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Essay;Drinking Habits of the University Students in Busan·Division of International and Area Studies·Group's Name : YOKOHAMA·Member's name:·Class Number : 102《 introduction 》a. The purpose statementWine has very close relation in campus life of university students in Korea as well as Busan. That university students generally think drinking act in their campus life. It is for reason that peculiar communal group drinking culture that confucian moral rule is caused in Korea was formed. Therefore, We wanted to investigate and analyze drinking habit, understanding for wine and merits and demerits by drinking to surrounding university students and discuss a device for healthy drinking habit.b. The research paradigm and the reasonsWe choose qualitative paradigm for our research topic. Qualitative paradigm interpret and understand the meaning of a social phenomenon by subjective observation of researcher. Therefore we can research about individual motive or characteristic of drinking habisease of gastritis, ulcer of the stomach, inflammation of the liver and alcoholic dementia etc because alcohol is absorbed in the interior of the body if drink. We could find several persons who have ever been in the hospital because of wine among informant when interviewed, Moreover three persons of our group's member have ever seen persons who were hospitalized in hospital because of wine among knowing persons. In this way, it can notice gravity of drinking in terms of that can meet easily people suffering because of wine in surrounding. According to research, 54.1% of university students who think to quit drinking counted problem of health for reason. This sequence considered, it can find fact that university students had reached to be worried already about health through drink in Korea.6. The plan for healthy drinking habitWhen university student drinkers drink, there are things for promoting friendship mainly. But, there was findings that persons who feel hard to refuse when theyso drinking is unavoidable. Therefore If we can't avoid, we have to control ourselves. Then, Liquor can be a good measure for socializing .3) Topic: Drinking habit of university students in PusanPark Jae-hwan, 1999. "Sociology of Drinking"Drinking(e.g., liquor, beer, wine, especially Soju), is the most easy method that people reliable when they meet a difficult problem.{ Park, jae-hwan, 1999. "sociology of drinking", page 73It is an important way to Korean when they want to familiar with each other. Of course, people have different action about drinking habit by each other. Workers have their unique drinking habit, students have their characteristic drinking habit. But generally Korean drink liquor very much. The researcher note that why people drink and what about their drinking habit. Drinking habit isn't drinking habit anymore. It's going to make a culture - Korean culture, very important to their life!Hypotheses People have a reason and objection when they drink liquor.MethodThe austake drinking too much. And Memory does not improve...Jung: The slight drinking is fine, but university students of our country drink too much and that is problem.Choi: That's right. It is problem that do not control. Keeping regular life is impossible If control doesn't become. And first of all, it is not good for health.Kim: Thank you for answering in interview.2) Dae-yun Dong, Pusan, Korea 2004.Time : Friday, November 12, 2004 21:00 -22 :30pmPlace : A pub 'Gochu mukuen dak' located around Pukyung National UniversityImpormant : Students Min & Park of Pukyung National University, a staff of the pubSubject : Observation on students' drinking habit - The kinds of liquor, The purpose of their drinking, Their opinion about drinking of students.Weather : cold , early winterObservation on students' drinking at pubIt was the day that I had a English Study with some people. We started this group from November, and we were a little awkward until then. So we decided to drink to become familiareople like strong drinker, but dislike that people can't drink liquor.Sim: is it merit of drinking?Kim: yes, I think.Sim: ok. I understand. have a nice time!4) Street on Pukyung National University, Busan, Korea 2004.Time : Monday, November 7, 2004, 20:30…23:00pm.Place : A pub of Cabin and the street on pubs.Informant : Mr. Kim, Mr. Park, The host Mr. Lee of Cabin.Subject : Observation, alcoholic liquor types, styles of drinker's action and their thought about drinking.Weather : Cool and refreshing, the peak of autumn 2004.Observation on alcohol's types and drinker's condition and their thought about drinking.I thought that Monday is a little reluctant day to drink. But it is right after days of middle exam, so many people were there in front of Pukyung University. Time was about eight thirty pm. But there were already drunken people, so the street was rather in disorder. Although some drunken people are appeared that they can not walk by themselves, they continually shout of "go to 2 g.
《중국의 근대》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혼란기에 빠진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과 미래 중국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중국에 대한 역사를 마무리 하였다.【중화민국】청말 세계의 열강들이 거대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중국 사람들은 서구의 발달한 문명 앞에 너무나도 무력한 봉건주의 체제 아래 놓여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1840년에 일어났던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중국이 영국의 해군력 앞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굴복을 하게 되자 중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 수천 년을 두고 굳혀져 왔던 중화(中華)사상도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1850년 태평천국의 난과 1856년의 애로호 사건 등은 서양 근대문명의 강력한 힘을 더욱 실감케 하였다. 이제 중국은 스스로 깨어나 세계 열강들의 움직임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따라서 이 시기에는 중국의 힘을 부강하게 하려는 수많은 움직임이 다양한 방면에서 일어났다. 특히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배워다 중국을 부강케 하자는 양무(洋務)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것을 모체로 하고 서양의 것을 응용한다)을 주장하였으므로, 서양의 근대적인 정신과 체제가 아닌 그 발달된 기술에 관한 것만을 배우길 바랐다. 결국 그들은 근본적인 면에서 시종 중화적 사고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1894년에 중국은 일본과의 청일전쟁(淸日戰爭) 에서 또 한 번 크게 패배했다. 이미 메이지 유신 등의 근대화 정책으로 힘을 기른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무참히 수포로 돌아가자 많은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의 모방을 통한 현대화가 더 이상 중국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만이 사경에서 헤매는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청일전쟁 후, 중국에는 두 유형의 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청조 체제를이에 적극 동참하여 줄 것을 기대하였다. 당시 청조의 황제인 광서제(光緖帝)도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이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수천녀네 걸친 정치 전통과 사회제도 등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수천년에 절친 정치 전통과 사회제도 등을 단번에 개혁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유신변법(維新變法)은 견고한 당시 보쉐력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광서제는 보수파의 시력자인 서태후(광서제의 선제인 동치제의 생모)에 의해 연금당하고 강유위, 양계초는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결국 이 새로운 시도는 시행 1백일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무술변볍이 실패로돌아간 다음해인 1899년에는 의화단(義和團)이 중국인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하는 평원현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국인들은 계속되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사회혼란으로 인해 각지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자주 서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였는데, 이 의화단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의화단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북, 북경, 천진,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 등지로 발전해 갔다. 의화단이 내건 구호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붙들어 일으키고 서양세력을 내쫓고 침략자를 내몰고 국가를 재건하자는 것이어다. 그러나 이들이 택한 방법은 서양 선교사 살해와 교회방화, 철도 파괴 등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결국 의화단은 열강 8개국(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의화단의 난을 구실로 중국에서의 지분을 더 챙기고자 했던 여러 열강들은 진압을 위해 출병한 군대를 철수를 조건으로 이제까지 받았던 이권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교섭과 타결될 때까지 각지를 점령하였다. 결국 1901년 청조는 열강에 항복하고 신축조양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내용은 막대한 배상금 지불, 외국군대의 북경 주둔 인정 등을 담고 있어 중국은 사실상 열강의 공동 관리 밑에 들어간 셈이 되었다.이렇게 중국은 1840년부터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겪었 동경에서 중국동맹회(국민당의 전신)를 결성하고 청조 타도를 외치며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의 이념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을 주장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도 혁명세력이 성장하여 1911년 10월 11일 마침내 호북성 무장에서ㅢ 군사봉기가 성고애자 혁명은 전국을휩쓸었다. 이 무창봉기 이후 각 성(省)은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혁명파는 1912년에 드디어 남경(南京)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손문이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동맹회는 국민당으로 창설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이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조의 260여 년에 걸친 통치가 끝나고 2천여 년 동안의 황제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새로운 근대 민주주의 정부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중화민국 내에서 혁명파들은 혁명을 주도적으로 실행해 나갈 실질적인 힘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여 보수세력들의 군사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또 다른 보수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또한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이 모두 손문의 삼민주의를 지지하여 근대적인 민족 민주국가를 세우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분위기에 밀려 참가한 군벌세력도 있었는데, 이들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있는 원세개(遠世凱)를 총통으로 앉히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타협 끝에 손문이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주었다.원세개는 민족주의에 불타거나 혹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대총통의 자리에 취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개인적인 야심에 가득 차 다시 황제지배 체제로 바꾸어 자기 자신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려고 하였다. 혁명세력은 원세개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지 못했으므로, 이런 원세개의 야심과 복고주의적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1913년 의회가 해산되고 국민당은 사라졌다.손문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다시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손문은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계가 양세력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던 전쟁 이후의 새로운 중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1.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2.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3.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의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며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비해 모택동은 전쟁 이후 새로운 국가형태를 연합정부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며,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들어 해방 이후 중국 전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민주·통일국가로 건설해야 한다」2차대전의 전세가 일본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사건은 소련의 극동전선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8월부터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9일 소련군은 극동의 500km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약 150만 명이다. 소련군은 8월 중 하얼빈, 여순, 대련 등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주의 괴뢰정부 만주국도 끝을 맺었다. 일본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지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최후의 한판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1945년 8월 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중경으로 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교섭을 위한 내에서는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국·공 양당의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각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협의를 하고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정치협상은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깨지고 만다. 국민당은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고,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 것이다.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었다. 그 점에서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있었다. 실제적인 군사력은 약하지만 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인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토지개혁은 인민들을 공산당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46년 6월 200만에 가까운 국민당군이 화북과 화중의 대규모 홍군 근거지를 공격했다. 홍군은 화중지방, 양자강 하류 등의 거점에서 밀려났다. 국민당은 47년 3월 대장정 이후 심장부였던 연안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공격대상이 되는 도시거점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중에도 두 세력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쪽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총통인 자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을 채택했다. 공산당도 역시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3월에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지에 남아 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했다. 협상은 끝이 났고, 싸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초반에는 국민당이 군사적 우위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47년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있었다.
《중국의 중세》=>중국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기로써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창한 시기이다. 삼국시대, 진나라, 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순으로 분석하였다.【삼국시대】후한 왕조는 황건군 봉기의 충격을 받아 통치 기반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는데,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 두 세력은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렸다. 서기 189년 14살 밖에 안 된 황태자 변이 즉위하였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후한의 전례에 따라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하태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하진은 정권을 잡자마자 환관 건석을 죽여 버렸다. 환관 건석은 당대 최대의 실력자였는데, 영제가 죽기 전 영제에게 하진을 죽이자고 하다가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때마침 원소가 환관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하진에게 권했다. 선비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여러 대에 걸쳐 선비들의 세력을 누르고 있는 환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이전에 두무가 환관들을 없애려 하였지만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도리어 환관들에게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군권을 장악하였으니 마땅히 천하를 위해 그 자들을 소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하진은 결단을 내릴 수 없어 하태후를 찾아가 의논하였다. 그러나 하태후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섭정을 하자면 유생들과 상대해야 하므로 환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과 둘째,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과 동생 하묘 등이 환관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이유로 환관을 제거하자는 계획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앞서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하진에게 권고한 바 있는 원소는 사방에서 용감한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원소는 또 하진에게 비밀리에 각지의 병마를 수도로 불러들여 환관 숙청에 동의하도록 태후를 위협하자고 했다. 하진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는 각지의 세력 중에서 특히 동탁의 병력이 제일 강했다. 원소는 땅이 넓고 장수가 많았으며 훈련된 병사와 풍족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어 겉으로 강대한 것 같았으나 원소의 성격은 교만하고 우유부단했으며,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부족하였다. 조조는 비록 병력이 적고 힘이 약했으며 후방 또한 안정되지 않았으나, 대세를 보는 눈이 뛰어나고 사람을 보는 데 탁월했으며, 부하의 정확한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전투에 있어 승리의 기회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이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원소의 군대를 완전히 대파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궤멸되어 10만의 군사 가운데 7만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 자신은 기병 9백 명의 호위를 받아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을 정도였다. 원소는 2년 후 죽고 그의 아들들이 잠시동안 조조에게 저항했으나 형제간의 불화로 세력이 약해져 얼마 후 조조에게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이로써 조조는 당시 중국의 13주 가운데 연주,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다섯 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거의 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조조가 차지한 주들은 인구가 많은 중원 지역이었다. 조조가 이렇게 중원 지역을 통일해 나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다른 두 주역 손권과 유비 역시 양자강 중·하류 지역에서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손권은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단단히 다져 놓은 강남의 기반 위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유능한 신하인 장소, 주유, 노숙 등의 보좌를 받았고, 또 여몽 등 능력 있는 장군을 등용해 병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하여 손권은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에 이르는 세력을 모두 병합하고 기세를 떨쳤다. 당시 손권이 정복했던 영토는 북으로는 조조의 영토에 접하고 있었고, 서로는 형주에 자리잡고 있던 유표의 영토와 경계를 이루었다.이에 비해 유비는 황건적의 난 때 관우, 장비 등과 함께 황건적 토벌군에 가담했으나 겨우 안희현의 현위가 되었을 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출발이 너무 늦은 셈이었다. 유비는 출발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한거느린 전함들을 바라보면서 좋아서 소리 질렀다."봐라.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조조의 진영 1킬로미터까지 접근했을 때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려 각 배에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을 지르게 했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황개의 전함들은 맹렬한 불꽃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조조의 함대는 도망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조조의 전함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강언덕까지도 붉게 물들며 사방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조조군은 물에 빠져 죽는 자, 불에 타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적벽 일대는 일시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이 틈을 탄 주유의 장수들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을 마구 무찔러 대니 조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조도 겨우 목숨을 보전한 채 허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적벽대전'이다만약 적벽의 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하고 손권·유비가 패했더라면 중국은 이 시점에서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을 계기로 유비는 제갈공명의 계책에 따라 곧바로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촉한을 세웠으며, 손권은 강동을 굳게 지킨 채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를 세웠으므로, 조조가 세운 위·유비의 촉·손권의 오, 이 삼국이 한동안 팽팽히 정립하는 형세가 이어졌다.【진나라】삼국을 통일한 진무제(晋武帝)는 위나라가 종친세력의 약화로 권신이 발호아여 망한 것을 교훈삼아 사방의 요지에 일족들을 왕으로 봉하고, 각 지방의 무기를 국가가 회수하고 군대를 해산하여 지방 자사(자사)들은 행정권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권적 봉건제도는 제왕들의 할거를 초래하였지만, 지방의 무력 약화로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또한 당시 중국의 북변에는 흉노, 갈(갈), 선비(선비), 저(저), 강(강)의 오호(오호)가 있었는데, 세력이 강해진 그들의 남침위기 속에 무제가 죽고 혜제(혜제)가 즉위하자 황후 가씨(가씨)는 황태후 양씨(양씨)를 살해하고 가씨 일족을 정권에 끌어들이고, 종친들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하였다.그러자 조왕 윤(조왕윤)이 가나뉘어 건설된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 남으로 항주에 이르는 장장 2천km의 거대한 물길이다, 이로써 실핏줄처럼 얽혀 있던 각 강의 지류들이 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관류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관용 수로로 출발했던 대운하를 따라 점차 민간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활발한 사람들의 왕래는 중국 내 문물의 교류를 더욱 촉진, 사회의 통합을 재촉했다. 물론 이러한 결실은 거대한 중국의 다른 문물이 그러하듯이 백년쯤 지난 당대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리장성처럼 대운하도 역시 그동안 역대왕조에서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것을 통일국가에서 완결을 본 형태지만, 이 운하의 건설에 바쳐진 백성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운하의 양 언덕에는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서, 복수 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참으로 고대의 웅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로지 전제국가들이 무수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운하의 건설에 매월 100여만 명, 만리장서의 보수, 축성에 10만 명 동도 낙양과 이궁의 건설에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가령 강남의 훌륭한 목재 한 개를 낙양에 운반하려면 2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했다. 낙양은 동주시대 이래 중요성은 인정되었지만, 대개 역대왕조에서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관중의 곡창지대를 거느린 장안의 세에눌려 있었다. 그러나 강남의 경제가 개발되고 대운하가 건설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북의 운하가 합류하는 낙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지금도 낙양 주위에는 큰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곡물창고들이 발굴되고 있다.웅장한 낙양성은 전국에서 수집한 진기한 동식물들로 가득했다. 장안에도 전한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거대한 대흥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장안의 서원은 둘레 2백 리의 거대한 궁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안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인공산을 조성했다. 거대한었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으로,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의 감찰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주에는 자사(刺使),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일반민은 향(鄕:500家)·이(里:100家)·인보(隣保:5家) 제도에 따라 조직되어 현의 지배를 받았다. 이의 책임자인 이정은 민호의 가족 수와 토지를 호적에 올려서 토지의 환수, 부세의 징수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일반민의 대부분은 이른바 균전농민(均田農民)으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직접 국가에 조용조를 바쳤다. 이 밖의 의무로서 병역·잡요가 있었으며, 병사로 뽑힌 자는 병역기간 중 국도의 경비, 변경의 방위, 향리에서의 동계교련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의 절충부에 소속되어 있어서 부병이라 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데는 고관의 자제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조의 관위(官位)에 따라 임명하는 은음제와 학과시험에 의한 선거로 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와 국가통치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이라는 독특한 법체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중 율은 금지법, 영은 행정법규, 격은 증보개정법규, 식은 시행세칙이다. 그러나 율령제도도 후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농정의 기반을 이루었던 균전제도 역시 지배층의 장원제에 의해 유명무실화하여 조용조제에 대신해서 대토지의 사유를 인정하는 양세법을 제정하였다. 국방의 근간을 이루던 부병제도 역시 현종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에 대신해서 실시한 병제는 절제사의 세력을 비대화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문화〉유학(儒學)에서는 공영달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을 정리·종합해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및 《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하고 여기에 선종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이고의 고문운동은 후대의 송학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한다.
서론요즈음 매스컴을 통해 자주 등장하는 국토계획관련 주제 가운데 하나가 수도권 서부지역에 대한 경제특구지정과 이를 통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건설론이 아닌가 싶다. 이 아이디어는 즉 서울-인천 지역에 동북아 중심지로서의 기능 확충을 통해 국제금융, 첨단정보 및 통신 등 국제기능을 강화하고, 동북아를 대표하는 국제도시에 걸맞는 대형 컨벤션 센타, 전시장 등 국제 교류 및 업무시설을 확충하며, 인천국제공항 주변지역을 국제금융·교류·유통·관광 등의 복합기능을 수용하는 국제업무도시 로 조성한다는 내용이다.이 같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 전략은 21세기 우리 나라의 운명이 달린, 그래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국가적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다시피 우리 나라는 기술 선진국이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과 21세기의 거대한 신흥 공업국인 중국이라는 두 경제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칫하면 호두까기 틀 속에 낀 호두 신세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바로 이와 같은 절박함에서 나온 생존 전략이 바로 동북아 물류 중심지 실현전략이다.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의 지경학적 잠재력은 동북아 중심지 전략을 실현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예컨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인천공항 중심 3∼3.5시간 비행거리 내에 무려 20억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인구 100만명 이상의 도시만도 43개나 입지하고 있다. 그 밖에 TSR, TCR 등 유라시아 대륙철도의 동쪽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평택·부산·광양항 등 양호한 SOC여건, 그리고 세계가 주목하는 역동적인 신흥 IT선진국이자 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등 기간산업 및 관련 R&D 기반이 강하다. 하지만 반면에 여러 가지 제약과 거쳐야할 단계도 많을 것이다.이 책에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한국의 미래는 동북아 중심국가이다 라는 포부아래 그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또 한 부분은 그러한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로 가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본론제1장 왜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어야 하는가현재 세계경제는 세계방 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며, 외국기업과 외국인에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할 경우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셋째, 산업과 지식 및 문화 인프라 측면에서도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등 기간산업 및 관련 R&D 기반이 강할 뿐 아니라, 정보 인프라 등 새로이 부상하는 IT분야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다. 또한 한국은 높은 교육열에 기초한 상당수의 고급인력을 확보하고 있어, 중국에 비해 숙련되고 일본보다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넷째, 세계적으로 지역화가 전개되면서 동북아 경제권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개방형 국토 축에 의한 동북아 교류 중심지로의 도약 가능성이 높은 점도 한국이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세계경제는 EU, NAFTA 등 지역별로 블록화 되는 추세이고 최근에는 동북아 경제권의 경제 통합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남북관계의 진전과 개혁·개방으로의 북한 경제정책 변화, 전체 한반도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제4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한반도의 지경학적인 장점을 활용하여 한국이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준다.반면 약점 및 위협요인으로는 첫째,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로의 정책 추진 출발이 늦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대만은 1995년부터 비즈니스 중심국가 전략을 추진해 오고 있으며, 중국도 상하이를 중국 및 동북아 지역의 외국인 투자, 물류 및 금융 등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둘째, 협소한 내수시장과 뒤떨어진 국제화 수준을 약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경제규모나 소득 측면에서 내수 시장이 협소할 뿐 아니라, 홍콩과 싱가포르에 비해 영어구사 능력과 국제화 의식 및 상거래 관행, 삶의 질 측면에서 뒤떨어진다.셋째, 시장화와 제도화 측면에서도 경쟁국에 비해 미흡한 편이다. 아직도 외국회사가 투자하기에는 홍콩과 싱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구체적인 동북아 물류 허브 구축방안으로 2002년 7월,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 방안 의 5가지 실천 계획이 있다. 첫째, 인천공항을 동북아 중심 공항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둘째, 동북아 중심 항만으로 부산 신항과 광양항을 개발할 계획이다. 셋째, 육로에서도 동북아 허브로 거듭나기 위해 남북간 철도 및 도로를 연결해 중장기적으로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구축한다. 넷째, 국내 주요 공항과 항만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국내외 종합 물류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허브 구축에 필요한 물류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한다. 특히 외국 물류 기업이 별 어려움 없이 투자할 수 있도록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지원센터도 건립할 계획이다.한편 이러한 계획에 제약요인으로는 먼저 가장 큰 걸림돌이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못하고, 노사관계가 지나치게 대립적이라는 점이다. 실제 많은 노조원들이 물류 시설의 자동화와 시스템 합리화에 반대하고 있고, 이러한 불안정한 노사관계는 국제 물류 기업 유치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둘째, 물류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운영이 되지 않고 있다. 셋째, 경제자유구역법, 외국인 투자지원 인센티브 등 물류 관련법·제도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이처럼 동북아 물류 허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류 전문인력 육성 및 노사관계의 안정, 외국인 물류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 물류 관련 법·제도 개선 등이 요구된다. 우선 동북아 물류 허브의 위상에 걸맞는 국제적인 감각과 기능을 갖춘 물류 전문 인력들을 육성해야 한다. 둘째,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셋째, 외국인 물류기업 유치를 위한 특별한 인센티브 지원 제도가 필요하다.제4장 교역이 살아나야 한다동북아 허브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경제적인 자질과 역량을 향상시켜. 따라서 기업들의 고용 조정 여지를 더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노동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관련된 다른 제도의 보완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동북아 허브 건설을 위한 노동 기준 설정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제적인 노동 기준의 변화 추세와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위상 강화 방안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앞서 살펴본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견을 고려할 때,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적절한 경영 환경과 생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밖에 한국이 동북아 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물류, R&D와 기술, 인적자본 및 금융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실로 많은 일을 이루어야 한다.제5장 IT는 한국의 최고 강점이다.IT허브란 컴퓨터, 인터넷망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인프라, 정보통신 기술, 그리고 정보통신 관련 인적자원 등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를 말한다. 즉,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IT 관련 인프라, 기술, 인적자원 등을 종합적으로 연결해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IT 중심축을 의미한다.IT산업의 생산 및 수출 규모를 보면, 세계5위 내에 한·중·일 3국이 포진하고 있어 동북아 지역이 세계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그렇다면 IT 인프라, IT 활용도, IT 성장 잠재력 등의 평가 항목들을 중심으로 한·중·일의 IT경쟁력을 비교해 보자. 우선 IT인프라 부문에서는 국내 PC보급률이 인구 1,000명당 556대로 일본의 383대, 중국의 19대보다 훨씬 많고, 인구 100명당 이동통신 가입자 수도 68명으로 일본(62)명과 중국(16)보다 많아 우리나라가 경쟁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둘째, 인터넷 사용자 수, 전자상거래 활용도, 전자정부 달성도 등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가 높은 순위를 차지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인터넷 등 IT를 실생활에 보다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기술력, 교육 훈련, 기업간 경쟁 정도 등 IT산업의 설비 부문과 접근 환경이 3국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전자상거래 규모와 준비도 역시 3국 중 가장 우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정부 정책, 비즈니스 경쟁력 등 오프라인 환경 역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월한 여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의 IT산업 부문의 절대 규모, 인터넷 호스트 수,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 요금, 데이터베이스 수, 물류 효율성 등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비교 평가를 종합해 볼 때, 한국의 동북아 e-biz 허브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만큼 강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약점은 보강하는 전략을 수립·추진하여 동북아 e-biz 허브화가 허울뿐인 구호로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직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 부문들, 즉 IT산업, 데이터베이스 및 인터넷 호스트 수와 같은 콘텐츠 부문, 물류 효율성 등을 육성하고 개선해 나가는 전략을 집중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제7장 지식 선도를 위한 R&D 허브과학기술부의 정의에 따르면 연구개발활동(R&D: Research and Development)이란 과학기술 분야의 지식을 축적하거나 새로운 적용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는 조직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일컫는다. 허브(Hub)란 중심, 중추, 핵을 뜻하는 단어로 어느 한 지역에서 인접국들의 경제적·사회적 상호 작용이 어느 한 지점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 그 네트워크의 집결지 또는 활동 본부를 지칭한다. 따라서 동북아 R&D허브란 동북아시아 지역 3개 국가인 한국·중국·일본의 연구개발활동이 한국을 통하여, 또는 한국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한국이 동북아의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주도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미래지향적 성장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동북아 R&D의 흐름을 한국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먼저 국내 자체적으로 R&D 활동의 중추적 역
《일본의 역사》일본은 비교적 초기부터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여 국호를 일본이라 정한 이후로 정권의 교체마다 국호를 바꾼다던가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대 이름들은 그 시대의 정권이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나 그 시대를 지배하였던 씨족의 이름이나 천황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원시 시대 》죠몬(繩文)시대당시의 사람들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아 먹거나 식물을 채집하는 수렵채집경제였다. 가옥은 땅을 얕게 파내고 거기에 기둥을 세워서 풀 등으로 지붕을 덮은 수혈식 주거였다. 주거 근처에 먹고 난 조개껍질을 버렸고, 그것이 쌓여서 생긴 패총이 지금도 일본 각지에 2000여개 이상이 남아있는데, 패총에서 석기나 죠오몽식토기(새끼줄 무늬가 있는 토기)가 나오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만년 전부터 8000년간 정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를 죠오몽토기의 이름을 따서 죠오몽시대라고 부른다. 죠오몽 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호두·밤·도토리 등이 출토되고, 그것들이 식량으로 이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우 등의 의례유물이 늘어나고 계급발생을 나타내는 돌로 만든 귀걸이나 조개로 만든 팔찌도 발견된다. 교역도 성행했는 듯, 원산지에서 멀리 운반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죠오몽시대는 약 4000년전 최성기를 맞이하고 동일본이 그 중심지였다.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경이 되자 새로운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또한 대륙으로부터 청동이나 철로만든 금속기와 벼농사법이 전래되었다. 이 때의 토기는 전시대의 것보다 튼튼하고 모양도 더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 토기는, 토오쿄오 분쿄오구의 야요이쵸오(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요이식 토기라고 부른다. 석기 시대가 늦게까지 지속된 관계로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거의 동시에 유입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일으날 즈음 한반도로부터 벼농사(いな作) 기술이 전래되었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인력과 종자 관리에 통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남은 쌀은 비축이 가능하였으므우고 지배자를 대왕으로 불렀다. 이 때의 유력자들의 고분이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사까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천황(仁德天皇)의 고분이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당시의 고분은 앞이 4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 많으며, 고분 주위에 인간, 동물, 집, 배 등의 모양을 한 토기(하니와)를 배치하고 있다.5~6세기에는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에 살게 되었다. 이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통상 도래인(渡來人), 혹은 귀화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 하거나, 관청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 작성 등을 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하여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가 서적과 함께, 불교가 경전이나 불상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6세기 중엽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모노베씨(物部氏)와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쟁탈전을 벌인 결과,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인 소가씨가 보수적 세력인 모노베씨를 누르고, 조정의 정치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섭정에 취임(593), 그는 소사씨 등의 호족과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다.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서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고, 능력있는 자를 관리로 발탁했다. 또한 불교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헌법 17조를 제정했다. 그것은 「화합이 중요하다」「부처님을 공경하라」는 따위의, 천황을 모시는 관리들의 마음가짐을 기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헌법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또 사신과 유학생등을 중국에 파견 (견수사), 선진문화의 수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쇼오토쿠태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 야마토의 이카루(斑鳩)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세웠다. 이극에 달하자, 황태자인 나까노 오오에(中大兄)와 호족의 한 사람인 나까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등은, 645년 소가씨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이것을 大化의 改新이라고 한다. 大化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연호이다. 대화개신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 당시까지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모두 천황이 소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公地·公民化), 호족은 도읍이나 지방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중앙정부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新祇官)과 정치를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의 2관과 8省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가 국사(國司)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인민을 호적에 등록시키고, 그에 따라 일정한 토지(口分田)를 나누어 주었다. 토지에 따라 쌀이나 천으로 세금을 조정에 내게하고, 사람이 죽을면, 토지를 반납하게 했다. 그 밖에도 남자에게는 도읍이나 지방의 토목공사 등에서 일해야 하는 勞役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도읍지나 큐우슈우의 국경을 경비하는 병역의 의무도 있었다.아스카 시대일본열도의 여러곳에 흩어져있던 세력들이 강력한 지배자가 나타나면서 그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국가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4,5세기에 걸쳐 이러한 나라가 다시 통합되어 천황중심의 야마토(大和)호족들이 야마토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천황중심의 전국 지배체제는 6세기 무렵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소가씨(蘇我氏)의 세력이 정권을 쥐게 된다. 7세기 초 쇼토쿠(聖德)태자는 12계급의 관위제도와 17조의 율령을 제정하여 천황의 지위를 높이고 국력을 강화시키려 하였다.그러나 소가씨의 세도는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랐다. 이에 소가씨를 타도하기위해 모든 토지와 인민을 국가 소유로 한다는 원칙으로 다이카(大化)개신을 추진하였다. 다이카개신으로 율령정치가 시작되었고 수도도 건설 되었다. 쇼토쿠태자 이후 중국 문화와 한반도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천황과 귀족들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고 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헤이안 시대794년에 칸무(桓武)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쿄토)로 수도를 옮긴 이후, 카마쿠라(鎌倉) 막부가 개설되는 1192년까지 헤이안시대라 한다. 수도를 헤이안(平安)으로 옮길 당시만 하여도 천황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서서히 율령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귀족이나 사원들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대부분의 천황을 자신들의 외손으로 만들어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이었으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가나문자의 발명이었다. 가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가나는 8세기말경부터 구체화되었지만,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또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교양있는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 수필 등에서 걸작을 남기고 있다.헤이안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가마쿠라 시대조정 내부에서 천황들의 불화로 일어난 보원, 평치의 난에 지방 무사가 도시의 귀족에 대해 처음으로 그 실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 싸움을 분수령으로 서서히 무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무사로서 맨처음 정원을 장악한 것은 다이라(平)씨였다. 그러나 동국지방에서 다이라씨 타도를 외치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