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1사마천의 궁형(宮刑)과 백이열전(伯夷列傳)과 목 명역사란 무엇인가(中國史)담 당 교 수김 한 규 교 수 님학 과경 제 학 과학 번1 9 9 7 1 2 7 5제 출 일2 0 0 1년 5월 1 4일성 명곽 창 환4 -1. 들어가는 글司馬遷의 는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通史로 한무제 이전의 중국고대사에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과 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배웠다. 하지만 이번 중국사 수업을 통해 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사마천이 '宮刑'을 당한 사실과, 이 후 그의 사상적 변화가 '伯夷列傳'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과정과 백이열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司馬遷의 생애와 史記의 탄생 배경사마천의 먼 조상은 周나라에서 사관을 지냈다고 한다. 그가 출생한 곳은 섬서성 한성현으로 夏陽이라곧 하였으며, 황하의 유명한 나룻터 용문에 가까워 용문에서 출생했다고도 전하기도 한다. 그는 용문에서 목가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그가 6세되던 해에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에 임명되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사관이 전하는 기록 등을 정리 보존하는 일을 맡았다. 기원전 138년 효무제는 수도 장안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茂陵을 능묘로 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이주시키는데, 사마천 일가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사마천은 8세부터 20세까지의 청소년 시절을 대부분 이곳에 살면서 학문을 익혔다. 당시 석학 童仲舒는 의 학설에 입각하여, 에는 역사에 대한 공자의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 미래의 이상 왕국인 한왕조가 암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효무제때에 중용되어 유교를 국교로 삼고 를 국가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장안에 살고 있던 사마천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20살 때 사마천은 천하를 두루 여행하였다. 각 권 말미에 이라 하여 사마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천하를 주유하는 동안 각지에서 고대의 제왕 五帝의 유적이나 전설을 접하고 감격해 하고 있다. 2,3년 정도 소요된 여행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 사마천은 郎中의 벼슬을 얻었다. 사마천은 처음부터 역사를 저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 데는 그의 아버지 司馬談이 끼친 영향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초보적으로 편찬 체계를 확립하고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부분적인 기록을 시작하였다. 특히 사마천의 교육은 아버지 사마담의 공헌이었다. 직접적인 영향은, 효무제가 산동성 태산에 올라 封禪의식을 단행하기로 하였을 때 참례하지 못한 사마담이 실망 속에 운명하면서 사마천을 불러 를 잇는 역사서를 저술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가 출현한 시대는 서주 말 이래 역사 발전의 추세 속에서 한나라가 진나라에 이어 다시 천하를 통일한 시대였으며, 안정된 정치에 대한 요구와 함께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이 . 팽배해 있었고, 여러 학문을 겸비하는 경향이 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마천은 오랜 역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紀傳體 역사서의 체제를 창립하고, 정치, 경제, 학술 등의 방면을 망라한 최초의 通史를저술하였으며, 특히 사회발전 속에서 인간의주체적인 역할을 분명히 함으로써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3년 후 아버지 사마담에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석실에서 金 의 책(황실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을 열람하기 시작하였다. 저술에 착수한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사마천에게 비통한 사건이 찾아왔다.3. '李陵의 禍'와 '宮刑'한라라 장수 이릉이 정예 부대 5천명을 이끌고 북방원정에 나섰다가 8만 흉노군에 포위되어 1만명을 베었으나 결국에는 항복하였다. 그러자 당시의 황제인 한무제는 크게 노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모든 대신들이 이릉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평소 이릉을 뛰어난 장수로 여기고 있던 사마천은 홀로 나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다. 물론 이릉과 사마천이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았다. 이에 무제는, 사마천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씨의 오빠 이광리 장군을 비난함으로써 결국에는 무제 자신을 비판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무제는 이광리 장군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 대원정벌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광리는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릉 장군은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마천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나서 충언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고통의 시작이었다. 무제는 사마천을 誣罔罪로 처벌하니 바로 허리를 잘리우는 벌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허리를 잘리우고 죽는 길, 두 번째는 50만 전 가량의 금전을 바치고 자유인이 되는 길, 세 번째는 궁형을 당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이 없었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동안 모든 삶을 바쳤던 역사서의 완성 또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궁형을 자청하게 된다. 그로부터 그가 겪게 되는 고통은 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이 모든 치욕을 오직 의 완성을 위해 감수하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이후 그의 삶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삶의 역정이 오히려 역사서 에 생명력을 불러 넣어주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당한 궁형을 사마천은 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4. 과 사마천의 역사관은 70열전의 서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 사실 사마천은 열전가운데 전설상의 인물인 백이, 숙제를 첫머리에 실어 일종의 선언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에서 말한 70열전의 주된 의미가 '의를 부추기고 세속에 매이지 않아 스스로 때를 잃지 않아 천하에 공명을 세웠다'라고 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포악한 정치가 각 지역 제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때,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과 요령성 조양현 일대)의 두 왕자는 서로 왕위를 사양하며 집정하지 않으려 했다. 본시 고죽국의 군주는 죽기 전에 셋째 아들 숙게(叔齊)에게 나라를 맡게 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마땅히 장자(長子)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숙제는 왕위 계승을 마다하고 형인 백이(伯夷)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하였다. 백이 역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계속 숙제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양보가 그치지 않자, 결국 백이는 나라를 떠나기로 하였다. 형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본 숙제 역시 그를 따라 나라를 떠났다. 후에 고죽국의 왕위는 하는 수없이 그들의 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당시 백이와 숙제는 이미 나이가 많았는데도, 서로 왕위를 양보하였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그들을 부귀(富貴)를 다투지 않고 서로 양보한 '현인(賢人)' 또는 '군자(君子)'라고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난 후,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인 서백후가 노인을 공경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주나라의 도읍에 도착해 보니, 주나라 문왕(文王)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마침 상나라 주왕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 주왕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기를 거부하며, 주나라의 도읍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갔다. 그들은 주나라의 녹봉을 먹지 않고 수양산 속의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굶어죽게 되었을 무렵, 그들은 죽기 전에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정벌한 것을 잔학한 폭력 행위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그것의 그릇됨을 알지 못 하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也).....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서 끝내 굶어죽었다. 백이와 숙제가 이렇게 굶어 죽은 일을두고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이와 숙제가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과 같이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이 고결한 사람이 끝내 그렇게 굶어죽었으니 말이다. .... 하늘이 착한 사람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이런 일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반면에 도척(盜척)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쳐 먹고, 포악무도한 짓을 일 삼고, 수천 명의 도둑 떼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무슨 덕을 쌓았기에 그런 복을 누렸을까? 이 몇 가지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며, 가장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此其尤大彰明較著也). 근대에 이르러서도 법도를 지키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종신토록 안락을 누리며 부귀를 대대로 전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사는 곳을 조심스럽게 골라야 하고, 말을 하려면 적당한 기회를 골라 입을 열어야 하며, 길을 걸을 때에는 작은 길이 아닌 큰길로 다녀야 하며, 공정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발분(發憤)하지 않아서, 오히려 재앙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셀수 없이 많다. 나는 실로 매우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천도(天道)라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러한 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