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제암리 교회 답사 레포트)과 목 : 한국사 입문(수 5,6)교 수 님 : 최 유 리 교수님제 출 일 : 11월 17일(수)이름 : 200002650 이준영목 차◈ 서 론 - 3?1운동 연구의 필요성◈ 본 론 - 1. 3?1운동의 전개과정- 3?1운동의 추진계획- 3?1운동의 확산과정2. 제암리 사건- 사건의 발단- 수촌리 사건-제암리 사건의 전주곡- 제암리 사건 발발- 사건의 경위- 제암리 사건의 역사성- 제암리 사건을 통해 본 화성 지방3?1운동의 성격과 의의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결 론 - 제암리 답사 후...◈ 참고 문헌서 론▶ 3?1운동 연구의 필요성우리가 한국근?현대사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말하고자 할 때, 이것을 대내외적으로 침략세력의 역할과 성격을 충분히 시야에 넣지 않고서는 이 시대의 총체적 역사상을 제대로 구성해 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근?현대사의 전체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침략세력의 행동양태와 본질을 철저하게 구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열강과의 각축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화하였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지배는 한국근?현대사를 형성하였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제의 침략과 지배의 실상을 알아보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사 연구의 처지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경우에서도 이 시대의 근본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대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보여주었던 주체성과 자율성이 극명히 드러난 사건을 꼽으라면 3?1운동을 들 수 있다. 우리는 3?1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있었던 경기도 지방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져 있는 3?1운동 정신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본 론▶ 3?1운동의 전개 과정1. 3?1운동의 추진계획먼저, 3?1운동이 시작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자.1910년의 한일 병합으로 나라가 망한 뒤 항일 구국 운동에 있어서 적극적인 인사들은 대개 중국?만주?노령?미국 등의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운동이 터지자 일본 유학생들 대부분은 즉시 귀국하여 이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외 각지 독립 운동자들의 활발한 활동 상황이 국내에 알려졌으며, 특히 중국으로부터 파견된 선우 혁은 평안도 지방에서 비밀히 기독교도들에게 독립 운동을 권유하고, 미국에서 돌아온 여운홍이 그 곳 운동의 진행 상황을 소상히 전했는데, 이것이 또한 국내 독립 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이렇게 하여 거국적인 3?1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 단체와 학생들이 각각 거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 까닭은 일제가 무단 정치를 실시한 이후 국내의 사회 단체 대부분이 해체되었지만, 종교 단체와 교육 기관은 약간의 자유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뜻있는 애국 지사들은 종교에 의지하거나 교육에 힘쓰면서 국권 회복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단체 중에서 천도교?기독교?학생 조직이 개별적으로 독립 운동의 추진 계획을 세워 왔는데 뒤에 이르러 서로 다른 계통의 활동을 알게 되자 이를 종합한 추진 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2. 3?1운동의 확산 과정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국민들은 걷 공원 문을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질서 정연한 시위 행진에 들어갔다. 이 시위 행진 대열에는 학생?신사?상인?농민?도유(道儒) 등 남녀 노소 모든 국민이 너나 할 것 없이 가담하여, 서울 시가를 골고루 누비면서 우리의 독립을 외쳤다.이날 서울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은 해가 저물도록 서울 거리를 휩쓸었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독립 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수십만 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건의 폭행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지상 명제(至上命題)인 독립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 3?1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는 군국주의의 특색인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경찰과 헌병 외에도 용산에 있는 보병 3개 중대와 기리로 전파되어 갔다.- 지방의 운동으로서 그 규모가 컸던 시위 날짜는 대부분 장날과 합치된다. 이것은 거사 계획의 누설 방지와 인원 동원이 용이한 것 때문인 것 같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 또는 5일, 10일 간격으로 몇 차례씩 거듭하여 운동이 일어났다.이것은 일제의 억압 속에 살아오던 민족 적개심의 끈질긴 발현으로서 어떠한 억압과 제지에도 쉽사리 굽힐 줄 모르는 강인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각 지역별 만세 운동의 주체가 된 것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 있는 여건에 따라 주종의 관계에 서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그 획수는 1천 2백 회 이상이요, 참가 인원은 1백만 명이 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 기간은 대체로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였는데, 그 절정기는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로 하루 평균 발생 지역이 50개소를 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1. 사건의 발단제암리 학살 사건은 발안 장날시위 등 수원 화성지역 주민들의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응징으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의 결정판이었다. 수원 화성 일대의 시위가 폭동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자 일제는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검거반이 편성?파견된 이유로는 첫째, 3월 28일 사강리에서 경찰관 주재소가 파괴되고 노구지(野口) 순사부장이 살해된 일, 두번째, 28일 오후 1시 오산에서 금융조합 및 일본일 가옥이 불타 2만 2천 여원의 손해를 보았고, 29일에는 800여 명의 한인이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일본인 가옥들을 파괴하며 오산역을 습격한 일, 세번째, 3월 30일 발안장에서 1천명의 노상 연설 만세시위, 또 일본인 소학교 방화,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위 산상 80여 개소에서 봉화를 올려 일본인 가족 43명이 피난을 가게 된 일, 네번째, 3월 31일 밤 안성군 양성에서 약 2천명이 모여 경찰관 주재소?우편소 및 면사무소를 파괴?방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뒤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였다. 면사무소가 파괴된 것은 물론 주재소가 불에 타고 일본인 순사까지 살해를 당하자,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고, 그곳의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4월 5일 새벽 3시반경에 수촌리를 급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검거반은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 검거반은 4월 11일에도 수촌리를 비롯한 장안면, 우정면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렇게 두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검거작전은 이 지역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응징의 성격이 짙었으며 4월15일 제암리사건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었다.3. 제암리 사건 발발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자 사사카(佐板)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밖의 삼괴 지역으로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3월 30일의 발안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시위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3월 30일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장날시위는 삽시간에 8백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의 독립만세 물결로 퍼져 나갔다. 군중들이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자 일본 순사들은 위협사격을 가했고,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급기야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롤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4. 제암리 학살 사건의 경위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 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 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 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 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마을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