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문화답사기를 읽고...Ⅰ. 들어가기부끄러운 문화답사기 란 책을 읽으면서 맨 처음 느꼈던 점이 나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또한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제치하 50년의 부끄러운 과거는 나에게 좀더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보도되었던 일본문화 4차 완전개방이란 기사가 문득 생각난다.일본은 벌써 오래 전부터 정책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시장의 문을 두드려왔고, 몇 해 전, 점진적인 일본문화 개방 이라는 우리 정부의 결정에 이어, 이번 완전개방까지 일본문화는 우리의 사회에 착실히 그 토양을 다지고 있다.개방 이전부터 일본 만화, 영화의 음성적 유통은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동경 신주쿠의 최신 패션 유행은 일본패션잡지를 통해 며칠 뒤면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가수, 연예인들의 일본풍 노래, 의상, 몸짓 등 역시 알게 모르게 일본 가요의 국내 유입에 일조 하였다.뿐만 아니라, 위성 안테나의 발달로 일본의 텔레비전 채널이 아무런 여과 없이 우리 안방에 스며들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방송사들조차 방송편성, 프로그램 구성·진행방식, 게임내용, 무대 등 방송 프로그램의 전반에 걸쳐 일본 베끼기에 여념이 없다.흔히 우리 민족은 겉으로는 항일을 부르짖으면서도 속으로는 결과적으로 친일을 하고 있다는 어느 일본인 평론가의 비아냥거림이 들어맞는지도 모른다. 실지로 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한 일간지에서 전국의 중·고·대학생 및 20세 미만의 근로청소년 등 1천6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국제화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대다수는 일본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나라(33.8%)로 꼽은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48.9%), 가장 본받아야 할 나라(61.4%)로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일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셈인데, 이는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증오와 동경 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된아니라 신판 일본문화가 이미 상당히 뿌리내리고 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나도 이전까지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의 청산도 중요하지만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많은 부문의 일제치하 50년의 부끄러운 우리나라의 역사의 잔재가 많이 사라졌으리라 생각했었다.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점점 모르는 것에 대해 새로 알게되는 기쁨보다도 아직까지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있는 여러 사실들이 잘못된 지식이며 또한 꼭 고쳐야 할 점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광복 이후 우리의 역사는 기본적인 요소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민특위 와해로 친일파 척결 이라는 해방정국 당시 최대의 민족적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이며, 다음은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제잔재를 온존시켜온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민족은 과거 역사에 대해 지극히 무비판적이었고 동시에 불만 속에서만 살아온 셈이다. 광복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일백 년 전, 즉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과 거의 유사한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Ⅱ. 일제의 풍수 침락아직까지 나에겐 90년대에 일어났던 일제가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본이 박아 넣었던 쇠말뚝 제거 활동이 생각난다.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수가 훌륭해 인걸이 많이 나고, 천하의 명당이 많은 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지 옛 중국의 여러 왕조나 이웃국가 들로부터 질투도 심했고 여러번 풍수훼손도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풍수 침략은 구전으로만 전해질뿐이며,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치욕의 역사인 일제치하 50년 동안 일본이 실제로 우리나라의 진산과 고궁 등에 얼마나 치밀하게 풍수침해를 가했는지 무수한 자료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쇠말뚝이나 창경궁, 종묘 등이 대표적이다.그 중에 쇠말뚝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겐 충격이었다. 현재에는 그런 고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집터나 묘를 고를 때 풍수설을 참고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볼 때 아직까지 맥이 끊기지 안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리의 문화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만해도 우리에겐 신앙 같은 역할을 했었으므로 그리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현재는 많은 노력으로 많은 수의 쇠말뚝이 제거되긴 하였으나 아직까지 모두 제거 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아직도 제거된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쇠말뚝이 남아있고 또한 그것말고도 건축물이나, 맥을 끊은 곳 등 온갖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풍수를 훼손한 수는 엄청나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된 조사나 연구를 통해서 훼손된 풍수는 바로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또한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 일제잔재 청산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거론되었던 주제 중의 하나가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론 이었다.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완전철거 했지만 그 동안 역대정권들은 정권차원에서 임기 내에 이 건물을 헐겠다고 공언해왔었으나 계속 지연되었던 것이었다.철거론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한마디로 일제잔재의 상징적인 이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제통치의 중추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을 헐고 자리를 잡았으니 어떠한 이유에 앞서 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에 철거반대론자들의 의견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이 건물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비록 일제시대에는 그러한 용도로 지어졌고 쓰여졌다 해도,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건축미에 대한 우수성은 차지하더라도 광복 후 우리 정부가 이 건물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했고 또 한때는 이 건물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그리고 정부청사로까지 사용됐다면 이 건물이 갖는 광복이후의 역사 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주장이 옳든 그르든 우린 일제잔재가 당장 눈에 띄는 조선총독부 건물 하나 정도를 상징적으로 헐면 모두 청산된다는 식으로 보아온 감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조선하지만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올바른 교육 또한 철저하게 이루어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우리가 꼭 반성해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때그때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단발적으로 일제잔재 청산을 되뇌고 있을 뿐 독자적인 목소리로 일관되게 이 같은 작업을 해온 집단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결국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 일제잔재 청산의 기본적인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후 우리 사회에는 일제시대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이 절대 부족한 상태로 50년을 넘게 지내온 셈이다.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총독부 건물은 차지하고라도 금융착취의 본산, 황국신민을 만든 건물들이 단지 튼튼하게 지어서 아직은 쓸만하다 는 이유만으로 쉬 헐리지 않고 사용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Ⅲ. 독립문은 결코 자주 독립의 상징이 아니다?독립문의 독립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립은 틀린 것이다. 라는 문제는 지금까지 나로서는 생각도 못한 문제중 하나이다. 독립문의 독립 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에 붙자는 속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알고있던 독립신문도 알고 보면 친일 쪽에 가깝다는 점은 나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고, 또한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될 사실이다. 나라의 임금이 버젓이 있었고, 조선국이라는 국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고,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와 같은 주장이 조선에 대해 침락할 수 있는 명분을 갖기 위한 일본의 주장한 것이라면? 일본은 청으로부터 독립된 조선을 일본과 합병하기 위해 이런 의미를 가진 청과의 조약을 가졌고 또한 독립문에도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나는 참으로 이런 내용에 분노와 부끄러움이 함께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잘못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올바른 교육과 연구로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정부나 국민 또한 부끄러움을 느껴야할 것이다.독립협회는 어떠한가? 독립협회도 우리가 알고있던 독립 있는 독립협회라면 독립문과 그들이 말하는 독립의 주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또 하나는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서재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은 부문에서 다르다고 한다. 1994년 4월 서재필의 유해가 메스컴의 조명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귀환했을 때에도 이런 서재필의 진실에 대해서는 어느 메스컴에서도 다루지 않았다.온통 독립운동과 개화사상의 찬양뿐이었고 서재필이 그를 스스로 필립 제이슨 이라 불렀고, 그렇게 불리기를 바랬던 사실이나 독립신문을 일제에 팔아 넘기려 했다는 사실 또한 다루지 않았다.왜 그랬을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거 지난 사실에 대해 우리나라가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그러나 분명 서재필은 개화사상가이자 민족 신문 창간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모 일간지에 떠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서재필은 분명 재평가되어야 하면 독립문의 의미 또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점이란 것이다.Ⅳ.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지난 문민정부때 임정선열 5위의 유해를 봉환해 온 것으로 민족사 되찾기 사업을 추진했고 총독부 건물 역시 철거 됐으며, 국민학교 라는 용어를 폐지한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일제잔재 청산운동이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에 경남 진주에서는 의기 논개의 영정이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이라며 이 영정의 철거를 위해 문화재관리국에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또 청주에서는 시내 3·1공원에 세워진 충북출신 애국지사 6명의 동상 중 친일행적이 확실히 드러난 정춘수의 동상철거를 위한 범시민운동이 시작돼 결실을 맺고, 지명하나를 바꾸기 위해 지역 내에 단체가 결성된 예도 있었다. 대전에서는 대전 이라는 지명이 일제가 마음대로 바꾼 것이라며, 옛 이름인 태전 을 되찾기 위해 태전지명찾기운동본부 가 92년 말에 결성돼 활동을 했었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상당수의 업소가 상호를 태전○○ 으로냈었다.
{역사란 무엇인가?{3조 발표주제 :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학 번성 명{목 차Ⅰ. 서론----------------P. 1Ⅱ. 본론----------------P.2Ⅱ. 1. 역사의 일반화----------------P.2Ⅱ. 1. 1 역사의 특수성과 과확의 일반성----------------P.2Ⅱ. 1. 2 역사의 교훈성----------------P.3Ⅱ. 1. 2 역사의 예언성----------------P.4Ⅱ. 2. 인식과정----------------P.5Ⅱ. 2. 1. 역사의 주관성----------------P.5Ⅱ. 2. 2. 역사와 종교 및 도덕----------------P.7Ⅲ. 결 론----------------P.9Ⅰ. 서론누구나 어렸을 적에 고래가 겉모습과는 달리 어류가 아님에 놀라워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분류 문제 따위에 별로 자극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경우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그러나 18세기 말 과학이 사회에 관한 인간의 지식까지도 진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계의 연구에 적용되었던 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적용되었다.이 시기 다윈은 역사를 과학 안으로 끌어들였다. 과학은 더 이상 정적이고 초시간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는 것이 되었다. 과학에서의 진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증했고 보완했다. 천문학에서도 우주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다루는 과학이 되었다. 게다가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조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가가 백년 전보다는 오늘날에 과학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우선 법칙의 개념이다. 과학자의 직무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귀납적인 추론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법칙들을 더 많이 발견하고 확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와 사실 사이의, 이론과 실천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을 거쳐 새로운 발견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과정에서 역사가가 이용하는 가설이 지위는 과학자가 이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대단히 유사한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논쟁이 그러하고 역사의 지역별 구분도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다.수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또는 수학과 자연과학 영역 내의 상이한 학문분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그 학문들과 역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그 차이 때문에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논의들을 고찰해보자 그 반론들은 이렇게 요약된다.(1)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5)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이 논점들 각각을 차례로 검토해보도록 하자.Ⅱ. 본론Ⅱ. 1. 역사의 일반화Ⅱ. 1. 1. 역사의 특수성과 과학의 일반성1. 역사는 특수하고 특정한 것을,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다룬다?이 견해는 “시(詩)는 일반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고 역사는 특수한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며 심오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서 콜링우드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역사가들도 과학과 역사를 이와 비슷하게 구분했다.이러한 견해는 오해에 바탕을 두고있는 것이다. 홉스의 명칭을 제외하고는 세계에는 보편적인 것은 없다. 같은 명칭을 가진 사물도 그 하나하나는 개별적이고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란 말은 분명히 자연과학에서는 확실한 진리가 되는 것이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역사적 사실도 있을 수 없다.그리고 역사는 언어의 사용 그 자체에 의해서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일반화와 불가피한 관련을 같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매우 다르고, 기 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의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에 관심을 두어야지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또는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현재, 사회학은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과 지나치게 경험적인 것으로 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데 사회학이 쓸모 있는 연구분야가 되려면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도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다루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사회학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역동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그 밖의 점에는 역사학이 더욱 사회학적이 될수록 사회학이 더욱 역사학적이 될수록, 양쪽 모두에 더 나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의 교류를 위해서 양쪽의 경계를 넓게 펼쳐 놓아야 한다.Ⅱ. 1. 2. 역사의 교훈성일반화의 문제는 역사의 교훈성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일반화를 거부하면서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에만 관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볼 때 대개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그러나 인간이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주장은 관찰 가능한 수많은 사실들로 보더라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경험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성의 예들....1.유럽의 지도를 다시 만들 때 민족자결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교훈이었다.2.비밀문서들을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것은, 그 내용이 틀림없이 누군가 다른 나라 대표단의 첩보원에 의해서 입수될 것이므로, 위험하다는 교훈이었다.->이러한 역사의 교훈들은 금과옥조처럼 믿어졌고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교훈의 영향그리스가 로마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헬라스(고대 그리스인이 그리스를 자칭하는 경우의 이름)역사에서 얻어낸, 또는 얻어냈다고 스스로 생각한고 있다.*콩트가 지적하고 있듯이,'과학에서 예견이 나오고 ; 예견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역사에서의 예언의 문제에 관한 실마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보편적인 것과 유일한 것을 구별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특정한 사건을 예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특정한것은 유일하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취하리라고 예상되는 태도에 대한 판단을 동반할수도 있는데, 그 판단은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혁명과의 비교를 토대로 해서 내려진다.*나는 사회과학자와 역사가의 추론이 정확성에서 자연과학자의 그것에 견줄 만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런면에서 사회과학자나 역사가가 뒤떨어지는 것은 다만 사회과학이 훨씬 더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어디로 보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복잡한 자연의 존재물이다.*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회과학자, 역사가,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일뿐이다.Ⅱ. 2. 인식과정Ⅱ. 2. 1. 역사의 주관성17~19세기를 지배해 온 고전적인 인식론에서는 어느 경우에나 인식의 주관과 인식대상은 명확한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외계로 분리 된다. 인간은 외계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외계를 감당하기 힘든 것, 적이 될지도 모르는 것으로 보고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고전적인 인식론은 이미 요즘의 과학에는 부적합하며, 그중에서도 물리학에는 특히 더 맞지 않는다.역사의 연구와 전통적인 경험론적 인식혼은 조화하기 어련운 것이다.사회학은 이론체계로서 지식사회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만들어 내었지만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는데. 그주된 이유는 전통적인 인식론의 울타리 속에서 빙빙 도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과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정했다는 믿음과는 양립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마음대로 유성의 궤도를 바꾸고, 일식을 연기하고 유주의 경기 규칙을 바꾸는 것이라는 믿음과는 양립될 수 없다.베르범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권위, 품위, 효용의 본질이다.]라고 선언하였다.이견해는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과 우월성에 대한 액튼의 거의 신비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며, 분명히 이것이 역사적 사건에 등장하는 여러 개인에 대해서 일종의 포역사적 힘인 대역사의 이름으로 도덕적 판단을 하는 의무와 권리를 역사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노울즈교수는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다. 더구나 엄격한 재판관은 아니다.]라고 했다.그러나 크로체 역시 이점에 대해서 훌륭한 글을 남겼으므로 다음에 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이러한 비난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우리 법정은 지금 살아 숨쉬는 위험분자들을 위해서 개설된 현대의 법정이고, 피고들은 이미 당시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두번 다시 유죄 또는 무죄의 판결을 받을수 없다.과거속 인물은 역사상의 인물이며, 그들의 사업정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판결 이외에 그 어떤 판결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이야기를 한다는 구실로 재판관처럼 한쪽을 향해서는 죄를 묻고 다른쪽을 향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감각이 없다고 생각된다.우리가 역사가로서 그들에게 접근하기가 곤란하고, 또 그들의 판단에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도 있을 우리의 다른 능력들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오늘날 칼 대제나 나폴레옹을 규탄한다고 해서 이익을 볼 사람이 대체 누구이겠는가? 그러니 역사가를 사형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으로 생각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자.오늘날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개인적 악의에 대한 단죄를 환영하고 있지만, 이것은 히틀러를 낳은 사회에 대한 역사가의 도덕적 판단이 낳은 훌륭한 대용품이 되고있다.막스베버가 [자본주의는 노동자나 패무자를 몰아넣는 주인없는 노예제도]라고 말하고, 역사가는 제도를 만든 개인이 아니라 제도 자체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역사란 하나의 투쟁과정이며, 거기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결것이다.
치즈와 구더기를 읽고....중간 고사의 대체 레포트로 교수님께서 책제목을 말씀하셨을 때 웃음이 났다.「치즈와 구더기」라는 제목은 처음에는 약간의 흥미와 관심을 일으켰고 또한 “역사란 무엇인가”의 강의와 과연 관계가 있는 책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밑에 나와있는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이라고 쓰여져 있는 소제목은 더욱 이 책에 궁금증을 더해갔다.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풀려가기 시작했다.책의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역사가 지나친 한 개인의 삶의 통해 소위 엘리트 문화에 종속된 종속문화로서 민중문화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민중 계급에 의해 축적된 민중문화의 가치를 설명하고자 하였다.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의 저자 진즈부르그는 실마리 찾기 라는 방식으로 메노키오가 그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게 되었던 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찾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치즈와 구더기’를 읽으며 엉뚱하게도 추리소설식 반전의 묘미를 맛보게 만들었으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가 아닌 나로서는 약간 생소한 구성이었던 것은 틀림없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책의 제목만큼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특히 16세기 이탈리아의 사회 상황과 종교 재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여러 역사가들의 역사이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책을 읽을 수 있어 이러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읽으며 받아들인 내용은 이 책의 매우 일부분에 불과하며 또 그 받아들인 내용도 올바르게 받아들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당시로는 드물게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저급한 싸구려 책일지언정 꾸준히 읽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할 정도가 된다. 논쟁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생각을 주절주절 떠들고 다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당시 기독교 윤리관으로는 매우 불경한 것들이었다. 예수의 신성과 마리아의 처녀성, 교황·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더니 심지어는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 신과 인간은 모두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독창적인 우주론마저 피력한다. 결국 그는 밀고되어 투옥과 방면을 되풀이하다 1599년 화형에 처해진다.이 책은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가 이단으로 종교재판을 받고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되는 내용을 중심 축으로 하고 있다. 우선 종교재판을 받았다는 것부터 당시의 민중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또 다른 특별함은 용기였다. 이단 심문관과 대등하게 논쟁을 벌이는 그를 보면서 나는 이 인물에 감탄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이단자가 들끓는 시대였다. 따라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이단에 대한 억압이 심했고, 처형도 가혹했을 것이다. 이것을 메노키오가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종교관은 꽤 흥미로웠고 독특했으며, 이를 이단 심문관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은 참 재미있는 인물이었다.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간혹 의문점이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래서인지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올리 지방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메노키오, 본명 도메니코 스칸델라의 이야기다. 북부 이탈리아의 동쪽 끄트머리에, 즉 크로아티아와 접하고 있는 지역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방앗간 주인으로서 마을의 촌장을 맡기도 하였고,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평범한 농민들과 약간은 달리, 그는 치즈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천사나 신도 우주의 초기 물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며 신이 삼라만상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지 않았다.“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공기,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한 지고지선한 존재는 이들이 하느님과 천사이기를 원하였고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같은 시간대에 그 큰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신도 있었지요. 그는 네 명의 부하, 다시 말해 루시퍼,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과 함께 주 하느님이 되었습니다.”메노키오는 이렇게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펴기도 하였고, 마을 사람들에게 성령이 교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떠들면서 “사제들은 우리들을 자신들의 발 밑에 두려고 하며, 자신들은 즐기면서 우리에게는 침묵을 강요한다”고 비난했다.메노키오는 또한 예수에 대해서도 불경스러운 입을 놀렸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녀들 중 한 명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도 나머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이 그렇듯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더 숭고한 위험을 갖추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는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한 그의 발언은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히 이단이었다. 그런데도 메노키오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권력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제 생각에 라틴어로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소송 때 가난한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몰라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몇 마디라도 하고 싶으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합니다.”메노키오는 종교와 사회계층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토론하기를 즐겼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현란한 수사를 과시하려는 인물이었다.그러던 어느날 1583년 9월 28일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메노키오는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었고, 고발과 투옥, 고문과 방면이 되풀이되다 끝내 1599년 말 화형에 처해졌다.그는 법정에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고, 교회와 사제가 부유한 것을 비판했다. 심지어 그는 세례를 포함한 모든 성사를 사제들이 가난한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규정했다. 결국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고 민중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저는 교회의 율법과 계율이 모두 장사 수단이며, 성직자들은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메노키오는 당시의 시대에서 권력자들과 가난한 민중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회의 계급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메노키오는 방앗간 주인이면서고 그 자신이 땅을 소작하기도 했던 농부였다. 그래서 농촌사회의 민중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또한 권력자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용감하게 표출해 버렸다.자신의 생계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직접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것이다. 게다가 종교재판 중에 이단 심문관은 메노키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메노키오는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것도 아니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단 심문관에게 사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메노케오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들은 메노키오의 생각을 불순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길을 가고 있었지만, 메노키오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굽히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말렸고 그의 주장을 굽히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심문관과 논쟁하는 것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메노키오는 머릿속에 담긴 것들을 줄줄이 끄집어내었다. 그는 그러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몰랐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이미 그에게 경고를 해 주었고, 그의 아들은 재판관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노키오는 이것들을 무시했었다. 그러나 감옥살이가 힘들었는지 메노키오는 감옥에 갇힌 후 재판관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데 이 편지 내용은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용서를 구하는 것 같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요셉에 비유한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신의 사랑을 받았기에 주위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 가지만 결국 그가 꿈에서 예언한 대로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경배를 받게 된다. 그런데 메노키오가 자신을 요셉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메노키오도 요셉처럼 주위의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그는 힘든 상황하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감출지언정 꺾어 버리려 하지 않았다.
Ⅰ. 서론경제발전전략은 경제발전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자원의 배분전략이다. 자원의 배분전략은 그 주체와 대상, 방향성 및 기간에 따라 다음의 네 차원에서 구분이 가능하다.첫째는 주체에 따른 구분으로 정부가 자원배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를 정부주도형이라 하는 반면 정부의 역할이 시장실패의 교정 등 최소한으로 제한된 상태에서 시장이 자원배분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를 시장지향형이라 한다.둘째는 자원배분의 대상에 따른 차원인데 모든 산업을 대상으로 무차별적 자원배분이 이뤄지는 경우를 균형발전전략이라 하고 특정산업을 대상으로 선별적 자원배분이 이뤄지는 경우를 불균형발전전략이라 한다.셋째는 경제발전의 방향성에 관한 것으로 내수시장의 활성화를 통하여 경제발전을 이루려는 대내지향형 발전전략과 국내시장의 한계를 수출로 해결하려는 대외지향형 발전전략으로 구분할 수 있다.넷째는 경제발전에 소요되는 시간에 관한 차원으로, 경제외적 여타 부문의 발전속도와 시간적 궤를 같이 하는 선진국형 점진적 발전방식이 있는 반면 경제부문의 발전속도를 여타 부문의 그것에 비해 차별적으로 가속화하는 압축형 경제발전방식이 있다.한국의 경제발전전략은 정부가 특정산업을 대상으로 자원배분권을 강력하게 행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출부문의 성장과 확대를 통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했다는 점에서 정부주도형·불균형·대외지향형·압축형 경제발전전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이 논문은 한국의 경제발전전략을 개괄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우선 2장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살펴본 후 3장에서는 경제발전전략에 대한 상이한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4장에서는 한국 경제발전전략의 핵심내용을 도출하였으며 5장에서는 한국경제의 성과와 과제에 대하여 논하고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발전 전략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겠다.Ⅱ.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중앙 집권적 관리자본주의의 특성을 지닌 한국자본주의체제는 한국경제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단순한 양적 지표로만 보면 60년의 1 인제민주화에 따른 지속적인 임금상승과 부동산가격의 상승의 결과에 의한 것으로 설명이 되며 이와 같은 형평성의 제고는 우리경제의 고비용현상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일반적인 경제력집중현상은 꾸준히 개선되었으며 종업원수와 생산액면에서 중소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년의 63.5, 44.6%에서 96년에는 69.2, 46.9%로 높아졌다. 그러나 소수 대기업집단(재벌)에 의한 경제력집중현상은 94년까지 더욱 심화되는 추세를 보여 상위 30대기업집단의 출하액 기준 점유율은 91년의 38.8%에서 94년에는 39.6%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점유율증가 추세는 그 후 점차 둔화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중소기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은 높아졌으나 주요경쟁국인 일본, 대만에 비해 아직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5). 평가동기간중의 제도개혁은 중앙집권적 관리경제의 틀을 벗고 시장기능을 활성화(효율성제고)시키는 한편 경제의 형평성제고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개혁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중앙집권적 관리경제의 속성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ex: 금융자율화는 구호로 외쳤으나 운영의 틀은 무변화)또한 세계경제의 환경변화에 부응하여 시행한 세계화정책은 국내경제의 경쟁력을 키우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섣부른 개방화 확대정책(ex: 자본자유화정책)으로 수입증대와 급속한 외채누적이 이뤄졌다.아울러 정책추진주체의 투철한 개혁의식결여와 추진상의 난맥상으로 중앙집권적 관리경제체제의 부작용을 더욱 심화시키기 되었다.Ⅲ. 경제발전전략에 관한 상이한 관점한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해석이 존재한다. 하나는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신고전파적(neo-classical)’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개입론자(interventionist)’ 시각이다.신고전파적 시장론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이고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라고 주장한다.2) 정부는 시장에 비해 오히려 부수적이고도 보완적인 역할를 전후한 대기업집단의 도산은 대마불사 라는 기존의 관념을 타파함으로써 책임경영의식이 확산되고, 기업은 재무구조를 건전화하기 위해 수익성 위주의 내실경영 추구 하고 있으며 정부는 지난 3년간의 위기극복과정에서 위축된 시장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시장에 개입하였으나,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한 제도 도입 및 경제주체들의 책임경영의식 고양으로 시장질서의식이 상당수준 정착되었다..특히, 벤처기업의 육성으로 탄력적이고 투명한 경영이 활성화됨으로써 과거와 같이 경제전체가 소수의 대기업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등 민간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계기 마련하였다.정부는 대통령 취임초기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를 설립하고 대화를 통해 위기극복을 위한 노조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특히 지난 3년간 노사문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발전은, 고비용 저효율 경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데에 있다.5. 사회보장의 확충정부는 생산적 복지의 이념아래 고용보험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사회안전망의 기본틀 마련,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들에 대한 실업급여 지원을 통해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불안정을 완화하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4대 사회보험의 적용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내실화 하였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정책은 복지제도의 확대에 따른 근로의욕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 한국경제의 과제지난 30년간 한국경제는 양질의 노동력과 왕성한 기업가 정신, 대외 지향적 개발전략에 힘입어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1996년 한국의 경제규모와 무역규모는 각각 세계 11위, 12위를 기록했으며 산업구조도 중화학공업, 서비스업 중심으로 탈바꿈되었고 1996년 12월에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도 가입하여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그러나 선진국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 오면서 양적 성장에 걸맞는 질적 충모면에서 4.5배나 증가하였고, 연평균 16.4%의 높은 증가율을 나타냈다. 재고유지관리비도 계속해서 증가추세에 있다. 지난 '84년에 3조2천억원이던 재고유지관리비는 '94년 10조 9천억원으로 증가했다.한국이 이렇게 물류비비중이 높은 이유로, 가장 먼저 국가의 기본적인 사회간접자본의 시설미비와 인프라시설의 부족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 정부의 행정규제와 복잡한 수송절차, 물류관련요금의 과다징수 및 비합리적인 세제가 기업들의 물류비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물류비가 급격한 증가세를 나타내는 반면에, 선진국은 '80년대에 물류비 비중이 평균 10%대이었던 것이 '94년에는 한자리수로 끌어내리거나 그 증가세가 전차 원만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상황은 정반대이다. 우리나라의 물류비의 고비용구조와 그 체계에 대해 그 실태와 문제점을 보다 세부적으로 알아보겠다.(2). 물류의 문제점1). 수송부문현재 우리나라의 수송비의 물류비 비중은 65%라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그 비중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물류비의 절감은 곧 수송비의 절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도로교통을 통한 화물운송위주의 수송방식에 있다. '90년대 이후부터 붐적으로 늘어난 자가용 승용차들의 증가가 도로사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사정의 악화로 인한 도로수송에 문제가 발생 할 경우, 그 모든 물류비용을 기업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도수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고속철도 건설을 서두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은 국내화물 수송현황을 나타낸 것이다.2). 공동 집. 배송 부문공동 집, 배송이란 기업들이 물류관련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설의 효율성을 높이는 물류공동화(物流共同化)방안의 하나로 일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96년 이후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도도모하기 위해서는 ① 임금의 적정수준 유지, ② 생산성의향상, ③ 기술개발의 촉진, ④ 기술도입의 자유화, ⑤ 수출상품품질의 고급화, ⑥ 신제품의개발 등이 필요하다.- 가격 및 품질 경쟁력은 우리나라 수출물품이 해외에서 好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개발 도상국의 부상으로 인하여 가격 경쟁력을 점차 상실하고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 제조기술 수준의 향상, ② 포장기술의 개발 및 수준 향상,③ 브랜드 마케팅 전략, ④ 국제적 인증 획득 및 사후관리 체계의 완성 등이 필요하다.- 통상외교 활동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중진국, 개발도상국, 사회주의 국가별로 특성에 적합한 통상외교활동의 적극적인 추진이 필요하다.선진국에 대해서는 무역의 균형적 증대를 통한 수입규제조치의 완화 및 통상마찰의 완화 등을 도모하고 중진국에 대해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무역확대 등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무역, 자본, 기술 등의 종합적 협력을 통한 보완적 경제협력체제의 구축 등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이상의 보완적 경제협력체제의 구축을 도모해야 할 뿐 아니라 자원협력의 강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나라의 경우라도 ① 통상회담의 개최, ② 시장개척활동의 강화, ③ 해외통상조직망의 강화,④ 세일즈 활동의 강화, ⑤ 무역사절단의 활동 강화, ⑥ 민간경제협력위원회의 활동 강화,⑦ 각종 수출상품 전시회의 개최 등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석유 및 수출용 원자재의 안정적 공급을 도모하기 위하여 ① 석유 및 수출용원자재의 비축, ② 원자재의 원활한 도입을 위한 특별외화대부제 확대, ③ 선물거래제의 활용 촉진,④ 원자재 수입선의 다변화, ⑤ 종합무역상사 원자재 수입기능의 확대, ⑥ 국내 석유화학원자재 생산시설의 규모 국제화, ⑦ 국산원자재의 개발, ⑧ 원자재 개발수입의 추진 등이필요하다.- 수입의 합리적 관리국제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 무역 자유화의 있다
1. 외자의 개념자본은 그 출처를 기준으로 내국에서 형성된 자본을 내자, 그리고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자본을 외자라 한다.1 협의의 외자외국인의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채권과 기술투자만을 의미함. 즉 자본의 출처가 공공자 금이 아닌 민간자금인 것에 공통성을 갖는다.2 광의의 외자공공자금으로부터 나오는 무상원조까지를 포함하는 것. 이는 해외저축이 외국으로 이동하 는 모든 형태를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즉 외자는 외국으로부터 받은 무상원조, 즉 공적 자금과 대외부채를 합한 것이다.2. 차관의 형태1). 차관국제간의 자본이동, 특히 민간장기자본의 이동은 자본수입국의 입장에서 보면 외자도입이 되고, 그 장기 자금의 대차를 보통 차관(loan)이라 한다.국제간의 장기 자본이동 → ㄱ 민간장기자본이동 - 이윤동기에 좌우.ㄴ 원조 - 국제경제협력의 한 형태로 실시되는 공적자본.장기자본이동 = 국제투자 또는 대외투자라 하며, 이는 다시 직접투자, 합작투자 그리고간접투자로 나뉨차관 = 상환기간에 따라 장기차관과 단기차관으로 나눌 수 있고, 또 차관의 대상에 따라현금차관·현물차관 및 기술차관으로 분류.2). 직접투자·합작 및 간접투자직접투자란(direct investment)란 외국자본이 외국의 기업가에 의해 자본수입국에서 직접운영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대체로 기업의 경영권을 획득하기 위해 행해진다. 이에 비해 간접투자는(indirect investment)에서는 기계나 기구 그리고 기술이 도입되지만, 자본 수입국의 기업가의 기득권과 책임 하에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보통 투자의 과실을 취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국기업의 주식이나 외국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매입하게 되므로, 증권투자(portfolio investment)라고도 한다. 직접투자와 간접투자의 중간적 형태로 합작투자(joint venture)가 있는데, 이것은 자본수입국의 기업가와 자본수출국의 기업가가 공동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다.(1) 직접투자※ 직접투자의 경제적 효과▶ 자본 수출국의 기업가 입장1 자(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세계은행)국제부흥개발은행의 약칭으로 세계은행(World Bank)이라고도 한다. 1944년 브레튼우즈협정(Bretton Woods Agreement)에 따라 국제연합의 전문기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전쟁피해 복구와 개발을 위해 1946년에 설립되었다.주요 목적은 1 가맹국의 정부 또는 기업에 융자하여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2 국제무역의 확대와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3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 대하여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금은 가맹국에의 주식할당에 의한 자기자본, 특별준비금, 차입금(세계은행채의 발행으로 조달), 투자이윤 등으로 이루어지며 예금은 없다.주로 개발도상국의 공업화를 위해 융자를 해주고 있는데 5~6%의 이율로 융자조건이 엄격해 융자대상은 선진국과 중진국이 많다. 융자를 받기 위한 조건은 1 차입자가 외화로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2 융자대상이 되는 개발계획이 실행가능해야 하고 3 정부 이외의 차입자에게는 정부보증이 있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라 1946년에 설립되어, 1947년 3월부터 IBRD(세계은행)와 함께 업무를 개시한 국제금융기구다. 이 두 기구를 총칭하여 브레튼우즈 기구라고도 하며, 약칭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이다. 100억 달러로 출발해 여러 차례 증자를 통해 1970년 10월 30일부터 총액 289억 510만 달러가 되었다. 가맹국은 일정한 할당액에 따라 25%를 금으로, 75%를 자국 통화로 출자한다. 할당액은 가맹국의 요청에 따라 조정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각 가맹국이 IMF의 자금을 이용할 때 대출한도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출자금은 SDR(Special Drawing Rights:특별인출권)로 표시한다.▶ 국제금융공사 (IFC: Internati촉진과 고용증대외자도입은 개발초기의 경제에 있어서 외국원조의 감소와 국내저축의 부족을 충당하고 고도성장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역할. 대외적으로는 국가경제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자립경제의 가능성을 확고히 하는 원동력이 됨. 그래서 외자도입의 결과 경제성장을 촉진시켜 늘어나는 고용인력을 흡수하고 국민소득이 상승되어 국민의 복지수준을 향상시켰다. 외자도입은 이와 같은 국내투자재원의 부족분(저축부족)과 외환의 부족분(무역수지적자)을 보충하여 성장제약요인을 해소시켜줌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시킴은 물론 국내의 잉여인력자원을 흡수하여 고용을 촉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2). 소득분배효과외자도입은 고용의 확대 내지는 임금상승의 형태로 노동의 소득 분배를 증대시켜 전체적인 소득분배구조를 개선시키는 효과.3). 기술개발에의 파급도입된 기술은 국내기술면의 애로부문을 타개하고 낮은 수준의 기술을 보완하는 외에 국내기술개발의 기반형성과 일연의 기술진보를 촉발하는 파급효과를 가짐으로써 전반적인 국내기술수준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4). 기업경영의 영향외자도입은 국내기존 기업과 외국기업과의 대내외적인 경쟁을 유발하고 경영합리화를 통한 생산성증대를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을 배양한다.★ 외자도입이 기업경영에 미친 효과1 노동생산성의 향상외자도입기업은 차관선의 경영조직, 회계제도 등을 모방하거나 새로운 관리기법 또는 PR기술 등을 도입하여 비교적 근대적 기업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됨.2 전문경영자를 배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외자도입에 의한 경영규모의 확대와 대내외 경쟁의 격화는 전문경영자를 필요로 하였으 며, 각 기업은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기에 이르렀다.5). 산업구조의 변화자본집약적 공업부문의 확대와 보호·육성정책의 실행 → 공업화실현5. 외자도입의 부정적 효과1). 국내저축의 감소외자도입은 한 국가의 총가용자원을 증대시키고, 소비성향이 일정하다면 총소비는 증가하는데, 이것은 국민소득에 대한 소비의 비용을 높이며 따라서 국내저축율을 감소시16등 정치사회적인 대격동과 미국의 원조규모 축소로 인한 외환사정의 악화를 겪는 등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제1차 경제개발 계획(1962~1966)에 착수하였는데, 이 계획은 산업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업부문에 목표를 둠과 동시에 공업화의 준비단계로서 동력자원의 확보와 기간산업의 확충에 기본목표를 두었다.특히 공업부문에서는 과거와 같이 원조에 의존하던 최종소비재 등 경공업부문의 자력공급능력 확대를 도모함과 동시에 수입대체과정에서 자본재 및 중간원료의 수입증가에 따른 외환부족문제의 극복을 위해 일부 경공업의 수출산업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내 자본축적이 빈약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투자재원의 확충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자도입을 촉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으로 외국인투자를 희망하는 업종을 대외적으로 명시하고 외자도입에 대한 민간의 활동을 강화하도록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외자도입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운용 등 지원체제의 정비 확충에 나섰으며, 그 제반시책을 강구하였는 바, 특히 예산제도의 개혁 및 세제지원제도의 확충과 원활한 외자도입을 위한 외자도입제도의 정비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외자도입에 관한 근거법으로는 이승만정권이 1960년 1월 1일 제정 공포한 외자도입촉진법 이 있었다.1961년 5 16 군사혁명을 계기로 외자도입정책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8월 7일 외자도입촉진법을 개정하여, 이 법률의 적용대상을 한국정부와 외교관계를 갖는 나라의 국민이면 누구나 적용되도록 확대시켰다. 즉, 한국와 우호, 통상과 항해조약을 체결한 국가에서만 외자를 도입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던 구법의 관계조항을 삭제하여 보다 적극적인 외자유치정책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이런 외자도입제도의 정비결과 외자도입실적은 예상밖으로 순조로워져서 1차 계획기간 중 차관 및 외국인 투자 도입실적은 당초 목표인 4.3억 불을 훨씬 초과하는 29.2억불에 이르렀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고도성장에 따른 투자증대에 그총생산의 11%에 해당하는 연평균 20억불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국제환경 속에서도 활발한 중동지역의 건설경기에 힘입어 3차 계획기간중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을 달성 할 수 있었으며, 이기간중 평균투자율은 27%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 높은 해외 저축율 덕분이다.3차 계획중 중화학공업의 기본목표는 원자재 및 시설재의 해외의존도에서 탈피하고 외화가득률을 제고하여 산업구조를 수출주도형 체제로 전환하려는 데 있었다. 1972~1978년 기간중 고도성장을 주도한 제조업 부문은 연평균 19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고, 제조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72년 16,8%에서 1978년 26.6%로 제고되었는데, 이는 철강, 전자, 조선, 석유화학등 중화학공업의 중점적인 건설에 힘입은 바 컸으며, 중화학 공업화율도 1972년 42% 수준에서 1978년 58%에 이르러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크게 촉진하였다.이렇게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비중이 높아지자 막대한 외자도입이 이에 수반되지 않을수 없었다. 즉 1972~1978년 기간 동안 도입된 차관은 100.3억 불이며, 이중 1976~1978년 기간중 도입된 차관은 61.6억불(61.4%)에 이르고 있다. 중화학분야에 대한 투자가 적은 외국인투자는 종전에 비해 큰 변동이 없이 7.6억불에 그치고 있어 차관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이어 1977년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의 기본목표는 투자재원의 자력조달과 국제수지의 균형 및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있었다. 특히 국제수지의 균형을 위해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있었다. 특히 국제수지의 균형을 위해 당초 외자도입은 조건이 유리한 차관과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기로 하고 차관방식은 공급자신용에서 구매자신용으로 전환하고 일괄방식의 설비도입을 지양하기로 하였으나 과다한 투자의욕 및 국내기술수준의 부족으로 이런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원배분상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는데, 특히 물가의 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