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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강의] 사이버강좌의 의의와 활용 평가A좋아요
    사이버 강좌의 의의와 활용에 관한 고찰◎ 목 차 ◎사이버 강좌의 의의와 활용에 관한 고찰서 론본 론Ⅰ. 인터넷 교육의 의의1. 인터넷 교육의 의의2. 인터넷 교육의 특징3. 인터넷 교육의 장·단점Ⅱ. 사이버강좌의 의의1. 사이버강좌 특징2. 사이버 강좌의 형태Ⅲ. 사이버 강좌의 활용1. 우리 학교의 사례2. 타교의 사례3. 외국의 사례Ⅳ. 사이버 강좌의 장·단점1. 사이버강좌의 장점2. 사이버강좌의 단점Ⅴ. 사이버 강좌의 방향결 론서 론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지식(정보)만 놓고 볼 때, 크게 세 번의 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것은 언어혁명, 문자혁명, 인쇄혁명이다.(이용열 외, 1987) 언어혁명은 사물이나 사건에 개별적 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였고 인간의 사고능력을 신장시켰으며, 정보를 인간간에 전승하도록 해 주었다. 문자혁명은 정보를 문자화시킴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항구적인 보존을 가능케 하였다. 인쇄혁명은 정보의 대량유통을 통해 지식의 공유화 및 보편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지식혁명을 모두 통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 이름하여 정보통신혁명이다. 정보통신혁명은 정보접근 방식의 수월성 임의성 신속성을 가능케함으로써 정보획득의 시간을 단축하고 인류를 같은 생활권에 둘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보 흐름은 정보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쌍방소통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정보 공급자가 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컴퓨터를 통한 정보의 개방화 공유화가 가속화된 것이다.이것의 중심에 인터넷이 있고 이 인터넷의 활용중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는 사안이 바로 인터넷 강좌이다.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것 중의 하나가 사이버 유니버스티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미 1982년부터 원격강의를 정규학위과정으로 인정하여 운영해 오고 있으며, 웹이 활성화된 요즘(1997년 10월 기준)에는 약 1218개 이상의 대학이 부설기관 형태의 임감을 감당하고 학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적합한 학습 전략들을 적용함으로써 자신에게 고유하고 의미 있는 학습과정과 결과를 산출해내는 과정을 통해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은 학습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학습의 주체로 생각게 하여 모든 학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동기부여하며 자신감을 지니게 한다.셋째, 창의성이 신장될 수 있다. 학습자는 수업내용에 대해 그 수준에 맞는 전문가가 되고자 할 것이며,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학습정보를 검색,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고력이 신장될 수 있다.예를 들어, 태양계에 관해 정보를 검색하는 단순한 활동을 수행하더라도 학습자들은 다른 학습자들보다 더 나은 정보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활동하여 자신에게 의미 있는 학습결과를 창출하고자 할 것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활동과 사고는 학습자의 창의성 신장에 기여할 것이다.넷째, 학습자의 협동심이 신장될 수 있다. 인터넷을 활용한 수업 방법 중에 가장 뛰어난 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협동성이다. 이는 한 학급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타 지역과 서로 연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자연히 협동심이 길러지며 협동에 대한 가치인식이 신장되게 된다. 협동은 한 사람만이 뛰어나다고 해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학습자들은 서로의 일을 구분 지어 수행하긴 하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나란히 나아가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협동학습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다섯째,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인터넷 활용 수업에서는 교사는 학습자에게 최소한의 내용을 제공하고 그 다음에는 학습자의 학습을 도와주는 조력자로 역할이 바뀌어진다. 이와 동시에 학습자는 자신의 학습을 스스로 진행해 나가야 할 책임이 주어진다. 다른 학습자들이 행한 일의 결과와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일에 열심이지 않았던 학습자들은 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의 일은 자신이 해 대학은 지역별, 설립형태별, 규모별로 폭넓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각 대학이 대학별 특성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이를 회원 대학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각 대학이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2)목표우리 대학교의 가상대학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any time, any place and anyone : AAA)"를 기본목표로 정하고 있다.영남대 가상대학의 궁극적인 운영은 열린 교육과정과 평생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이상적 가상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3)교육과정우리 대학교의 가상강좌는 교내인터넷강좌, KCU 강좌, 정보통신부강좌로 이루어진다.교내인터넷강좌는 가상강의 수강신청제한학점(6학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강신청이 가능하며, 교내일반 강의실 강좌와 동일한 일정 및 방법으로 수강신청·변경·정정·취소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대학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고 있는 KCU 강좌, 정보통신부강좌는 강좌의 1개 학기 통합 최대 수강신청 가능학점은 6학점이며, 졸업 때까지 취득할 수 있는 학점은 대학원 및 타 대학(원)에서 취득한 학점과 합산하여 졸업에 필요한 학점의 1/2을 초과할 수 없게 되어있다.①교내인터넷강좌(www.vuniv.yeunnam.ac.kr)현재 12강좌가 운영중에 있는데, 암호학, 멀티미디어정보통신, 웹디자인, 미학의 이해, 컴퓨터망과 TCP/IP, 로봇공학, 멀티미디어개론 및 응용기술, 회사법(1), 정 보시스템관리, 테이터베이스관리, 국제통상기구, 전자재료 및 소자 의 과목이다.이 중 우리 경영학부의 전공은 2과목으로 김종욱 교수님의 정보시스템관리, 김 기수교수님의 정보시스템관리가 그것이다.대부분 강의의 수업은 강의실에서의 면대면 (face-to-face) 수업은 없으며, 대신 원격강의 소프트웨어(C-Board)를 이용하여 강의실이 아닌 집이나 학교에서 우 리 학교의 가상대학 홈페이지를 통하여 수업한다. 접속은 영남대학교 가상대학 홈페이지를 통하여 아이디와 비밀번호 입력후 로그인해지요.그리고 학생들의 반응을 잘 알수 없으니까 수준 등도 잘 모르는 단점이 있지요.질문도 학생들이 잘 하기 힘들고,그래서 교실수업을 1시간, 온라인 수업을 2시간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다른 것은 일반 수업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교안도 확실히 준비하고요.@"사이버강의는 좋던싫던 이제 당면해있는 일이니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많은 노력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사이버강의가 일찍이루어진 미국같은 경우 온라인상의 감성적 공동체 형성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더라구요. 편하지만 인간적인 강의가 이상적일것 같아요.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미국에서는 강의 내용 그 자체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선생과의 교감을 더 중시 여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요,어쨌든 원격강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감성적인 면을 보완해 가면서 발전하리라 생각합니다.향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강의를 들을 지도 모르지요.지금 채팅 같은 것을 불과 몇년전만 해도 상상을 했겠습니까?""내가 생각하기에는 원격 강의 시대를 빨리 오게 하는데는 원격강의 안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 툴이 중요한 것 같아요.지금은 교실 수업의 몇배 노력이 듭니다. 물론 한번 만들면 또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현재의 수업내용의 발전으로 보아 작년 것을 100% 그대로 사용할 수업은 많지는 않겠지요.파워포인트와 VOD를 이용하면 (지금 제가 수업하는 대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화면을 그대로 보일수 있으면 더 쉽구요.""지리적인 제한을 벗어 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만일 첨단 IT교육을 받으려면 서울에 가야 하는데 원격으로 강의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별로 강의의 질도 틀리지 않다면 말이죠.수고하세요."2. 타교의 사례1) 연세대사이버대학(www.yscec.yonsei.ac.kr)(1) 역사와 기반준비작업연세대학교는 지난 '98년 교육부로부터 가상대학 프로그램 실험운영대학으로 지정을 받아, 동년 12월 연세대학교 사이버교육지원센타(Yonsei Cyber Education Cent대상 사이버강의. 일반인전문교육과정으로 사이버신학과정, 윤리준법전문가과정, 사이버임상간호과정, 사이버스페이스와 법률과정이 개설되어 있다강의는 YSCEC 사이트를 통하여 온라인으로 제공되며, 매주 3시간학습 분량의 강의안이 업데이트되며, 지난 강의는 저장된 데이터 형태로 제공되므로 반복하여 학습할 수 있다. 수강생은 인터넷, e-mail, 채팅 등을 통해 교수 및 조교와 질의응답을 나눌 수 있고 매 학기 3~4회의 강의실강의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린다 별다른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해진 기간안에 신청하고 수업료를 내면 들을 수있다(5) 문제점과 개선안연세대의 사이버강의의 문제점을 짚어봄에 있어 지난 2000학년도 2학기 사이버강의 수강생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분석한 자료를 예로 들겠다 이 설문조사는 인터넷을 통한 교육의 효과를 검증하고 교수 및 수강생들의 만족도를 조사하기 위해 사이버교육센터에서 실시했다. 조사결과 학생들은 사이버강의 시스템에 대해서 보통수준의 만족도를 보였으나‘접속 및 페이지 변환 속도’와 ‘접속 성공률’에서 낮은 만족도를 보였다. 가장 많아 시용하는 기능은 ‘전자칠판’이었으며 응답자의 48.1퍼센트가 강의실 강의에 비해 사이버강의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63.5퍼센트가 강의실 강의 보다 사이버강의에 더 많이 참여한다고 응답했다. 사이버강의 자체에 대한 주관식 설문결과 ‘시간 활용이 자유롭다’, ‘시청각 자료의 활용도가 높다’,‘수강생간의 활발한 교류가 가능하다’는 측면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결과적으로 사이버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은 그 과목에 대해 비교적 높은 수준의 만족도를 보였으며 ‘다음 학기에 사이버강의를 수강하겠느냐’는 질문에 44.7퍼센트의 응답자가 수강의사를 밝혔다.한편 교수 설문조사는 사이버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들과의 직접면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조사결과 교수들은 ‘강의록 게시’, ‘토론’, ‘질의·응답’등의 기능을 이용한 다양한 학습방법을 통해 강의를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학원 사이버강의도 이시간/비
    경영/경제| 2002.11.07| 25페이지| 1,000원| 조회(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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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사관계론] 고용보험제도 평가A좋아요
    1. 고용보험제도의 의의고용보험제도란 실직근로자가 구직활동을 하는 기간동안 생계지원을 위한 실업급여 지급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훈련과 교육을 지원하고 실업예방과 고용촉진을 위하여 각종 사업주 지원사업을 복합적으로 실시하는 사전적이고 적극적인 고용정책 수단이며 민간보험회사 등이 영리를 목적으로 보험가입자의 희망에 따라 임의로 가입하는 사적인 보험제도와는 달리 국가가 고용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험의 원리와 방식을 도입하여 법률에 의하여 보험의 가입과 보험료의 납부가 강제되고 실업이라는 보험사고에 대하여 근로자와 사업주를 지원하는 공적인 사회보험제도이다.2. 제도의 연혁고용보험제도는 '80년대 후반부터 인력수급 불균형, 산업구조 조정에 따른 고용조정 지원문제 등에 대한 제도적 수단으로 도입이 논의된 이래 '93년 12월 고용보험법이 제정되고 '95년 7월1일부터 상시근로자 3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IMF이후 실업이 급증함에 따라 '98년 1월 1일부터 상시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 동년 3월 1일부터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 10월 1일부터는 4인 이하 사업장 및 임시직· 시간제 근로자에게까지 적용범위를 확대하여 왔다.3. 주요사업고용보험은 사업의 종류에 따라 실업급여, 고용안정사업, 직업능력개발사업으로 나누어 실시한다.① 실업급여는 산업구조조정, 조직 및 기구 축소 등 기업의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실직하는 근로자에게 구직급여와 재취직촉진비용을 지원해 줌② 고용안정사업은 근로자를 해고시키지 아니하고 고용을 유지하거나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자 등을 채용하여 고용을 늘리는 사업주에게 소요비용을 지원함③ 직업능력개발사업은 근로자의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는 사업주와 근로자에게 일정비용을 지원함4. 고용보험의 기능①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조정을 지원하여 고용안정 및 구조조정 촉진산업구조조정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고용조정을 지원함으로서 고용안정과 기업의 구조 조정지원저생산·저부가가치산업에서 고생산·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 인력이동을 지원함으로서 산업구조·인력구조 고도화 도모기업의 고용조정지원으로 경영합리화 도모② 인력수급 원활화 : 인력의 POOL 형성(고용보험전산망), 국가의 직업안정기능 체계화③ 근로자의 직업능력개발 활성화로 노동생산성 향상 및 기업경쟁력 강화 : 기업의 인력확보, 취업 기회확대, 실업문제해결에 기여④ 실직근로자 생계안정, 재취업촉진 : 실직자에 대한 실업급여 지급과 함께 고용정보제공, 직업상담, 취업알선, 직업훈련안내 등 종합고용서비스 제공으로 재취업 촉진⑤ 경기조절기능 수행고용보험지출액이 실업율의 증감에 연동하므로 경기상황이 좋을 때 적립된 기금이 경기불황시 지출되어 구매력 증가5. 우리나라 고용보험의 주요 사업고용조정의 지원(고용조정 지원금, 지역고용 촉진 지원금)고용안정사업 잠재인력 고용 촉진(고령자 고용촉진, 재고용, 육아휴직 장려금)고용촉진시설에 대한 지원(직장보육시설 설치비용 융자와 지원금)고용정보의 제공 및 직업지도 등고용보험제도 직업교육 훈련 지원(사내 직업훈련 지원금, 교육훈련 등 지원금)직업능력개발사업 실직자 재취업 촉진(실업자 재취직 훈련 지원)직업훈련시설 설치 지원(훈련시설 장비구입 비용 대부, 우선지원대상기업 훈련시설 장비비 지원)교육훈련 수강비용 지원(고령자 수강장려금, 근로자학자금 대부)구직급여(기본급여)실업급여 조기재취직수당취직촉진수당직업능력개발수당광역구직활동비이주비6. 고용보험의 적용대상보험사업별적 용 범 위'98. 1. 1 이전'98. 1. 1∼2. 28'98. 3. 1∼6. 30'98. 7. 1'98. 10. 1실 업 급 여30인이상10인이상5인이상5인이상1인이상고 용 안 정 사 업직업능력개발사업70인이상50인이상50인이상5인이상1인이상7. 고용보험적용 제외자60세 이후 새로이 고용된 자65세 이상인 자1월 미만의 기간동안 고용되는 근로자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원연금법을 적용받는 자월간 소정 근로시간이 80시간 미만인 근로자8.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제 시행배경고용보험제 도입에 대해 일부에서는 근로의욕의 저하, 실업의 장기화 등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우리나라도 일본·독일과 같이 국가의 적극적인 인력정책 추진을 위해 고용보험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데 노사정이 공감 정부는「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 계획」및「신경제 5개년 계획」에 고용보험제 도입을 반영하고 '93년 고용보험법을 제정하여 1995년 7월 1일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음.9. 외국의 고용보험제도와 고용정책① 서독의 실업보험제도는 1927년 '직업소개 및 실업보험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국가의 재정원조로 80만 실업자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출발하였다.그러나 시행후 2년 만에 대공황이 내습하여 500만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실업에 직면하였다. 이때 정부는 실업보험의 절하, 보험료율의 인상 등으로 실업자의 생활을 보장하려 했지만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붕괴의 한 요인이 되었고 대량실업은 이후 파시즘 정권에 의한 경제의 군사화, 군사적 강제노동에 의하여 해소되었다. 이 때 실업보험은 연금보험과 함께 군사비를 위한 징세기구로 전락하였다.1956년 실업보험의 재건시에 현실에 맞게 개정되고 다시 1969년 5월 13일 현재의 '고용촉진법'으로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보험은 고용촉진법하에서 실업부조제도, 직업훈련, 고용촉진시책과 함께 '실업 고용대책 제도'가 됨으로써 실업보험이 고용시책과 연결되기에 이르렀다.② 미국의 실업보험은 1930년대 후반부터 모든 주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으나 실업보험금의 지급개시 초기(1937년-1938년)부터 실업자의 급증으로 재정위기에 직면하였다.즉 세계대공황(1929년) 타격을 강하게 받은 미국의 대량실업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불황으로부터 탈출해야만 했다. 1935년의 사회보장법하에서 실업보상제도가 정비되었지만 사실 실업대책의 중심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서 대규모의 공공사업투자에 의한 적극적인 고용확대와 경기회복이었다.③ 프랑스에는 법정실업보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프랑스의 실업보험제도는 경영자연맹과 일정한 피고용자의 대표조직 사이에 체결(1958.12.31.)된 단체협약에 의하여 창설된 것으로 보충제도의 일반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프랑스에서는 이 형태가 실업 보상과 실업자의 노동 복귀라는 두가지 측면으로 발전하고 있다. 노동복귀대책은 전국고용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주요시책으로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급여 지급(직업전환수당, 이전 및 재취직 보상수당, 구직자수당, 무료승차권등 구직기간 중의 각종원조 등)과 해고 예고기간에 대한 관계규정의 개선, 집단적 조치로서 직업훈련, 직업적응훈련 실시 등이 있다.좀더 구체적으로는 먼저 급여대책으로서는 부조적용범위의 지역적 확장, 실업보험 적용직종의 확대, 사회부조 수급상의 소득요건의 완화, 사회부조 및 산업보험의 급여수준의 인상에 의한 실업자에 대한 보호강화, 사회부조 및 실업보험상의 급여의 지급기관의 단일화등을 들 수 있다.그리고 고용복귀대책으로는 근로자에 대한 정보제공 및 취업알선, 특정구직자에 대한 직업교육이수를 위한 지도, 고용시장에 관한 통계작성사업에의 참여 등이다.④ 일본의 고용보험제도는 1947년 2차대전 직후 다수의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실업보험제도로서 창설되었다가 이후 75년에 고용보험법으로 개정되었다. 거기에는 급여지급사업 외에 직업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용안정사업, 고용개선사업, 능력개발사업, 고용복지사업 등이 포함된다.특기할 점으로는 단기고용 특례피보험자에 대한 구직자 급여가 있어 일정기간마다 취직과 이직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도 급여가 지급되며 일용노동자도 당연히 급여를 지급받는다.한국과 일본의 고용보험법과의 비교표구 분일본의 고용보험법한국의 고용보험법적용사업근로자를 고용한 모든 사업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적용제외65세 이상 근로자단시간근로자4개월 미만의 계절근로자타제도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60세 이상 근로자시간제근로자계절적 사업, 일시적 사업의 근로자공무원, 사립학교교원임의적용5인 이하 상용근로자의 사업장인 농업, 임업, 수산업의 피용자대통령령에 유보특별제도일용근로자선원고용보험일용근로자; 별도의 법률에 유보비용부담근로자; 임금의 0. 55%, 계절적 근로자는0. 65%사용자; 지불총액의 0. 9%, 계절적 근로 자는 1.0-1.1%
    경영/경제| 2002.04.28| 5페이지| 1,000원| 조회(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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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 5인에 대한 요약과 비판 평가B괜찮아요
    『친일파 5인에 대한 요약과 비판』-친일문학가 5인-경영학부 3년 19817361 박인애1.서론-1940년대 전후의 역사적 상황-식민지 전기간에 걸쳐 소위 를 강조하며 민족문화와 민족혼의 말살을 꾸준히 추진해 온 일제는 40년대 이르러서는 의 기치아래 더욱 강력하게 문화탄압과 민족탄압을 전개하였다. 10년 이상 지속된 만주사변이 1937년에 중일전쟁으로까지 확산되고 그것이 다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진전된 일제말기에 일본은 강력한 전시체제를 갖추는 것과 아울러 그들의 식민지 정책으로 더욱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을 내세웠다.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마비시키기 위해 일본신사를 보급,참배를 강요하고,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억압하는 한편,사교(사교)를 장려해 나갔다.또 우리글과 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를 강요하고 조선인에 대한 를 강화하기 위해서 를 매일 제창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을 펴나가는 한편,일제는 자라나는 젊은 조선인 세대를 철저하게 일본인화하기 위해 종래의 교육제도를 대폭 개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하의 조선에 있어서의 황국신민화교육은 조선인 청소년으로 부터 민족의식을 빼앗는데 그치지 않고 침략전쟁을 위한 노동력,전투력으로써 동원할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민족말살정책이 더욱 심화되어감에 따라서 일제는 한층 더 강한 민족말살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일시동인의 대이상을 구한다", "경국의 대정신 팔굉일우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라 떠들고,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나라 조선민중의 열렬한 요망에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는 관헌들을 동원해서 협박하며 강제했다. 일제는 침략전쟁이 점점 확대되고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일본 청년의 인적 자원의 한계를 가져와 풍부한 조선인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앞세우려고 지원병령을 내려 강제로 징병해 나갔다 . 또 탄광을 비롯해 각 분야에 노무자가 필요해짐에 따라서 일제는 필요해진 노무자들을 조선에서 충당하려고 강제로 징집해 나갔다. 이러한 식민지의 강화와 한국인의 강제징집같은 야만적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됨으로써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의 발판을 마련하고 4개월 만에 그는 {만세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긴다. 1906년 2월에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창간된 이 신문은 {국민신보}의 대항지였다. 일진회는 원래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가 국내의 이용구를 내세워 벌인 동학의 반정부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 군부의 조종을 받는 송병준과 야합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06년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하고 일진회에 대항하는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인직은 이 신문에 유명한 {혈의 루}를 연재함으로써 일약 문명(文名)을 얻고 이를 발판으로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 도쿄정치학교 시절의 인연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은사 고마츠는 통감부 외사국장으로 부임하고 친구 조중응도 통감부 촉탁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이인직은 이완용의 후원을 얻어 {만세보}를 인수하여 1907년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한 후 사장 자리에 앉는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한 이 신문을 통해 그는 본격적인 암약에 들어가게 되니, 친구 조중응은 이 때 법부대신이었다. 당시 정계는 친일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파와 일진회가 격렬한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인직은 전자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1908년 이후 그는 연극시찰이니 종교적 목적이니 하는 명목으로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실제로 그는 이완용의 밀사로서 일본정객들과 매국의 막후공작을 위해서 일본 나들이에 나섰던 것이다. 1910년 8월 초순 이완용은, '합방'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던 일진회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심복 이인직을 고마츠에게 보내 결정적인 비밀접촉에 들어간다. 이를 기틀로 협상은 급진전,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이완용파의 주도 아래 멸망하였던 것이다.이처럼 혁혁한 공으로 이인직은 1911년 경학원 사성(司成)으로 임명받는데, 연봉이 900원이었다. 이완용이 2000원, 조중응이 귀국 이후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 적인 욕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념체계인 민족개량주의와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이어 제3단계는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협력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珽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야 한다고 주장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 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臣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라고 주장.([반 도민중의 애국운동], {매일신보}, 1941. 9. 3) 그의 핵심적인 친일 행각으로는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국민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1943년 12월 일본 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강연에 나섰고 조선 문인협회 회장과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따르자는 황도학회 발기인 대표를 비롯, 임전대책 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등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많은 글을 써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였다. 독립 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2천여 유랑자들(실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닌 위험성을 세 가지로 나눠서 경고한다면 서, 첫째는 '독립운동을 표방해서 무기를 들고 조선 안에 몰래 들어오는 일'이며, 다음은 '과격파 러시아의 선전자가 되는 일'이고, 그 다음은 '사기꾼 또는 절도, 강도가 되는 일'이 라는 것이다. 춘원은 이들이야말로 '수효에 있어 적은 것 같지만 그 실제로 일본의 국방 및 사회의 안녕에 대해 경시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까지 강변한다.해방후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호하는 [나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그의 친일행위는 문인협회, 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언론보국회, 대의당, 대화동맹 등 수많은 부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음에서 명백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단체들에서 그가 어떠한 일들을 했는가는 그리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몇가지 핵심적인 행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1943년 12월 4∼5일 이틀에 걸쳐 만주의 신징(新京)에서는 '만주국 예문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 결전예문전국대회의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 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의 특파사절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데라모토(寺本喜一)와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유치진과 함께 참가하였는데, [결전하 만주의 예문태세](決戰下滿洲の藝文態勢)({신시대}, 1944. 1)라는 참관기를 남기고 있다. 또 이 회의 개회식장에서 축사를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금일의 문학은 다만 이기기 위한 문학, 미·영 격멸을 위한 문학이 있을 뿐입니다. 동양이 오늘의 찬연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금일 미·영 격멸의 피비린내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입니다.……우리들은 친애하는 만주제국 5000만 민중들 역시 하루라도 속히 직접 총을 잡고 포학한 미·영의 두상에 불의 세례를 내릴 것을 기원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또한 그는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개최한 미영타도강연대회에서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외쳐댔다. 게다가 1943년 11월 4일 화신 6층 회의실에서 있었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에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지역별 간담회 및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통하여 학병권유를 결의하였는데, 그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11월 5∼9일에 진명학교 교정 등 10군데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가 있었는데, 그를 비롯하여 이광수, 양재창(梁在昶), 송문화(宋文華) 등이 연라는 반도의 인간적인 사명 등이 그것이다.이상에서 보았듯이 주요한의 친일행적도 양에서나 질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청춘을 던져 애국적인 시를 썼던 '송아지'(그의 필명으로, 어딘지 민족적인 냄새가 담긴 듯도 하다. 그의 아호 송아(頌兒)도 이 말에서 나왔다)가 '팔굉일우'라는 일본 정신의 기수 '마쓰무라 고이치'로 변신해 간 것은 그 자신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불행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일은 해방 조국에서 그 불행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그가 독립투사로 우국적인 지도자의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그는 해방 이후 흥사단에 계속 관계하였으며,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민주당 민의원(초선, 재선)을 지냈다. 4·19 이후에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거쳤고, 5·16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정계, 재계, 언론계, 문화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늘 양지 쪽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1979년 80세를 일기로 영욕의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해 정부에서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본명 세철(世哲)로 평북 의주 출생했다. 일본 도쿄고등사범 문과 졸업(1931)했고 1930년 에 '어머니', '단장', '무제' 등의 시를 발표했으나, 이어 1931년 에 평론 '농민문학문제', [농민시어]에 '레닌6주기'를 발표하여 평론가로서 정식 문학활동을 시작했다.카프(kapf)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문학파와의 논쟁에 가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변증법적 사실주의에서 사외주의 리얼리즘으로 논의가 바뀌던 무렵인 1930년대 초반 '인텔리의 명예', '조선문학을 구하라' 등을 발표, 카프 당원으로써 처음으로 자유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1936년에 이르러 '인간묘사시대' '심리적 리얼리즘과 시회적 리얼리즘' '인다.
    사회과학| 2002.04.06| 11페이지| 1,000원| 조회(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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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학(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평가B괜찮아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부제:한국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경영학부 2학년 19817361 박인애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가정적, 정치적 측면 등에서 매우 열악한 위치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여기에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있어서의 불리함과 그 배경 과 변화를 위한 대책을 모색하고자 한다우리는 바로 얼마전 IMF체제에 들어가는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았고 지금도 크게 나아진 바는 없다 이는 민주화의 시대적 요구와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국가 경제의 경쟁력 강화라는 대세에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첨단산업의 발전은 산업구조의 개편을 재촉하여 기업은 경영합리화란 명분아래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으로 직장인들을 대량으로 실직상태로 몰아내고 있다 젊음을 바쳐 회사에 충성하며 평생직장으로 삼아 온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남성들, 앞으로의 조직 사회는 남성들에게마저 고용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한참동안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휘청거리는 아버지'.'고개 숙인 아버지'등은 이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생존경쟁의 일자리에서 시달리다 퇴직 당하는 남성들은 돌아온 가정에서도 소외당하는 기죽은 남편. 아버지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죽은 남성들의 위기의식은 가부장의 권위와 위신을 상실당했다고 믿는데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에서는 '남편 기살리기 운동'을 제기한다.또는 '초일류 내조를 위한 아내의 필독서' 등을 통해 남편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현모양처가 될 것을 여성들에게 호소한다. "주부들은 고급문화의 주 소비층이 되고, 남편들은 스트레스와 몰이해에 시달리다가 급사한다. 억울한 것은 남자 쪽이다." 남성들에게 "가정은 부부와 자녀가 함께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터전이어야 한다."그러므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들 자체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내조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회이 당하는 위기가 다만 여성들의 몰이해와 철없는 행위로써 배반당한 느낌을 갖는다. 이에 민주화를 통해 변화해 온 가정 생활 및 사회적 현실, 그리고 여성들의 변화를 이해하며 이에 대처하려는 의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만이 가정을 위해 희생했다고 자부한다. 가부장제 전통 속에서 누려 온 남성중심의 질서가 자연질서이며 운명인 양 믿으려는 것이다. 남성우월의 기득권에 도취되어 함께 살고 있는 아내와 딸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변화와 요구에 둔감하며 이를 무시해 온 것이다.사실상 우리가 직면하는 진정한 위기는 여성을 무능력자로 만들어 남성과 가정에 예속시킨 결과이다. 가부장제는 사회적으로 남녀를 가정 안팍으로 분리시키고 역할 분담을 구조화했다. 남편은 가족의 부양자로 바깥에서 일하고 여성은 피부양자로 가정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는 가부장제 질서에서 결과된 자업자득인 것이다. 여성을 민주시대에 알맞게 인격적 동반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시켜 경제적 무능력자로 머물게 하였다. 남편의 실직과 위기를 진정으로 이해하며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개발시키지 못하였다.오늘날의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현모양처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남성중심적 권위주의와 생활에서 당하는 횡포,억압,학대에 인내하며 가족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여성을 피부양의 무능력자로 삼는 혼인과 가족생활에 더 이상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인격을 지닌 능력자로서 직장과 지역사회에서 남성과 함께 책임있는 일꾼으로 일하며 가정에서 평등한 부부로서 대화하고 협력하며 동고동락하려는 것이다.이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에서 더욱 극면화 되어 보여진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산업사회는 양성평등을 전제로 개인의 능력발휘와 창의력에 의한 경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교육과 훈련, 노동과 소비시장을 통한 자유경쟁의 질서 속에서, 시민들은 창의력과 능력을 발휘하며 성공과 출세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유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자본의 무한경쟁을 이익을 위해서는 성차별, 인종차별의 이데올로기가 교묘히 이용되고 존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사회경제적 현실 속에서 조직적으로 유지되는 차별의 다양한 형태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한국 여성들이 처음으로 근대적인 임금 노동자로 취업한 것은 20세기 초반 일제시대였다. 그 당시 여성들은 일본하의 방직 및 고무 제품 공장 등에서 일하였는데 일제의 수탈과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의한 성차별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신식민지 형태의 자본주의 하에서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지향 산업화에 따라 저임금의 여성 노동력의 역할과 비중이 절대시되었다. 60년대 들어 본격적인 경제 성장 추구 속에서 단순 노동 집약적인 성격의 산업 활성화를 통해 여성들의 경제 활동 참여는 빠르게 증가하였다. 70년대 후반에는 중화학 공업화가 활성화되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80년대까지 단순 노동 집약적인 섬유, 전자산업 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제조업 분야의 취업은 다소 정체되는 반면 3차 산업인 서비스업과 직종별로는 사무직에 여성의 취업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지금까지 한국 여성의 사회 참여 과정을 대략 살펴보았다. 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성의 사회 참여가 편향적인 취업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 옴에 따라, 또 하나의 여성 차별적인 요소를 지녀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인 사항으로 들어가서 직장내의 여성 차별과 가사노동과 직장노동에서 오는 여성들의 이중부담 현실을 알아보도록 하겠다.현재 우리 사회는 여성의 노동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남성 중심적 사고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일차적으로 가사 노동 담당자로 인식되기 때문에 노동 시장에서 남성에 비해 2차적인 노동자로 낙인되어 있다. 자본의 필요에 따라 쉽게 노동력으로 흡수되지만 불필요해지면 가장 먼저 노동시장에서 밀려나게 된다. 여성은 언제라도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에 대한 부당한 해고나 장기한 기업의 고용 정책이 임시 고용이나 하청 등의 불안정, 임시 고용의 대폭 확대로 바뀌면서 미혼 여성 노동 인력의 부족을 기혼 여성 노동력으로 바꾸고 있는데 정부는 기혼 여성의 가사 노동과 임금 노동의 이중부담을 구실로 그들을 임시직이나 시간제로 채용할 것을 장려하여 저임금과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여성은 인류의 재생산을 위해 임신 및 출산과 육아를 담당한다. 이 일들은 단순히 여성의 일만이 아닌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기본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회 구성원을 낳아 성장시킴으로써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역할에는 사회의 공동 책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을 보면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성만의 역할로 규정지으면서 여성에게 무보수의 가사 노동을 하도록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생산 현장에서도 임신, 출산에 따른 모성 보호와 직장 탁아소의 설치 등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여성에게는 가사 노동이 1차적 역할이고 생산 노동은 부수적 노동이라는 이유를 들어 퇴직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가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단기적인 저임금 노동자로 이용하는 것에 주된 관심을 갖기 때문에 근무 연수가 길어져 호봉을 올려 주어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 임시 퇴직제, 조기 정년제 등의 관행이 존재하고 있다 .여성의 취업은 개인의 능력과 의사와는 무관하게 중도에 좌절되고 이후 재취업을 하더라도 경력 단절로 여러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남녀 임금 격차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다르기 때문에 임금 격차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또한 차별 임금을 주는 방법도 매우 다양한데 여성의 일 과 남성의 일 을 구별하여 여성의 능력과 관계없이 고임금 업종에 여성의 취업을 제한할 뿐 아니라 남녀가 동일하게 근무하는 직장에서 승진에 차별을 둔다거나 작업배치를 다르게 한다거나 호봉을 달리하는 등의 우회적인 방법이 종종 사용된다. 동일한 양과 질을 갖는 노동에 대해 이같이 차별 임금을어지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주로 단순 보조적인 업무만을 담당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의 취업 보장이 비교적 잘 되었다고 인식되고 있는 교사직에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여교사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으나 직급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최근 여성이 결혼후에도 직장에 다니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여성들은 직장과 가사 노동이라는 이중 노동을 수행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어느 한 쪽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까지 놓이게 되면서 이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이중노동 현장은 어떠한가여성이 직장일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가사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를 이중 노동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가사일을 도맡아 왔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요즈음에도 이러한 전통이 적용되어 으례히 가사일은 여성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부담을 안게 된 여성들은 심지어는 직장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제 가사 노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인 육아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우리나라의 연령별 취업구조를 보면 M자형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20~24세의 여성들의 취업율이 가장 높고 결혼 적령기인 30세를 전후한 여성들의 취업율이 낮으며 다시 40~45세의 여성들의 취업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래프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전후해서 직장을 기피하며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무렵인 중년기에 들어서서 다시 직장을 찾는 경향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육아는 여성에게 있어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그러나 탁아 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있으며 이러한 방법도 여의치 않은 여성들은 가정부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아이가 어렸을 때 돌보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죄책감마저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사회과학| 2002.04.06| 5페이지| 1,000원| 조회(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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