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 콜럼버스(1492 Conquest of Paradise, The,1992)1. 영화소개{감독 : 리들리 스콧출연 : 제라르 드빠르디유 / 아만드 아산테 / 시고니 위버 / 로렌 딘장르 : 서사 / 어드벤쳐국가 : 미국 / 스페인 / 영국 / 프랑스제작 : 알랭 골드만 / 리들리 스콧부가사항 : 154분,15세 이상 관람가,1992-12-24 개봉줄거리 : "500년 전, 공포와 미신에 휩쓸렸던 스페인은 왕정과 무자비한 종교 재판으로 꿈을 갖는 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이 절대 권력에 강력히 도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운명적인 힘에 이끌리듯 어둠의 바다를 횡단하였다. 명예, 황금, 그리고 더욱 위대한 주님의 영광(and The Greater Glory Of God)을 찾아서." 서쪽 바다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에스파냐(스페인) 왕국으로 이민 온 이태리 출신 탐험가 콜럼버스(Columbus: 제랄드 드빠르듀 분)는 그의 어린 아들인 페르난도를 데리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의 모습을 보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자신의 의지를 더욱 불태운다. 15세기말 유럽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영향을 받아 아시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가야 하는 뱃길로는 너무 멀어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 바다로 항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구는 평평한 땅이라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며 그곳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공포와 미신이 난무했고 기존의 권리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의 탁상공론까지 콜럼버스의 제안에 제동을 건다. 당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합병된 에스파냐를 통치하고 있던 이사벨라 여왕(Queen Isabel: 시고니 위버 분)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지원하여 1492년, 드디어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3척의 배로 항해를 시작한다. 극심한 공포와 난관을 헤치면서 예정의 2배가 넘는 2개월여 동안 서쪽으로 항해하던 콜럼버스 일행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과나하니(산살바도르) 섬을 발견하고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 생각하고 식민지로서 개척한다. 영웅이 되어 돌아온 자신을 시기하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확신하는 본토 대륙을 발견하기 위하여 2번째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신세계를 건설하던 중 시련이 닥친다. 원주민과의 갈등과 동행한 귀족 목시카(Moxica: 마이클 윈콧 분)의 반란과 더불어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그의 신세계는 황폐화된다. 그 존재를 확신하고 있던 본토는 엉뚱하게도 다른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하였다는 소식도 접한다. 이를 빌미로 반대파들의 모함을 받은 콜럼버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사벨라 여왕의 도움으로 석방된 콜럼버스는 마지막 항해를 간청하여 여왕의 허락을 받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와 함께 마지막 탐험에 나선다. 페르난도가 남긴 아버지에 관한 자서전으로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았다. 1502년 페르난도(Fernando)와 함께 마지막 신세계(the New World) 항해에 오른 콜럼버스는 파나마에 도착하여 인디언으로부터 새로운 바다, 태평양(the Pacific Ocean))의 존재를 알게 된다. 페르난도가 쓴 전기로 콜럼버스는 역사 속에서 제 위치를 찾게 된다. 19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후손이 스페인 왕실 해군의 제독이 되다." 실제 삶이 꿈보다 더 상상의 나래를 편다(Life has more imagination than we carry in our dreams...)"서론. 지리상 발견에 관한 나의 의견인간의 역사에서 과연 자신이 속해있는 관념에 매인 채로 할 수 있는 발전이란 얼마나 될것인가? 그 중에서도 자기 반성과 또 끝없는 탐구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것들도 많다. 하지만 정해진 틀에서 잡혀진 주제에 너무 충실한 채로 만들어진 발견이란 대개 그 관념자체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발견'했다고 한다. 어떠한 관념에 싸인 이런 발견보다는 주제를 벗어난 전혀 모르던 현상에서 착안한 '우연한' 발견이 실제로 우리인류의 역사를 바꾸어왔고 진보시켜왔다. 우연한 발견이란 그래서 '그 사실에 대한 무지'가 전제된다. 그렇다면 봉건제에서 벗어나고 있던 근대와 다시 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인류가 그 역사발전의 발판으로삼았던 '우연한 발견'은 무엇이었나.? 그건 바로 아프리카 저편의 기독교인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지극히 봉건적인 무지에서 나온 거의 망상에 가까운 몽상가와 심각한 지리적인 무지의 소산으로 빗어진 오류 때문에 그것을 증명해야 했던 한 인간이 이루어놓은 '지리상의 발견' 일 것이다. 이런 과실에 의해 태어난 발견은 이후 그들 발견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상업혁명을 이루게 되고 이런 결과는 근·현대사회로 넘어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지리상의 발견은 우리에게 되살펴져야할 의미가 있는 것이다.대발견의 시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여기서는 한정된 지면이기 때문에또 신항로 개척이 사람들의 그 인식의 본격적인 변화를 초래했고 그 때문에 이후 지리상의 발견까지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점에서 신항로 개척의 초기시대 즉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항로개척시대를 그 내용으로 잡고 이를 서술하기로 한다.본론. 지리상 발견의 동기와 결과사회적 동기: 15세기의 탐험들을 이끈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던 동방무역에 대한 어떠한 위협이기보다는 오히려 이탈리아의 독점을 깨뜨리려는 대서양 연안국들의 의도였다.정치적 배경: 당시 유럽제국에서는 국왕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어 경제 경쟁도 모두가 국가단위로 행해 지고 있었다. 경제 경쟁은 격심하게 이루어져 유럽 이외에서도 시장을 구하여 유럽경제와 결부할 필요가 있었다. 또 절대왕정은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국왕은 적극적으로 탐험사업을 진행하여 탐험가에 원조를 하였다.경제적 동기: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가 동지중해 지역에 진출하여 동서 무역로가 집중되는 서남 아시아 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동양과 유럽과의 무역중개자와 달리 그 영내를 통과하는 상품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 결과 향료와 견직물, 그 외 모든 유럽인의 생활 필수품이 되었던 동방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의 가격이 뛰어올랐다. 그래서 지중해 동부를 통과하지 않고 동방과 직접거래를 하기 위해 신항로 개척이 절실히 요구되어 이것이 지리상의 발견의 직접동기가 외었다,가격혁명과 상업패권의 교체: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비로소 유럽을 알 수 있게 된 남아메리카 및 멕시코는 풍부한 금과은 특히 은을 많이 매장하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은 원주민을 강제적으로 시켜서 이것을 채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1. 영화 에 대하여...{제작년도 : 1995년제작국가 : 미국형식/등급 : R / 15상영시간 : 177분감독 : Mel Gibson출연 : Mel Gibson, Sophie Marceau줄거리13세기 말엽,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잉글랜드는 왕권을 요구하며 스코틀랜드에 포악한 정치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폭정으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잇달아 죽음을 당하게 되고,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 멜 깁슨 분)는 폭정을 피하여 고향으로 멀리보내어져 양육된다. 그가 성장하여 고향에 돌아왔을때 월레스의 조국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생크(Longshanks - King Edward I: 패트릭 맥구한 분)의 핍박과 탄압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월레스에게는 그에게 운명적인 사랑의 여인인 머론(Murron: 캐서린 맥코맥 분)을 만나게 되고 그와 결혼하나, 잉글랜드의 폭정에 머론은 잔인하게 처형된다. 월레스는 머론의 죽음을 복수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 둘씩 모여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모아 용맹과 투지로 무장한 저항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잉글랜드는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오고 역사적인 스털링 전투에서 월레스의 군대는 잉글랜드에 큰 승리를 거둔다. 월레스 군대의 용맹함에 당황한 롱섕크는 휴전을 제의하게되고, 롱섕크는 왕자 에드워드(Prince Edward: 피터 핸리 분)의 무기력함에 공주 이사벨(Princess Isabelle: 소피 마르소분)을 화해의 사절로 보내게 된다. 비록 정략적인 만남이었지만 이사벨은 월레스의 애국심과 용맹함에 매혹되고, 그녀는 잉글랜드의 침공 사실을 월레스에게 알려주기 이른다. 폴커크 전투에서 두 왕조는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기사들의 충성심은 이미 잉글랜드에 돈으로 매수된 빛바랜 충성심으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고, 목 라틴어의 feudam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에는 그 말이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주군에게서 부여받은 영지를 가리켰다. 주군과 봉토보유자 사이의 관게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봉토보유자는 영주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즉, 그는 특정한 충성의 서약으로 영주에게 매여 있었다.이 봉건제의 출현을 논의 하는데 있어서, 봉건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기원을 살펴볼필요가 있다. 봉건제와 관련된 모든 관행은 게르만족 침입의 시대로 소급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게르만족에게서 기원한 것도 있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기원한 것도 있다. 우선 충성의 서약으로 맺어지는 봉신과 주군과의 관계는 약육강식의 불안한 사회에서 생활해야 했던 게르만의 종사제(從士制)에서 기원한 것도 있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기원한 것도 있다. 반면 에 특정한 봉사에 대한 대가로서의 조건부 토지보유는 로마의 토지법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로마시대의 토지제도는 라티푼디아(대토지 사유제)였으나 로마 말기 귀족들이 노예노동력의 결핍으로 대농장의 농토를 경작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농민에게 소작을 주어 경작하게 하는 콜로누스(colonus)라는 일종의 새로운 토지경작제도가 생겨났다. 그 결과 '장원'이라는 토지단위가 생겨났다.그리고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이들 콜루누스에서 농업노동자들이 장원을 떠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장원인 또는 중세의 농노가 되었다. 프랑크족 치하의 갈리아 지방에서는 그렇게 보유된 토지를 은대지라 불렀고, 9세기 이후에는 봉토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였다. 봉건제도는 칼롤링왕조가 시작될 때에 프랑크 왕국에서 그 기틀이 이루어졌다. 찰스 마르텔이 실권을 장악하던 8세기 초 프랑크족은 처음으로 기병을 대규모로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등자 등의 장비들은 너무나 값비싼 것이었고, 또 이 장비를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했다. 따라서 기병이 되려면 말과 장비를 갖출수 있을 만큼 부유한 동시에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므로 찰스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토지를 더욱 강력한 유력자에게 기탁하고, 그것을 봉토로 되돌려 받으면서 봉신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리하여 9세기에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로 얽혀진 위계 질서가 발달하게 되었다.봉건사회의 구조1) 토지제도 : 이 시기에 진정한 토지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모든 토지는 신의 소유물이었으며, 인간은 이를 사용할 수는 있으나 매각할 수는 없었다. 토지에는 봉사의 의무를 포함한 것과 거의 의무가 없이 자유로운 것의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전자는소유자가 영주에게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하사받은 것으로 봉토라고 불렸다. 후자는 정복이나 유산을 통해 독자적으로 획득했던 것으로 자유보유지(自由保有地)라고 불리웠다. 이러한 자유보유지를 소유한 사람은 주로 대영주였다.2) 봉건제의 체계 : 중세 봉건사회의 계층들 사이의 관계를 國王, 家臣, 騎士들로 이루어진 흔히 '피라밋'으로 표현된다. 가신들은 영주로부터 받은 봉토를 다시 자기의 가신들에게 하 사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피라밋의 각 계층은 바로 위의 계층에 대해서는 責任을 지지만 더 높은 계층들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즉, 영주와 가신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권리·의무)가 성립되지만 영주와 그 영주의 가신의 家臣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봉건제 초기 시대에는 봉신이 오로지 한 군주만을 섬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지참금으로 토지를 받게 된다면 그는 처가쪽 영주의 봉신이 되는 것이다. 또 뚜?아들이 아버지의 주군이 아닌 다른 주군에게 봉사하여 봉토를 받은 뒤, 후에 아버지의 봉토까지 상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12세기에는 거의 모든 중요한 영주가 여러 주군의 봉신이었다. 봉건제에 있어서 이러한 복잡한 상황은 당연히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으며, 이는 특히 한 봉신이 주군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至上(지상)의 신서라는 새로운 관대를 걸고서, 봉토가 없는 기사는 생계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이익을 얻을 기회를 배제하더라도 사우는 것 자체가 아주 즐거운 스포츠로 여겨지고 있었다. 봉건 영주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동이 트기 정에 잠이 깨어 미사를 올리고, 관리들과 의논하고, 송사를 판결하였으며, 대개 봉토의 업무를 살펴보았다. 동이 트면 그는 사냥을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사냥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전투와 비슷했던 방법은 말을 타고 숫사슴이나 멧돼지를 쫓아가서 살육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알맞은 좀 점잖은 사냥 방법으로 남자들도 역시 몹시 탐닉했던 것은 매사냥이었다. 매사냥에서 사냥꾼은 팔뚝에 훈련한 매를 올려놓은 채 말을 달리다가 사냥감이 될 새가 나타나면 매를 날려보내 잡게 하였다. 봉건 계급을 이루는 구성원의 개인적인 행동에 대한 법적 제한은 거의 없었다. 그는 주군과 주군의 직계가족, 봉신과 봉신의 가족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되었고, 동료 봉신에 대해 공격하면 주군의 궁성에서 그 행위를 변명해야 했으나 그밖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재판에 귀족에게유리하였는 바, 실제로 왕의 관리들은 유력자가 저지른 범죄를 피해자가 가해자 못지 않게 유력한 자가 아닌 이상, 종종 문제를 삼지 않았다. 봉건 계급의 여성은 남성과 함께 몇몇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 여자들도 수시로 즐겨 과음하였고 매사냥을 하였다. 당시여성의 지위가 어떠하였는가는 극히 복잡한 문제이다. 여자는 전투 능력이 없었으므로, 초기 봉건 관습에 의해 언제나 미성년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보호를 받았으며,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주군이나 아들의 보호를 받았다. 여자의 인신(人身)과 재산은 완전히 남편의 통제 아래 있었다. 교회는 남편의 폭력을 줄여보려고 하였지만 교회의 가름침(여자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이 여성의 지위를 개선시키지는 못하였다. 기사가 부재중일 때는 그의 아내가 가계와 봉토를 다스렸다. 즉, 여자로서의 장애에도 불구하고들도 반자유민이나 농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농민 계층의 사회적 유동성은 귀족들의 유동성보다 컸다. 자유민들은 간혹 귀족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더 흔히(특히 수확의 실패로 인해 부챌글 지게 됨으로서) 그들은 농노신분으로 하락하였다. 농노가 거주하는 토지는 일반적으로 두 부분 즉, 직영지와 탁영지로 나뉘어 있었다. 농노들은 일주일 중 며칠간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경작해야만 했으나, 나머지 시간은 흔히 공동으로 자기들의 토지를 경작하여 그 생산물을 분배하였다. 농노들은 또한 직영지를 경작하는 일(주역) 외에도 삼림 관리, 도로와 교량의 보수, 상품의 운송 등의 여러 가지 다른 의무(수시부역)를 이행하여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공납을 지불하여야 했다. 이 공납은 식구 수에 따른 인두세, 식구 중 누가 사망하였을 때 노동력의 감소를 충당하는 의미의 사망세·상속세 등이 중심이 돈다. 그러나 후에 이 공납의 착취는 증대하여 영주의 마음에 따라 징수하는 여의세, 물레방아, 제분기 등의 영주의 시설물을 사용케 하고 물리는 용익세, 삼림에서 땔감을 채취하고 내는 삼림용역세, 통행세 등이 있었다. 또한 농노들은 교회에 대한 십일세(十一稅)도 지불해야 했다. 농노와 자유민의 생활은 모두 고된 것이었다. 그들의 주요 차이점은 자유농민은 이동의 자유가 있었고 이로써 영주의 경제적 압박이나 자의적인 사법권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7) 장원 제도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지 즉, 장원이 일종의 제도적 생활의 중심지로 확립 되었다. 이를 장원제도라고 하는데, 이는 봉건제도의 특징적인 일면을 보여준다. 본질적으 로 장원제도란 귀족의 성과 저택 주변에서 발달한 촌락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생산조 직과 공동체 관계였다. 이 장원의 생산물은 그 지역의 수요, 즉 장원의 영주와 농민 및 수 공업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큰 시장을 목표로 한 생산이 아닌 자급자 족(自給自足)이 장원적 사회 조직의 기초였다. 장원의 영주는 그의 직영지를 관할하고 진행중인 작업을 다.
Dances with Wolves{영화소개감독 : 케빈 코스트너출연 : 메리 맥도넬 / 그레이엄 그린 / 케빈 코스트너각본 : 마이클 블레이크제작 : 케빈 코스트너 / 짐 윌슨음악 : 존 배리촬영 : 딘 세믈러상영시간 : 185 분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줄거리남북전쟁에서 우연한 계기로 영웅이된 '존 던바'중위는 서부의 인디언 접경지대로 발령이 난다. 그러나 그의 임지는 벌써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여장을 풀고 미육군의 명령에 따라 혼자서 요새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곳 접경지역에는 호전적인 [포니]족이 살고 있어 넓은 평원의 넉넉함만큼이나 위험으로부터도 배제된 곳은 아니었다.[포니]족 외에도 [수]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매우 정직하고 유모감각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존은 그의 일기에 기록한다. 이 [수]족과 중위의 접촉은 용맹성을 자랑하고 백인을 고립시키겠다는 [수]족 용사들의 말도둑질과 중위가 인디언 여자(실은 백인이지만 어릴 때 인디언과 함께 생활한)를 구해주는 사건, 인디언에게 커피대접, 모피선물 등의 사건으로 잦아진다.그러나 그들을 결정적으로 맺어준 것은 터탕카! 버팔로! 들소 때문이었다. 들소는 인디언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겨울을 나기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들소의 출현을 중위가 [수]족에게 보고하고 같이 사냥을 나감으로써 인디언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된다. 존과 인디언 소년 '많이 웃는(헤픈 웃음)'의 대활약, 백인 인디언 여자 '주먹쥐고 일어서'와의 사랑, 결혼.그는 드디어 용감한 [수]족의 용사가 되었다. 존은 옷을 갈아 입었다. 외형상 그는 [수]족의 용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중위와 맨처음 접촉하고 지금은 존의 장인이 된 '발로 차는 새'는 차분하고 중후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대부분의 인디언이 용감하고 정직한 인품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마을의 존경받는 인물답게 더욱 신중했다. '발로 차는 새'는 존에게 아니 [수]족 용사 '늑대와 춤을'에게 잔잔하게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뒤로 넘기고 있는 서부의 온화한 석양 속에서 말한다."...인간 앞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인간이 가야할 길은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그러면서 "...[늑대와춤을]이 인간이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보기 좋다" 라고.중후한 인품의 인디언은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다.이제 인디언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겨울 캠프로 야영지를 옮길 때가 되었다. 모두가 짐을 싸고 있는데 존은 자신의 일기가 요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혼자서 요새로 달려간다. 요새엔 방금 전에 세운 듯한 막사가 보이고 미육군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다. 그동안 기다려온 미육군이, 자신의 군대가 왔다.꿈에서 깬 듯. 잠시나마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방황할 때. 몇발의 총성이 울리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벗, 애마가 쓰러진다. 탈영병 취급을 당하며 포로가 된 그는 모진 구타를 당한다. 처음엔 그가 조국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설명하려 했으나 유일한 증거인 일기가 없다는 이유로 군법에 회부되어 압송된다.그 과정에서 자신의 종족인 백인에 대한 불신을 느끼게 된다. 서구의 광폭함과 침략적 기질은 스스로 존재에 대해 결단을 하게 한다. 존은 더 이상 존이 아니다. 외형상 인디언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도 인디언인 [수]족의 용사임을 진심을 깨닫는다.쇠사슬에 묶인 억센 팔다리는 그들이 인디언 용사를 조롱하듯 던져주는 음식들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또다시 구타. 압송길에 요새으 친구 늑대는 친구의 죽음을 느끼고 있는 듯 존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 위해 압송 마차가 보이는 언덕에서 죽음을 맞는다. 분노를 쇠사슬로 간신히 틀어 막은채 전진하던 마차는 작은 개울에서 용감한 용사들에게 기습당하고 존은 구출된다. 다시 돌아온 존은 인디언의 겨울 캠프에서 겨울을 난다.오늘날의 인디언20세기초에 이르러 인디언들은 폴란드인, 유태인, 이탈리아인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보호구역으로 쫑겨나 전통의 혼돈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위해 미국정부는 실천 가능한 계획을 생각해 내었다. 정부로서는 인디언의 문제는 사냥꾼을 소작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같은 원주민 동화정책을 열렬히 찬성한 상원의원 헨리 도스는 1887년 인디언 한 가구당 160에이커의 토지를 나누어 준다는 도스 분배 법령 을 표결에 회부했다. 나머지 인디언의 땅은 국가에게 양도되어 경매에 붙여졌다. 결국 도스법령은 어떤 산업보다도 미국 농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 법령으로 수많은 인디언 가족들은 1887년부터 1934년까지 5억 6600만 헥타르에서 3억 6400만 헥타르로 토지 소유권이 줄어드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미국정부는 1924년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고 1948년 참정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디언에게는 시민권과 참정권이 축복일 수만은 없었다. 인디언에게 미국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일련의 정책의 밑바탕에는 인디언을 흡수, 동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인디언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고 인디언들을 미국문화에 동화시키는 일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인디언들의 저항감과 복수심을 누그러뜨리는 길이기도 했다. 인디언들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사회제도를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했고 아이들은 백인학교로 보내졌다. 1940년대부터는 더욱 조직적인 한파가 불기 시작했다. 미국정부는 인디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종식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했다. 1953년 보호구역은 미국정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고 의회는 보호구역을 철폐시킬 것을 제안했다. 1954년부터 1960년 사이에 61개 부족의 보호구역이 철폐된 상태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데모와 항의집회가 잇따르면서 더 이상 다른 부족으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 인디언에 대한 지원정책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인디언 구역에 대한 연방 정부의 보호도 철회되자 인디언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지만 척박한 인디언 구역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많은 인디언 구역들이 부족원들에게 분할되거나 백인에게 팔렸다. 1960년대 이후 인디언들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1961년 인디언 학생들은 전국 인디언 청년 위원회 를 설립하여 극빈층에 속한 인디언들을 보호하는 일뿐 아니라 인디언 문화에도 가치를 부여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전국 인디언 청년 위원회 는 연좌농성등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고 이러한 집회광경이 텔레비전 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거대한 전파매체를 통한 이들의 호소는 큰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가장 강경한 투사들은 그때까지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1968년 아메리칸 인디언 운동으로 재결집한다. 이 세력은 1969년 알카트래즈감옥을 점거하였고 1972년 워싱턴에 있던 인디언 사무국을 점거하고 인디언 정책의 재고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했다. 그 후 1973년의 운디드니에서 71일동안 경찰과 대치하며 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벌인 일련의 활동은 인디언 공동체를 움직였고 모든 운동을 가속화시켰으며 지도자들의 영향력 또한 강화시켰다. 1978년 이들은 자치권을 상실해 버린 인디언 부족국가에 대한 미국과 전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하여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길고 긴 행진 을 기도한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적 시각이 미국 정부 내에서 힘을 얻으면서 인디언 정책은 전향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지원이 많이 늘었으며, 교육·의료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름만 남아있던 인디언의 자치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내 인디언들은 상당 수준 자치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 집단들과 구별된다. 미국 연방 정부의 인디언 지원 프로그램은 인디언 부족에 의해 대리 운영된다. 즉 교육, 의료, 주거, 복지문제와 관련된 행정의 처리가 인디언 부족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의 조직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규칙을 제정 할 수도 있다. 인디언 구역 내에서의 사법권도 인정되는데 살인, 절도, 방화같은 범죄가 인디언 대표조직이 관할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인디언의 자치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법률이 허용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디언들의 삶의 질을 확보하고 자긍심을 높이는데 기여했다.현재 미국에는 약 500개의 부족이 278개의 인디언 구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정도만이 인디언 구역에서 농사나 목축,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고 3분의 2 이상이 인디언 구역을 떠났다. 주로 교육이나 취업이 이주목적인데, 그만큼 인디언 구역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인디언 구역을 벗어나 도시로 떠난다고 해도 상황이 그리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전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던 인디언들이지만, 이제는 소수민족이자 주변적 존재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던 타임즈(Modern Times,1936){모던 타임즈(Modern Times,1936)감독 : 찰리 채플린출연 : 찰리 채플린 / 폴렛 고다르장르 : 코미디국가 : 미국제작 : 미상부가사항 : 85분,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줄거리 및 영화감상 소감'모던타임즈(Modern times)'는 작은 행복을 찾는 한 방랑자의 이야기로서 첫장면에서 시계바늘의 단순하고 주기적이며 반복적인 움직임은 바로 산업사회에서 인간들이 기계적/순환적인 모습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또한 양몰이장면과 노동자의 출근 장면은 양을 노동자로 양치기를 국가 또는 자본가로 대치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획일적이고 통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자본가는 시간때우는 소일거리나 하다가 가끔 감독관을 통하여 노동현장을 감시/통제하는데,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언제나 중간적 착취계급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량이나 엄청난 부를 노동력 착취를 통하여 얻는다. 이는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도 나타난다. 자본가들은 노동시간의 최대효과 창출을 꾀하려는 나머지, 자동식사기계를 이용하여 노동시간을 확보하려 할 정도이다. 휴식시간도 예외는 아니다. 화장실도 자본가가 직접 통제를 하는 장소이다. 노동자의 노동모습은 컨베이어 벨트라는 일련의 생산 메카니즘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움은 철저히 폐쇄되어 지고 오직 반복적이고 단순한 작업에 불과하다. 이것은 작업대 이탈 후에도 그 작업 행위가 연결됨으로써 그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부속품 속으로 빠진 채플린의 모습은 기계의 부속이 되어 버린 노동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노동방식에서 인간은 탈출하려 한다. 영화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노동시위는 산업사회의 모순을 노동자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노동방식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개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국가(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획일적 노동방식에서 이탈한 노동자들은 감옥이라는 이데올기적 통제수단을 통하여 기계적 인간으로 재교육된다. 결국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단순신호(호각소리)에 의한 조직적 생활방식을 교육받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꿈은 채플린의 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과의 동화 즉, 자연적(원초적) 생산방식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장제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먼 이상향(상상)에 불과하다. 결국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공장복귀를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의 미래를 향한 길을 걷는 연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노동력의 진정한 주인인 노동자로서 그리고 자유를 지닌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모던 타임즈를 통해 알아 본 자본주의 사회주의1. 모던 타임즈의 자본주의찰스 채플린의 영화 는 제목 그대로 '근대(modern times)'에 대한 영화다. 동시에 그것은 다양한 근대적 공간들(modern spaces)에 대한 영화며, 그 근대적 공간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에 대한 얘기다.자본주의는, 베버가 분석했듯이 프로테스탄트적인 금욕주의를 통해서 발전했다. 그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절욕과 절약을 통해 축적 그 자체를 추구하도록 했으며,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진 직업을 천직으로 삼도록 했으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고된 노동을 견뎌 내는 습속(ethos)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사정은 포드주의가 생산에 도입되면서 크게 달라진다. 그것은 대량생산을 위한 체제였고, 대량생산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생산체제였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이상을 컨베이어 벨트와 대규모 기계 등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체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대량생산한 상품은 과연 누가 소비할 수 있는가? 이러한 모순에 쌓여서 폭발한 것이 바로 1929년의 대공황이다.방랑하는 분열자의 출현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봉건적 가신집단들의 해체와 폭력적 토지수탈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세상에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빠른 속도로 신흥 메뉴팩처에 의해 도저히 흡수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들의 관습적인 생활양식에서 갑자기 내몰린 사람들이 그만큼 갑자기 새로운 환경의 규율에 순응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대량으로 거지, 도둑, 부랑자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별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이러한 분열적 흐름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의 가장 유명한 신 중 하나는 컨베이어 벨트 신이다. 채플린은 컨베이어 밸트를 따라 흘러가는 기계에 너트를 조인다. 벌이 눈앞에서 뱅뱅 돌며 채플린을 위협해도 그로서는 쫓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다간 어느새 조여야 할 기계는 저만큼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동료와 다투는 것도 기계에 매여 있다. 일찍이 '과학적 관리'란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동작과 시간의 사용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던 테일러(F.Taylor)의 이상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브레이버만(H.Braverman)의 유명한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그것은 노동과정을 노동자의 기능에서 분리하고,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며, 구상기능을 자본가/관리자가 독점하여 노동 과정의 각 단계와 행위양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개개인의 작업을 관리자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자본가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손. 거기서 손을 움직이는 의지는 채플린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요 테일러의 것이다. 테일러주의의 요체는 바로 이처럼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관리자의 의지대로 길들이고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신체를 길들이려는 '의지'요, 자본가의 의지대로 그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이다. 요컨대 채플린이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테일러주의(포드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이란 것이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에 푸코는 이를 '생체권력'이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는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를 타이틀 백으로 하여 시작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기묘한 말장난이 개재해 있다. 가 근대적 시간을 뜻하는 시계--이는 다시 보겠지만 "결코 은유가 아니다."--로 시작함을 보여 줌으로써 '근대'가 근대적 시간을 통해 시작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2. 자본주의의 장점과 단점자본주의 경제의 장점은 첫째, 경제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하고, 마음대로 생산을 하며,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다. 둘째,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자유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창의(創意)를 발휘하여 좋은 상품을 풍부하게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것이 사회에 양질(良質)·풍부·저렴한 재(財)를 공급하는 결과가 된다. 이것을 A.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자본주의의 단점은 첫째, 빈부의 차가 크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화되고, 국가에 의한 소득재분배정책도 추진되기에 이르러, 분배의 불평등이 꼭 커지는 것만은 아니다. 둘째, 생산이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영위되기 때문에, 전체로서는 무계획적이 되어 공황이나 실업이 발생할 수 있는 경향이 있다.3. 사회주의자본주의의 경제체제는 사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유경쟁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제도로서, 개인의 소유, 개인의 경쟁으로 되어 있는 경제적 개인주의의 제도이다.그런데 19세기 사회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과 병폐들, 즉 생산의 무정부성 ·자본의 집중 ·자원의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제국주의와 전쟁 등이 나타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기 위하여서는 개인주의를 폐지하고 반대 원리로 대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새로 만들어져 나오게 되었다.이리하여, 사회주의는 처음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하여 자유 ·평등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운동으로서 출발하였다. 1950년 이전에 나타난 모든 사회주의는 사회개조의 근본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생산수단의 공유는 사회개조의 유일 ·절대적 방법으로 여겨짐으로써, 이 제도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굳어지는 한편, 이 제도에 의하여 실현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 즉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Malcolm X{국내소개명: 말콤 X감독: 스파이크 리장르: 드라마, 다큐멘터리출연: 덴젤 워싱턴, 스파이크 리, 안젤라 바셋런닝타임: 201분극중역할: 말콤 엑스 (Malcolm X)미국개봉날짜: 1992/11/18관련정보: 시카고 영화비평가상/ 뉴욕비평가협회/ 43회 베를린 영화제/ 보스턴 영화비평가 협회/ MTV 무비 어워드 최우수 남우상 수상. 골든글러브 시상식/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 노미네이트.줄거리 :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결국 목숨까지 잃은 행동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말콤 엑스(Malcolm X: 덴젤 워싱톤 분)는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 속에서 보스턴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말콤의 어머니는 자긍심이 강한 여성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백인한테 당한 결과가 자신이었기에 백인을 증오하고 흑인 얼(Earl Little: 토미 홀리스 분)을 택했다. 말콤은 어느 날 우연히 댄스 파티에서 만난 백인 여자 소피아와 눈이 맞아 방탕한 생활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간다. 흑인 폭력배 인디안 아치 밑으로 들어간 말콤 엑스는 소피아, 친구 소티(Shorty: 스파이크 리 분) 등과 함께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 붙잡혀 법원에서 8년에서 최고 10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감옥에서 만난 흑인 회교 경건주의자 베인스의 소개로 당시 흑인들의 희망처럼 떠오르고 있던 이슬람교의 한 지파의 교주인 엘리야 무하마드를 알게 되어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슬람교에 귀의하여 출감 후 특유의 언변과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의 토로로 엘리야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백인들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이끄는 회교 행동주의 전도사로 변신한다. 말콤 엑스의 인격과 신앙심, 그리고 언변에 이끌려 많은 소외된 흑인들이 엘리야 무하마드 밑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말콤 엑스는 참한 흑인 아가씨 베티(Betty Shabazz: 안젤라 바셋 분)를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한다. 교세가 점점 확장되는 가운데 엘리엄 X(William X: 마이클 게스 분)가 말콤의 가슴에 기관총을 발사한다. '아프로-아메리칸 말콤은 이미 수년전부터 니그로가 아니었다'는 나레이션이 길게 이어지는 속에 그의 생애가 스쳐지나간다. '그가 뿌린 한알의 씨앗은 다시 싹이 틀것을 확신한다.'는 나레이션과 낡은 국민학교 교실, 말콤 X의 생일을 알려주며 위대한 아프로 아메리칸의 생애를 알려주는 교사와 꼬마들이 나오며 마치게 된다.말콤x와 마틴 루터킹말콤은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이끄는 '이슬람민족' 운동의 2인자로서 헌신을 다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하마드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면서 무하마드와 그 추종자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말콤은 결국 무하마드와 결별하고 따로 회교사원을 조직하게 되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역시 무하마드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더욱이 무하마드가 두 여비서와 통정하여 사생아를 낳은 스캔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면서, 말콤이 그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신뢰는 큰 상처를 입었다. 무하마드와의 결별을 계기로 그는 종교적 신념을 새롭게 하기 위해 1963년 회교 성지 메카를 순례하였고, 이듬해 '사단법인 회교사원'을 조직하고 보다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기시작했다. 생애의 마지막 1년 동안 말콤은 완전히 새로운 사상과 태도를 가진 지도자로 변신했다. 말콤은 곧이어 OAAU를 조직했다. 종교적 편견을 뛰어넘어 미국 흑인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말콤의 두 번째 변신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뜻을 채 펴보지도 못 한채 종국을 고하고 말았다.1965년 2월 21일 OAAU 연설회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살해된 것이다. 3년 뒤인 1968년, 킹 목사 역시 암살당했다. 말콤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항상 죽음 가까이에서 살았다. 그 자신이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이슬람'의 일원에게,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아니면 그들에게 이라는 몸에서 '인종차별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도려내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죽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하고,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사회가 변화를 위해 몸부림칠 때면 항상 급진주의자와 온건주의자가 대립하기 마련이다. 김옥균과 민영익도 그랬고 로베스피에르와 당통도 그랬다. 그러나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두 거인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처럼 그 대립이 선명하고 극적이었던 적도 없었다. 말콤 엑스는 1925년 오마하 빈민촌에서 태어났고,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조지아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엑스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살해당했다. 킹이 평생을 고결하게 살며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엑스는 청년시절을 마약과 소년원생활로 보냈다. 킹이 기독교 목사였던 반면 엑스는 무슬람 지도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둘을 갈랐던 것은 미국에서 흑인이 어떻게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대하는 방법이었다. 1955년 앨라배머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란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후 10여년간 미국 사회를 뒤흔들 흑인운동이 태동하는 바로 그때 마틴 루터 킹은 몽고메리 교회의 목사로 재직중이었다. 흑인운동의 지도자로 뽑힌 그는 간디의 비 폭력주의에 크게 감명받고 있었으며 폭력과 테러에 의하지 않은 평화 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비폭력노선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워싱턴 대행진에 수만명이 참여하게 만드는 등 인권향상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 흑인 세력을 주도하던 말콤 엑스는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킹을 비난했다. 흑인과 백인은 이미 화합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백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만이 흑인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아무도 평화를 자유로부터 분리해 낼 수 없다. 자유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흑백분리’. 이것이 말콤 엑스가 본 유일한 해방의 길이었다. 그의 무 이름에 익숙해져 있는데 대체로 역사는 급진주의자보다 온건주의자를 기억하는 법이다. 그것이 정말로 점진적인 개혁이 옳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급진주의자의 존재로 인해 가속된 사회의 변화를온건주의자가 얻어가기 때문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마틴루터킹 목사의 워싱턴 집회를 평가"소방차와 진압봉,경찰견으로 무력진압만 받아오다가 당연한 평화시위를 한번 보장해 준것이 그리도 감격스러운가? 엄청난 인권신장과 혜택을 이미 베푼 듯이 매스컴을 앞세워 아직은 작은 것에도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는 순박한 흑인들을 이용한 정치적 코메디일 뿐이다. 흑백갈등이 이러한 전시행사 정도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시한폭탄처럼 내동댕이 쳐진 빈민계층이 장차 큰 사회문제가 될 것임은 물론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마저 위협이 될 것이다." -말콤X-영웅의 최후-1965년 2월 21일 OAAU 연설회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괴한들의 집중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살해말콤 X"아직도 이 나라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폭력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유감입니다. 우리 사회에 사랑과 정의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비폭력 노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생존을 원한다면 우리는 증오와 폭력을 영원한 망각의 강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마틴루터킹21세기가 된 지금도 아직도 계속 되는 KKK단의 행진과 의식 누구를 위한 불꽃인가? 백인우월주의는 아직도 수많은백인들의 잠재의식에 내포되어 있다.옆의 60년대 선전포스터와는 달리 미국은 아직도 인구의 83%이상이 백인인 백인국가이다. 한예로 미국판사의 98%가 백인이다.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흑인 교통법규 위반자를 10여명의 백인 경찰들이 짖밟고 경찰봉과 채찍으로 까지 무자비하게 구타하였으며 이 장면이 한 시민에 의해 비디오로 촬영된 것을 근거로 이뤄진 소송에서 조차 백인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로 판결되는 순간,피고인이었던 백인경찰이 현장의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I'm happ 들어서면서 백인 민족집단들의 반대와 제재로 인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백인들은 어퍼머티브 액션 (Affirmative action)과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이 자신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진보주의적 성향에서 보수주의로 회귀하기 시작하였다 (Wilson, 1978; Rieder, 1985; Omi and Winant, 1986).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미국사회의 인종관계가 백인과 흑인들 간의 인종갈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들 간의 인종갈등까지도 악화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 초부터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로부터 미국으로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한 것에 기인한다. 1970년대의 새로운 이민자들은 미국 노동시장과 주택시장에서의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로 인해 도시 내의 전통적인 흑인지역에서 주거를 정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흑인들과 희소한 사회 경제적 자원을 놓고 경쟁을 하며 갈등관계를 갖게 되었다. 마이에미에서 흑인들과 라틴계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라던가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들과 흑인들 사이의 갈등들은 소수민족들 간의 악화해 가는 인종관계의 좋은 예들이다 (Cheng and Espiritu, 1989; Chang, 1990; Jo, 1992; Johnson and Oliver, 1989; Lee, 1993; Min, 1993; Oliver and Johnson, 1984; Portes and Stepick, 1993) 소수민족들 간의 인종관계는 종래의 흑백간의 인종관계와는 성격 면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흑백관계는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의 구분이 확연하고 피지배집단인 흑인들이 백인지배의 일방적인 희생자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소수민족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의 구분이 분명치 않다. 그들간의 인종갈등은 사회불평등의 근본 원인인 현 사회체제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방해함으로써 자신들을 희생자로 만들뿐이다. 이런 와중에 백인들은 소수민족들을 분리시켜서 정복한다는 전략에 의해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