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플루타르코스와 사마천의 일대기2.대표작들에 투영된 그들의 사상3.플루타르코스와 사마천의 비교1.플루타르코스와 사마천의 일대기♣플루타르코스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 출생. 영어식 이름은 플루타크(Plutarch).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의 명문가 출신으로 일찍이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고, 다시 자연과학과 변론술을 배웠다. 그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 로마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과 깊은 친교를 맺어 아카이아주(그리스 본토)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다. 만년에는 델포이의 최고신관(最高神官)으로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인으로서 대지의 중심인 델포이의 아폴론 신역의 황폐화를 염려하여 그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그는 '최후의 그리스인'으로서 고전 그리스 세계에 통달한 일류 문화인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신봉하고 박학다식한 것으로 유명하며, 저작활동은 매우 광범위하여 전기·속윤리(俗倫理)·철학·신학·종교·자연과학·문학·수사학에 걸쳐 그 저술이 무려 250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작품은 《전기》 《영웅전(플루타크영웅전)》 《윤리론집》(모두 그리스어로 씌었다) 등이다.전기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사한 영웅 23쌍의 대비열전(對比列傳)과 4편의 단독전기인데, 개인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기술하여 만인의 귀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사료비판이 결여되어 있어 제1급 역사기술로는 평가되지 않으나 근세 서유럽에서 널리 애독되었다. 《윤리론집》은 표제와는 달리 인사일반에 걸친 수필집으로서, 그 가운데는 대화 형식으로 된 것도 있고, 처세훈(處世訓)을 중심으로 한 중용(中庸)을 취하는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발췌여기에 좀더 덧붙이자면, 그가 태어난 것은 기원 46년경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기원 120년경의 일로서, 플루타르코스 스스로가 전기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연대와 기년에 관해서는 극히 무관심했기 때문에 현재 자료만으로는 그의 티아의 경기위원장직을 맡았다는 사실이다.끝까지 그리스 인이었던 플루타르코스에게 있어 델포이는 대지의 중심이며, 아폴론의 신탁은 진리였다. 그는 신탁에 대한 인심의 이산과 신역의 황폐를 방지하고 고전기의 번영을 부흥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그리스 인은 물론 트라야누스 황제를 포함한 로마 인 사이에서 열심히 활동한 결과 부흥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것은 델포이 출토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입상 비명에 그의 이름과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글귀를 통해 그가 행했던 행동들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사마천사마천은 자신의 생몰 연대를 써 놓지 않아 정확한 날을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일반적으로 B.C. 145년경인 한제국 효경제 때에 태어나 효소제 시대에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사마천이 실질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앞의 두 황제 사이에서 54년 간 재위한 효무제 시대인 것이 분명해진다.사마천의 먼 조상은 주왕조 때의 사관이었다. 열국들이 대립하기 시작하는 춘추시대가 되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산서성의 강국인 진나라를 섬기게 되는데, 얼마 뒤 사마씨의 또 한 일족은 서쪽땅 섬서성으로 들어가 신흥세력인 진을 섬기게 되며, 사마천은 결국 이 갈래의 일족에 속하는 것으로 전해진다.사마천은 섬서성 한성현에서 출생했다. 예부터 하양이라 불려졌던 황하의 나루터인, 그 유명한 이 가까이 있었기로 사마천도 바로 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어린 시절의 사마천은 의 산간벽지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며 자란다. 거기서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부친 사마담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사관이 가져오는 문서나 기타 기록들을 정리 보존하는 태사령이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천도 글과 관계 있는 영향을 입었을 것이 분명해진다.한의 효무제는 B.C. 138년 수도 장안에서 북서쪽 40킬로미터쯤 떨어진 무릉에다 자신의 능묘터를 정했다. 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그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사마천도 가족들과 함께 그 바을 찾고 그들의 전설에 접하면서 감격해 하고 있다. 역사적인 영웅인 제의 태공망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그의 인간됨에 유념하기도 한다. 곡부에 들러 숭배해 마지않던 공자의 묘당을 방문함며 공자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오래 동안 상상해 보기도 한다.주의 무왕이 포악한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그나마도 무력혁명이라 하여 그 밑에서 녹 먹을 것을 비굴하게 여겨 수양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백이. 숙제의 유적을 찾고는 심란해 한다. 전국시대의 맹상군과 신릉군과 춘신군 등과 인연이 있던 지방을 지나칠 때에는 q반드시 그들의 유적을 답사하고는 후손들에게 그들 생전의 인간 됨됨이를 자세히 물어 두곤 했다. 초의 회왕 때 간신의 참소를 받고 끝내 강남의 멱라수에 투신자살한 충신 굴원의 유적을 찾고는 그의 신세를 억울해 하기도 한다. 진나라가 구축한 만리장성 위로 올라, 산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를 메운 장대한 광경을 목도하고 상상하면서 이런 대사업에 투입되어 죽어 간 슬픈 농민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치기도 한다. 장성 축조를 지휘했던 장군 몽염이 시황제의 죽음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끼며 홀로 착잡해 하기도 한다.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장 한신의 고향을 굳이 찾아, 그가 가난에 쪼들리고 비천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원대한 꿈을 잃지 않더라는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며, 큰 인물로서의 비범한 재능과 행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세심히 관찰 기록한다.사마천은 맨처음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남하해 회수와 양자강 유역을 돌아 회계산을 올랐으며, 구의산을 둘러보고 원수와 상수를 배로 건넜으며, 다시 북상해 민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공자의 조국인 노의 수도 곡부를 거쳐 천하 명산 태산에 올랐고, 추현의 역산에도 올랐으며, 파현. 설현. 팽성형을 들르고 양과 초를 거쳐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적어도 3년은 충분히 걸렸으리라는 추측이며, 돌아온 직후 낭중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돼 있다.그가 처음부터 역사를 서술한다는 결심을 하고 는 사마담은 불행히도 봉선 참례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더구나 기록관인 태사령으로서도 참례 못 하게 된 사실이 못내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다. 동도 낙양에 잔류하면서 실의와 낙담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이 더욱 위중해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직감했다.병석에 누운 채 사람을 시켜서 아들 사마천을 급히 낙양으로 불렀다.'주공단이 사거한 지 5백 년 만에 공자가 를 저술해 끊어졌던 기록의 전통이 되살아났다. 공자 또한 사거한 지 5백 년 만인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명주와 현군과 충신과 역사 등의 수효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못다 한 일 때문에 한이 많구나. 나를 대신하여 네가 그 기록들을 남겨 내 한을 풀어 주면 어떻겠느냐.'아들 천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민한 자식이오나 삼가 아버님의 유지를 모시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구래의 기록들을 잘 정리해 결코 빠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런 약속이 사마천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6세였다.그 후 3년이 지나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다. 그는 우선 황실도서관에 비장되는 책으로 일컬어지는 석실. 금궤의 서들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전제국의 연대기를 읽었다. 한제국의 조칙과 대신들의 상주문 따위e들도 섭렵했다. 오경인 도 다시 정독했다. 등도 열심히 탐독했다.드디어 저술에 착수했다. 거기에 몰두한 지 7년 뒤 어느 날, 사마천에는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장군 이능이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방 원정길에 올랐다가 흉노군 1만의 적을 베고도 8만 대군에 포윈되어 항복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격노한 효무제는 이능을 문책하는 어전회의를 열었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사마천이 단신 이능을 변명하고 나섰다.'이능만큼 충직무쌍한 장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금의 어떤 명장도 5천의 소수병력으로 8만 대군을 이길 수는구인 임안(任安)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착찹한 심정으로 서한(報任少卿書)을 보내 지난날 자신이 옥에 갇히고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는데, 편지 내용중 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처형당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사기 완성후 몇 년더 살다가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2. 대표작들에 투영된 그들의 사상①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그가 영웅전의 의 첫머리에서 집필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내가 처음 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남을 위한 것이었지만, 쓰다보니 어느새 나 자신을 위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인들의 덕행을 거울삼아 내 인생을 조절하고 일상생활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전기란 위인들의 생애를 연구함으로써 그들의 재능과 품성을 알고, 반가운 손님을 맞아 환대하듯이 그 인생의 모든 면을 환대하며,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고상하고도 가치있는 모든 것을 뽑아낸 것이다.아,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들의 덕성을 함양하는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이겠는가? -이하 중략-나의 방법은 역사를 연구하여 기록하는 도중에 얻어지는 인물들을 잘 알게 함으로써 나는 사회에 묻혀 사는 동안에 오염된, 천하고 사악하고 야비한 인생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② 사마천의 '사기'그의 집필동기에 대한 답변은 의 맨 마지막에 있는 「태사공 자서」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해제는 그 「자서」에 대한 사족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지만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첫째, 발분(發憤) 의식의 소산이다. 사마천은 부친인 사마담의 유언에 따라 10여 년간에 걸쳐 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친구 이릉 (李陵)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에 의해 궁형 받은 기원전 98년 이후, 집필 방향을 바꾸게 된다. 사마천은 친분이 그다지 두텁지도 않은 이릉을 변호하다가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