변화를 보면, 5천년전(B.C.3,000)부터 3천년전(B.C.1,000)까지에는 비교적 온도가 높았으나 습도가 낮아져 상대적으로 굉장히 건조해 졌고, 3천년전부터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 추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기후로 변하였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후변화에 따른 인류생활의 변화이다. 기후가 크게 변하는 시기가 홍적세이후 세차례나 있었다. 8천년전과 5천년전, 그리고 3천년전 등인데, 이러한 변화는 이 지역만이 아닌 범세계적인 추세였다. 당시의 요동반도 남부지역 식물분포의 정황을 보더라도 요녕남부지역에는 낙엽활엽수 과 돌낫의 출현, 식칼 ·톱 ·낫 등의 패 기(貝器)의 사용, 골점(骨占)을 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기는 농경과 목 축의 병용기로서 양샤오문화기에 비하여 농경기술이 진보하고, 가축의 수도 증가하였지 만, 사회형태는 계급차이가 현저히 발달하지 못한 단계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의 주인공으로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비정한다. 이리두문화는 앙소문화를 계승하여 대문구문화의 요소도 받아들인 초기청동기 문화단계로 인식된다. 이점은 산동지역 용산문화와 요녕지역 하가점하층문화도 마찬가지이다.홍산문화 다음단계로 같은 지역에 하가점하층문화의 초기청동기문화가 전개되는데 둘 다 농경문화에 속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에 대해서 앞단에서 언급했었지만 그외에도 여인상(女人像)이 다수 출토되고 있고 또한 최초로 용(龍)의 형상을 창출해 옥기(玉器)로 표현하는 등 독특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여인상은 비중국적인 특징으로 남부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말타(Malta)유적등에서 다량 발견되고 유럽지역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지모신(地母神) 숭상의 전거로 인식한다.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이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관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지역 요녕성 능원현(凌源縣)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러한 돌무덤들은 후에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석실묘(石室墓:돌방무덤), 지석묘(支錫墓:고인돌) 등으로도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만주일대와 한반도전역에 분포하고 있고 이것은 바로 고조선의 대표적인 묘제이기도 하다.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墓葬法)이다.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은(殷)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土廣墓)가 유행하였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곽묘(木槨墓)가 유행하였다. 역사상에서 다.
    인문/어학| 2001.12.05| 15페이지| 2,000원| 조회(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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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 이론 평가C아쉬워요
    근대화 이론과 종속 이론목차1. 당시의 사회적 배경2. 근대화 이론3.종속이론4.근대화 이론과 종속이론의 차이점1. 당시의 사회적 배경최근 몇 해에 이르러 한국의 사회과학계에서도 종속이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이론의 소개를 넘어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분석도구로서의 유용성 문제에 대한 토론도 일고 있다. 이렇게 종속이론이 한국의 사회과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향은, 60∼70년대에 한국사회의 분석도구였던 발전이론이나 근대화론이 상정했던 경제의 양적 팽창, 즉 고도성장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근대화가 곧 발전인가란 의문과, 경제가 발전하면 정치도 민주화한다는 그 이론들의 가정은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즉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소득분배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으며, 막대한 외채의 증가, 국민의 대다수를 정치과정에서 소외시키는 권위주의적 정치체계의 경직된 성격 등, 경제가 양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심화되고 있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인 왜곡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발전이론이나 근대화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종속이론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종속이론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발전 경험을 설명하는데 얼마만한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종속이론의 등장배경, 그 이론적 특징, 그리고 종속이론의 분석능력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점이 있다.2. 근대화 이론근대화 이론과 종속이론의 차이점을 보면, 이념적인 면에서는 근대화 이론이 자유주의적인 전통에서 친 자본주의적인 발전 방식을 택한다면 종속이론은 마르크스 적인 전통에서 친 사회주의적인 발전방식을 우위에 놓는다는 점이다. 분석의 틀을 보면, '발전'의 파악에 있어 근대화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로 부터의 근대화 이론대성의 확산을 발전으로 보고, 반면에 종속이론은 그 확산이 도리어 제3세계의 저 발전을 이룬다고 본다. 즉 근대화 이론은 발전을 통계수치(국민 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은)와 근대성(사회적 유동성, 문맹, 도시화, 사회적 불평등, 국민적 통합)의 정도로 파악하고, 선진자본주의의 기술, 자본, 가치, 제도 등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다.품목이 뒤떨어지고 전통적인 지역에 확산됨으로써 후진지역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라틴아메리카 사회의 파악에 있어서도 근대화이론은 이중사회론, 즉 한편으로는 봉건적인 상태(농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상황(도시)에 놓여있는 이중사회로 본다. 농촌은 자본주의의 동태적인 힘과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침체되어 봉건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므로 도시의 자본주의가 농촌으로 확산됨으로써 이 지역이 발전되어 가는 것이라 본다.3. 종속이론종속이론은 외국의 침투, 즉 선진자본주의의 팽창이 라틴아메리카의 발전을 위한 힘이 되기보다, 오히려 저 발전을 초래한다고 본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산으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힘이 주변부 지역에 침투하여, 중심부는 발전하고 주변부는 저발전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속이론은 발전을 경제적 측면에서는 경제적 주권의 확립, 투자를 위한 잉여생산, 전체인구의 기본적 필요를 적절히 제공하는 일정수준의 생산성, 분배양식을 포함하는 것이며,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는 평등의 실현, 소외의 제거, 의미 있는 작업의 마련,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들에 관계되는 결정을 스스로 하게 하는 정치적, 사회적 조직의 확립을 의미한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파악에 있어서도 근대화이론이 보듯, 자본주의로의 이행중인 이중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사회로 본다. 농촌의 정체는 고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시와의 상호관계로 심화되고 있어서 도시와 농촌의 자본주의적 연결이 저 발전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 2001.06.24| 3페이지| 2,000원| 조회(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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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과 민족자본 형성의 실패
    개항과 민족자본 형성의 실패1. 머리말우선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할 만한 조짐은 미약하였다. 농촌 수공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면포(綿布) 생산도 문호개방 전까지 공장제 수공업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고, 그 일부가 선대제(先貸制) 생산에 한정된 농촌 부업의 단계에 머물려 있었다.시전상인·공인(貢人) 등 특권상인과 개성상인·경강상인 등 사상인(私商人)의 도고(都賈)상업이 발달했고, 유기(鍮器)제조업·야철업(冶鐵業) 등 약간의 수공업 분야와 광업분야에서 공장제수공업 경영,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의 맹아적인 형태가 일부 나타났다고 논증되었다. 그러나 문호개방 당시까지 그것이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이처럼 토착자본이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단계에서 외세의 강요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어, 보호무역주의와 선진기술의 도입에 의한 국내 산업의 자본주의화는 불가능했다. 외국상품의 무제한적 침입과 국내 원자제의 무제한적 유출을 방지할 수 없었다. 외국 상품의 침투 앞에서 국내 수공업 생산구조는 공장제로 발전하지 못한 채 무너져 갔다. 일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발달했던 광업 분야도 채굴권의 대부분이 외국자본에게 넘어감으로써 자생적 발달의 길이 막혔다.다만 상업자본의 일부가 개항장에 들어온 자본주의 상품을 농촌시장에 침투 시키는 과장에서, 또 쌀·콩 등 농민 생산품을 개항장의 외국 상인에게 모아주는 과정에서 개항 전의 유통구조보다 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재부의 축척이 가능했고 그 일부는 산업자본으로 전환될 조짐이 보였으나 주체성 있는 정부의 의한 정책적 보호를 거의 받을 수 없었던 조건 아래서 우세한 외국자본에 대항하며 독자적으로 성장하기 보다는 그것에 예속되거나 몰락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문호개방 이전의 동양 3국, 조선·중국·일본은 그 지배구조 자체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정도는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조선보다 앞서 구미 자본주의변 이후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1882) 이 장정은 서두에서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관계를 규정했다. 따라서 조선정부의 비준조차 생략하는 일반적인 것이었고, 그 내용에서도 청나라의 특권성이 일관되었다. 치외법권은 말할 것 없고 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권, 즉 호조(護照)를 가진 경우 개항장 밖에서도 통상이 가능한 내륙통상권(內陸通商權)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했다.그 밖에도 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관세, 청나라 기선의 조선 파견권, 청국인에 대한 조선연안 어업권 인정 조항이 있었다. 청나라 쪽은 이같은 특권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나라가 이들 특권을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체결되는 조선과 일본 및 영국과의 조약 개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불평등조약 체계의 확립에 결정적 열활을 했다.조선정부는 강화도조약 당시의 통상장정을 개정하여 새로운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했다.(1883) 이 장정에서는 관세권은 인정하되 개항장 밖에서의 과세가 일체 부인되었다. 개항장 밖에서의 과세는 조청장정(朝淸章程)에서는 인정되었고 조미조약(朝美條約)에서는 수입품만 부인되었다가 새로운 조일통상장정에서는 수출입품 모두에 대해 완전히 부인되었다. 이후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또 '조미조약'과 '조청조약'에서 각각 승인된 연안해운권·연안무역권이 통합 승인되었다. 일본에 대한 최혜국대우가 인정죄었고, 조미조약의 곡물수출 금지권은 1개월 전 사전통보에 의해 방곡령(防穀令)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일본은 이 장정에서 전라·경상·강원·험경 4도의 어업권을 획득했다.같은 해에 영국도 기왕의 조약을 개정하여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고, 이 조약에 의해 불평등조약 체계의 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이 조약에서는 협정관세가 규정되었는데, 관세 이외 일체 개항장 밖에서의 과세가 부인되었으며,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 감소된 반면 일본의 수입이 72.2%로 급신장됐고, 러시아에서의 수입도 1.6%로 증가했다. 청일전쟁 이후의 조선의 외국무역은 다시 일본에게 독점되어갔고 러일전쟁 후 보호국체제로 들어가면서 그것은 더욱 심해져 갔다.문호개방 이후 조선의 외국무역이 약탈적인 방법으로 일본상인에게 독점되어갔다는 사실은 조선상인의 무역업 발달 단계가 철저히 봉쇄되었음을 뜻한다. 일부의 조선상인들이 무역품의 국내 유통과정에서 그 자본규모를 약간 확대해 갔으나 대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는 어려웠다.3)무역의 성격조선의 대일 무역은 한마디로 말해서 주로 소비재 자본주의 제품을 수입하고 곡물과 금·쇠가죽 등 원자재를 수출하는 무역이었으며, 그것도 일본상인이 완전히 주도권을 쥔 것이었다. 우선 수입의 경우 개항 초기에는 카네낀(金巾)·한랭사(寒冷紗) 등 면직물이 전체 수입량의 80%를 차지했고 청일전쟁 이후까지도 70%정도를 차지했다. 겨울옷감 카넨낀과 여름옷감 한랭사는 당초에는 주로 하급관료층, 도시중간층, 농촌의 지주·부농층이 사용하고 일반 농민층은 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명을 사용했으나 차차 농민층에도 이들 자본제 제품이 보급되어갔다. 개항 초기부터 일본상인에 의해 독점된 조·일무역은 특히 면직물의 경우는 사실상 중계무역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적 위협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아직 자국 생산품을 수출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고 주로 선진자본주의 상품을 조선에 재수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출품 중 대종을 이루었던 면직물은 그 대부분이 영국제품이어서 영국상인들이 상해에 가져온 것을 이본상인이 수입하여 나가사끼(長崎)와 오오사까(大阪)를 거쳐 부산으로 다시 수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상인들의 수입가와 수출가 사이에는 높은 가격차이가 있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은 면직물 이외에도 화폐제조 원료로 쓰인 구리(銅)가 많았던 한편 설탕·석유·술·우산 등 당시로서는 사치품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의 무제한적 수입으로 생활필수품의 자본주의 제품화가 촉진된에 이익은 부지만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정책은 아니다. 재정의 정리는 먼저 본위화(本位貨)를 정한 다음 보조화를 발행해야 한다."하고 근대적 화폐제도로의 전환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정변이 실패하여 실행되지 못했다.1891년에는 상평통도 유통량 200만 관(貫), 당오전 유통량 770만 관이 될 만큼 당오전이 남발되었다. 당오전은 당일전 상평통보의 5배 가치 즉 5푼 가치로 강제 통용되었으나 1년도 못가서 명목가치의 절반 이하로 폭락하였다. 돈의 주조 이익이 적어지자 평양감영에서 상평통보의 3분의 1 가치도 안되는 1푼짜리 평양전(平壤錢)을 대량으로 발행하였고(1891) 이 때문에 당일전 전체의 유통가치도 하락하였다.1892년경에는 조선 전역에 걸쳐 당오전·평양전·구당일전이 구별 없이 같은 1푼의 가치로 유통되었고, 1894년에는 당오전을 당일전의 엽전과 같은 가치로 유통할 것을 정식 결정하여 당오전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같은 악화의 남발로 인플레이션 현상이 극심해져 1894년의 경인지방의 쌀값이 당오전이 처음 발행된 1883년에 비해 7배 이상 폭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당오전의 남발로 인해 경제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개화파 관료 김가진(金嘉鎭, 1846∼1922)·안경수(安 壽, 1853∼1900) 등의 주동으로 근대적 화폐제도로의 개혁을 기도한 '대조선국 화폐조례'가 발표되었다.(1891) 외국인 전용 2냥(兩) 은화와 내국인용 1냥 은화를 본위화로 하고, 보조화로서 2전 5푼짜리 백동화와 5푼짜리 동전으 발행하는 한편 종래의 1푼전을 그대로 쓰기로 한 이 화폐개혁안에 따라 신화폐가 일부 발행되었으나 국내 보수세력과 청나라측의 반대, 그리고 화폐개혁을 도우러 온 일본인 사이의 불화 등으로 곧 중단되었다.당오전 발행은 정지되었으나 조약한 1푼전이 계속 발행되고 있는 가운데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갑오개혁이 실시도면서 개혁사업의 일환으로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제정되어 또 한번의 화폐개혁이 실시되었다.(1894) '신식화폐발행장정'은 5냥 은화를 본위다.(1902) 제일은행권은 "한국에서의 금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발행된 것이라 했지만, 사실은 개항장을 비롯한 조선 전국의 제일은행권을 유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인 각국의 차관 대여 경쟁에서 자본축적면에서 열세에 있던 일본이 제일은행권에 의한 자본수출을 기도한 것이다.이 시기 조선에 차관을 공여하는 나라들은 그 대가로 은행권 발행권을 얻고자 노리고 있었다. 일정한 자본수출로 얻은 이윤을 화폐 발행을 통해 더 많이 증식함으로써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려 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당초부터 그 자본수출까지 제일은행권의 발행으로 대신하여 자본축적상의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제일은행권 발행고는 조선 정부와 민중의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로 급격히 증가했다. 1902년의 발행고는 약 60만 엔이었으나 전쟁을 도발한 1904년 말에는 약 337만 엔으로 급증했고, 제일은행 조선지점의 조선중앙은행화가 추진되었다. 러일전쟁 후의 보호국체제아래서 일본 제일은행은 한국정부에 대해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화폐정리' 자금 3백만 엔을 대여하는 대가로 그 은행권을 법화로 승인받고 국고금 취급권을 얻었다. 한편 전환국을 폐지시켜(1904) 한국정부의 화폐 발행권을 빼앗고 '화폐정리사업'까지 담당했다.이로써 일본 제일은행은 명실 공히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된 것이다. 1900년대로 들어오면서 치열했던 조선을 둘러싼 각국 사이의 차관 공여 및 은행권 발행권 획득 경쟁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결국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한층 더 굳히는 결과가 되었다.3)화폐정리사업조선정부의 화폐정책 실패와 일본을 비롯한 외국 침략세력의 작용으로 대한제국 시기 화폐제도의 혼란은 극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개항 이전부터 유통되었던 엽전의 경우 그 형태와 지금량(地金量) 그리고 주조기술의 정도가 서로 다른 것이 1천 종 이상이나 유통되고 있었다고 한다. 개항 후 발행된 백동화는 그 실질가치와 표현가치의 차가 더욱 심해서 정부가았다.
    인문/어학| 2001.06.15| 12페이지| 2,000원| 조회(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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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천국 평가B괜찮아요
    Ⅰ. 머 리 말전근대사회의 민중운동은 피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배층과 지배기구에 대항하여 전개한 투쟁을 말한다. 곧 민중운동은 인류역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현실보다 앞서서 선구적으로 추구해왔다. 맑스는 "문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때부터, 생산은 다양한 계층이나 신분 또는 계급의 적대 관계에 그 기초를 두기 시작한다. 적대관계 없이 진보는 없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까지 문명이 따라온 법칙이다. 현재에 이르기 까지 생산력은 다양한 계급의 적대관계라는 체제덕분으로 발전해왔다.") k. marx 「철학의 빈곤」고 서술하였다. 그러면 19세기 중국사회의 모순과 극복을 위한 민중운동은 어떠하였는가?중국의 太平天國運動은 1851년 1월 정식으로 기의를 선포한 이래 1864년 7월 실패할 때까지 14년간 中國의 봉건왕조에 대치하는 民衆적 정권을 수립하여 18개 성과 6백여개의 도시를 점령.유지시켰다.太平天國運動은 청말에 누적되고 있던 대내외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대사건이었다. 따라서, 太平天國이 19세기말의 청조의 정치적 실정과 中國의 농촌 분해과정에서 비롯되는 봉건적 토지 소유의 모순과 아편戰爭으로부터 제기되는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모순을 어떻게 표출했으며,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정책 및 그 문제점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Ⅱ. 사회경제적 배경강희.건륭기의 안정을 배경으로 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의 증가는 거의 정체에 가까웠다. 1784년 인구는 2억 8,633만 명인데 비해 경지 면적은 7억 1,833만 畝로 1인당 경지 면적은 2.51 畝였고, 1812년에는 3억 6,169만 명의 인구에 7억 9,202만 畝의 경지 면적으로 1인당 경지 면적지가 2.19 畝에 불과했다. 이러한 가운데 경제적 상태를 개선시키려는 전호들의 부단한 노력은 상품경제의 발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抗租運動의 양적, 질적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여 지주-전호간의 모순과 대립은 나날이 격화되었다. 또한, 流民적 존재가 대량으호북, 강서, 복건북변까지 이동한 시기로 그 기간은 수당대까지 계속된다.제 2기는 당말의 황소의 난(A.D.875)을 계기로, 중원한족이 강서의 동남부, 복건의 서남부 및 광동의 동북변경까지 이동한 시기이다. 이것은 당대까지 지속된다.제 3기는 송의 남천(A.D.1127)과 원의 침입에 의해, 제 2기의 구거주지로부터 다시금 광동의 동북부로 이동한 시기로서 명말까지 이어진다.제 4기는 청의 침입(侵入 ; A.D.1662)에 의해 제 3기의 구거주지로부터 사천 광서태만(廣西台灣)등으로 이동한 시기로 동치년간까지 지속된다.마지막으로 제 5기는, 동치 6년(A.D.1867)에 발생한 토객간의 항쟁을 계기로 광주서남부의 新興, 恩平, 鶴山, 台山일대에 거주하던 객가가 적계(赤溪)와 해남도 해되등으로 이동하는 시기로 현대에 이르고 있다.이상과 같은 객가의 남천시기와 경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남하가 단순한 생존문제에 그치지않고 중국의 동난(動亂)과 밀접한 관계는 있다는 점이다.특히 제 4기에 있어서 그 남하의 정치적 배경이 청의 침입이었고 남하지역이 광서인 것은, 청과 태평천국과 광서기의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 남하기간중 객가가 다른 민계(民系)와는 다른 독자적 문화체계 - 기질 풍습 -를 형성한 집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제 2기의 구거주지로부터 제 3기의 이동을 개시한 시기 즉 송말원초이다.이 시기의 신거주지 해현은 강서, 광동, 복건의 삼성이 교차하는 삼각형의 산간지대였다.해현은 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오대·송대의 혼란기를 경과하는 중에 객가고유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즉 해현이라는 산간벽지에 틀어박힌 객가가 필연적으로 봉착한 것은 토착민의 차별속에서 자기생존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토비(土匪)와 도적(盜賊)으로부터 오는 生存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비적의 끊임없는 창궐과 험난한 자연환경속에서 객가들은 역경의 극복과정에서 객가 특유의 기질즉 객기가 배양되고 투쟁성과 저항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이 해현을 중심으로 직인 배상제회)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洪秀全)은 남경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43년에 기독교를 환골탈태시켜 혁명적 신종교를 창립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주재자로 간주되어 왔던 상제(上帝)를 여호와와 동일시하여, 여호와야말로 유일무이한 참된 신이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천하의 남녀는 모두 그의 자식으로서 형제·자매이므로 그 사이에 차별·대립·항쟁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배상제회(拜上帝會)의 발생이고 간략한 내용이다를 창립한다. 그런데 처음 순수한 종교집단으로 시작한 이 배상제회의 모임에 그 동안 삶의 뿌리를 잃고 다른 집단에 의해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객가인들과 소작농, 광부, 숯쟁이, 유민들이 가입하면서 새로운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도광 25, 26년(1845∼46) 경에 홍수전은 『原道求世歌) 동서 고금의 유링한 진짜 신이 상제이며 모든 사람의 공동의 아버지라 선전하였다.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것은 옛부터 전해져 왔는' 등 정치적 평등의 소망을 표출하고 있지만 그러나 빈부는 命이 있다거나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는 등의 유가 사상을 제창하기도 했다.』, 『原道醒世訓)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지적하고 소박한 평등.균등 사상을 표현하였다. '대도가 행해져서 천하가 공평하게 된다'는 大同사상을 들어 '천하가 한 가족이 되어 태평세월을 함께 누린다'고 희망하였다.』, 『原道覺世訓) 청조의 통치자를 '염라 요괴' '늙은 뱀 요괴' 라고 하며 인민이 '함께 공격하여 멸망시키자'고 호소하며 투쟁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를 완성했다. 이 책들에서 그는 상제와 그 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정치·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신선, 공자, 맹자, 천황제는 염라요, 관리와 군대를 요도, 귀졸이라 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전통 중국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만주족 정부를 비판함으로써 한족의 단결을 자극하는 것이었다.1847년, 홍수전이 자형산의 배상제회에 합류할 때 배상제회의 하지 않았고,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익왕 석달개가 무창에서 달려와 북왕을 문책하려 했다. 위기를 느낀 북왕은 즉각 익왕부를 습격하여 석달개의 모친, 처자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을 살해하자, 기습을 당한 익왕은 간신히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왕은 그 여세를 몰아 익왕을 천경으로부터 축출시켰다. 옛 동료의 손에 가족을 잃은 익왕이 호북에 있던 부하를 인솔하여 청군에게 향했던 창을 천경으로 돌려 진격하자, 천왕 홍수전은 그때서야 북왕과 그의 가족, 부하들을 참수했다.이 사건으로 태평천국을 일으킨 주요 인물들 가운데 남은 사람은 무능력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천왕과 익왕뿐이었으나, 체제에 회의를 느낀 익왕 석달개는 홍수전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천경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떠 홍수전의 휘하에는 유능한 군사지도자로 진옥성, 이수성이있어 그럭저럭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태평천국을 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이렇게 태평천국의 위세가 약화되고 홍수전이 더욱 미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나타난 인물이 홍인간(1822∼1864년)이다. 그는 초기 홍수전이 배상제회에 몰두할 때 그의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봉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후 홍인간은 홍콩으로 가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정식 교리를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어 천경에 나타난 것이다.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그의 등장은 태평천국에게 다가온 새로운 전기라고 할 수 있다. 홍수전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천경으로 온 홍인간을 반가이 맞이하여 간왕으로 봉하고 모든 실권을 넘겨주다시피 했다. 서구 교육을 받은 홍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 근대화로 넘어가는 세계속의 중국의 위치를 잘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뜻하지 않게 막중한 임무를 맡은 홍인간은 먼저 백성들에게 기도를 하게 함으로써 신앙면에서의 단결을 꾀하는 한편, 홍수전에게 「資政新篇」을 제출하여 정치적 개혁을 도모했다. 「資政新篇」은 서양 자본주의 전신과 경제제도에 따라 태평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싣고 있었다. 이에는 광산의 채굴, 도는 그것을 집행할 관직이나 관리가 없고, 구체적인 실현방안, 즉 전의 등급에 따른 결전 給의 비율과 1인당 결전의 크기, 分田과 給田을 위한 토지와 인구 조사에 관한 규정의 미비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天朝田畝制度」는 핵심적 제도인 토제제도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의 결여라는 모순과 農民의 염원이 실현 불가능한 공상적) 당시 상당한 정도로 발전한 상품경제를 부정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토지 분배와 물자 배급을 규정한 절대적 평균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공상적인 것이다.농촌공동체사회 건설을 지향했다는 한계 때문에 천저전무제도는 전반적으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토지이 획득과 평균, 평등적인 이상사회를 염원한 農民의 의식을 반영) 이는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취시켜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농민의 반봉건투쟁을 고무하고 농민의 태평천국 참가를 불러일으켜 봉건지배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을 가하였다.하여 토지정책을 기초로 한 사회조직과 생활규범을 만들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太平天國의 전반적 쇠락 속에서 太平天國 강령을 새롭게 정비하여 다시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洪秀全의 10촌 동생 홍인간에 의해 제기된 「資政新篇」이다. 이것은 太平天國의 후기 강령으로 지도층의 분열과 民衆지지의 철회 과정상에 나온 것으로 太平天國의 후기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資政新篇」의 주요 내용을 보면 정치 방면에서는 통일적 지도를 강화할 것을 제기하여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권력을 하나로 귀속시켰다' 일반관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 新聞官과 청거를 설치하여 상하가 상통되게 하고 '公議'를 발양하여 사회여론과 군중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관리들을 정화하여 매관매직을 금지하고 서구의 민주제도의 정신을 太平天國의 제도 속에 끌어 들이려고 시도하였다. 경제 방면에서는 근대기업을 일으키려고 시도하여 광산을 개발하고 고장을 설힙하여 우편국, 철도, 은행 등을 설치하였다. 문화사상과 풍속 습관 방면에서는 혁명사상의 교육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여 악습과 누속을 제거하고 학관었다.
    인문/어학| 2001.06.15| 15페이지| 1,000원| 조회(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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