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미학 사상사제 1 장 고대 - 서양 음악 미학의 기원, 또는 바탕을 이룬 시대1. 알카익기 (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 전반 )음악을 독립된 주체로 취급한 이론적인 서술은 없다. 이 시기에는 서정시가 가장 발달 했는데, 핀다로스(Pindaros)의 에는 아울로스의 성립에 관한 신화가 나온다. 또한 에서는 리라의 성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신화들에서 관악기인 아울로스와 그 음악이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처절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현악기인 리라는 협화음이라는 화음 현상을 기초로 하는 악기이며 침착한 세계 관찰의 악기로 여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악기의 기원에 관한 신화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즉, 우리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음악과, 외부 세계의 재현으로서의 음악이라는 두 개의 극(極)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2. 고전기 ( 기원전 5세기 후반~기원전 4세기 )음악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 시작되었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이다. 피타고라스 파는 수학을 중심으로 천문학과 음악을 연구했다. 또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이 신에게로 귀일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혼의 카타르시스(정화)를 가장 중요시 했다. 피타고라스 파에게 있어서 음악은 혼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수단이고, 음악은 무엇보다 윤리적이며 종교적 작용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음악이란 귀에 들리는 우주의 하모니아, 즉 우주의 가청적 경지였으며 우주 전체가 곧 하나의 음악이였다. 이렇게 음악 미학의 역사는 음악을 인간의 역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하모니아론은 플라톤에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플라톤은 ‘하모니아’에 ‘혼의 조화’라는 의미를 더한다. 플라톤에 이르러서는 하모니아론은 혼에 관한 문제로서, 인간적 차원에서 중시되기에 이르렀다.사람들은 음악은 그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작용되어 혼의 ethos를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ethos설은 이미 피타고라스 학파의 옹호자였던 다몬(Damon)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몬의 주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ethos설에 고전적인 형태를 부여한 사람이 플라톤이었다. 일반적으로 ethos는 음악에 내재하고 있는 높은 도덕적 작용 또는 그 힘, 혹은 음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면서 높은 도덕적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윤리적 성격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생각하던 ethos는 윤리적 성격은 아니었으며, 단지 음악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윤리적 효과를 강조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무지케 사이에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ethos를 무지케의 미메시스(mimesis) 대상이라고 하였다. 플라톤 ethos이론의 핵심은 무지케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 ‘혼의 ethos’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모든 예술은 현상의 이중모방이기 때문에 진정한 존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며, 예술을 국가로부터 추방해야 한다고 했으며 무지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지케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본질적인 이유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즉 무지케에 있어서 모방은 이중모방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 행위의 원천이 단지 천분과 영감에 의한 경우의 비진리성과 무지케가 미치는 효과가 비이성적이라는 점이 비난되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플라톤은 무지케가 ‘혼의 ethos’의 모방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ethos설은 단지 윤리주의적인 음악관의 표명에 머무르지 않고, 혼에 관한 이야기를 제일로 삼았던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였다.3. 헬레니즘기 (기원전 3세기~기원 3세기)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는 경험적 입장으로부터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즉 음악과 유쾌함이라는 경험적 사실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생각의 특색은 음악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성과 감정이 아니라 감각, 즉 귀에 두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리스토크세노스, 스페우시포스, 디오게네스, 혹은 스토아 학파에서도 현저히 나타난다. 그들은 음악의 유일한 작용이 즐거움이나 유쾌함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ethos설이 주창했던 혼을 이끄는 힘이나 윤리적 작용은 부정했다.제 2 장 중세중세 그리스도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속에 지니는 것이고 노래도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초기의 교부들 중에는 음악을 이교적이라고 배척했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교부들이 음악의 의미를 인정하였는데, 그들은 음악을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교도적이라고 하여 악기의 상용은 인정치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음악의 유일한 형식은 인성, 즉 노래였다. 또한 단지 감감을 매료시키는 노래도 배척하였다. 음악을 시인하였던 교부들도 음악에 대하여 그 표현 수단과 효과에 대해서도 엄한 제한을 가하였다.중세에는 고대의 전통, 생각을 계승하여 수적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그것 자체가 음악이라고 보았다. 즉, 음악은 학문 이었다. 이러한 중세의 무지카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음악을 이성과 감정을 잘 조절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며, 음악은 철학이고 인간학이었다. 중세음악가로서 본질적인 것은 작곡하거나 연주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후에 무지카의 개념은 인간의 혼과 우주로까지 확대된다. 보에티우스의 무지카에 대한 분류는 이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지카를 우주 또는 대우주의 하모니아이며, 천체의 무지카라고 부르는 무지카-문다나(musica muncana)와 ‘혼의 하모니아’인 무지카-호마나(musica humana), 일반적으로 음악이라고 부르는 무지카-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로 분류했다. 그는 무지카는 음의 고저의 차이를 감성과 이성으로 생각하고 계량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했다.9세기 이후 다성 음악의 시대가 시작되고, ars nova라고 부르는 14세기의 음악 양식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그와 함께 음악 이론에 대한 연구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음악관은 기본적으로 고대나 중세의 연장에 머무르고 있었다.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상적으로 극히 광범위하게 지칭했던 무지카의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의 귀로 감지할 수 있는 음악적 현상으로 한정되어 쓰여지게 된다. 결국, 그로케오는 현실적으로 들리는 음만을 무지카로 취급하게 되는데, 이것은 음악 개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를 만한 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제 3 장 근세 -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1. 15~16세기근세 음악관의 특색을 이루는 새로운 것은 이론보다도 실천에 우위를 두었다는 것이다. 근세의 전반인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발견의 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인간은 이미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르네상스는 공작(工作)에 의한 행위적 인간상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음악관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생각은 실재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로 향한다. 르네상스는 경험주의적인 관점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전 문화의 부흥 기운에 따라서 예술 그 자체도 현저하게 발전하였음은 물론, 새로운 예술 사상도 융성하였다. 뛰어난 음악론은 적었으나 르네상스의 재생, 부흥의 정신은 음악에서도 16세기 전반 이후부터 고대 음악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고대 음악을 규범으로 하여 새로운 음악 사상을 도출해 내고 거기에 기초한 실천 활동을 전개시켰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에서 음악과 시가 필연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monodia‘가 탄생했다. 또한 시와 결합된 음악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이며, 추상적인 음의 구축에 기초를 둔 음악은 작위적이라 해서 배척되었다. 이것은 결국 poplyphony를 배척하게 되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은 학문이라기보다는 기술로서 실천에 중점이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기술로서의 음악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게 되었다.2. 17~18세기 전반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들어오면서 감정은 지적인 것과 아울러 인간의 중요한 내적인 힘으로 인식되었고, 감정의 표현과 야기가 음악의 목적이고 목표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인간의 정서와 음악과의 관계를 논하던 당시의 이론을 정서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정서설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당시 탄생된 오페라이다. 아리아는 개별적으로 분화된 유형적인 정서의 표상을 주는데 가장 적절한 음악이었다. 정서설의 이론적 전개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독일의 음악가나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이 시대의 감정 미학은 데카르트에게서 비롯되었다. 테카르트는 음악의 목적을 쾌(快)로 정하고, 이 쾌에 대해서는 논증이 가능하며, 데카르트는 그것을 수(數)에 바탕을 둔 규칙에 의해서 행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감정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감정 상호간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야 말로 정신의 진정한 힘을 발휘시키는 원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의 미학에서 성행했던 이론은 모방설이었지만 그것이 정서설과 결부되어서 음악은 감정의 모방이라고 보게되었다. 그럼으로 해서 이 정서의 모방도 명료해지고 명백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음악으로서 문제된 것은 시를 수반하는 음악, 즉 성악이었다.제 4 장 근대 - 음악이 예술로서 자리를 잡게 됨1. 음악의 자율화기악이 성악에 대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한 것은 1660년경의 일로, 기악은 그 고유의 이디엄(idiom)과 표현수단, 그리고 장르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기악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음악 스스로의 법칙을 따라서 형성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러한 음악 독자의 내적인 원리로서 그 당시에 이루어졌던 것은 1) 화성의 골격으로서 조성 2) 형식과 의미 통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주제 3) 시간적 질서의 원리로서의 박자였다.
Gustav Mahler(1860.7.7 - 1911.5.18)말러의 음악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우선 그의 '정신 세계'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의 이면에는 그의 개성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러의 종교적 및 철학적 사상은 전체적인 그의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종교적 감정, 주변 세계에 대한 시각, 미학적 관점 등 말러의 모든 사상들은 그의 음악 속에 녹아들어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말러는 1860년 7월 7일 보헤미아의 칼리슈트에서 유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이었으나 항상 그리스도교인이 되고 싶어하다가 37세 되던 해에 결국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카톨릭의 신비주의와 종말론에 심취했다. 그렇지만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같이 묘한 균형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그는 평생 동안 유태인 태생이라는 상처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사회에 융화하려고애썼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어서, 오스트리아에 가면 나를 보헤미안이라 하고, 독일에 가면 오스트리아인이라 하고, 보헤미아로 돌아가면 유태인이라고 한다."이렇듯 자신의 출생 배경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졌던 말러는 어린 시절에도 결코 행복하지못했다. 말러의 부모는 성격이 서로 물과 불처럼 어울리지 못해서 자주 싸움을 벌이고 했다. 말러가 1910년에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상담을 했을 때,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불화가 그에게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주었으며, 그의 경험에서 비극적인 사건들과 하찮은 일상사들 사이의 격력한 대조가 평생동안 자기를 지배해왔다고 시인했다. 이것은 말러의 음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난해한 요소와 단순한 선율이 병존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말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 아직 음계를 연주할 줄 몰랐던 네 살 때부터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엄청난 발전을 보여 열 살 때이미 청중 앞에 설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 말러에게 중요했던 또 한가지 경험은, 그가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글라우의 군 주둔지에서 수백 곡의 민요와 군가를 배웠다는 점이다. 말러의 교향곡에 빈번히 등장하는 군대의 나팔 소리와 단순한 민요의 요소는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싹텄던 것이다.15세 때에 빈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말러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말러는 빈 음악학교 시절에 이미 음악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그의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의 문학을 향한 열정은 문학 써클의 설립을 추진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특히 시를 많이 썼으며, 그 자신을 시인이자 작곡가라고 생각했다. 또한 말러의 독서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평생 동안 미친 듯 열심히 책을 읽어댔다고 한다. 그의 문학과 철학의 시야는 놀라울 정도로 넓어 희랍의 고전 사상으로부터 셰익스피어, 독일의 신비주의자들, 프랑스의 바로크 작가들과 독일의 고전적 낭만적 문학과, 칸트를 비롯한 19세기의 많은 철학자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당시의 현대파 작가들까지도 포괄했다.말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음악가로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있다. 젊은 말러는 바그너에 대한 열정적인 존경심을 품고 있었으며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유태인인 말러가 바그너의 반유태주의 사상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바그너를 셰익스피어와 베토벤과 더불어 '현대의 가장 숭고하고 전세계적인 천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꼽았다. 처음부터 그는 바그너의 글에 큰 공감을 느끼며, 예술과 종교, 채식주의, 인류의 재생에 관한 바그너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말러는 또한 안톤 브루크너에게서도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다. 젊은 말러가 빈의 초기 시절에 만나 알게된 브루크너는 항상 말러가 존경해왔던 음악가로서 말러는 그의 3번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다.인간으로서의 말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전에 그가 력했던 지휘 활동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생전에 말러는 작곡가로서 보다는 지휘자로서 더 잘 알려져있는 인물이었다. 이 분야에서 그가 국제적으로 거둔 명성은 모차르트, 베버, 글룩의 위대한 작품들의 뛰어난 공연, 당시 음악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태도, 예술 활동에 대한 태도의 진지함, 그리고 그의 완벽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전혀 타협할 줄을 모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요구하고, 무사안일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말러의 사회적 직업상의 출세는 어찌나 갑작스러웠는지 거의 혜성과 같았다. "꿈같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인 빈 궁정 가극장의 예술 감독이라는 지위를 차지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휘자로서 아무리 성공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직업에 완전히 불만이었다. 그는 작곡을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전혀 남겨두지 않는 노예같은 오페라 일에 대해서 자주 불평하고 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여름철에만 작곡에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스스로를 "여름 작곡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널리 찬사를 받았던 개성적인 관현악법은 지휘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얻었기 떠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그의 주요작품인 , , , 등읜 가곡과 대작 성악곡 등은 모두 비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가 심취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말러는 항상 의혹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인생을 보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질적인 심장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유태인이면서도 카톨릭으로 개종한 종교적 콤플렉스, 즉 민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문제로 늘 고민했다. 그의 교향곡은 자기를 괴롭히는 의문과 불안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얻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작품도 베토벤처럼 후련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저런 의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의 예술은 어쩌면 불안과 의문투성이의 20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민과 부합되어 많 사람들의 공명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1번 은 작곡자 자신이 곡의 내용을 표제적으로 제시하려고 붙인 것인데, 실은 이라는 이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지는 인상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인생을 깨닫게 된 20대의 서정이 넘친 청년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어 비좁은 세계 속에서 싸우고 혈기가 많은 마음으로 인생 속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관현악 편성은 크지만 말러는 각 악기의 가곡풍의 선율로 교묘하게 노래 불리게 하는 점에서 성공하고 있다. 주로 동기적인 수법이 보이고 또 많은 개햐도 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극히 보수적이다.[제1악장] 유연하고 장중하게. D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현의 긴 A의 보속음 위에서 오보에와 파곳이 4도 특징적인 하강의 동기를 내고, 이어서 클라리넷이 멀리서 들리는 듯한 팡파르를 연주한다. d단조에 의해서 조용한 아름다움이 여울지고 있다.자연의 고요함이 펼쳐진다. 이 4도 동기는 단지 이 서주뿐만 아니라 제1악장을 비롯하여 전곡의 주한 동기나 주제를 생성시켜 전체의 연관에 대해 구실을 하고 있다. 반음계적인 저음현이 나타나 D장조로 바꿔고, 4도 동기를 클라리넷으로 낸 뒤, 곡은 주부로 들어가서 첼로에서 제1주제가 나타난다. 잔조를 지나 A장조를 이루면 제1주제와 밀접히 관련된 대위법적인 제2주제가 나타난다. 야기서부터 정점이 구축되면서 관이 조용하게 가라앉고 현이 사라지즛이 상승하면 제시부는 끝난다. 전개부는 고음현의 음 위에서 목관에 의한 제2주제의 변형으로 시작된다. 전원적인 고요함 속에서 첼로가 보속음을 타고 호소하는 듯한 선율을 내면 약간 속도를 늦추어 곡은 오보와 하프를 결합해서 제시한다. 곧 다시 목관은 뻐꾸기 울음소리를 남기면서 곡은 고요 속으로 돌아간다. 혼의 부드러운 울림이 끝나면 플루트가 새처럼 사랑스럽게 지저귄다. 그 밑에서 첼로가 소리낸다. 거기에 이끌려서 바이올린이 선율을 내고 이것에 의한 전개가 잠시동안 다루어진다. D♭장조에 이르러 현의 움직임 속에서 목관이 새로운선율을 빼고 이윽고 바이올린이 활발한 운동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동기를 다루면서 곡은 전개의 클라이막스로 고조되어 간다. 저음악기에 바소 오스티나토가 나타나 ff의 정점을 쌓아 올리면 지금까지의 선율의 대조법적인 처리 속에 또 한번 pp에서 ff까지 크레센도 하고 거기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최후에 4도 동기를 소리 높게 제시하면서 곡은 강렬한 울림으로 끝마친다.[제2악장] 힘차게 움직여서. A장조 3/4박자 3부형식최초 저음현에서 의한 힘찬 오스티나토의 베이스가 나타난다. 그 상성부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8도 도약의 율동적인 동기를 여러번 소리내어 화성을 충실하게 한다. 계속해서 거기에 관이 가담하여 처음으로 선율적인 4도를 쓴 뚜렷한 선을 제시하게 된다. 역시 바소 오스티나토 위에서 점차 크레센도 하여 그 정점에서 목관과 바이올린이 다음 부분, 즉 복합 3부형식의 제 1부의 중간부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선율을 낸다. 이리하여 이 중간부에서 이 선율(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위에 관이 연주한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c#단조로 대위 선율을 동반하여 힘차게 오스티나토를 제시한다. 그러면 콘트라베이스와 튜바의 공허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명동음의 전조를 지나 정점이 구축되어 바소 오스티나토는 8분음표로 변해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서 첫머리의 제1부가 변형되어 다시 제시된다. 긴 트릴에 이어진 강렬한 A장조의 화음, 숨막힐 듯한 쉼표, 사라지는 듯한 호른의 울림을 지나서 곡은 F장조의 목가적인 트리오로 들어간다.트리오는 왈츠풍으로 부드럽고 4도 동기를 베이스의 반주로 쓰고 있다. G장조로 전조되면 제1악장과 연관된 선율이 슈베르트풍으로 현에서 울려 나온다. 플루트, 클라리넷, 현 사이에서 다시 새로운 선율이 대위법적으로 제시된다. 이것이 간단하게 다루어져 저음현으로 사라지면 또다시 호른의 부르는 소리로 바소 오스티나토를 지닌 제1부의 재현에 해당하는 제3부로 나아간다. 관의 긴 트릴로 정점을 쌓아 올려 속도를 증가시키면서 힘찬 화음으로 곡은 끝다.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3. 1 바르샤바 - 1849. 10. 17 파리)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 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중 둘째가 쇼팽이었다.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20세가 되던 1830년에 세계 여행길을 오르며 10월 11일 고별연주회를 개최했다. 그 때 콘스탄치아도 찬조 출연하여 독창을 맡았으나, 그녀는 그 고별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미쳐 알지 못했다.세계 여행길 첫 방문지인 빈에서 친구를 잃는 등의 상처를 받고 런던으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1831년 7월, 빈을 떠나 런던으로 가던 중 쇼팽은 바르샤바 함락의 비보를 접하였다. 절망 속에서 오늘날 이라 불리는 연습곡 c단조 작품 10 12번을 작곡하였다.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파리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사상과 행동 모두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으므로 모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의 집산지가 되어있었다. 그 당시에는 로멘티시즘 사조가 크게 유행하여 쇼팽도 그 조류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는 음악상의 새로운 동지 칼크브레너, 리스트, 힐러, 멘델스존 등의 협조를 받아 연주와 작곡활동 들을 펼칠 수 있었다.1835년 겨울,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이 시기에 창작된 쇼팽의 작품이 가장 원숙하며 뛰어난 것으로 오늘날 평가되고 있다.1846년 11월, 쇼팽과 상드는 이별의 시간을 맞게 되었다. 상드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문제로 견해차가 심해져 쇼팽은 상드의 곁을 떠나버렸다.그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폴로네이즈나 마주르카는 폴란드 토착의 특징이 엿보이며, 그와 반대로 그의 악곡 전체를 감싸는 장식이나 끝맺음의 섬세함은 그가 후반기에 출입했던 파리 귀족사회의 살롱을 나타내고 있다.쇼팽의 작품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하나의 특색은 생활속의 체험이 미묘하게 작품속에서 살아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너무 서정적이어서 때로는 센티멘탈에 빠지므로 여성들에게 호감이 높았는데, 이것은 연약하고 우울한 그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러한 감상이 추고를 거듭하는 가운데 정화되어 예술로 변용되었으므로 모차르트와 같이 순수하고 고아한 음악이 된 것이다.또한, 피아노 연주의 명인으로서 피아노 곡의 선율과 장식에 힘을 기울인 순수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피아노 음악이 표현 할 수 있는 극치의 경지까지 표출해 내었다. 작품 11쇼팽은 피아노 협주곡을 2곡 작곡했다. 2곡 모두 쇼팽의 청년시대, 고국인 폴란드에 체재중에 창작된 것이어서 후년의 원숙기의 작품에서 보이는 내용의 깊이와 작곡기교의 변화 및 완벽성 등에 결함이 보인다. 그러나 청년기 특유의 정서의 면밀성, 감각의 신선미, 표현의 요설과 현란함 등, 후기 작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특징이 엿보인다. 다만 두 곡이 모두 오케스트레이션이 빈약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정평이다.협주곡 제1번 e단조는 1830년 고향을 폴란드를 결별하기 직전에 작곡된 것이며, 쇼팽이 교환한 여러 서신들로부터 f단조 협주곡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말하는 한 친구의 인상을 전하고 있으며, 도한 다른 서신에서는 이곡의 피날레 부분이 f단조의 것 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 곡을 연주해 보면 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을 때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을 느낀다. 정말 대단히 특수한 연주다. 그러므로 나는 연주를 잘 못하고 끝이 나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된다."고 쓰고 있다. 이 같은 편지로도 알 수 있듯이 이 곡이 f단조보다 연주기교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곡은 칼크브렌너에게 헌정되었다.[제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e단조 3/4박자형식은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협주곡의 제1악장 형식을 따르고 있다. 곡 첫머리에 관현악의 합주가 있으며 제1주제가 연주되지만 이것은 제2악절로 되어 있으며 그 전반은 바이올린의 f로 연주하는 선율, 후반은 같은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레가토 에스프레시보로 상냥하게 나타난다. 제2주제는 현이 연주하는 E장조의 칸타빌레의 달콤한 선율이다. 이 선율이 몇 번이고 되풀이된 후 다시 제1주제가 나타나며 그 최후에 피아노의 독주를 유도한다. 피아노는 처음부터 기교적으로 꾸며가고 제1주제를 화려하게 연주하며 그 후 점차 비르투오소적으로 된다. 다시 제2주제도 같은 방법으로 취급되고 최후에 관현악의 합주에 의해 제시부가 끝난다. 전개부는 C장조이며 최초의 피아노가 제1주제의 후반부를 처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 앞에서 말한 여러 주제가 피아노의 중음, 스케일, 아르페지오 등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전조를 하며 화려하게 전개된 후 다시 전합주에 의한 재현부가 된다. 제1주제 전반이 관현악에 의해 제시되면 그 후반은 피아노가 담당하고, 제2주제의 재현은 역시 독주 피아노에 의해 연주되나 조성은 G장조이다. 곡은 최후에 찬란한 기교를 발휘한 피아노에 의한 아다지오를 지나 제1주제의 처음 악상에 의한 코다에 이르고 관현악의 전합주로 곡을 끝낸다.
200024109 김정연Felix Mendelssohn (1809 함부르크-1847 라이프찌히)멘델스존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복하고 교양이 넘치는 유태계의 부르주아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려 깊은 은행가로서 그의 아버지 역시 저명한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 Moses M.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평온하고 따뜻한 가정에 더하여 엄격하면서도 조숙한 재능을 개화시키는 데 알맞는 교육을 시켰다. 멘델스존은 누나 파니와 함께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1816년에 파리에서 마리 비고Marie Bigot의 레슨을 받았다.1817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로는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1818년 10월 28일 멘델스존은 처음으로 피아노의 공개연주회를 열고, 1819년에는 징 아카데미에 들어갔다.1825년에는 아버지와 같이 다시 파리를 방문하여, 음악원장이었던 케르비니와 로시니, 마이어베어 등과 알게 되었다. 다음 해 1826년에는 서곡을 작곡했다. 1829년에는 바흐의 을 작곡가가 죽은 뒤 처음으로 공개 연주하여, 바흐의 위대함을 새삼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해에 영국으로 건너가 자작의 제1교향곡을 연주하여,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833년에는 뒤셀도르프의 악장으로 추대되었고, 1853년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작곡활동, 지휘자나 독주자(피아노, 오르간)로서의 연주회 활동, 여행, 회합이나 서신에 의한 사람들과의 교제 등, 멘델스존의 생활은 활기에 넘쳐 행복한 것이었다. 멘델스존이 설립자금을 마련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1843년 4월 2일에 개교 하였다. 작곡과 피아노에는 슈만, 화성과 대위법에는 하우프트만,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합주에는 다비드라는 쟁쟁한 인재가 교사로 취임했으며, 원장 멘델스존 자신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수업을 맡았다.극중 부수음악 (1843),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64(1843), 오라토리오 (1846) 등 걸작이 이 시기에 씌어졌으나, 피로 때문에 건강이 좋지 못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1847년 5월, 영국을 방문하는 길에 누나 파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신경장애를 일으켰다. 한때 회복하여 바덴바덴과 스위스에서 정양을 했으나, 가을에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다시 악화되어 11월 3일에 의식을 잃고 다음날 밤 38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기억력을 갖추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재기에 차 있던 멘델스존은 폭넓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고, 인생을 사랑하며 사람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또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특성인 자유분방함을 좋아하는 경향과 부르주아 생활의 규율을 잘 절충시킬 수 있었다. 아내 세실이 1853년 죽기 전에 멘델스존과의 사적 서한을 파기해버렸지만 마그누스, 클링게만, 모셸레스 같은 친구와 교환한 방대한 서신 덕택으로 부르주아 생활의 규율이 멘델스존에게는 조금도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멘델스존은 도처에서 작곡가, 지휘자 혹은 피아니스트로서 시대의 총아였다. 베토벤이나 특히 바흐, 모짜르트의 연주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휘대에 올라서면 악단원을 고양시키고 동시대의 작품뿐만 아니라 과거의 잊혀지거나 간과되었던 작품에 눈을 뜨게 했다. 독일이 J. S. 바흐를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그 작품을 소생시킨 멘델스존 덕택이었다. 또한 그는 친구들, 그 중에서도 슈만의 새로운 작품 등도 연주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슈만은 멘델스존이 슈베르트의 사후에 실현한 그 제9교향곡의 초연(1839. 3. 22)에 힘이 되기도 했다. 과거에의 애착, 고전주의나 완성된 것에의 기호와 결부되어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었던 멘델스존의 정신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시도해 온 그의 음악 속에도 나타나 있다. 한여름밤의 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교향곡 이탈리아나 스코틀랜드 등 잘 알려진 작품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곡도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며 그 몇 가지는 이미 브람스를 연상케 한다. 멘델스존의 독일적 교양은 이탈리아, 그리고 특히 그의 제2의 조국인 영국에서 귀중한 자극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극히 독창적인 영감, 교묘한 테크닉, 세련된 음악성과 오케스트레이션, 작품의 다양성 등으로 보아, 멘델스존은 낭만파의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작품 611826년 멘델스존이 17세 때 셰익스피어의 을 숙독하고, 그 환상적이며 괴한 시적 여운에 감흥을 느끼고 작곡한 곡이다. 은 6월 24일 하지인 의 바로 전날 밤을 가르킨 말이다. 서양에서는 그 밤에 기괴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는 미신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미신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희극 이 나온 것이다. 멘델스존은 처음에 연주회에 쓰일 독립된 서곡만을 작곡했었다. 그런데 17년 후인 1843년에 프러시아의 빌헬름 4세가 명하여 국왕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공연되는 연극 의 무대음악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 , , 등 4개의 관현악곡과 서곡이 가장 많이 연주 되고 있다.[서곡] 알레그로 디 몰토 E장조 2/2박자소나타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내용은 낭만적이고 색채적인 필치로 극적인 분위기를 여실히 표현했다. 영주 시시어스 제공이 지배하는 아젠스의 나라가 무대인데, 양주의 딸 헤미아는 데미트리어스와의 결혼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헤미아는 전부터 라이산더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쳐서 라이산더와 숲속에서 만난다. 한편, 헤미아를 사랑하는 데미트리어스는 헤미아를 찾아 나서는 하면, 데미트리어스를 사랑하는 헬레나는 데미트리어스를 찾아, 결국 모두 숲 속으로 간다. 그런데 이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른은 여왕 타이타니아와 갈등이 생겨 그 해결책으로 요정 파크에게 여왕의 눈에 마법의 풀즙을 넣어주라고 한다. 그리고 방황하는 네 청년들의 사랑을 위해 데미트리어스의 눈에도 마법의 풀즙을 넣으라고 한다. 이 마법의 풀즙은 잠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파크가 잘못하여 라이산더의 눈에 이 마법의 풀즙을 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 마지막에 가서 오베른의 힘으로 헤미아와 라이산더, 데미트리어스와 헬레나, 시시어스 대공과 히폴리타 이렇게 세쌍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처음에 목관악기의 긴 화음이 여리게 연주되는 마법적인 음악이 꿈나라로 이끌어 들인다. 제1테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경묘하게 움직여 요정들의 장난을 묘사한다. 또 영주 시시어스의 궁정을 나타내는 호화로운 음향이 나온다. 제2테마에서는 무곡이 나오고 마지막에 이르러 꿈과 같은 4개의 마법의 음악이 다시 나타난다.
{푸 가 [fuga] : 모방대위법에 의한 악곡형식(樂曲形式) 및 그 작법.원래는 ‘도주(逃走)’의 뜻으로 음악용어로는 둔주곡(遁走曲) ·추복곡(追覆曲) 등으로 번역된다. 그 전에는 카논을 뜻했으나 17세기 이후부터는 모방대위법에 의한 보다 완성된 음악형식과 악보 적는 법을 의미하게 되었다.【구조】 푸가는 역사적인 변화를 거쳐 그 발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J.S.바흐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가지 형태를 보였으나 대부분의 푸가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정해진 수의 성부(聲部)를 지닌 대위법양식으로 되어 있다. 2 주제와 이의 모방이 악곡구성의 기초를 이룬다. 주제는 먼저 곡의 첫마디에서 제1성부로 나타나며 다른 성부들이 차례로 이 주제를 모방해 나간다. 이 때 주제의 원형과는 대개 5도 위나 4도 아래의 모방이 교대로 나타나며 뒤의 모방을 주제에 대한 ‘응답’이라고 한다. 제2성부가 응답을 시작하면 주제를 제시하고 끝난 제1성부는 대위구(對位句)를 이루게 된다. 성부가 주어지는 순서는 자유이다. 3 이상과 같이 주제의 모방으로 이루어진 부분을 제시부(提示部)라고 하며 이 제시부의 사이사이에는 주제와는 별개의 자유로운 대위법에 의한 간주부가 끼이게 되고 푸가는 이 제시부와 간주부로써 이루어진다. 4 위에서 든 공통된 특징 외에 주제의 확대 ·축소 ·자리바꿈 ·스트레토(응답이 주제가 끝나기 전에 나타나는 수법) 등의 수법도 자주 쓰이며 2개의 주제를 지니는 2중푸가나 3개의 주제를 지니는 3중푸가도 가끔 볼 수 있다.【역사】 푸가의 선구자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기악형식인 리체르카레와 칸초네 등이다. 가브리엘리와 프레스코발디 등이 육성시킨 이들 형식은 독일에 들어와 17세기에는 푸가로 발전했으며 셰링, 샤이트, 프로베르거, J.C.F.피셔 등이 푸가의 대위법 기술을 다듬어 그 형식을 명쾌하게 만들어 나갔다. 이들의 업적을 이어받은 바흐는 푸가의 정점을 이룩하였으며 바흐의 푸가는 조성(調性)에 의거한 밀도 높은 대위법인 동시에 특히 인상 깊은 개성적인 주제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바흐 이후 푸가는 독립된 형식으로 쓰이기보다는 흔히 다른 악곡의 한 부분으로 쓰였으며, 특히 베토벤 후기에는 소나타와 현악4중주곡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힌데미트와 바르토크 등의 작품에서 푸가의 뛰어난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기법】 푸가의 변형 기법에는 캐논, 모방, 확대, 축소, 전위, 반대진행, 역진행, 반역진행등이 있다.#캐논 : 캐논은 법칙, 규칙 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음악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모방수법에 의한 대위법적 음악형식을 말한다. 캐논은 한 선율이 먼저 주어진 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타성부에서 특히 음정관계에 있어서 모방되는 형식을 말하며, 선행하는 선율을 주제라고 하고 모방하는 선율을 응답이라고 한다. 푸가와 카논의 차이는 때로 명백하지 않다. 예를 들어 순열푸가라는 것은 순환카논과 같은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이 푸가와 카논은 앞서간 성부의 선율을 뒤따르는 성부가 충실히 모방하고, 그 사이에 다른 음악적 요소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카논이 엄격하게 테마에 묶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반면, 푸가는 테마와 상관없는 자유스러운 에피소드(중간삽입부)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