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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의 사기 열전 요약본과 공자세가
    ..FILE:공자세가.hwp「공자세가(孔子世家)」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태어났다. 그노 양공(魯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구가 태어난 후 숙양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防山)에서 장사를 지냈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 후에야 비로소 방산에 합장하였다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정(鼎)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였다. 커서 일찍이 계씨(季氏)의 위리(委吏)로 있을 때, 그의 저울질은 공평하였고, 그가 직리(職吏)의 일을 맡고 있을 때 가축은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공(司空)이 되었다.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노나라를 떠났다. 제(齊) 나라에서 배척되고, 송과 위(衛) 나라에서 쫓겨나고, 진(陳)과 채(蔡) 나라 사이에서 곤궁에 빠지자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다.노나라 사람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하였다. "공자와 더불의 변천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은나라는 질박함을 귀히 여겼고 주나라는 문화(文華)함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周) 왕조는 하와 은 2대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그러므로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로부터 처음으로 편찬되어 나왔다고 한다...FILE:관안열전제출용.hwp관 안 열전관중은 영상(潁上)사람으로 자는 중(仲)이고 이름은 이오(夷吾)이다.관중은 어려서부터 포숙아(鮑叔牙)와 사귀었다.포숙은 관중이 어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관중은 집안이 가난하여 항상포숙을 속이고 있었으나, 포숙은 언제나 좋게 대해 주었고 한번도 푸념하는 일이 없었다.포숙은 제나라 공자 소백을 섬기고, 관중은 (소백의 형인) 공자규를 섬기고 있었다.소백이 즉위하여 환공이라 불리우자, 공자규는 죽음을 당하고 관중은 체포되어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포숙은 옥중에 있는 관중을 등용해 쓰자고 환공에게 추천했다.관중은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되자 정치에 힘썼다. 제나라 환공은 (그의 덕택으로)으뜸이 되었다. 제나라가 제후들을 자주 소집(九合)하여 동맹을 맺음으로서 천하를 바로잡은 것은 관중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관중이 말했다. “나는 지난날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이익을 분배할 때 내 몫을 많이 했는데도 포숙은 나에게 탐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나는 이전에 포숙을 위해 사업을 경영하였다가 실패하여 이전보다 더욱 궁핍하게 된 일이 있었지만,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탓하지 않았다.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어 이불리(利不利)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나는 이전에 세 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다가 그때마다 주군에게 추방된 일이 있었지만, 포숙은 나를 불초한 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세 번이나 전쟁터에 나갔다가 그때마다 패주했지만, 포숙은 나를 비겁한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노모가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하였다. 외루허(畏累虛), 항상자(亢桑子) 편 등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이지만, 장자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세사와 정리(情理)에 합당하게 잘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으니 비록 당대의 대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거센 물결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자기 마음대로였으므로, 왕공대인(王公大人)들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지 못하였다.초 위왕(楚威王)은 장주(莊周)가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그를 맞아들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천금(千金)이라면 막대한 돈이며 재상이라면 존귀한 지위이지만, 그대는 교제(郊祭)를 지낼 때 제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 소는 몇 년 동안 사육되다 수놓은 옷이 입혀져 태묘(太廟)로 끌려 들어가는데, 그때 가서 하찮은 돼지가 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가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신불해(申不害)는 경읍(京邑) 사람으로 본래 정(鄭)나라의 하급 관리였다. 그 후에 법가의 학술을 배워 한 소후(韓昭侯)에게 관직을 구하니 소후는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그는 15년간 안으로는 정치와 교육을 정비하고 밖으로는 제후들에 응대하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병력이 튼튼하여 감히 한나라를 침략하는 자가 없었다.신자(申子), 즉 신불해의 학설은 황로(黃老)의 학설을 근본으로 하나, 형명(刑名)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2편이 있는데 그것을 신자(申子)라고 이름하였다.한비(韓非)는 한(韓)나라 공자(公子)로서 형명과 법술(法術)의 학설을 좋아하였으나, 그의 학설의 근본은 황로사상에 있었다. 한비는 선천적으로 말더듬이어서 변론에는 서툴렀으나 저술에는 뛰어났다. 이사(李斯)와9개의 주(州)가 있는데 하우(夏禹)가 정리한 9주(九州)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는 주로서 셀 만한 것이 못 된다. 중국 이외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9개나 되는데 그것이 바로 9주이다. 그 요점은 반드시 인의와 절약, 근검 그리고 군신, 상하, 육친(六親) 사이의 일에 귀착되는데, 그 처음은 크고 넘친다.이것으로 추자는 제나라, 양나라 조나라에서 소중하게 여겨졌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솥을 짊어지고 탕(湯)을 격려하여 왕이 되도록 하였으며, 백리해(百里奚)는 수레 아래서 소를 먹여 진 목공(秦穆公)에게 등용되어 그를 패자로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먼저 상대방의 뜻에 영합한 이후에 그를 대도(大道)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추연의 말이 비록 일반적인 법칙을 초월하였지만, 그 역시 혹시 백리해가 소를 먹인 것이나 이윤이 솥을 짊어진 것과 같은 뜻이 있지 않았겠는가!추연을 비롯하여 제나라의 직하선생(稷下先生), 즉 순우곤(淳于) 신도(愼到), 환연(環淵), 접자(接子), 전병(田騈), 추석(騶奭)과 같은 무리가 각자 글을 지어 국가의 치란(治亂)의 일들을 논술하여 이로써 당시의 군주들에게 읽혀지기를 간구하였다.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학문에 주된 견해가 없었다. 그의 풍간(風諫)과 유세는 안영(晏)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뜻을 이어받고 안색을 살피는 데에만 힘썼다.신도는 조나라 사람이다. 전병과 접자는 제나라 사람이다.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다. 모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도덕에 관한 학술을 배워 그 뜻을 발휘하고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래서 신도가 12편의 이론을 저술하고, 환연이 상, 하 편을 저술하였으며, 전병과 접자도 모두 논술한 바가 있었다.추석은 제나라의 여러 추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역시 비교적 많은 부분에서 추연의 학설을 채택하여 글을 지었다.순경(荀卿)은 조나라 사람이다. 그의 나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와서 학설을 유세하였다. 추연의 학술은 멀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그 뒤 오기는 증자를 섬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의 어머니가 죽었지만,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증자는 오기를 경시하여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오기는 노나라로 가서 병법을 익혀 노나라 군주를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노나라 군주가 오기의 아내 문제로 의심하자, 오기는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군이 되려 하였다. 대체 노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싸워 이겼다는 명성을 얻게 되면, 각 국의 제후들은 노나라를 공략의 표적으로 삼을 것이다. 게다가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인데, 위나라에서 죄를 지은 오기를 중용한다면 이는 위나라를 팽개치는 셈이다."이러한 소문을 들은 노나라 군주는 오기를 탐탁치 않게 여겨 그를 내쳤다.이에 오기는 魏(위)나라 文侯(문후)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섬기려고 하였다. 위문후는 오기를 장군으로 삼아 秦(진)나라를 쳐서 성 다섯 개를 빼앗았다.오기는 장수가 되자 신분이 가장 낮은 병사들과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않고, 행군할 때에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은 직접 들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문후는 오기가 병사를 다루는 일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청렴하고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西河(서하)의 태수로 임명하여 秦(진)나라와 韓(한)나라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위나라 문후가 죽은 후 오기는 그의 아들인 武侯(무후)를 섬겼다. 한 번은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를 내려가다가 중간 즈음에 이르러 오기를 돌아보며 산천이 아름답다고 하자 오기는 이렇게 대답했다."나라의 보배는 임금의 덕행에 있는 것이지, 산천의 견고함에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 三苗氏(삼묘씨)의 나라는 왼쪽에 동정호가 있고 오른쪽에 팽려호가 있었지만, 덕행과 신의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라의 우임금에게 멸망했습니다. 하나라의 桀王(걸왕)이 살던 곳은 황하와 제수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이 그 오른쪽에 있으며 이궐이 그 남쪽에 있고 양장이이한다.
    인문/어학| 2008.06.12| 4페이지| 3,000원| 조회(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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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중니제자 열전 요약
    중니 제자 열전공자 제자들에 대해 적었다. 논어(論語)를 읽기 위해서는 이 제자들을 알아야 한다.안회(顔回)는 노나라 사람으로 字는 자연(子淵)이다. 공자보다 30 세 아래이다. 공자는 말하였다."어질구나 안회는.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것으로 더러운 빈민굴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남들이면 견디지 못할 것인데 안회는 그 도를 계속 즐기는구나.""안회는 어리석은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사행활을 살펴보면 배운 것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임금이 등용하면 벼슬하여 도를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숨어 살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로구나."공자의 3 천 제자 중에 숨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다."내가 안회가 들어온 이후로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여 졌었다.""안회가 학문을 좋아했다. 그는 성내는 것을 남에게 옮기는 일이 없었으며, 과실을 두 번 다시 저지르는 일이 없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일찍 죽었으니, 지금은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없다."...중유(仲由)의 자(字)는 자로(子路)이다. 공자보다 9 세가 젊다.자로는 성질이 거칠고 야비하고 용력(勇力)을 좋아하였으며, 뜻은 강직(剛直)하였다. 수탉의 깃으로 꾸민 갓을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다녔다. 공자를 업신여기고 포악한 짓을 하곤 하였다. 공자가 예를 베풀어 점진적으로 자로를 유도하였다. 자로가 뒤에는 유자의 옷차림을 하고 예물을 갖고 와서 공자의 문인(門人)을 통하여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자로가 물었다."군자도 용맹(勇猛)을 좋아합니까?""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을 좋아하고 의가 없으면 문란하여지고, 소인이 용맹을 좋아하면서 의가 없으면 도적이 된다."자로는 한 가지 교훈을 듣고 아직 실천하기 전에는 새로운 교훈을 듣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공자가 말하였다."한 마디의 말을 듣지 않고도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자로가 용기를 좋아함은 나를 앞서나 그것을 알맞게 사용할 줄 모른다.""자로 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기 어렵다.""다 떨어진 헌 무명 도포를 입고 여우 가죽과 담비 가죽의 털 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자로이다."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반란이 일어났다. 자로는 성 밖에 있다가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성문에서 도망가는 공자의 제자 자고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왕은 달아났으니 그대는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공연히 화를 받지 않게 하시오." 자로가 말하기를"그 사람의 밥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화난(禍難)을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하고 들어갔다. 자고는 도망갔다.반란자가 대(臺)에 올라가 있었다. 자로는 반란의 주모자를 죽이게 내 놓으라고 하였다. 듣지 않으니 대에 불을 놓으려고 하였다. 무사를 내려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하였다. 자로는 여러 곳에 칼을 맞았으며 또한 자로의 갓 끈이 끊어졌다. 자로는
    인문/어학| 2008.06.11| 2페이지| 1,000원| 조회(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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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와 사고 평가D별로예요
    인간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직접 행동하지 않고도 그 행동을 언어로 대신할 수 있으며, 그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는 우리의 윤택한 삶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행하고 있다. 이에 여러 어문학자들은 언어 영역과,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사고 영역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하여 왔다.사고가 언어에 의존한다는 입장,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적이라는 입장,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는 입장 등 여러 상반된 주장들이 있어 왔다. 그 중 가장 널리 논의되어 왔던 두 가지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 내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우선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는 입장에서 관계를 밝힌 학자에 대해 살펴보겠다.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 따르면 단어들은 영혼의 영향이나 감동에 대한 상징이나 기호이다. 정신적 상태 자체는, 단어들이 주로 그에 대한 기호로, 그러한 상태가 대상물에 대한 표상으로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즉 단어는 실제 세계의 대상물을 통해 인간이 그것을 '정신적 작용'으로 표상화 한 것이다. 만약 그러한 정신 작용이 없었다면 다시 단어가 기호화 될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경우에, 정신 작용에 대한 기호가 아닌 음성적 소리는 그 어떤 것도 전혀 단어가 아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단어가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지 묻는 것은 항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은 단어가 뜻하는 것을 설명하는 표준적인 방식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불일치의 개념에서는 단어는 단지 대상물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며, 사고는 단지 그 대상물의 '표상'일 뿐이다. 여러 사물에 대한 단어의 의미가 표상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지 아님 그것의 의미화가 함축되어 있는 지에 대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고가 언어에 먼저 영향을 끼친다는 것으로 공통점을 갖는다.두 번째 사고가 언어에 의존한다는 입장이다.이 입장에 있어서는 간단히 왓슨과 워퍼의 입장을 살펴보고, 전반적으로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반영하고자 한다. 왓슨과 워퍼는 사고가 언어에 의존한다는 입장으로 언어상대설 또는 언어 결정설을 주장하고 있다 .왓슨과 워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첫째, 음성 언어에 대한 표현은 사고의 기본이 된다. 둘째, 언어 그 자체가 사고의 기본이 된다. 셋째, 자연 현상에 대한 지각 및 이해는 사용하는 언어의 어휘, 통사 구조 등 언어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넷째, 개별 언어의 체계는 그 언어가 쓰이는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놀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사고와 관련성의 이해를 돕고 있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이 택한 관점에서 어떤 단어의 기능은 ,결코 그 단어가 표현한다고 주장되는 생각 (외부 세계의 어떤 '대상물'이나 특질)을 언급함으로써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 음성과 의미의 불가분의 단위로써 간주된다. 소쉬르는 체스의 말을 이용하여 기호와 의미를 관계짓고 있는데 즉 체스의 말 자체가 갖는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역할 또한 이해한다는 것으로 그 두 가지의 사실을 분리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청각 영상과 개념의 연합은 무관하게 주어진 항목들의 결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기억할 만한 비교로, 종이 한 장의 앞면과 뒷면에 대한 것이다. 가위로 동시에 다른 면을 자르지 않으면서 종이의 한 면을 자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언어에서 음성을 사고로부터 분리하거나 사고를 음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 음성적 앞면에 있는 것을 개념적 뒷면에 있는 것과 분리해서 기술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 단어들의 의미만을 배운 사람이 프랑스어를 말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은 일부를 이루는 언어 체계에서 그것의 역할을 다른 단어의 역할과 대조함으로써 설명한다. 이런 재평가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언어가 인간의 이성과 가지는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즉 말하기와 사고는 상호의존적이고, 다른 것이 없이는 나타나지 못하고, 둘 다 언어에 의해 가능해진다. 소쉬르는 거침없이 언어 이전의 사고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호하고 형태가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는 사고가 음성과 결합하는 방식을 공기와 물의 접촉에 비교했다. 그는 그의 의도를 두 가지 면에서 명확히 하고 있다.첫째는 인간은 언어가 사고와 표현을 중재하는 약간 모호한 제 삼의 층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공기와 물 사이에는 중간층이 없지만, 접촉면은 상관 위치로 표현된다.둘째로, 접촉면의 상관 위치는 동시에 접촉한 두 질량의 상관 위치이고, 그 굴곡은 정확하게 들어맞는 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단어의 소리는 지각할 수 있는 반면에, 그 의미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것도 별개의 언어적 존재가 아니다.비트겐슈타인 또한 소쉬르와 마찬가지이지만 그보다 좀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철학적 탐구]의 앞부분에서 ,동물들은 정신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전에는 언어가 없는 생물체에게조차도 어떤 단순한 형태의 사고는 가능하다는 견해를 내 보임으로써, 그는 언어가 비-언어적 행동과 아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동조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생각은 어떤 종류의 내적 독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말에 모두다 사고를 수반한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어들은 내부 행위와 외부 행위를 연결하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 단어들은 크게 말하기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각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는 좀더 친밀한 연구를 위해 윌리엄 제임스에 의해 제시된 농아의 기억에 관한 증거를 인용하는데, 말하기를 배우기 전인 유아 때에 신에 대한 생각을 가졌었고 또한 쓰기를 배우기 전에 세계의 기원에 관해 자문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 연구에서 단어 없이 한 생각들을 단어들로 올바로 옮긴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그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한 단어를 찾는 것'으로 보통 기술된 정신적 노력을 하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자주 발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에게 표현을 찾기 전에 그 생각을 가지는지 여부를 묻는 다면 그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그 생각이 그 표현 이전에 존재했다면, 그 생각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들에 대한 해답의 논지로 소쉬르는"발화의 순화"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그의 순환적 작용에 의해서 사고가 언어적 형태로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개념의 출현이 대응하는 청각 영상을 자극하고 그것은 다시 발성 기관에 대한 운동 명령을 유발할 때 화자의 머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이런 식의 논지에 따른 언어적 해석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비트겐슈타인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첫째, 우리가 의사 소통에 있어, 먼저 사고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는 화자가 여러 가지 언어적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특정한 발화 상황의 필요에 가장 적절한지를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망설임은 언어가 다양한 기호나 기호들의 결합을 제공하고, 선택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일어난다. 놀이의 경우 위기에 몰렸을 때 유용한 가능성들 중의 어떤 하나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물론 생각나지 않은 더 나은 선택이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생각난 가능성들 중에서 어느 것도 정말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표현을 찾기 위해 사고를 하였다면 그 표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된다. 그것을 그는 채워질 필요가 있는 발화의 틈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둘째, 우리가 아는 것이 정확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 표현을 꺼내는 데에 실패해서 야기되는, 망설임이 있다. 즉 명명된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 생기는 망설임과 같은 경우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일 때 정원에서 자라던 그 꽃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소쉬르식의 설명은 꽤 분명하다. 화자는 기의(signifie)를 확인했지만 일시적으로 기표(signifiant)를 잊어버렸다. 어떻게 해서인지 보통 그 둘을 연결하는 격발(trigger) 과정이 막히게 된다. 이런 경우에 표현을 찾기 위해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의 표현을 찾는 것에 우선해서, 특별한 의사 소통 적 요구에 대한 망설임 없는 우리의 확인이었다.셋째, 소쉬르의 모형은 또한 더 흥미로운 제 삼의 유형의 경우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 전에 망설이고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소쉬르가 논의한 예는 단어의 첫째 용법이다. 화자가 이 단어를 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탐색에 있어 숨어있는 친숙한 표현의 탐색과는 다른 상태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경우 비록 우리가 직접 사용한 적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구성을 위한 유형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놀이에서도 비슷한 것은, 규칙은 허용을 하고 있지만 이전에 어떤 놀이꾼도 결코 사용할 생각이나 필요를 느끼지 못한 , 가능성들의 결합을 이용하는 경우이다.이런 유형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가 입증하고자 고심한 것은, 발화가 수반하는 어떤 감춰진 사고 과정에 의해서 발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잘못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 대화자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접근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적절한 것은 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2.05.29| 5페이지| 1,000원| 조회(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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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