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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의 근원 피타고라스학파
    철학이란 것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동양에서는 논어와 맹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서양에서는 그리스 시대의 그리스 철학이 바로 그 시초라고 말해진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 중 소크라테스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서술되고 있다. 모두 17가지의 소제목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 소제목 중에서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고대 그리스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의 공통 유대 역할을 하는 언어, 문화, 민족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나 중점적 관심은 여전히 도시 국가에 머물러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기원전 5세기가 지나면서 아테네가 코린트를 잠식해감에 있었고, 아테네의 직접적 붕괴 원인은 시라큐스 전쟁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내부적인 질투와 분열성을 띤 개인주의로 인해 극도로 분열된 나머지 전체적인 안정을 얻을 수 없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공통적인 제도와 이상, 즉 민족적 서사시와 아폴로 신 숭배, 올림픽 경기개최로 하나의 문화적 단일체로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스 문명은 조화를 근본 원리로 하고 있으면서도 내적인 투쟁으로 분열되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이 문명의 위대성을 높였다. 그들의 문명은 정복자들을 "정복"해버렸고, 오늘날 서양 문명의 골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철학과 과학은 누군가 어떤 일반적인 질문을 던질 때 시작된다. 그리스인들은 바로 이러한 호기심을 맨 처음으로 나타낸 사람들이며, 그들은 200년이라는 단시간 내에 예술, 문학, 과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서양 문명의 일반적 전형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크레타 등으로부터 지식을 물려받았고, 많은 침략 속에서도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의 지식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적 정신세계는 질서 있고 이성적인 동시에 무질서하고 본능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각기 철학, 예술, 과학/원시적인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는 아져 있다. 사모스는 소아시아 연안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海)의 번창한 섬으로, 본토의 상업 도시들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었을 뿐 아니라, 올림포스 신들의 여왕인 헤라의 신전이 있어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이 섬에서 피타고라스는 늘 이방인과도 같은 입장이었으니 그 이유는 어머니는 사모스 토박이였다고 전해지지만, 아버지는 타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출신이었던 듯한 그의 아버지는 가뭄이 들었을 때 사모스인들에게 곡식을 대준 일로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인종적으로도 순수한 그리스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신비적 경향도 사모스인들 사이에서는 별난 것으로 일찍부터 두드러졌습니다. 만년에 그는 이오니아 문화에 등을 돌리고 동방 출신으로 자처했으며, 그리스인들의 긴 옷 대신 페르시아식 바지를 입음으로써 이러한 유대를 상징하였다.부유한 상인이었던 므네사르코스는 그의 아들을 교육시킬 여유가 있었고, 이 여명기에 이미 젊은 사모스인은 가장 위대한 이오니아의 신(新)사상가들에 속하는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스승들 중에는 아낙시만드로스, 페레키데스, 그리고 전설적인 칠현인 중 한사람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꼽히는 탈레스 등이 있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로부터 배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무엇을 갈망했으며, 서양 지식의 진수를 흡수하고 난 뒤에는 동방으로, 즉 처음에는 이집트, 다음에는 바빌로니아로 눈을 돌렸다.피타고라스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여행했다는 것이 정말인지 아니면 후세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확인은 되고 있지 않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건 간에, 역사가 데이비드 린드버그가 지적하는 대로, 그 이야기에는 역사적 진실이 들어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수학을 계승했으며, 피타고라스는 이 보물을 서양에 도입한 인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가 최초의 위대한 그리스 수학자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 여행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테르에게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물들이 바쳐졌다. 이러한 신화적 체제 속에서, 신들은 달랠 수는 있어도 예측할 수는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600년경, 자연현상은 신들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하는 과정들,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과정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신화의 두터운 지층을 뚫고 솟아남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 그 자체를 마주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이러한 지적 혁명의 진원지는 에게 해안에 있는 소아시아의 도시들, 즉 오늘날의 터키땅으로 여기서 이오니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역학을 발견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오니아인들은 올림포스 신들의 인간적 드라마에 등을 돌리고 자연적 설명들을 구하였으니, 세계란 인간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체계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탈레스(Thales)는 지구란 망망한 바다 위헤 떠 있는 거대한 원반이라고 보았으며,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지구란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원기둥이고 태양이란 지구 둘레를 도는 거대한 불 바퀴라고 보았다. 이오니아인들의 이러한 세계관은 꿈 같은 소리고 들리지만, 그렇더라도 자연현상을 초자연적인 힘들에 의거하지 않고 설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 할 만하다. 이오니아 철학자들 개개인의 생각들은 대부분 잊혀졌지만, 그들 전체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서구 과학의 시초가 되었던 것입다. 이오니아인들 중에 특히 한 사람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료 철학자들이 세계를 흙, 공기, 불, 물 등의 물질적 원소들로써 설명하기에 골몰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모스 섬 출신인 피타고라스는 실재의 본질이 비물질적인 수(數)의 마술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주가 수의 속성들 및 그들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 이러한 철학은 「만물은 수」라는 그의 금언에 집약되어 있다. 피타고라스는 또한 깊은 종교심을 지닌 사람으로, 전통적인 신들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수학적 세계상에 편 마신들과 대화하며 별들의 음악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겼으며, '이성적 존재들로는 신들과 인간들과 피타고라스 같은 존재들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신화와 역사가 엇갈리는 눈부신 여명의 지대에 살았던 만큼,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들은 진위를 구별하기 힘들다. 그의 저작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대 문서들에는 그에 관한 언급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대인들중에 가장 논리적이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서도, 피타고라스의 수학 및 우주론에 대한 논의와 기적담들이 뒤섞인 대목들을 찾아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그가 살았던 변화의 시대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그것은 수리과학의 씨앗들을 배태하는 동시에 만신전의 역할도 하였다.사상에 있어서나 생애에 있어서나, 이 사모스의 현인은 두 세계간의 교량이었다.그의 전기를 쓴 3세기 로마 작가 이암블리쿠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지중해 동부 연안을 따라 이집트로 갔고 그의 목적은 이집트의 신성한 제의들과 이집트 종교의 비밀을 배우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표를 수집하고, 어떤 이들은 동전을 수집하거니와, 피타고라스는 종교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종교에 입문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피타고라스가 파라오들의 땅에 도착했을 때, 사태는 그가 바라던 대로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또 다른 전기작가 프로피리에 따르면, 그는 헬리오폴리스에서도 멤피스에서도 신전의 사제들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디오스폴리스에서는 그를 받아들였고, 거기서 그는 여러 해 동안 공부했다. 고대인들은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에서 보낸 기간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지 않으나, 적어도 10년은 되었던 듯하다. 피타고라스의 이집트 체류는 돌연 끝났다.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침공한 페르시아인들에게 그도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던 것이다. 공중 정원과 거대한 피라미드형 신전이 있었다는 저 전설적인 도시에서 그는 바빌로니아인들의 지혜를 배울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고자 수학자이기도 했다. 린드버그는 그들의 수학이 '이집트인들의 수학보다 더 웅대한 질서'를 지닌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피타고라스는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정리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를 어쩌면 그들로부터 배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배우지만, 수학사가들은 그보다 이전의 바빌로니아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타국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온 피타고라스는 이제 바지를 입은 데다가, 머리칼과 수염도 깍을 줄 몰랐다고 하고 이런 행색은 이후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의 특징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피타고라스가 종교단체 겸 학술단체를 창립하고, 당시 종교부흥 운동에 학문을 결부시키려 했다. 당시의 밀의종교(密儀宗敎)의 형식에 따라 절제·질박(質朴)·심신의 단련을 목표로 하고, 신들과 양친·친구·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금욕과 계율에의 복종을 중히 여기고, 원시적 타부(taboo)의 흔적을 나타내는 계율, 아폴론(Apollon) 숭배의 주요 관념인 결신등을 믿었다. 그들은 이 영혼을 진정시키는 음악과 영원 불변의 진리를 가르티는 수학의 연구에 전진한 것이다.그에 의하면 수는 만물은 근본물질이며 원형이고, 만물은 수의 관계에 따라서 질서 있는 코스모스를 만든다고 했다. 우주를 장식이라든가 질서의 뜻을 가진 코스모스라 이름 지은 것도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수학을 영혼의 정화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하학, 수론, 측량술, 계산술의 단계를 넘어서 이론에 까지 발전되었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삼은 것은 수학, 천문학 발달에 좋은 자극이 되었으나, 한편 너무 조급히 수 및 그 관계를 가지고 모든것을 설명하려 하여, 무의미한 수의 신비주의에 빠져 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 학파는 수학적 법칙이 다.
    인문/어학| 2003.04.16| 5페이지| 1,000원| 조회(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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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주 암각화의 비밀
    3000년전의 고래사냥 - 울주 암각화의 비밀반구대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번지에 위치해있으며 1971년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울산을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울산지역뿐만 아니라 국내 암각화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견이후 1975년, 1977년 등 몇 차례에 걸쳐 암각화를 조사하였고 1984년에 종합적인 조사보고서가 간행되는 등 그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1995년 6월 23일 국보285호로 지정되었다.암각화란'암각화' 또는 '바위그림'은 글자 그대로 '바위 위에 다양한 기술로 그려진 모든 그림'을 뜻하는 것으로 '전세계 거의 모든 지역과 시대에 걸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예술 표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반구대암각화는 1965년 12월 울산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사연댐으로 인해 물속에 잠겨 있다. 연중 9~10개월 가량 물속에 잠기며, 2 ~ 3개월 정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어 1년중 갈수기인 10월에서 2월까지의 4개월중 2 ~ 3개월 정도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무척 아쉽다.암각화는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 사회에 일종의 기록수단으로 여기에는 구체적인 형상이외에도 많은 흔적이나 기호 등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암각화를 '종교적 제의에서 사용되는 상징언어이고 그림의 이미지를 통해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보는가 하면 '언어는 존재하지만 글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그림언어 '나 ' 종교적 관념이나 신화에 대한 기호' 등으로 보고 있다. 결국 공통적으로 '암각화가 선사시대 그리고 문자이전 사회의 종교적 제의에 사용된 일종의 표현수단'이라 볼수 있다. 또한 매우 사실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도 당시 제작인들의 종교관념, 생활상, 그리고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는 그림으로 보고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많은 형상들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수있다. 또한 현재까지 남한에 16곳에서 발견된 암각화의 대부분은 추상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동물과 인물을 주로 그렸으며, 어로를 실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고래 면각들은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실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당시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가치가 높다 할수 있다.암각화의 가장 중심적인 제작 기법은 쪼아서 그리기이며, 부분적으로 갈아서 그리기와 가느다란 선으로 그리기도 이용되었다. 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세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형상 전체를 쪼아서 그리는 면그림이 있고, 다른 하나는 윤곽선 또는 윤곽과 동시에 형상의 내부를 선쪼기로 장식한 선그림이 있다. 왼쪽은 동쪽 즉, 바다를 가르키며 바닷동물들의 형상 - 다양한 종류의 고래와 상어, 작은 물고기, 고기를 문 물개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오른쪽은 육지를 가르키며 육지동물- 표범, 사슴, 호랑이의 모습이 보인다. 간혹 배 형상에 10-20명의 사람들이 고래를 잡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울타리와 먹이를 미끼로 육지동물을 사냥하는 모습도 볼수 있다. 그 당시에도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즉, 반구대암각화는 울산만의 바다에서 고기잡이하고 이 지역에서 짐승을 사냥하던 이른바 수렵어로인들이 사냥의 풍성과 생의 번식을 기원해서 만든 사냥 미술로 볼수 있다. 바다물고기, 육지동물, 수렵장면 등의 형상으로 보아 바다의 고기잡이 어부들 집단과 육지의 짐승 사냥군 집단의 두 집단이 풍요를 기원해서 동시에 제사 지내던 미술로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수렵과 어로를 동시에 행하던 주민들의 미술로서, 신석기시대 내지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바다고기와 육지동물이 동시 출토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 바닷가에 사는어로와 수렵을 겸하던 주민집단이 만든 미술로 볼수 있다. 바다물고기 가운데 고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것은 신석기시대 유적지 출토 동물 분포상과 일치하고 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먹이였던 사슴과 고래등의 사냥장면 내지 사냥의식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암벽조각은 당대의 생활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신석기시대 내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고래를 어떻게 잡았는지 하는 사냥방법 문제 등 갖가지 의문점을 쉽게 이해 시켜 준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행한 고래잡이 사냥이나 그물이나 배등을 이용해서 행한 발달된 사냥기술이 신석기시대 사람이나 청동기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개발되었으며, 특히 울산 방어진이 신석기시대 이래로 고래잡이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고래잡이는 신석기시대 이래 발달되어 고래가 식용으로 쓰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집단적으로 수렵어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암벽조각의 의의는 지대한 것이며, 이러한 조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그 체제나 문화단계가 상당히 발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문/어학| 2003.04.16| 2페이지| 1,000원| 조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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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자의 도덕경
    여러사람들은 노자의 사상인 무위자연적인 삶은 잘 알아도 정작 노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 어떤 이들은 노자가 전설상의 인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보면 노자를 이렇게 논해놓았다.노자라는 이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勵享)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姓)은 이(李),이름(名)은 이(耳), 자(字)는 백양(伯陽)이고, 시호(諡號)는 담(聃)이다.사마천이 제시한 출생지는 지금의 안휘성 지역에 자리잡은 박현으로부터 약 40리쯤 떨어진 하남성의 녹읍이라는 곳에 해당한다.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노자에 대한 설명이 모순되는 점이 많이 있다.사마천이 저서하기로는 노자의 성은 이씨로 하였다.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왜나하면 사마천이 노자의 성을 이씨로 보는 것은 단지 산동지방의 이씨 집안이 자기들은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도, 사마천이 한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노자의 인생 경력을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⑴노담은 주나라 장서실을 지키는 관리였다.⑵노자는 공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이것을 참고로 노자가 어느시대 사람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⑶노자는 마침내 서방으로 떠났고 도중에 책(도덕경)을 구슬하고서 이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그리고, 공자에 비하면 노자는 너무 알려진것이 없다.그래서,노자에 대해 황당무계한 전설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 의 사기에 보면 노자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사기의 "노자한비열전"에서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자신을 숨겨서 이름이 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힘쓰는 것이다."는 구절과 그 다음 구절인 "노자는 숨은 군자이다." 라는 기술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란면 노자는 철두 철미 하게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산 사람이다.이쯤에서 우리는 공자와 노자의 맞닥뜨리는 장면을 한번 살펴보자.「공자가 작별을 하고 떠날갈 때에 노자는 전송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부귀한 사람은 사람을 전송하는 데에 재물로써 하고, 마음이 어진 사람은 사람을 전송하는 데에 말로써 한다고 한다. 나는 부귀한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란는 이름을 빌려서 그대를 보내면서 몇 마디 말이나 선사하고자 한다. 총명하여 깊이 사리를 살핀다고 하더라도 이윽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박학하고 달변이며 식견이 아무리 넓어도 자기 자신의 처지를 위롭게 만드는 이는 남의 못된 점을 폭로하는 사람이다. 남의 자식 노릇 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너무 집착 해서는 안되고, 남의 신하 노릇을 하는 이는 자기의 소아를 내버려야만 한다."」이 장면은 한나라에만 이르러도 이미 너무나 유명해져서 산동 지방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기원저 2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묘석에 이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여러문헌에서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둘러싼 이 이야기를 찾아볼수있다. 그러나, 두 성인의 만남에 대한 정확한 날짜, 만남의 횟수, 그리고 그 순간에 조자가 했던 이야기 등에 관한 주자이 제각기 달라서, 어떤 이들은 이 만남을 믿지 않으려고도 한다.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노자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책인 도덕경에 대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먼저,도덕경이란, 도와 덕에 관한 성전(聖典)이라는 뜻이다.도덕경은 종종 "5,000자로 된 책"으로 일컬어져 왔다. 사실 지금 전하는 도덕경 원문의 자수는 이보다 많은 편인데 판본에 따라 글자 수에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 전하는 도덕경의 원문은 상하 2편 81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상편은 제37장까지이다. 상편은 도경(도경:도에 관한 경전)으로 불리고, 하편은 덕경(덕경:덕에 관한 경전)으로 불리지만,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현재 전하는 판본에서는 제1장이 도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제38장이 덕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는 정도이다.그리고, 만약 전설에 전해오는 것처럼 노자가 도덕경의 저자라면 도덕경의 성립 연대는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도덕경이 그렇게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믿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경의 성립연대에 관한 의견은 이론이 분분한 실정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대체로 기원전 4세기 말엽 또는 기원전 3세기 초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빈약하다.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⑴현재 전하는 도덕경의 본문은 공자의 동시대인인 노담 즉, 노자가 쓴 것으로 볼 수 있다.⑵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도덕경의 본문과 유사한 판본이 전국시대 말엽쯤에는 이미 존재하였다.⑶도덕경에 나오는 많은 경구들은 이른 시기의 철학자 집단에서 이미 통용되던 것들로써 반드시 노자가 지어낸 것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그리고 문체의 측면에서 보면 운을 단 운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문장이 있다. 게다가 운문의 운을 조사해보면 여러 가지 불규칙한 사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규칙성이 바로 도덕경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입증한다. 그리고 내용 면에서 보면 노자의 사상 외에도 명가, 법가, 병가등 다른 사상까지 곁들여 있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덕경은 제자백가의 원천이라고 할 초기 고대의 지혜 및 원도가에 해당하는 여러 유파들로부터 각각 일정량을 빌려온, 격언과 경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한 격언과 경구의 집적은 단계적으로이루어졌고, 기원전 3세기 무렵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확정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서로 다른 여러 이본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 전하는 도덕경의 여러 이본과 고대의 여러 문헌에 인용된 도덕경의 문장들 사이에 어째서 서로 다른 수많은 이문이 생기는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기원전 3세기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유가 사상가의 한 사람인 순자는 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노자는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입장만을 알고, 적극적으로 뻗어 나가는 입장은 알지 못한다.상대방에게 복종하는 입장만을 알고, 적극적으로 뻗어나가는 입장을 알지 못 하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따라서 어리고 약한 것과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노자가 주장해않던 이상적인 행동원칙임을 알 수 있다.고대 문헌 가운데 노자사상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또 하나의 문헌은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마천에 따르면 노자의 가르침은 자은과 무명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사마천은 무위라는 원칙을 덧붙였는데, 이러한 무위의 행동 원칙에 입각해서 성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변화에 조화롭게 적응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노자사상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그러나 초기의 도교사상을 기록한 문헌에 도와 덕을 강조하는 발언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들 고대문헌에서는 도와 덕 같은 관념들이 본래 도에 내포된 의미들 (공허,태일,무위) 을 뜻하는 다른 낱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도덕경에서 어머니, 암컷 그리고 신비스러운 자궁 등의 관념은 공허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도가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 공허의 문제는 도덕경 제5장과 11장에 다음과 같이 극히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은 텅 비었지만 힘이 다하는 일이 없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솟아난다. (제5장)30개의 바퀴살이 바퀴의 중심인 바퀴통에 집중한다. 바퀴통의 텅빈 공간 속에 바퀴의 유용성이 있다. 출입구와 들창 구멍을 뚫어서 집을 만든다. 집안의 텅 빈 공간에 집의 유용성이 있다. 따라서 무엇인가 있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유용성이 근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제11장)이상에서 보듯이 공허란 다름 아닌 무로서, 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 가능한 성질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다.이러한 공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왜냐하면 공허는 풀무처럼 마음대로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인(仁), 의(義), 지(智), 효(孝), 충(忠) 이러한 관념이나 태도들은 만일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자연의 질서에 순응시킬 줄 안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도로부터 한걸음씩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다음에서 보듯이 도덕과 정치의 무질서 상태로 점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3.04.16| 5페이지| 1,000원| 조회(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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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고분벽화 평가A+최고예요
    차 례서론2본론.............2-9Ⅰ.의의와 분포Ⅱ.고분벽화의 일부내용Ⅲ.벽화를 통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 분석결론9Ⅰ.서론처음 고구려 고분에 대해서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고구려에 고분벽화는 막연하게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나 잠깐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다루었는데, 이번 학기 이 과목을 듣게 됨으로써, 이런면에 전혀 무지하고 관심도 없는 내가 크나큼 즐거움을 갖게 된 것은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난 이번 과제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무척 난해(難解)함을 느꼈다. 내 조그만 지식으로 이 것을 과연 얼마나 알차게 쓸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됐다. 난 우선 수업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인터넷과 책의 자료를 참조 삼아 나름대로 내 느낌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교수님께서 너그러이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Ⅱ.본론1.의의와 분포고구려 벽화의 바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초기에 그려진 춤무덤, 씨름무덤, 세칸무덤과 같이 벽에 회를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경우와, 다섯무덤(오회분) 사신무덤과 같이 잘 다듬은 돌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들은 모두 후기 벽화에 속한다.고구려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대략 95기가 발견되었다. 집안지역에는 23기가 있는데, 모두루총, 환문총,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회분(다섯무덤)4호묘, 오회분(다섯무덤)5호묘, 만보정1368호분등 4기가 순천지역에, 쌍영총, 강서중묘, 강서대묘,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등 21기가 남포지역에 있다. 또 팔청리고분을 비롯한 6기가 대동지역에 있고, 기타 온천지역에 2기, 평원지역에 1기, 평성지역에 1기 등 평양과 평안남도 지역에만 59기가 있다. 또 황해도에는 안악지역을 중심으로 안악3호분, 평정리1호분을 비롯한 12기가 있다.이렇듯 고분벽화는 집안지역과 평양, 안악, 남포, 순천, 대동지역 등 고구려의 중심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및 고려에도 고분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양과 질에서 고구려와 비할 바가 못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혼이 담겨진 위대한 예술작품이며, 그들의 사상과 생활모습이 담겨진 고구려사의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다.2.고분벽화의 일부 내용무용총이 고분은 춤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무용총이라고 이름지어졌는데, 춤추는 무희들이 그려져 있는 벽화를 통해 죽어 서도 노래와 춤을 즐기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씨름도각저총의 유명한 씨름도. 커다란 나무 한쪽으로 역사들의 씨름 장면이 보이는데, 왼쪽 사람은 서역인인 듯 하다.각저총 현실 동벽에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각저'란 힘을 겨루어 기예를 보이던 유희의 일종으로 씨름을 뜻한다. 큰 나무 밑에서 잠방이 차림의 장부 둘이서 씨름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씨름 장면을 보고 있는 노인이 그려져 있다. 큰 나무는 약간 기울어진 붉은 갈색의 줄기에서 뻗은 가지의 끝이 마치 곰의 발 모양을 하고 있고 가지 끝에는 솜뭉치 같은 연한 녹색의 잎이 나 있으며 가지에는 네 마리의 검은 새가 앉아 있다.수렵도현실 서쪽 벽면에 있는 것으로, 평양 약수리 고분의 수렵도와 함께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상을 전하는 대표적 그림 중 하나다. 수렵도의 아래 부분에는 호랑이를 쫓는 무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쏜살같이 달 리는 말 위에서 이를 포획하려는 무사의 기백과 긴장된 움직임이 화면에 가득하다. 오른쪽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 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 마리씩 그렸으며,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는데,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고분축조 및 벽화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로 추정되며 벽화는 대체로 철선묘법으로 그려졌는데,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동물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신도이다. 사신이란 동서남북 4방위의 수호신을 말하며, 동쪽에 청룡(靑龍), 남쪽에 주작(朱雀), 서쪽에 백호(白虎), 북쪽에 현무(玄武)가 있다. 이는 단순한 환상의 동물이 아니라 方位神내지는 道敎를 포함한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靑龍은 東方의 守護神으로 네 발을 갖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白虎와 비슷하다. 다만 머리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며, 청룡은 긴혀를 갖고 있으나, 백호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방수호신인 玄武圖는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이나, 약수리고분과 삼실총의 것은 양(염소)과 뱀이 어울린 모양을 하고 있다. 더구나 약수리 고분의 현무는 거북 잔등 모양을 하지 않고 있어 특이하다.남방수호신인 朱雀는 닭, 봉황, 꿩 등의 결합체로서 큰 날개를 갖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무용총의 경우와 같이 닭이 주작의 위상을 대변하기도 하고, 5회분 5호묘의 주작은 빨간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되기도 하였다. 청룡은 비늘모습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뿔과 혀만이 길게 위로 뻗어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백호는 흰색 바탕에 털무늬가 있어 비늘무늬를 한 청룡과 다르다. 특히 5회분 5호묘의 백호는 부릅뜬 빨간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낸 큰 입, 그리고 위로 치켜 올라간 귀에 굵은 목을 있었다. 그리고 날개 밑에는 빨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앞발이 곧게 뻗어지고 있으며, 사방에는 화염문으로 둘러 쌓여지고 있다.그러나 현재 이 청룡과 백호는 크게 훼손되어 있으므로 그 외형의 차이는 [긴 혀와 날카로운 발톱]뿐이다. 즉 청룡은 긴혀로 위로 힘차게 뻗고 있으나 백호는 없다. 그리고 백호는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으나, 청룡은 발가락 속에 발톱이 들어가 있다. 다만, 백호도 날개를 갖고 있어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덕흥리 고분은 안악 3호분(동수묘) 다음으로 연대가 확실한 고분이다. 평양 서북방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묵서명에 의해 오늘의 북경 지방인 신도현 출신으로 유주자사를 지냈고 불교신도이며 고구려에 와서 국소대형의 관작을 받고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 18년(408)에 별세한 사람의 무덤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고분의 경우도 벽화의 내용은 안악 3호분과 같으나 견우직녀, 수렵도 등이 있다. 이 사진은 주인공에게 그 예하의 13군 태수가 하례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화려한 장방 안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다.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갈색의 맞섶 겉옷에 넓은 검은 띠를 맸으며 오른손에는 검은 털 부채를 쥐고 왼손은 띠 앞까지 올리고 있다. 겉옷 밑에는 담녹색 옷을 입은 것이 보인다. 얼굴은 넓고 둥그스름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약간 높으며 가느다란 눈매에 약간 긴 콧등, 그리고 팔자형 수염을 잘 다듬고 턱수염을 길러 위풍당당한 풍모를 하고 있다.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 광개토대왕 때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중국 화북 지방까지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벽화를 통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 분석고구려벽화는 당시의 사회생활이나 행동양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의 실제 삶을 나타내고 있다. 벽화마다 나타난 宴會圖와 接客圖는 귀족들의 사치와 여유를 나타내고 있었고, 狩獵圖는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군사훈련과 인물발탁의 과정이 있다. 특히 고구려인의 귀족적 취미는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수렵도의 화살촉에서 그 상징적 은 목표물을 단순히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맹수를 쫓아내서 작은 동물(사슴·토끼)을 잡는 방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이러한 벽화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인의 尙武的 氣風과 樂天的인 기질을 잘 알 수가 있다. 무영총에서 나타난 무사들의 사냥도나 삼실총의 역사들은 팔뚝이 가슴의 두배나 되고 있어 힘과 패기에 찬 고구려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벽화에서 보여지는 연회도에서는 으레 화려한 실내장식과 무덤주인공에게 따른 시종자들의 그림은 고구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동물이 뒤엉킨 사신도의 환상적 표현은 내세에 대한 강렬한 투영을 엿보게 하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신과의 조화에서 고구려의 종교관과 사생관을 보여준다.더구나 벽화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구도와 다양한 색상은 온도·채광·습도 등을 조절한 과학적 뒷받침에서 가능한 것임은 사실이다. 또한 고분벽화에서 고구려여인들의 「점박이」 옷이나 瓔과 折風과 같은 모자의 풍속은 어느 벽화나 비슷하게 나타나 있어 고구려인들의 전통적 습관으로 보인다.고구려벽화에는 당시 음악·무용·교예 등 예술의 발달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악기·관악기·타악기 등 21종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王山岳의 거문고〔玄琴〕는 4현금(무용총)과 6현금(미천왕릉)에서 볼 수 있으며, 비파모양을 한 阮咸은 삼실총과 미천왕릉에서 찾을 수 있다. 관악기로는 나팔·저·소 등이 있으며, 타악기로는 북과 장고가 있다. 이러한 다양한 악기와 연주장면은 고구려인의 낙천적인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그 외 높은 나무다리 위에서 춤을 추는 교예도 있어 춤의 다양성을 추측할 수 있다.이러한 장식무늬의 발달은 진파리 1호분이나 흥륜사(경주)출토 와당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문양이 통일신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그 문화를 濟·羅에 전파함으로써 민족예술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나아가서 벽화의 인물이 동물뿐 아니라, 식물과도 공생하였으며 불교가 양자를 연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長川一號墓의 蓮華化生은 만물하겠다.
    인문/어학| 2002.06.17| 10페이지| 1,000원| 조회(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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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서론1. 소리바다의 정의소리바다는 인터넷 음악공유의 공간으로 사용자끼리 서로의 mp3 파일을 검색하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P2P 프로그램이다. 기존 웹 형식의 mp3 검색엔진을 사용하다보면 대부분 오래된 링크라 다운로드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나, 소리바다는 이와는 다르게 현재 연결된 사용자들을 실시간으로 직접 연결시켜주는 새로운 개념의 mp3 검색/공유 프로그램이다.2. P2P란?"P2P"란 "Peer to Peer"의 약자로 "개인 대 개인"이란 뜻이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P2P 기술이란 서버가 모든 데이타를 관리하고 전송하던 기존의 "클라이언트 서버" 방식과 상반되는 말로서, 개인의 컴퓨터가 클라이언트는 물론 서버 역할까지 할 수 있게 구현해주는 기술이다. 즉, 개개인들이 정보제공자가 되어 중앙서버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방식이다.Ⅱ.본론1. 소리바다에 대한 찬반논쟁들1)찬성측 입장들A.저작권을 침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소리바다는 듣고 싶은노래를 따운받아서 들을수 있는 곳이다 . 자신이 듣고 싶은 노래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테이프나 음반을 사지않고도 쉽게 접할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가입자와 인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반협회에서는 소리바다로 인해 자신들의 저작권이 침해를 받는다고 고소를 했다. 나는 소리바다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 소리바다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든다고 저작권 침해라고 고소를 하는 음반협회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소리바다가 어떤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고 이익만을 따지는거 같기 때문이다. 소리바다로 인해 예전에는 테이프나 음반을 사야 노래를 들을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누구나가 쉽게 들을수 있게 되었고,또 돈이 많지 않은 학생들은 돈을 걱정안하고 노래를 들을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미리 사고싶은 노래가 어떤지 들을수도 있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 후회하는 경우가 줄어들껏이다. 물론 당사자의 입장이 되서 생각해 보라고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소리바다에서 노래를 따운받는다고 해서 좋아하는 가수들의 테이프나 음반을 사지않는거는 아닌거 같다. 내주위에 있는 사람들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판매량을 늘이기 위해 테이프를 3장 노래시디를 2장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또 나도 친구의 생일때 좋은 노래가 있어 들으라고 테이프를 사준적이 있다. 그리구 항상듣기 위해서도 테이프를 산다 . 그러므로 약간의 음반판매량에 영향을 끼져도 저작권을 침해할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닌거 같다. 그리고 소리바다 말고도 이런 싸이트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는데 소리바다만 고소를 하는것도 잘못됫다고 생각한다. 만약 소리바다가 없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음반을 사지말자는 운동을 벌일수도 있어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수도 있으므로 고소보다는 타협으로 해결하면 서로간에도 좋은듯 싶다.B.소리바다 측은 절대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네티즌이 좋아서 그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서 같이 공유하는것인데..소리바다측은 절대 저작권침해가 아니다... 글구 네티즌이 받아쓰기만 하는것도 아니고 다른 사용자에게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mp3를 나누어 주니깐 저작권과는 절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나도 소리바다를 잘 사용하고 있으면서 저작권침해라는 것을 많이 들었고 무슨 서명운동에도 참여 했는데 절대로 소리바다 잘못이 없다고 서명을 했다....다른 사람들은 소리바다가 저작권을 침해해서 고소를 하고 소송을 걸고 있다고 하던데....내같으면 그런 고소나 소송같은걸 하지 않을것 같다. 네티즌이 좋아서 하는것이고 네트즌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모든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더욱더 더욱더 반대이다! 소리바다측은 아무 잘못이 없고 잘못이 있다면 그냥 네티즌을 위해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든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2)반대측 입장A.소리바다라는 것은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합니다.찬성에 글을 남기신 분들과 같은 생각인데, 가수들이란 직업은 상업입니다. 가수들은 노래라는 것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수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이 부른 노래를 담은 음반이 나옵니다. 가수들은 이 음반을 팔면서 자신들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헌데 소리바다라는 사이트는 가수들에게는 치명적일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겠지만 가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무심코 ' 나 혼자만 그러는건데 머...'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소리바다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서로의 파일을 공유하겠지요...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가수들은 불리해지겠지요???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B.소리바다 측이 나쁜 취지에서 소리바다라는 사이트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점은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소리바다는 엄연한 저작권침해이다.얼마전까지만 해도 길보드가 없는 곳은 드물었다. 잘 나가는 음반들을 더빙해서 그것을 반값으로 싸게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를 저작권침해라고 해서 단속하였다. 이것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가수는 대부분 음반판매로 판가름이 맺어진다.가수들이 노래와 쇼프로를 동행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기 PR을 해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자신의 음반판매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물론 기획사측도 포함된다.)가수들이 음반을 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 노력과 정성이 묻혀버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무료로 이 노력과 정성을 쉽게 본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2. '소리바다' 기소 배경과 전망경찰이 국내 최대의 음악파일 공유 사이트인 '소리바다' 운영자를 기소한 것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뤄지고 있는 'MP3' 파일의 무단 배포 및 사용에 대한 경고로 풀이된다.저작권 대상인 음악파일을 정당한 대가없이 무단 사용하는 것은 불법 행위라는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 관계자는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MP3 파일을 무단으로 주고받는 것을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게 현실"이라며 "소리바다가 회원들 사이에 음악파일 교환을 중개한 것은 불법행위"라고 말했다.검찰은 소리바다가 미국의 '냅스터'와 달리 파일목록과 IP주소 등을 서버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놓은 상태에서 배포하지 않고 단순 중개역할만 하고 있지만, MP3 파일 전송 프로그램을 개발, 배포하고 파일 전송을 중개한 것은 명백한 저작권 위반 행위라고 판단했다.결국 소리바다가 네티즌들이 음악파일을 회원들과 임의로 공유하도록 함으로써음반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음반업계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셈이다. 음반업계쪽은 지난해 5월 소리바다 사이트 개설 이후 국내 음반매출 손실액이 2천억원에 달한다면서 사이트 운영 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소리바다 운영자를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이 소리바다 운영자를 기소한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MP3 음악파일 사이트와 관련한 민.형사 소송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 있는데다 이미 보편화된 '인터넷 문화'라는 사건외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결정이 쉽지 않았던 것. 일단 소리바다를 사법처리할 경우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수 있고 수백만명에 달하는 소리바다 회원들의 반발도 예상됐다. 형사처벌에 이어 사이트 폐쇄조치가 내려질 경우 디지털 콘텐츠 유통기술 개발에 찬물을 끼얹고 국내 MP3 플레이어 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또 음악파일을 직접 주고받은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회원은 처벌하지 않고 '방조자' 성격이 강한 사이트 운영자만 처벌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의견도 일부에서 제기됐다. 이 때문에 검찰은 사건 당사자들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지만 이역시 쉽지 않았다. 소리바다쪽이 '사이트 유료화를 통해 저작권료를 지불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물러섰지만 음반업계가 사이트 폐쇄라는 강경입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 결국 검찰은 당사자 조사와 소리바다 회원들에 대한 e-메일 조사, 법리검토 등을 거쳐 소리바다가 '저작물 전송은 저작권 침해 행위'로 규정한 현행 저작권법에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회과학| 2002.06.03| 4페이지| 1,000원| 조회(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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