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유물론과 관념론철학의 근본 문제에서 물질이 의식에 우선하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최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본 문제에 대해 대답을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다른 철학적 문제, 즉 철학자들이 자기 시대의 조건 및 결국 자신들이 대변하고 있는 사회세력의 이해 관계에 맞추어 제 문제들에 대한 주요 탐구 방향이 이론적인 측면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철학은 이데올로기적이며 당파적이다.1. 유물론유물론은 역사상 어떠한 형식을 취해 왔든지간에 일반적으로 자연과 물질 세계 및 물질이 의식에 대해서 일차적이자 근원적이라는 점, 사유와 의식은 물질에서 산출되며 규정된다는 점, 따라서 물질에 비해 의식은 이차적이라는 점등에서 출발한다. 유물론의 시원은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적 사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유물론의 절정을 대표하는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결정론적 세계관이다.유물론의 새로운 개화는 근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유물론은 중세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문턱에서 부상하는 부르조와지의 세계관으로 형성되었고 봉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되었다. 16,17세기에 등장한 이러한 유물론은 경험, 관찰, 실험 등을 인식 수단으로 삼고, 또한 봉건제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인 종교와 대결하기 위해 자연 과학과 손을 잡는 등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베이컨의 이론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뒤를 따른 사람 중에는 기계적 유물론에 대한 최초의 체계를 세운 홉즈와 모든 인식의 근원을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한 현실 세계의 경험에 두는 로크등이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창조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 무한한 실체에 대한 학설에 중점을 두는 유물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체계를 구축했다.영국의 유물론에 기반을 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은 혁명적 투쟁의 무기로서, 또한 프랑스 대혁명의 준비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주요 대표자로는 디드로, 엘베시우스, 홀 바하 등이 있 반해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에피쿠로스의 무신론을 이용하여 몰락하고 있던 로마노예제 사회의 국교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진보적인 사회적 시도를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무신론은 그 사회의 진보적인 사회계급들의 해방투쟁과 과학(자연과학)의 진보 및 철학적 유물론과 결합됨으로써 뚜렷이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2. 중세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와 근대 초기의 철학에 있어서 유물론적 사고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 유물론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가 제기한 와 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특히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근대 초기의 브루노(Bruno)에 의해 다시 거론되어 유물론적인 해결의 길로 나아갔다. 보편 개념과 실재하는 개별자의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논제를 그거로 하여 중세에는 이 불붙었다. 이 논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비판을 추종하는 자들, 즉 유명론자들의 견해는 중세 철학에서의 유물론적 사유를 대변한다.근대 자연과학의 발달은 신학적 세계관을 한층 더 흔들어 놓아 이 때에 나타난 범신론, 이신론은 기독교의 인격신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무신론이라 불리워졌다.1) 유명론유명론이란 보편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세철학의 진보적 조류이다. 일반적 의미로는 스콜라 철학의 주류인 실재론에 강력하게 반대해 온 조류를 가리킨다. 이 조류의 사회적인 받침은 중세도시에서 성장하고 있던 초기 부르주아적인 요소들이며 유명론은 전체적인 진행 과정으로 볼 때 유물론적 사유의 한 형식으로 본다.보편문제에 대한 유명론적 해결은 '보편자는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 오직 개개의 사물, 개체만이 실재하며 보편개념은 단지 구체적인 사물들 뒤에 있는 이름일 뿐이다.' 로 표현한다. 유명론의 결정적인 새로움이자 진정한 발전적 성격은 개별자, 개체를 한없이 강조하고 오직 이러한 개별자, 개체에만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점에 있다. 개별자를 완전히 강조하는 동시에 보편자를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우선 중세 카톨릭 교회의 존립기반을 파괴함으로 일체주의와 선교사등을 통한 역사적 시야가 확대된 것을 기반으로 생긴 비교신화학의 휴머니즘적 맹아들이 비교종교사로까지 발전한 사실이 전제가 되어있었다.두 번째로 기계론적 세계관과 감각론을 들 수 있다. 이신론의 토대를 이루는 인식론은 로크식의 감각론이 되며 이러한 인식론 위에 세워진 형이상학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상의 영향을 받는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됨으로 전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성이 증명이 되었고 이로 인해 신의 관념은 철저한 추상과정의 손에 맡겨지고 모든 의인적인 표상들을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유물론으로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새로운 세계 인식에 근거한 단순명료한 신관은 신의 관념에 위엄과 확신을 불어넣어주었고 이신론자들은 이 신관이 종교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이신론적 사상의 핵심은 신과 세계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성과 계시와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탐구로 모든 인식이 일차적으로 감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계시에게 보일 수 있는 최상의 호의는 계시가 인류역사의 경험들을 미리 선취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시와 이성을 일치시키는 로크식의 타협은 이신론에 결정적인 방법론적 자극을 주었고 이의 자극을 받은 영국의 애닛은 계시를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세 번째로 원시 기독교 이념과 역사적 인식을 들 수있는데 역사적 인식과 비역사적 자연종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신론에서는 이 양자가 결합되어있다.이로 인해 기독교는 그것이 띠고 있는 역사적인 모습인 교회의 틀을 벗어날 수 있을때와 교회와 원시기독교가 대립물에 가깝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자연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원시 기독교의 개념은 기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자연법칙적인 이념을 가지고 기독교의 구체적 모습을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며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3. 16, 17세기∼18세기초의 유물론1) 17세기 무신론과 18세기 무신론의 비교17세기 프랑스와 스튜어트 왕조 복론으로 기울어진다.2) 사회적 배경 및 특징이 시기는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마련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종교적 세계관과 교권주의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뚜렷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종교비판을 통해 기독교의 교의가 전적으로 불합리함을 논증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배와 세속 권력의 지배 사이의 연관, 즉 종교와 전제주의 사이의 연관을 밝혀 냈으며, 교회와 종교가 전제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발판임을 폭로했다.그리하여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봉건적인 절대 왕정을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왕위와 제단의 결탁이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을 무지 상태에 방치하며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악의 근원인 노예적 굴종으로 이끌기 때문이다.그들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안고 있는 종교적 도덕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이성적인 교육에 근거한 자연적인 도덕을 대립시켰으며, 그럼으로써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에 종속되어 있지 않는 것을 강조했고 인간이 자신의 힘에 대해 자각해야 할 필연성을 강조했다.3) 영향프랑스 유물론자들은 볼테르에 의해 대표되는 반교권적 이신론과 루소를 중심으로 한 평민 민주주의 운동과 같은 계몽주의의 다른 진보적 사조들의 대표자들과 더불어, 교회나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하층 계급의 적대적인 감정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하층 계급에게 통일적인 공격 방향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반봉건운동을 담당하고 있던 여러 세력들의 결집을 촉진시켰다.그들의 비판은 지배적인 봉건적, 교권적 이데올로기의 권위를 동요시켰고, 억압받는 계급의 의식 속에 유물론적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세계관이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또한 프랑스 유물론의 무신론적 이념은 18세기초와 19세기초의 독일인의 정신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비록 권력을 획득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반봉건 투쟁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 전통과 곧바로 결별하기는 했 기원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고 기독교의 기원을 고대의 영적 생활과 철학적 경향에 연관시켜 고찰했다.청년헤겔학파와 정통적인 종교 옹호자들 사이의 이러한 논쟁은 형식상 이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명확한 정치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절대왕정체제의 주춧돌 중 하나가 신의 계시로서의 종교에 대한 부정과, 그것이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의해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청년헤겔학파는 비판을 통한 현실 변혁이라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정치, 반동적 낭만주의 이데올로기, 프러시아 절대군주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그들의 철학을 급진 독일 부르조아지 철학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그러나, 관념론은 청년헤겔학파의 근본적 약점이었다. 헤겔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주관주의적 역사관으로 경도 되었고, 이론적 비판의 전능함을 굳게 믿고서 특출난 인물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인간 자아의식의 진보를 보증해주고, 결과적으로 모든 일반적 진보를 보장해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천적 행위, 특히 집단적 행동을 과소 평가하는 우를 범했다.Ⅳ. 마르크스의 초기 철학과 종교관마르크스는 1839년에 오늘날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 회의론 철학에 관한 노트』로 알려진 예비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일곱 권의 노트를 썼다. 이 노트를 통해서 마르크스는 철학이 종교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철학이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능력을 지닌 일종의 활동적 힘이라는 사실에 이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천상으로부터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이 지상에 집을 짓고 정착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전세계를 포용하기 위해 확장된 철학은 현상 세계를 거역한다"고 말한다.마르크스가 "평범은 절대정신의 전형적인 표현이다."라고 주장한 몇몇 헤겔 추종자들을 비판했던 것도 바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철학에 근거해서였다. 그는 철학이야말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