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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식의 역사관
    朴殷植의 歷史觀-목차-?머리말?본문1. 박은식의 생애2. 박은식의 역사인식3.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⑴한국통사⑵한국독립운동의 혈사4. 사학사적 의??맺음말1. 머리말민족주의 사학은 일제시대에 우리민족에게 정신적으로 큰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사학의 출현으로 일제 당국에서도 이에 맞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본격적인 식민사학을 시작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은식은 정인보?신채호와 함께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면에서 박은식의 역사관을 알아보는 것은 민족주의사학의 한 부분을 공부하기에 좋은 방법일 것이다.이 보고서에서는 박은식의 생애와 그의 혼백사상, 국혼의식, 그의 저서인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의혈사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역사관을 살펴보고, 그의 역사관이 갖는 사학사적 의의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2. 박은식의 생애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자는 聖七호는 謙谷?白巖이며, 1911년 이후에는 無恥生?太白狂奴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0세 이후 부친으로부터 시와 문장을 배웠고, 17세부터 관서지방을 여행하면서 학자와 지사를 만나 배움의 길로 나섰다. 20대에는 다산학파의 학자 신기영과 정관섭을 방문하는 등 조선후기 실학에 접했다. 1884년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며 관서지방의 대표적 주자학자였던 雲菴 朴文一, 誠菴 朴文五 형제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하여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숭인전 참봉, 동명왕릉 참봉의 벼슬을 지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시 원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상경했다. 상경 직후 장지연?유근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주필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그후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면서 틈틈이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學規新論』을 간행했다.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화하자 『대한매일신보』주필로서 격렬한 논조로 이를 비판했다. 곧이어 복간된 『황성신문그리고 1909년에는 「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유교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장지연?조완구 등과 함께 大同敎를 창건하고, 종교부장으로 활동했다. 1910년에는 양명학의 보급을 위해「王陽明實記」를 간행하는 한편, 한문교재로서 「고등한문독본」을 편집했으며, 최남선이 주관하는 光文會에 참여하여 이듬해인 1911년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직후 尹世復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종교도인 윤세복이 경영하는 東昌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때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여 「東明聖王實記」「明臨答夫傳」「渤海太祖建國誌」「夢拜金太祖」「泉蓋蘇文傳」「大東古代史論」등을 저술했다. 1912년 신규식?홍명희 등과 함께 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해에 博達학원을 세워 교포 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에는 홍콩의 한인교포 잡지 「香江」의 편집을 잠시 맡았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와 康有爲의 추천으로 「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다. 이 해에 「安重根傳」과 「韓國痛史」를 저술했는데, 「한국통사」는 1915년에 중국의 대동편역국에서 간행되었다. 1915년 상해에서 이상설?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이 단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했으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다.19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韓族公報」발행에 관여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맞이하였다. 3?1운동직후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민국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작성했다. 이후 상해로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정의 기관지 「독립신문」사장이 되었으며, 대한교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 간행했다.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정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할 때 개조론의 입장을 취했다. 1924년에는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가 되었고, 1925년에는 임정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재직시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책임제박은식은 정통주자학자로서 한국을 유교적 禮敎국가로 파악하는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자강론을 제시하면서 애국심 함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민족자주의식을 강조했다. 특히 국사교육을 애국심 함양의 최선책으로 중시하였다. 그는 종래 유학자들의 중화주의적 역사학을 노예학문이라고 비판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민족사적 영웅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자국사에 대한 강조로부터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905년에서 1910년까지는 한국사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고, 과거인물들의 전기를 단편적으로 소개하거나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1911년 중국망명 직후 만주지역의 고적 답사와 대종교 입교를 계기로 고대사 연구에 진력했다. 그의 고대사 인식은 전통적 유교사학의 틀을 벗어나 조선후기 이래의 반중화주의적 역사인식을 수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 만주지역에 거주했던 여진족 등 여러 북방민족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보고 북방민족의 역사를 민족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는 1911년 「동명성왕실기」「명립답부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천개소문전」등 많은 고대사 연구 성과물들을 쏟아냈다. 위인전기나 역사소설의 형식을 취한 이 저서들에서는, 이민족과의 대외경쟁에서 자주독립정신을 구현한 인물들이 숭해해야 할 민족사적 영웅으로 묘사되었다.박은식사학의 정신사관적 성격은 국혼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1915년에 간행된 「한국통사」에서 국혼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魂魄論을 원용하여 국가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國魂과 물질적인 國魄으로 구분하여 파악했다. 여기에서 국혼은 국백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종교?언어?문학?역사?풍속 등을 포함하는 민족문화의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국혼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념으로서 오늘날 민족정신의 개념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혼의 여러 요소 중에서 역사를 국혼의 소재처로 가장 중시했으며, 역사를 국혼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하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망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서술체제는 동양의 전통적 역사서술체제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근대적 역사서술체제를 원용하여 사건 중심으로 장을 나눈 것이었다 그는 각 사건들의 내용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까지도 서술, 논평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서술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7부분에 대해서는 사론을 부기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원용하여 ‘按’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한국통사」는 근대적 방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한국근대사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투철하고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실천적 지향성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구가 되었다. 「통사」는 내용상으로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고 그 부당성과 횡포함을 폭로하는 한편, 이에 대응한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민족이 국권을 상실해가는 통한의 근대사를 자기반성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뼈아픈 고통의 역사를 통해 知恥心과 知痛心을 유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을 제공코자 하였던 것이다.박은식이 한국근대사를 평가하는 관점은 그의 안설과 논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는 대원군의 외척 및 문벌 견제, 군포제 개혁, 서원철폐, 풍속교정 등 내정개혁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으나, 화폐정책과 전제적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대원군은 대혁신이 가능한 내외적 조건의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배외주의적 폐쇄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증흥의 시기를 놓쳤다고 보고, 이를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통사」는 대원군 집정기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자수자강의 실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한 민비정권의 개항정책도 비판하였다. 특히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은 예리했다.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여건미숙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이를 통해 일본을 이용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는 ‘선의의 친일파’에 대해,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큰 착오로서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멸망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한국통사」는 중국, 러시아, 미주 교포들에게 널리 읽히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유포됨으로서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과 함께 고통과 희망을 나누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역사서가 되었다.(2) 한국독립운동의 혈사「한국통사」의 저술 후 박은식은 동지들로부터 ‘광복사’ 저술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광복사’대신에 「한국독립운동의 혈사」(약칭「혈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1919년 임정 산하 임시사료편찬회에서 편찬한 「한일관계사료집」4책을 토대로 「혈사」를 저술했다. 「혈사」는 1920년 중국 상해의 한국인 경영 출판사 維新社에서 순한문으로 간행되었는데, 이는 「통사」의 속편으로서 제목 그대로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였다. 3?1운동을 중심으로 근대 항일독립투쟁의 전개과정을 서술한 「혈사」는 「통사」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역사서술체제에 따라 3편으로 구성되었다. 상편에서는 개항 이후 국망까지의 시기를 다루었고, 하편에서는 국망 이후 당시대의 독립운동을 다루었으며, 부편에서는 3?1운동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수록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혈사」에서도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계속되고 있으며, 더욱 심화된 측면이 있다. 그는 독립운동을 민족정신의 전개과정으로 보면서, 한민족은 국혼이 강고한 민족임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그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일본족을 경멸했고, 일본족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으며, 일본족을 불신하였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양민족의 국민성이 氷炭과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혈사」는 한민족이 일본에 동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는 확신에 토대를 두고 저술되었다.「혈사」상편은 「한국통사」의 서술대상 시다.
    인문/어학| 2004.10.17| 7페이지| 1,000원| 조회(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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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물사관에대하여
    유물사관에 대하여.....1. 들어가며유물사관 혹은 사적유물론은 현대의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끼치었다. 계급의 대립이 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이루는 유물사관은, 현실적인 사회변혁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그만큼 학문적으로도 많은 매력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일찍이 손진태가 신민족주의사학을 제창하면서, 유물사관의 선두주자였던 백남운을 귀족적?지배계급적 역사학의 옛 껍질을 깨뜨린 선구자로 지목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사회적 모순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유물사관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유물사관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하는 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유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의 이해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실정이다.2. 유물사관의 수용1920년대 초에는 이미 유물사관이 우리나라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백남운도 그가 유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의 서술에 착수한 것이 1922년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물사관에 입각한 최초의 저술인 백남운의 『朝鮮社會經濟史』가 1933년에 간행되었으므로, 학문적인 연구성과가 나타나기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그 뒤 역시 백남운의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이 1937년에 간행되었고, 이청원의 『朝鮮史會史讀本』이 1936년에 간행 되었으며, 김광진의 「고구려사회의 생산양식」이 1937년에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는 유물사관에 입각한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하겠다.백남운은 그 스스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게 된 동기로서 다음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첫째, 조선사는 계급투쟁사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사의 일환으로서의 조선역사는 반드시 계급투쟁사라는 점을 구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둘째, 조선역사의 기점을 설정하는 문제를 해명하려 하였다. 즉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조선역사는 반드시 원시씨족공동체로부터 기점을 설정하여야 할 것이었다. (중략) 단군은 조선역사의 기점은 아니었다.셋째, 당시 일제의이라고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 그는『조선사회경제사』결론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오히려 그 서론에서는 일본관변의 '조선특수사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 그의 진정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조선특수사정' 못지 않게 신채호, 최남선의 '문화사관'을 또한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한국사의 기원이 단군에 있지 않다고 한 데에도 나타나 있다.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은 이청원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문학사를 전공한 김태준에 이르면 더욱 심해져서 정인보의 「5천년간 조선의 얼」에 언급하여 "역사 그 자체를 위하여 또는 독자들을 위하여 한없는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리고 백남운은 심지어 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양자를 닮은 꼴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을 특수사관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같이 식민주의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을 배격한 백남운은 새로운 역사학으로서 계급투쟁사를 구상한 것이다.현재 한국사학계의 일각에서는 민족주의사학과 유물사관이 원래부터 친근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백남운이 같은 연희전문의 동료교수인 정인보로부터 문헌의 수집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 것과,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고유적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異族통치의, 사회적 불평균의, 노예적 문화 사상의 현상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데서 말미암는 것 같다. 그러나 백남운은 같은 서문에서 일본학자 四方博, 秋葉隆에게도 감사의 뜻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남운은 그들과도 학문적, 사상적인 친근관계에 있었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렇게는 생각되지가 않는다. 또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뒤의 일이므로, 이를 민족주의사관의 산물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신채호가 공산주의 아닌 무정부주의에 빠진 이유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아마 짐작컨데 그가 순수한 이상주의적 형태의 인간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그의「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고유적 조선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그에게서 민족주의사관과 유물사관의 조화돤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밖에 없다. 신채호의 애국심이 너무나 강하고, 또 그가 근대사학사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무조건 합리화하고 미화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또 신채호의 권위를 빌어서 현재의 자기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사관과 유물사관의 친근성을 찾아보려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백남운이 그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비판한 사실을 모를 까닭이 없는데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학자적 양심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그러면 이렇게 식민주의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을 닮은 꼴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 배격한 유물사관은 어떠한 한국사를 구상하였는가. 그것은 백남운이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한 첫째 동기로 거론한 바와 같이 계급투쟁사였다. 계급투쟁은 민족의 대외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 내부의 문제였다. 민족을 단일한 개인과 같이 생각하고, 그 대외관계사에 주력하다시피한 민족주의사학과는 전혀 다른 부면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즉 민족 내부의 모순, 갈등을 역사 서술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의 제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계급사관을 도입한 것은 한국사의 이해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것이라고 하겠다. 유물사관을 수용한 사학사적 의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3. 이론과 실제유물사관은 한국사를 한국민족 내부의 갈등과 모순, 특히 계급대립 혹은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 경우에 한국사의 구체적서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곧 마르크스가 말한 소위 유물사관의 공식에 따르는 시대구분으로 나타났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경제적 사회구성이 진보하여 가는 단계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학자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공식에 따라서 한국사의 발전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고대 노예제사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를 '아시아적 봉건적 단계'라고도 하여 봉건사회의 아시아적 성격의 뜻으로 이해하였다. 이 점은 이 시대를 봉건사회 속에 포함시키면서도 '고대 아시아적 국가'로 표현한 것 등에도 나타나있다. 한국의 소위 중세가 서양에서와 같은 지방분권적인 봉건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집권적 봉건국가로 흔히 표현해 왔지만, 스탈린에 의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아시아의 특수한 노예사회, 특수한 봉건사회로 규정된 이후에 이를 따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의 공식에는 그것이 시대구분의 한 시기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백남운의 해방후의 논문에는 이를 노예사회 이전의 한 단계로 이해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마 마르크스는 원시 공동체 사회를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옳게 생각되지만, 어떻든 아시아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견해는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말할 때에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특수한 것인 이상 그것은 변형적인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석담, 김광진이 한국에는 노예제 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그런데 한국에 노예제 사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또한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가령 백남운은 "경작노동과 토목공사는 귀족群의 사유노예, 관유노예 및 빈농민들의 부담이었는데, 특히 주요한 수공업의 대부분은 모두 노예群의 소산이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예를 든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예시한 것으로는 황룡사종을 주조한 장인인 里上宅下典과 분황사약사동상을 만든 本彼部 强古乃未가 있다. 이를 예시한 뒤에 그는 "이같이 명확한 증거품을 제시하는데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의식적인 色盲이거나 저능아일 것이다."라고 극언하였다. 그러나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强古乃未는 신라 17관등 중 11등급인 乃未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적어도 5두품에 소속된 하급귀족이다. 그리고 下典이라는 것도 노예이기보다는 하급을 발굴한 결과 위의 기록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순장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같은 근거에서 노예제사회의 존재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백남운이 거듭해서 노예순장제도가 노예제도의 미발달한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며, 노예제도가 발달한 후에는 순장제도가 폐지되고 노예를 경제적인 노동도구로 이용하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이 같은 과거의 주장에 만족할 수 없는 입장에서 새로운 의견을 낸 것이 국가에서 인두세를 받느냐 토지세를 받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전자를 농예제 사회, 후자를 봉건제사회로 보는 견해이다. 이 새로운 견해는 인두세에서 토지세로 전환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견해의 차이에 따라서, 혹은 고려말까지를 노예제사회로 보기도 하고, 혹은 삼국시대 말까지를 노예제사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인두를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고 해서, 인두세를 내는 평민을 노예라고는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볼 밖에 없다.다음으로 봉건사회의 문제도 그렇다. 한국에서 영주를 봉건한 일이 없다. 봉건이 없는데도 봉건사회는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너무도 심하다. 그런데도 이를 봉건사회라고 하는 이유는 농노의 존재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농노사회, 혹은 농노제사회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봉건사회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가 말한 유물사관의 공식에 '봉건사회'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중세를 농노제사회라고 하였다. 서유럽과 같은 봉건영주가 없는 러시아의 입장을 살린 것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런운 발상이다. 그리고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경우에라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환영해야 할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제껏 봉건이 없는 한국에 봉건사회가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물사관의 공식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하기를 힘들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구체적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 한 유물사관 공한다.
    인문/어학| 2004.10.16| 7페이지| 1,0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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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조선후기 공론정치 평가A좋아요
    朝鮮後期 公論政治에 대해서...目次Ⅰ. 머리말Ⅱ. 본 문①公論政治의 형성②公論政治의 확대③公論政治의 활성화Ⅲ. 맺음말Ⅰ.머리말우리는 조선후기시대를 사림정치의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사림정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조선후기의 공론정치이다. 공론정치는 조선후기 사림정치의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조선후기 공론정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문①공론정치의 형성조선후기 권력구조가 바뀌고 정치 충원 방식이 바뀌면서 정치 참여층이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 참여층의 확대는 정치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단적인 것이 바로 공론정치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림이 재야에 있으면서도 공론을 통해서 정치에 영향을 비칠 수 있는 압력 집단이 되는 현상이었다. 공론정치의 형성은 공론 수용기구와 형성층의 양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이었다.당시의 관념에서 공론은 一國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으로 人心이 결집되고 天心이 반영된 것이었다. 따라서 공론은 國是였고 공론에 의해서 정치가 되어질 대에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공론은 인심이 결집된 것이므로 국가의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는 기반을 가져야 할 것으로 이해되었으므로 '一鄕之人宣有公論'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고, 국가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鄕士와 庶民에게 의논한다"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이들의 공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고, 일반 민들에게도 上言의 길이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上言의 길은 현실적으로 제한되었고, 이들이 공론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이념에 불과하였다.현실에서는 공론은 왕, 재상, 언관에 있었다. 代天理物하는 자로 인식되는 왕은 천심에 따라서 통치해야 하였고, 천심과 인심은 공론으로 반영된다고 인식되어, 왕은 공론을 수용하고 공론에 따라 일을 결정하는 공론의 주인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공론의 수용 여부는 왕이 하늘을 대신한다는 명분이었으므로 통치의 정들은 국사를 왕과 논의한다는 입장에서 공론을 유지하는 명분을 가졌고, 공의를 왕에게 건의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적으로 재상들은 국가의 각종 사안에 대해 직접, 간접으로 간여하였다. 그러나 공론 형성층이 분명하지 않았던 당시에 재상의 공론은 재상들의 공통된 의경이라는 좁은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도 공론은 왕의 경우에서와 같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이념에 불과하였다.통치에 대한 명분적 수식에 불과하였던 것과는 다른 성격의 공론을 대간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간은 왕의 耳目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복의 역할은 공의를 거두어서 왕에게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간은 지위가 낮았지만 국정을 논하는 위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은 공론이었고 대간 언론의 폐지는 공론의 폐지로 인식되었다.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대간들의 정치 구조적 지위가 취약하였고, 공론의 바탕이 되어야 할 공론의 형성층이 형성되지 못하여, 대간의 언론은 표방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그러나 성종대에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여 성종의 지원을 받아 언론 기구를 중심으로 수용되면서 언론 활동이 강해지기 시작하자, 대간들은 부여된 임무에 상응한 역할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대간들은 圓議制를 강화하여 언론이 대간의 합의도니 의견이라는 인식을 확보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양사의 언론 기능이 강화되고 있었고, 공론 수용 기능 또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②公論政治의 확대언관과 낭관들이 공론 수용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면서 그 이면에서는 점차 공론 형성층이 형성·확대되고 있었다. 공론의 형성과 수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수용기구의 정비는 공론 형성층의 형성에 밀접히 연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공론의 형성과 수용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특정 인물이나 부서가 공론을 담당하였다. 당시에 공론을 담당하는 부서를 "公論所在"라 지칭하였는데 이는 공론의 수용 기관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공론 형성 기관이라는 의미까지를 포괄하였공론을 담당하였다는 의미는 대신이 공론을 수용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이들이 구체적인 공론 형성층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 합의된 의견은 곧 공론이었다.이러한 양상은 공론의 바탕이 되는 공론 형성층이 구체화되지 않은 데서 기이하였다. 이념적으로는 모든 민은 공론의 형성층이었고 민심이 공론이었지만, 이들의 의사 표출과 정치의 수렴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이러한 상황에서 공론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제한되어, 재상들의 정책 결정이나 언론기관의 탄핵에 명분을 부여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언권이 강화되고 낭관권이 형성되어 공론 수용 기능을 활발히 하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공론 형성층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들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되었다.삼사의 언권이 강화되고 낭관권이 형성되어 공론 수용 기능을 강화하자 관원들의 의사 표출도 활성화되어 갔고, 이들의 의견이 대간의 언사나 정책 결정에 압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또한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심으로 결집된 중앙의 유생들과 지방의 유생들도 점차 공론을 형성하는 기관으로 등장한다. 중앙의 유생들은 이전부터 국가 정책에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 말기부터 성균관의 구성원이 지방의 사림들로 채워지고, 齊會 방식에 따른 衆論에 의해 운영되어지면서 성균관도 공론을 형성한다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유생들은 삼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훈구와의 대립에 서로 지원하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균관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수반하여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중종반정 이후에는 일반화되어 표출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 공론 형성층으로 등장하였다. 지방 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성종 초엽부터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한편으로는 중앙정치 구조의 개혁에 주력하였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치적 운영의 확보에 노력하였다. 사림은 중앙정치에서 公論에 의한 통치를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鄕論에 따르는 지방의 자치적 운영을 이상시하였다. 사림은 그러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유향소의 복립을 례의 실시를 계속 추진하면서 자치적 운영을 모색하였다. 유향소나 향사례, 향음례는 지방의 향론에 입각한 향촌 규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자치 노력은 戊午士禍로 위축되지만 연산군의 축출 뒤 더욱 강하게 추진된다.이러한 상황에서 鄕論의 구성원도 확대되는 추세였다. 그러한 추세는 향론 중심 기구의 확대를 통해 짐작된다. 성종대에 만해도 鄕論의 중심 기구는 留鄕所,可馬所였으나 중종대에는 유향소와 더불어 향교가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성종 말기 지방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성균관에 진출하여 지방 유생들이 성균관의 주구성원으로 등장하면서 성균관의 유생과 지방의 사류는 더욱 밀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류의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무의미해졌고 이들의 의사는 합하여져 사론으로 개진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사림이 鄕論을 통해서 중앙의 대표였던 수령의 잘못을 정면으로 제기할 만큼 성장한 상황에서, 중앙의 성균관에 진출한 사류들은 정치적인 의식을 성장시켜 중앙의 문제에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중앙정부에서도 그러한 언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③공론정치의 활성화선조대 이후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공론정치는 활성화된다.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언관권과 낭관권이 확고해졌고, 이를 통한 공론의 수용기능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사림이 공론 형성층으로 인정되어 성균관이 공론의 소재이면 재야사림이 공론 형성층이라는 것, 즉 공론이 草野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공인되었다. 특히 붕당정치가 형성되면서 각 당파가 공론을 정통성을 부여하는 존립 근거로 삼았으므로 공론은 붕당정치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정치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공론은 대신이나 왕조차도 따라야 할 것이라는 대전제가 형성되어, 모든 정치 사암이 당연히 공론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전제가 표방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왕이나 대신이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왕이나 대신이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선조 21년(1588)' 복상들에게 공론이 어떤 사람을 뽑기 바라는가를 물었고, 재상들 역시 이에 回啓에서 공론을 참작하여서 재상을 뽑겠다고 말한 사례를 볼 때 공론정치가 실제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공론의 활성화 상황은 일일이 사례를 들어서 거론할 수 없는데, 그 대강의 추세를 짐작케 해주는 현상이 朝報와 通文의 활성화였다. 조보는 정치에 대한 소식지로 공론의 형성을 위한 정보 전달의 역할을 하였다. 조보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분명치는 않다. 그러나 초기의 조보의 기능이 주로 정부에서 결정한 일을 언론기관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 언론기관이 활성화된 성종대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행된 것으로 생각된다.공론이 활발하게 형성되면서 중종 대부터는 중앙 정치의 논의가 조보를 통해서 외부로도 나가서 공론 형성을 위한 정보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은 중종 10년(1515) 대사헌 權敏手가 국가의 비밀을 점거하지 않아 외인이 먼저 안다고 지적하면서 조보를 금할 것을 요청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즉 공론이 활성화되면서 정치 결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고, 조보를 빌미삼은 비공식적인 정보의 유출이 드러나자, 국가 비밀의 누설이라는 차원에서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공론이 활발해지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조보를 금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권민수의 발언에 대해서 사림은 비난하였고, 중종도 "조보이 일은 예로부터 있어 왔으니 비밀히 해야할 일은 승정원에서 알아서 비밀로 하는 것이 가하다"고 조보의 금지를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나 아직 당시의 조보는 조정에서 결정된 일을 승정원에서 주관하여 의정부나 대간 등 정부기관에 알리는 기관과 기관 사이의 연락을 하는 것이 공식적인 기능이었다. 그러나 조보의 역할은 점차 활성화되었고, 중종 후반에는 조보의 역할이 기관 사이의 연락에 그치지 않고 재상 등 개인에게도 보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보를 통한 정보의 전달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선조대에 이르면 지방에 거주하는 사림도 조보를 구되었다.
    인문/어학| 2001.12.08| 6페이지| 1,000원| 조회(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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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랑도]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 평가A좋아요
    花郞徒의 起源에 대해서...目 次Ⅰ.머리말Ⅱ.본문①원화제도②화랑제도로의 변화③화랑도의 설치목적Ⅲ.맺음말Ⅰ.머리말우리는 신라의 통일을 말할 때 가장 먼저 화랑을 떠올리게 된다. 신라가 반도 내에서 통일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게 한 가장 커다란 힘은 바로 화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랑에 대해서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매우 적다. 그러한 까닭에 화랑에 대해서 특히, 화랑이 생기게 된 이유 즉,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화랑의 연원은 직접적으로 원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먼저 원화제도에 대해서 알아보고 원화제도가 화랑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과 화랑을 설치하게된 목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문①원화제도源花制度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연부인의 風俗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기르면서 國花라 이름하였는데, 그 풍속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여자로서 源花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본다면 원화제도는 중국 연나라의 풍속을 수입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연부인의 '국화'와 원화제도의 형식상의 유사점만을 근거로 하여 접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원화제도는 고유한 것을 발전적으로 개혁하여 시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화랑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랑세기」는 "화랑은 선도의 무리"라 적고 있고, "우리 나라는 신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마치 연나라가 동산에, 노나라가 태산에 제사 지내듯 하였다"고 하였으며, "전에 선도들은 다만 신을 받드는 것만을 주로 삼았는데..."하고 하였다. 이것은 새로이 시행된 원화의 연원에 대한 언급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말들을 통하여 우리는 원화가 우리 고유의 신성숭배의 전통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즉 원화제도는 그 형식적 구조에 있어서는 '연부인'의 '국화'제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하겠고, 그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혈연집단 이래로 신라가 가지고 있었던 신성숭배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源花組織은 여성 수령과 그를 따르는 徒衆으로 구성되어있다. 왕녀로 추정된 원화조직의 수령인 남모와 준정은 신라 초기 왕녀의 역할과 관련지어 볼 때 司祭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원화조직의 "類聚群遊"라는 遊娛的 속성은, 그 수령의 사제적 성격 및 그 後身인 화랑도의 종교적 祭儀와 연관됨을 생각할 때, 원화조직을 산악신앙과 관련한 국가적 제사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원화조직은 신라의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의 발전의 산물이었다. 진한을 통합한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어 州, 郡制度를 시행하여 국가권력의 지방 침투의 확고한 계기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군사적 服屬·支配만으로는 지방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판단한 결과, 종교적인 통일을 시도하였다. 일원적인 宗敎儀式은 집단의 통합과 결속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라는 중앙 통치력의 확대와 관련하여 신궁을 설치하는 한편, 이른바 護國三山 및 경주평야 주변에 5岳과 같은 국가적 산악의 설정을 통해, 지방 토착세력의 정신적 기반이 되어 왔던 蘇塗信仰의 국가적 통합, 이를테면 복속 지역에 대한 이념기반의 국가적 통제와 확대라는 측면에서 그 같은 임무 수행 집단으로 원화조직이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즉, 원화제의 역할은 지방토착세력의 정신적 기반이 되는 山岳信仰이나 蘇塗信仰의 국가적 장악이 수반되어야만 중앙권력의 지방침투가 용이하며, 또 그것이 진한연맹체의 실질적인 통합 요체라고 생각하여, 중앙권력의 확대에 부응하여 신라는 원화조직으로 하여금 그 같은 임무를 수행하게 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②화랑제도로의 변화원화는 신라의 원시로부터 이어온 종교적 집단의 전통과 교육 또는 수양 집단의 전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원화제도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원화는 이러한 전통이 그 실제적 기능을 상실한 다음에 그 형식적 전통만을 갖추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신라사회의 정치적, 정신적 성격의 변모를 반영한 결과라고 하겠다., 원화제도는 그러므로 여성제주의 전통에서 화랑제도의 전통에로 바뀌어지는 과도기에 놓여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신라사회의 변모는 내물마립간의 시대로부터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지증대왕, 법흥대왕 시절에 완성된다. 내물마립간 때부터 왕권은 한층 강화되어 간다. 그리하여 김씨 왕가의 전통이 성립되는 것이다.) 내물 이전의 왕권은 박, 석, 김, 3성씨 사이에 오고 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박혁거세의 신화적 힘을 배경으로 하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내물왕 이후부터는 권력이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를 세우는 시기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왕가의 확립은 권력의 집중화를 가져오고, 신권적인 기능에 의한 사회 통치보다는 물리적 정치력에 의한 사회통치의 장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신성숭배의 전통은 약화되어 가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신성숭배 전통의 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불교의 유입이다.) 불교는 눌지왕 때 묵호자에 의하여 신라에 전파된다. 내물-실성-눌지로 이어지는 김씨 왕가 전통의 확립기에 수용된 불교는 왕권 강화에 많은 공헌을 한다.불교의 수용과 전파는 신라 고유의 신성숭배의 전통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고 신성숭배 전통으로 대표되는 혈족사회 이래로의 신라의 지배구조를 재편하는 데에 일조 하였다고 할 수 있다.정치적 차원에서의 내물왕계 김씨 왕가의 등장, 새로운 종교로서의 불교의 등장, 한자상용을 통한 본격적인 중국문화의 수입 등은 신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구조를 뒤바꾸어 놓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의 상호작용은 일세기가 조금 지나서 새로운 신하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지증왕, 법흥왕 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중국식 법제가 완비되고, 왕이라는 칭호가 쓰여지며, 순장의 풍속이 폐지되고, 신라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쓰여지게 되며, 불교가 공인되고, 율령이 반포되고 하는 등의 새로운 신라의 등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성제주의 전통은 파기된다. 그리고 다만 그 형식적 구조만이 남아 지난 시대를 추억하는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기능도, 교육 재니 수양의 기능도 상실하고 원화라는 형식적 제도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이미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구조가 바뀌어 버린 신라에서 이 원화제도는 단지 관습으로써만 생명력이 유지되어 갔다. 따라서 이 원화제도는 새로운 사회구조가 완성된 후에는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법흥왕은 이 원화제도를 혁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을 이어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파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법흥왕 사후 정권을 담당한 지소태후가 일면 원화혁파의 책임을 위화랑에게 맡기면서, 일면 남모공주의 낭도를 늘려주는 모순적인 시책을 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전통적 관습과 새로운 시대의 단층이 빚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결국 원화제도는 마지막 원화였던 준정과 남모 사이의 시기와 알력으로 인한 살인사건을 계기로 혁파된다.) 「화랑세기」는 준정이 남모의 낭도를 꾀어 살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삼국사기」는 준정이 남모를 꾀어 살해하고 그 벌로 처단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그리하여 새시대에 맞는 제도로 개혁되는 것이 바로 화랑제도 인 것이다.화랑제도는 그러므로 원화, 또는 신성숭배의 전통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모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통적인 것의 계승이라는 측면과,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른 개혁이라는 양면을 함께 갖는다. 「삼국사기」는 "다시 잘 생긴 남자를 뽑아 잘 단장하여 화랑이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바로 남자를 '원화'의 대역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여 주는 것이므로, 화랑제도가 원화제도의 성격상 차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삼국유사」는 "왕은 또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책으로 우선 풍월도를 생각하였고, 다시 명을 내려 좋은 집안 출신의 덕을 갖춘 남자를 뽑아 화랑이라 이름을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원화제도를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갖추도록 하여 화랑제도로 개혁시켰다는 의미가 된다고 하겠다.
    인문/어학| 2001.12.08| 5페이지| 1,000원| 조회(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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