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의 사회와 문화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을 뜻하며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있던 정치집단들을 말한다. 삼한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3세기 후반 삼국지 동이전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모두 합하여 78개의 국명이 실려 있다.※소국의 정치권력소국의 구성단위는 국읍 읍락 소별읍 등이 있다. 국읍은 소국의 중심되는 읍락을 뜻하며 규모가 크거나 일반 읍락과 구별되는 기능을 일부 발휘하고 있다. 소별읍은 소국의 일부로 통합되지 않고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고 있었던 개별 읍락을 지칭하는 것이다. 읍락은 자연촌락과는 달리 정치 경제적으로 통일적인 기능을 발휘하던 개별 집단이었다. 읍락은 독립된 통치자를 세우고 있었으며 삼한에서는 읍차 라 불렸다. 그리고 읍락은 경제활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활동이 보장되는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삼한은 국읍을 중심으로 단일한 지배자를 세우고 대외적인 통힙돤 정치체로 기능을 하였고 읍락단위의 소규모 활동보다는 여러 읍락을 대표하여 국읍의 주수가 각종의 대내외 교역활동을 주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읍락들을 결속시키고 국읍주수의 통치기반을 유지시켜주는 중요 작용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집단간의 무력 항쟁과 이에 대한 공동 방어라는 측면이 고려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는 유사시에 국읍 주수의 통솔하에 읍락의 족장들이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공동 대응하였다고 한다.※농경생활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주민들이 정착생활을하고 오곡과 벼를 재배하였으며 누에와 뽕나무를 길러 생사와 비단을 생산하였다. 특히 진변한지역은 철자원이 풍부하여 제철과정을 거친 철기 제작원료가 마한 동예 왜 낙랑군 대방군 등지로 수출되었으며 철이 화폐처럼 각종 교역활동의 매개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기제작에는 주조와 단조의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였으며, 높은 수준의 강철 제작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읍락민들은 농경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철생산과 토기제작 분야에서는 이미 전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철기는 생산지가 국한되어 있고 전문적인 제작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므로 처음부터 소수집단에 의해 독점 생산되었다. 그러나 삼한의 주된 경제기반은 농경이다. 조 콩 보리 밀 팥 등 밭작물이 고루 재배되고 있었으며 삼한지역은 기후화 토양이 벼재배에 적합하여 벼농사가 특히 발달하였다. 벼농사의 대부분은 논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역에 따라서는 밭벼가 재배되었을 가능성도 시사되고 있다. 수전의 입지형태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 벼농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일본 시대 수전을 참고하면 삼한지역 역시 배수를 중심으로 하는 수전이 널리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의농업생산의기술적 토대는 청동기시대이래 따비와 괭이 중심의 농경기술이 확대 발전된 것이나 철기의보급으로 목제 농기구가 점차 철제로 전환되면서 생산력면에서 획기적인 성장이 있었다. 농기구의 철기화 과정을 살펴 보면 수확도구가 가장 먼저 철제로 전환되었다. 석제 반달칼이나 돌낫이 사라자고 철제 손칼과 낫이 사용되면서 노동력의 절약뿐 아니라 수확 적정기를 놓침으로서 입게되는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어 결과적으로 생산력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철제 손칼은 일상생활에서 다용도로 사용되는 도구로 보급도가 가장 높아 일반 주거지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다. 낫에 비해 손칼의 보급도가 훨씬 늪다는 것은 수확작업은 여전히 선별적인 이삭베기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초기와는 달리 2~3세기 이후가 되면 낫의 보급량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철제 농*토목구의 보급으로 인해 경작기술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발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삼한에서 널리 사용된 철제 기경구의 하나는 철제 따비이다. 땅을 가는 기본 도구인 따비의 경우 철제 날을 끼운다면 작업의 효율화는 물론이고 보다 깊이 땅을 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생산효율을 직접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철제 따비는 대부분이 주걱형이다. 따비는 선칼이나 낫과 달리 중국제 농기구와는 형태를 달리하는 한반도 독자적인 것으로 전통적인 목제 따비를 날 부분만 철제로 전환한 것이다. 다호리에서는 주걱형과는 달리 날끝이 뾰족한 따비도 출토되었는데 철기 제작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전통적인 목제 농구에 다양한 응용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비와 함께 중요 농기구의 하나로 사용되어 온 것은 괭이이다. 청동기시대 이래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나무괭이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중 철제 괭이로 먼저 전환된 것은 농*토목구로 사용되는 날끝이 좁고 긴형태의 것이다. 쇠괭이는 주조철부로 불리면서 공구류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다른 농구와 달리 주조에 의해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이 형태의 괭이는 밭농사에 있어서 고랑을 파거나 작물뿌리를 제거하는데 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해를 묵힌 경작지를 다시 개간하는 데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쇠괭이의 보급에 따라 특히 전작 농경지의 절대 면적이 크게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호리고분에 부장된 주조 도끼를 공구도 농구도 아닌 철소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다호이 출토품은 전혀 사용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루를 끼우는 구멍 속에 주조시 끼워 넣은 내형을 파내지도 않은채 부장된 것이어서 의문이 가는 점도 있다. 그러나 무덤에 부장된 철기는 실용적인 면 이외에 무덤 주인공의 경제적인 활동과 정치 사회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용 흔적이 없다고 하여 모든 주조괭이를 비실용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U자형 철제 삽날 또는 가래날로 목제 삽이나 가래날의 가장자리 양면을 5~7cm 넓이의 철판으로 테를 돌린 것이다. 이 종류의 농기구는 홅을 파서 옮기는 데 편리한 도구로 주로 수전농사에서수로를 파거나 보수하고 또는 급수나 배수 작업과 관련하여 물길을 트거나 막는데 사용되는 농구이다.이상의 철제 농기구들은 공통적으로 철제 무기와 여러 가지 사치품들이 풍부하게 부장된 대형 분묘에서 출토되고 있다. 철제 농기구가 지배계층의 분묘 부장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단계에서는 생산도구 그 자체가 중요한 자산일 뿐 아니라, 무기 못지 않게 정치적인 권위와 경제적인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는 증거이다. 아직도 철제 농기구의 소유는 지배집단을 중심적으로 제한적으로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작지 확대화 생산력 증대라는 경제적 혜택을 집중적으로 누리는 계층도 이들이었다. 따라서 철제 농기구와 각종 공구의보급으로 집단 전체의 총 생산력이 증대한 것은 사실이나, 지배집단이 획득한 잉여산물이 사회 전체의 평균적생산력 증대 비율을 앞지르기 때문에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계층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지배집단의 권력기반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잉여산물의 급속한 축적은 집단간의 교역을 활성화시키고 사회,경제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교역활동대외교역 활동을 자극한 일차적인 요인은 한군현설치로 인한 중국산 사치품의 등장과 변진한의 철자원이며, 이를 매개로 각 소국간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중국 군현, 왜, 삼한 사이에 활발한 국제교역이 전개 되었다. 중국과의 교역에서 행해지는 주된교역 형태의 하나는 조공무역으로 한반도에서는 주로 낙랑군, 대방군과 같은 중국 군현을 통한 간접적인 조공무역이 일반적이었다.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 군현으로부터 들어오는 중요 교역품은 의책,동경, 비단, 등 실용성보다 주로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데 효과적인 물품들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조공무역 이외에 삼한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교역 형태는 중국 상인들에 의한 교역활동이다. 상인이라는 전문적인 중개인이 등장하게 되면 화폐 또는 화폐의 기능을 가지는 교역의 매개물이 사용되기도 하고 교역대상과 교역과정도 다양하고 자유로워지게 된다. 낙랑군에 와있던 중국상인의 존재가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오수전,화천,과 같은 중국 화폐는 중국 상인 내지는 군현 거주 상인들에 의한 상거래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군현 관리에 의한 공적물자 이동과 대비시켜 사적인 상인들의 교역활동을 민간교역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중국 화폐들은 군현 이외의 지역에서는 대개 전남 해남이나 , 제주도 산지구 , 경남 마산등 바다에 면하여 해로를 통해 외부와의 통교가 편리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상인들에 의한 민간 교역활동이 이루어지던 중요 교역루트는 해로 였으며, 그들의 직접적인 교역대상은 주로 서남해안지역의 소국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계층 분화지금가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삼한은 이미 계층분화가 상당히 진행된 사회였다. 국읍의 주수를 비롯하여 읍락의 족장들은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누리면서 지배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들은 효율적인 생산도구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고 대외교역을 독점함으로써 그들의 권력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다호리유적에서 나온 붓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중국인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나마 한자를 이해하고 있었고 생활용기로 칠기를 사용하였으며, 수정이나 유리로 만든 장신구로 몸치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념적으로는 아직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인물일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족장 계층 아래로는 대다수의 주민들이 읍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삼국지)동이전에서는 하호 라고 칭하고 있다.삼한의 읍락에는 하호 이외에 노비가 있었다. 노비 발생의 일반 예에 비추어 삼한의 노비 역시 그 대부분이 형벌을 받은자, 채무를 갚지 못한자, 전쟁포로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삼한의 농업생산을 담당한 주요 계층은 하호로 불려진 대부분의 일반 읍락민들이었다고 생각된다.※생활과 풍속삼한의 생활양식 중 먼저 주거에 관한 기사를 보면 마한인은 움집에 살았는데 모양이 무덤 같았다고 하며 변진한의 가옥은 나무토막을 가로로 쌓아올려 그 모양이 마치 중국의 감옥과 같다고 하였다.
신석기 전기에 대해빙하기가 끝났으나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던 기후는 점점 오늘날과 같이 따뜻하게 되고, 해면도 현재와 같은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에는 신석기인이 등장하여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식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면을 매끄럽게 만든 석기인데, 인류는 이 숫돌을 발명하는 데 수백만 년 혹은 수십만 년의 긴 세월을 필요로 했던 셈이다. 토기는 요리를 하거나 물건을 저장하기 위하여 흙을 빚어서 불에구운 것으로 간석기와 함께 신석기시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물이 되고 았다 그리고 이 토기의 양삭 변천을 가지고 신석기 시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논하는 것이 고고학에서의 관례로 돠어 있다.한국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인다. 신석기시대 전기는 원시민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시기이다.{1)토기신석기 시대 전기 토기의 특징은 매우 단조롭다는 것이고 무늬의 형식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신석기 시대 전기는 원시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를 사용했다. 원시 민무늬 토기는 알이 약간 굵은 돌이 섞인 진흙을 손으로 빚어서 만든 비교적 소형의 투박한 토기이고, 덧문의 토기는 표면에 띠 모양의 흙을 덧붙여서 무늬를 만든 토기를 말한다. 덧무늬는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포항 유적 3기의 덧무늬를 돋친 단지는 아가리 끝에서 약간 내려와 덧띠를 한줄 들리고 그 덧띠위에 돌아가면서 촘촘히 점을 눌러 놓은 것이다.서포항 유적 1기층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의 가장 오래된 유적에서 이 시기 토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단정짓는다면 매우 단조릅다는 것이다. 즉 토기의 생김새와 종류, 그리고 무늬 장식이 비교적 단조롭다는 것이다. 토기의 재료는 대부분 바탕 흙에 모래를 섞은 것이 대부분이고, 바탕 흙에 조개 가루를 섞은 것도 있다. 토기 생김새의 기본은 납작한 밑창으로부터 밋밋이 벌어져 올라간 통이 깊은 생김새가 있다. 몸체와 밑창과의 경계가 뚜렷한 것,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배부분이 얼마간 둥실하게 휘어든 것 등이 있다.토기의 무늬들은 4-6가닥의 점살빗을 눌러서 낸 새김 무늬이다. 즉 여러 개의 살이 있는 무늬돋치개를 눌러 점선들로 무늬를 이루게 한 것 있다. 거기에는 무늬 돋치개를 토기 아가리에 수직 되게 곧추 누른 것, 비뚤어지게 세워 누른 것들이 있다. 무늬는 주로 토기 위 부분에 치우쳐 돋쳤다.대부분의 토기는 바탕 흙과 모래를 섞은 것이다. 하지만 서포항 유적 2기층 토기의 바탕 흙에는 조개 가루와 운모 가루가 섞여 있는 것들도 나타난다. 토기의 생김새는 밑창이 납작하고 통이 깊은 것, 밋밋이 벌어져 올라간 것, 패가 얼마간 부른 것, 주둥이 부분이 좁아지면서 목이 생긴 것 등이었다. 토기의 종류는 항아리, 단지, 보시기, 바리, 잔 등이 있다. 무늬 새김 법에는 돋친 것이 있는데, 목이 있는 단지와 잔 등 일부 토기에는 무늬를 돋치지 않았다. 무늬 수법에 따라 무늬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눌러서 낸 무늬이다. 이런 무늬에는 다시 무늬가 다양한 무늬 돋치개를 쓴 것과 한가지 무늬 돋치개만을 쓴 것 두 가지가 있다. 다양한 무늬 돋치개를 쓴 것으로는 끝이 마름모꼴인 무늬 돋치개와 점살빗으로 눌러 새긴 것이 있다. 이와는 달리 한가지 무늬 돋치개로 누른 무늬는 끝이 네모난 톱바퀴 같은 무늬 돋치개를 굴려서 점선을 이루게 한 무늬이다. 이 무늬 도안의 기본은 여러 줄의 점선 띠무늬이다. 둘째로 그어서 새긴 무늬이다. 그은 무늬에는 길이 2cm정도의 짧은 선으로 거의 평행되게 가로 흑은 비뚤게, 때로는 세로로 여러 줄그어 놓은 무늬와 짤막한 사선을 서로 엇바꾸어 그은 전나무 잎 무늬들이 있다.마지막으로 위의 두 가지를 배합한 눌러서 낸 것과 그어서 새긴 무늬를 배합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점과 짧은 선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냈는데 전나무 잎무늬를 기본으로 한 것과 점선 및 짧은 선의 띠를 기본으로 한 무늬들이 서로 배합되어 있다.있다.토기의 크기를보면 다양하지만 오산리에서는 28L 짜리대형토기도 나오고 있다. 평균5사람 이하의 가족이라면 5L 가넘는 그릇들은 일단 조리용이 아니라고 봐 수 있다. 아마 곡식을 저장하는 용도가아닐까?2)집자리여러 지역의 집자리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알아보려 하였다.첫째로 집의 크기에 따라 한 집에 살았던 사람의 수는 몇 명일까?둘째, 이러한 사람들의 수를 합한 한 마을 (혹은 공동체)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셋째, 집자리들 가운데는 특별한 쓰임새의 건물이 있다. 예를 들면 부속시설이나 저장고로 여겨져온 집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위의 다른 집들 보다 특히 작거나, 내부 구조가 매우 간단하거나, 출토 유물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타난 집자리들과 저장고의 관계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집과 가까이 붙어 있다고 하여 그 집만의 저장고인지, 마을 공동의 것인지 알 수 없다.(1)신석기 전기의 집자리ㄱ.오산리신석기 전기까지의 집자리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로 나타나는 오산리 1문화층에서는 9채의 집이 나왔다. 집의 구조는 여늬 지역들과 달리 움집이 아닌 지상가옥들로 나타나나 바닥형태는 거의 모두가 둥근 꼴이다.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들 가운데 묶음낚시는 거의 모든 집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묶음 낚시는 보통 배를 타고 나가 큰 물고기들을 잡는데 썼다고 여겨지고 있으므로 이같은 활동은 배 를 전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체 유물갖춤새를 고려할대 간도끼가 비교적 일찍부터 출토되는 편인데 이것과, 추 모양석기, 돌톱등은 배를 만드는데 사용되던 것인지 모른다. 당시의 지형이 지금과 같았는지, 그리고 바다가 지금보다 더 가까이 있었는지등은 앞으로 연구되어야할 사항이다. 물고기잡이를 하는 곳인데 조개더미가 쌓이지 않았다는 것은 개펄이 없다거나 하는 입지 탓일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얕은 곳에서 잡는 물고기의 이용도도 낮았을 ㄱ서이다. 아마도 오산리에서의 살림살이에는 사냥 채집에 대한 비중이 물고기잡이 못지않게 높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많이 나온 뗀 격자류 등은 채집하는데 쓰일 수 있겠다. 따라서 앞으로 오산리 유적의 연구에서도 역시 원래의 지세와 자연환경에 대한 연구들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에서 보면 집자리들은 넓이 30㎡가 넘는 것들 (2.3.4호)과 10㎡를 넘는 것 (6.7.8호)두 종류로 나눌수 있다. 넓이 5∼6㎡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집도 두 채가 나왔다. 여기서 몇가지 사실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재로, 어느 쪽의 넓이로 나누던 (3㎡혹은 4.5㎡)8∼9㎡이하의 넓이로는 3사람 정도도 살기가 어려워 집터로 보기는 무리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10㎡는 넘어야 한 가족 정도가 사는 집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작은 집 두채는 발굴자들의 관점대로 부속시설이나 저장고로 여겨진다.이는 유물 갖춤새를 참고하면 더욱 뚜렷하다. 저장고에서는 각종 유물과 살림도구들이 매우 많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전혀 안나오는 경우도 있어 여늬 평범한 집자리들과 구별될때가 많은데 오산리에서는 부속건물로 보는 집에서 유물이 거의 없었다.30㎡가 넘는 큰 집들은 위층(5∼3층)으로 가면서 나온다. 이들은 또, 집안에 석기만들던 곳으로 보이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공간기능이 분화되는 현상은 지탑리, 암사동 등에서도 볼 수 있다.). 10㎡정도 되는 집들이 아래층에 있음을 볼 때 나중 시기로 가면서 집이 커지거나 집안에 공간 기능이 분화되어 작업장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이들은 작은 시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산리에서는 대개 집3채에 부속 건물 하나로 공동체가 구성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는 매우 적은 숫자인 만큼, 발굴되어 나온 자료만으로 셈해 보았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수는 10명(6.7.8호)에서 20명(2.3.4호) 정도로 생각된다. 30㎡가 넘는 집에 사는 사람들의 수를 20명정도로 보는 이유는 집안의 작업장 면적을 고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