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文化와 한국의 傳統建築1. 불교사원 건축의 형성과정과 그 내용불교사원은 종교적 동기에서 건립되었다. 불교사원을 뜻하는 가람(伽藍)은 산스크리트어(梵語) Saaghrma에서 유래된 것으로 음역(音譯)하여 승가라마(僧伽羅摩, 僧伽藍摩)라고 한다. 가람은 승가라마의 약칭이다. Sa agh 는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뜻하고, rma는 거주처를 뜻한다. 이는 의역(意譯)하여 중원(衆園) 또는 승원(僧院, 僧園)으로도 부른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의 불교사원은 원래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이 한 곳에 모여 불도(佛道)를 닦는 곳이었다. 『사미율의(沙彌律儀)』에도 절(寺)이란 출가 제자가 불법을 섬겨 받들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곳, 곧 수행(修行)의 도량(道場)이 절이라고 하였이와 같이 초기의 인도 불교사원에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나 사리를 모신 탑은 없었고 승원만 있었다. 이는 석가모니가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自燈明), 법을 등불로 삼아(法燈明)" 열심히 정진 하라고 한 것에서도 연유한다후세에 와서 가람은 승원으로서의 가람에 당(堂)과 탑(塔)이 있는 불교건축 일반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사원은 승원·당·탑을 이룬 것을 말하게 되었고, 불교사원 건축은 이들 시설들의 배치관계와 건축 형식 및 기법에 대한 것을 뜻한다. 즉, 가람을 이루는 승원, 당, 탑은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배치되어 불교사원 건축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가람이 형성된 과정을 보면 승원이 먼저 조성되었고, 다음으로 탑, 그리고 당이 세워져 불교사원 건축을 형성하면서 여기에 일정한 질서를 반영하며 가람배치 형식이 생겨나게 되었다.승원은 오늘날의 승방과 같은 곳으로서 승려들의 거주처인 동시에 수행처였다. 승방에는 단독의 승방과 집단의 승방이 있었다. 단독의 승방은 비하라(Vihra, 毗訶羅, 精舍, 僧院)라 하는데 영구적인 시설물을 갖춘 곳이고, 집단의 승방은 비하라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으로서 승가라마라고 한다. 불교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기원정사(祇園精舍, Jettavana) 이 탑의 형식은 각국의 탑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문화(漢文化)에서도 상륜이나 탑의 양식에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2. 우리나라 불교사원 건축의 전개 내용1). 고구려의 불교사원우리나라 가람의 배치 형식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에서 형성된 불교사원의 배치형식을 수용하면서 발전되었다.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공식적인 기록은 소수림왕 2년(372, 壬申)에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함께 경전과 불상을 보내면서 부터다. 이는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 북조계(北朝系)의 불교였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왕실과 귀족세력에 의하여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후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고구려는 이들을 위해 서울인 환도성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었다.그 후 광개토왕 2년(393)에는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九寺)을 창건하였고, 문자왕 7년에는 금강사를 창건하였으며, 영류왕 때는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을 건립하게 된다. 불교의 도입과 함께 건립된 불교사원으로 고구려의 건축은 중국의 건축술을 수용하여 재래의 토속건축에서 한단계 진전한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건축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고구려 때의 가람으로 지금 남아있는 것은 없고, 발굴한 사지(寺址)를 통하여 그 배치형식을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다. 이들 터는 공통적으로 중앙에 팔각형 평면을 한 목탑 자리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지(金堂址)가 형성된 이른바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식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예로서, 1938년에서 1939년에 걸쳐 발굴된 평양 청암리의 금강사지는 중앙에 목탑지로 추정되는 팔각형 건물지가 있고, 그 동·서·북쪽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나왔으며, 팔각전지 남쪽으로는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나왔다.황해도 봉산군 토성리 절터도 마찬가지로 가운데 팔각 목탑터를 중심으로 한 동·서·북쪽에 금당지가 나왔다. 그 외에도 상오리 절터·정릉사터에서도 중심 되는 전각의 구성은 마찬음 받아드린 불교는 공적이며 중앙적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불교가 개인적, 지방적 차원에서 신라에 전래되었을 때는 신앙의 차원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아직 격식을 갖춘 가람은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중앙의 귀족 세력에 의하여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다가 법흥왕에 의하여 527년(법흥왕 14)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의 불교도 중앙적이며 공적인 성격을 띠며 기술과 재원을 바탕으로 한 가람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법흥왕은 흥륜사와 영흥사를 경주에 세웠으며, 이어서 삼국통일 전에는 황룡사·기원사·실제사·삼랑사·분황사 등이 건립되었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궁궐로 창건되어 그것을 절로 고쳐 566년에 1차 완공되었고, 진흥왕 35년(574)에 절을 완전히 새로 조성하여 장육존불을 주조하고 진평왕 6년(584)에는 새로이 금당이 완공되었다. 그후 선덕왕 14년(645)에 9층 목탑이 완공되어 2차 가람이 완성되었다. 그후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 병란으로 소실되어 그 터만 지금에 이르고 있다.황룡사지는 최근에 발굴 조사되어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번 있었음을 밝혀지게 되었다. 창건 당시의 1차가람은 동서 약 181m, 남북 약 144m 규모에 중문과 남회랑. 동·서 회랑이 확인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일탑일금당 형식을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중건된 2차가람은 645년 9층 목탑을 건립하면서 완공된 것으로서,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이 없어지고 중문을 창건 가람의 남쪽에 새로 설치하고 그 북쪽에 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금당의 동·서쪽에 동·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일탑삼금당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2차 가람의 가장 중심은 9층 목탑이다. 이 목탑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이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주변 아홉 국가가 복속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세웠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노반 아래까지의 높이가 183척, 상륜부가 42척으로 전체 높이가 225척(약 80m) 영역에 조성되어 있다.화엄사상의 성행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종래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있던 사찰을 산간으로 확산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동시에 산지의 지형조건에 맞는 가람배치를 구성하여 종전의 회랑 중심의 고대사찰의 규범에서 탈피하는 가람구성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화엄계열의 대표적인 사찰이 영주 부석사·합천 해인사·구례 화엄사 등이다.특히 이와 시기를 같이 하여 당나라에 성행하던 선(禪) 사상을 익히고 돌아온 승려들은 신라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불교사원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8세기까지 주로 왕실이나 귀족의 지원아래 이루어지던 사찰은 왕실이나 귀족층에 연연하지 않은 선승들에 의하여 도회지에 멀리 떨어진 산간에 지방 호족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실질적인 종교의식에 필요한 사찰을 조영해 나갔다.이 시기에 건립된 사찰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좌우대칭의 엄격한 구성에서 벗어나 지형조건에 맞는 자유스러운 가람 구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사찰로는 원주 거돈사·양양 진전사·강릉 굴산사·강릉 무진사·여주 고달사 등이 있다.5). 삼국시대의 불탑삼국시대의 불교사원은 이와 같이 왕실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 건립한 호국사찰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왕실은 국외의 기술자들을 받아들여 선진 건축술을 빠르게 수용하였다. 이러한 불교사원의 건립과 함께 한국 고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새로운 경지의 건축술이 정착하는데, 이는 특히 탑의 건립에서 볼 수 있다.불탑은 그것을 조영하는 재료에 따라 목탑(木塔)·석탑(石塔)·전탑으로 구분되며, 층수의 규모에 따라 3층탑·5층탑·7층탑·9층탑·13층탑 등으로 구분되고, 또 평면 형식에 따라 사각형·육각형·팔각형·원형탑 등으로 구분된다.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당시의 가람의 배치형식과 탑의 형식은 어떠하였는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당시의 탑은 목탑이 주류를 이루었고, 고구려 목탑은 팔각형의 평면, 백제와 신라의 목탑은 사각형 평면을 주로 하였음을 유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불탑이 석 가람의 공간을 구성하여 사찰건축의 공간 구성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케 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찰들은 불규칙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필요한 곳에 다리를 놓고 계곡물을 사찰의 한 부분이 되게 하여 자연을 주인으로 삼아 거기에 순응하는 공간구성을 하여갔다.고려 말기에 접어들면서 고려말기의 불교계는 원(元)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침체하였고, 이 시기에 창건된 중요한 사찰은 거의 모두가 중앙 정치세력과 연관이 큰 곳이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연탄 심원사·안변 석왕사·양주 회암사 등이 있다. 특히, 원나라의 간섭기에는 원의 영향을 받은 건축형식이 사원건축의 탑에도 나타났다. 개성 부근에 있던 경천사탑은 원나라 기술자가 직접 고려에 와서 새로운 형식으로 조영한 10층 탑이고, 오대산 월정사탑과 마곡사 5층탑도 이때까지 보이지 않던 외래적인 조형 요소가 가미되어 조영되었다.특히 고려말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목조건축은 하나의 고유한 구조형식을 완성하는데, 이러한 실례를 봉정사 극락전·부석사 무량수전·수덕사 대웅전 등 현존하는 사찰내의 목조건물에서 볼 수 있다.봉정사 극락전은 지금까지 알려진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목조 기법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건축 법식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다.부석사 무량수전은 세부적인 처리에서 봉정사 극락전과 구조 개념에서 수덕사 대웅전의 과도적인 기법을 보여주는 주심포 계열의 건물이다.수덕사 대웅전은 창건 연대(1308년)가 분명한 건물로서 육중한 양감, 평활한 입면비례, 공예품에 가까운 세부 구조의 섬세함에서 조형미가 빼어난 주심포계열의 건물이다. 이들 건물에는 이 시기 건축의 특징인 기둥의 배흘림 기법, 귀솟음기법, 안쏠림기법 등이 잘 나타나 있다.7). 조선의 불교사원조선시대에 들어 불교사찰은 조선사회가 유교를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채택함에 따라 정책적으로 크게 제약을 받았다. 불교 종파는 통합을 당하였고, 승려의 사회적 신분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사찰의 재정적 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더구나 승.
----------------------------한국 전통 건축의 기초적 이해****************************(1) 공간적 이해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각각의 기능과 용도에 맞는 건물과 공간을 이루어 나가는데 특히 공간은 관습과 종교, 지역과 자연 환경에 가장적절히 어울리도록 구성한다. 건축공간은 생활공간, 儀式공간, 작업공간, 휴식공간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宮闕, 寺刹, 廟祠(임금이나 성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 주택등 각각의 건축물은 용도와 기능에따라 그 공간적 구성을 달리한다. 이들 각 공간들은 독립적으로 또는상호 연계 되면서 위계를 이루며 또한 사용주체의 목적이나 용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다.한국 전통 건축의 집단적인 건물에서는 대개 건축물의 바닥 면적보다는 외부 공간의 면적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전통건축물은 서구의 건축물이 건물의 외형에 많은 비중을 두어 계획된 것과는 달리 내부공간과 외부세계와의 동화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1) 宮闕궁궐은 임금과 그의 가족, 그리고 이들을 보필 하면서 통치를 수행하는 군신들을 위한 업무 및 생활 공간으로 이루어 진다. 이를 중국에서는 外朝, 治朝, 燕朝공간으로 구분하여 계획하 였으며 조선 초기경복궁의 배치에서 이러한 계획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궁궐건축은 지배자의 절대권위를 상징적으로 표출해야 하므로 正殿을중심으로 하는 廻廊(건물 본체의 좌우, 또는 건물을 둘러싼 통행의목적으로 세운 건물)의 일곽은 정연한 좌우대칭형의 배치를 이루며구성된다. 이는 고대사찰에서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 일곽을 좌우대칭형으로 배치한 것과 유사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2) 寺刹사찰은 불교가 도입된 삼국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상황과 불교적 교리에 따라 그 배치기법과 공간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이는 불교의 세계를 현세에 암시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도상적으로 나타내고자하는 종교적인 배경과 당시 궁궐에 버금가는 최고의 건축으로서 엄격한 권위성을 표출하고자 한 사회적 배경, 그리고 한국의 자연 지세에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한 지리적 배경등이 시대에 따라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내외부 공간의 연출을 달리하여 왔다.3) 鄕校와 書院향교나 서원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으로 공자나 그의 제자 그리고 역대 성현들의 가르침을 기리고 공부하기 위한 곳이다.따라서 공자와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을 기리는 절대의식 공간인 祭享空間과 이들의 가르침을 학습하는 講學空間으로 구분된다.4) 住宅주택은 상류주택과 민가로 구분되는데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은 유교정책에 따라 男女有別과 신분의 구분에 의한 건축 계획이 이루어져 사랑채, 안채, 행랑채와 이에 부속되는 마당으로 공간이 구성되는 것이통례이다. 민가는 상류주택과는 달리 일반 서민의 생활과 지역적인 자연 여건이 공간구성에 더 우위를 차지하며, 생활공간인 건물과 작업공간인 마당으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적이다.(2) 구조적 이해1) 基壇건물이나 탑, 기타 이와 유사한 축조물의 지면을 주변 보다 높게 올려 쌓은 것을 말한다. 기단은 재료에 따라 흙이나 돌, 전돌, 그리고기와 등으로 쌓기도 하는데 재료의 여부를 막론하고 건물의 규모나용도에 상관없이 초가삼간에서부터 궁궐의 정전에 이르기까지 모두축조된다. 이러한 기단은 쌓는 방식에 따라 자연석 기단과 가구식 기단으로 대별된다.1 자연석 기단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은 채 외부에 돌출된 면만 대충다듬어서 쌓는 것을 말한다.2 架構式 기단쌓는 돌을 모두 정교하게 다듬어 맞추어 올리는 기단으로 지면에 놓는 地臺石과 지대석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는 面石, 그리고 면석을덮어 기단의 바닥면을 이루는 甲石으로 이루어져서 목조의 가구를쌓는 것처럼 구성한 기단을 말한다.2) 礎石기단 위에 놓아 기둥을 받치며 기둥의 무게를 지면으로 전달시켜 주는역할을 하는 部材를 말한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며 배열하는 방식에 따라 定平柱礎 방식과 덤벙주초 방식으로 대별된다.1 정평주초 방식초석의 윗면을 다듬어 모든 초석면을 동일 수평선 상에 맞추어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앉히는 방식으로 고대 사찰이나 궁궐, 그리고관영 건축 등에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다.2 덤벙주초 방식초석의 윗면을 가공하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초석의 윗면이 평탄하지 않아 기둥의 하단을 초석 윗면의 형태에맞게 잘라내어(그렝이질) 세우는 방식이다.3) 기둥초석 위에 세워서 지붕과 가구 즉 상부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부재를 말한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柱間이라고 하며 이 주칸의 치수는일률적으로 일정한 것이 아니라 건물에 따라 차이를 가지는 상대 치수로서 일반적으로 건물의 규모를 규정짓는 기준이 된다. 기둥은 단면의 형태에 따라 두리기둥(圓柱)과 각기둥(方柱) 으로 대별된다. 두리기둥은 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主佛殿 등 규모가 큰 주요 건물에 사용되며 각기둥은 주택이나 사찰,궁궐의 부속건물 등에 주로 사용된다.기둥을 다루는 治木기법은 흘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하며 기둥 자체의 구조적 기능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의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기둥의 흘림은 배흘림, 민흘림, 그리고 원통형으로 분류되는데 시대적으로 보아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의 柱心包系와 多包系의 건물에는배흘림 기둥이 주로 사용되며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의 건물에서는민흘림 기둥이 많이 나타난다.1 배흘림 기둥기둥의 전체 길이 중 아랫 부분에서 1/3 가량의 높이까지 기둥의 두께(柱徑)가 점차로 커지다가 그 위로 부터는 서서히 좁아져 항아리와 같은 형태를 가진 기둥을 말한다.2 민흘림 기둥기둥 아래쪽부터 위로 올라 가면서 서서히 두께가 좁아지는 기둥으로서 일정한 비율로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점마다 체감되는 비율을 달리하여 좁아지는 기둥을 말한다.3 원통형 기둥기둥의 상하 모두가 같은 크기의 두께를 가지는 기둥을 말한다.4 귀솟음건물의 모서리에 세우는 귀기둥(隅柱)의 기둥 높이를 平柱보다 약간높게 치목하여 귀기둥에 쏠리는 상부의 무게로 인한 沈下에 대비할뿐만 아니라, 건물의 立面상 양쪽 끝이 쳐져 보이는 시각적인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다.5 안쏠림건물의 바깥쪽에 세워진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 세우지 않고 기둥머리를 건물의 안쪽으로 약간 기울여 세우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은 정면에서 바라볼 때 건물의 윗 부분이 밖으로 나와 역사다리 꼴의 형태로 보이는 착시 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다.4) 공포전통 목조건축에서 앞으로 내민 처마(지붕이 처마도리 밖으로 내민부분 즉 지붕이 벽체의 밖으로 나온 부분)를 안정되게 받치며 그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시켜주기 위해 기둥 위에서 부터 대들보(大樑)의 아래까지 짧은 여러 부재를 중첩 하여 짜 맞추어 놓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포는 구조적 기능 뿐만 아니라 중첩되는 부재의 조각 형태에 따라 의장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의 전통 목조 건축은 공포가 놓여지는 위치와 결합되는 방법(結構法)에 따라 柱心包形式, 多包形式, 그리고 翼工形式으로 그 형식과계열을 분류하고 있다.1 柱頭기둥머리나 昌枋(한식 목조 건물의 기둥과 기둥사이의 머리를 파고가로로 건너질러 연결한 가로재), 平枋(공포등을 받기 위하여 평주 위에 건너 지르고 창방 위에 얹히는 가로재로서 다포계 형식의 건물에쓰인다) 등의 횡으로 놓이는 부재 위에 놓여 위쪽의 무게를 받아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시켜 주는 됫박처럼 네모지게 만든 부재로써 운두와굽 그리고 굽받침으로 구성된다.2 주심포 형식기둥의 위에만 공포가 짜이는 것으로서 위쪽의 무게가 공포와 기둥을 통하여 지면으로 전달되는 구조 체계를 가진다. 사이에는 창방이라는 횡부재가 기둥머리를 파고 놓여지며 창방의 중앙에는 花盤이나包壁이 구성된다. 주심포 형식의 건물은 외관상 단아한 멋을 나타내며 건물 세부 부재의 치목에 의한 화려함 보다는 건물 전체에서 보여주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3 다포 형식기둥의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아 입면상 하나의 공포대를 횡으로 구성하여, 매우 화려한 모습을 가지는 형식이다.위쪽의 무게가 기둥뿐만 아니라 벽을 통하여도 전달되므로 기둥머리를연결하는 횡부재인 창방 만으로는 상부의 하중을 지탱하기 어려워 창방 위에 평방이라는 횡부재를 하나 더 올려 놓아 공포를 구성한다.5) 架構기둥 위나 공포의 위에 얹어 지붕의 틀을 구성 하는 부재들로 지붕의무게를 고루 분산시키면서 내부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구조나
한국전통건축하늘을 나는 듯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 창호지 위로 번지는 서늘한 달빛, 낮은 담벼락을 따라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 한국 전통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러한 풍경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 전이다. 대략 2,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의 전통 건축은 산업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빌딩문화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현대 건축에 급속히 파묻혀 버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건축에 있어서 전통계승이라는 문제는 많은 건축가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실제로 현대의 건축물에 전통계승의 의지를 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전통계승은 반복적인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맞도록 변형시키고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난 '사진영상의 해'에 뒤이어 올해는 '건축문화의 해'로 지정되었다. 지금부터라도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우리 전통건축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열린공간을 지향하는 전통건축오래 전, 인류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서 생활한 이래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인류의 주거공간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가졌다. 초기의 건축이 단순히 먹고 자고 추위를 피하는 구조물의 의미였다면 현재의 건축은 하나의 문화적 상징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한 시대의 건축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역사와 정신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운하로 유명한 베니스의 경우, 이민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바다 위에 도시를 건설하였고, 바람의 나라 네덜란드는 수면보다 낮은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댐을 쌓고 풍차를 만들었다. 우리가 전통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건축물의 구조적인 특성을 분석하기 전에 그러한 건축물이 형성된 당시의 시대상황과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우리 나라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뚜렷하고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은 지리적 조건을 가졌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 속에서 우리의 전통건축은 자연을 개척하고 지세를 거스르기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지세를 이 세워지고 왕조와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 하였다. 현재 그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궁궐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이다. 이 궁궐들은 모두 조선왕조 때 창건된 것으로 이전의 것들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모두 소실되었다.'좌종묘우사직'. 이것은 조선왕조가 궁궐을 세울 때 건물 배치의 기준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경복궁을 정궁(임금이 신하들에게 정치적인 명령을 발표하거나 사신을 맞아들이는 곳)으로, 전체의 한 가운데 배치하고 그 좌우로 종묘와 사직단을 세웠는데 이것은 중국의 궁궐 배치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양식은 도읍의 중앙에 궁궐을 설치하고 궁궐의 좌측에는 종묘를 세우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설치하는 것이었다.종묘는 역대 군왕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성리학에 입각하여 철저한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겼으며, 특히 농경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중국의 '좌묘우사' 제도를 모방한데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새왕조의 정통성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 이전까지 이름 없는 무신가문의 인물로서 중국으로부터 그 정통성을 인정받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결국 중국을 모방한 궁궐을 세움으로써 당당히 정식왕권으로 인정받고, 종묘를 통하여 국내적으로는 그 정통성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처럼 궁궐은 단순히 건축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용 주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문화적 상징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사찰사찰은 궁궐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용 주체가 특수한 신분의 사람이었다. 또한 불상, 승려와 함께 직접적으로 불교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사찰이라는 명칭도 '승려들이 모였다'는 뜻과 '거주처'라는 뜻이 결합된 복합어이다.사찰은세우고 좌우에 대칭적으로 회랑(건물본채의 좌우 또는 건물을 둘러싸고 통행을 목적으로 세운 건물)을 세운 것은 궁궐의 '좌묘우사'가 절대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처럼 부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불교의 사찰 건축 또한 문화적 상징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전통가옥궁궐이나 사찰 건축과는 달리 일반 서민들이 사용 주체인 전통가옥은 과시적인 권위나 상징성을 가지기보다는 건축이 지니는 일차적인 목적, 주거공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와 돌, 흙, 짚을 주재료로 인위적인 건축미 보다는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이 엿보인다.우리 나라의 전통가옥은 안 공간과 밖의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유교의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의식이 건축문화에 베어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실제 의식주 생활이 이루어지는 살림공간이며 외부의 공간인 사랑채는 남성을 위한 공간으로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나 이웃이나 친지가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안채에는 커다란 마루인 대청이 있어서 곧바로 마당과 연결된다. 대청은 전면이 탁 트인 공간으로 여름에 들창을 올리면 열린 공간이 되고 겨울에 들창을 내리면 닫힌 공간으로 변한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절충적인 공간이 바로 대청인 것이다.전통가옥은 농경사회의 생활양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살림 채에 딸려 있는대청은 집안 식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집안의 큰일을 치르거나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공간이었으며 마당은 안마당, 바깥마당, 뒤꼍, 뒤뜰, 우영, 텃밭, 뒤안 등으로 구분되어 채소를 가꾸는 밭으로 활용하거나 마을의 큰일을 치르는 장소로 활용했다. 이처럼 집은 일상에 지친 몸을 쉬게 하는 휴식공간이며 또한 농사일을 위한 준비와 마무리 작업의 공간이었던 것이다.열린공간을 지향하는 전통건축세계적인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켜 복원한 것이다. 이전된 5개의 전통가옥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이진승가와 삼청동 김홍기가, 옥인동 서용택가, 중구 삼각동 조흥은행 관리가, 그리고 동대문구 제기동 정규엽가이다.1)삼청동 김홍기가(오위장 김춘영 가옥)이 가옥은 본래 종로구 삼청동 125-1에 있었으나 1996년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는데 서울의 전형적인 'ㅁ'자 형태가 아니라 'ㄹ'자 모양이 되도록 배치하였다. 이것은 'ㄷ'자형의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안채는 중앙에 대청이 2칸 크기로 마련되었고 그 서쪽에 역시 2칸 크기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다. 안방의 남쪽에는 부엌이 있고 부엌 남쪽에는 광, 광의 남쪽에는 문간방이 배치되었다.문간방에서 'ㄱ'자로 꺽어져 서쪽으로 한 칸 반 크기의 대문간이 있고 그 동쪽에 한 칸 반 크기의 큰사랑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ㄱ'자로 꺽어져서 한 칸 크기의 사랑대청이 있고 사랑대청 남쪽에 한 칸 크기의 작은사랑이 설치되었다. 작은사랑과 대청 앞에는 봉당이 있다.2)관훈동 이진승 가(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조선조 제25대 절종의 후궁 숙의 범씨 소생인 영혜옹주의 부군 박영효의 주택으로 속칭 서울의 8대가 중하나이다. 이 가옥은 처음에는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이루어졌으나 안채 외에는 헐리어 없던 것을 사랑채와 별당 채로 복원한 것이다.부엌과 안방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형태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으로 서울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기단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았고 지붕은 팔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퇴칸 앞의 창호는 모두 유리 분합문을 달았으나 이는 후대에 고친 것으로 보인다.3)삼각동 조흥은행 관리가(도편수 이승엽 가옥)조선조 말기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 (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엽이 1860대 지은 것으로 원래 중구 삼각동 36-2에 있던 것을 남산골 공원에 옮겨 놓은 것이다.전통건축물의 구조우리의 전통가옥은 자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온돌과 대청우리 나라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뚜렷하므로 집을 지을 때 여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했다. 온돌은 추운 겨울날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나는 열을 이용해 방안을 따뜻하게 하는 난방장치로써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온돌의 난방 고조를 보면, 먼저 방바닥에 얇고 넓은 석판을 깔아 놓은 구들이 있고, 구들 위에는 다시 얇게 흙을 바르고 구들 위에 기름을 먹인 한지를 깔았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구들 밑으로 연결된 빈 공간을 통해서 열이 전달되어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의 열은 '개자리'라는 구조가 있어서 곧바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한참 머물다가 굴뚝을 통해서 열과 연기가 함께 빠져나간다. 추운 겨울에도 저녁 식사 준비하는 시간에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놓으면 다음날 새벽까지 따뜻한 잠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온돌이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는 장치라면 대청은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공간이다. 대청은 집채 가운데에 있는 바닥을 넓은 마루 널로 꾸민 널찍한 대청마루로서 사방이 뚫려 있다. 그러나 여기에 '들창문'을 달아 여름에는 이것을 위로 걸어 올려놓고 열린공간으로 활용하고 겨울에는 이것을 내려서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다.▶들창온돌과 대청마루가 한 지붕 밑에 공존하는 것은 한옥의 구조적 특성 중 대표적인 예이다. 온돌은 추운 겨울에 실내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폐쇄적인 공간구조를 지니며 대청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의 구실과 여름에 실내를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서 개방적인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들창은 폐쇄적 공간인 온돌방과 개방적 공간인 대청마루 사이를 분리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안과 밖을 창호지로 두껍게 바른 몇 짝의 분합문을 서로 연결시켜 문짝을 접어서 들어 올려 등자쇠에 거는 간단한 장치이다.분합으로 된 여러 짝의 문중에서 가장자리의 문은 출입문으로 활용된다. 평소에는 다른 문짝들을 모두 닫아걸고 한쪽만 여닫이문으로 사용하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