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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패니메이션 - 에반게리온 평가C아쉬워요
    +요즘 우리는 tv에 친숙해 있다. 예보다 접할기회가 많고 인터넷이라는 컴퓨터에 많이 빼앗겼지만. 내가 어린시절에도 tv는 빼놓을 수 없는 크나큰 친구였다. 그중에서도 만화를 들 수 있다. 어릴적부터 나는 만화를 좋아했다. 제본되어 있는 문고판 책뿐아니라 tv만화도 물론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일요일 아침 누나의 강압에 의하여 억지로 봐야 했던 "캔디",그리고 "미래소년 코난"등이 있다. 그때쯤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예쁜 캔디얼굴(그렇다..난 남자다..-.-;; ,잘생긴 테리우스보다 캔디가 더좋다.)그리고 들판에서 달리던 코난의 웃는얼굴을 보았다. 어릴때의 기억의 잔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때의 추억때문일까? 아직도 저패니메이션이라 대별되는 일본 만화가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요즘도 가끔은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된다. 물론 저패니메이션이다.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채 쳐다보던 그 모습에서 이제는 나름대로의 재미와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럼..먼저 저 저패니 메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나름대로 살펴보아야 하겠다.+저패니메이션일본+애니메이션,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저패니메이션에 열광하고 있으며 저패니메이션은 세계화라는 시장확대를 이미 완수해가고 있는중이다. 저패니메이션은 진정 국경을 넘고 있는가? 이 질문 속에는 어휘가 내포하는 지역성과 함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오랜 숙언이 교묘하게 함축되어 있으며, 바로 그 곳에서 저패니메이션의 변방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물음이 함께 시작된다.▶저패니메이션의 유래현재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들, 최근에는 저팬과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를 합친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유래는 어디서 온 것인가? 저패니메이션의 조류는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의 서해안에서 시작된다. 그 역사는 의외로 깊어서,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인 [철완아톰](63)때부터 이 지역에서 방영됐었다. 애니메이션뿐만이 아니고 [울트라맨]오타쿠들의 이야기를 빼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오타쿠라는 일본어는 원래 우리나라 말로 치자면 댁이라는 말로 상대방 또는 집을 가리키는 말인데 최근에는 어느 한 분양에 광적으로 취미의 도를 넘어 빠져드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이 오타쿠라는 단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추세인데 그 증거는 인터넷에 나타나 있다. 프랑스, 캐나다의 홈페이지에 '오타쿠'라고 쓰여 있는 페이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미국은 물론 동남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일본의 아니메, 만화의 팬이 급증하고 있는 사정이 있는데, 즉 이런 사정은 세계적으로 아니메 오타쿠가 확실하게 늘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팬실베니아 주에서 열리는 이벤트에는 미국 각지에서 맣은 수의 오타쿠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 행사의 이름은 '오타콘', 오타쿠 컨벤션의 약칭이다. 거기에 몰려드는 오타쿠들은 일본의 아니메, 만화를 보고 팬이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캡틴 하록]이나 [루팡 3세], [드래곤 볼]에 심취,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오타콘 붐만이 아니고 어느 지방이라도 대도시라고 불리우는 도시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벤트가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반드시 [드래곤 볼'의 커스튬이나 [캡틴 하록]의 커스튬 플레이를 볼 수 있다고 한다(커스튬 플레이란 애니메이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 같은 의상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의상을 입고 특별하게 뭔가 쇼를 하는 것은 아니다)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야오한 백화점의 개점기념 이벤트로서 '울트라맨 쇼'를 기획했는데 3,000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야외 극장에 15만명이 몰려들어 결국 쇼는 중지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 후 야오한 백화점 측은 동남 아시아와 중국에 새로 지점얼 만들 때는 반드시 야외극장을 만들어서 '울트라맨 쇼'을 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비디오 가게 진열장에는 [드래곤 볼], [란마1/2]등의 저패니메이션이 가득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원래 문화란 자국의 사회정세, 경제, 정치 등 미묘한 문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외국의 문화가 자국의 정서에 제대로 부합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무리 기본적으로 허구의 세계를 기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국적성, 현실성이라는 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제한된 문화 위에서 만들어진 '일본적' 상상력인 것이다.그들은 아니메를 계기로 해서, 만화나 특수촬영물 등이 오타쿠 문화에 빠져 있다. 그들 중에는 '이론에서 태어났었으면'이라든지 '일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고 한다. 이런 저패니메이션의 의한 오타쿠의 증가는 세계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저패니메이션에 대한 반응이 엄청나다고 한다. 10년쯤 전에 [UFO 로보트 그랜다이져]가 '골드 럭'이라는 타이틀로 방영됐는데 100퍼센트라는 믿기지 않는 시청률이 저패니메이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도 [캔디 캔디]와 [드래곤 볼]이 80-90퍼샌트라는 믿겨지지 않는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문화성은 이런 사태를 일본의 문화침략이라고 판단, 일본 애니메이션의 방영시간을 제한하기로 했다고 한다.아시아권에서도 저패니메이션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마르코스 정권하의 필리핀에서 [초전자 머신 보르테스V]가 방영되자 시청률이 50퍼센트가 넘는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폭력적이라거나 일본 군국주의의 선전이라는 비판이 속출, 마르코스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방영이 중지됐다고 한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야오한 백화점의 개점기념 이벤트로서 '울트라맨쇼'를 기획했는데 3,000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야외 극장에 15만명이 몰려들어 결국 쇼는 중지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 후 야오한 백화점 측은 동남 아시아와 중국에 새로 지점얼 만들 때는 반드시 야외극써 저패니메이션은 자신의 한계로서의 국경을 넘어서려고 시도할 것이다. 저패니메이션은 '특정한 예술사조'가 아니라 영화 시장의 한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가 저패니메이션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거래서 해외자본을 끌어들이고 일본의 관객들이 아니라 세계의 관객들 앞에 나서게 된 저패니메이션은 자기 한계에 부딪히고 오히려 일본적인 요소를 상실하거나 변질당하여 용어만 남은 저패니메이션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일본 문화의 (서방)세계화라는 그 오랜 프로젝트를 이루는 메이지 유신 이래의 숙원을 이루게 될 것인가? 더 나아가 그 가장 가까운 변경에서 저패니메이션의 하청작업 지역구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애니메이션은 그로부터 어떤 입장을 같게 될 것인가?+잘 보았는가?? 이상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자료이다. 저패니메이션에 관하여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덧붙인다. 지금 내 옆에는 '미야자키 히야오의 작품세계'.'저패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등의 도서관에서 구한 자료와 인터넷의 각 사이트에 서 발췌한 여러 가지 자료들이 널려있다. 저패니메이션이 이렇게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것이란 막연한 생각에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던나는 이렇게나 많은 자료를 모아놓고 보니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었다.주변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이러한 일본문화를 우리는 얼마만큼 비판정신을 가지고 수용을 할수 있는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문화를 개방한다고 여러 말들이 많다. 영화산업이 그만큼 중요하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저패니메이션 즉.애니메이션에 관하여는 그렇게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것같다. 그 이유는 나와 유사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어릴때부터 쉽게 접해왔고 즉.익숙해져있고,아직도 우리사회는 '그저 만화일뿐이야','애들이 보는 것일뿐인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해 애니메이션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과 디즈니의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분류되어가고있는 이제 나섰고 주요일간지들은 한국과 일본의 '에반게리온 현상'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PC통신 게시판에서 매니아들이 동호회를 만들거나 일본 현지로 건너가 극장판 에니메이션을 감상하고 올린 기사들이 조회수가 300회를 넘는 등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줄거리=이 컬트현상으로 다가선 것은 독특한 배경과 이야기 구조가 한 몫을 차지한다. 의 출발점은 다른 SF에니메이션과 비교해 낯설지 않다. 21세기에 접어든 신세계는 '세컨드 임팩트' 라는 재앙을 맞이하여 인류의 절반이 사라졌고, 제 3신도쿄시에선 잔존세대의 불안한 생활상이 전개된다. 또한 과학기술적으로 월등하며 정체를 파악할수 없는 적으로부터 늘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작가=1990년대 사이버 펑크의 결정판이라 불리우는 의 저자는 안노 히데야키이다. 1960년 생이며,가이낙스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가이낙스의 멤버로서 1980년대에 에니메이션오타쿠를 개발하였다. 이저은 의 오토모 카츠히로와는 크게 다르다. 가이낙스는 오사카 지역대학 SF동호회를 모태로하여 1984년에 만들어진 만화영화 및 컴퓨터 게임 제작사이다. 창립후 파격의 길만을 걸어온 신세대 '매니아'문화의 첨병이다. 작품수는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최초'나 '새로운'이란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다이콘 필름이 제작한 작품은 아마추어이면서도 높은평가를 얻어 현재도 전설적 존재로서 자주 이야기되고 있지만,다른 한편 미소녀가 등장하고 패러디로 가득한 작풍으로 인해 '오타쿠의 컬트무비'라고 간주되어왔다. 반다이를 스폰서로 해서 실현된 기획이 1987년 이다. 안노 히데야키는 이 작품에서 작화감독을 맡았다. 가이낙스는 타겟을 '오타쿠'에게 한정한다는 의미에서 '오타쿠화'로의 방침을 전환하였다. 가이낙스가 게임 소프트웨어 업계로 진출을 한 것은 이무렵이다. 동시에 안노 히데야키는 가이낙스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중심이 된다. 미소녀와 로봇을 등장시키고,과거의 여러 애니메이션작품 및 SF의 인용과 패러디로 가득한 이작품에는 스토리가 없다.그것은 명백히 일부오.
    예체능| 2001.10.18| 11페이지| 1,000원| 조회(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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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시공 - 신도시
    REPORT(건축시공-신도시)-들어가면서...+이번학기에 들어서면서 우리과 4학년 졸업에정자들은 한숨을 쉬고 있다. 이미 결정된 몇몇은 빼고라도 대부분은 취직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결정이 되었더라고 하더라도 근래의 몇 년사이에 건축이라는 것이 과연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천직으로 삼을만큼 그렇게 매력적인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우'라고 얘기하고 있다. 비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비젼'이라는것만 있으면 힘들어도 해보겠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의 귀를 자극한 것이 '신도시' 건설이었다. 정부의 경기 부양책인지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인지 아직도 뚜렷이 알수는 없으나,신도시가 건설이 된다면 지금의 건설경기가 조금이라도 부양이 돼지 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건축과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신도시의 건설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것일까?우리가 여지껏 건설해온 신도시는 많다. 일산 신도시,평촌 신도시,분당 신도시,그리고 멀게는 부산 해운대 신도시 까지... 대도시 인구 과밀화로 인한 신도시 건설이 과연 필수적이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었을까? 그리고 신도시는 과연 건설이 되어야만 하고 건설이 된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것일까?건설 산업의 전반적인 기술개발이나 건설산업인의 자세등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도 좋을 듯하나 개인적인 관심에서 신도시를 선택했다.그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가 가장 당면한 현실로써 아주 큰 이슈로 다가왔던문제이다. 대부분의 건축과 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미래의 자기인생을 설계하는것일 것이다. 그리고 취업이라는 당면한 문제에 관한 깊은 관심으로 이 문제를 주시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에 대해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조금이나마 피력해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우리나라 건축과 3년교육과정을 수료한 일반 학생의 관점으로 말이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것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주장이므로 오류를 범할수도 있다. 먼저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주택 수요가 신규시장으로 몰려 기존시장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고 지적했다. 양화석 21세기컨설팅 사장은 "장기적으로 매매.전셋값 안정에 기여할 것" 으로 전망했다.-2000년 10월 11일 중앙일보.판교와 화성 중부지역, 천안.아산 등에 신도시를 우선 개발하는 구상이 제시된 것은 소규모 난개발 방지와 전.월세 급등, 주택공급 물량부족, 기반붕괴 위기에 처한 건설업계의 회생 등을 겨냥한 다각적인 포석으로 풀이된다.특히 최근 용인 등 수도권 일부 지역에 도로와 학교 등 기반시설 조차 갖추지 않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난립, 환경훼손 등 심각한 부작용이 야기된 만큼 난개발 요인을 흡수하기 위한 신도시 건설을 서둘러 추진해야한다는 시각이다.수도권 지역 주택보급률이 83%선으로 전국 주택보급률 평균 93%(작년말 기준)를 훨씬 밑돌아 대규모 주택수요가 예상되는 만큼 서둘러 신도시를 개발, 난개발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려는 계산이다.또 올들어 3.4분기까지 전국에 신규 지정된 택지가 50만평에 불과한데다 수도권지역에는 정부의 강도높은 준농림지 이용규제 등으로 단 1건의 택지도 지정되지 않은 점도 상당부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국토연구원은 앞으로 5년간 수도권 지역의 주택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100만 가구의 주택을 건설해야할 것으로 전망하고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1천850만평 규모의 토지가 소요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이와 함께 저금리 추세에 따른 전세의 월세전환 현상으로 전.월세가격이 10% 이상 상승, 주거불안 요인이 확산되고 있는 점도 신도시 개발론의 배경이 되고 있다.국토연구원은 특히 서울에 집중된 수도권의 기능분산과 공간구조 개편을 위한 거점을 구축하기위해서라도 판교와 화성, 김포 등지에 신도시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또 부동산 경기침체로 업계기반이 와해, 대규모 실업사태 마저 우려되고 있는 건설업계의 사정을 고려한 부분도 없지 않다.실제로 100대 대형 건설업체중 올들어 법정관리와 화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간 대형 업체가 44개에 달하 기업의 본사가 몇 개인가? 독일의 경우에는 한주에 한 개의 대학밖에 세울수 없다는 법령이 있다. 그럼으로써 지역분할을 시행하고 교육의 기회를 고루 주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지역으로 나뉘어져야 할 사회 유틸리티들이 수도권에 모여있음으로 해서 인구 집중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유틸리티들을 분산하여 지역을 개발하고 인구를 분산해야지 유틸리티들로 모이는 인구를 모조리 수용하려는자세를 이해할수없다. 세 번째로 침체된 건설경기 부양이다. 우리건설의 침체이유는 건설회사들의 침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또다시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여 이러한 기업들을 살려주어야 하는것인지 현대를 통하여 우리건설업계들을 살펴보자.-국내건설업계의 문제점◇ 20년 전부터 꼬여〓 "90년대 초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공사대금 10억달러가 물린 것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L씨의 말이다.당시론 엄청난 금액이어서 회사가 흔들거릴 정도였는데, 위기를 모면한 것은 '아랫돌을 빼 윗돌을 궤는' 임시변통 덕분이었다. 이 부문의 대손충당금은 아직도 회계장부에 주름살을 만들고 있다.고위 임원 출신인 L씨는 "물량 위주, 실적 채우기 식의 무리한 해외건설 확장이 경영난의 씨앗이 됐다" 고 지적했다.수주 경쟁이 치열했던 80년대 중반 적자 공사를 감수하는 대신 과감히 철수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는 것이다.당시 중국.인도 등이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한국 업체의 주요 시장을 공략해 수주 단가가 떨어졌고, 미국 벡텔사 등이 장악한 고부가가치 분야는 기술력 부족으로 엄두를 못내는 '샌드위치 상황' 이었다.◇ 덩치 경쟁 못벗어〓늘어난 조직과 인력을 유지하자니 밑져도 공사를 계속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현대는 90년대 들어 매해 관급공사를 2조원 이상 수주했다.그러나 98년 8월 이후 건설업계의 담합구조가 깨지고 공사물량도 줄어 지난해 수주는 7천8백억원에 그쳤다.한국건설산업연구원 이상호 박사는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80년대 후반부터 현대는 선진 건설사처럼 종합관리 회사로 변신했어야 옳았다" 며도 구조조정 게을리해〓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삼성물산 건설.주택부문은 임직원을 1천20명, LG건설은 3백60명 줄였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인원.조직을 줄이지 못했다.-2000년 11월10일 중앙일보53년의 현대건설 사사(社史)는 곧 한국 건설산업의 역사다.현대건설은 앞선 기술력과 개척정신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국내의 큼직한 역사(役事)를 독차지하다시피했다.'현대' 란 이름만 걸면 아파트 값이 비싸질 정도로 사랑받는 국민적 브랜드였다. 밖으론 선진 건설업체와 어깨를 겨루는 매출 7조4천억원(올해 예상)의 세계 17위 건설업체로 자랐다.전문가들은 "변신을 망설이고 시장의 신뢰를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깨닫게 해주는 타산지석" 이라고 입을 모았다.현대건설이 시공 위주에서 선진국형 건설관리(CM)회사로 거듭날 기회는 최근 20년 사이에 세 번 있었다.1980년대 초반, 90년대 중반의 두차례 해외건설 특수와 80년대 후반 신도시 건설이 그것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세 차례 호황기의 여력을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로 변신하는 데 써야 했다" 며 아쉬워했다.외형 불리기 경영에 치중해 조직의 탄력을 잃은 탓에 외환위기 이후에도 제대로 된 구조조정 한 번 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임직원 수는 9일 현재 7천2백40명.지난해 현대엔지니어링을 합병하면서 옮겨 온 인원 1천3백50명을 빼고도 3년 전 외환위기 직후의 5천8백6명보다 오히려 늘었다.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계열사를 도와야 하는 모기업으로서의 부담, 오너의 정치 참여 등으로 역량을 본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부실 요인" 이라고 지적했다.이런 가운데 오너 형제간 경영권 다툼과 무리한 대북사업, 실효성이 작은 자구책의 남발 등으로 금융시장의 신뢰까지 잃어버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향영21C리스크컨설팅의 이정조 사장은 "현대건설이 공개한 재무제표나 쌓아놓은 수주물량(23조원)을 보면 영업상황은 지난해보다 나아진 것 같지만 시장의 신뢰를 잃은 것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가장 큰 이유" 라고 진단했다월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와 함께 주택공사에 인수돼 이후 지금까지 해외매각과 출자전환 등 재기의 몸부림을 펼쳐왔다. 그러나 올 한해 600여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데다 내년에도1000억원 이상의 차입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 주택공사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2000년 11월 17일 조선일보위에서 보여지는 한양은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발전적인 업체로 나아갈수 있으나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구조조정을 하고 합리화된 기업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정부의 경기부양책인 신도시개발에 참여하고 몸집불리기를 하여 결국은 부도가 나고 만 것이다. 이러한데에는 도급순위라는것도 문제가 있다. 도급순위를 만들어 이것이 기업들간에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일정 도급액이상 수주할수 있는공사제도를 두는등 외형적인것에 치중하도록 만들어놓고 있다. 정작 기술이나 능력은 어느정도 무시되어왔던셈이다. 도급순위는 기업의 능력을 가늠하는 자료로써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그것이 과당경쟁을 낳는 또하나의 원인이 되고있는셈이다.우리정부는 한창 구조조정을 하고있는시기에 또다시 신도시 개발을 발표하여 건설업체들에 한가닥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또다시 과거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려는것인지.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 건설업체들이 선진화,합리화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한국 건설업의 내일은 암울하기만 하다.-신도시는 지어져야하는가?정부는 최근 들어 갑자기 움츠러들고 있는 소비 및 투자 심리를 살리기 위한 대책 마련을 검토중이다.이와 관련, 내년 예산중 상반기 지출액을 당초 계획보다 크게 늘리거나 각종 사회간접자본(SOC)투자를 늘리는 방안 등을 강구하고 있다.재정경제부 고위 관계자는 22일 “민간소비 및 투자, 특히 건설 투자 심리가 지나치게 위축되면서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며 “구조조정의 큰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안에서 이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대책을 내놓을 것을 신중히 고려중”이라고 밝혔다.진념(陳稔)재경부장관은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건설든다.
    공학/기술| 2001.10.18| 10페이지| 1,000원| 조회(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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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트 평가A+최고예요
    ♤들어가면서..지난 방학을 즈음하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나름대로의 흥미였지만, 이해하기 힘든 철학책을 독서한다는것자체가 조금은 무모했던듯하다..그렇지만,칸트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이란것에 대해 조금은 공감할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다.♤칸트..1781년에 일어난 아주 조용한 일이 한가지 있었다. 이라는 책이 출간된 것이다. 물론 그 책의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서양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키 작은 세 거인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베토벤,그리고 칸트인 것이다. 그중에서 칸트는 가장 왜소한 체구에다 볼품없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하고, 그 대학의 사강사로부터 시작해 교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84세까지 살았으니까 다른 두 사람보다는 월등히 오래 산셈이다. 그는 한평생 쾨니스베르크 시 밖에 나가 본일이 없었을 정도로 좁은공간에서 일생동안 철학에 몰두했었다. 그 칸트가 18년동안 어떤 학문적 작업에 열중해 있다는 사실은 동료교수나 친지들에 의해 알려졌으나,그 연구활동이 어떤것인지는 누구도 알 바가 없었다. 다 아는 바대로 칸트는 결혼같은 것을 생각해본 일도 없었고,혼자 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하곤 했는데,단 한번 루소의 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늦추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잇다. 후에 칸트가 계몽주의 사상에 뜻을 둔 것은 프랑스의 영향때문이었다고 볼 만한 이야기다.칸트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힌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으며 상당히 독창적이다. 칸트의 철학은 이성적 사유를 옹호하는 대륙의 합리주의와 감각 경험을 중시하는 영국의 경험주의 사이에 긴장이 있었던 철학사의 중대한 시기에 등장했다. 칸트는 이 두 가지 주제의 종합을 시도했고 그럼으로써 철학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는 감각 경험이 우리의 모든 믿음의 원천이라는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이 지니는 힘은 인정했으나 그러한 믿음들이 정당화될수님을, 즉 x가 y의 원인이라는 것은 x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감각 경험으로부터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흄에 따르면 우리에게 친숙한 모든 감각 경험이 보통 y가 x에 규칙적으로 따르는 것이지 필연적으로 y가 x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가진다는 주장이 정당화되지 않음을 의미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전체 뉴턴체계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이어 흄은 인과라고 부르는 필연성을 우리가 규칙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과정의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연접한 사건인 xy쌍이 규칙적으로 자주 관찰되면 x가 일어날 때 우리의 마음에 y가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급기야 x는 y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되고 또 x와y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이 믿음에 이르게 되는 지를 설명하는 흄의 심리학적 설명은 그 설명을 통해 믿게 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흄이 인과율의 무근거성을 '논박된수 없게 증명했다.'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든가 인간 영혼이 불멸한다든가 하는 것처럼,형이상학자들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다른 명제들도 마찬가지로 정당화 되지 않음을 보았다. '독단의 잠'에 빠져있을 때 그는 경험을 넘어서서 참을 발견하는 이성의 능력을 의문시하지않았다. 그러나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서는 인간 이성의 범위를 비판적으로 연구할것과 '형이상학이라는 것이가능한가'라는 물음을 견지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결론적인 분석을 '혁명적'이라고 했는데 그이유는 흄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간략히 말해서 흄이 인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궁극적으로 규칙적으로 연접해 있는 사건들에 대한 감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고 주장한 반면에, 칸트는 완전히 반대로 우리가 인과의 개념을 가져야만 객관적 경험을 할수 있다고 주장했다.형이상학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칸트는 인간의 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판단력 비판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은 이론적 인식이나 실천적의지이기에 앞서 미적 혹은 미감적 정서요, 느낌이다. 실로 우리가 감정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인간이 세계를 현재화하는 것이며,현재라고 하는 시간안에서 세계를 보는 독립적인 방식이다. 느낌 또는 감각이란 세계를 현재화하는 것이고,세계에 대한 이러한 파악이 곧,감성적 인식이며,이는 이성의 확장으로서 삶의 인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인식이 추구하는 본질인 주객일치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역설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 의거한 역설이다. 그것은 본질로서 주어진 동시에 그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 할 과제로서 부과된이념이다. 이때의 이념은 칸트가 "미적 판단력의 변증론"에서 이율배반을 해소하면서 얻게 된 것이다. 미적 이념의 표현은 형식적 성질에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칸트의 미적 이념은 이상은 외관상 구성적으로 보이는 듯하지만,실제로 규제적 원리에 의해 해결되기 때문이다. 정신능력들 일반에 관해 말한다면,자연의 이론적 인식 능력에 대해서 선천적인 구성적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는 정신 능력은 오성이다. 쾌와 불쾌의 감정에 대해서 그것은 판단력이고,욕구 능력에 대해서 그것은 이성이다. 오성은 인식 능력에 대해 법칙부여적이고,이성은 욕구 능력에 대해 법칙부여적이다. 이 양자 사이에 쾌와불쾌의 감정이 자리한다. 미적 판단은 쾌와 불쾌의 감정에 대해서는 구성적 원리인 것이다. 인식 능력들의 조화가 이러한 쾌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 이때 인식 능력들의 유희에서의 자발성이 도덕적 감정에 대한 심의의 감수성을 촉진하며,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으로 하여금 자연 개념의 영역과 자유개념의 영역을 연결하고 또한 매개시켜 준다는 점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 와 같다. 어떻든 판단력은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기초적인 능력이며,미적 소여에 대해 특별한 결정을 내리는 힘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자연의 합목적성을 인정하는 근거가 된다. 칸트에세가지 주제인 개념,판단,추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볼프학파가 '경험심리학'에서 다룬 하위의 인식능력에 대한 확인 '감성론'까지 포함하여 명실상부한 인간지식의 이론을 꾀한다. 방법론 역시 칸트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제구실을 만족스럽게 다하지 못하던 실천논리학을 '선험적 의도'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론 논리학에서 밝혀진 오성의 능력을 가지고 오류를 피하고 진리에 도달할수 있는 방법을 다루고자 하는 실천논리학의 다분히 경험적인 주제를, 원리롱에서 도달한 순수이성의 원리들을 가지고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인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건설을 위해 준수하고 지켜야 할 '형식적 제약들'에 관한 논의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칸트의 인간관-우리들 인간은 단순히 인식하는것만의 존재가 아니고 동시에 또 행위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인식하는것으로서의 나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일것이며,행위하는 것으로서의 나에게 있어서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되는가라는 문제인 것이다. 제2비판 즉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이문제에 대한 답이다. 그런데 우리가 미리 각오해야만 될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답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좀 거리가 먼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가 자기들의 행복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행복은 어디에'라는 표어가 오늘날의 청춘남녀의 지표인것도 같다. 이 경우 인간의 행위의 뜻은 행복의 추구에 있다고 하는 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간에 자명의 사실로 전제되고 있다. 이러한 풍조가 나온 것은 하나의 영미의 실용주의적인 행복주의사상의 경향도 있겠고 또한 특히 우리민족에게 있어서는 국토분단이라는 쓰라린 의식이 우리속에 잠겨있어 더욱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에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행위의 뜻을 행복의 추구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단연 반대하고 있다. 정말 도덕적인 이름에 해당하는 행위하는 것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법칙이란 전술한바 우리들 인간에 대해서 "해야만 된다""해서는 안된다"와같이 명령하는 의미의것이었다. 만약에 인간에게 자유가 없고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인과적 필연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도덕법칙은 전혀 그 존재의 여지도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만약,가령 이 세상 어디엔가 도덕법칙도 자유도 분명히 있는 것이라면 그 경우의 도덕법칙이나 자유는 감성적,경험적인 현상계를 넘어선 초감성계에서 구해야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이세상에 진실한 의미에서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 있다 한다면 그것은 감성적,경험적인 인과적 필연법칙(쾌를 구하고 불쾌를 피하는 우리들 일상의 행위는 모두가 이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을 넘어서 실현되어지는 행위,즉 순수실천이성에 의한 행위어야만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만약에 거기에 조금이라도 경험적인 것이 들어가 있다면,즉 쾌를 쫓고 불쾌를 피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경향성(Neigung)이것은 문자그대로 '앞으로 비틀거린다'라는 뜻이며,욕망에 의하여 지배되는 인간의 성향을 말한다에 유래하는 것이 들어가 있다면, 그 경우 인간의 실천적 행위는 현상계의 필연법칙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행위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 도리인 것이며,따라서 순수실천이성에 의한 참으로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의 이름이 맞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제2비판에서 그러한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와 그것이 기준이 되는 도덕법칙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 안전의 현상계를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염두에 있는 도덕법칙이라는 것이 이상과 같이 현상계의 일체의 경험적 목표에서나 또는 인과적 필연의 법칙에서 넘어서는 것이라 한다면 여기에 그 도덕법칙에 일견 기이한 성격이 스스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도덕법칙이 우리들 인간에게 "너는 해야만 된다"라는 명령을 가지고 다가서면서 그자신은 전혀 무이유,무조건의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경험적 목표를 초탈하기 때문에 무이유적인 것이며 일체의 인과적 하겠다.
    인문/어학| 2001.10.18| 12페이지| 1,000원| 조회(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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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노그라피와 청소년 범죄 평가A+최고예요
    +포로노그라피와 청소년범죄..-요즘의 우리사회는 가히 정보화 사회라고 할 수 있다.흘러넘치는 각종 정보는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우리주위의 정보는 어떠한 형태로든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어지고 일련의 불필요한 매스미디어 정보가 여과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정보화 사회라고도 불리우는 현대에 있어서 매스컴(mass communication)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형성에 미치는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서적,잡지,라디오,TV,영화 등의 매스 미디어(mass media,대량전달매체)는 이제 우리 생활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었고 일반문화의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같은 여러 가지 매스 미디어가 가지는 병리적 작용에 대해서도 많은 지적이 있어 왔는데,특히 그것이 범죄의 발생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하는 문제는 여러 범죄적요소중에서도 청소년범죄를 다루게된다.영상미디어나 잡지,서적등의 외설적,즉 포로노 그라피가 청소년범죄,청소년문제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되고 그것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따져보게될 것이다.-먼저,포르노그라피란 무엇인가? 그 근원을 살펴보기로한다.19세기 초 이전에 포르노 그라피는 기록물이나 시각적 표현물로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된 범주를 이루지 못했다. 만일 포르노 그라피를 '성적 감정을 불러 일으킬 목적으로 성기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18세기중엽이나 말엽까지 포르노그라피는 거의 언제나 다른 것의 부속물이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 즉 근세 초 유럽에서 포르노그라피는 흔히 성의 충격을 이용하여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와 프랑스 혁명 사이에 부분적으로 인쇄 문화의 전파에 힘입어 서서히 별개의 범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포르노그라피는 '미풍양속'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던 작가와 화가,판화가들의 의도와 이를 조정하려던 교회 당국과 성범죄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있다.사춘기를 맞이하게 되면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운 몇 가지의 성징이 나타난다. 남아에서는 목소리가 변하고 수염과 음모등 발모 현상이 있게되고,골격이나 근육이 발달되어 남성다운 체격이 구비된다. 여아에서는 발모현상과 더불어 피하지방이 많아지면서 유방이 커지기 시작하고 어깨와 허리의 선이 예쁘게 곡선을 그려 여성다운 몸매를 갖추게 된다. 이와같이 유별된 남녀의 특징을 제2차 성징이라 한다. 이 때가 되면 육체적뿐만아니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남자다운,그리고 여자다운 특징을 나타내면서 남아는 남성으로 여아는 여성으로 각각 성숙해 가는 것이다. 물론 제2차성징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가 많으나 도시나 농촌의 지역간에도 차이가 있으며 가정 환경과 영양상태에 따라서도 개인차가 많이 나타나고 심한 예에서는 5~6년의 차이가 있게 된다. 이 때가 되면 성을 잠 깨우는 생리현상이 일어나면서 아이들을 놀라게 한다. 남아에서는 정통 현상(精通現象)이 일어나고 ,여아에서는 초조를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경계로 하여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에 첫발을 내어 딛는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정통현상과 초조는 제1차성징의 성숙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춘기에 있어서 성징의 성숙 현상이나 변화는 사람에 따라서 틀리는 것이 보통이고, 여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1년쯤 앞서서 성숙된다. 이때가 되면 생식기의 변화뿐만 아니라 운동능력이나 내장의 각 기관도 같이 발달되어 13세를 경계로 하여 남아에서는 여아보다 뛰어난 운동능력의 발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여아에서는 운동능력의 발달이 남아보다 뒤지기는 하지만 여자에서 가장 중요한 생식의 준비를 위하여 내부 생식기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이때가 되면 육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신적 또는 심리적으로 여러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지금까지 마음에 의식하지 않았던 이성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솟아나게 되고 또 부끄러운 수치감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이때 이다. 이것은 체내에서 분비되는 노여움을 품게된다.즉,'욕구불만'인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이유 없이 화를 잘 내는 것은 자신의 역부족과 저지가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생리적으로 남아에서는 정통현상.음모 발생이,여아에서는 초조.유방 발육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비밀이 체내에서 생김으로써 느끼는 불안 속에서 욕구불만적인 심리,그리고 이성에의 동경 등 누구에게도 고백할수 없는 복잡한 변화가 같은 시기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지껏 비교적 장황하게 청소년,특히 사춘기에 있어서의 생리적 ,심리적 변화등을 살펴보았다. 그러하면 이러한 청소년들에 있어서 성범죄는 어떠하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자..-이웃나라 일본 수사과학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20세 미만의 청소년 성 비행이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에는 2.4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비행은 주로 강간과 추행등 두 종류로 대별 할 수 있는데 이런 비행이 주로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자동차(34.2%),야외(25.8%)순이었다고 한다. 학교별로 이 비행의 발생건수를 보면 비행 고교생 가운데 강간이 55%로 가자 많았고,추행은 비행 중학생의 65%로 가장 많았다. 연령별로는 추행자의 60%가량이 13세 미만의 청소년이었다는 분석이다. 정신과학적으로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기온,습도,계절 등 자연의 영향과 음주,집단적인 심리등이 비행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조건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한다.특히 성 범죄는 5,6월에 많으며 8월이 피크로 되어 있다. 여름에 성 범죄가 많은 원인은 기온이 높기 때문에 받는 기분이나 감정의 변동이 크며,또 해가 길기 때문에 내분비 호르몬의 자극이 높아 지게 되고, 또 피로 회복을 위해서 음주를 하는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신체 노출과 발한에 따른 시각적.취각적.성적 자극이 많아지고,야간외출의 기회가 많은 것도 성 비행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라 지적할 수 있다. 성 비행 소년의 가정 환경을 분석하여 보면 때 범죄에 이르는 인격은 선천적원인,출생관계,가정관계,학교관계,직업관계,배우자관계,경제적,문화적 관계에 따라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으며,그러한 환경의 영향 가운데 개체가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일정한 범죄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포르노그라피는 단지 문화적관계에 밖에 포함되지 않는다. 문화적관계하나로는 도저히 범죄에로까지의 연계가 이루어지진않는다. 범죄심리는 무척이나 복잡다단하고 윤리의식에 반하게 되는 일련의 행위가 나오기까지는 무수한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문화적 요인 하나로 범죄행위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범죄를 범죄수행행위라고 가정하고 그러한 범죄행위가 일어나게되는 여러 이론들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1.긴장이론:긴장이론이란 사회적으로 승인된 목표를 합법적인 통로를 통하여 성취할수 없을때에 긴장이 발생하여 그 소망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불가능한 경우에 불법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머턴(Robert K.Merton)은"사회 구조와 아노미(Anomy)현상"이란 논문에서 범죄 원인은 무규범한 사회상태로 인한 자본주의적인 미국사회의 특징인 사회적인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간의 괴리에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목표들이 현실적으로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사회적인 상황이 목적을 성취하는 합법적인 수단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을경우에 긴장이 생기고 합법적인 수단에의 접근을 제한받는 사람들은 불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반사회적인 행위가 나타날수도 있다. 클로와드(Richard Cloward)와 오오린(Lloyd E. Ohlin)은 이와 같은 이론을 확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사회적으로 승인된 목표를 성취하는 합법적인 수단은 훌륭한 교육과 열심히 일하는 것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비합법적인 수단은 여러 가지 통로가 있다. 클로와드와 오오린의 이론에 의하면 긴장(strain)에 대한 세 가지 하위 문화가 있는트 칼라 범죄자들에 관한 고전적인 경험적 실험과 그 이론적인 증언은 매우 유명하다. 서덜랜드는 범죄학의 이론의 효시라고 간주되는 "분화적 접촉이론"을 발전시켰다. 어느 특정의 사회집단과 접촉하면 그 집단 특유의 행동이나 인지의 패턴을 아주 자연스럽게 학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범죄라고 하는 행동 패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밀러는 하위 계급의 남성들은 그들 집단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그 집단 내에서의 소속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범죄행위를 추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중된 관심사의 추구(다툼,거칠음,약삭빠름,흥분,죽음,자살)는 흔히 범죄와 비행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통제이론:이 이론은 한 개인이 관습적인 사회와의 유대가 약화되거나 파괴될 때 비행과 범죄에 관계하는 것이 발생한다고 한다.미국의 사회학자인 허쉬는 개인과 사회간의 유대가 강화된만큼 규범을 위반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다.개인의 사회에 대한 유대에는 애착(attachment),참여(commitment),전념(involvement),신념(belief)네가지 요소가 있다. 네가지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에게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도 역시 관습적인 행동에 참여하기 쉽다. 그들은 사회가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는 역시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전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개인의 유대가 강화되면 범죄행위도 감소하게 된다.4.비행 표류이론과 낙인이론:자유와 규범사이에 방황하는 상태를 표류라고 한 이론이 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소년의 비행가능성에 대한 성격을 바르게 파악한 태도로 대부분의 비행소년들이 성숙에 의하여 그 비행을 교정한다는 사실과도 조화되는 이론이라고 하겠다.5.정신분석이론:정신분석이론은 프로이드(S.Freud)에 의하여 창시되어 현대 문명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에 의하면 범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수 있다. 인간에게는 생득적인 충동(성,공격 등의 본능)이 있기 때다.
    사회과학| 2001.10.18| 12페이지| 1,000원| 조회(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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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르노의 여러지류 중 위쪽에 자리한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산악 부락 빈치는,법률가들과 검소한 지주들을 배출한-그리고 장차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를 낳게될-한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15세기 중엽,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이 가문의 23살난 아들로 지역 공증인으로 일하던 세르 피에로 다빈치는 시골 처녀 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테리나는 임신까지 했으나 혼인은 불가능 했다. 당시엔 서자를 평생의 치욕으로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결혼하자니 그녀의 사회적 신분과 지참금을 낼수 없는 처지가 커다란 난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452년 4월 15일, 카테리나와 세르 피에로 사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로 다 빈치는 적당한 가문출신의 16살짜리 처녀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미도라와 결혼식을 올렸다.처음에 레오나르도는 친어머니인 카테리나와 함께 살았다. 당시 그녀는 캄포 제피 근처의 한 젊은 농부와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즈음 알비에라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한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데려왔다. 1457년 경의 과세기록은 당시 레오나르도가 빈치에 위치한 부친의 집에서 살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 바르겔로(피렌체시 중앙에 있던 유명한 감옥)맞은편에 사무실을 내고 한 지역 공증인과 동업을 하게 된 세르피에로는 피렌체로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중에 알비에라가 사망하자,1465년에 그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 가문의 여자와 재혼했다. 한편 빈치에 남은 레오나르도는 친조부모와 그들의 막내아들 프란체스코 밑에서 양육되었다. 프란체스코 삼촌은 레오나르도보다 겨우 6살 위였다.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들과 그 시대에 관한 폭넓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어린시절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짐작해볼수 있다. 먼저 레오나르도의 출생에서부터 엇갈림은 그의 어린시절을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했으리라.할아보지 안토니오의 장남이며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이미 공증인의 길에 접어들어 출세하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피사나 피 후로 새로운 두 의붓어머니 마르게리타와 루크레치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의붓어머니가 그 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편지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귀하"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 그의 생모에게는 어떠 했을까? "거기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말해다오. 그리고 그 카테리나라는 여자가 무얼 하기를 원하는지 내게 말해다오.."라는 구절이 그의 수첩에 적혀있다. 특히 '그 카테리나란 여자가'라는 경멸조의 문수사 눈에 띈다. 카테리나를 '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고통 스러워서 일까? 이 호칭은 의붓 어머니를 위해 남겨두어서 일까? 아니면 카테리나를 마주칠때면 레오나르도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밭일을 하는 카테리나 부부와 마을에서 성공한 세르 피에로 부부를 어찌 비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세르 피에로와 어떻게든 결혼을 할것이지 왜 농부 아카타브리가를 따라 갔느냐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렇게 레오나르도의 유년기는 사생아라는 굴레 속에서 지나가게 된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이런 암울한 어린시절과 그의 천재적인 재능 과의 관계를 1910년에 간행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의 한 추억]에서 재구성하려 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러한 가설이 반드시 정답일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위대한 천재의 어린 시절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1468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옮겨가 화가,조각가, 금 세공사로서 명망 높은 베로키오의 도제로 들어갔다. 베로키오의 지도하에 레오나르도는 여러 가지 기량을 연마했고,1472년에는 20살의 나이로 화가 길드회원 명부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명한 화가가 되는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었다.레오나르도가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하게 드러났다. 건축가이자 미술사가인 지오르지오 바사리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화가들의 생애]에서 레오나르도에 대해 "신의 손으로 특별히 수있다.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오랬동안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적 인지도를 높이고자 애썼다. 그의 야망은 그저 화가의 세계를 뛰어 넘는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도 인문주의자나 과학자보다 큰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레오나르도가 공증인의 서자에서 '루오모 유니베살레'(만능인)로 발전하기까지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눠볼수 있다.첫단계는 1452년 출생 이후부터 어린 소년이었던 그가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자각하게 된 1467년 무렵까지 빈치에서 보낸 시절이다. 그리고 1467년부터 1482년까지 피렌체에서 베로키오와 함께작업했던 시절,레오나르도 는 다양하면서도 자유로운 그곳 도시 생활을 누리면서 자신의 천재성은 미술분야를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게 도니다. 마지막 단계는 밀라노로 이주한 후인 1483년부터 1499년 까지의 시기인데, 처음엔 데 프레디스 형제들(유능하긴 했으나 뛰어나진 못한 화가들이었다.)과 함께 일하다가 나중에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대공휘하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다채로운 재능들을보다 깊이있게 연마해나갔다. 그리하여 1499년 밀라노가 프랑스인들에게 함락되었을당시,레오나르도는 화가로서뿐만아니라 기술자,과학자,건축가,음악가로서도 유명해져 있었다.일반적으로 유명인들의 유년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그 점에서 볼 때 레오나르도는 특이한 경우라 할 만하다. 그가 손수 쓴 방대한 분량의 [노트북]에는 자신의 일생에 관한 꽤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자신만의 추억과 즐거움을 위해 생략법등으로 은밀하게 쓰여진 메모들이긴하지만, 이 중요한 자료와 그 밖의 기록 자료들을 조합해보면 레오나르도의 청춘기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부친이 속한 길드에서는 서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므로,레오나르도는 읽기와 쓰기를 정식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레오나르도가-그는 왼손잡이였다-사적인 얘기를 기록할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경자(鏡字)'를 쓰는 습관을 갖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완성한 부분은 보티첼리,필리피노 리피,지르란다이오, 라파엘로는 물론 미켈란젤로까지도 탄복케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동방박사의 경배]는 결국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레오나르도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작품은 그밖에도 몇점이 더 있었다. 그러므로 이작품역시 다른 경우들처럼 완벽주의와 변덕 때문에 작업을 중단했을 것이라 보는 이들도 있고,실행하기 힘든 예술적 해답을 추구한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작업을 중단시킨 쪽은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라고 판단한 산 도나토 수도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482년 혹은 1483년, 레오나르도는 아틀란테 미글리오로티라는 젊은 가수와 함께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의 [노트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무렵 레오나르도는 자신에게 음악과 그림뿐 아니라 공학,과학,조각,건축 디자인,무기 발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피렌체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한번도 제대로 평가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화가로서 그림 청탁을 따내는 일이나 부를 추구하는 데서 만족라지 않고, 섭정 시대 밀라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얼굴이 검어서'일 모르'-무어인-로 물리기도 했다)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해 영향력있는 자리를 얻고자 애 썼다.이러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데는 어느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다. 처음엔 스포르차 궁정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레오나르도는 먼저 데 프레디스 형제의 공방에 합류했다. 암브로지오 및 에반겔리스타 데 프레디스와 함께 일하던 레오나르도는 '무원죄 잉태회'로부터 제단화를 하나 청탁받는데,그것이 바로 [암굴의 성모]이다.이번에도 역시 레오나르도는 인습적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그러나 이처럼 주제를 비전통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사들은 대금을 다 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래 레오나르도는 격고안해온 "청동 기마상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덧붙였다. 즉 대공 부친이 말에 탄 모습을 거대한 동상으로 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편지를 보낸 목적은 다름아닌 이 동상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계획은 최우선 순위에 드는 일이 아니었다.그리하여 레오나르도가 제안한 스포르차 가족의 마상(馬上)기념물을 일모로가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이 편지에서 알아챌 수 있듯이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통치자와 '사적인'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전하께 제 기밀을 보여드리면서 심중을 털어놓고 싶습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또한 현직 관리나 루도비코 스포르차 궁정의 내부 인물들을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 고문 자리를 원했다(그는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하면서"대공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단지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던게 아니라, 조각과 그림은 물론 군사 기술과 민간 기술까지 관장하는 영향력 있는 왕실의 개인 고문직을 원했던 것이다.루도비코 스포르차 밑에서 일하고자 했던 레오나르도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는 궁정에 들어가 대공의 저택 내에 방하나를 차지하고 봉급까지 받게 된것이다(꼬박꼬박 지급된 것은 아니다). 밀라노쪽의 자료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기술자나 건축가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를 통해 스포르차에게 보낸 편지가 마침내 그가 바라던 효과를 발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달랐다. 한동안 그가 주로 맡았던 임무는 궁정 어릿광대, 혹은 축제 기획자 정도의 일이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본인과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결혼,지안 갈레아초 스포르차(적법 권력 상속자였다)와 아라곤의 이사벨라의 결혼을 경축하기 위해 1490년에 거행된 "행성들의 가면 무도극"같은 축제가 벌어지며 무대장치,페넌트(기),의상을 챙겨야 했고,스포르차가 군중들을 놀래키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벌이곤 했던 가장행렬까지도 레오나르도가 구상하고 제작해야 했다. 때때로 그는 시인이나 이야기꾼,가수로도 활었다.
    공학/기술| 2001.10.18| 24페이지| 1,000원| 조회(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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