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란 무엇인가?환상이란 무엇인가?1. 글을 시작하며..판타지에 관한 글을 쓰기위해 자료를 찾으면서 생각했다. 판타지 소설은 많은데 판타지에 관한 연구나 환상문학을 다룬 자료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물론 강의를 통해서 이미 판타지, 환상문학에 관해서 알게되었지만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판타지라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몇 년전부터일 것이다. PC통신이 발달되고 나아가 인터넷의 대중화와 더불어 인기를 얻게 된 것이 판타지 소설이였다. 인터넷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소재 또한 이전과 다른 현실이 아닌 가상의 소재를 통한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충족시켜주었고 어렵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의 또다른 장점이 되었다. 하지만 판타지의 대중화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판타지, 환상문학에 관해 저급하고 통속적인 소설이라고 여겼다. 밀물처럼 한때 지나가는 유행같이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판타지라는 소설의 열기는 식어가지 않고 있다. 퇴마록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판타지 소설들도 봇물을 이루며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드레곤라자, 묵향 등이 인기를 얻었었다. 또한 해리포터가 인기를 얻으면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반지의 제왕 역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판타지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판타지란 무엇인가? 라는 이 쉬운 물음에 명확히 대답할 수 없음은 무엇일까? 우리는 판타지라는 본질조차 알지 못한 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짧은 글을 통해서 환상문학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 다만 환상문학으로의 접근을 통해 그 본뜻을 알고자 함이다.2. 본 문1) 환상문학이란?우리 말의 "환상"은 일차적으로 '현실이 아닌것'을 뜻한다. 그 의미가 긍정적으로 쓰이든, 부정적으로 쓰이든 '환상'은 현실의 바깥에 있는 -상상력이 구성한- 허구세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이라는 단어가 문학과 연결되어 사용될 때, 우리는 쉽게 현실의 무미건조함을 보완해주는 화려하고 몽환적인 신화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현실에서 충족 삼고 있다. 이 글에서 환상문학에 대한 이론적 토대로 토도로프의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환상문학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토도로프가 시도한 범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환상성은 모방과 더불어 문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본질이라는 점에서 토도로프의 정의는 환상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국소화하여 축소시키고 있다는 캐더린 흄의 비판이 있으나, 흄의 논리를 따를 경우 극소수의 사실주의 계열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환상문학이라는 점으로 인해 문학의 환상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가능하지만 환상문학의 특수성에 대한 범주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두 번째 이유는 토도로프가 정의한 환상성와 인접장르(경이/환상/기괴)간의 구분법은 광의의 환상문학이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양식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도구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요소야말로 현재 환상문학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왔으며, 왜 이 시대에 환상문학이 주목받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본다.토도로프는 환상문학 연구의 출발점으로 환상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당시까지 이루어진 환상문학연구자들의 환상성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고 있는데, 그가 인용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P.G. 카스테는 “환상적이란 것은 실제 생활의 영역 속에 신비함의 급작스러운 침입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루이 바는 “환상소설은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가다가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놓여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을 제시한다”라고, 로제 카유와는 “모든 환상성이란 인지할 수 있는 질서의 단절이며, 대체할 수 없는 일상적 적법성의 영역으로 허용될 수 없는 어떤 것의 강습”이러고 정의하고 있다. 그들의 정의를 더 좇아가 보면, “환상성은 이성에 바탕한 세계에 초자연적인 요소의 침투를 요구한다... 이때 초자연적인 요소가 우리의 안정감을 뒤흔들지 않는다면 환상문학은 설자리가 없어진다(루이하고 있는 존재가 현저히 초자연적인 사건에 직면할 때 경험하게 되는 동요이다.이러한 환상성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환상문학을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환상문학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이행해야 한다. 첫째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세계를 실제 사람들이 살아있는 세계로 간주하도록 해야 하며 -이 조건은 환상문학을 정의하고 있는 토도로프의 입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화에 바탕한 고대의 서사시나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물들의 이야기인 중세기의 로망스, 이 글의 모두에서 얘기했던 기사소설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차원이 다른 세계를 그린 장르가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인물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서 행위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근대의 문학장르인 소설을 겨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인용자주)-, 언급된 사건을 자연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으로 설명할 것인가를 망설이게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망설임은 작중인물에 의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독자가 작중인물을 신뢰하게 함으로써 순진한 독서행위의 경우 망설임이 텍스트 상에서 발생하자마자 독자의 기능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가 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즉 독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시적’해석을 거부해야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동일한 중요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환상문학장르를 구성하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두 번째는 반드시 이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상문학작품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위의 정의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환상문학이 앞서 지적했듯이 텍스트 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것과 설명될 수 없는 사건 사이에서 유발되는 독자, 혹은 작중인물의 심리적인 망설임, 동요를 축으로 삼고 있으며, 결국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관계가 장르 규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발생하는 혼란이다. 작품을 끝까지 읽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하위장르에 속한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 사건의 성격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는가에 따라 하위장르가 결정된다는 점은 독자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장르규정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그의 장르 규정과 관련하여 논쟁이 되는 다른 부분은 그가 환상문학과 알레고리와 시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레고리나 시는 환상성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장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환상성이 세계의 묘사적 재현을 주목적으로 한 소설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면, 세계의 재현 -사물과 관계없이- 과는 관계없이 언어적 결합에 의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비재현적 문학장르라고 보는 시나 이미 독자가 작품의 내용을 표면적으로 읽지 않고 그 배면을 읽도록 훈련된 묵계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알레고리 역시 환상성을 유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시가 재현적 기능을 지니고 있고 알레고리 작품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벗어나 모호성을 유발함으로써 환상성을 불러일으키는, 환상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를 비판하는 비평가들의 주장이다.그러나 토도로프의 환상문학 장르 규정에 있어 가장 반론에 부딪치는 문제는 그가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 18, 19세기에 쓰여진 것들이라는 점이며, 20세기의 대표적인 환상문학 계열의 작품들은 그가 규정한 특질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에서 환상성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가 20세기 환상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카프카의 『변신』은 그레고리오 잠자의 변신이 작품 도입부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작중인물이나 독자 역시 변신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망설임이나 심리적 동요가 현저히 감소되어 있거나 아예 심리적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고 상황을 수용한다. 말하자면 그가 정의하고 있는 환상성이 유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잠자의 갑작스런 변신 앞에서 우리는 왜 잠시의 놀라움은 경험하지만 심리적 망설임을 겪지 않는 것일까?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주요 충동의 모방으로 간주하거나, 환상을 분리할 수 있는 주변적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환상에 관해 배제적 정의를 내리는 견해들에 반박했다. 흄은 ‘환상’을 문학사의 특정 시기에 생성, 확산된 장르로 인식하거나 저급문학, 주변문학이라는 종래의 관념에 저항하여 그 자체를 ‘문학의 충동’으로 간주했다. ‘미메시스’ 충동이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핍진감(逼眞感)과 함께 사건?사람?상황?대상을 모사하려는 욕구인데 반해, ‘환상’ 충동은 권태로부터의 탈출?놀이?환영?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독자의 언어 습관을 깨뜨리는 은유적 심상 등을 통해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구라는 것이다. 환상이란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 즉 등치적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것이다. 흄은 환상의 기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환상은 자동적인 반응을 교묘하게 회피하면서 관습의 껍질을 깨뜨리는 새로움을 제공한다. 또한 새로움을 통해서든 심리적 조종을 통해서이든, 연대성의 강도를 높여 준다. 더욱이 환상은 우리 자신?느낌?정보 등을 연관지을 수 있는 의미 체계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환상은 관계를 내세운다. 환상은 또한 다양한 범주와 방식으로 독자에게 영향을 주는 이미지들의 응축을 촉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물질의 세계에서 초월하는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중략) 환상의 사용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흄은 기존의 문학 연구자들과는 달리 환상을 문학적 본질의 하나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작가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리얼리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실물 같은’ 무언가를 표면상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의 모방이라는 관념은 언제나 그들의 비평적 가설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러한 재현의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흄은 환상을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
‘문명은 디자인이다’를 읽고머리가 한가득 꽉 무언가가 들어찬 느낌이다. 처음 문명의 디자인이라는 책을 들었을 땐, 여러 가지 문명을 한가득 늘어놓고서, 조금은 지루하게 쓰여진 단순한 기행문이나 답사책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 그러한 편견으로 시작된 나의 책읽기였는데 이상하게도 책장은 너무 쉽게 넘어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좁은 생각을 꾸짖기라도 하듯이 친절히도 사진이 나와 설명을 더했고, 세계의 여러 곳으로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쉽고 재밌게 읽은 책이였건만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너무 많은 내용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사실, 이 책의 저자인 권삼윤씨는 세계 60개국을 20년간 고대문명 발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박물관·미술관 등을 두루 답사하고서 이 책을 만든 것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의 작가가 느끼고 얻은 것들을 며칠에 얻은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쉽게 읽혀지면서도 그 속에 깊이가 있는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단순한 풍물여행기가 아닌, 문화를 보고 문명을 말할 줄 아는 ‘이것은 이런 것이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지, 그러한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말해주는 듯싶다.인류는 긴 시간을 살아왔다. 처음 태어났던 것은 같았을지 모르나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을 하고 살아왔다. 그 삶 속에서 문명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책 속에선 그런 말이 나온다. 문명은 인간이 창조한 ‘디자인’이다. 문명의 문(文)은 원래 ‘무늬’란 뜻이니 바로 디자인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삶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이나 다른 인간 집단과의 관계 설정이라는 아주 거창한 것까지 아우른다. 문명의 디자인은 동과 서, 남과 북, 메마른 땅과 습한 땅, 고지와 저지, 고대와 중세 근세 등 공간이 바뀌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그러한 다름을 추구하는 디자인과 문명의 세계를존재한다.지난 왕족의 권위를 상징하듯 밑변 230.7m, 높이만도 146.7m, 그것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 역시 사람 키를 훨씬 넘는 거석. 겉으로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 뒤에는 놀랄 정도의 정밀함이 감추어져 있다. 밑변의 각 변은 동서남북 네 방위를 정확히 가리키며, 밑변들간 길이의 오차는 0.1% 미만이다. 돌과 돌 사이에는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다. 현대인들도 쉽게 이루지 못한 것을 고대이집트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피라미드 건축에 동원된 고도의 천문학적, 지리적, 수학적 지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밑변 한 변의 길이에 480을 곱하면 이 지역의 지리상의 위도 1도 길이인 11만800m이 되고, 한변의 길이를 당시의 길이단위인 피라미드 인치로 환산하면 365.242가 되어 1년의 날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피라미드의 높이를 10억 배 연장하면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인 1억4694만4000km가 되고, 밑변 둘레를 높이의 2배로 나누면 3.14, 즉 π(원주율)의 값이 된다. 의도된 건축이였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말 돌을 쌓으면서 영원에 이르는 무언가의 주문을 걸었던 것일까? 단순하게 이집트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 속의 많은 의미들이 나를 자극시켰다.또한 피라미드 내부에서 죽은 시체들은 부패하지 않도록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풀기 힘든 과제로 남아있다. 산자가 아닌 죽은 자를 위한.. 어쩌면 고대이집트 인들이 꿈꾸어왔던 영생으로의 한걸음 이였는지도 모르겠다.진나라의 황제 진시황이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아다니고 현대인들 또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 또한 시간의 탑을 조금씩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라쉬 - 로마제국은 길의 네트워크였다길은 주어진 것과 원하는 것 사이를 메워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우선 서아시아 유목민들은 척박한 생활터전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일정한 곳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구하기위해선 움직여야 했고, 외부자연의 이치, 즉 도를 깨닫고자 하였다.참 상반된 이치였다. 떠나야만 구할 수 있는 자와 떠나지 않아야 구할 수 있는 자. 작가의 그러한 재밌는 구분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레 나누어진 것이었다.‘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라는 것을 바탕으로 유목문화권 민족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길을 건설하였고 바다와 땅의 길, 하늘의 길, 그리고 사이버 속의 길은 그렇게 태어나게 되었다라고 한다.그리스와 로마의 경우도 그러한데 로마는 그리스로부터 배운 건축에 토목을 더해 시간과 거리를 단축하였고 개방과 세계성을 통해 더 넓은 도시, 더 넓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그 길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를 전달하였고 문명이 발달하였다. 유럽이 다른 아시아권의 나라보다 먼저 발전하게 된 것은 길의 발달도 한 몫을 했던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 컴퓨터, 사이버 길을 개척하고 있다.◎ 폼페이 - 빵문화권에서 권력자는 제분기를, 밥문화권에선 물을 지배했다손으로 직접 생산하고 만들었던 빵을 제분기를 통해 대량으로 만들면서 로마는 산업화, 기계화의 시작과 에너지 혁명의 구실을 하면서 산업화의 계기가 되었다. 빵은 자급자족적인 밥과는 다리 완성품으로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제분기를 지배함으로 권력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끼니때마다 빵을 만들어도 되지 않게 된 여자들은 여유시간동안 외모와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됨으로서 밥문화의 여성들보다 일찍 사회에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무언가를 발명한다는 것은 참 많은 것들을 초래하게 되는 것 같다. 일차적인 빵의 손쉬운 생산뿐만 제분기라는 발명으로 인해 권력과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것이 따라왔던 것이다. 자동차, 배와 같은 이동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빠르게 편리하게 이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인간의 디자인, 새로운 문명이 아닐까? 우리는 날마다 문명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만리장성 - 돼지고기의 북방한계선이자 유따라서 양과 같은 고원에서 크기 쉬운 동물을 택하였고 유제품이 발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거리가 부족한 북방민족은 자연히 남쪽을 침략하게 되었고 한족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으로 보호했다는 것이다.선택적이 아닌 자연에 주어진 것을 바탕으로 이뤄진 구분인 것인데, 나는 그 구분보다도 그러한 발견을 한 작가의 견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리장성은 일차적인 자기보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문화, 정체성인 것이다. 생명과 재산이라는 유형의 것도 문화라는 무형의 가치의 뒷받침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는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마지막에 책에선 21세기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문화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문화를 잃어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리고 나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과 악이 아닌 필요에 의해 전쟁이 정당화 되고 우리는 그것을 반대할 힘도 없이 그저 방관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내면의 정체성이 필요한 것 같다.◎ 이스파한 - 코발트 블루는 고귀함과 고상함의 표상이다시원한 바다색의 코발트 블루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색이였다. 고려청자, 청화백자에 쓰였던 코발트 블루라는 색은 아라비아 지금의 이란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우리 전통의 색은 아니였지만 밝고 영롱한 색감을 자아내 바탕색인 백자의 투명함을 더욱 은은하게 만들어 백자를 더욱 멋스럽고 고귀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뜨겁고 메마른 땅에 차갑고 시원한 오아시스역할을 했던 ‘코발트 블루’로 외벽을 장식해 놓은 거대한 ‘이맘 모스크’의 사진을 보면서 직접 내 눈으로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이때 더욱 생각나는 색이 아닌가 싶다.◎ 피사의 사탑 - 서양 종은 안을 쳐서 밖으로 알리고, 동양 종은 밖을 쳐서 안을 울린다종? 한번도 우리와 서양의 종의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양의 종은 작으면서 명쾌한 소리를 냈고, 우리의 종은 크고 긴 여운을 내는 것으로 은은하고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의 종은 알림보다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종인 것이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보신각의 종소리를 들으며 한해를 정리하기도 새해를 맞이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베르사유 궁전 - "나는 자연의 질서도 바꿀 수 있어."베르사유 궁은 그 규모와 장식만으로도 우리의 창덕궁과는 판이하게 다른 궁이였다. 루이 14세에 의해 건축되었고 궁의 건축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물을 흐름도 바꿀 만큼의 왕에 대한 권의를 위한 건축일 만큼 크고 웅장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의 창덕궁은 자연의 지세에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고 대문을 내고 또 그에 어울리게 기능에 맞는 건물들을 적절한 장소에 배치했기에 인공이 아닌 자연, 기계적인 삭막함이 아닌 어머니의 손길 같은 따뜻함과 섬세함이 알게 모르게 묻어난다. 우리 선조들이 갈고 닦은 일탈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알람브라 궁전 분수 - 솟구치는 분수는 불모성에 대한 무언의 항거다현대의 분수의 쓰임은 시원함과 장식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 기원은 생존과 관련된 것이라니 조금 놀라웠다. 페르시아의 마른 사막의 자연환경에서는 물과 나무를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닌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공적으로 물을 가지고 온 것이 분수인데 생존을 위한 예술적 극복이 아닌가 한다. 반면 물이 풍부한 동아시아에선 굳이 물을 끌어올 필요도 없었고, 자연의 순리를 중시했던 터라 현실 부정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그것이 현실 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라고 하는 말을 했던 작가의 말에 때론 지금의 우리도 자신에 관해 현실에 관해 이해와 순응이 필요하지만, 다른 세계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도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르니카 - 수소는 잔인함과 암흑의 상징이다게르니카는 히틀러를 돕기 위해 스페인 총통이 파시스트 정권을 위해 무차별 폭격을 하여 하루아침에 비극의 상징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을 기리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인간의 내면세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