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누구인가? (Who are we?)우리 민족은 농경 문화에 바탕을 둔 고유의 민족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오는 한편, 주변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새로운 문화 요소를 받아들여 우리의 환경과 조건에 맞도록 변화시켜 왔다.부족 국가 시대에는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하여 살아오면서 우리 민족은 하늘과 자연물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졌다. 삼국이 정립된 후에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토속 신앙과 풍습에 융합시켜 독특한 민족 문화를 성장시켰다. 예를 들면 신라의 화랑도는 가정과 나라를 위하고, 벗과 더불어 자연에서 심신을 단련하는 고유의 사상과 불교 사상을 융합시킨 것이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에 따라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통일된 민족으로서 찬란한 불교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시의 불교 문화는 사찰의 건축과 불상의 조각, 그 밖의 예술 분야에 크게 반영되었다. 처음에는 당의 영향을 받아 웅대한 것이 특징이었으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 우리 민족 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를 보였다.불교 문화는 고려에 그대로 이어져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의 침입에 대한 호국 불교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어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불교와 풍수 지리설은 천신을 비롯하여 산천과 조상에 제사하는 고유의 신앙 등과 함께 일반 민중의 생활 원리로서 기능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생활 원리들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융합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많은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등에서 불교와 고유 신앙이 융합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유교를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아서 상류 계층에서는 유교의 예의 범절을 행동 규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유교의 생활 원리뿐만 아니라 불교와 무속도 여전히 성행하였다.우리의 민족 정신과 사상은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오랜 문화 전통이 반영되어 형성된 것이다. 우리의 자연 환경과 생업, 사회 생활의 윤리와 규범, 정서와 예술, 정치 체계, 종교적 신앙과 세계관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요 등 현실적인 복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교는 정치적 지도 이념인 동시에 인간 생활의 행동 윤리를 규정하는 규범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었다.2.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How did we get here?)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이러한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그대로 지닌 농촌 중심의 매우 가난한 사회였다. 1960년에는 72%의 인구가 농촌에 살았으며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61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83달러에 불과하였다.그러나 1962년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실시와 함께 공업화와 경제 개발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로 대규모 이농 현상이 나타났다. 또, 그 동안 지속적인 사망률의 저하와 높은 출생률 때문에 매우 높던 인구 증가율도 출생률이 감소하면서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한편, 우리나라의 도시 인구 비율은 1985년에 65%에 달했으며, 도시화는 계속되어 1995년에는 약 85.5%로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서울과 같은 인구 1,000만이 넘는 초거대 도시가 생겼고,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 도시들도 계속 늘어가고 되었다.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동안, 국민 총생산에서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1/4로 줄었으며, 광공업의 비율은 약 2배로 늘었다. 그리고 1인당 국민 총 생산(GNP)은 1985년에 2,000달러를 넘어서 우리나라는 이른바 신흥 공업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고, 1995년에는 10,000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우리 사회는 이와 같이 짧은 기간에 전통적인 사회에서 공업화, 경제 성장, 도시화 및 인구 변천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적인 사회로 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 발전의 잠재력을 나타내는 교육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다. 1970년에 66.1%와 70.1%에 불과하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진학률이 1996년에는 99.9%와 98.9%로 올라갔다.건강 수준도 향상되어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크주도되었다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하여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룬 계획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생적인 발전은 사회의 여러 부문 사이의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계획에 의한 발전은 경제 발전과 공업화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 사회의 발전도 이러한 과정을 밟아 왔다. 그 결과, 성장과 분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경제·문화·교육 등이 발전의 정도에 있어 지역적으로 심한 불균형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분배의 불평등 문제로 계층 간의 위화감이 심화된 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이 성장 우선의 정책을 통해 급속히 이루어진 데 기인한다.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Where are we going?)한국사회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광범하고도 급속한 사회 변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변동을 조명하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변동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의 그 동안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배경요인들로서 도시화 및 산업화과정 그리고 경제성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후진국에서의 도시화 과정은 산업화 과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발생하면서 사회변화를 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의 초기 도시화도 마찬가지로 산업화와 관련 없이 해방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나 1960년대 이후의 도시성장은 경제성장 및 산업화와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져 왔다. 우리나라 도시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도시 내 지역 간의 분화, 도시문화의 형성, 인구구조의 이질화, 분업의 발달 등 여러 가지 도시적인 특질을 구조적으로 생성하였다. 이러한 도시화는 고용기회, 교육기회, 오락시설, 의료시설 등 사회경제적 지표들에서 농촌보다 유리한 측면을 가져왔지만, 반면에 인구과밀화, 주택문제, 공해문제, 도시빈민문제, 청소년 및 노인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제기할 만큼 부정적 결과도 초래한 것이다.다른 한편 이러한 지만 공업과 농업, 공업내 각 부문,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등 각 부문간의 불균형도 노출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공업화 및 도시화에 대한 정부의 편중적 지원 때문에 과도한 도시화 현상을 초래하여 농촌의 유휴 노동력 및 노동인구의 일부가 공업으로 충분히 흡수되지 못하고 도시 비공식 부문을 형성하는 경과도 초래하였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3차 산업은 취업구조비중에 있어서 이상 비대화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상 비대한 도시의 서비스 부문에서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새로운 Petty Bourgeoisie를 형성함과 동시에 거대한 비공식부문이 번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1960년대 이후부터 대기업중심의 수출 주도적 중화학 공업정책을 선택한 정치적 결정의 결과로 볼 수 있다.4.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Where should we go?)현대적 사고의 특성 중 하나가 시간개념일 것이다. 전통적 사고에서의 시간이란 순환적인 것이었다. 해가 지면 다시 뜨고, 달이 기울었다가는 다시 차고, 사계절이 갔다가는 다시 오고, 삶과 죽음조차도 윤회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현대적인 것과는 판이했다. 이에 반해서 시간에 대한 현대적 사고는 시간의 흐름을 원적인 순환논리가 아닌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직선논리로 보기 시작하는 데 있다.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것, 한번 흘러가 버리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며 역사적 사건 또한 일회적인 것이고 낡은 것과 새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삶은 과거와 현재가 밀착된 삶이었다면, 현대적 삶은 현재가 미래지향적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전통과 현대라는 양분법도 현대적 사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미래지향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발전논리다. 현재는 과거보다 발전된 상태이고 또 현재는 보다 발전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발전논리가 곧 근대화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란 근대화 모든 것을 물화시키며 인격까지도 물화시킨다. 현대사회에서는 아카데미즘까지도 이러한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도덕적 사고는 보다 큰 것, 보다 많은 것, 보다 좋은 것을 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추구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발붙일 여지가 없다.막스 베버는 일찍이 수단합리성이 지배하는 발전의 결과가 인간을 철창 속에 가두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한 일이 있거니와 우리 인류는 이제 이러한 발전지향적 사고가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회갈등은 더 치열해지고 있고 핵무기는 계속 개발되고 있으며 환경오염은 점점 더 심각해져서 이 모든 것이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발전이 맹목적으로 양적 차원에서만 추구되는 대신, 발전 방향이 비판적으로 모색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접어들었다.온고지신(溫故知新, 탁고개제(託古改制),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말해 온 동양에서의 전통은 결코 현대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서의 전통은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적 identity로서 그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관류하는 현재적인 것이다. 전통은 베버가 말한 것처럼 합리적인 것과 대립되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이 시간의 시험에서도 살아남은 합리성이다. 즉, 과거에서부터 합리적인 것으로 존중되어 온 것이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적 합리성은 물론 탈시간적인 과학적 합리성과는 다른 것이다. 과학적 합리성은 관찰과 실험으로 그 타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라면, 전통적 합리성은 오랜 시간적 체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타당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성은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인 데 비해서, 전통적 합리성은 지혜와 슬기의 보고라 할 수 있다.과학적 합리성은 수단적이고 전문적인 것인 데 비해서, 전통적 합리성은 삶의 목적까지도 아우르는 총체적이며 일상적인 합리성이라 할 수 있다. 과학적 합리성은 부단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낡은 것은 버리지만, 전통적 합리성은 새로운 다.
1. 현재의 나의 위치나름대로 '사랑' 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백마디, 천마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양분하자면 사랑의 아픔이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사람을 꾸준하게 사랑을 해 본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나는 후자에 속한다. 현재의 여자친구를 1학년(97년) 때 만나서 현재까지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 속에서 즐거움과 위기를 많이 겪어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름대로 나는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있고 나의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면 졸업을 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결혼을 약속한(양가 합의까지 완료) 사이이기에 이 과목이 본인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수강을 하게 되었고 이에 부합하여 이러한 과제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되어 만족감을 얻고 있다.2. 영화 '봄날은 간다'를 통해 본 사랑마음같아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소설로 쓰고 싶지만 영화라는 제한이 있기에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통해 영화 속의 사랑의 유형과 본인이 생각하는 사랑을 표현해보고자 한다.'봄날은 간다'는 대표적인 두 가지의 사랑유형을 표현하고 있다. 바로 주인공 남자의 '소유적인 사랑'과 여자의 '유희적 사랑'이 그것이다.상우(유지태)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의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 한 번의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상우는, 때문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여자 은수를 통해서 자신의 이상적인 애정관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은수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직장에 거짓말까지 하고, 늦은 새벽에 은수가 보고 싶어서 택시기사인 친구를 동원해 서울에서 강릉까지 은수를 보러 가는 모습들만 보더라도 상우의 애정관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상우처럼 단 한 번의 완벽한 사랑을 염원하는 여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상우 역시 은수가 자신의 사랑임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고 몇 번의 짧은 만남 후에 은수에게 조심스레 결혼을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결혼을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서부터 상우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다른 남자까지 만나게 된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던 상우,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은수의 배반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그는 은수를 통해 완벽하길 기대했던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상우에게는 처음 사랑을 느낀 여자인 은수였지만 은수를 통해 이루고자했던 자기 사랑의 양태를 은수에게까지 적용시키려 했다. 물론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진다 함은 서로 간에 동등한 시각과 입장의 감정들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상우는 은수에게서 그런 것들을 확인해야하는 절차를 무시했다. 자신만의 사랑을 확신해버린 곳에서부터 상우의 사랑은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철저히 믿었던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배반당한 상우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고통은 단순히 한 차례의 열정을 수습하는 차원을 넘어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념 자체의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큰 상처였을 것이다.은수는 한차례 결혼 생활을 경험해 본 여자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꽤나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개인적인 생활 자체도 그렇거니와 이성과의 관계 역시 그렇다. 현실성이란 것은 또한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솔직함의 다른 표현이다. 처음 은수가 상우에게 접근했던 방법도 그랬거니와 상우와 멀어지게 되면서 결국 이별까지 치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그녀의 솔직함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상우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그 순간부터 은수의 마음은 상우에게서 멀어져간다. 아마 누구나 그렇게 짐작했을테지만 결혼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껏 자기 사랑을 깊이 심어준 남자에게 그토록 넌더리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만일 사랑의 마지막이 결혼이 아닌 다른 부분일지라도 말 한마디 꺼낸 것 만으로 그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상우의 사랑을 조금씩 부숴나가는 은수의 행동은 방송국에서 만난 남자와 만나는 것으로 결정타를 날린다. 현실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여유나 기다림은 없다. 처음 상우를 만날 때 그렇게 쉬웠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났고, 앞으로도 또 다른 사람을 만날 터였다. 상우의 마음에서 그녀가 떠나가듯, 그녀의 마음에서도 점점 상우는 아련한 기억 저편의 짧았던 추억으로 사라져간다.
「백범일지」와 「아리랑」은 일제시대 항일 독립 투쟁가였던 김구와 김산의 서로 상반되었던 독립운동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책이다. 한 명은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 다른 한 명은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김산이라는 인물이 김구라는 인물에 비해서 평가절하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해왔던 남한에서는 김산이라는 인물이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두 인물의 사상적(이념적) 차이와 민족 해방운동의 공통점을 토대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나의 느낌을 서술하도록 하겠다.김구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과 이념적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겠다.첫째는 '완전 독립 사상'이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둘째는 '자유 민주 사상'이다. 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셋째는 '아름다운 문화국가 건설 사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의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넷째는 '통일조국 건설 사상'이다. 백범은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이와는 반대로 김산은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을 주장했다. 김산은 그가 가진 여러 가지 가명 중에 하나로 이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님 웨일즈라는 미국인 여성을 만날 때조차 가명을 써야 했던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 알 수가 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이다. 이것이 밝혀진 것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란 책에서이다.장지락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달리 증명하지 않아도 아리랑 책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민족주의자 다음에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막시스트로 변해왔던 최종귀착점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과격한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폭력이나 테러를 적극적으로 용인하지는 않았으며, 톨스토이나 그리스도가 쓸데없는 인류애에 집착한다고 비현실적이라 매도하면서도 군데군데 박애정신이 충만한 모습이 드러난다. 중국에 있으면서 「톨스토이에서 마르크스」라는 책의 한 대목에서도 말하듯이 그의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고조되던 막시즘에 대한 관심은 결국 그가 중국의 광동코뮌에 참가하게 하였으며 그 후 많은 그의 활동에 철학이 된다.그는 과격한 폭력이나 테러를 통한 혁명에는 적극 동조하지 않았다. 물론 3·1운동이 실패하고 관동대지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폭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최후의 수단이 되기를 바랬으며, 언제나 혁명의 이상에 충만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핍박받는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그것이 님 웨일즈가 보기엔 종교적 믿음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장지락의 이러한 사상은 시대적 요구였다. 당시의 조선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소작농은 해를 거듭할수록 수가 늘어나고 노동자 역시 싼 임금 아래 18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하루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며 무장투쟁을 한 사람의 대부분은 이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고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동조하게 된 것이다. 재산이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생산하고 동등하게 분배되는 세상이야말로 가난뱅이도 부자도 없는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조선의 특이한 사회적 상황 역시 장지락의 행로에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해 역사상 유래 없는 잔인한 일제의 통치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통한 국권회복이라는 말은 너무나 소원하게 들렸고,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놓지 못했다. 장지락의 경우만 해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마치 짐승 잡히듯이 죽어 가는 모습을 동경에서 목격하였으며, 자유시 참변 등의 많은 학살과 3·1운동의 비폭력적 수단에 의한 독립의 쟁취라는 빛 바랜 구호 뒤에 따른 많은 인명들의 희생을 목격하였고, 어쩔 수 없이 폭력투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공산주의 중에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면서 3·1운동의 실패를 지적하고 나아가 지금은 국권회복이 불가능하니 더욱 실력을 쌓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내야 한다라는 우파의 소극적 운동에서, 의열단 활동과 같은 일본의 고위관들을 암살하고 주요건물을 폭파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 운동까지 하나같이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면서 행동한 운동들이다. 문제는 장지락은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였고 미국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유학은 모두 자비를 부담하여야만 했고, 그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발생하는 계급간의 갈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장지락은 살아가면서 보아온 환경들에 자신의 행로를 결정지은 것이다.김구와 김산. 이 둘은 조선의 해방을 외친 민족의 열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김산은 김구와는 달리 너무 역사 속에 묻혀 있다.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국 유학, 혁명, 결혼, 그 다음으로 또 다른 혁명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조국에 대해서는 부끄럼 없이 살았다.
1. 서 론 - 건축의 필요사회 집단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건축이다. 건축물이라 함은 주거의 목적인 필연적인 용도도 있겠지만, 그밖에 종교적, 예술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부터 나타나고 있는 건축의 의미인 것이다. 지금이야 건축재료, 기술 등의 혁혁한 발전으로 인하여 어느 장소에나 필요성에 맞는 건축물을 지을 수 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러한 사실은 무색해진다. 다시 말해 옛 시대에는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역사적, 예술적 상황 등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고려되어져야만 그 시대에 맞는 건축물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서양 건축의 시발점인 이집트(Egypt), 크레타(Crete), 미케네(Mycenae), 그리스(Greece) 시대를 주거환경, 주택문화, 건축물 등을 통해서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2. 본 론 - 각 문명별 설명(1) 이집트(Egypt) 문명이집트 건축의 주된 배경은 지리와 종교이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나일강의 범람에 의한 비옥한 토양과 사막과 산맥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형, 종교적으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것으로부터 영원불변의 질서와 절대 기하학의 법칙이 숨쉬는 건축을 탄생시켰다.이집트 역사는 편의상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눈다. 고왕국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펼치면서 통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왕(파라오;Pharaoh)을 초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절대자로 만들었다. 그 권력의 상징물이 바로 절대 불멸의 뜻을 담은 건축물 마스터바(Mastaba), 피라미드(Pyramid), 스핑크스(Sphinx)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권력의 규모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될 만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외에 건축물로는 조세르(Zoser)왕의 계단 피라미드, 기제의 피라미드, 스네프루(Snefru)왕의 굽침 피라미드 등이 있다. 그러나 중왕국 시대로 넘어오면서 가뭄과 추위가 잇달아 통치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정치 혼란이 거듭되었고, 중왕국은 쓰러지는 왕권을 수습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수도를 테베(Thebes)로 옮겼지만 불안한 시대 상황과 불리한 지형 조건으로 곧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말기에는 동방의 힉소스(Hyksos)족의 침입으로 약 100년간 지배를 받는 굴욕의 시대를 맞이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무덤 건축은 왕권의 약화와 지형상의 특성으로 인해 바윗굴 무덤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형태가 베니-핫산(Beni-Hasan)의 바윗굴 무덤이다.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집트는 힉소스를 물리치고 왕권을 회복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왕의 신성은 지난날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은 태양신과 결합한 새로운 모습의 파라오를 다시 창조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고, 이러한 노력들은 신전 건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신전이 늘어나면서 이를 지키는 신관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기원전 10세기부터는 마침내 신관이 나라를 통치하는 시대로 바뀐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멘투헤텝(Mentuhetep)왕과 핫셉수트(Hatshepsut)여왕의 장례신전, 카르낙(Karnak)의 암몬(Ammon) 대신전, 카르낙의 콘수(Khonsu) 신전, 오벨리스크(Obelisk) 등이 있다.전체적인 이집트 건축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이 주로 사용되었고, 목재는 부족하여 고급 건축에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회 체제가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체제였으므로 대규모 건축물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건축적 구성의 목적은 이러한 왕의 권력을 표상하기 위해 왕이 지닌 힘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또한 이 때문에 내부공간보다는 건물과 외부공간의 관계가 건축 구성상 중요시되었다. 피라미드와 같은 단순하고 정교한 조형은 수학의 발전과 추상화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고, 장식에 대한 관심도 상당부분 표출되었으며 건축물을 보다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조형적인 연구('refinement'라 불리우는 시각 교정법)나 의도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건축적 구성은 축선이 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조각적인 공간구성이 특징이다. 주거건축에서는 이집트인의 종교관에 따라 주거는 일시적 거처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다른 건축분야에 비해 발달이 부진하였다.(2) 크레타(Crete) 문명크레타 섬은 동 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오리엔트 세계, 특히 이집트와의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또한 다른 섬들보다 면적이 넓고 평야가 많아 조직적인 문명 성립에 유리하였고, 해상이라는 천연의 방어막까지 갖추고 있어 개방적인 건축 형태를 보인다. 처음에는 동부와 중부에 각각 독립적인 세력이 분립되어 있었는데, BC 2000년경에 크놋소스(Knossos)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미노스(Minos) 왕이 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이때부터 정치·군사·예술 등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또한 동부 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주신은 모계신이고 다산의 상징인 여성이었고, 굴이나 낮은 산지처럼 중심적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크레타 건축은 지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집트 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미로형 평면이 두드러지지만, 무역으로 현실감각이 발달해 이집트와는 달리 신전건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크레타의 멸망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화산폭발로 인한 자연재해나 미케네인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크레타 문명은 나중에 미케네 문명을 거쳐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주게 되며, 또한 이집트 문명과 그리스 문명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도 한다. 대표적 건축물로는 미노타우루스(Mynotaurus)의 미로로 유명한 크놋소스 궁전이 있다.(3) 미케네(Mycenae) 문명미케네 문명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서 융성했으며 BC 1400년경에는 크레타섬을 제압하고 BC 1100년경까지 번영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미케네와 티린스(Tiryns)이다. 트로이 전쟁을 주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케네는 크레타가 사라진 뒤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북쪽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도리아(Doria)인과의 전쟁으로 쇠약해져 결국 멸망했다.이들 도시는 궁전을 중심으로 한 크레타 문명의 도시와 성격이 유사하지만, 개방형을 띄는 크놋소스 궁전과는 달리 거석을 이용한 견고한 성벽의 요새와 가깝다. 더욱이 궁전은 메가론(Megaron;흔히 2개의 기둥이 있는 문간과 방으로 짜여진 집으로 방의 지붕은 4개의 기둥으로 받쳐지며, 그 한가운데에 둥근 화로가 있다)으로 불리는 대규모의 주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메가론 평면형식은 후에 그리스 신전 평면의 기초가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에 지대적인 영향을 끼친 문명으로 평가된다. 주요 건축물로는 티린스 궁전, 미케네의 사자문, 아트레우스(Atreus)의 보물창고 등이 있다.(4) 그리스(Greece) 문명그리스 문명은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 도리아인과 이들에 의해 에게 해의 여러 섬과 소아시아 기슭으로 옮겨 자리잡은 이오니아(Ionia)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지리적으로 산과 섬이 많아 이들은 독립된 도시국가인 폴리스(Polis)를 형성하였고,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대부분의 생활이 밖에서 이루어져 공공시설 건축이 발달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대표적인 폴리스인 아테네(Athens)에서 최초의 민주주의가 이룩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했지만 그 신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약점을 가진, 다시 말해 신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이집트와 사뭇 다르다. 이러한 인문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 건축은 이집트, 크레타, 미케네 건축에 모두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달리 그것만의 독자적인 건축 형태를 띄게 되었다.그리스 문명은 편의상 아르카익(Archaic), 헬레닉(Hellenic), 헬레니스틱(Hellenistic) 시대로 구분한다. 아르카익 시대는 미케네 문명이 해체된 후 그리스 문명이 꽃피우기 전까지인 BC 11∼5세기를 말하며 암흑시대로 불리지만, 이 시대에 메가론에서 출발한 평면형식이 신전건축 양식인 도리아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에서 꽃피운다. 주요 건축물로는 올림피아(Olympia)의 헤라(Hera) 신전(도리아 양식)이 있다. 헬레닉 시대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아테네가 그리스 동맹의 주체가 되면서 그리스 문명의 절정기를 맞는 시대로 대략 BC 5∼4세기를 지칭한다. 이 시대에 대부분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하고, 도시계획이 단행되고 공공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주요 건축물로는 파에스툼(Paestum) 신전, 아크로폴리스(Acropolis), 파르테논(Parthenon) 신전(도리아 양식), 니케(Nike) 신전(이오니아 양식), 에렉테이온(Erechtheion) 신전(이오니아 양식) 등이 있으며, 또 다른 신전건축 양식인 코린트(Corinth) 양식이 탄생하게 된다. 마지막 시대인 헬레니스틱 시대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페르시아(Persia) 원정을 시작한 때부터 그리스가 로마(Rome)에 의해 멸망한 시기까지를 칭한다. 이 시대에는 전쟁에 대한 위험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아고라(Agora)로 옮겨지며 극장(Theatre), 경기장(Stadia), 민의회장(Ekklesiasterion), 체육장(Gymnasia), 경마장(Hippodrome) 등 공공시설 건축이 꽃을 피운다. 에피다우루스(Epidaurus) 극장이 그 예이다. 개인주택은 그리스인들이 옥외 야외생활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다른 건축분야에 비해 건축수준이 낮았고, BC 6세기경부터 중정식 평면의 단층 주택이 지배적인 유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구조와 변동 "최종보고서"주제 : 포스트모던 신학의 사회학적 합의공 과 대 학지구환경건설공학부1997001605김 원 배자연과학대학수 학 과1999022565한 형 민자연과학대학물 리 학 과2000023120신 동 철목 차Ⅰ. 문제제기Ⅱ. 현대신학의 유형과 최근 동향1. 현대신학의 난해성2. 현대신학의 범위와 학맥3. 현대신학의 최근 동향Ⅲ. 포스트모던 신학1. 현대의 종말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출현2.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과 특징3. 포스트모던 신학의 기원4. 포스트모던 신학의 태동5. 포스트모던 신학의 조류6. Mark C. Taylor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던 신학 (해체주의 신학)Ⅳ. 결 론Ⅴ. 참고문헌Ⅰ. 문제제기현대 기독교 신학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신에 대한 이해를 바꿔 보려는 도전이 계속 되고 있다. 니체의 '초인(超人)사상'과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 비판' 이후, 토머스 올타이저(Thomas Altiser)의 '신의 죽음의 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서남동을 위시한 한국 신학자들의 '민중신학',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마크 테일러(Mark C. Taylor)의 '해체 혹은 포스트모던 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도들은 신학의 출발점을 교리나 성서의 원전이 아닌 현대인들의 변화된 삶의 존재양식에 대한 자각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들이 해체하려는 대상은 신인가? 아니면 신학인가? 이들은 무신론자들인가? 이들의 신학방법론은 무엇인가? 이들은 현대인의 삶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다고 인식하고 있는가? 신에 대한 인류의 이해 방식은 변화해 왔는가? 변화해 왔다면, 무슨 이유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 현대신학의 흐름을 살펴보고 포스트모던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을 토대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특징을 서술한 후, 이러한 조류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의 순서로 서술하도록 하겠다.Ⅱ. 현대신학의 유형과 최근 동향1. 현대신학의 난해성현대신학을 연구하는 학자 중 많은 사람들이 현대신학이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가지면서 탈신화라는 방법을 통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인 형식을 벗겨내고 성서 본래의 사신인 케리그마를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발견의 준거로 보았다. 성서의 케리그마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언어와 세계관으로 번역되거나 재해석될 수 있다고 불트만은 믿었다.⑥ 세속신학과 해방신학20세기에 들어와 가속화된 산업화와 개발 경쟁에 힘입어 세속적인 가치관이 확산되고, 경제적인 수준의 간격이 나라에 따라 계층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급진적인 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세속신학'과 '해방신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세속신학은 성과 속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서 종교인으로서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본훼퍼(D. Bonhoeffer)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성과 경건성을 핑계삼아 이 세상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 우리를 부르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치 않고 있다고 본훼퍼는 말한다.본훼퍼의 종교성 없는 기독교 또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표어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본훼퍼가 종교성 또는 하나님이라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정한 부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다면, 반 뷰렌(P. M. van Buren) 등 신 죽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믿고 있는 현대인들의 세속성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초월적인 절대자로서 하나님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기독교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해방신학은 남미의 가난한 민중들의 억압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가톨릭 교회의 목회적 관심으로부터 태동했다.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G. Gutierrez)는 정치적, 역사적, 영적인 삼중 해방을 강조한다. 정치적 해방이란 부유한 국가들과 억압하는 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압박민 사회집단의 갈망과 노력을 의미한다. 역사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의 과제인 새로운 인간과 전적으 우주 안에 있는 사물들과 질서를 기술하는 목적론적 언어, 전통을 지식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인식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 등이다. 한마디로 전근대는 신적 계시가 진리의 최종 척도인 반면, 이성은 계시를 통해 주어진 진리를 이해하는 시대였다.근대는 르네상스에서 준비되고 계몽시대에서 시작되었다. 계몽시대는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평가를 향상시켰다. 인간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의 길을 열었다.계몽사상의 특징, 곧 현대성의 기본 이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첫째,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다. 현대는 이성의 시대며 현대성의 이념적 핵은 이성 중심주의, 즉 합리주의다. 현대를 지배하는 이성적 사고는 전근대적 환상, 선입견을 거부하고 합리적 비판을 통해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 그 상징적 인물이 현대 서양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Rene Descartes) 였다. 그는 이성을 '잘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간할 줄 아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절대적 신뢰를 두었다. 모든 사람이 이성을 고루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진리 탐구의 제일 원리로 삼았다.둘째, 기계적,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근대는 17세기 과학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케플러(Kepler, 1571∼1630), 갈릴레오(Galileo, 1564∼1642), 뉴턴(Newton, 1643-1727) 등이 이룩해 낸 과학적 발견들은 전통적 우주관은 물론, 사유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가정한 중세의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그리고 자연을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는 중세의 자연관은 뉴턴의 기계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었다. 현대인은 자연을 물체들의 단순한 운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리고 질서 있는 기계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데카르트는 우주를 물질과 정신의 영역으로, 그리고 칸트는 현상과 실재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이런 이원론이 이원론적이다. 인간은 물질적 또는 객관적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이 분리한 것을 재결합하며, 인식하는 인간 주체와 인식되는 객관적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재확인한다. 포스트모던 의식의 중심 요소는 전체에 대한 관심, 인격적이며 우주적 통합에 대한 관심이다.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염세주의와 상대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율성, 과학의 능력,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 현대의 낙관주의를 염세주의로 대체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인간은 세계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사고를 신뢰하지 않는 반면,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 지식이 객관적이라는 계몽주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상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절대적 진리, 영원 불변적 실재, 모든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초월적 관점이나 원리, 보편적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담론은 개별적이며 제한되고 편협하다. 리요타르드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은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이다.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성의 상실, 표준의 해체다. 포스트모던 문화적 표현의 중심은 다원주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의 유일성이나 전체성을 철거하거나 교정하는 반면, 다원성을 강조한다.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그 자체 내에 많은 의미와 흐름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를 대별하면, 해체주의와 건설주의로 요약된다.포스트모더니즘은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긍정적 방향보다는 현대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해체주의는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인 실재론에 대한 공격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우리의 진리 체계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에 선행하여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언어와 사유를 통해 적절히 파악한다. 해체주의는 언어와 개념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실재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관의 필수 요소인 하나님, 자아, 목적, 의미의라는 점이다. 즉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기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그러한 인식이다.포이에르바흐는 인간성을 볼 때 개별 인간의 인간성이 아닌 전체 인류의 본질로서의 인간성만을 보았다. 인간과 그의 본질을 규정하는 이성, 의지, 사랑 또는 마음은 실재적 무한이라고 주장된 것은 입증되지 않는 가설로서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보편적 인간본질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포이에르바흐는 그의 무신론을 무엇보다 심리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신의 개념은 인간의 심리학적 산물이다. 즉 종교는 아직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했거나 자기 자신을 이미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의식이요, 자기감정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세계경험을 심리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지만, 이로써 나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어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신의 경험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이로써 나와는 독립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될 수는 없다. 이로써 포이에르바흐의 심리학적 시각은 입증될 수 없는 단순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4. 포스트모던 신학의 태동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는 최근 신학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전환되고 있다는 평가와 의식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형성과정에 있는 신학이기 때문이다.현대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의 구별 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동일한 신학자가 포스트모던으로 분류되기도, 되지 않기도 한다.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콕스(Harvey Cox), 테일러(Mark C. Taylar), 스미스(Huston Smith), 그리핀(David Griffin)의 포스트모던 신학 방법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