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能) ]노(能)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전통극으로,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무대예술이며 일종의 가면극이다.(1) 성립14세기 후반 당대 예능계의 일인자였던 간아미(?阿彌)가 고대 말부터 민간예능으로 행해져온 사루가쿠(猿?)를 원류로 하고 여타 예능의 장점을 흡수하여 더욱 세련되고 예술성 있는 새로운 가무극인 노(能)를 창출하였다. 간아미의 노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의 후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게 되어, 간아미의 아들인 제아미(世阿彌)에 의해 노는 가무를 위주로 하여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연극으로서 완성된다. 제아미는 노의 궁극적인 이념을 유현(幽玄)미의 구현으로 보고 이러한 예술관에 입각하여 많은 작품과 예술론을 저술하였다. 노의 대본을 요쿄쿠(謠曲)라 하는데, 그 대부분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현재는 240여 종만이 상연되고 있다. 근세에 성립된 가부키(歌舞伎)나 닌교죠루리(人形?瑠璃)가 서민들을 위한 연극인데 비해, 노는 성립 당시부터 쇼군의 후원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무사계급에 의해 비호·애호된다. 무사계급의 가예(家藝)로 자리잡고, 근세에는 에도막부의 의전행사용 예능으로 상연되었다.(2) 무대와 악기① 신에게 드리는 공양물로써일본에는 도쿄의 국립 노가쿠도, 간세 노가쿠도를 비롯하여 전국 약 80여개의 크고 작은 노가쿠도가 있다. 노가쿠도의 위치는 대개 시내에 자리 잡고 있다. 신사에서 노를 공연하는 까닭은 노가 사람들을 위한 공연물이 될 뿐만 아니라, 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공양물로써 공연하기 때문이다. 노는 신사의 연중행사로서 열리는 제사의식의 일부로서 공연된다. 곳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는 관람 시키지 않고 신만이 감상 할 수 있도록 하여 노의 神聖性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② 야외의 소나무 아래서 하는 연극초창기의 노는 심어져 있는 나무와 그대로 보이는 하늘이 배경이 되는 야외가무극이었다. 그러다가 무대가 신사 경내에 설치되었고 현대에는 실내 공간 안에 설치되기에 이르 내방자등으로 설정된다. 이런 구성법은 패턴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패턴에 구체적으로 각 주인공의 성격과 행위가 결부되어 각 곡을 형성하게 된다.∮신의 이야기 와키노 모노하루 프로그램의 첫 번째 곡은 신이 주인공이 되는 노, 이를 와키노 모노라고 한다. 주인공은 신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데 곡의 진행은 전반과 후반으로 나뉘어진다. 전반은 대개 신의 화신(化身)인 노옹(老翁)이 나와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춤을 추다가 하시가카리로 퇴장한다. 후반에는 신이 등장하여 춤과 노래로 ‘천하태평’,‘국토안정’ 등의 祝言을 하여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목이다. 신은 남신?여신?老神?성격이 거친 신?이계에서 온 (異神)등으로 분류되며 그 성격에 따라서 가면도 달라진다.∮무사의 이야기 슈라 모노(修羅道)무사들은 생전에 많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죽어서는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을 겪는 곳 슈라도에 빠져 업보를 치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슈라도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곡을 슈라 모노라고 한다. 슈라도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선악의 棄에 따라 가게 된다는 여섯 사지 세계인 육도(六道: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한 단계로, 신을 거역하고 전쟁을 벌린 무사들이 사후에 가게 되는 곳을 말한다. 유명한 무사의 영혼이 등장하여 고통을 하소연하며 구원을 청하는 내용을 담는다.∮미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쓰라 모노노의 세 번째 곡은 가쓰라 모노로 정해져 있다. 노에서 여자로 분장할 때는 전통적으로 가발을 쓰기 때문에 여성의 우아한 가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곡목을 통틀어 가쓰라모노라고 한다. 주인공인 꿈속의 환상적인 장면을 춤으로 나타내는 경우와 주인공이 현실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젊은 여자뿐만 아니라, 나이 든 미녀나 그들의 정령이 주인공이 된다. 유명한 미남이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런 주인공들이 흘러가 버린 젊은 시절의 아름답던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윽하고 아름답게 추는 춤이 곡의 중심을 이룬다. 가쓰라 모노는 우아하며 유현하게노 무대에서는 인물이 등장하여 품고 있는 각각의 사연을 그려낸다. 신들의 이야기, 무사이야기, 미녀이야기, 또 이루지 못한 욕망으로 생기는 광란과 인간의 집착 등 오늘날 정식으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은 약 240편이 된다.유파(流派)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현재 상연되는 곡은 5개 장르로, 최초로 상연되어지는 것은 신을 주인공으로 한 것, 다음으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것, 여자가 주인공인 고전 이야기의 히로인을 취급한 것, 다른 분야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귀신· 괴물· 요괴 등 인간 이외를 주인공으로 한 것 순으로 공연이 이어진다.'노'를 상연할 때 가장 많은 역할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시테(仕手)'이다. 시테는 대대로 담당하는 집안이 있어 세습해 나간다. 또 부주인공인 '와키(脇)'는 시테의 상대 배역으로서 승려, 신관, 무사, 신하, 마을 사람 등 남자 역으로만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와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받아주는 역할을 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배역이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는다.[ 카부끼(歌舞伎) ]: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연극.??(1) 성립에도시대[江戶時代] 서민의 예능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약 4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부키라는 말은 원래 가부쿠[傾く:放縱하다, 바람나다, 好色하다 등의 뜻]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이다. 근세 초기 고료에[御靈會]라는 종교행사와 함께 후류오도리[風流踊]라고 부르는 예능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라는 여자가 교토[京都]에서 가무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이 ‘여자 가부키’는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나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는 1629년 풍기상의 이유를 들어 여자의 출연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동(美童)·미남자 등이 주로 춤과 곡예 등을 보이는 가부키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남색(男色)을 파는 일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52년 미동의 출연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에도에 있던 극단들은 바쿠후[幕府] 의 종류, 지역, 가부키의 종류, 가문(家門), 사제(師弟)관계, 개인들이 있다.① 구마토리( 取,바림)?????구마토리라는 것은 얼굴에 연지로 선을 긋는 독특한 화장법을 말한다. 처음에는 연지를 바른 얼굴 위에 분을 바르고, 그 분 위에 연지로 다시 선을 긋는 방법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분 밑에 연지가 잠겨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단지 분을 발랐다는 것이 아니라 분 밑에 연지색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데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구마토리는 가부키의 고유한 양식미를 표현하는 배우의 독특한 얼굴치장 방법으로 홍색계통과 남색계통으로 크게 나뉘어진다.② 미에(見得)미애라는 말은 외양, 외관, 허식, 허영 등의 뜻을 갖는다. 가부키의 독특한 연기수법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무대에서 연기가 진행되는 어느 한순간에 배우가 정지 상태로 눈을 부라리거나 손이나 발에 힘을 집중시키는 연기를 말한다. 원칙상 이 순간은 무대에 출연하고 있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정지 상태가 되고, 또한 미에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반주음악도 멈추고 딱딱이만 친다. 미에는 말하자면 연기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일이며 연기의 어느 순간에 초점을 모으는 연기인 것이다. 이는 관객에게 어느 동작을 인상깊게 하고자 할 때 배우가 신체의 움직임을 고정해 조각과도 같이 정지한 포즈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가부키가 회화적인 무대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데서 비롯한다.③ 다테(殺陳)무대에서 벌어지는 난투장면을 '다테' 또는 '다치마와리(立回)'라고 말한다. 살인, 격투, 범인체포 등 살벌한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양식화란, 가부키연기의 일종이다.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와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난투를 표현하는 모든 것을 다테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살벌한 장면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테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다테의 가장 화려한 움직임은 '돔보(とんぼ)'라고 일컬어지는 공중제비이다. 돔보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상당한 숙련을 필요로 한다.④ 롯포(무대음악은 무대의 일정한 장소(마루)에서 연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와 연주를 한다.(4) 가부키 춤무(舞)와 용(踊)은 일본어로 각각 '마이'와 '오도리'라고 한다. 일본무용하면 보통 가부키 춤을 뜻하고 약칭으로 '일무(日舞)' 또는 '방무(邦舞)'라고 한다. 일본의 무용을 '무'와 '용'의 장르로 나누면 무악이나 노오 따위의 중세까지의 무용은 무이고, 근세 가부키 춤은 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부키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염불춤계의 민속무용에서 비롯해 풍류춤에서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무'가 노오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서 '무'는 조용하고 의례적인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서 '용'은 민간에서 행해진 모내기 춤이나 우란분 춤 등을 포함한 화려하고 흥청거리는 매우 활발하고 민중적인 활력을 지닌 신체운동이라는 인상을 안겨준다. 가부키는 원래가 가부키 춤에서 발생한 것이니 만큼 대사극으로서의 길을 밟으면서 항상 무용성이 중시되어, 하루의 가부키 상연작품 중에는 반드시 한두 막의 무용극을 삽입하고 있다.??(5) 가부키 무대 및 극장가부키 극장은 '시바이(芝居)' 또는 '시바이고야(芝居小屋)'라고도 한다. 주로 가부키 무대장치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마치(花道)'라는 꽃길과 회전무대이다. 노오나 가부키의 무대는 액자식이 아니라 객석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초기 가부키가 노오무대에서 답습한 무대와 분장실 사이의 통로 기능이, 무대 전체가 확장되는 바람에 상실되어 관람석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출현한 것을 꽃길이라고 한다. 객석에서 무대를 향해 볼 때 왼쪽에 위치해 있고, 관람석을 지나 무대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배우가 출입하는 통로를 말한다. 길이는 극장에 따라 다르지만 폭은 약 1.5m이다. 이 꽃길은 연출상 매우 중요하다. 원래 꽃길은 관객이 배우에게 '꽃(화대나 선물 따위)'을 선사하기 위해 가설 통로를 마련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꽃길은 단순한 등장인물의 통로 내지 출입구가 아니며 무대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특히 관객과의 공감공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을 세력권아래 놓는다고 하는 일본의 계획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일본은 농민군이 해산하여 출병의 빌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발 위험을 명분으로 내세워 철병하지 않고 ?개전의 도화선?을 찾기에 분주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목적으로 하여 출병하였고, 조야의 여론이 시비없이 ?전쟁도발, 조선침략?에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만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아 일본에게 그빌미를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 일본은 결국 어떠한 빌미를 가지고서라도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려했을것입니다. 이는 운요호사건을 계기로한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가지려 했던 일본은 청나라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으며 내적으로는 임오군란등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임오군란을 빌미로 한 제물포 조약을 맺음으로써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입지를 강화 했으며, 청나라 또한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조선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내적 대외적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을 당시 부패한 정권을 바로 잡고,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하여 농민들이 주도한 개혁운동이 바로 동학농민 운동이였습니다. 이에 일본과 청나라는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삼아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입지 확장을 위하여 결국 서로 대립하던 일본과 청나라는 청일전쟁을 치르게 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보적인 입지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작업에 착수하게 된것입니다. 일본은 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구미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게 되고, 조선을 발판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일본은 근대 세계체제의 주역으로서 발돋음하고 중국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동아시아의 종주국화를 획책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일제의 보호국화 더 나아가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천명이라는 작품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음악극 형태의 작품으로써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농민들이 이 시대에 지닐 수밖에 없었던 천명과 동학인들이 가졌던 천명, 그리고 동학인이지만 그 천명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전봉준의 천명 등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천명의 진정한 의미 또한 잘 나타낸 작품이다.1. 주요등장인물법 관(오영수) - 체포 된 전봉준을 최종적으로 심문하고 처벌을 내리는 정부관리.전봉준(왕기석) - 녹두장군. 이 음악극의 중심적 인물로써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최시형(김종엽) - 호는 해월. 최제우에 이은 동학의 제2세 교조, 농민봉기 초기에는 최제우(수운)의 천명 을 지키고자 봉기를 반대하지만 결국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을 위해 봉기에 호응.조병갑(정상철) - 조선 후기의 탐관. 고부 군수로써, 여러가지 온갖 폭정을 자행하여 결국 동학농민운동 을 유발시키게 되는 장본인.장두(이문수) - 폐정을 시정해 달라고 조병갑에게 등소 했다가 오히려 난장을 당하는 고부군민.복례(안숙선) - 그 당시 농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로써 이야기 전개에 있어 중요한 인물.고종(장민호) - 동학농민운동 발생 당시의 조선 제23대 임금.동혁(주호정) - 복례의 남편으로써 농민봉기의 참여자복례 시아버지(김학용) - 안핵사의 만행으로 인해 피살 당하는 동혁의 부.홍계훈(정태화) - 고종의 명을 받아 전주화약을 맺기 위해 파견된 정부관리.촌로(백성희) - 전주화약에 따름 집강소 설치에 따른 농민의 세상이 열림을 기뻐하는 대표적 인물.기타 - 안핵사, 복례 아들, 일본군, 청나라군2. 줄거리(전체 2부 16장)1부1장(프롤로그)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농민들이 나와서 그 슬픔을 애도하는 물결은 이어지고. 법관 앞에서 전봉준은 동학과 농민봉기의 정당성에 이야기하나 법관은 처벌을 결정하게 되고 전봉준은 마지막 유언을 하려한다.2장(보은 대집회) 계속 되는 관리들의 수탈과 혁명성을 가진 동학에 대한 탄압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은 그 규모가 매우 커져서 보은에서 집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서울에 까지 진격하자고 하지만 집회의 주체자인 해월(최시형)은 관리들의 잘못을 알고 있으나 조정의 일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면서 창을 들고 진을 치는 것보다 본업으로 돌아가 생계를 돌보며 지낸다면 농민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다는 고종의 입장을 설명하여 준다. 그리고 해월은 대포로 무장한 관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인명의 피해만 생길뿐이라며 다음을 기약하자고 농민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농민들은 쉽게 분노는 가라앉지 못하고 한양으로 올라가서 왜놈을 몰아내고 사회를 개혁하자고 주장한다.3장(등소) 고부군수로 온 조병갑의 악행은 끊임없이 생기고 이에 폐정을 시정해 달라는 군민 장두를 과장에 처한다.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전봉준은 농민봉기의 대장이 되고 이어 사발통문을 돌리게 된다.4장(이별) 봉기에 합류할 것을 결심한 동혁은 아내 복례와 어린아이, 홀아버지를 뒤로하고 고부 관아 습격의 대열에 참가한다. 복례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동혁을 말리지만 아버지의 설득에 의해 동혁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이별을 한다.5장(불씨는 지펴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로 인한 고부관아 습격의 성공으로 작은 불씨 하나를 얻은 것과 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승리를 거둔 농민군들은 좀 더 조직적인 군이 되기 위해 백산으로 훈련을 하러 간다.6장(안핵사의 만행)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에 성공할 즈음에 동학교도들의 종교탄압을 이유로 안핵사의 역졸들이 마을을 습격, 농민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지르는 만행이 시작된다. 이때 복례의 시아버지가 죽게 되고 복례와 아들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남편을 찾으러 간다.7장(백산에서 전주까지) 백산에서의 훈련으로 완벽한 군사가 된 농민군들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외치며 백산에서 전주로 향하게 된다. 동혁을 찾으러 간 복례와 그 아들은 부안, 백산을 헤메이며 힘에 버거워하는데...8장(전주성 입성) 고부관아를 시작으로 하여 부안공격, 황토현 싸움 등의 계속되는 농민군의 승리속에 어느덧 전라도 감영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최시형 선생은 아직 때가 이르니 좀 더 기다리라며 전봉준을 설득해 보지만, 이에 전봉준은 “물결은 거세면 보는 터지는 것 성급함으로 공을 다투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원성에 의해 만들어진 물결에 내가 휩쓸려 가는 것이 나의 천명으로 저 물결에 나를 던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배성을 위한 천명을 지키려 하며 결전을 준비한다.2부1장(외군 입성) 농민군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에게 도움을 청하고 텐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도 들어오게 되어 한 나라에 두 나라의 군대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사태에 고심을 하던 고종은 실료들의 갑을논박속에서 화약이라는 대책을 결정하게 된다.2장(전주화약) 조정은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홍계훈을 내려 보내 농민과 전주화약을 맺게 한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들과 전주화약을 맺고 조건으로 폐정개혁안 27개조 수용과 집강소 설치도 인정하게 되었다.3장(집강소 시대) 집강소 설치로 인해 살기가 좋아졌다고 기뻐하는 농민들의 모습에 전봉준은 자신도 끼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먼 개혁의 세상에 매우 서글퍼 한다.4장(청일전쟁과 재기포) 집강소 통치도 불과 4개월, 일본이 조선의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하는 과정소에 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되었다. 전봉준은 마지막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왜적을 물리칠 때임을 깨닫고 많은 군사들을 모으기 위해 해월에 도움을 청하여 각 지역에 있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의 참여를 이끌게 된다. 해월은 시기상조라던 예전의 태도와는 달리 수운선생의 천명은 지킬 수 없지만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천명은 지켜야 한다며 이를 수락하며, 각처에 전령을 급파하여 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 참여하게 된다.5장(남북접 연합군) 많은 동학농민군들의 군세에 일본은 동학군 진압에 조선관군을 선봉으로 내세워 같은 민족을 싸우게 만드는 계략을 세운다. 이에 같은 민족끼리 피를 볼수 없던 동학농민군들은 일본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6장(우금치 전투 전야) 전봉준은 남은 모든 동학농민군들을 마지막 결전의 장소를 공주 우금치로 정하고 이곳으로 모든 병력 모이도록 한다.7장(아! 우금치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신식무기에 밀려 패전하게 된다. 남편을 찾아 힘들게 아들과 함께 찾아온 곳에서 만난 남편은 시체로 남아있었다. 이에 복례는 살 희망을 잃고 죽으려고 하나 남편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천명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자신도 살아남는 것이 천명이고 동학농민운동에서 보여준 농민들의 정신을 후세에 알려줘야 하는 것이 천명이라고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다.8장(에필로그) 전봉준은 죄를 탓하는 관리 앞에서도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며, 자신은 백성을 사랑한 것밖에 없다면서 이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며 처형대에 올라가고 곧 처형되게 된다.3.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과 미흡한 점1)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① 고종은 12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왕에 즉위하였고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때가 고종 31년(1894)이므로 당시 고종의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에 불가하다. 하지만 음악극에서는 늙고 병약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한나라의 군주로서 위엄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 영력하다. 고종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자칫 동학농민운동이 고종의 많은 나이와 병악함으로 인하여 미흡한 정치의 결과물 이라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② 이 음악극의 사건 전개가 전봉준 위주로 편성된 것이기는 하나 실제와는 너무 다르게 동학농민운동 전반을 전봉준과 연관지어 다룸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을 한 인물의 주제로써만 이루어진 것으로 자칫 오해할 여지가 있다. 또한 전봉준이 농민들 세력에서 근본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 했던 것은 고부봉기 이후 백산으로 본진을 옮긴 후, 대장으로 추대 받으면서 부터인데 이 음악극에서는 빠른 사건전개와 전봉준 중심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인지 고부봉기 전부터 전봉준을 중심축으로 하여 봉기가 일어난것처럼 묘사됨으로써 시간적인 묘미한 차이가 있다.2) 미흡한 점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고부봉기 등 위협을 느낀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전주화약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가 이 장면에서 나오질 않았다. 당시 흥선대원군과 세력 타툼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고종 곁에서 실세권력을 행사하였던 명성황후 가 동학농민봉기라는 큰 사건의 해결책 마련하는 자리에 참여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언급은 물론 등장도 없었다.
Ⅰ. 서 론(답사일정 및 동기)2007년 11월 7일 수요일 나는 이번학기에 동학농민 혁명사라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고, 유적지답사를 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으로 부터 어렵게 월차휴가를 얻어내어 꿀 같은 휴식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원칙으로는 지난주 교수님과 수강학생들의 단체 답사에 함께 참여했어야 했지만, 직장 사정상 답사를 함께하지 못한 나는 교수님의 동의를 얻어 대학친구와 이번 답사를 함께하였다.이번 답사일정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동학놈민운동 유적지로 답사를 경험해보았던 백산지역의 유적지는 제외했으며, 답사 전에 사전조사를 통하여, 유적지 답사를 다음의 표와 같이 크게 4구역으로 나누어서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구역코스제1구역(만석보 유적지)만석보유지비 → 만석보혁파비 → 말목장터제2구역(전봉준장군 유적지)전봉준장군 고택 → 전봉준장군 단소제3구역(황토현 유적지)동학농민혁명기념관 → 황토현전적지 → 동학혁명기념탑제4구역(고부 유적지)고부관아터 → 무명농민 위령탑→ 동학혁명모의탑Ⅱ. 본 론(유적지 현황)1.제1구역-만석보 유적지익산에서 아침 10시를 약간 넘겨 출발하여 자동차로 40여분의 시간을 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만석보유지비가 있는 만석보터’ 였다.만석보 유지비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던 보가 잇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는데 조선 고종 30년(1893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낸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주변에는 배들평(이평)이라는 비옥한 넓은 들 그 당시의 장터로서의 부산했던 본래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단지 이곳이 옛 말목장터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석(이평 종합복지회관 앞)과 말목정(이평 종합복지회관 좌측), 그리고 고부봉기를 도모 할 때에 깊은 관련이 있는 감나무만이 이곳이 예전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첫 집결장소로써 유서 깊은 곳이라는 것을 입증해 줄뿐 이였다.말목장터와 감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이 곳은 1894년1월 고부봉기 때 배들평 농민들이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모인 곳으로 전봉준장군이 감나무 아래에 서서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을 설명하고 고부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수천 농민이 호응하여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하니, 이곳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농민혁명의 첫 집결장소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면사무소 맞은편에는 전봉준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다. 이 감나무는 2003년 8월 25일 강풍으로 도복되었으나, 방부 처리하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 보존되어있다.(도복된 후 새로이 심어진 감나무)(도복된 그 당시 실제 감나무)더군다나 말목장터에서 보았던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 이였던 고부봉기의 첫 집결장소로 유서 깊은 150여년동안 세월의 세파 속에서도 견디어낸 그 당시의 감나무가 아니였으며, 그 당시의 감나무는 2003년에 태풍으로 인하여 도복되어 현재 보존 처리되어 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었고,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이 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말목장터를 답사하면서 가장 크게 마음에 거렸던 부분이 바로 이 감나무였다. 앞에서 말했던바와 같이 현재는 많은 변화로 인하여 이곳이 말목장터였음을 알아보기 힘들다. 비석과 말목정이 있다고는 하나 이는 언제까지나 그 후의 기념물 일뿐 그 당시의 말목장터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다. 그나마 그 당시의 감나무가 도복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있었더라면 그 당시의 현장분위천안전씨 문중에서 설단하였다. 이 단비명은 사학가이신 김상기 박사가 명명하였으며, 동학혁명 100주년(1994.5.11)을 기념하고자 전봉준 유적 보존회를 구성하고 뜻있는 종인들이 성금을 모아 이곳을 확장 정화하였다.이곳에서 200미터 북동쪽에 장군의 고택이 있고, 150미터 북서쪽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전봉준 장군의 고택 주변에는 일반묘소들과는 달리 화려하고 장엄한 묘소들이 곳곳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장군의 단소인줄 알고 가고서는 헛걸음을 계속하는 헤프닝이 있기도 하였다. 장군의 단소는 여러 비석과 단소 바로 뒤에 있는 도로로부터 단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외벽, 단소주변에 잡초하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관리된 잔디 등 어느 묘소보다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는 천안 전씨 문중이 조상인 장군을 기리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내 자신부터도 조상들의 묘소에 기껏해야 명절을 비롯해 한손에 꼽을 정도로 성묘를 가면서도 매번 귀찮아하고 반강제적으로 갔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도 전봉준 장군처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단소 앞에서 다시금 마음을 갖춰먹고서 다음 답사지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3.제3구역-황토현 유적지제2구역의 견학장소가 동학 농민혁명운동의 주역이셨던 전봉준장군에 대한 유적지였다면다음으로 답사한 제3구역은 동학 농민역명운동의 전반적인 흐름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황토현 유적지였다. 전봉준 장군의 단소로부터 자동차로 10여 분간 이동하여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동학 농민혁명 기념관’ 이였다.2004년 5월 11일 개관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전시관과 교육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와 정신의 선양 장소로 활용 되고 있다고 한다. 총면적은 174,146㎡(기념관 172,602㎡, 교육관 1,544㎡)먼저 교육관은 전통 초가형으로 전시관과 함께 준공된 교육관은 세미나실, 강의실 없고 설상 있다하더라도 그는 매우 협소적이고, 형식적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이곳의 전시관의 경우에는 1,2층 전시관 전체에 곳곳마다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몸소 직접 체험과 각종 관람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공간에 빨려 들어가 그 현장에 내 자신이 몸소 겪는 듯한 경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우스나 터치스크린을 통해서가 아닌 허공에 손을 움직여 영상을 조작하는 ‘아이오포인터 시스템’을 시작하여 놀이동산에서나 볼수 있는 목마인형을 타고서 동학혁명 유적지를 가상체험해 보는 시스템 등등 여러 체험공간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 이였던 체험공간은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게 재판심문을 하는 과정을 다룬‘애니메트로닉스’이였다. 정말로 볼 것도 많았고 체험을 통해 몸소 느껴봄으로써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좀 더 한발 더 다가 갈수 있는 좋은 경험 이였던 것 같다.약1시간에 걸쳐 곰꼼히 모든 답사를 마친후 다음으로 향한 곳은 기념관 앞 200여 미터 앞에 바로 자리잡고 있는 황토현전적지와 동학혁명기념탑 이였다.황토재 전적지는 1894년 5월(고종 11년)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최초로 크게 승리를 거둔 전적지로 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 전봉준장군의 동상과 사당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 광장, 주차장을 갖추고 있었다.1987년에 전봉준장군상 및 동학농민군의 부조물이 건립되었으며 백산 창의문 중에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중략)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지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라는 동학농민군의 그 때의 함성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91년에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사당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장군과 동학농민군 참전제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황토현 전적지 전경)(갑오 동학혁명 기념탑)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이곳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해산물 또한 풍부한 천혜의 낙토라 이를만한 고을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제때부터 남방경영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날 이름인 고부로 일컬어진 것은 신라통일 후 신라경덕왕 16년은 (757년) 부터이며, 조선시대에 와서도 전라도 서부지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자 서해안의 요진(要鎭)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제시대때 정읍군으로 폐합되어 백산면은 부안군으로 부안면은 고창군으로 각기 편입되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농민군과 함께 쇠락을 같이한 고을이라고 한다.(고부관아터-현재 고부초등학교)고부관아터고부는 예로부터 드넓은 호남평야와 인근에 서해안과 접해있어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천혜의 지역으로서 전라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하여 왔으며, 이곳은 1894년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온갖 탐학과 수탈로 인해 동학농민혁명 봉기의 직접적인 장소이기도 하다.당시 관아에는 동헌, 객사등 여러동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민족혼의 말살정책으로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고,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고부관아터 건물 배치도)마침 우리가 답사를 했을때가 현재 고부관아터에 자리잡고 있는 고부초등학교가 개교100주년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개교가 100주년이나 되다니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학교는 처음이였다. 그렇다면 이는 고부관아 일제강점기시기에 민족혼 말살정책에 의해 모두 철거될 시기 하고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는 얘기인데, 정말이지 이 고부관아의 빈자리를 초등학교가 꿋꿋이 100년 동안 지켜주었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뭉클하였다.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본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소실되었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에 있던 일본에 대한 분노와 애국심이 불타올랐다.고부관아터를 둘러본 후 우리는 이번답사의 마지막 답사지인 ‘무명농민군 위령탑’와‘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로 향하였다.무명농민군 위령탑은 1894년 농민전쟁 역사에서 그렇게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쓰러져간 농민군의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Ⅰ. 서론신체 각 부분이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려면 혈관을 통하여 적절한 산소와 영양이 공급되어야 한다. 이처럼 심장또한 관상동맥이라는 혈관을 통해 필요한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는다. 즉, 관상동맥은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혈관이며, 크게 세 가닥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모양이 심장을 덮고있는 왕관 같다고 해서 관상동맥 이라 불린다.관상동맥질환은 사망원인 중 약 25~30%를 차지할 만큼 성인에서는 중요한 병이다. 심장사중에서는 관상동맥질환이 80%를 차지하고 5~10%가 고혈압성이므로 심장질환 중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심근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관상동맥인데 어떤 원인이든 3개의 주 공급 관상동맥의 내강이 좁아지거나 폐색되는 경우 관상동맥의 혈유가 심근의 수요에 균형을 유지할 만큼의 양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심근은 허혈이 되어 병변을 일으킨다. 이것을 관상동맥질환, 즉 허혈성 심질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Ⅱ.본론1.질병의 발생심장은 1년 내내 24시간 내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쉬지않고 일하는 기관이므로 많은 영양분과 혈액을 공급 받아야 하는데 심장의 각 부분은 하나의 관상동맥에 의해서만 혈액을 공급 받기 때문에 이들 관상동맥이 좁아지거나 막히게 되면 심장의 근육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통증을 일으키고, 심하면 썩어버리게 된다.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상동맥질환이란, 동맥경화증이 심해져서 관상동맥의 협착이 진행되고 이로 인하여 심근의 혈류공급에 장애가 생기는 병변을 지칭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동맥경화증이 오게되면 혈관은 딱딱해지고, 콜레스테롤, 다른 지방성분, 칼슘, 기타 혈중성분등이 한데 덩어리져 관상동맥의 내면에 축적되면 혈관벽은 두꺼워지고 그 내경은 점차 감소하게 되어 중요 장기에 혈액 공급이 저하되거나 동맥 동맥의 탄력성이 소실되고 약화되어 동맥의 파열이나 폐쇄등이 일어나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동맥경화증으로 인해 관상동맥의 일부가 좁아지면 운동시나 심장 박동이 빨라질 때 심근에 대한 혈류 공급이 줄어들게 되어 결국 산소부족으로 와 함께 환자는 기운이 빠져 피로감을 느끼거나 숨이 차며 속이 메스꺼운 증상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통증은 수십 초에서 30분까지 지속될 수 있지만 대개는 2-3분 정도 이어지다가 사라지게 되며, 통증은 대개 흉골의 바로 안쪽에서 느껴지며, 때로는 이러한 통증이 목, 턱, 왼쪽 어깨, 왼쪽 팔로 번지기도 한다.운동이나 감정적인 흥분은 심장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수행하게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심근의 산소요구량도 늘어나 이러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휴식을 취하면 증상이 완화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행증상이 없이 곧바로 심근경색증(심장발작)이나 심장마비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응급 조치가 따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게 된다. 관상동맥이 갑자기 막히게 되어 심장 일부에 대한 혈액공급이 완전히 차단되면 해당 부위의 심근이 영구적인 손상을 받게 되는데, 심한 흉통이 지속되고 심장의 수축력도 감소하게 되며, 이를 흔히 (급성)심근경색 또는 심근발작이라고 부르며, 보통 동맥경화성 협착이 있는 관상동맥에 갑자기 혈전이 생겨서 발생한다. 심장경색 환자의 약 1/4 정도는 심장마비의 형태로 이어져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사망위험율은 심장발작 2시간 이내가 가장 높다. 그러므로 가슴통증이 처음 시작되거나 관상동맥질환이 있는 사람에게서 가슴통증이 지속적일 때는 가능한 빨리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① 협심증 발작의 위치전형적인 경우는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고 죄는 듯하다가 이 증상이 왼쪽 어깨나 왼쪽 팔의 안쪽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때로는 오른쪽 어깨 또는 팔?턱?목 얼굴로 가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등과 상복부에도 드물게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② 발작의 상태통증이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운 것이 꽉 누르거나 쥐어짜면서 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때로는 왼쪽 눈이 시리고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을 갖거나 턱이나 이가 아파서 치과를 찾는 수도 있다.③ 발작의 기간발작은 심장의 근육에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운동 등으로 더 많은 산소 발병과 연관된 몇 가지 인자가 있다. 아래에 관상 동맥 질환이 발병할 위험성을 증가시키는 주된 인자들을 나열한 것으로써 이 인자들은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두 개의 범주로 나뉘어지게 된다.①고정요인1)관상 동맥 질환의 가족력가족 중 심장병,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을 앓거나 혹은 이런 병으로 남자의 경우 55세 이전, 여자의 경우 65세 이전에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질환 가족력이 없는 사람보다 심혈관 질환 발생에 더욱 주의 해야한다.2)성별관상동맥질환 및 고혈압의 경우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여성의 폐경기까지는 위험이 높으며, 폐경기 이후에는 여성의 위험이 남성과 비슷하게 높아진다.3)나이연령이 증가하면서 심혈관 질환 발병이 많아진다.②변동 요인고혈압, 고지혈증, 흡연, 당뇨병, 비만, 운동부족, 스트레스, A형 성격 등임이 여러 연구 및 조사에서 밝혀졌으며, 고령자, 유전적 소질을 이어받은 사람도 동맥경화를 일으키기 쉬운 불리한 조건에 해당된다. 이상의 위험요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동맥경화가 될 가능성이 많아지는데 각 요인이 서로 동맥경화형성에 기여하여 발병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중에서 고혈압, 고지혈증, 흡연의 세 요인은 독립적 위험요인이라 하여 비록 다른 위험요인의 부추김이 없더라도 독립적으로 동맥경화를 야기시킬 수 있다.1)고혈압고혈압은 온몸의 혈관과 심장을 손상시킨다. 일반적인 경우에 혈압은 심장의 박동능력과 혈관의 직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혈압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심장박동의 리듬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혈압을 측정할 때는 항상 두 개의 측정치가 나옵니다. 즉 높은치수와 낮은치수가 나온다. 예로서 120-80(mmHg), 이것은 정상적인 혈압이다. 계속적인 혈압측정치가 140-90일 경우는 혈압이 높은 경우로서 혈압이 강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혈압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계속적인 고혈압으로 인하여 혈관에 부담이 가고, 혈관에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혈관은 점차 좁아지고 딱딱하져당뇨, 신증후군, 알콜중독, 갑상선 기능저하증 등의 병이 있으면 고지혈증이 합병하게 되는 결과로 동맥경화가 촉진된다.3)흡 연동맥경화성 질환을 일으키는데 관여한다는 사실이 여러 역학조사에서 증명된 바 있다. 하루 한갑 이상의 흡연을 하는 남자는 비흡연자에 비하여 관상동맥경화에 의한 심장병의 발생이 3~5배에 달한다고 하며, 사망률도 70%나 더 많다고 한다. 흡연하면 혈중에 일산화탄소가 많아지며 이것이 혈관벽에 손상을 주고, 혈소판의 응집력이 강화되어 혈전형성이 용이하여질 뿐 아니라, 혈소판이 분비하는 증식인자가 동맥벽의 병적인 이상증식을 촉진한다고 한다.4)당 뇨당질이 효과적으로 에너지원으로서 이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 지방질이 분해되어 에너지원으로 이용된다. 이 과정에서 혈중 지방질의 농도가 높아지며 동맥경화가 용이하게 형성된다. 그리하여 당뇨병은 심혈관 질환 발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는 혈당을 조절했다고 해도 당뇨병은 심장질환과 중풍의 위험을 결정적으로 증가시킨다. 또한 당뇨병 환자의 80%이상이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한다.5)비 만비만은 체내 지방이 지나치게 쌓인 상태를 말하며 비만한 사람은 심혈관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증가된다. 비만은 다른 어떤 위험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심장병과 중풍을앓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비만하면 혈압이 상승하고, 혈중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이 많아지고 당뇨병의 발생위험이 증가하며 이러한 변화는 모두 심혈관 질환의 발생 위험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건강에 유해하지 않은 콜레스테롤 수치는 200mg% 이하이다. 혈액내 콜레스테롤 치가 300mg%이상 되는 환자의 경우는 정상적인 혈액내 콜레스테롤 수치인 200mg%의 환자에 비해 4배나 더 높은 관상동맥 심장병 유발의 가능성이 있다. 비만도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이상으로 심장병 유발의 위험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비만의 체구에 신선한 피의 공급을 보장할 수 있으려면 그 만큼 심장이 더 많이 일을 해야하고, 심장자체도 그를 위해 더 많은 영양분과 산소공 주어 불리하게 작용한다.4.질병의치료방법관상동맥질환의 치료는 크게 약물요법, 중재적 시술, 수술요법으로 나뉘어진다.①약물요법은 심장의 운동량을 줄이고, 관상동맥을 확장 시켜주는 베타차단제, 니트로글리세린제제, 칼슘길항제등을 사용하고, 동반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등에 대한 치료를 병행한다.②중재적시술은 경피적 관동맥성형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약물로 치료하는 내과적치료와 수술을 통해서 치료하는 외과적 치료의 중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중재적 시술이라고 한다. 경피적관동맥성형술은 대퇴동맥이나 액와동맥, 요골동맥등을 통해서 풍선을 넣어서 관상동맥의 좁아진 부분에서 풍선을 부풀려서 좁아진 부분을 넓혀주는 치료방법 이다.시술방법이 간단하고 효과가 좋아 최근 그 사용이 늘고 있지만, 시술 후 수개월내에 다시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다.③좁아진 부위가 여러 곳이거나 풍선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곳이면 관상동맥우회술이라는 수술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우리 몸의 다른 부위에 있는 동맥이나 정맥을 이용하여 협착으로 인해 혈류량이 부족한 부위에 혈류공급이 원활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수술로써 이때 사용되는 우회혈관은 떼어내더라도 신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혈관을 사용하게 되며, 흉골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내유동맥과 하지의 피하에 있는 복재정맥을 주로 사용한다. 이 혈관을 심장 표면에서 막힌 부위 너머 관상동맥에 직접 연결하여 혈액공급을 원활하게 해줍니다. 수술이 크고 위험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관상동맥질환의 치료효과는 가장 뛰어나 현재 가장 많이 보편화 되어있는 외과치료시술이다.5.질병의 예방 및 관리관상동맥 질환의 예방은 수정 가능한 위험요소인 생활습관의 교정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금연이 가장 중요하며, 식습관의 교정, 적절한 체중의 유지, 스트레스 조절, 규칙적 운동 등이 중요한 예방원칙이다. 또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갑상선 기능저하증 등 위험요소 증가와 관련된 질병에 대한 치료가 필요하며, 특히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① 식습관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