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가부장제가족1. 원시가정의 발전과정과 개별가정의 생성1-1 인류의 출현과 인류 최초의 성관계{(1) 인류의 생성과정고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인원이 현대인으로 진화하는 데는 대체로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째는 직립인, 곧 호모 에렉투스 단계로서 이들은 대략 100여 만 년에서 30~40만 년 전에 활동하였다. 호모 에렉투스는 직립하였을 뿐 아니라 손과 다리의 기능적 분화가 나타났으며, 비교적 높은 사유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면 생각을 교류할 수 있는 간단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매우 간단한 석기를 제조하여 사용할 수 있었는데, 고고학에서는 이 단계를 구석기 초기단계로 일컫는다. 다만 당시 인류는 체질상 여전히 원숭이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호모 에렉투스 또는 원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둘째는 호모 사피엔스 단계로서 이들은 약 30만 년에서 10여 만 년전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 때가 되면 인간적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고 원숭이의 특징은 한층 더 감소하며, 뇌 용량은 이미 현대인과 기본적으로 동일할 정도이다. 다만 체질상에는 여전히 일부 원시적 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이전 단계에 비해 비교적 복잡해지고, 조잡하지만 여러 형태의 석기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인공적으로 불을 일으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모 사피엔스 단계는 고고학상의 구석시대 중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단계로서 이들은 지금부터 약 10여 만 년에서 5~6만 년 전의 사이에 활동하였다. 이들의 체형은 이제 현대인과 완전한 일치하고, 피부색과 종족의 구분이 생겨났으며, 언어는 더욱 발달하고 석기는 더욱 정교하고 종류가 다양해지는데, 이 단계를 고고학에서는 구석기 말기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현대인의 직접적 조상으로서 이로부터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완전히 현대인류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2) 중국에서 활동한 최초의 인류중국에서 초기 인류의 유골과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르게는형적 형태는 한 쌍의 부부와 그 자손들로 이루어지는데, 같은 세대에 속하는 자손들은 모두가 형제 자매이므로 상호 부부간으로 볼 수 있다. 혈연가족은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역사상 가장 초기에 살았다고 알려진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족이 반드시 존재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아직도 폴리네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하와이의 친족이 이 가족형태에서만 가능한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발달한 가족형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므로 혈연가족을 필연적인 예비단계로 제시하게 된다.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의 원시가정은 일반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활동한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인간들의 사회조직은{여전히 원시군의 형태로서 이를 기본 단위로 한 공동의 생산과 생활이 영위되었다. 그러나 100여 만년 동안의 난잡한 성생활을 경과한 후 인류 역사상의 첫 번째 혼인 형태인 혈족군혼이 출현하였다. 중국 고대 전설 중 대희와 여?는 오누이 관계로서 서로 혼인하여 인류를 번성시켰다고 하며, ??와 고신씨의 딸 사이에 육남육녀가 태어났는데 이들은 형제 사이에 서로 혼인하였다는 전설이 후대로 전해진다. 이는 곧 혈족군혼의 흔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2)중국의 아혈연가정상호 성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대상에서 부모와 자녀 간을 배제시킨 것이 첫번째의 진보였다면, 두 번째 진보는 형제와 자매 간의 성교를 배제시킨 것이다. 형제-자매는 연령이 한층 더 비슷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 단계로의 진전은 극히 중요하며 첫번째 단계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데서 시작하여, 점차로 규율화되고 방계 형제들에게도 확대되어 사촌간이나 종사촌간과 재종사촌간에도 혼인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진보에 따라 근친교배가 금지된 종족이 아직도 형제-자매 간의 혼인이 가능한 종족에 비해혼은 점진적으로 소멸하게 된다.중국의 아혈연가정은 대략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단계의 인류인 산정동인이 활동한 시기에 맹아적인 상태로 출현하기 시작하여 중원과 장강 유역의 앙소문화 시기에는 흥성하는 단계에 이른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산정동인은 이미 초기 단계의 모계 씨족공동체 사회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단계는 불안정하고 간단하기는 하지만 이미 성별과 연령의 구분에 따른 사회적 분업이 나타났으며, 부녀는 씨족의 조직자이자 영도자로서 씨족을 유지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또한, 씨족 내부 성원 사이에는 통혼이 금지되고, 각기 서로 다른 씨족에 소속된 두 무리의 남녀 사이에 상호 군혼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앙소문화 시기의 아혈연가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고고학 자료와 묘장을 통하여 매우 분명히 알 수 있다.(3)중국의 대우혼가정다소 지속적인 대우관계는 이미 집단혼에서도 존재하였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남자는 많은 아내 중 한 명의 주된 아내가 있었고, 그 주된 아내에게 그는 또한 여러 남편 중 가장 주된 남편이다. 이런 관습적 대우혼은 씨족이 발전할수록 그리고 결혼이 불가능한 형제-자매 집단의 수가 늘어날수록 더욱 확고해졌다. 가까운 친척들간의 결혼을 막는 데 씨족의 영향은 더욱 막강해졌다. 결혼금지에 대한 규율이 강화되어 집단혼이 더욱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가족제도가 대우혼 가족으로 바뀌어졌다. 이 단계에서 한 남자는 한 여자하고만 산다. 경제적 이유로 복혼제가 드물긴 했지만 일부다처제와 이따금씩 일어나는 외도는 남성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아내에게는 동거기간 동안 엄격한 정조가 요구되어 아내의 간통시에는 잔인한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결혼유대는 어느 쪽이라도 쉽게 끊을 수 있으며, 그 경우에 자녀들은 이전처럼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속한다. 이처럼 혈족이 혼인관계로부터 점점 더 배제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도태는 계속 효력을 지니고 있다. 대우혼 가족은 독자적 가구를 구성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견고하지 못해서 옛부터 전해 온 공산제적 가구형태를 벗어나지 못한가까운 친족인 어머니쪽 친척에게 상속의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어머니쪽에서는 상속을 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는 상속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쪽 씨족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축의 소유주가 사망한 후 형제자매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가축을 상속받든가 이모들의 자녀들이 가짐으로써 친자녀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다. 재산이 증대할수록 이 재산은 한편으로는 남성의 가족내에서의 지위를 점점 더 중요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된 지위를 활용하여서 자신의 자녀에게 유리하도록 전통적인 상속제도를 폐지하게끔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따른 혈통이 인정되는 한 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모권은 전복되어야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앞으로는 자녀들이 씨족내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아버지쪽의 씨족에 속해야 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충분하였다. 여자 계통에 따른 혈통의 인정과 모계상속의 관습이 없어지고 남성 혈통과 부계상속이 제도화되었다. 모권의 붕괴 후에 급속히 발전한 부계권과 일부일처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에 관해서 몇 마디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이 두 형태의 결혼제도는 한 나라에서 두 형태가 동시에 나란히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예외적인 것으로, 이른바 역사적 사치품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 두 형태가 동시에 제도화되어 나타난 적은 없다. 사실상 일부다처제는 분명히 노예제의 산물로써 예외적인 경우에만 제한되게 나타났다. 셈족의 가부장적 가족에서 가부장만이거나 또는 기껏해야 자신의 아들 중에서도 한두 명만 일부다처제를 실천하며 나머지는 모두 한 명의 아내로 족해야 했다. 이 현상은 동양의 모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다처제는 부자나 귀족들의 특권으로, 주로 여자노예를 사서 부인들로 충원해 왔으며 일반인들은 일부일처제를 생활화하고 있었다.중국의 대우혼가정은 대체로 앙소문화 후기에 출현하여 중원의 용산문화, 서북의 마가?문화, 강한의 ???초기문화이를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종사하고 여자는 주로 가사에 종사하는 등 남녀간의 대체적인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남자가 생산부문에서 주도적 지위를 점하면서 하였다. 종래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모르는 군혼제 단계에서는 누가 어느 자녀의 생부인가 누가 어느 부친의 자녀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자녀를 식별하고 재산의 계승자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보다는 혼인의 범위가 더욱 축소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부부사이의 이별이 용이할 뿐 아니라 부자관계를 판별하기 어려운 대우혼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한 개별혼제였다. 이렇게 볼 때 개별혼제는 남성의 경제력 장악을 배경으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중국의 개별가정은 대체로 중원의 용산문화 후기, 그리고 중원 이외 지역의 경우는 ?가령문화 말기와 량?문화, 제가문화, 대?구문화 시기에 출현하였는데, 그 절대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5000년 전에 해당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당시인들의 생활유적지와 묘장은 당시 성행한 개별혼제의 출현과정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2. 가부장제가족2-1 모계씨족제가족에서 가부장제가족으로의 이행(1)모계씨족제에서 부계씨족제로의 이행모계씨족제는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구성원 내부의 경제적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농경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농경에서 남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종래 여자가 장악한 생산부문의 주도권을 남자가 대신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생산부문의 주도권을 남자가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 결과 남자가 씨족조직의 중심에 서서 씨족을 부계 중심으로 재편하게 되어 마침내 씨족제는 모계제에서 부계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였다고 하여 씨족 내부의 구조와 제도 및 씨족 사이의 관계 등에서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부계씨족제가 형성된 후에도 구성원들은 여전히 원시공산제하의 씨족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였고, 토지 역시 모계 단계와 마찬가지로 씨족의
◈ 차 례 ◈Ⅰ . 서론Ⅱ . 경제학의 1차 분수령Ⅲ . 경제학의 2차 분수령Ⅳ . 경제학의 3차 분수령Ⅴ . 경제학의 4차 분수령Ⅵ . 결론Ⅰ. 서 론쿤은 과학의 발전과정을, 기존 정상과학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마다 새로운 인식의 틀이 등장하여 다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경제학은 크게 네 번의 학문적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그때마다 주류경제학의 이론체계를 수정함으로써 이를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네 개의 분수령은 고전학파경제학의 성립, 역사학파와 공산주의의 도전, 한계학파와 신고전학파의 발전 및 케인즈학파의 수정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그 근본적 존재목표인 인간을 인간답게 귀하고 존엄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데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서 새로운 경제적 인식의 틀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성립된 지난 300여년 동안의 과정을 거시적으로 비교ㆍ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경제학이 하나의 사회과학으로서 성립되게 된 이래의 방대한 사상과 이론을 고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라고 할 수 있겠으나, 각 이론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본질을 다룰 수 있다면 무기력해진 주류경제학이 제약을 극복하고 보다 온전한 경제학 체계를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본 Report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경제학의 사상과 이론들의 논점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이 어떻게 대두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서 고전학파의 성립과정을 고찰한 후, 고전학파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역사학파와 마르크스의 쟁점을 분석하였다. 뒤이어 한계효용학파의 가치론의 문제를 검토하였고, 균형가격의 성립과정 및 가격의 자원배분기능을 다루었으며, 가치론상의 절충문제도 분석하였다. 케인즈이론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서 1920년대의 낙관적인 기대심리가 193 강조하여 이기심의 사회적 기능을 무시한 허치슨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기심을 통해서 공익의 조화를 유도하는 보이지 않은 손 의 원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스미드의 윤리사상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로 하는 가운데, 개인간에 사회적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사회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한 스미드도 최소한의 정의와 강제는 자유시장의 작용에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보았다.그는 이기심이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보고, 절약과 근면의 습관은 일반적으로 이기심에 의해 배양되고 누구에게나 존경과 치안을 받을 수 있을 때 이러한 미덕이 강화된다고 보았다. 『군부론』에서 일관되고 있는 경제행동의 원천적 동기로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욕망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 그것은 인간의 강력한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비심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기심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매일 식료품을 구입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농부나 정육점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또한 그는 이기심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공정하게만 경쟁한다면, 경쟁은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시키고 나아가서 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경쟁 이외의 어떠한 동기도 인간의 근면성을 지속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경쟁은 비효율적인 생산자를 제거하여 생산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하여 가격을 저렴하게 하고, 질이 향상되도록 한다. 따라서 자기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 에 인도되어 희소한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억지로 정부가 국민을 간섭하고 규제할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방임한다면 효율성이 증진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이 침문에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의 경제이론은 국가주의적 경제이론이었다.고전학파의 이기주의와 사유권을 비난한 학자가 크니스였다. 그는 스미드의 이기주의는 사회의 도덕과 법규가 변화되면 그 내용이 변화된다고 하였고 따라서 자유경쟁과 시장경쟁체제는 독일의 국가통일에 역행하며 무익하다고 보았다. 또한 사유권은 시대적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서 중세 이전에는 사유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유권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독일이 처한 환경 및 역사적 현실을 중요하게 다룬 학자는 힐데브란트였다. 그는 인간의 가치판단과 행동원칙은 사회의 발전단계에 따라 계속 변화되기 때문에 경제이론은 각 사회가 처해 있는 발전 단계에 따라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도덕과 종교 및 사회관습이 경제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2. 공산주의마르크스는 그의 주 저서인『자본론』에서 자본주의 경제법칙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의 영향을 받아 잉여가치설에 근거한 분배이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어떤 상품의 가치는 노동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유도해 낼 수 있었다. 임금과 생산물 가치의 차액이 잉여가치가 되며 이것이 이윤과 이자 및 지대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그는 자본을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나누었다. 가변자본이란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지출된 자본으로 임금에 해당하며 불변자본이란 생산시설, 기계, 원료 등을 구입하는데 지출된 자본이다. 그가 이처럼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나눈 이유는 가변자본만이 잉여가치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가변자본을 V, 불변자본을 C, 잉여가치를 S라고 한다면, C/V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S/V는 착취율, S/(C+V)는 이윤율이 된다고 하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는 기업과 산업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커지게 된다. 착취율은 기술이 진보해서 노동의 투입량이 감소하게 되면 또한 증가하게 되므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한다고 결론을 내한 실제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은 그 재화를 생산하는 데 투입된 노동량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용성과 희소성이 가치를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한계효용이 바로 유용성과 희소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전학파는 사용가치와 희소성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았으나, 제본스는 두 가지 개념을 효용이라는 개념으로 통일해서 사용가치는 총효용, 교환가치는 한계효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고전학파는 가치결정요인으로서 공급의 이면에 작용하는 비용을 강조했으나 제본스는 수요의 이면에 작용하는 한계효용 즉 희소성과 유용성을 강조했으며, 고전학파가 상품의 가치를 개인과는 무관한 외부의 세계에서 찾았다면 제본스는 인간의 주관적인 심리상태에서 찾았다.이와 같이 고전학파의 가치론은 생산요소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상품의 가치라고 보았으나 제본스는 노동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생산물의 가치로부터 생산요소의 가치를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제본스는 노동이 가치를 직접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으나 상품의 가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비는 공급을 결정하고 공급은 최종효용도를 결정하며 최종효용도는 가치를 결정한다. 즉 그는 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노동량은 공급에 영향을 미치고 공급은 다시 그 재화의 효용의 강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교화가치를 간접적으로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생산비와 한계효용과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봄으로써 마샬이 주장하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교환가치가 결정된다는 논리와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비용이 가치결정요인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이외에 한계효용학파로 멩거와 왈라스 등 여러 학자가 있으나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을 뿐 주관가치인 한계효용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3. 마샬마샬의 경제이론이 한계효용학파와 다른 점은 효용을 수요분석에 종속시킴으로써 수요이론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과 고전자들보다도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더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거의 과시소비이론은 주류경제학에 점차 수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인간은 우선 먹고 살기 위해서 활동을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자기능력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이와 같은 과시소비가 인간의 강력한 본능이며 경제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는 과시소비의 연장으로서 모든 경제현상을 관찰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비생산적 소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부와 능력에 있는데, 이것을 자기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려는 인간행위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는 『유한 계급론』에서 인간의 경쟁적 본능이 자기보존본능 다음으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전통적으로 부자는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인간의 지위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의해서 평가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또한 그는 생산적 노동은 빈자에 의해서 수행되며 여가는 부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여 여가 자체도 하나의 소비재로 보았으며,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였다.리벤스타인은 그의 1950년의 논문인 『Bandwagon, Snob and Veblen Effect in the Theory of Consumers' Demand』에서 베블렌 효과를 설명하고 있다. 리벤스타인은 베블렌 재화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와 같은 재화는 그 효용이 그 재화의 유용성과 지불되는 가격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의 과시적 가격이 있게 되는데 과시적 가격이란 어떤 상품에 대해서 지불했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격이며, 이와 같은 가격이 어떤 한 재화의 과시적 소비에서 오는 효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요량은 그 재화의 가격과 그것에 의해서 예상되는 과시적 가격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에서 보는 바와 같다. 수요곡선 D1은 과시적 가격이 일정하다는 가정하에서 그려진 것이다. 과시적 가격이 상승한다면, 수요곡선은 D2, D3와 같이 우측으로 이동할 것이며, 균형점도 A, E, F가 되게 된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