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서양 철학사에서 근대의 합리론 혹은 이성론의 출발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는 확실한 진리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이끌어 냈다는 데카르트. 그렇게 무슨 수학 공식처럼 암기했던 데카르트를 그의 초기 작품인『방법 서설』에서 만나게 된다니 약간 두려웠고, 신기하기도 하면서 부푼 기대로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일단, 데카르트의『방법 서설』이라는 책을 잘 이해할려면 이 책의 구성 및 작가의 의도를 알아야 할 것 같아 옮긴이(이현복)의 말을 읽어보았다. 이 책의 원제목은『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방법 서설』은 네 편의 글로 이루어졌지만 옮긴이의 의도에 따라 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을 제외한 서론 부분인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읽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책을 통해 누구를 가르치기 위한 논문 이 아니라 진리 탐구를 위해 자신이 설정한 방법과 그 결실을 보여 주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하고 있다.데카르트의 출판 동기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니 한결 부담감은 줄어들었지만 자서전의 느낌이 나는『방법 서설』첫머리는 결국 나로 하여금 한숨을 절로 나오게 하였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식(bon sens)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이성으로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 양식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일까? 굳이 데카르트가 이런 문장을 첫 구절에 쓴 이유는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머리 속은 복잡해졌고, 아무것도 알 길이 없는 나에겐 이해되는 대로 읽어내려 가자는 결론이 나왔다. 더불어 데카르트에 의하면 bon sens(양식)이란 것은 이 세상에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기에 나에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sens가 부여되어 있겠지 하면서 말이다.제 1부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학문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배웠던 여러 학문들이 다양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는 웅변, 시, 수학, 철학, 도덕, 신학, 법학 의학 등등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만 점점 발견되고 그동안 배웠던 학설에 많은 의심과 오류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찾게 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너무 굳게 믿어지는 것들을 의심함으로써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여 이성의 소리를 듣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취지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의 소리를 들을려고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방법 서설』을 쓴 것 같다.제 2부에서는 데카르트가 이성을 참된 인식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 분야에서는 논리학을, 수학 중에서는 기하학과 대수가 가지고 있는 난점들을 찾아보면서 어떻게 하면 확실하고 명증적인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의 네 가지 규칙들을 설명한다. 그 네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첫째, 명증적이고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명증성의 규칙)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부능로 나눌 것.(분해의 규칙)셋째,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합성의 규칙)넷째,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열거의 규칙)결국 그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로 삼아서는 안되며, 참된 것을 찾기 위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믿고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에 관해서 한번 깨끗이 제거하고, 그런 다음 더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전과 같은 의견이라도 이성의 수준에 적절하게 만든 다음에 다시 받아들이는 시도를 전개한 후 위의 네 작업을 통해 확실한 원리를 설정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제 3부에서는 데카르트가 이성에 의해 판단 내리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에도 행동의 확신성과 단호함을 추구하기 위해 끌어낸 도덕 규칙 네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첫 번째 격률은,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라 나를 지도하자는 것.두 번째 격률은, 행동에 있어서 가능한 한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런 의견이라도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라야 한다는 것.세 번째 격률은,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네 번째 격률은, 내 이성을 계발하는데 전 생애를 바치고 진리 인식에 있어 내가 규정한 방법에 따라 가능한 한 계속 나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어설프지만 내가 2, 3부 내용을 통해 데카르트가 제 2부에서는 이성을 통한 인식론을, 제 3부에서는 이성을 통한 실천론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으며, 그는 지와 행이 일치하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제 4부에서는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신 및 인간 정신의 현존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방법적 회의를 통한 결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철학의 제 일 원리가 나온다. 더불어 감각이라는 것이 불완전하다면서 회의론자 및 경험론자들을 비판한다.그렇다면 철학의 제 일 원리의 확실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보다 더 완전한 어떤 것인 신의 개념을 도입한다. 즉, 신에 의해 모든 물체나 지성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신이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이 신에게서 주입되었기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관념이나 정신의 관념은 결코 감각 속에 있지 않다는 확실성을 주장한다.이러한 형이상학적 토대들을 말하면서 다시 한번 데카르트는 이성만이 명증성을 지니고 있지 상상력이나 감각이란 것이 명증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제 5부에서 데카르트는 제 일 원리들로부터 연역하여 다른 것들의 진리를 계속 추구하고자 한다. 특히 자연학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인간의 영혼과 짐승의 영혼간의 차이를 논의한다.신이 이성적 영혼을 만들고, 이것과 신체를 결합시켰다는 가정 하에 인간이 탄생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부학 내용들이 등장하고, 심장의 운동이나 근육 운동에 대한 설명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내가 그나마 이해되는 것들만 요약해 본다.
Ⅰ. 서론프로타고라스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면 세상에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生과 死」라는 진리 앞에서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어떤 절대적인 존재자를 찾게 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지, 전능, 전선한 그리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계시, 기적의 경험 등으로 혹은 단순한 믿음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교에 귀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무신론자에겐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랜 철학 역사 속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 논증이 필요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은 이 보고서에서 이러한 신앙과 이성 사이의 접촉 시도인 신 존재 논증의 대표적인 3가지 논증 -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 에 대해 알아보고 각각의 논증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탐구해보겠다.Ⅱ. 본론1.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 반박완전성 개념에 의한 신 존재 증명은 11세기 안셀무스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이 논증은 가장 오래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 받는 논증이다. 존재론적 논증은 안셀무스의 저서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저희들은 당신이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서, 그것이 어찌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분명히 이렇게 어리석은 자가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에 대해서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그는 그가 들은 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그가 이해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 우리가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는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에도 역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현실에도 아울러 존재하는 것이 더 위대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가 단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모순된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가 마음속에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박종원 지음, 『서양철학의 이해』, (서울 : 한울 아카데미, 2000), 64쪽.안셀무스의 논증은 그가 살고 있던 동안에도 이 증명은 수사 가우닐론에게 예리한 반박을 받았다. 가우닐론은 두 가지 중요한 반대를 제기했다. 첫째로, 우리는 신의 실존을 추론할 신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사유 바깥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유 속의 실존에 의존할 수 없다. 사실상 사유의 대상으로 실존하는 것은 참된 실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실재가 아닌 것, 혹은 심지어 불가능한 대상의 양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대상들은 사유 속에 있지만, 사유 바깥에 실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 대상들은 그 대상을 파악하는 지성 속에 있는 개념에 불과하지, 전혀 실재가 아니다.그러면 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의 경우는 달라야 하는가? 만일 우리는 대양 속에 어딘가에 사라졌지만 접근할 수 없는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복된 섬들에 대한 관념을 생각한다 해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 땅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라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에티엔느 질송 지음, 김기찬 옮김, 『중세 철학사』, (서울 : 현대 지성사, 1997), 197쪽.이러한 반론은 후에 칸트가 관념으로 있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은 다르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100만원이 만원의 100배라는 것은 관념으로 있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과는 같다. 그러나 100만원일지라도 관념으로 있으면 밥을 못 사먹고, 실제로 있다하면 밥을 사 먹을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한 예를 들어서라도 우리는 신에 대한 관념이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념이란 것에 반박할 수 있겠다.2.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 반박신의 존재성을 증명하는 두 번째 방식은 신을 모든 현상들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논증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스콜라 학파의 창시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 즉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과정 도식을 사용하여, 운동의 시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 제일운동인에 도달해야 하는 바, 이것이 신이다. 라고 한다.{) 박종원 지음, 『서양철학의 이해』, (서울, 한울 아카데미, 2000), 57쪽.이러한 내용이 좀 더 이해하기 어렵다면 사물들 자체를 고찰해 봄으로써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 이해해 보자.감각적 사물에 운동이 있듯이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런데 운동의 원인에 대하여 단적으로 이야기되어 온 것을 또한 원인 일반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스스로의 능동인이 될 수 없으니, 스스로 산출하기 위하여 그것이 결과로서의 자신에 대하여 원인으로 앞선 것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높은 것이 좀 더 낮은 것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인과의 질서에서 무한히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에 첫 번째 원인이 없으면, 중간 원인과 마지막 원인도 있을 수 없다. 즉 무한한 원인의 계열이 일관해서 이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라고 부르는 맨 첫 번째 능동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능동인에 의한 증명이다.또 우연성에 의한 증명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물들은 끊임없이 생성한다. 사물들 가운데 더러는 발생되고 있고, 반면에 더러는 소멸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실존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런데 필연적인 것은 존재하기 위하여 원인을 필요치 않다. 그것은 필연적이므로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가능적인 것은 스스로 실존을 맡을 수 없다. 그리고 오직 사물들 속에 절대적으로 가능서안 있다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무엇이 있다면 그 실존이 필연적인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필연적 존재가 여러개가 있다면, 동일한 이유로 그들의 계열은 틀림없이 유한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최초의 필연적 존재가 있고, 모든 가능한 존재를 이 첫째의 필연적 존재 때문에 실존하며, 모든 사람은 이럴 일러 신이라 한다.{) 에티엔느 질송 지음, 김기찬 옮김, 『중세 철학사』, (서울 : 현대 지성사, 1997), 513쪽.근본적으로 보자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증명과정들은 한 가지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증명에 있어서의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은 인과 명제와 무한한 후퇴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명제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은 세계의 원인이다. 라는 증명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우주론적인 논증, 운동에 의한 논증, 인과관계에 의한 논증이라 불리어 진다.우주론적 증명에 대해 칸트는 이러한 논증은 존재론적 논증을 은밀히 이용하고 있다고 보고 반박을 가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우연적인 것에서 존재의 원인에로 나아가는 선험적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감각경험 세계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 세계 밖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본다. 칸트의 말을 빌려보면 우연적인 것이라는 순수 지성적 개념은 인과성의 개념처럼 종합적 명제를 산출하지 못한다. 인과율은 감성계 이외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것을 사용할 하등의 기준도 없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박석희, 「칸트의 신존재 증명과 토마스 철학의 초월적 방법」, (형이상학 제1호, 1992), 9쪽.
Ⅰ. 서론철학의 문제 중 가장 본질적인 물음은 아마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면 정신과 육체는 또 무엇인가? 그 양자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것은 독립된 실체들인가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심리철학의 중심적 질문이지만 바로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핵심적 질문이기도 하다. 본인은 이러한 심신문제를 본격적으로 철학 문제로 제기한 17세기 초반에 살았던 데카르트의 심신이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인간관데카르트는 존재하기 위하여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을 실체(substantia)라 부르고 신, 정신, 물체를 3실체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신은 무한 실체이고, 나머지는 유한 실체 혹은 2차적 실체이다.{) 강대석, 『서양근세철학』, (서울 : 서광사, 1985), 137쪽.여기에서 본인은 무한 존재의 영역인 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의 영역인 두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유한한 존재의 영역에서 첫 번째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주어져있는 것은 정신을 가진 실체이다. 사유실체(res cogitensa) 즉 정신은 사유가 그의 유일한 본질인 그런 실체이다. 사유는 우리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을 말한다.그런 정신은 어떠한 부분들로 분해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전체적인 것으로만 이해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영혼의 절반이라는 것을 결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고, 정신 전체가 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들이 정신의 부분들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인간 정신은 우유성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순수한 실체로서 본질상 불멸이다.정신은 결코 물질의 힘으로부터 연역되어질 수 없는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징은 말(언어)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나에 의해 가장 손쉽게 파악되면, 그것에 대한 판단은 절대적으로 참(불가오류적)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장이 이제 나의 정신에만 관계될 따름이고 또 그 정신만이 보고 걷는 것을 느끼거나 사유하는 기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효범, 『심리철학의 근본문제』,(서울 : 소나무 철학문고, 1987), 82~83쪽.정신과 나란히 있으면서, 정신의 밖에 있는 유한한 실체의 다른 커다란 영역은 물체의 세계 즉, 연장하는 세계다. 깊이, 폭, 길이로 이루어진 연장이 본성인 그런 연장된 실체(res extensa)는 상이한 부분들이 우유적으로 어떤 형태를 이루기 때문에 소멸되고, 분해 가능하며, 일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크기·소리·맛·단단함·따뜻함 등의 성질들도 물체 속에 있다고 직접 생생하게 감각하고 기억한다.인간의 몸도 본성상 물체와 똑같다. 인간의 몸은 하나의 구체적 물체이기 때문에 물리적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며 기계와 같다. 그러한 육체에 관한 판단은 어떤 판단이든 지간에 물체에 관한 판단처럼 인식론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있다 또는 내가 걷고 있다. 는 판단은 그것이 시각 작용이나 다리로 행해지는 행위에 의해서 내려진 것이라면 언제나 의심을 품을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능성이 있다.{) 같은책, 82쪽.이상의 논의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인간은 두 가지의 서로 분리된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몇몇의 철학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정신을 육체로 또는 육체를 정신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두가지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2.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관계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두 전혀 다른 실체가 상호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즉 내가 발에 고통을 느낄 때, 이 감각은 발에 퍼져 있는 신경에 의해 전달된다는 것을 자연과학은 내게 가르쳐 주며, 이 신경들은 발에서부터 뇌에까지 끈처럼 퍼져 있어서 발에 있는 신경들이 당겨지면 그와 동시에 그 신경들이 시작되고 끝나는 머리의 부분을 당기며, 마치 이 고통이 발에 있는 것처럼 자연히 조직한 어떤 움직임을 뇌의 그 부분에서 일으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시고 싶을 때에, 그것으로 인해 목구멍에 어떤 갈증이 생겨나고, 이 목마름은 그의 신경들을 움직이고 정신에게 목마름의 느낌을 갖게 한다.{) 같은책, 84쪽.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당연한 의문이 제기된다. 만일 인간이 두 개의 다른 실체 - 하나는 연장되어 있으나 사고하지 않는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되지만 연장되지 않는 실체이다 - 가 상호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러한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가장 완전한 설명은 《정념론》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영혼이 전체 육체와 연결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영혼 안에는 다른 모든 부분들보다도 자신의 기능을 더욱 특별하게 발휘하는 어떤 부분이 있다. 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은 심장이나 두뇌 전체가 아니라 바로 두뇌의 각 부분 중 가장 안쪽에 들어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은 유일한 기관인 송과선(pineal gland)이다. 송과선은 두뇌의 중앙, 동물적 정신이 두뇌와 이어지는 부분에 파이프처럼 생긴 신경을 통해서 매달려 있다. 이것은 근육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한편 안쪽, 바깥쪽으로 흐르는 동물적 정신의 방향에 맞추어 감각적 자극을 받아 움직인다.예를 들어 만일 어떤 동물이 우리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다면 그 동물의 육체에서 반사된 빛이 우리의 두 눈을 통해서 들어와 두 개의 상을 형성하고, 이 두 개의 상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신경을 통해서 여러 개의 구멍이 나 있는 두뇌의 내측 표면에 닿게 된다. 그러면 동물적 정신이 이 구멍을 가득 채우게 되고, 이 상들은 동물적 정신이 둘러싸고 있는 가느다란 선에 이어진다. 그러면 이런 상 가운데 하나를 형성하는 운동이 일어나 그 선의 한 점에 도달하며, 또 다른 상도 마찬가지로 같은 점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이 동물의 어떤 한 부분을 나타내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두뇌 안에서 두 개의 상이 그 선을 통해서 하나의 상으로 형성되며, 이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혼으로 연결되고 우리가 이 동물의 형태를 볼 수 있게 된다.{) 안쏘니 케니 지음, 『데카르트의 철학』, 김성호 옮김, (서울 : 서광사, 1991), 241~242쪽.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유명한 그러나 약간 우스운 해결방법인 정신과 영혼의 자리 인 송과선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생리학적인 재간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고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신과 송과선 사이의 상호 작용도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 작용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Ⅰ. 서 론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고대 철학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며 중세는 물론 근세를 거쳐 현대에까지 서양 철학 사상의 원류를 형성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 의해 철학의 기초가 세워졌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의 체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서양 철학 전반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큰 두 명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해 보겠다.Ⅱ. 본 론첫째, 그들은 고향이 서로 달라서 그로 인해 철학적 출발이자 목표가 달랐다.플라톤은 이젠 황금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 들어가는 아테네(Athenae)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남쪽 칼키디키 반도에 있는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Stageira)라는 곳이였다. 플라톤의 철학은 붕괴해가는 그리스 도시 국가인 아테네를 구하려는 노력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polis 중심인 다분히 민족적 성격을 띄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게이라는 마케도니아 지배에 들어가 버려서 흔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고향 없는 자의 철학'이라고도 불리워지기도 했다. 이런 고향 없는 자의 철학은 cosmopolis적인 세계 시민적 성격으로 출발하게 된다.둘째, 플라톤은 개념의 객관화를 모든 것들이 동경하는 피안으로 옮겨 놓았음에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하는 사물들 자체에서 개념의 현실화를 발견한다.) 쿠르트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강영계 옮김, 1985, 73쪽.플라톤이 주장하기를 인식의 대상들 즉, 정의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만 지각의 세계에 있어서는 없다고 한다. 그것들이 존재함은 공간과 시간 밖의 관념적인 세계에 있어서다. 이것들이 그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들(Ideas)'이다. 그리고 그것은 형상 또는 본(pattern)을 의미한다. 요즈음 우리들이 생각하는 idea(관념)란 말은 우리들의 마음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연상시키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이데아들은 충만하고 온전하며 독립적인 존재이다.) W. K. C. 거드리, 『희랍철학 입문』,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1992, 109쪽.플라톤은 이데아 세계와 사물들 세계가 따로 있다고 보면서 이데아 세계는 심안(心眼)으로만, 사물들 세계는 육안(肉眼)으로만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데아는 개별적 사물을 초월해 있다고 보는 플라톤의 입장을 '실체 형상설'이라고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현실 저편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구하지 않는다. 보편자는 개별물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물 속에 존재한다. 개별물 속에 존재하는 보편자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라 부르고, 본질을 자기 속에 실현하면서 존재하는 개별물을 '실체(ousia)'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형상은 단지 개체 - 우리 눈앞에 있는 물체 - 안에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사고 방식을 철학적으로는 '개체 형상설'이라고 한다.) 고슈카 슈헤이 지음, 『함께 가보는 철학사 여행』, 방준필 옮김, 다정원, 1997, 92쪽.이렇게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에서 실재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극히 초월적이고 추상적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한 개념인 형상은 현실적인 바로 이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형태라고 생각하여 경험적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Raphaelo는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서 이 두 사람의 철학적 차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플라톤의 손은 위로 향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은 위로부터의 철학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래로부터의 철학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셋째, 이렇게 철학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에 접근하는 철학 방법과 도구 과목 또한 달랐다. 플라톤은 직관과 사유를 통한 접근과 운동·변화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중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들에 대한 직접적 설명을 제공하는 경험 과학 중 생물학을 중요시하였다.플라톤은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 중 수학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수학적 사유는 이데아를 사유 대상으로 하되 감각적 대상의 도움을 방법론적으로 요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학적 사유는 완전한 학적 인식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데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학교인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여 필수 과목을 기하학으로 하였다.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관심을 쏟았던 자연 과학 분야는 생물학이였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생물들이 생명이 없는 물체들에 비해 형상·목적의 역할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증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병수·우기동,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돌베개, 1991, 105쪽.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인 Nikomachos는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어머니인 Phaistis도 의사 집안의 딸이였다. 이러한 집안 환경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스럽게 경험 과학 특히 생물학에 관심을 보였다.종합하여 말하자면, 플라톤이 주로 자연 현상의 이해에 수학을 응용한다는 생각에 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연구의 가치를 옹호하고 그것을 실제 연구로서 보여주려고 했다.) 같은 책, 103쪽.넷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중세 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플라톤의 이데아는 교부철학의 신(神)이란 개념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였다. 교부 철학에 있어서 신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선(善)의 개념이였는데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똑같은 개념이였다.반면에 스콜라 철학에게 주요 과제는 교리의 철학적 체계화였다. 그래서 그들이 이어받은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은 계시, 기적으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합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이용했다. 신의 존재 증명 중 '우주론적 논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가 적용된다. 부동의 원동자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고 모든 것을 소멸하는, 그러나 자기는 움직이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자'이다. 이런 부동의 원동자는 세계를 일관하며 목적을 의식하고 세계를 이끄는 보편 정신으로서 최고의 형상으로 궁극적으로는 신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다섯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이러한 저서의 표현면에서도 그들은 서로 매우 달랐다.플라톤은 인간의 문자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차선책으로 대화 형식의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플라톤은 결정적인 대목에 들어서면 비유, 상징, 신화 같은 표현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담아내려고 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철학의 핵심이 되는 이데아론을 설명할 때도 그는 태양의 비유, 동굴의 비유, 선분의 비유, 그 밖에 여러 신화들을 접목시켜서 나타냈다.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냉철한 산문으로 저서를 썼다. 이런 면이 두드러진 책은 모든 학문의 도구이자 기본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organon』이라는 오늘날 말로 쓰자면 '논리학' 정도로 표한할 수 있는 저서이다.여섯째, 플라톤은 현실에서의 교육적 실천에 대해 관심이 많아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387년에 아테네의 교외에 세워진 이 학교는 플라톤이래 529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교적 사상의 온상이라고하여 해산을 명령받기까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은 아이니컬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카데메이아는 오늘날의 아카데이의 어원으로 종교적 색채가 짙었던 피타고라스 교단에 비교하면 최초의 학문 연구 기관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아카데메이아는 플라톤이 죽은 뒤에도 1000년의 역사를 유지하며 유럽의 지적 전통의 시작점이 된다. 그곳에서 실시된 교육의 이념을 플라톤은 '혼의 방향 전환'이라 했다. 이 현실 세계로부터 이데아의 세계로 청년의 영혼을 돌리는 것이 아카데메이아의 교육 목표였던 것이다.
제 1장 난세의 철학1)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4세기의 고대 중국, 이른바 전국시대.장자 철학은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찬 극한 상황에서 출발.2) 장자에게 있어서 사후 세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인간이란 그저 저절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하나의 생명.인간을 창조한 자는 자연의 도⇒ 철저한 현실주의, 현세주의 철학3) 장자에게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힘을 초월한 초월적인 자연 의 도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자연의 도는 인간의 생활 태도와 무관하면서도 자 연의 도는 인간 존재와 근원적인 관계를 갖는 비인격적인 초월자.4) 장자는 천지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 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인간 존재를 전 우주적 규모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파악 속에서 인간의 합 리와 자유를 추구해 나간다.5) 장자의 철학은 근원적인 하나(一)를 문제 삼는다.차별성이 아니라 동일성을, 대립의 세계가 아니라 조화의 세계를, 다수가 아니라 하나를, 작음이 아니라 큼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려고 한다.6) 분석적, 추상적인 사고보다는 전일적, 구체적인 사고를 중요시하고, 이론보다는 생활을, 인식보다는 체험을, 생명없는 질서보다는 생명있는 무질서를 추구한다.제 2장 참혹한 현실장자는 송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위기, 나아가 국가 그 자체의 존립 위기를 감득했다. 또 송나라를 둘러싼 나라들, 예를 들면 노·제·위·진·초 같은 나라 역시 공포와 기만, 그리고 살육으로 가득차 있었다.지금의 임금은 젊은 나이에 독단적인 행실로 함부로 정치를 하면서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백성들도 함부로 부려 죽는 이가 나라에 가득하며, 들이나 늪은 불을 놓은 듯 차버려 백성들이 갈 바를 모른다. - 《장자》인간세편장자는《장자》인간세편에서 지리소의 자유로 행복을 칭찬하는데 이것은 불행히도 불구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고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보다 행복한 현실을 풍자함과 동시에 불구자가 권력을 위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음으이 꺼져가는 전국시대 민중의 가혹한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제 3장 위기의 인간대자연의 세계에는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고 평화와 질서가 있다. 대자연의 세계에서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데 이러한 사계절의 운행은 한 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질서정연하게 보였다. 또 그 질서 가운데서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를 유지하고 크나큰 조화를 유지한다. 이러한 대자연의 리듬은 아름다움과 찬란함으로 가득 차 천지 우주 사이를 운행하고 있다.그런데 인간의 세계는 투쟁과 살육, 죽음과 공포로 떨고 있다. 무엇인가가, 혹은 어딘가가 잘못되었다고 장자는 생각했다. 인간의 세계에는 조화도 없고, 질서도 없으며, 아름다움도 찬란함도 없다. 장자가 보기에 인간 세계는 그저 혼란과 무질서, 피범벅이 되는 투쟁과 추한 대립만이 존재하였다. 군주를 둘러싼 정치가들의 분열과 항쟁, 전장의 공명을 다투는 무장들의 불화와 고집, 학자는 학설의 시비를 다투어 자기와 다른 사람은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고, 장사치들은 부의 크고 작음을 다투어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또 장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함, 까닭 모를 무서움에 경탄하고, 그 안에 감춰진 인간의 광란과 파멸의 위험성을 섬뜩하게 느끼며 응시했다. 인간의 마음만큼 위험한 것도 없고, 그 마음을 모든 인간이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만큼 위험한 존재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장자는 인간의 마음만큼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 마음의 밑바탕에는 비합리적인 감정이나 맹목적인 충동이 깊숙이 숨어 있어서 그것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용솟음친다. 또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도 더 연약하고, 사랑과 미움의 무정형적인 교차, 그리고 신뢰와 적의의 변전을 장자는 말을 사랑하는 남자 의 비유로 설명한다.장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의 복잡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밖, 혹은 위만 쳐다보는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형식적인 예의 규범을 강요하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인간이 본래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학파의 선생들을 예의에는 밝지만 사람의 본성을 아는 데는 어둡다. 라고 평가한다.장자는 인간 욕망의 위대성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는 또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욕망을 갖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장자는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제일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정된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아무리 강렬하다고 할지라도 일시적이며, 또 아무리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을 누리는 기쁨은 그것을 잃는 두려움에 의해 위협받고, 그것을 누리는 편안함은 그것을 빼앗길 때의 그 허망함에 의해서 복수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利)를 찾아서 그리고 또 권력을 찾아서 밤낮으로 골몰한다고 장자는 생각했다.인간이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과 득의와 오만 속에서 살아가는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과 끊임없는 실의와 걱정과 절망의 깊은 바다 속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인간의 양면성을 장자는 꿰뚫어 본 것이다.또 장자는 인간의 욕망이 그러하듯이, 지력(智力)의 작용 역시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위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력은 그 소산인 가치관으로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속박하고 왜곡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원래부터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하나의 가치 기준은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을 한정하고 일면화한다. 여기에서 근거 없는 인간의 우월감과 부당한 열등감. 인간은 이 속에서 잘난 체하고, 절망하고, 존대 받고 그리고 비굴해진다고 보았다.우리의 삶은 언젠가 종말이도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다. - 《장자》대종사편장자는 지력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여 자기의 삶과 이 세계의 근원에 가로놓여 있는 우연의 문제를 생각했다. 장자의 자연과 운명에 관한 사색이 여기에서 전개된다. 그는 지력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으로 지력 그 자신의 노력으로 그 극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그 유한성을 우연의 문제로 응시하고, 그 응시 위에서 풍족한 자기 삶을 살기로 결의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이며, 이 죽음 때문에 한정된 자기 삶을 가장 잘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관심사였다.제 4장 미혹된 인간장자는 논의라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비판하고,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 논쟁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성 즉 상호부정에 의한 진리의 상대화에 주목한다.옳다는 주장이 있으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따르고, 그렇다는 주장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생긴다. 만일 옳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다면, 옳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과 다르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 그 끝없는 순환, 곧 변화를 되풀이하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해결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장자》제물론편예의의 강조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일체감을 잃고 대립 의식을 가지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정말로 위대한 사랑은 스스로 사랑을 의식하지 않는 사랑이다.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 또한 의식되지 않는 사랑으로써 인민을 다스린다. 의식되지 않는 사랑만이 빼앗는 일이 없고 해치는 일이 없으며 의식되지 않는 사랑만이 잃어버리는 일 없이 영원하다고 장자는 생각한다.그리고 공자학파가 규범으로 세운 효제·인의 등의 도덕은 어느 것이나 할 것 없이 무리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도덕성을 손상하고 해치는 것으로, 존중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장자》천운편에서 말하고 있다. 또 장자는 원래 책이라고 하는 것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거기에 기록된 글자 자구 한하나가 아니라, 그 자구가 의미하는 내용이라고 해야하는데 즉, 다투고, 싸우면서 자신을 소모시키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장자는 이런 사람들을 물(物)화된 사람들 이다. 이들은 세속의 가치관에 자기를 맞추고, 세상의 풍문을 끊임없이 염려하는 인간은 쉽게 유행의 노예가 된다. 장자는 이러한 사람을 수릉 소년의 비극으로 표현한다.세상 사람들은 눈앞의 현상적인 차별상에 사로잡혀서 그 본질적인 혹은 전체적인 혹은 전체적인 동일성을 예리하게 간파해 가는 예지가 부족하다. 이들은 정신의 지대한 세계를 보지 못하고, 근원적인 하나의 세계를 듣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상의 표면적인 차별과 대립을 고집하고, 언어수사의 말초적인 변화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그래서 장자는 조삼모사 같은 어리석음을 지닌 인간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진실재의 세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제 5장 진실재의 세계1. 만물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변한다.장자는 만물을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변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물로 하여금 사물이 되게 하는 것, 일체존재로 하여금 일체존재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이법은 이름과 형상을 갖기 않으며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일체 존재의 근원의 근원에 작용하는 이법을 잠정적으로 이름 붙여 道 라고 한다면, 도 란 만물이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변하는 것을 일컫는다.사물 과 도 는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다. 더구나 도는 사물을 떠나서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체만물을 일체만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스스로 그렇게 작용이며 말로 설명할 수도, 그리고 인간의 지력으로 인식할 수도 없다.2. 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도, 즉 진실재의 세계를 이 현실계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심원하고 오묘한 형이상학적인 다른 세계라도 되는 듯 생각한다. 그러나 초월적인 도는 이 현실세계에 있으며 닭이 닭으로서 울고 개가 개로서 짖는 우리 눈앞의 현실세계 속에 있다.3. 도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일체만물은 각각 이(理)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