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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 해방 후 남한과 북한 사학계의 역사 인식 평가A+최고예요
    해방후 남한과 북한 사학계의 역사인식1.해방 후 남한 사학계의 역사인식⑴남북의 분단과 1950년대의 역사인식1950년의 한국전쟁은 사회의 다른 각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학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에 반대했던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사학 계열의 역사학자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1950년대 남한 사학계는 냉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학의 이념이나 사관을 결여한 채 문헌고증의 아카데미즘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0년대는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이념적·체제적 대립이 심각한 시기였다. 민족적인 사상이나 관념은 거부되었고, 대신 공산주의 이념에 대응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도입되었다. 서구에서 발전해 온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원칙과 본질이 지켜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념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대립되는 독재정치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정치·사회적 재편성은 미국의 세계체제의 편성과 밀접한 관련을 같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복구사업에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했고, 정치·사회적 제도정착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인 것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50년대 사학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본적으로 당시는 문헌고증사학이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치하에서 형성된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미미하지만 그 발전의 가능성으로 보아 간과할 수 없는 신민족주의사학의 유풍은 남아 있었다. 전자는 '震檀學會'의 활동, 후자는 '歷史學會'의 창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전쟁후 곤궁한 가운데서도 진단학회가 학회활동을 전개한 점은 높이 평가되지만 그것이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대하여 정치·경제·사회·사상·문화 각 부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미국의 지원으로 가능했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문헌고증사학을 비판하는 신민족주의사학 유풍은 해방공간에서 교육을 받았던 소장학자들에 의해 일부 간직되었다. 그들은 문의 고착화와 북진통일로 상징되는 사상적 경직성에 적응할 수 있는 역사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형성된 식민주의사학의 타율성이론·정체성론은 아직 비판되지 못하고 있었다.⑵1960, 70년대의 민족사학론①식민주의사학 비판과 민족주의사학의 계승1960년 4월혁명은 체념적인 사회분위기를 일신하면서 민족적 저력을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이러한 분위기는 다시 침잠되고 이후 기나긴 군사독재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1965년 한일회담을 통해 일제시기의 역사에 대한 반성없이 새로운 한일관계가 정착되었고, 이를 토대로 미국·일본·한국은 극동아시아의 중요한 동맹국이 되었다. 근대화론에 입각한 공업화정책이 추진되면서 경제성장을 꾀하였지만 남북대결을 이용한 유신체제의 성립은 사상적·학문적 발전을 크게 제약하였다.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민족민주운동도 급속한 성장을 보이면서 1980년대를 향하고 있었다. 사학계도 이런 사회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4월혁명을 계기로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사학사의 흐름을 이으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것은 일제시기 식민주의사학·문헌고증사학·민족주의사학·마르크스주의사학의 내용을 정리하고 그 성격을 평가하는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사학사 정리는 일제시기 식민주의사학과 그 아류인 문헌고증사학을 엄격하게 비판하고 마르크스사학의 한계를 인식하는 한편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민족적인 분위기에서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사학의 계승은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였다. 그 과정에서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자체가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이 곧 '민족사학'인 것으로 오해되었다. 여기엔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 자체가 곧 민족사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이 단지 일제하의 그것만을 대상으로 삼고 식민주의사학의 본질에 대한 현재적 비판의 문제는 수준을 상승시키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1960, 70년대의 한국사학자들은 대부분 일제하의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한 민족사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민족사학의 범주를 가리는 작업은 주관적인 것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민족사학 내부의 다양한 경향을 가려내고 그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에야 비로소 민족사학의 방향설정이 가능할 것이다.민족사학의 다양한 경향은 우선 크게 '民族文化論'과 '內在的 發展論'으로 구분된다. 민족문화론은 식민주의사학의 타율성이론을 비판하는 경향으로서 대체로 관념적인 영역의 문제를 다루고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주의사학의 정체성이론을 비판하는 경향으로서 물질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다. 민족문화론은 다시 민족'문화'의 역량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文化史的 경향과 '민족'적 우월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구별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발전의 계기를 사회리 구조와 내부적 역량에서 추구하는 社會構成史的 경향과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발전'의 양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근대주의적 경향으로 구별된다.민족문화론의 왜곡된 형태가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내재적 발전론의 왜곡된 형태가 근대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국수주의적 경향은 유신체제에 의한 '한국적 민주주의론'의 제기에 호응하여 주로 관변이나 재야사가들에 의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문화사적·근대주의적·사회구성사적 경향들은 대체로 학계의 연구경향을 반영하고 있는데, 학계의 연구경향을 담아낸 학술단체가 1967년 역사학회와는 별도로 창립된 '韓國史硏究會'였다.민족사학 내부에 나타난 여러 가지 경향은 기본적으로 문헌고증적인 경향을 기초로 했음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헌고증적 경향은 일제시기의 문헌고증사학이 한국전쟁이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일제시기의 식민주의사학과 문헌고증사학이 비판을 받으면서 실증으로서 문헌고증은 역사연일본 등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전개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타율성이론의 내용은 任那日本府說, 滿蘚史觀, 半島的 性格論, 事大主義論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민족문화론은 이러한 타율성이론에 대항하는 논리적 경향을 지녔는데, 내부에는 다시 문화사적 경향과 국수주의적 경향이 있다. 문화사적 경향은 타율성이론에 대한 대항의 논리를 민족문화의 고유성과 독자성, 문화적 능력에서 추구한다. 국수주의적 경향은 한민족은 고대부터 광대한 영토의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이후 영토는 축소되었으나 외세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대사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극단적인 국수주의로 나아가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③내재적 발전론식민주위사학의 정체성이론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정체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데 악용되었다. 그것은 封建制度 缺如論으로 대표되며, 경제의 정체를 주장하는 것이 핵심을 이룬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러한 정체성이론에 대항하는 논리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데, 내부에는 다시 사회구성사적 경향과 근대주의적 경향이 있다. 사회구성사적 경향은 경제의 발전을 전망하면서도 그 내재적 구조와 계기를 중시하여 조선 후기 資本主義萌芽論을 비롯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주의적 경향은 근대화론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경제발전의 주체와 방향을 문제삼지 않고 발전의 양적 성장을 중시하며 발전의 결과를 낙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식민주의사학의 정체성이론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⑶1980년대의 민중사학론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사회변화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민족민주운동이 크게 활성화되었고, 민중의 사회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선언적 명제에 기초하여 역사를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학문 경향"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민중사학은 1980년대의 변혁 분위기 속에서 실천활동에 대한 학문적 응답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민중의 개념에 대해서는 초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견해와 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민중의 개념을 초역사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견해는 민중을 피지배계층으로 이해하고,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그 구체적인 존재형태가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민중이란 역사에 있어서 부나 권력, 그리고 명성이나 특권적 지위에 가깝지 않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분석하여 정치권력의 관점에서는 피지배층, 경제활동의 관점에서는 직접생산자, 사회적 지위의 관점에서는 저변의 계층으로 보면서도, 운동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타파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이같은 민중개념은 민중의 존재를 역사의 모든 단계에 설정함으로써 민중개념의 확산과 민중사학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지만, 1980년대의 사회 분위기에서 나타난 민중사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부족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와는 달리 민중의 존재를 특정한 역사적 시대와 특정한 역사적 지역에 한정하여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 즉 한국역사에서 민중이라는 인간집단이 등장한 것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전개에 의하여 민족의 위기에 처했던 한말이었고, 그것은 한국역사에서만 독특한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적 관계가 미숙한 후진국에서는 계급적 요인보다는 민족적 요인에 의하여 이러한 민중의 형성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민중의식은 한국사에서 신채호와 백남운에 의해 형성되었고 1960, 70년대에는 신채호와 백남운을 재발견함으로써 토대가 닦였으며, 1970년대 말 이후 근대사회의 발전방향을 재인식하면서 성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민중개념은 지나치게 민족모순에 규정되어 사회 하였다.
    인문/어학| 2002.10.09| 5페이지| 1,000원| 조회(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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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ANY GIVEN SUNDAY 영어대본
    This does not look good. Cap Rooney, three-time league MVP......and Coach Tony D'Amato's star 38-year-old quarterback is down......and not moving.Don't you see he's hurt?-Did you see that? -That hurts.Every Shark fan has a sickening feeling in his stomach.Let's look at this again.Cap Rooney is down and in pain.Get me Vincent.Riggman makes a beautiful move over Julian Washington.Which frees up Watson up the middle. Look at Gates on the backside.Who's on weak side safety?Stop showing that.We'll return with Cap's condition after a word from our sponsors.-They cut to a commercial. -I think I broke my back!My butt!Damn it! Fuck!-Where's it hurt? -Where you're touching it!Candy-ass, no-blocking bitches!
    인문/어학| 2002.10.09| 52페이지| 1,000원| 조회(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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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한국사 시대구분론 평가A+최고예요
    韓國史 時代區分論< 목 차 >1. 머리말2. 時代區分論의 展開3. 時代區分의 基準과 槪括的 類型 分析4. 時代區分의 課題5. 맺음말1.머리말역사 연구와 서술에서 시대구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시대구분은 인간역사의 과정을 체계적·법칙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역사가 임의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공통적인 어떤 원리에 의하여 발전되어 있다고 보고, 역사발전의 객관적 원리를 확인하고자 하는데 시대구분의 목적이 있다.이와 같이 시대구분의 목적인 지나간 역사속의 경험을 합리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의 보편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대구분의 진정한 목적은 현실사회의 위치를 역사전개 과정속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미래사회의 발전방향을 예견하는데 있다. 즉 과거의 역사를 법칙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통하여 현실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데 시대구분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나온 개설서나 시대구분을 보면 한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이른바 三分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긴 고대 이전에 원시시대(혹은 선사시대)를 설정하는 四分法도 행해지고 있으며 또한 근대 이후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기를 추가하여 五分法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현대'의 경우, 이를 단순히 '근대'의 연속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와는 대립되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극복해야 할 특정한 의미와 내용을 갖는 것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상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현대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정치형태라든가 혹은 사회적인 지배세력의 변화에 기준을 둔 독창적인 시대구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역사학계의 압도적인 경향은 삼분법적 파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 내면으로부터 주체적 파악을 소홀히 한 채 유럽사회의 역사적 경험에서 추출된 개념, 즉 서구의 가치의 척도나 모형에 맞춰서 한국사 발전의 여러단계를 劃期하려는 삼분법에는 근본적인한국사에 대한 세계사 시대구분의 기계적 도입을 반대하고 그 발전과정의 한국적 특수성을 밝히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주로 문제가 된 것은 특히 마르크스의 아시아적생산양식론의 적용과도 관련하여 한국에 있어서의 노예제사회의 존재유무와 그 시기설정 문제였다. 이는 동시에 한국봉건제사회의 성격과 그 성립 시기를 설정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백남운은 삼한, 삼국시기를 중심으로 이 시기의 농업생산의 기본 노동부대를 서양의 고전고대적 노예와 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노예군(노비, 하호, 부곡민 등)으로 파악하여 노예제가 조직적으로 확립되고 주민의 절대 다수를 이루며 생산노동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은 크게 두 형태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노예제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서양의 고전고대적인 것이 아니라 아시아적생산양식에 규정된 공납제 노예제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노예제이며, 그 존재시기도 고려시기까지 내려온다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5단계 발전설을 부정하고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직접 봉건제로 이행하였다는 노예제 결여론이다. 특히 노예제 결여론은 삼국시기 생산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계급으로서 노예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생산노동의 주 담당층은 노예가 아니라 국가에 예속된 봉건적 의미의 농노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즉 이 시기에는 복수적 생산관계가 존재하는 가운데 농노제(봉건제)가 지배적 생산관계였다는 것으로, 백남운이 노예로 이해한 하호농민 또는 부곡민은 봉건적 예속농민에 속한다고 하였다.이와 같이 한국사에 있어서 조기에 봉건제 생산관계가 성립한 것은 아시아적생산양식에 의해 공동체적 소유관계가 충분히 해체되지 않은 가운데 봉건화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라 하여 아시아적생산양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한국사의 일원론적 발전을 강조한 백남운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한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보다 풍부한 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마르크스가 아시아사회에 대한 천박한 지식을 가지고 아시아사회의 낙후성을 전제한 위에서 개념화한 이는 1968년 시대구분에 관한 토론과 《韓國史時代區分論》(1970)의 간행으로 일차 정리되었다. 이때에는 고대, 중세, 근대, 일제하 등 각 시대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대구분상의 이론적 수준이나 문제의식에 있어서 과거 마르크스주의역사학의 시대구분에 비해 큰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논의를 통해 한국사의 발전적 시각이 제고됨으로써 분단 이후 경색되었던 한국사인식의 시야를 확대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이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 근대의 기점문제가 제기된 점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당시 식민사관의 正體性論을 타파하는 데 주요한 성과로 평가된 조선후기 봉건제해체론, 자본주의맹아론 등을 기반으로, 다른 한편 박정권의 근대화정책의 이데올로기 선전과 관련해서 한국의 근대화과정이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근대의 기점으로 18세기 후반, 1860년대,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 여러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어떤 특별한 결론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근대기점에 대한 과학적인 기준을 설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논의는 전근대, 근대를 불문하고 시대를 구분해야 하는 역사인식상의 과제와 의의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공유한 가운데 시대구분의 과학적 기준설정이나 그것의 실증성 여부를 검증하는 형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이와는 거리가 먼 각종의 시대구분의 기준을 내세워 그 다양화, 개성화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는 분단 이후 문헌고증사학의 바탕 위에서 각종의 구미 부르조아역사학이 결합되어 전개되고 있었던 당시 학계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토론회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과학적, 실천적 의미의 시대구분의 시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고, 현재에는 시대구분 부재의 한국사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이다.(3)최근의 경향대다수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三分法的인 시대구분에 따라 개설서를 집필해 왔다. 이는 시간의 遠近을 기준으로 하여, 여기에 역대 왕조를 각기 구성이라든가 정치기구의 운영, 사상의 추세는 사회세력으로서의 인간집단의 정치, 사회, 사상적 태도를 표시한 것에 다름없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 시대의 사회적 지배세력이란 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하는 인간의 양상이 거울에 비춰진 反射體라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전환기마다 새로이 대두하는 사회 세력은 결국 한국사 발전의 양상을 밝혀 주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 된다고 한다. 블로크(Marc Bloch)가 『역사를 위한 변명』(1949)에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의 사실이란 어떤 종류의 의식을 갖고 발생하는 인간행위의 반영일 따름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탐구해야 할 대상이 사실의 배후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기백이 인간이 역사로서의 한국사를 강조하는 것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현재 학계의 일각에서는 社會思想史의 관점에서 사상·종교의 변화로써 시대를 구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즉 許興植은 새로운 사상은 사회변동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아가 이를 안정시키는 사회적 기능이 있으며, 사회 禮制의 기반이 되는 종교는 다름 아닌 國敎라는 기본전제 아래 한국사를 삼국시대 전반기까지는 自然神과 始祖神 신앙시대 (상고), 삼국시대 후반기부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는 儒敎시대(古代중기∼中世), 조선시대는 性理學시대(近世), 19세기 초 이후를 多國敎시대(최근세)로 구분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수용은 기존사회의 여러 요소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 때문에 급격한 사회변화를 초래하지 않았으므로 시대구분의 起點으로 잡기는 어렵다고 하며, 9세기 말부터 진행된 佛敎界 내부의 변화는 그 자체 중세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중대한 변화로서 종교사와 일반사의 시대구분이 일치되는 대복이라고 한다. 또한 성리학의 國敎化와 이에 수반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커다란 분기점이었다는 것이다.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이러한 공동체적 사회집단 내지 각종 任意團體(Voluntary Association)의 변천 강화 혹은 축소 이완되는 과정을 밟았으므로, 역사의 전반적인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透視해 보는 데도 유익할 것이다.3. 時代區分의 基準과 槪括的 類型 分析최남선의 『朝鮮歷史』(1931)로부터 이기백의 『朝鮮史新論』(1967)에 이르기까지 발간된 15개의 한국사 개설서에 나타난 시대구분에 대하여는 이미 이기백이 그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한 다음 각각의 문제점에 대하여 상세하게 검토한 바 있다 즉(1)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의 원근에 의한 구분, (2)사회발전의 단계를 기준으로 한 구분, (3)민족의 성장과정을 기준으로 한 구분, (4)주제별에 의한 구분, (5)사회발전과 왕조와의 혼합에 의한. 구분, (6)지배세력의 변화에 의한 구분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위에 나온 시대구분을 간략하게 槪觀,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1)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의 원근에 의한 구분시간의 遠近에 의한 시대구분은 흔히 三分法 내지 四分法 혹은 五分法에 입각해 있는데, 玄목의『東國史略』(1906) 이래 최남선의 『朝鮮歷史』, 李丙燾의 『朝鮮史大觀』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학계에 일관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이 구분법은 고려시대는 중세, 조선시대는 근세라고 하듯 하나의 왕조를 시대구분의 단위로 하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보면 신라가 천년, 고려와 조선이 각각 5백 년 간 지속하는 등 일반적으로 왕조의 존속기간이 길었던 점을 상기할 때 이 같은 시대구분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국사를 통해서 볼 때 왕조 교체의 사례가 매우 드물었던 까닭인지 일단 왕조가 바뀌면 그에 수반하여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舊王朝는 필경 문자 그대로 '앙시앙레짐'으로서 개혁·타파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한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본디 삼분법적 시대구분이 전근대의 왕조중심 구분법에 대한 비판의 뜻을 내포하다.
    인문/어학| 2002.06.18| 8페이지| 1,000원| 조회(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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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한국중세정치조직 평가A좋아요
    중 앙 정 치 조 직- 차 례 -1. 머리말2. 고려의 중앙정치조직(1) 고려의 중앙정치조직 구조(2) 고려의 중앙정치조직 특징(3) 고려후기 중앙정치조직의 변화와 특징3. 조선의 중앙정치조직(1) 조선의 중앙정치조직 구조(2) 조선의 중앙정치조직 특징(3) 朋黨政治기의 중앙정치조직의 변화와 특징(4) 영조의 蕩平策과 중앙정치조직의 변화와 특징(5) 勢道政治기 중앙정치조직의 변화와 특징4. 맺음말1. 머리말흔히들 고려는 귀족사회라 하며, 조선은 양반관료 사회라 한다. 고려를 귀족사회라 부르는 것은, 신라를 골품제 사회, 조선을 양반 사회라고 하는 식의 적절한 표현을 고려 사회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족의 개념 정의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반 인민과 구별되는 신분적, 정치적 특권이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인간' 또는 '신분제 사회에서의 지배 신분층'등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크다. 어찌하였던 귀족은 양민보다 상위의 특권 신분층이라는 것과 이러한 신분은 특권적 가계에서 출생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신분의 인물들이 국가의 요직을 점유하고 귀족제적인 범위 안에서 국가를 운영해 갈 때 그 사회를 귀족 사회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대체로 고려 전기 사회를 기준으로 할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특수 신분층인 소수의 귀족 가문이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국가를 운영해 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고려사회를 문벌 귀족 사회라고 규정짓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조선은 중앙집권적 양반관료 국가였다. 중앙집권이란 지방분권에 대비되는 통치방식으로 모든 정치·군사·사회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통치 형태이다. 이러한 조선의 통치구조는 태종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었고, 성종대에 반포된 《經國大典》에 의해서 일단락되었다. 양반들은 관료기구를 활용하여 정치적인 권력을 확대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인 특권과 함께 문화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였다. 양반관료들은 蔭敍보다는 科擧를 통해서 정계 진출을 꾀하였두 귀족의 대표적인 존재였으므로 서로 상호 견제하는 작용보다는 같은 귀족의 입장에서 협조하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왕권은 오히려 이들에 의해 제약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宰樞는 의정기능뿐 아니라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기구인 상서6부의 判事를 겸직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서6부를 장악한 재추의 권한은 상당한 수준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재추의 권한 강화는 왕권에 대해 제약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 정치체제상의 귀족성 성격이 나타난다.고려시대 권력구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또 하나의 조직으로 대간이 있었다. 대간이란 臺官과 諫官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었다. 대관과 간관은 시정의 논집이나 서경·간쟁·봉박등의 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대·간은 상호 깊은 유대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왕권과, 다른 한편으로는 채추와 일정한 관계 위에서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선 왕권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간은 서경·간쟁·봉박등의 직임을 가지고 왕권을 규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래 대간제도란 왕조측이 자기 보완의 한 방법으로 설치한 것으로 이들의 간쟁으로 국왕은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국왕의 행위나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라는 바의 목적론이요 당위의 이론일 뿐 실제적인 권력관계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시대의 역사적 현실은 국왕이 대간의 간쟁이나 서경문제를 德治的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은 예에 못지 않게 정사에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대간과 서로 날카롭게 대립한 사실이 허다했다. 다음으로 宰樞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양자는 같은 臣僚의 입장에서 왕권에 대하여는 공동운명체적 의식을 가지고 상호 협력 관계에 있었다. 또한 조직적인 면에서도 대·간의 장관을 재추가 겸임한다던가, 또는 간관이 중서문하성의 하급관원으로 존재하고 있는 등 유대의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대간과 재추간 양자 사이에는 규제보다 협력관계가 강하였고, 그에 따라 왕권과의 관계에서는 변혁을 겪었다. 충선왕대의 관제개혁은 元制의 채용에 따른 자주적인 성격이었으며 구세력을 억제하고 혁신세력으로 하여금 '개혁정치'를 추진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충선왕 즉위 직후의 관제개정과 인사발령은 이러한 '개혁정치' 추진의 결과였다. 밀직사의 광정원 승격과 자정원 및 사림원의 신설이 곧 그것이었다. 또한 충선왕 2년(1310)에 종래의 도첨의사사에 대신하여 식목도감이 나라의 중대사를 관장하는 도당으로 바뀐 것도 정치세력의 변화를 기하고자 한 처사였다.이에 대하여 공민왕의 관제개혁은 혁신적인 요인과 반원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李齊賢을 등용하여 개혁정치에 착수하고, 원년에 政房을 혁파하여 文武의 銓注를 典理司·軍簿司에서 관장케 하고 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세가들이 점탈한 토지와 인민을 바로잡게 하였다. 즉 공민왕은 대내적으로 부원세력인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신진세력과 친왕적 중신을 등용하고 정치제도이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공민왕은 원의 압력으로 기형화된 관제를 문종 관제로 복구하여 자주적인 정치체제로 환원하였는데, 이는 그의 일련의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공민왕의 관제개혁은 대내적인 개혁정치와 대외적인 반원정책이 복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셋째 특징은 도당의 대두에 따른 정치조직의 일대 변동이다. 고려의 정치체제는 3성 6부를 기간으로 하였으나 후기에는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도병마사는 兩界兵馬使를 중앙에서 통렬하는 일원적 기구로 출발하여 변경·군사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후기에는 일반 민사문제까지도 관여하는 宰樞會議機關으로 승격하기에 이르렀다. 도병마사는 충렬왕 5년(1279)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개정되어 그 명칭상으로도 실제 최고 정부기관의 기능을 표현하게 되었다. 고려후기의 고평의사사는 70∼80명이나 되는 많은 재추가 국가의 모든 중요사를 회의·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6부가 관장한 행정사무까지 집행하고 특한 제도이다. 의정부는 최고의 의정기관으로 領議政·左議政·右議政등 3정승의 합의제로서 백관과 서무를 총괄하였다. 정승은 예문관·홍문관·승문원·춘추관·관상감 등 중요 관청의 최고 책임을 겸임하고, 국왕을 교육하는 經筵과 세자를 교육하느 書筵의 책임까지 맡아 그 권한이 매구 컸다.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기관은 吏·戶·禮·兵·形·工의 6조로서, 여기에는 장관인 判書(정2품)를 비롯해 참판(종2품), 참의(종3품), 정랑(종5품), 좌랑(종6품)등의 관원이 소속되고, 여러 가지 행정사무를 나누어 처리했다. 그러나 6조의 관원은 행정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중요 정책회의에는 정승과 합석하여 정책을 논의했다. 정책회의는 정기적인 것과 임시적인 것이 있었는데, 정기회의는 매일 의정부, 6조, 三司 등의 고급 관원과 만나는 常參, 매일 5명 이내의 중급관원을 만나는 輪對, 매월 몇 차례씩 고급관원과 전직 대신을 만나는 次對등이 있었다.한편 국왕의 시정을 비판하는 기관으로 司諫院을 독립시켜 젊고 강직한 신하를 임명하여 언론을 전담시켰으며,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관청으로 司憲府, 그리고 왕의 정치 및 학술 고문과 교지작성을 맡은 弘文館이 있었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은 자유스럽게 정사를 비판하는 임무도 함께 맡아 '言論三司'라고도 불렀다. 3사의 관원들은 때로는 합동으로 疏를 올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끝까지 반대하는 기풍이 있었다. 또한 일반 국정은 물론 왕의 사생활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하여 왕비와 종친 및 외척의 생사를 좌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3사는 이른바 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이밖에 주요한 중앙관청으로는 큰 죄인을 다스리는 義禁府, 왕명의 출납하는 비서기관인 承政院, 그리고 군사기밀을 관장하는 중추원 등이 있었다.한편 중종 때 변방지방의 방비를 목적으로 설치한 備邊司가 명종 10년(1555)부터는 상설관아로 발전하였으며, 뒤에는 군정뿐만 아니라 민정·외교·재정 등 전반적인 내용들을 문무고관들이 모여 협의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종래 최고 정무를 원리로 하는 정치운영 형태"하고 정의 할 수 있다.조선 초기에는 붕당을 私黨으로 간주하여, 조정 문란의 요인이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죄악시하였다. 그러나 중종대 趙光祖를 비롯한 사림세력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면서 붕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붕당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선조 5년 붕당의 조짐이 지적되면서, 붕당을 긍정적으로 평가게 되었으며, 선조 8년(1575) 붕당 형성 이후에는 정치 집단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붕당론이 제기되었다. 17세기 인조∼현종 연간의 정치집단은 서인·남인의 붕당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강화하기 위해, 구양수·주자의 붕당론이나 이이의 붕당론을 수용하고 이를 당시의 현실에 맞게 재조정하여, 상대 세력과의 공존 위에서 정국의 안정을 이루려는 논리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숙종 이후 잦은 換局과 노론·소론간의 대립 과정에서는 일당 전제적인 경향을 뒷받침하는 붕당론이 성행하였고, 근본적으로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皇極蕩平論이 제기되어 영·정조대 탕평책의 실시로 이어졌다.붕당정치기의 중앙정치조직의 변화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붕당정치기에는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를 이루었다. 비변사는 대신을 비롯한 문무 고위 관료들이 합좌회의를 통해 정책을 심의하였는데, 대신 중의 선임자가 회의를 주도하였고 유사당상이 실무를 맡았다. 비변사에서 심의된 사항은 「備邊司啓」나 차대 자리에서 왕에게 보고되었고, 왕의 재가를 받으면 이것은 곧 명령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 비변사는 최고 정무기구로 인식되었고, 붕당정치의 운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비변사 구성원의 붕당별 구성을 살펴보면, 현종대까지는 서인이 비변사를 주도하였고, 남인은 소수가 비변사에 참여하다가 숙종 즉위초에 이르러 대거 비변사에 진출하여 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북은 인조대를 지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숙종초 남인이 정국을 주도 있었다.
    인문/어학| 2002.06.18| 11페이지| 1,000원| 조회(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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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이론] 영화로 보는 역사학 평가A좋아요
    영화로 보는 역사학1. 머리말(영상시대에서 역사학의 위기)2. 오늘의 역사학은 영화와 왜 만나야 하는가?3. 한국사 - 영화 을 보고4. 중국사 - 영화 을 보고5. 서양사 - 영화 을 보고6. 맺음말1.머리말영상시대라 일컬어지는 오늘날 역사학은 근본적인 위기에 빠졌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역사학의 위기는 이전 역사학의 위기와는 질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예컨대 정치사 혹은 사건사 중심의 역사학이 산업시대에 나타난 사회변동과 사회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학은 사회과학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새로이 나타난 역사학이 '사회과학적 역사'이다.프랑스의 아날학파를 보면 이러한 역사학의 발전방향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제국주의 방식으로 역사학의 고유영역을 확장시켰고 연구대상을 정치에서 사회로, 사건에서 구조로, 비 일상적인 것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확장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지리학 등 다른 학문이 제창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서 역사학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쇄신하였다.그러나 오늘날 문자가 아닌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역사학은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동영상을 보고 사회를 적응해 나가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문자로 쓰여진 역사는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로 전락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대중을 위한 역사를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동료조차도 별로 읽지 않은 논문을 쓰고 있다. 탈문자를 근간으로 해서 성립하는 역사학의 위기를 피할 길이 없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오늘날의 역사학은 영상시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발전시켜야 하고 그래서 이 같은 맥락에서 역사학의 영화와의 만남은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그래서 여기서는 그 예로 3가지 영화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역사를 집중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3가지 영화를 분석하기 전에 「역사가 영화와 만나기 위한 조건」·「영화와 역사 영화에서 관객은 보이는 영상화면 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의미를 보아야 한다는 켄 로치 감독의 주장을 통해 영화에는 논쟁의 공간이 없고 관객에게 논쟁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다는 두 번째 비판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영화가 사건의 배후를 이루는 구조를 형상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다. 영화는 아날학파가 계량적 방법을 통해 발견한 구조인 인구수와 가격 변동 동향 혹은 지중해와 같은 지리적 환경이 어떻게 장기 지속적인 구조를 형성하는지를 영상화면으로 직접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인 요인들에 대해 간접적인 시사는 할 수 있다.(영화 "제르미날" 통해)영화와 역사의 만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영화가 영상 화면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라는 네 번째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해소 될 수 있다. 첫째 과거인들이 오늘날 역사가들의 역사 이야기와 똑같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요컨에 '일어난 역사'와 '쓰여진 역사'는 불일치하며 그래서 역사는 계속해서 다시 쓰여진다. 둘째 역사가가 하는 이야기도 실제로는 '언어적 허구'를 내포한다. 셋째 역사가는 언어를 매개로 해서 과거를 재현하기 때문에 역사의 이야기 구성에는 화이트가 지적하듯이 언어적 비유 전략이 개입한다. 결국 역사가가 역사서술에 사용하는 문자는 과거에 잇는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것을 굴절시키는 프리즘의 요소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3) 영화와 역사의 만남의 방식과 그 의미영화와 역사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으며 그런 만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예가 (마틴기어의 귀향)이다. 영화 (마틴기어의 귀향)은 1982-3년에 제작되었고 그 영화제작에 자문 역할을 한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 나탈리 데이비스의 역사서술(마틴기어 귀향)도 뒤이어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은 각기 자기영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뒤에 각기 다른 영역으로부터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지은이(데이비스)는 영화를 통해서 새로 아르노와 버트랑의 사고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예외적인 인물이나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일반적으로 규정했던 구조이다. 따라서 문제는 아르노와 버트랑이 얼마나 잘 대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중세 농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그러나 한 시대의 대표성을 통계적인 수치로 환원하는 것은 가능성으로 있었던 세계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미시사가들이 강조하듯이, 낯선 세계의 이상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역사가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유실된 유의미한 세계들을 재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예외적인 것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일반성을 해독해낼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예외적인 특별한 사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례에 내재해 있는 그 시대의 일반성이다.문자를 포함해서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의 반영물이 아니라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의미체계를 구축하여 현실을 선도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처럼, 영화는 현실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때로 영화는 현실을 해체한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문자 역사가 재현한 과거 현실에 대한 반분석을 통해 대한 기억을 발굴함으로써 이른바 '반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영화가 이미지로 구현하는 역사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반역사'이다. 첫째는 지배적인 역사해석을 재생산하는 문자 역사 안에 내재해 잇는 인식 체계를 해체함으로써 대항적 역사를 찾아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영화가 보여주는 역사는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닌 '과실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첫 번째의 '반역사'는 역사학 내에서 이미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하는 신문화사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 보는 역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것은 두 번째 의미의 역사이다.3. 한국사―영화을 보고1)들어가며레닌이 보낸 자객 앞에서 트로츠키는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진정 삶은 아름답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트로츠키는 않는 상처이자 앞으로 짊어지고 나가야할 '죄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공안형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더욱 더 철저한 그리고 악랄한 적들의 편에서 자신의 순수했던 모습들을 고해하고 가해하는 자로써 길을 걷게 된다. 상상컨대 아마도 영호가 공안형사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구제받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할 뿐, 광주사태의 죄인으로 진입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은 넓지 않을 수밖에 없다.이때부터 영호의 타락된 삶은 그 깊이와 정도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뒤늦게 자신을 찾아온 윤순임을 맞이한 영호는 더 이상 첫사랑의 순수했던 시절이 아닌 변화된 자신이 결코 윤순임과 같은 기차를 탈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차에 순임이를 태워보낸다.그리고 이젠 자신의 이상이었던 "삶은 아름답다"라는 글귀를 비웃으며 과거의 자신을 마음껏 그리고 효과적으로 고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영호의 모습은 단지 타인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결코 화해할 수 없게된 현실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호의 행위는 부인의 불륜행각의 처리와 자신의 불륜행각에서 그리고 단란주점에서의 애절한 노래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더 이상 꿈도 이상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누군가에 복수하려고 총을 구입하지만 그 어떤 누구에게 복수의 총구를 겨누지 못하고 만다. 다만 그에게 다가온 것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첫사랑 윤순임의 소식과 눈물나는 재회뿐이다.은 어떤 영화보다 슬픈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슬픔은 억눌려 분출되지 못하고 겹겹이 쌓인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눈물이라도 마음껏 흘릴 여유마저 주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인생이 영호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우의 시기부터 시작하여 대륙의 공산화, 모택동 시절의 일련의 광란의 역사―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그리고 등소평 이후 자본주의 길로 뛰어가는 중국의 모습을 한 특별한 중국인민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원제는 이 아니라 '활착(活着)이다. 뒤에 붙은 '착'은 지속성―계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죽거나 꺾이지 않고 연연히 살아내려가는 민초의 모습을 보고 "삶"이 그렇게도 인류를 속이고, 인민을 농락하고, 역사를 기만했을지라도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을 연결짓는 유일한 메시지 인 듯하다.2) 의 내용지주의 아들 부귀는 도박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 결국 도박으로 집을 잃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내는 집을 떠난다. 집을 잃은 부귀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세상이 외롭고 힘든 곳임을 안다. 그로부터 성실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다시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 돌아온다. 집을 도박으로 빼앗긴 용이에게 돈을 꾸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나 용이는 돈 대신 그림자극 도구를 빌려준다. 부귀는 그림자극 도구를 받아들고 중국을 누비며 그림자 극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국공내란이 일어나 그림자 극을 인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에게 그림자 극을 하게 된다. 내란 도중 공산군의 도움으로 집으로 귀향한 부귀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며 고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대약진 시기에 아들인 '유경'은 친구의 차에 치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 덧 딸인 봉화가 시집을 갈 나이가 되어 공장 기술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하지만 딸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 문화혁명이 일어나 봉화는 아들을 낳고 죽고 만다. 그렇게 아들과 딸을 잃고 시간이 지나 손자가 자라 '유경'과 '봉화'의 묘에 찾아가고 거기서 영화는 끝이 난다.3. 에서 보는 역사장예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두 가지의 주제를 나타내고자 한다. '人間之事 塞翁진다.
    인문/어학| 2002.06.18| 13페이지| 2,000원| 조회(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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