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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고] ◆광고속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Sexuality
    ◆광고속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Sexuality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상품화되어 버린 성문화를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의 곡선미로 자신들의 구두가 섹시하고 아름답다는 광고를 하는 구두회사,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한껏 멋을 뽐내며 광고하는 의류업체, 남성의 탄탄한 근육과 잘생긴 얼굴로 광고하는 속옷회사 등 우린 이런 광고에 익숙해져 있다.1. 섹스어필 광고가 사용되는 이유는한마디로 말해, 광고 차별화의 손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본능을 자극해 눈을 끄는 주목도가 높기 때문이래요!1) 광고의 전체 분위기를 은밀하고 관능적으로 연출하는 경우로 화장품 및 향수, 의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2) 광고에서 구사되는 특정 문장, 사진 혹은 CM에서의 특정 대사 등을 성적 연상이되도록 노리고 사용하는 것으로 제과, 음료, 신변잡화 등에서 주로 발견되는 형태.2. 상품으로서의 여성성의 상품화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다는 점에서 여성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지대한 것이다. 우선 성의 상품화가 여성다움, 여성적 아름다움, 여성적 가치 등을 성적인 것과 직결시켜 결국에는 여성을 성적 존재로서의 상품가치로 취급하는 경향을 조장하게 된다. 한마디로 성의 상품화는 여성적 존재를 일종의 성 상품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라는 성(gender)이 성 상품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여성의 인격성 자체가 부정된 채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인데, 이는 종래의 가부장 문화가 성적 대상화를 바탕으로 규정해 온 여성성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극대화되는 것을 말한다.성의 상품화 현상이 여성에게 외모와 성적 육체가 인격이나 능력 이상의 절대적 평가를 받는 가치임을 주입시키는 효과가 바로 여성들의 자발적인 동조와 적극적인 참여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성의 상품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적 존재, 즉 성적 존재로서의 상품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필사의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3. 광고 속의 여성의 모습첫째, 여성은 광고 속에서 남성보다 왜소한 존재로 재현된다고 한다.남성보다 더 큰 존재의 여성, 큰 여자가 작은 남자와 함께 등장하게 되면 그 광고는 코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것인 아니라 비틀어진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둘째, 광고 속 여성들의 행위는 사회적 기능을 갖지 못하는 모습이다.혹 사회적 역할을 맡은 남녀를 그리더라도 광고 속 남성들은 기획적이고 역동적인 역할을 맡고 여성은 보조적이며 종속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셋째, 여성은 어린아이처럼 재현되거나 어린이들과 함께 등장한다.이는 여성이 보호되는 객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성들이 순진 무구한 모습 혹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띠거나 아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광고 빈도가 높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여성에게 전이하는 재현 방법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하듯이 여성도 누군가에 의해서 지켜져야 하는 존재임이 강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을 자연과 가까운 존재로 재현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여성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가꿔져야 하는 자연 상태의 존재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남성이나 상품이 불러 주었을 때 이름을 갖게 되고 의미를 내게 되는, 그리고 끊임없이 가공되어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다섯째, 여성의 몸은 곧은 채로 재현되는 일이 없었다.항상 어디에 기대거나 구부려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신 없는 모습인 셈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광고하는 제품 뒤로 숨기거나 나무 뒤, 남성 뒤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손 뒤로 숨기는 형상을 하고 있다.이러한 요약은 우리 모듬만의 편견의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아직도 유효한 요소 또한 지적하고 있다. 쉽게 볼 수 있는 TV 광고들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4. 최근의 광고에서의 여성오늘날 여성에게 다가오는 사회적 양식이 변화화고 있고 따라서 광고 속 여성의 모습도 변화하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1) 사회적 진출이 당당전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형사반장이 되기도 하고, 대통령의 경호원이 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여자 대통령이 되어 남자 경호원을 이끌고 환호를 받기도 한다.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진출이 당당해 보인다는 것이다.(2) 예쁜 여성의 반란"예쁘기만한 여성" , "예쁘게 보이려는 여성"만을 보여주는 그간의 광고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의 모습에 보다 박력 있고, 과감해졌으며 사회를 주도하는 이미지를 불러 넣고 있다. 당당한 눈빛, 자신 있는 표정은 미모를 과시하기 위한 것에서 한 단계 나아간 듯 보이기도 한다.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화장품이나 향수, 의류광고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예쁜 여성이 좀더 주체적인 변신을 거듭하면서 여성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 상승, 그리고 끊이지 않는 여성해방운동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은 현실세계가 이미지의 세계에도 옮겨 붙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러한 광고들은 여성도 이제 변해야 한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있는 듯하다3) 여성은 이제 아름답기만 해선 안 된다.사회, 직장, 가정에서 모두 인정받는 '슈퍼우먼'이 되야 될 듯 하다5.남성의 성 상품화 시대 개막흔히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 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살수 있다.`는 깃발을 달고 물살을 가르는 거대한 배가 한 나라의 자본주의라면 `무엇이든 살수 있게` 도와주는 광고는 배 꽁무늬의 프로펠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배는 아마 미국일 것이다. 그 배는 크기에 걸맞은 커다란 프로펠러를 가졌다. 할리우드에서는 아름답고 잘 빠진 배우들이 영화를 찍고 하루하루 새로운 광고에 모습을 담는다. 이런 영화와 광고를 보고자란 미국의 청소년들은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많은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헬스클럽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심지어는 근육을 키우는 약물을 사용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광고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노출 정도는 우리 나라 광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종종 선정성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높다. 이는 대부분이 술이나 향수, 청바지, 속옷, 화장품 등의 광고에 벗은 몸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6.벗는 광고의 효과는물건이 팔리는 정도는 광고뿐 아니라 다른 많은 요인들과 한꺼번에 연결되어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신체를 노출시키는 광고가 효과가 있다, 없다고 말 할수 없다. 하지만 광고학적인 연구를 보면 상품과 벗은 신체가 기능적인 연관이 있을 때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환상을 제대로 나타내서 만족감을 줄 때 효과가 높다고 본다.반대로 이러한 광고는 보는 사람에게 충격을 주고 인상을 오래 남기지만 정작 무엇에 대한 광고인지는 잊게 만들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사회과학| 2002.07.05| 3페이지| 1,000원| 조회(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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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베르크손철학
    바슐라르는 "연속성(continuit )만 빼면 베르그송 철학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베르그송을 벗어나서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보면 바슐라르의 철학 전체가 베르그송이라는 거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시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의 매력에 빨려 들어가 열정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탐닉한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조금 지나서 제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베르그송을 넘어설 수 있을까, 아니면 적어도 벗어날 수 있을까를 꿈꾸게 된다. 베르그송 자신이 자기에게 머물지 말기를, 더 나아가기를,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기를 강력히 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것의 창조는 새로운 기형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아이를 낳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베르그송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겉으로 드러난 논점들의 배후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적인 함의들을 읽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베르그송은 세 가지 방법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그 첫 번째가 제대로 된 문제를 제기하고 거짓 문제를 폐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관의 방법의 도입이다. 베르그송은 그 동안의 형이상학이 범한 오류를 피하기 위한(제대로 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거짓 문제를 폐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관의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시간('지속')의 견지에서 사유하기 위함이기도 하다.두 번째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과학이, 그리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많은 부분 간과되어왔던 세계의 형이상학적 측면에 대한 강조를 위해 과학의 '형식 논리'가 아니라 이른바 '지속과 생성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베르그송은 '다양성(여럿)'에 대한 기존의 몰이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양적 다양성'과 '질적 다양성'을 엄밀히 구분한다. 양적 다양성은 수학처럼 확정되고 결정된 것들 사이에서만 얘기된다. 반면에 질적 다양성은 생명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생명체에서 우리는 기존에 없던 것으로의 진화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창조'(매순간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는 새로운 것의 의미로서)의 예를 보여준다.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베르그송의 철학을 관통하는 것은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지속은 자기 동일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운동 자체를 말한다. 어떤 것이 움직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화되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속의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지속과 운동의 개념은 베르그송의 '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방식으로서의 '생'을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들의 본성이 미리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즉 끊임없이 유동하는 무규정성의 바다에서 길러내 진다는 역동적이 삶의 철학으로서 말이다.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 1859∼1941)은 파리의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두각을 나타냈으며 파리고등사범학교를 거쳐 1881년 교수자격을 획득한 후에는 고교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1907년에 대표작 『창조적 진화』를, 1932년에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발표함으로써 금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으며 192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베르크손의 철학은 과학적 '시간' 개념과는 상이한 '지속' 개념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베르크손은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면서 접하게 된 역학이나 물리학에서의 시간, 즉 "과학적 시간은 지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이 최초의 놀라움에서 비롯된다. 베르크손은 흐르는 시간 앞에 선 자신의 경이를 항상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최초의 경이는 결국 과학적 인식 형태와 그 인식이 겨냥하고 있는 실재와의 간극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아직까지도 그의 철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시간'과 구별되는 '지속'은 출발점인 동시에 중심이다. 원심력에 의해 항상 끊임없이 그 곳으로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가 철학자 베르크손의 사유의 운동인 것이다.베르크손이 보기에 과학은 순간들만을 포착하는 '영화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간화된 시간을 측정할 뿐이지만, 그가 말하는 이른바 '지속'은 '흐르는 시간'인 동시에 '창조적 시간'이다. 이와 같은 창조와 자유의 세계야말로 바로 실제적 지속의 영역이며 과학의 도구인 '지성'이 아닌 '내적 직관'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철학의 고유 영역이 된다. 그런데 시간은 이렇게 심리학적 삶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창조적 진화』의 드라마가 시작된다.지속은 단지 과거를 현재 안에 연장시키고 과거의 것을 현재 안에 밀어 넣는 계속된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미래를 잠식하고 전진하면서 부풀어지는 계속적인 진보이기 때문에, 우리 내적 의식 상태는 시간의 여정 위를 전진하면서 갖게 되는 지속의 부피로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커지며, 우주 안의 의식, 즉 우주적 영혼은 스스로 전개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계속적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 열매가 맺을 때 열매는 꽃으로부터 된 것이지만 꽃과는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인 것처럼, 지속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차이나는 새로운 것으로 진화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지속은 창조이다. 창조적 지속은 전개될 역사가 질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일종의 기획인 바, 이 기획이 계속 새롭게 시도되는 가운데 조금씩 실현되어 결국 창조로 구현되는 역동적 진행이 바로 생명의 과정이다.『창조적 진화』에서 베르크손은 생명에 관한 기존의 '기계론'과 '목적론'을 모두 물리치고 있지만 그의 생명관도 사실은 일종의 목적론이다. 그는 외적 목적성을 비판하였을 뿐, 내적 목적성은 역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개선되어 가고 이 증가되는 개선의 경향을 후손에게 전하려면 그 개별적 존재보다 먼저 있으며 그를 통해 유전되는 그 어떤 내적 충동과 같은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 하나의 유기체들을 관통하여 생명을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충동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각각의 생명체들은 일장 춘몽의 덧없는 기간동안 그 위를 다만 교차해 지나갈 뿐인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흐름이 바로 생명의 흐름이며 이런 생명 진화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추진력이 이른바 '생의 비약(elan vital)'인 것이다.
    인문/어학| 2002.07.05| 3페이지| 1,000원| 조회(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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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자유란무엇인가 평가A좋아요
    자유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모든 형태의 자유에 해당되는 넓은 의미의 자유를 정의한다면,「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는 극복해야 할 속박만큼이나 많아진다. 물리학에서는 물체자체이외엔 어떠한 힘의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을 말하고, 정치학에서는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또한 형이상학은 「절대적 자유」에 대해 말한다. 절대적 자유란 초-자연적,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써 여러 원인들로부터 무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의 자유는 외적인 속박은 물론 내적인 결정성에도 의존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관념 ,본능 관습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이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의지는 실재하는가우리는 자유의 실재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명은 필연성을 밝히는 작업인데 자유는 우연성, 즉 필연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자유를 경험할 수는 있다. 몇몇 철학자는 이러한 자유 경험에 대해 소박하게 말하고 있다.먼저 ,데카르트는 주의력의 자유를 통해 자유를 설명한다. 어떠한 명석한 명제도 나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나는 언제라도 명제에 대한 고찰을 중지하고,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있다. 또한 나는 오성에 의해서 명석하고 판명하게 본 것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주시한 것만 보고, 원하는 것을 주시한다. 따라서 참에 대한 명증성 조차도 나의 자유로운 주의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사실, 주의를 옮기는 것은 다른 흥미있는 대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다. 결국 주의력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정신의 전체적인 내용이며, 주의력과 주의력을 결정하는 정신생활의 내용을 분리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또한 멘느드비랑은 근육의 노력의 경험을 말한다. 나의 육체가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력을 계속한다. 예를 들면 나는 의자를 들고 있다. 팔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계속 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육체적 고통에 반항하는 자유의지를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지는 동기가 있다. 예컨대 운동 경기시 기록갱신 또는 그의 이론은 설명하려는 욕망들이 그것이다.또 다른 자유에 대한 해석으로 보쒸에는 무상행위(無償行爲)에 대해 말한다. 즉 다른 것보다 이것을 선택하고 주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해관계가 없고 목적도 없고 동기도 감정도 없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상행위가 실재로 가능한가? 무상행위도 무상행위를 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무상행위가 무의식적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기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은 동기(motif)와 동인(mobile)을 구별하면서 이를 잘 설명한다. 즉 동기를 모르고 행하는 행동은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인 동인에 의해 행동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러한 자유의지는 우연성을 전제로 하고 도덕적 의무를 가치 있게 한다. 우리가 선과악중 어떤 것은 선택하야만 도덕은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선택에도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다. 무관심하고 우연적이고 무상한 선택이 아니다.이와 같이 순수한 자유의지나 우연적인 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이와 반대로 만일 인간 행동은 설명 가능한 것이고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면 자유에는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현대 학문은 인간의 행동에서 우연성을 제거하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환경 ,교육, 계급 등이 인간 행동의 근원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과 스피노자는 이러한 필연성을 자유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스토아 철학은 신의 필연성에 순종하는 것을 자유라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필연성이 자유로 전환된다. 우리는 자연 속에 있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 능력의 증가, 감소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한 인간이 우주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우주 속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우주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나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이라 이해하고 이 필연성과 일치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지성(intelligence)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체념」이 되기 쉽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자연을 정복해 가는 과정이 보여진다. 우리는 「체념」을 넘어서,「그리부이으의 콤플렉스」를 넘어서야 한다.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개념을 버린다면 그 이유는 상식이 말하는 자유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나는 내 멋대로 동기가 없는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때 내 성향을 만족시킬 때 자유로운 것이다. 또한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과 이성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자유는 반성, 깊은 동기, 검토를 통한 행위이며 무관심한 행위와는 반대되는 행위이다.
    인문/어학| 2002.07.05| 3페이지| 1,000원| 조회(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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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순수이성비판 2장 정리
    @ 순수이성비판 제 2부 선험적 논리학. 서론: 선험적 논리학의 개념1. 논리학 일반에 대하여-인식의 두 근원: 인상에 대한 감수성과 자발성으로서의 능력.-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감성', 표상을 산출하는 자발성을 '오성'이라고 한다.-직관을 갖지 않는 개념이나 개념을 갖지 않는 직관도 모두 인식을 성립시킬 수 없다.내용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순수직관이란 "그것에 의해서 무엇이 직관되는 형식";순수개념이란 "전적으로 대상 일반을 사유하는 형식"/순수 개념과 순수 직관만이 선천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논리학: 일반적 오성 사용의 논리학 / 특수한 오성 사용의 논리학.-전자는 "그것 없이는 어떠한 오성 사용도 성립되지 않는 단적으로 필연적인 사유규칙"-후자는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기 위한 규칙"-전자는 또한 순수논리학과 응용논리학으로 구분된다. 순수논리학은 이성 사용의 형식적 면에만 관여하는 것. 응용논리학은 일반적이지만 동시에 경험적 원리를 갖는 것. 전자만이 본래의 유일한 學이다.-1)이 學(순수논리학)은 사유의 단순한 형식 이외에 아무 것도 문제시하지 않는다.-2_ 순수논리학으로서 이 학은 어떠한 경험적 원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얻어낼 수 없다.2. 선험적 논리학에 대하여-일반논리학은 인식 일체의 '내용'을 배제하고 논리적 형식만을 탐구한다. 즉 표상이 경험적으로 주어졌든 선험적으로 주어졌든 상관없이 표상이라면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법칙을 탐구한다.-선험적이라고 해서 언제나 초월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어떤 표상이 단적으로 선험적으로 적용되고 선험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어떻게 선험적으로 적용되고 어떻게 선험적으로만 가능한지를 인식하게끔 하는 인식이 초월적이라는 말의 뜻"-초월적과 경험적의 구분은 다만 인식의 비판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식과 그 대상의 관계와는 상관없다.-순수 직관이든 경험적 직관이든 어떠한 직관도 아니고, 전적으로 사유의 행위로서 대상에 관여하는, 동시에 순수한 개념을 다루는 학이 선험적 논리학이다.-"인식의 기원 범위 및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학을 선험적 논리학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3. 일반논리학의 구분에 관하여-분석론과 변증론-진리기준의 문제.1) 진리가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면, 이 진리로 인해 이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분되어야 한다.2) 진리의 보편적 기준은 대상의 구별과 상관없이 모든 인식에 타당해야 한다.2)-1. 즉 이런 기준은 인식의 내용은 일체 도외시하는 것이다.3) 그러므로 인식의 내용에 관한 한 어떠한 보편적 진리 기준도 요구할 수가 없다.-오성의 보편적/필연적 규칙이란 즉 논리학이므로 보편적 진리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논리학에 위치지어져야 할 것이다. 즉 "논리적 규칙에 어긋나는 것"은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논리학은 인식의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주어진 한 인식은 형식적으로는 정합적이나 대상과는 모순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일반논리학 중, 이성과 오성의 모든 형식적 활동을 그것의 기본 요소로 분할하고 그것을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리로 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분석론]이라고 한다.-즉 어떠한 인식도 형식면에서 이러한 규칙에 비추어 음미해야 하나 이것만으로 실질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에는 부족함은 물론이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논리학 밖에서 나오고, 논리는 이것을 결합하는 것.-오성이 형식을 부여하는 작업은 매우 강력하므로 단지 규준에 불과한 일반논리학이 실질적인 주장을 실제로 산출하는 [오르가논 機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인된 일반논리학을 변증론 dialektike이라고 부른다.-중세적인 의미에서 dialektike 는 "가상의 논리학"이상이 아니었다.-일반논리학이 [기관]으로서 사용되는 경우는 항상 궤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역시 선험적 논리학의 일부로 칸트는 넣는 것이다.Q: "논리학"?예컨대 헤겔. "대논리학"훗설 "논리 연구" 등등..칸트가 말하는 판단표, 그리고 그로부터 획득한 범주표가 진정 정확한가 하는 문제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의 경우도 그러했듯이, 반드시 해결할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칸트에게는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듯이 우리 지성의 개념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면, "우리의 지성이 왜 범주에 의해서만 또 범주의 이런 성질과 수에 의해서만 통각의 선험적 통일을 산출하는 특성을 갖느냐 하는 근거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왜 바로 저런 판단 기능을 갖고, 그 외의 판단 기능을 가지지 않느냐, 혹은 왜 시공만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그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B146)그러나 어찌되었건 칸트는 감성론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해명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초월적 분석론"의 제 1편 '개념의 분석론'에서 범주에 대한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감성론에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구가 '형이상학적 구명'과 초월적 구명'으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듯이, 분석론에서도 이와 대응되게 "제 1장 「지성의 모든 순수한 개념」을 발견하는 실마리"에서 지성에 선험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구명이, "제 2장 지성의 순수한 개념의 연역"에서는 초월적 구명에 해당하는 "초월적 연역"이 진행된다.이 발제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초월적 연역이 진행되는 제 2장의 제 2절에 앞서서 예비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 1절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와 '범주가 초월적 연역에로 넘어감'을 다룬다.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연역의 의미, 연역의 과제, 연역 수행의 어려움 등 연역작업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간략하게 다룬다. 또 한가지 덧붙일 것은 특히 '범주가 초월적 연역에로 넘어감'이라는 대목은 이후 본격적인 연역작업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는 것이다.연역은 원래 법학용어로서 권리의 증명을 의미하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적으로 얻어진 개념들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얻어진 약간의 개념들의 사용권한을 밝히는 작업을 의미한다. 개념은 인식을 하는데 필수적인 것, 즉 인식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인식활동에 필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선험적으로 대상과 상관하는데, 이렇게 대상과 상관하는 방식의 설명을 개념의 "초월적 연역"이라고 한다.시공이나 범주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연역하려는 것은 전혀 헛된 짓이다. 우리는 비록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일반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기 쉬우나, 선험적 순수개념의 연역은 말 그대로 경험에 앞서 있는 것이므로 경험적인 방법으로는 이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순수한 개념에 관해서는 초월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경험적인 연역이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인문/어학| 2002.07.05| 5페이지| 1,000원| 조회(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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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순수이성비판 1장 정리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밖에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자극, 즉 우리를 촉발시켜야만 한다. 외부 사물로부터 촉발된 인간의 감관은 직관작용을 수행함으로써 그 외부사물에 대한 정보(질료)를 수용한다. 주지하다시피(경험적) 직관작용은 감성적이다. 즉,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성질을 지닌다.(물론 순수직관은 그렇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렇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 질료는 아직 혼돈의 상태다. 즉 깔끔하게 질서지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직 이 질료가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완전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론 개념에 의한 지성의 작용이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지성작용의 질료(즉, 대상)가 되기 위해서는 감성작용에 의해서 받아들인 '혼돈한 상태'의 질료로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이 질료를 질서지워줄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혼동스런 잡다에 형식을 부여해주는 일을 감성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이 수행하는 것이다.주지하다시피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루고자 하는 칸트의 목표는 철학의 본령인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논리학, 수학, 물리학에서 성취한 절대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인간 지식의 양을 늘려주는 선험적종합판단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첫째 단계로서 인간 인식의 출발점인 감성을 해명하는 것이고, 대상해명이 목표가 아니고, 인간의 인식형식이 목표인 한(물론 인간인식의 형식을 해명하면서 대상도 해명이 되지만),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감성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논증'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단언적인 '주장'이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어쩌면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이며, 더더군다나 그것들의 근거가 '선천적'인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어쨌건 칸트의 논의를 따르자면,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먼저 형이상학적으로 구명하고, 즉 일종의 그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나서(본성을 구명함을 말한다), 초월적 구명을 행한다. 즉 여기서 '초월적'이라 함은 그 자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구비되어 있으면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원리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공간"과 "시간"이 없이는 우리의 경험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명의 과정속에서 칸트의 "공간관"과 "시간관"은 라이프니츠의 그것과도 뉴턴의 그것과도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한 "공간"은 외감과 기하학에, "시간"은 내감과 산수학에 관련된다는 칸트의 생각이 보인다. 물론, 시간의 경우는 단지 내감과 관련을 맺는다는 말로 끝낼 수 없다. 이 사정은 B50-B51에 나타난다. "모든 외적 현상은 공간 중에 있고, 또 공간의 관계들에 합치해서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내감의 원리로부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현상 일반은 즉 감관의 모든 대상은 시간 중에 있고, 필연적으로 시간 관계 중에 있다고." 즉 모든 표상은 우리 마음에 곤 내적인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외감을 통해서 얻게 되는 표상도 역시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내외의 현상 전반)의 선험적 조건이다"(B50)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 "공간" 관념의 형이상학적 구명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후험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의 표상 없이는 외적 경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공간은 모든 외적 작용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선험적 표상이다.공간은 추리된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순수직관이다.(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또, 공간은 개념과 달리 본질적으로 하나다.공간은 개념과는 달리 (공간)표상의 군을 무한하게 자기 속에 포괄한다. 이 점에서 개념과 다르고,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공간이라는 근원적 표상은 개념이 아니라 '선험적인 직관'이다.여기까지는 재판에 나와있는 것이고, 초판에 있는 형이상학적 구명 중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다음의 에 제시한다.모든 기하학적 원칙(명제)들의 절대필연적인 확실성과 그것들의 선험적인 구성가능성은 공간의 이 선험적인 필연성에 기인해 있다.2. "공간" 관념의 초월적 구명여기서 공간은 선험적인 종합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원리로 설명되는데, 이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공간관념에서 선험적 종합인식이 실제로 나온다는 것이고, 선험적 종합인식은 오로지 칸트 자신의 설명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공간"이 선험적 표상이고, 순수직관이며, 기하학에서 다루는 선험적종합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라는 칸트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3. "시간" 관념의 형이상학적 구명시간은 어느 경험에서 유도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전제해서만 경험적 표상은 가능하다.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현상(외적 현상과 내적 현상을 모두 합해서)이 실재하는 것은 모두 시간 중에서만 가능하다.시간은 일차원만을 갖는다. 즉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시적으로 있지 않고, 계기적으로 있다.(물론 공간은 동시적이다)시간은 추리된 개념도 일반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감성적 직관의 순수형식이다.시간이라는 근원적 표상은 무제한적으로 주어져 있다. 즉 시간은 무한하다.4. "시간" 관념의 초월적 구명여기서는 형이상학적 구명의 과 을 반복한다. 곧 "시간" 관념이 전제되어야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5. "공간"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
    인문/어학| 2002.07.05| 4페이지| 1,000원| 조회(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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