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서동요] 서동요-서동은 누구인가 평가D별로예요
    薯童謠-서동은 누구인가Ⅰ.서론(1) 원전 소개善花公主主隱 善花公主니믄他密只嫁良置古 다 그스기 얼어두고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맛둥바잎 바밑ㅣ 몰 안고 가다.(2) 서동설화제 30대 무왕은 이름이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로 경사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거처했는데, 지룡과 교통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기량이 넓어 측량하기 어렵고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사에 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여 아이들과 친하게 사귀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서 아이들을 꾀어 그 노래를 부르게 했다.「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뒹굴안고 간다」그 동요가 서울 안에 가듸 퍼져서 궁중에까지 다다랐다. 백관들이 공주를 원방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길을 갈때에 서동이 길 가운데에 나와 절을 올리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뜻밖에도 마침 미덥고 즐거워져서 이로 인하여 수행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이에 동요의 효험을 믿게 되었다.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백제에 왔다. 왕후에게 받은 순금을 내놓고 장차 생계를 꾸려가고자 하였더니,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말했다. 공주는 이것은 황금인데, 가히 백년은 쓸 수 있는 부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서동은 냐가 어렸을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쌓여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이것은 천하의 지보입니다. 당신이 지금도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서동은 좋습니다. 하였다. 이에 금을 모으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師子寺)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금을 운송할 계책을 물었더니, 법사는 내가 신력(.첫째, 민중들에게 구전되어 온 이류교혼담(異類交婚譚)에서 탄생된 영웅 이야기가 영향을 주어 자기들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인물의 출생을 신화화(神話話)하였다.둘째, 아름답기 비할데 없다는 이상적인 여인인 선화공주를 등장시켰다.셋째, 미륵사연기설화(彌勒寺緣起說話)를 첨가하여 서민들에게 불심을 심어주고자 하였다.서동들이 자신들을 대표할 만한 이상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서동설화가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그 과정에서 일연이 교화의 목적으로 미륵사 창건연기설화를 첨가시켜 『삼국유사』에 수록함으로써 지금의 서동설화를 정착시켰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왜 하필 서동의 이야기가 백제 무왕의 이야기 속에 편입되어 문헌 기록화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여러 설화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이 서동설화가 오히려 비슷한 다른 설화에 영향을 준 설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2)최성호본래 설화상의 연대나 이름등은 필요와 자의에 따라 임의로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신라와 백제사이의 전쟁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옛날의 평화로웠던 양국의 우호관계의 재현을 소망하며 창조해 낸 것이 서동설화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신라 쪽에서는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를 등장시켰고, 백제쪽에서는 정체불명의 무강왕을 등장시켰다고 보았다. 다만 일연이 무강왕이라 표기된 것을 실존인물인 무왕으로 역사화하였다고 해석하였다.사실 백제와 신라사이의 전쟁이 한참이었을 무렵 나제(羅濟)간 우호관계의 재현을 소망하였다는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사람인 일연이 『古本』에는 무강왕으로 되어있던 것을 굳이 무왕으로 바꾸면서 까지 이 설화를 『三國遺事』에 수록한 것에 대한 적절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타당한 견해라고 보기는 어렵다.3) 김문태용의 아들인 무왕이 못을 메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볼 때 이 설화의 목적은 불교의 홍보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서동이라는 인물과 무왕을 어떻게 연결다. 이런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그리고 1993년에는 전북 익산면 금마면의 미륵산 기슭에서 사자사 터가 확인된 일도 있다.{ 1993년 3월 23일 백제문화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사자사(師子寺)의 명문이 발굴되어 삼국유사 무왕조에 있는 사자사나 미륵사가 그 속에 실재해 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또 삼국사기는 무왕 35년에 왕흥사가 완공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서동요」의 기록물들을 단순히 설화로만 볼 수 없다는 중요한 단서들이다.2. 역사적 해석1) 무왕설우선 삼국유사의 편자인 일연은 서동설화를 백제의 武王에 얽힌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대부분의 초기 향가 연구자들이 일연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 이 설화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으로, 서동은 바로 무왕의 아명으로 보고 있다.{ 황패강 외,『향가문학연구』,(일지사, 1993)김균태는 서동이 법왕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탄생이 이물과의 교혼에 의한 것으로 설화화된 데에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그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은 오랜 기간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룡으로 표현되었으며 무왕은 법왕이 아직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을 때 정실이 아닌 다른 여자와 정을 통해 낳았던 인물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왕이 정상정인 방법을 거쳐 왕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화적 조작을 시도한 것이 바로 『古記』의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오히려 무왕을 신화화한 것이 아니라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의 신화화에 가깝고 무왕에 대한 신화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최래옥은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지만 증조부인 위덕왕대에 소년시절을 보내었고, 생업으로 마장사를 하여 서동으로 불리워졌고 후에 백제가 신라와의 대립을 완화하고 백제의 인질을 잡을 책략으로서 서동을 신라에 잠입시켜 진평왕의 공주 선화를 데려오게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믿을 수 없는 점이 많다.서동을 무왕으로 이해하려는 입장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가 갖는 역사적 모순을 비판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과는 맞지않는 무리한 논의를 전개시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2) 동성왕(東城王)설박노준은 서동을 동성왕이라 보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동성왕은 신라에 건너가서 경주 일원의 군동을 모아놓고 전부터 그곳 사회에 전래해 오던 동요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고쳐서 부르게 한 후 그곳의 공주녀를 빼내올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보았다는 것에 착안하고 있다. 백제 23대왕인 동성왕은 무주왕의 아우이다. 문주왕의 아들인 제22대 삼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문주왕, 삼구왕 양대에 걸쳐서 해구(解仇)가 왕을 시해한 사건은 동성왕이 서동으로서 신라에 건너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해구가 살해된 직후에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고 추측하고 있다.그러나 이 견해 역시 동성왕이 즉위이전 신라에 건너갔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해구로부터 일신을 보전하기 위해 신라에 들어간 서동이 한가히 동요로서 그 곳의 귀공녀를 꾀어 결합하고자 했다는 것도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이병도는 박노준의 지적한 바에 따라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고 있긴 하지만, 그에 따르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성왕이 즉위한 시기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지 불과 사년후였기에 고구려로부터의 압박을 받을 때 였고, 이러한 압박은 신라와 백제의 혼인동맹을 맺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동 은 왕의 어릴적 이름이거나 신라의 별칭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그러나 이병도의 주장은 서동설화가 갖는 신화적인 상징부분에 대한 이해를 배제한 채 역사적 사실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외의 부분인 선화공주와 진평왕과의 사이라든가 미륵사 건립등의 부분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시조에 해당하는 백제의 인물로서 제25대 무령왕을 들었는데,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그 기록에서는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도 아니며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이루지도 않았다. 포악한 전왕을 몰아낸 국인의 추대로 왕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대석은 무령왕이 전대의 왕과는 다른 혈연, 즉 다른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는 새로운 시조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무령왕이 생장(生長)한 집단의 신화가 무령왕에게 결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서재석의 주장대로 무령왕을 전왕인 동성왕과는 다른 세력의 출신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 자료를 얼마만큼 신빙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백제 후기에 이르는 어느 왕인가에 가서는 왕실의 세력 교체에 의해 마한의 신화가 왕실로 유입되었던 것은 상정해 봄직하다. 이로써 민간에서만 전승되던 야래자신화가 백제왕실로 유입되는 계기를 가졌을 것이다.4) 원효설김선기는 중 이외는 절대 머리를 깎지 않으므로 머리를 깎은 서동은 중이 분명할 텐데 무왕이 중이 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는 것, 또 진평왕과 무왕대의 나라 사정이 통혼할 만한 환경이 못되었다는 것등을 들어 무왕은 서동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어 서동을 원효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첫째는 원효의 어릴적 이름과 서동이란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서동은 머리를 깎았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중이었을 텐데, 이것은 중이었던 원효와 맞아 떨어진다.셋째, 원효가 자루없는 도끼 노래를 불렀던 기록이 있는데, 이것역시 서동이 노래를 부른 사실과 일맥상통한다.그러나 김선기의 견해대로 서동을 원효로 본다면, 이 이야기가 『삼국유사』원효조의 항목에 실리지 않고 백제조의 항목에 들어간 까닭은 설명할 수 없게 되며, 또한 서동이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라든가 즉위 후 미륵사를 창건하는 것도 원효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인지도 불분명해지는 문제를
    인문/어학| 2003.04.21| 12페이지| 1,000원| 조회(792)
    미리보기
  • [작가연구] 김동리 평가D별로예요
    ⅰ.김동리의 문학의식과 신인간주의김동리(金東里 1913 -1995) 는 한국의 근·현대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우리의 정 통성과 정체성에 대하여 탐색한 작가로서 해방과 민족문학의 확립, 전 후현실(戰後現實)과 문학의 분열, 산업과 과정과 문학의 사회적 확대로 이어지는 50여년의 전 생애에 걸쳐서 한국인의 주체성에 대한 물 음과 해답을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서 제시한 작가이다. 동리의 인간성 옹호 사상론은 그의 스승이자 맏형인 김범부의 생명철학의 동양사상 체계로부터 심화되어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잠재적 유물로만 이어받지 않고, 그것을 세기말의 인류 정신사적 과제로 확장시켜 한국문학의 세 계화라는 개성있는 독창성을 전 작품을 통해 탐구한 작가이다.호명이 창귀(昌貴)이며, 호가 동리(東里)인 김동리는 1913년 음력 11월 24일 경북 경주시 성건리에서 오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동리가 태 어난 성건동은 일명 무당촌이라고 불리었으며, 소설속의 신화적 배경 으로 자리해 巫女圖 , 을乙火등의 배경이 될 만큼 동리문학의 정신적 기반이 된다.김동리는 1935년 신춘문예에 화랑의 휴예 와 1936년 에서 山火 가 당선되면서 당시 우리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동리는 첫 창작집인 巫女圖 를 내고 계속해서 黃土記 를 속간하였고, 해방 후에도 귀환장정 , 등신불 등의 창작집을 내어 순수 문학관의 바탕 위에서 인간 생명의 본질적인 것을 제시, 신인간주의를 추구해낸 집념의 문학가로 자리 매김 한다.특히 김동리가 작가생활을 시작한 1930년대는 카프로 대변되는 유물론적 문학사상이 성쇠(盛衰)를 보이고 있을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동리는 이데올로기를 배제 한체 인간성 옹호를 부르짖으며 문학적 관심을 신화, 무속, 민족, 휴머니즘 등으로 집중시켜 당 시대 여타의 문학들과 차별화 하였다.그러나, 김동리는 1941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한 편 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는데, 이는 일제말 암흑기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절필한 것으로 보여진다.ⅱ. 시대적 배경과 김동리의 문학의식김동리 문학의 출발점은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현실관과 격변하는 시대적, 민족적 체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문학사적 측면에서의 시대의 중요성은 당 시대들이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정치적 동향과 문화적 상황들이 별개가 아닌 함께 맞물려 가는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김동리의 문학관 역시 변화하는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 식민지시대의 문학의식이 시기 문학의 최대의 사명은 당대의 주어진 상황과 경험을 형상화해서 문제와 직결된 민족적인 형식을 발견하고 민족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 의식 있는 작가들에게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였고, 이러한 탄압 때문에 근대 문학을 민족문학으로 확대·심화·발전시키고 민족 해방을 이룩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작가들이 그 노선을 이탈하거나 역행하는 경우마저 발생하였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 즉 민족 정신이라든가 민족적 개성에 해당되는 모든 것이 말살되어 가는 시기의 문제에 직면해 있던 김동리는 문학을 통해서나마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서구의 기독교나 중국의 유교 사상이 들어오기 이전, 즉 상고 시대에서부터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기능을 담당했던 무속에 눈을 돌리게 된다.즉 김동리는 무속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 민족고유의 정신적 가치의 핵심을 찾고, 지키고 나아가 현대에 되살리는 곧 민족의 고유한 혼을 문학으로 구현시켜 그것으로 세기말을 휩쓴 허무의 물결이 몰아온 20세기의 불안과 혼돈을 헤치고, 새로운 성격의 神과 人間象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2. 解放期의 문학의식해방기의 김동리의 문학의식은 리얼리즘의 정신을 주조로 하면서도 사회적 관심의 확대와 소설의 장르적 확대를 동시에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식민지 시대의 김동리의 문학의식이 형이상학적인 순수문학의 개념 정립단계였다면, 해방기의 역동적인 시대 상황에서의 김동리의 문학의식은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의 등가 관계를 모색한 문학론이었다. 이 시기 그의 문학의식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표출되어져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극명한 논쟁의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문학론에 있어서도 민족문학으로서의 제3 휴머니즘을 정립하였다.그는 해방과 더불어 작품 속에서 인간의 삶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모든 국면에 다양한 관심을 보이며, 긴장된 시대적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소설적 형식의 이완을 꾀하기도 하고, 개인의 내면을 파헤치기 위해 의식의 흐름을 추적하기도 한다.다시 말해서 해방공간에서 민족문학의 좌표를 순수문학으로 세우고자 한 이 시기 김동리 문학의 핵심적인 관심과 논의는 문학의 본령인 순수문학은 인간성 옹호의 휴머니즘을 기조로 한다 는 것과 민족문학은 순수문학이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3.전후(戰後)의 문학의식김동리는 전쟁을 겪으면서 민족적 비극인 참상을 휴머니즘의 문학 방법론으로 형상화시켜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 전쟁상황을 고발하는 작품을 써 나간다. 50년대에 발표된 그의 소설중에서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로 歸還壯丁 , 밀다원시대 , 實存舞 등을 볼 수 있는데, 이 소설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겪게되는 만남과 헤어짐을 다루어 전쟁의ⅳ 참상과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또한 노년기에 접어든 김동리 문학은 회상적 인식을 통한 삶의 순환론적 인식을 드러내는 소설적 경향과 정통성을 바탕으로 하는 무속의 여신적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비롯한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상적 인식의 세계관들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나타난다.
    인문/어학| 2003.04.21| 3페이지| 1,000원| 조회(556)
    미리보기
  • [처용가] 처용가에 대한 무속학적 고찰
    무속학적 측면에서 이해하기1. 원문과 해석東京明期月良 서울 밝은 달밤에夜入伊遊行如可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二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내(나의 아내) 것이지마는二兮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디 내 것이다만은(나의 아내이지만)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2. 배경설화제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 (학성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이다. )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에 있는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했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 명했다.동해의 용이 기뻐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에서 일곱 번째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처용의 아내로 삼게 하여 그를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하고 또한 급간이란 관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이 그를 흠모하여 밤이면 사람으로 변하여 그 집에 가서 몰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이 때 역신은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했다. 이 일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로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라 했다. 또는 이 절을 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왕이 또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오직 왕의 눈에만 보였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나타내 보였다. 신의 이름을 상심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하여 御舞祥審 또는 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폈다가 공인에게 명하여 이를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였으므로 상심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霜髥舞라고도 하니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에 행차할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했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이라 했다. 어법집에 말하기를 그 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사태를 짐작하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됐다는 뜻이다. 하였다.즉 지신과 산신은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가 나타났다고 하여 술과 여색을 더욱 즐긴 까닭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고 한다.3. 작품의 이해노래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대체로 축사(逐邪: 나쁜 귀신을 쫓아냄)나 벽사진경( 邪: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進慶:좋은 일을 맞이함)의 무가(巫歌)로 본다.고려 시대에도 처용에 대해 속요 가 있으며 처용의 설화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로 계속하여 계승되기도 한다.향가 의 여덟구 가운데 앞 여섯구가 내용이 약간 바뀌어 34∼36행에 삽입되어 있다. 향가 로부터 45행으로 부연되면서 역질(疫疾)을 쫓는 완벽한 무가(巫歌)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고 본다.내용상 4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사(序詞)로서의 첫째 단락과 처용의 위압적인 모습을 그린 둘째 단락, 처용의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셋째 단락,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위용을 말함으로써 역신을 물리치고 접근을 방지하고자 하는 넷째 단락이 그것이다.는 고려시대 궁정의 구나의식(驅儺儀式)에 잉용(仍用)되었음은 물론 조선시대에까지도 그대로 전승되었다.4. 깊이보기-무속학적 측면에서1)내용이 노래는 축사(逐邪 : 사악한 것을 쫓음) 및 벽사진경( 邪進慶 : 사악한 것을 쫓고 경사를 맞아들임)의 노래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에서 무속(巫俗)에서의 악귀를 여유롭게 쫓는 풍속과 우리 민족특유의 예지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惡神)을 물리치는 뒷전풀이 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그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일이다. 오직 무격 사회 안에서만 이해될만한 풍습이기 떠문이다.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 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2)성격1 목적성의 노래 - 이 노래는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주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의 전례는 멀리 "구지가"에서, 또 향가로는 혜성가와 도솔가, 제망매가에서도 볼 수 있다2 무당(샤먼)의 노래 - 이 노래는 배경설화에 나타나듯이 동해용신의 아들인 처용이 부른 것이다. 따라서 그 주술적 힘의 원천은 용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동해용신이 자신의 힘의 일부를, 혼란한 신라를 지탱해 가려는 헌강왕에게 대여해 준 것으로, 처용은 그 힘을 받은 대행자(무당)였던 셈이다. 그리고 처용은 그러한 주술적 힘으로 각종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3 전승과 변화 - 이 노래는 속악가사(고려가요) 처용가에서 보듯이 민간전승과 국가적 전승으로 꾸준히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가사도 길어지고 무당이 굿을 하기에 적합하게 각색되었다. 민간에서는 그 후로도 이 노래를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궁중에서는 이 노래뿐만 아니라 처용의 차림새와 춤을 놀이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형식에 수록 된 것을 보면, 노래의 형식은 장 또는 연의 구분이 발견되지 않고, 대체로 보아 한 줄이 네 토막인 것 같기는 하지만 줄을 나누기도 어려워 산만한 편이다. 이것은 무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민요에서도 기본 형식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이 일찍 표면화한 예라 하겠으며, 후대의 가사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하겠다.4)전승고려의 처용가는 노래로 된 언어이면서, 대화로 전개되고, 그 춤에 있어 배역을 나누어 행 동하는 연극적 요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무가가 향악의 한 장르로 두드러지게 나 타난 것은 향악보가 궁중의 향연에 쓰인 음악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매우 특이하다.처용가는 고려사 악지 에서 신라 때 생긴 것이라고 밝혔으면서도 삼국 속악에다 넣지 않고 고려 속악이라 하였다. 오래 전승하는 동안에 원래의 모습과는 달라졌기에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나싶다.신라 때의 원천도 노래만이 아니라 춤과 놀이까지 갖춘 복합체이고, 연극적 요건 역시 적지 않게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려에 이르러서는 그 다면적 성격이 속악정재라는 것으로 일단 정리가 된 다음, 시대와 상황에 따른 변이를 보였다.이런 조건은 처용놀이가 민간 연극의 발전과정과는 맞지 않게 격식화 되도록 하는 구실을 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처용놀이는 예사 속악정재와는 다르게 굿으로서의 기능을 지녀왔 으며, 곧 는 굿노래라 할 수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용놀이를 섣달 그믐달 궁중에서 거행하는 나례의 한 절차로 제도화 한 데에서 오랜 전통이 확인된다. 그런데 재앙을 물리치는 굿은 재앙이 어떤 구체적인 의 미를 가지는가에 따라서 관습적인 주술상의 의의가 인정된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굿은 망국의 불안한 조짐을 재앙 또는 질병이라고 여기며 공연했었는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거기 상응하는 어떤 주제가 부각 될 수 있었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강화도 피난을 간 조정에서 처용놀이를 하면서 몽고 침략의 격퇴를 기원했을 것이다.나례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거행되는 의식으로 이 나례행사는 주 이래로 중국에서 행하 던 방식을 수입한 것으로 가면을 쓴 사람을 비롯하여 군중이 무기를 들고 주문을 외워 잡귀를 물리치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이 때 처용희도 아울어 거행되었다. 처용희는 한국의 전통적인 나례라 할 수 있다.은 처용희와 관련된 무가로, 신라나 고려와는 달리 처용희와 함께 구나의 의식에서 불려졌던 노래가 아니고, 궁중의 종묘 제사때 태종대왕의 신위를 모시면서 그 주위를 정화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거나, 궁중연회에서 태종을 칭송하기 위해 불렀던 노래인 것 같다. 즉, 은 처럼 구나의례에서 불려지던 무가는 아닐 것이다.『시용향악보』에 실려 있어서 관심을 끌지만, 그 정체가 모호하기만 한 ,, 이하 ,에 이르는 노래들은 이와 관련시켜 다룰 필요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대단한 노래는 아니다. 한 대목씩 실어 놓은 사설은 별로 볼 만한 내용은 없으며, 악기의 구음 또는 주문이라 생각되는 말만 늘어놓는다.
    인문/어학| 2002.10.10| 5페이지| 1,000원| 조회(1,07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2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3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01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