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학사1. 주요 주제는 무엇인가?오이디푸스왕의 주요 주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라고 할수 있습니다.아무리 강력한 왕이라 하더라도 신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인간의 초라한 모습, 정해진 운명에 맞추어져 살아가야하는 나약한인간의 모습을 보인다고 할수 있습니다.또 다른 거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수가 있겠습니다. 모든 잘못은 자기가 아 닌 다른 사람때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 도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습니다.2.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고대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가?이 작품에서 인간은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신의 경계를 넘어설수 없다는 신의 전지전능을 볼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의 한계선을 분명하게 다룬점은 전형적인 고대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작품 중간중간에 헬레니즘의 특징이 엿보이고 있습니다.3. 이 작품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사상은 어떤 장면에서 알 수 있나?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였을때 그것을 가르쳐 주는 신하들의 태도, 비록 왕이 화를 내고 분노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신하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신하들을 자기의 마음대로 함부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4. 오이디푸스 왕에 나타난 모성애는 어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가?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5. 서양문학사를 시대와 사조별로 구별하면서 그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라.고대시대-인물이 중심이 아닌 사건 중심의 문학중세시대-주로 신앙적인면에서 특징을 보임.르네상스시대-인물에 리얼리티가 실리면서 인본주의시대신고전주의시대-그리스/로마시대의 문학과 예술을 원천으로.낭만주의시대-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사실주의-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대로 묘사.6. 오이디푸스 왕이 현대 정치가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오이디푸스 왕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 정치가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한 비판을 할수가 있다. 비록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나라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감있는 행동을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름으로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요즘의 정치가들은 그런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는거 같다.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자기가 한 행동이나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 커녕 회피하는 모습들을 볼때 우리는 꼭 오이디프스 왕이라는 명작을 정치가들에게 권해야 할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서양 문학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는 리포트 주제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평소에 철학과 관련된 책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책읽기를 좋아하고 남들보다 글 쓰는 재주도 뛰어나다고 생각했었기에 든 자신감 때문이었을까?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교수님이 그냥 부담 없이 읽어보라고 한 ‘향연’이라는 책은, 옮긴이의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벽으로 다가왔다. 항상 수업시간 때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들어왔지만, 철학이라는 학문과 그에 관련된 서적들은 단순히 교양수준의 지식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이 책을 읽기전만해도 철학을 지칭하는 그리스어 philosophia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몰랐던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을 읽고서 리포트를 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부여받았던 그 어떤 과제보다도 난해하고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철학이란 학문에 대한 생각과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끼는 철학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1세기를 살아오면서 인터넷과 현대문명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학문은 너무나 익숙해지기 힘든 학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원천적으로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하여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이미 나에게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학문적 사상으로는 -철학을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고대 철학자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들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며, 왜 그들이 시대를 내려오면서까지 인정을 받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철학이라는 학문에는 얕은 지식으로는 잘 설명되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향연에 참가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내가 만약에 저들이 토론을 하는 자리에 있었더라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리고 누구의 의견에 동조했을까? 아마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누구의 의견에도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 어떤 학문이나 이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오묘하며, 아무리 나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서는 잘 설명되어질 수 없는 그 무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턱없이 부족한 지식과 얕은 철학적 한계에서 봤을 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설명해본다면 지극히 단순하다. 나는 그들처럼 에로스를 찬양하면서 이야기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럴 생각도 없다. 나는 그저 사랑이란 타오르는 불길과 위대함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의 동물에 대한 애정도 사랑이요, 사람의 식물에 대한 애정도 사랑일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람이 책상을 좋아하고 의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개가 고양이를 사랑할 수도 있는데, 사람이 책상을 사랑하고, 연필을 사랑하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사랑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느 유행가 가사에 ‘사랑을 한 사람들은 후회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더 후회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그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사랑을 한다고 꼭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꼭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말했듯이 사랑은 위대하지만 그 위대함은 사랑이라는 불길이 얼마만큼 큰 크기로 타오르고 얼마만큼 오래 타오르느냐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이 고층건물만큼의 불길처럼 저 남극의 얼음을 다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오래 타오를 때, 사랑은 그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불길이 정말 작은 크기로, 순식간에 타서 없어질 정도로 짧다면, 사랑의 위대함도 그에 맞게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악을 사랑한다고 치자. 그는 사랑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음악을 사랑하는 불꽃이 꺼져버린다면, 그가 했던 노력들을 더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통하는 진리요, 동물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통하는 진리일 것이다. 물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통할 수 있다.그렇다면 여기서 보통의 사람들이 흔히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때 통용되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명이라는 것을 믿어왔다. 처음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바로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러한 사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나에게도 지금 여자친구가 있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단지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라는 불꽃이 그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불꽃이 다 타버렸을 때, 나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사랑을 생각해보면 쉽게 설명되어질 수 있다. 내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재산을 사랑해서 결혼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녀의 배경을 사랑하고 결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나의 사랑의 불꽃은 그녀의 배경이나 재산을 향해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의 누가 그랬듯이,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믿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그 불꽃이 꺼져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흑인음악이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현재에 이르러 탄생한 모든 대중음악들은 흑인들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대중음악들은 팝, 록, 리듬 앤 블루스, 재즈, 테크노 등 수많은 장르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 뿌리에는 흑인음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현대에 있어서 흑인음악의 기원은 흑인영가에서 찾을 수 있다. 가스펠이라고도 하는 이 흑인영가는 미국의 흑인들이 노예시대에 부르기 시작한 종교음악이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노예들이 집단농장에서의 힘겨운 노역 속에서 내세에서의 행복과 해방을 희망하며 부르던 노래들로 이전의 서양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흑인 특유의 리듬감이라던가 말 그대로 영혼을 울리는 소울 창법은 이내 자존심 강한 백인들에게도 어필하기 시작했으며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었다.흔히들 흑인음악 하면 리듬 앤 블루스나 힙합, 소울, 펑키들을 떠올리는데 흑인음악은 단순히 몇 가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쳐왔다. 재즈의 경우 197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장르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다 가벼운 팝음악 등에 자리를 내주어 많은 사람들이 재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재즈의 기원이 흑인들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재즈는 미국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 밴드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모두들 백인음악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록음악 역시 기원은 흑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흔히들 록음악하면 엘바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스톤즈, 레드 재플린 등의 백인가수들을 떠올리는데 그 기원은 흑인음악에 있다. 록음악은 흑인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를 계승한 장르이며 흑인들 특유의 저항정신이 1950년대 젊은이들의 상황과 맞물려 발전된 것이다. 흑인음악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백인음악의 자존심이라고도 하는 록큰롤 역시 흑인음악의 하나인 것이다.
아프리카 언어가 가진 한계와 난점에 대하여.나이지리아의 비평가 Obijunwa wali(이하 : 오비 왈리)는 이라는 잡지 10호에서 마케레레 작가회의)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이라는 그의 논설에서 영어로 글을 쓰는 데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식민주의자들이었던 영어나 불어를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것데 대해 비난을 한다는데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만 보지 말고 전체적인 숲을 보아야 하기에, 아프리카언어의 한계성과 난점은 과거시대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생각해봐야할 문제점이다. 실제로 오비왈리의 독설에 가까운 주장과는 달리 아프리카 신진 작가들의 작품은 상상치도 못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언어의 한계성은 무엇일까?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문학을 갓 태어난 유아에 비유하곤 한다. 그리고 기실 아프리카 문학은 유아의 한 세대를 아우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상호의사소통 수단으로 식민주의자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식민주의자들의 언어를 폐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식민주의 자들의 언어사용 역시 아프리카 민족국가의 성립과 함께 나타난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일화만을 보더라도 아프리카 언어의 한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1960년에 치누아 아체베는 동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탕가니카)의 스와힐리 시인인 샤반 로버트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가 받은 시집 두권은 스와힐리어로 써있어서 그가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전까지는 이 시집을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도 물론 많은 아프리카어를 배우고 싶어하였으나 그 많은 아프리카어를 다 배울수는 없었고, 그의 생각으로는 국가 전역에서 사용되는 중심어의 세력을 방해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부족어를 발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아프리카언어의 한계성을 다른 나라에 비유하자면 브라질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브라질 작가 호르게 아마두(Jorge Amado)가 지은 소설 는 열광적인 아프로-라킨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지만 브라질어라는 언어장벽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다시 한번 아프리카언어의 한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호주의 시인 A.D 호프는 오늘날 가장 행복한 작가는 소수인의 언어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으나, 하지만 실상은 거대한 국가집단안에 있는 작가들이야말로 커다란 행운인것이고, 실제로 치누아 아체베라는 아프리카의 훌륭한 작가는 영어 사용 국가를 은연중 부러워하기도 했다.아프리카언어의 한계성을 역설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아프리카인들이 왜 영어와 불어를 폐기시키면 안되는지 알아보자면, 언어적 파편화가 극에 달한 지역에서 -일례로 400여개의 상이한 언어가 난립하고 있는 나이지리아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신생 아프리카의 독립국들에서- 해당 지역의 문학의 세계화를 지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전에 부족 차원에만 국한된 문화적, 지적, 정치적 차원의 행위에서 탈피하여 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적어도 국가적 차원의 현안으로 부상시키기 위해서 영어나 불어사용은 개별 작가의 의지로 각기 상이한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만약에 정치적 성향을 띤 남아공 작가들의 영어로 쓰여진 작품이 없었더라면 남아공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대한 서방세계의 인식은 한계성을 지녔을 것이고, 식민지배 당시 영국정부에 대항에서 일어난 케냐의 마오마오 투쟁의 잔혹한 참상에 관한 응구기의 작품이 없었더라면 수 십만의 현지인들이 살해되었던 케냐인들의 이 독립의지는 한낮 주변부 지역의 역사의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체베나 소잉카가 영어를 사용하는 대신 각각 자신들의 부족어인 이그보어와 요루바어를 표현의 도구로 선택했더라면 그들의 작품에 내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신적 요소와 탁월한 문학적 요소는 기껏해야 관련된 어학전공교수의 논문이나 대학교재의 몇 줄을 장식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Ⅰ. 동아프리카 내륙의 탐험1. 유럽인들의 지리적 관심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수 세기 동안 들어 왔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여행과 답사는 부진했고,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지식은 미미미하였다. 유럽은들은, 리빙스턴이 그의 글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은 미덕과 결점을 지닌 그들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인들보다는 아프리카 자체의 지리적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어떤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를 초기에 탐험했었는지 알아보자.2. 탐험가들1) 크라프와 레프만19세기 중엽, 유럽인들의 동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리바이 음피아에 선교 기지를 설치한 두 명의 독일 선교사 루트비히 크라프와 레프만에 의해서 고조되었다. 영국의 교회 선교회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학교의 개설을 계획하였다. 이와 같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동아프리카로 파견된 최초의 유럽 선교사는 독일인 목사 루트비히 크라프였다. 크라프는 내륙 선교활동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844년 3월에 몸바사로 이동하여 니카족의 선교 사업에 몰두하며, 니카족의 언어와 스와힐리어를 학습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스와힐리어?영어 사전을 편찬, 발간한 최초의 저술자로서, 스와힐리어의 이해와 보급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1846년, 선교사 레프만 목사는 크라프와 합류하게 되며, 크라프를 도와 라바이의 선교 기지를 운영하게 된다. 이들은 니카족의 관습과 언어를 습득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며, 니카 원주민들은 이들 선교사에게 우호적이었으나 그들의 믿음을 개종시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크라프와 레프만은 거친 밀림숲과 맹수들의 공격, 풍토병과 예상치 못한 원주민들의 반응을 감수하며 각각 남쪽과 서쪽지역으로 탐험을 하게 되었다.레프만의 첫 선교 여행은 타이타 구릉 지대로서, 몸바사에서 약 100마일 떨어져 위치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약 500여년 전 피그미족들이 거주하였으나 침략자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서, 레프만은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862년 2월 19일 부간다의 수도 맹고에 입국함으로써 최초의 유럽인 방문자가 된다.스페케는 나일강의 수원을 발견하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란트를 북쪽으로 보내고 다신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폭이 약 600야드 정도의 거대한 나일강을 만나게 되며 이 강을 거슬려 올라가던 중 1862년 7월 28일, 빅토리아 호에서 연유하는 폭포를 만나게 되며 이 곳이 나일강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스페케는 영국에서 영웅이 되었으며, 위대한 아프리카 탐험가였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고사하였다.4) 사무엘 베이커사무엘 베이커는 오랜 동안 나일강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또, 그는 여행을 즐겼으며, 강인하고 거대한 체구에 사격술 또한 뛰어났다. 그는 독일인 부인과 거대한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고 싶어 약 100명의 동행인과 3척의 배를 운용하여 스페케로부터 들은 나일강과 연결되어 있을 또 다른 호수의 존재를 탐험한다. 베이커 일행은 1863년 3월에 탐험을 시작하여 스페케가 들었다고 하는 거대한 호수에 도착한다. 그는 이 호수를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이름을 따라 엘버트호라고 명명하였으며, 동쪽 연안을 따라 선박으로 약 15마일을 전진하며 탐사하던 중 머치슨 폭포를 발견하였다. 그는 다시 엘버트 호로 돌아와 수송의 어려움과 건강 상태의 악화로 탐험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5) 데이빗 리빙스턴주로 남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오랜 동안의 탐험 여행으로, 위대한 발견을 통해 유럽인들의 관심을 가장 높이 끌어올려 동아프리카의 역사를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리빙스턴은 탐험 여행을 위해 최초로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며 은가미호를 발견한다.그의 첫 번째 본격적 탐험 여행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계속되며, 리빙스턴은 바로첼란드에서부터 대서양의 앙골라의 루안다까지 탐험한 다음 다시 동부 인도양의 모잠비크의 켈리마네까지 도달하는 탐험여행을 시도했다. 이 탐험의 대부분은 잠베지 강의 진로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1855년 약 3000마일 이상을 전진하였을때 거대한 폭포를 발견하 저술하여 성공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883년, 유럽으로 돌아온 스탠리는 그 곳에서 4년간 체류한 후 1887년에 에콰토리아의 총독 에민 파샤를 수단의 마디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와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다시 귀환하는 도중 루웬조리 산맥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목격하고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 관한 책인 ‘암흑의 대륙에서’를 집필함으로써 아프리카 탐험에 종지부를 찍는다.7) 죠셉 톰슨1882년, 런던의 왕립 지리 협회는 마사이랜드를 통과하여 빅토리아 호까지 도달하는 단거리 루트의 개척과 탐사를 위해 조셈 톰슨을 탐험대의 팀장으로 선정하게 된다. 이 최단거리 루트를 개척함으로써, 내륙의 일반 무역을 활성화시켜 노예무역을 종식 시키려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다.톰슨은 5700피트 높이의 만년설이 뒤덮인 케냐산을 최초로 목격하는 유럽인으로 기록되며 술탄의 권력 약화와 노예 무역 폐지에 기여하였으며, 자라모족의 협력으로 보다 더 합법적인 무역의 요구를 이끌어 냈다.그러나 톰슨은 무역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1885년 그의 저서인 ‘마사이 영토를 지나에서, 10개의 주요 씨족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마사이의 조직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Ⅱ. 선교활동1. 유입배경많은 기독교 단체의 구성원들이 기독교의 복음과 서구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18세기 말엽 개신교의 선교 단체들을 출현시킨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을 증가시킨 이유는 1815년부터 산업 혁명으로 인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유럽사회의 향상된 생활수준으로서 해외의 탐험과 선교 활동을 지원할 자금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19세기에 이르러서 동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유럽의 부유 계층 시민들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국에서는 교회선교회와 런던선교회와 같은 선교 단체를 결성하여 외부 세계의 기독교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사 지원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또, 19세기 증기 기관선의 발명으로 외부 세계로의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선교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수의 선스코틀랜드 선교단과 아랍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그러나 가장 근복적인 문제점은 아프리카인들이 기독교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에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였으며, 종족의 관습은 토속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경우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3. 식민지 경영선교 활동은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동아프리카 내의 식민지를 확보하도록 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릉 위한 선교 활동을 방해하는 원주민 부족 간의 전쟁을 유럽인들이 들어와 중지시켜 줄 것을 희망하였으며,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을 실시함으로써 선교 활동의 걸림돌이 되는 아랍 노예 무역상들의 공격을 저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추기경 리뱅제리는 프랑스 정부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보하기를 유도하였으며, 스코틀랜드 개신교 선교단은 포르투갈 정부가 노예 무역에 대해 소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니아살랜드를 영국 정부가 보호령으로 선포하여 경영하도록 유도하였다. 또, 부간다 왕국의 교회 선교역시 회교도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영국이 부간다를 식민지화하기를 희망하였으며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영국은 우간다와 케냐를, 독일은 탕가니카를 식민지와 보호령화시켜 통치하게 된다.4. 활동과 업적1) 교회 선교회동아프리카를 선교 목적으로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들은 독일인들로서 영국의 교회 선교회의 일원이었다. 잔지바르의 술탄으로부터 환영을 받은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선교사와 탐험가로서의 자신들의 뒤를 옹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2) 성령 신부회이 선교회는 1860년대 초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문제 해결에 앞장 선다. 1963년, 자유를 얻은 노예들을 위한 정착촌을 건립하고, 학교와 병우을 설치하였다. 1868년, 바가모요에서도 잔지바르의 것과 같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교회 선교회 역시 프리어타운에 자유를 얻은 노예들을 위 증가하게 되자 유럽의 선교사들은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Ⅲ. 외부세계의 압력1. 영국1870년대는 영국의 동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는 일련의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성취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국은 식민지 확보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경제학자들은 식민지의 무역 이득보다 더 많은 관리 비용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무의미 한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영사들을 통해 현지의 통치자를 지지함으로써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을 모색하였다.2. 이집트1870년대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접근은 동부 해안으로부터의 침투와 나일 강을 따라 북쪽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집트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3. 벨기에1865년, 벨기에 왕에 즉위한 레오폴드는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야망에 가득 찬 레오폴드는 유럽의 작은 중립 왕국의 통치자로서, 열대 아프리카의 거대한 모습을 보고 아프리카 대륙의 개화에 있어서 지도자가 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는 1876년,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진 지도자들과의 회합을 소집하였는데, 이 회합은 국제아프리카 연합으로 발전되었다.4. 프랑스의 관심동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의 야심과 영향력은 1862년 술탄의 독립 승인을 선언한 이후 차차 쇠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레오폴드와 국제 아프리카 연합에 동참하였으며, 국제 아프리카 연합의 프랑스측을 대표하여 성직자 아베드베즈는 1878년에 잔지바르를 출발하여 내륙으로 향한다.Ⅳ. 식민지분할유럽 열강들은 오랜 동안 동아프리카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여 왔다. 포르투갈은 이미 오래 전 교역과 선교의 목적으로 동아프리카에 접근하였으며, 뒤이어 노예 무역 시대가 뒤따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럽인들의 새로운 관심과 의도가 구체화되기 시작되며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등의 아프카에 대한 관심은 상호간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든다.1. 베를린 회의와 독일의 관심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인해 유럽 열강들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