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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역사, 문화] 중국의 붉은별 평가A+최고예요
    Ⅰ. 들어가는 말 - 이 무렵의 중국은?鄧小平이후 중국은 세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市場經濟(시장경제)를 적극 도입, 비록 정치체제는 社會主義를 고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경제면에서는 社會主義的 요소를 거의 탈색시켜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맑스주의자로서 共産黨 운동을 주도했던 그에 대한 논의와 관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그러나 毛澤東을 제외하고서는 중국의 근, 현대사를 논할 수 없으며 중국의 근, 현대사를 논하면서 역시 毛澤東을 제외할 수 없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鄧小平정권 이후 많은 변화를 겪은 중국 내에서도 여전히 중국민들은 毛澤東을 인민의 아버지로 가슴깊이 기억하고 있다. 이는 정치가?권력가라면 ‘거짓말 쟁이’를 먼저 연상하는 우리나라와는 비교되지 않는 현상이다. 이처럼 毛澤東이 시대가 변해도 정치가, 권력자로서 인민의 아버지라 여겨질 만큼 사랑을 받는 점은 우리의 관심을 더 증폭시키는 부분이다.의 작가 에드가 스노우는 는 모택동에 대해 “그에 대해 쓰자면 한권의 책도 쓸 수 있다.” 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도 내용중 가장 많은 부분이 그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는 꼭 그가 가장 훌륭한 공산주의자 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겪은 공통된 경험을 그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경험을 밝힘으로써, 다른 이들의 것들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모택동'이라는 인물이 대체 어떤 인물로 인식이 되어 있기에 지금, 조선족에게조차 이렇게 깊게 각인이 되어 있는 것이며 공산당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서 놀라운 것은, 이 책에 毛澤東과 그의 동지들에 관해, 또 이들의 내력에 대해 최조로 일관된 역사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스노우는 4개월동안 머문 중국에서 이 책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혁명가로서의 생애를 회고하는 모택동의 이야기를 적은 후 봉쇄된 홍구를 다시 빠져 나왔다.毛澤東은 꿈 많던 청년 시절에 중국 대륙을 여행했다. 8억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매우 놀란다. 빈농의 자식, 도제, 노예, 공장 노동자였던 이들은 지금의 생활에 매우 만족한다.하룡은 단도 한 자루로 호남성에 소비에트를 만든 인물로 가로회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로 성장했다. 하룡은 당시 공산당을 주도하는 대표단의 구성원중 하나다. 한참을 돌아서, 스노우는 서안의 성시 보안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모택동을 만난다. 소비에트의 유력자인 모택동의 얘기에는 자기 자신보다는 홍군이 겪은 경험자체가 더 부각되어 있고,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자기 자신을 두드러지게 말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모택동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당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공산당에의 소속감이 강하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모택동의 집안은 중농이었다. 돈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 때문에 집안엔 문제가 많았고,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그는 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는 집에서 나와 많은 학교들을 전전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는 외양이나 호칭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며 생활 또한 다른 일반 사병과 다를 것 없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중국의 공산당은 1921년 창당되었다. 1923년까지 급속하게 성장하고, 그 해에 손문 박사의 국민당과 동맹 관계를 맺게된다. 손문이 1925년 죽자,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협력관계는 1927년에 끝나고, 4월부터 대규모적인 숙청작업을 통해서 탄압을 받는다. 공산당은 1927년 이후 10년 간 중국이 반제국주의와 농업 혁명을 추진하지 않고는 열강으로부터의 국가 독립(특히 일본)과 민주주의를 성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소비에트 지구를 통해 실천한다. 당시 민중의 생활은 화중, 화서 지역에서 기근상태가 계속되어 수 천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3000만명 이상이 기아에 굶주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산당은 특히나 항일문제에 굉장히 적극적이다.모택동은 중국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이 성취되고,전지역에 걸쳐서 포위하면서 보루를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면서 홍구 쪽을 입장 곤란하게 만든다. 이 시기에 홍군은 두 가지 중대한 과오를 범한다. 하나는 1933년 복건 반란 중에 채정개 군과 연합하지 못한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동전술을 포기하고 단순히 방어에만 전념한 그릇된 전략의 채택이었다. 홍군의 병력은 백군에 비해서 장비 면에서도 매우 낙후 되 있었고, 뛰어난 기민성과 교란작전, 게릴라 작전으로 그 동안 소수로 다수를 이겨왔지만, 5차 초공전 때, 진지전을 벌였고 이는 홍군의 심각한 피해로 이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는 홍군이 전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홍군은 장정을 준비하고 1935년에 주력부대가 귀주성의 준의에 도착했다.그들은 끝없이 어어지는 수많은 난관을 해치고 중국에서 가장 길고 가장 깊으며 가장 위험한 강들을 건너며 또 가장 높고 가장 험난한 몇몇 산령을 넘고, 사나운 원주민들의 거주지와 아무것도 없는 대초원지대를 뚫고 혹서와 바람과 눈과 폭우를 이겨내며, 또 중국 전체 백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의 추격을 받으면서 이 모든 자연적 장애를 헤치고, 아울러 광동, 호남, 광서, 귀주, 운남, 서강, 사천, 감숙, 섬서 등 각 성의 지방군과 싸우며 길을 뚫고 나가 홍군은 1935년 10월 마침내 섬서성 북부에 도착하여 중국의 광대한 서북지역으로 그 근거지를 넓혔다.그 동안에 잘못 알려져 있던 홍군에 대한 이미지를 갱신하고, 홍군의 장정로에 있는 지역들을 소비에트지구로 만들고, 많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굉장한 길이의 장정을 거치면서 갖가지 경험을 통해서 결속력을 다진다."홍군이 승리에 찬 장정 끝에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감숙과 섬서성에 의기양양하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공산당의 올바른 지도역량에, 두 번째는 소비에트 인민의 기간요원들이 발휘한 굉장한 노련함과 용기, 결의, 그리고 거의 초인적인 인내력과 혁명적인 열정에 기인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계속 충실할 것이며 또 을 시작한다. 그들은 공산당과의 합작을 요구하면서 일본에 항쟁할 것을 요구한다. 장개석은 이에 구두로 약속을 하고 다시 남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장개석은 아주 교묘하게 국민당 내부나, 외부의 반발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조치들로써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공산당과 합작한다. 하지만 국민당정부쪽에서는 공산당을 배반하는 여러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엔 전국을 뒤덮는 대대적인 운동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2. 모택동에 관한 회상 - 어느 공산주의자의 내력모주석은 중국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통일전선이 성취되고, 국제적인 항일연합전선이 결성되고, 당시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피압박 인민들의 혁명적 활동이 함께 이루어질 때 일본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는 일본과의 전쟁을 현실상황을 감안할 때 장기전으로 치달을 것이라 예상함과 동시에 결국 그 결과는 중국의 승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모택동은 1927년 공산당의 실패와 무한 연립정부의 패배, 그리고 남경독재의 완전 승리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으로 진독수를 지명했다. 그는 진독수에 대해 "흔들거리는 그의 기회주의로 말미암아 당은 더 이상의 타협이 분명 파멸을 의미하던 순간에 단호한 지도력과 그 자체의 명백한 노선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러시아인 수석 정치고문 미하일 마르코비치 보로딘을 꼽았다. 모는 보로딘이 태도 변화를 뒷받침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1926년에는 철저한 토지재분배에 찬성했다가 1927년에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뒤바꾸었다고 말했다.1927년 8월 1일 하룡과 엽정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주덕과 힘을 합쳐 역사적인 남창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나중에 홍군이 되는 최초의 모태가 되었다. 홍군은 정강산을 근거지로하여 그곳에서 주덕과 합류를 한다.광주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팽배는 자신을 따르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해륙풍으로 가서 소비에트를 만들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시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계급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전정이 사행된다. `인민민주전정`하에서의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착실하게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따라서 중공정권은 1950년대 초에는 ?토지개혁, 항미원조운동, 반혁명분자의 숙청, 국민경제의 부흥 등과 같은 대규모 투쟁을 수행하여 계획적은 경제건설은 추진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중공정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기틀을 마련하였던 1953년에 중공정권은 스탈린 경제발전 모델에 입각하여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동시에 농업, 수공업, 상업 등 경제구조의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강화하였다.이와 같이 급적인 산업화와 집단화정책에 대하여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모택동은 그와 같은 `보수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집단화한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개조는 ?개체경제의 속박으로부터 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1955년과 1956년에 중공정권은 농촌사회에서 합작화운동을 강화하였으며,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개조를 완결하였다. 그러나 현대공업, 특히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하여 급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들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산당의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모택동은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모택동은 1956년에는 ?논십대관계?를 , 그리고 1957년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서 경제적인 불균형과 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없었다.
    인문/어학| 2004.11.25| 10페이지| 1,000원| 조회(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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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문화] 영화를 통해 본 중국 음식문화 평가A좋아요
    중국 문화의 이해- 음식문화를 담은 영화를 통해 본 중국목 차Ⅰ. 서론1Ⅱ. 영화를 중심으로 본 중국음식문화31. 중국의 음식문화32. 영화에 나타난 중국의 음식문화43. 중국영화에 나타난 음식문화의 의의7Ⅲ. 맺음말8참고문헌Ⅰ. 서론미국의 인류학자 코니한(Carole Counhan)과 에스테릭(Penny Van Esterik)은 “음식은 모든 문화적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라고 하면서 음식을 통한 국가의 문화 연구를 강조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음식은 국가의 정치적 구조가 관통하는 중심핵이며 사회적 차이를 가장 잘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어느 나라이든 음식문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나라의 풍토와 자연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형성된다. 음식은 일차적으로 생리적인 공복을 채우는 데 필요한 영양물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조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식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음식에는 이러한 의미만이 아니라 심리적?문화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양을 충족시킨다는 면도 있다. 즉, 한 나라의 음식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중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을 뿐만 아니라, 언어 문자학의 측면에서도 한자문화권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중국문화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막연하게 우리 문화와 유사할거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중국어와 우리나라 말과 확연히 다르듯이 중국문화 또한 우리문화와 다르므로, 우리가 미리 그 차이를 알고 의사소통 행위에 임하지 않으면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살 수 도 있다.각 나라의 문화는 각기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을 할 수 없는 것, 즉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 문화를 가지고 중국문화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중에서도 중국영화는 직접 중국에 가보지 않고도 가장 실감나게 신앙과 예절이 담겨있다.중국에는 ?백성이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民以食爲天)?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역대 천자의 최대 과제는 백성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있었다. 적어도 먹게만 해주면 태평성대라고 칭송받을 수 있었다. 역사상 중국 대륙에서 食을 완전히 해결한 적은 없다. 1983년에 발행된 에 의하면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함으로써 당시 한국의 인구에 해당하는 무려 2천 4백만 명이 굶어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중국 사람들의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매우 강하다. 흔히들 한국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의?식?주 세 가지를 든다. 그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중에서 중국인들은 食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외관에 치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옷이나 집의 화려함을 가지고 그들의 빈부를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오늘날 중국의 음식문화는 바로 역사적?지역적?민족적 특성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2000년 전 이전의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역적으로도 중국의 음식문화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지역적으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독특한 음식문화와 요리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또한 중국은 한족을 포함하는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각 민족마다 서로 다른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한족 외에도 대부분의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 문화를 보존해 오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의 모든 음식문화라는 한 가지 틀 속에서 상세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역사와 함께해 온 음식을 영화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음식문화와 중국의 문화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그들은 그들의 음식 문화를 영화 사이사이에 세밀하게 표현해 두었다. 따라서, 영화가 어떠한 부분에서 중국의 음식과 밀접하게 관련 되어있고간단하고 편리하게 해결하려 한다.또, 중국에서는 요리가 한국처럼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하나씩 나오는데 그야말로 세숫대야만한 접시에 요리를 내놓는다. 이것을 탁자 가운데 올려놓으면 탁자의 중앙은 회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앞으로 돌려놓은 다음 적당한 양을 덜어먹는다. 물론 제일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과일이다.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풍습인 젓가락은 나라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고 쓰임 또한 다르다. 한국인이 즐겨 쓰는 놋젓가락이나 은젓가락은 가늘고 짧은데 반하여, 일본의 나무젓가락이나 철젓가락은 짧고 통통하며, 중국의 통젓가락은 훨씬 튼튼한데 팔뚝만큼 길쭉하다. 한국 사람에게는 수저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한 도구로서 그 용도가 엄연히 다른데 비하여 중국인에겐 젓가락과 숟가락이 구별되지만 숟가락의 용도가 적어서 겨우 뜨거운 탕을 마시는 데에만 쓰인다. 중국인이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중국음식이 대개 기름을 사용하여 조리하기 때문이다.기름의 뜨거운 열 때문에 숟가락으로 먹을 경우 입을 데기 쉽다. 또 다른 이유는茶문화의 정착으로 중국요리에서 국물이 많은 음식은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이 쓰는 숟가락의 모양은 대개 보트 모양의 사기다.또, 중국에서는 식사하는데 많은 예절들이 있다. 음식은 통상 12가지 이상 나오므로 되도록 자신의 식욕을 조절해서 먹어야 하며, 식사 중 정치이야기는 금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손님을 초대할 경우 손님에게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를 권하며,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접대한다. 중국인은 손님이 다 먹지 못하고 음식을 남기는 것을 자신이 음식을 충분히 준비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굳이 음식을 비울 필요는 없다.대신, 음식을 맛있게 많이 먹어주며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을 함이 좋다. 준비된 음식에는 적어도 한번씩 손을 대는 것이 예의이며, 밥을 많이 먹는 것은 아직 양이 차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2. 영화에 나타난 중국의 음식문화영화에서 보여지는 중국인의그는 맛있다고 듬뿍듬뿍 덜어서 먹는다. 그리고, 음식을 만든 주인은 자신의 음식에 대해 매우 겸손해 하면서 ?간도 안 맞고 맛도 별로예요?라고 예의상 말을 한다. 그것은 맛을 보고 칭찬을 하라는 신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리 없는 그는 ?간장만 좀 치면 되겠네요?라고 하면서 요리에 간장을 듬뿍 뿌려 버린다. 이에 놀라는 주위의 중국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에서는 아침식사시 짠지를 먹고 또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할 때, 탕이 있으니 천천히들 먹으라고 한다. 중국음식은 우리의 음식과 달리 음식이 하나씩 순서에 따라 나오는데, 탕은 대개 요리가 다 나온 뒤에 마지막에 나온다.중국음식에서 만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 만두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 음식에서의 만두는 우리가 별식으로 먹는 것과 다르게 그것 역시 하나의 밥이다.에서 만두는 중요한 사건마다 항상 나타난다. 대약진 운동 시기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자는 유칭에게 당의 간부가 학교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푸꾸이는 자는 유칭을 업고, 공동식당에서 싸온 만두를 도시락에 싸서 학교로 간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유칭은 학교 담벼락에 기대어 잠을 자다가 위원장의 차가 담벼락을 박는 바람에 돌담이 무너져 그 자리에서 죽고만다. 만두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말이다. 유칭의 무덤에 짜전이 유칭이 먹지 못한 상한 만두와 새로 만든 만두를 나란히 놓고는 살아서는 배불리 먹지 못했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배불리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 딸 펑시아의 출산 장면에서도 만두는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문혁시기 홍위병들이 학교와 병원을 모두 점거하면서 의사들이 하던 일을 학생들이 하게 되었다. 펑시아의 난산으로 하혈이 심해지자 펑시아의 남편은 의사를 한명 데리고 오는데, 허기진 의사에게 만두를 주자 그는 허겁지겁 만두를 다 먹고 거기에다 물까지 가득 마시고는 만두가 위에 들어가서 부는 바람에 봉하는 치료도 받지 못한다. 이렇게 극도로 비주는 중국의 음식의 특징은 만찬을 통해 드러난다. 중국음식은 우선 하나의 재료로 수백 가지의 음식을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음식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리의 수일수도 있지만 내포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즉, 중국의 만찬은 중국인의 의식이 비추어진다.?주사부?의 만찬을 살펴보면 그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나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인 의식은 식사에 초대한 손님에게 주인은 풍성한 식사와 좋은 술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은 음식을 적게 내어놓으면 손님들이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손님에 대한 성의가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질과 양이 풍성한 음식과 술을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다.권하는 의식도 중요하다. 식탁에서 친절과 우의의 표시로 음식은 손수 집어 놓아준다. 손님의 접시에 음식이 비었을 경우 주인은 좀더 드실 것을 권하는 것이 중국인의 예의이다.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실례이며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은?주사부?가?금영?과 결혼 발표를 할 때 만찬에서 가족에게 음식을 하나씩 올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담배를 서로 권하는 것도 친밀함의 표시이므로 피우지 못하더라도 권하는 사람의 성의를 최대한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주사부?가 세 딸로 고민을 할 때?금영?의 양모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는 담배를 피지는 않아도 불을 부쳐준다든지 계속적인 청취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로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 자리가 그만큼 서로가 친할 수 있고 더 다정한 관계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손님을 초대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술과 음료이다. 풍성한 요리와 술상을 차리는 것은 주객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식사 전에 요리와 함께 술을 먼저 마신다. 술잔에 술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중국인들은 가득 찬 상태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시 따른다. 연회를 시작할 때는 일반적으로 건배를 한다. 이 장면을 통해?주사부?가 결혼 발표버린다.
    인문/어학| 2004.05.31| 11페이지| 1,000원| 조회(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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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중세 왜인의 세계
    국경에 걸친 지역- 왜인의 정체에 대한 논란Ⅰ. 들어가는 말‘내가 죽으면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 라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유언을 생각해 보면 한반도에 있어서 왜의 존재는 敵(원수, 대적) 혹은 寇(도적무리)의 의미로서 인식되어 온 듯 하다.현대에 이르러서도 ‘왜’ 하면 왜적, 왜구의 의미로 생각하며, 더구나 ‘왜’를 단순히 일본 혹은 일본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왜’와 ‘일본’은 그 지역적 범위나 민족적 구성 등에서 살펴볼 때 차이가 있다. 물론 ‘왜’라는 집단의 주된 구성원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고려시대에는 몰락한 지방 호족이, 조선시대에는 남해연안의 일부 거민(居民)들 혹은 정치적 의미를 가진 집단들이 가담하기도 하였다. 무라이 쇼스케는 중세왜인을 경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세 왜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국경에 걸친 지역- 왜인의 정체에 대한 논란조선왕조가 최초로 일본과 접촉을 시도한 것은 1392년이라고 한다. 조선은 역성 혁명으로 새 왕조 조선의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전 왕조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곧 왕조의 지배계층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조 질서 수립을 꾀하였다.대내적으로는 고려의 귀족연합적 성격을 버리고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였으며 외교정책을 ‘사대교린(事大交隣)’을 통한 유연한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사대교린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다른 인접 국가들에 대해서는 교린을 통하여 국교를 유지한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 명에 대해서는 조공을 하는 대신 무역의 실리를 얻었으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일본에는 요시노의 남조와 교토의 북조가 대립하게 되어 남북조의 쟁란이라는 전국적인 동란으로 확대하여 1392년 남북조통일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명의 태조는 중국에 확립된 군주독재제(君主獨裁制)를 답습하여 대내적으로는 가혹한 숙청으로 국내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당나라 때 정형되어 중국의 왕조들이 계승하였던 조공을 통한 쇄국주의를 취하여 이민족을 통제하였다. 이는 명과 무역을 바라는 나라들은 명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하면 이에 부수하여 무역을 허용한다는 방침이었다.이러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상황에서 왜구의 습격은 잦아지고, 국경을 넘는 해적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조선은 일본과 교섭하고 왜구대책을 세우게 된다.?倭寇?, ?倭人?,?倭服?, ?倭語?라고 부를 경우의 ?왜?는 결코 ?일본?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 아니라고 무라이 쇼스케는 말한다.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일지라도, 왜구에 의해 對馬등지로 연행되어, 일정기간을 그곳에서 지내고 통교자로서 조선에 왕래한 사람은, 왜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해적의 표식이었던 왜복과 왜어는 이 해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공통의 차림새와 언어로 ?일본?의 복장이나 언어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이러한 인간 집단 속에 민족적인 의미로서의 일본인과 조선인과 중국인이 스스로 참여, 또는 강제로 끌려들었을 때, 그들은 애매한, 요컨대 주변인적이고도 경계적인 것이 된다.무라이 쇼스케는 왜인을 곧 일본이라고 해석하는 상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왜인?이라 불려도 민족적인 기원을 따지자면, 그들은 조선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왜와 일본은 다르기 때문에 ?일본의 왜인?이라는 표현도 납득할수 있다고 말한다.왜구는 대마도 일대의 해역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던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의 본질은 국적이나 민족을 초월한 차원의 인간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을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하는 질문 자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조선인의 눈에 왜인과 항상 비교 대상으로 비치던 야인(野人)은 여진족으로, 야인도 왜인도 모두 인간 이하의 금수로만 취급당하였다.그런데 무라이 쇼스케가 제시한 진주?사천 등지의 제주도인을 ?왜인?으로 규정짓는 것은 왜어를 쓰고 왜복을 입었다는 이유이다. 다나카 다케오와 다카하시 고메이는 ?왜구=고려?조선인 주체론?또는 ?왜구=고려?조선인과 일본인 연합설?을 주장하고, 무라이 쇼스케는 ?왜구=경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무라이 쇼스케는 제주도인을 예로 들면서, 왜구를 ?왜구=고려?조선인 주체론?론 쪽으로 밀어놓고 있는 것 같다.이에 역자는 만약 이들의 말대로 왜인이 민족적인 출신을 따져, 조선인이 분명하다고 해도, 그들의 전대(前代)의 왜구의 발호가 낳은 역사적 산물인지, 아니면 14세기 왜구의 실체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무라이 쇼스케가 제시한『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왜구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심각했던가와 조선사회에 왜구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퍼져 있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료는 일본의 중세사회와 특히 그 경계적인 영역에 관한 정보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 무라이 쇼스케는 우리의 사료를 바탕으로 왜가 일본이 아니라고 말한다.사실, 무라이 쇼스케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섬 지역 백성들이 부역회피를 위해 왜구 행세를 했다는 말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세를 가지고 왜구=조선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행세를 했을 뿐이지, 왜구는 아니라고 본다.무라이 쇼스케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왜구를 일본인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은근히 조선인이라는 주장으로 몰아가는 그의 논점은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의 사료가 아니라 우리의 사료를 예로 들어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끔 하는 그의 주장은, ?왜구= 일본인 해적?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식에는 변화가 없을 듯하다. 다만, 그는 우리가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한 우리 사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우리 백성들이 부역의 어려움으로 인해 왜구 행세를 했다는 사실들을 알려주었던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왜구는 침략 뿐 아니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많은 행패를 부렸다. 때문에 왜인만 오지 않으면 사람과 말이 조금은 쉴 수 있을 것이라는 한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만약 왜인이 조선인이었다면, 이렇게 전국에 걸쳐 자신의 민족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4.05.31| 5페이지| 1,000원| 조회(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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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문학] 일본 고전문학사 평가C아쉬워요
    Ⅰ. 들어가며일본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을 뿐 아니라, 언어 문자학의 측면에서도 서로 고유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자 문화권 안에 속한다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 일본 문화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어와 한국어가 확연히 다르듯이 일본 문화 또한 한국 문화와 다르므로 우리가 미리 그 차이를 알고 일본 고유의 문화와 역사, 민족 자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나라의 문화는 각기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 할 수 없는 것, 즉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시각으로 일본 문화를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그 중에서 문학은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다. 현대의 문화는 일본을 직접 방문한다거나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체험할 수 있겠지만 그 민족 자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고대로부터 현대 이전의 문화나 역사는 활자화된 자료, 특히 문학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사전 상으로 ‘삶의 가치 있는 경험을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언어로 짜임새 있게 표현한 예술’ 또는, ‘지난 날, 학예?경사(經史)?시문(詩文)을 총칭하던 말,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르던 말’로 나타나 있다. 넓은 의미로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구전된 구승 문예도 그 범주에 포함 할 수 있다.무릇 모든 민족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각각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사상, 감정이나 사회상,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고 그려내어, 그 민족의 문학을 발전 시켜왔다. 어떠한 문학 작품이, 어떠한 시대, 사회 속에서,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어떻게 계승되고 전개되어 왔는가했다. 원래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우타가키의 기원은, 봄 가을에 마을의 남녀가 산상이나 해변의 신성한 장소에서 가무를 하며 풍요를 비는 종교 행사였다. 그러나 점차 종교 행사의 성격은 옅어지고 남녀가 서로 배우자를 구하고 가무를 즐기는 행사로 변질되어 갔다. 즉, 상대 가요가 읊어지게 된 종교 행사나 노동, 그리고 남녀의 애정 표현이 바로 문학 발생의 기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애초에 촌락 공동체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에서 출발한 우타가키는 후에 점차 궁중 의례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고 남녀가 유희와 가요를 나누는 장소로 변화 하였다.그 밖의 歌謠記紀歌謠의 종말기는 『』의 초기시대와 겹치는데, 萬葉초기의 노래나 작자 미상의 노래 또는 의 대개는 가요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부처님의 덕을 찬양한 가요로서는 의 약사사(藥師寺)에 있는 「불족석가비」에 새겨진 「彿足石歌」가 있다. 또 시대의 서사인 『』에는 記紀歌謠와 중복되는 노래도 있어, 이들은 모두 상대가요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2)成立背景귀족과 지식인 사이에 개인의식이 싹트고 문학적 자각이 뚜렷해지는 한편, 한자가 보급되면서 한자의 음과 훈을 활용한 가 발달하여 개인의 심정을 단가와 장가에 담은 가 발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와카의 특색인 웅대하고 힘찬 가풍의 이른바 만요초(萬葉調)가 형성되었고 6, 7세기경에는 5 ? 7조 정형(定型)이 확립되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에도 이러한 시가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시대의 와카를 집성한 것이 일본 최고의 가집『』이다.構成과 內容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래는 4500여 수를 담고 있다. 이 중 단가가 약 4200수, 장가가 약 260수, 세도카가 약60수, 렌가(連歌)가 1수, 붓소쿠세키카가 1수로, 단가가 전체의 9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이를 내용별로 분류하면 조카(雜歌 : 주로 궁정의 공식행사와 관계가 있는 노래), 소몬(相聞 : 이성을 연모하는 노래), 반카(輓歌 :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로 나눌 수 있다. 표현 방법으로는 정 30권과 계보 1권이 편찬되었다고 하나 현재 계보는 전하지 않는다. 권 2까지는 신대(神代)의 것을 권 3 이하는 神武 천황에서 持統 천황 때까지의 역사를 가요를 제외하고는 거의 순수한 한문체로 기술했다. 이는 육국사의 최초의 권으로 관선국사의 시초이다. 전반은 전설성과 허구성이 강하며, 후반은 사실성이 풍부하여 자료적 가치가 높다.文學史的 意義일본의 정사(正史)로서 육국사의 출발이므로, 사서(史書)로서의 의미는 크지만 문학적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편찬자가 왕권의 확립을 위해 한문체를 체택하여, 중국의 사서를 윤색하고 있는 점에 오히려 문학적 의의가 있다. 또한, 신화와 128수의 가요를 싣고 있다는 접에서 문학사적인 위치는 확하다고 할 수 있다.(5) 風土記 와 日本?異記『』는 당시 조정의 명에 의하여 산물, 토지의 상태, 산천 원야의 지명의 유래, 고로들이 전해 온 구문(舊聞) 이사 등을 적어 올린 지리서이다. 편찬의 성질상 평판적인 지지(地誌)로 되어 있으며, 지방 및 민간에 전승되어 온 신화, 전설, 설화가 그대로 실린 향토지(鄕土誌)이다. 통일된 설화보다도 유리설화(遊離說話)와 지명설화(地名說話)가 많아, 지방 사람들의 역사나 생활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는 3권으로 된 지방의 민간설화인데, 예부터 전해 오는 전설이 아니고 불교가 전래한 뒤에 발생한 불교설화를 모은 것으로서, 외래 사상 침투기의 설하라고 하겠다. 헤이안 초기에 편찬했으나 나라조의 이야기가 많고 주로 불교에 있어서의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설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중의 씩씩함과 다양한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을 엿볼 수 있다.Ⅲ. 中古의 일본문학1. 槪觀時代背景중고시대는 고대시대와 중세시대의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사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고대 후기에 속한다. 나라 시대 말기에 간무(桓武)천황은 정치적 혼란을 타파하고 천황 중심의 율령체제를 재건하기 위해서 794년에 지금의 교토인 헤이안()으로 천도한다. 그 후 미나모토노용은 넓은 의미로는 역사라고 하겠는데, 좁은 의미의 역사가 개인이나 집단의 기록을 정리, 조직하는 것임에 대해, 모노가타리의 대상인 역사는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 감정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는 가공이며 상상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이나 이야기의 진행은 현실적인 인간생활을 통해 구체적이며 합리적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모노가타리의 가장 큰 특징은 창작된 허구적인 이야기를 가타리테가 독자에게 들려주는 데 있다. 모노가타리의 내용은 이 세상 어는 곳에서나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奇物語 와 歌物語전기 모노가타리는 고전승을 많이 담은, 현실적이기 보다는 공상적이고 전기적인 요소가 강한 모노가타리를 말하고, 우타 모노가타리는 와카를 중심으로 구전되는 설화를 기반으로 궁중을 무대로 펼쳐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구체적인 작품으로는 『』,『』,『』가 전기 모노가타리로 분류되고, 『』,『』는 우타 모노가타리로 분류된다.源氏物語가 지었다고 전하는 모노가타리 문학의 최고봉이다. 11세기 초에 성립되었으며, 54첩으로 되어 있는 장편이다. 어느 시점에서 어디까지 쓰여졌는지, 현재의 책의 순서대로 쓰여졌는지 등은 미상이다. 각 첩에는 모노가타리의 세계를 암시하는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제1부는 33첩으로 光源氏의 탄생부터 여러 시련과 사랑의 편력을 거쳐 영화의 극치에 이르는 청 장년기를, 제2부는 8첩으로 아들의 탄생 ,사랑하는 여인들의 죽음을 거쳐 결국 출가를 결심하는 光源氏의 만년을, 제3부는 13첩으로, 죽은 뒤에 남은 자식들의 연애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전후 4대 74년에 걸친 대하소설로서 등장인물이 약 490명에 달하는 큰 규모의 세계인데, 그것이 웅대하고 면밀주도한 구상 아래 훌륭하게 통일되어 있다. 문학의 실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모노가타리라는 허구를 통하여 귀족 사회의 사랑과 고뇌, 이. 흔히 「御伽草子」라고 불리는 단편 「物語草子」도 이 시기에 많이 생겨났다.전국시대 이후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렌가에서 나누어져 나온 하이카이(俳諧)의 렌가나 교카(狂歌) 등이 사랑을 받았다.중세 후기 선승(禪僧)들의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하는 고잔(五山)문학은 가마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남북조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기도슈신(義堂周信), 젯카이추신(絶海中津) 등 여러 시승(詩僧)이 나왔다.한편 1549년 크리스트교가 전래하여 선교사업의 하나로 복음서?이솝우화 등의 번역과 일본고전의 번역이 이루어져 출판되기도 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지방 무사 세력의 비호 아래에 서민적인 무대 예술인 노(能)와 교겐(狂言)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귀족 문화와 신흥 무사, 서민 문화의 융합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중세 문화의 하나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중세의 문학은 귀족이나 무사 서민 계층에 두루 걸쳐서 문학이 이루어 졌으며, 어느 한 계층에 머무르지 않는 문학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2. 韻文文學(1) 和歌中世和歌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중세는 무사계급의 사회로 변보해 갔는데, 실권을 상실한 공가(公家) 귀족들에 있어서는 와카가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따라서 중세에 들어와서도 왕조 와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성행하였다. 가인(歌人) 중에는 왕조 와카의 마지막 선집 『千載和歌集』의 선자(選者)인 의 아들 와 그 자손들이 많은데, 이들은 오랫동안 궁정 와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와카의 규범을 『』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가풍이나 표현기교는 왕조 때와는 달라져 시대를 반영한 중세 특유의 그늘진 미의 세계를 형성해 간다.新古今和歌集이 가집은 전 20권으로 상대의 『』, 중고의 『』와 함께 일본의 3대 와카집에 속하는 걸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와카집으로 귀족 문화의 전통으로서의 와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문과 가나로 쓰인 서문과 1980수의 단가로만 이루다.
    인문/어학| 2004.03.31| 28페이지| 1,500원| 조회(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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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 사회] 영화를 통해 본 대만 홍콩의 사회 풍속도 고찰
    대만·홍콩의 사회풍속도 고찰Ⅰ. 들어가는 말'지구촌화' 혹은 '세계화'에 대한 대표적 이론가인 로버트슨(Roland Robertson, 1992) 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의 개념으로서 '지구촌화'는 "세계의 압축 그리고 전체로서 세계라는 의식의 강화 이 양자를 모두 일컫는 것"이다.그런데 오늘날 '지구촌화'는 단순한 이념의 수준을 뛰어넘어 사회학자 기든스의 말대로 '사회생활의 국제화'를 초래함으로써 엄연한 하나의 일상 생활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같은 세계화의 흐름이 문화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을 장기적으로 평가한다면, 두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박영은, , 정신문화연구 제 18권 제 3호, 1995, p.99하나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로 서양 강대국(특히 미국)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계화와 초국가적 발전에 의해 사회적 의미의 문화적 가치, 그리고 상징과 그 형태들이 약소국에 수입되어 주민들의 감성세계에까지 무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지방문화들은 수입된 것들과 거의 구별되지 않고 결국에는 그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그와는 반대로 그렇게 수입된 문화형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은 민족문화와 지방문화에 의해 제대로 포착되고 또 제대로 소화될 것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 시나리오는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19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몇몇 어부들이 모여살 던 작은 돌섬이었던 홍콩이 영국인들의 1세기 반에 걸친 장심의 경영끝에 1997년 중국 대륙정부에 그 주권이 이양될때에는 이미 세계에서 그 지위와 작용을 공인하는 정치와 경제의 실체로 발전되었다. 남경조약을 계기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된 홍콩은 비록 영국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나 그 인구의 90% 이상이 중국인들이었으므로 줄곧 중국인 사회였다. 제 2차 아편전쟁이후 홍콩 당국은 홍콩 중국인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反英정서를 감지하였다. 다시 말해서 홍콩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영국사람을 매우 적대시하고 있었다.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당한 도피소까지 제공하여 주는 형편이었다.대만은 중국과는 별개의 자본주의 국가지만, 중국과는 또 다른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만인은 원래 중국 대륙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이지만, 그들의 문화는 대륙의 문화와는 고립되어 발전한 탓에 1947년부터 1949년 동안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중국문화'와 동일하지 않다.대만은 중국과 항구적인 대치상태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인 도움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보호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대만 경제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문화 내지는 자본주의 문화의 침윤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즉, 젊은이들은 공적으로는 중화문화를 존중하게끔 교육되지만, 사적으로는 미국문화를 애호하게 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홍콩과 대만의 사회적 특성에 따라 본 고에서는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에 반영된 사회의 가치관과 특성들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Ⅱ. 영화에 반영된 가치관, 영상미학적 특성에 관한 논의1. 사랑과 기억에 대한 영화 -화양연화" 그 시절은 이미 가버렸다. 그 시대에 속했던 모든 것이 이제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 감독 왕가위는 MTV적 시네아티스트라고 불리고 스타일리스트라고도 불린다. 아침이슬, 향기로운장미, 젊음, 아름다운 것은 하나같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른 뜻의 인간에게 그런 '한 때'가 없다면 고해(苦海)같은 인생을 무슨 낙으로 살아 낼 수 있었을까? 그런때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할 수도 있고, 그 순간이 찰나인지라 불행할 수도 있으며, 혹은 허무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모두가 함께 머뭇거리며 교차할지도 모른다.그래서 인지 는 느리다. 이야기의 구성과 편집의 속도가 느슨하고 슬로우 모션이 많으며, 인물들은 음미하듯 독백한다. 어긋나는 시간이 하나의 공간에서 교차한다. 에서는 신문기자인 차우와 여행사 직원인 리첸은 대륙에서 이주해온 서민들이 살고 있는 남루한 아파트로강박적인 억압의 반복이고 욕망의 은유이며, 변주이다.에서는 슬로우 모션으로 시간을 잡아당겨 늘리지만, 편집은 커트로 과감히 생략한다. 기억에 웅크리고 있는 장면은 길고 아름답고 유혹적이며 반복해서 보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은 아무 의미없고, 꿈속에서처럼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헤어지는 연습의 반복을 통해 '그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애틋하게 보여 주고, 리첸이 차우의 호텔에 들어서는 장면은 생략되고 문을 닫고 나선다. 그녀가 왔었다는 것, 그 '기억'만이 중요했을 것이다.2. 중국의 음식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 영화-음식남녀중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가장 잘표현한 영화는가 아닐까 한다. 에서는 다양한 중국요리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다른 분야의 영화와는 달리 중국의 특색이 담겨있고 의미가 곳곳에 담겨있다.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빚어지는 남녀간의 갈등,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음식을 매개체로 하여 은유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94년 아·태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하고, '95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제 47회 칸느영화제 감독주간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식민통치와 독재 속의 억눌림, 근대화와 서구화 속에서 전통의 혼란을 겪고 있는 대만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국제영화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가 시작할 때 주인공인‘주사부’는 만찬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일상은 항상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내어진다. 그것은 서구문명이 도입으로 점점 쇠퇴하여가는 중국인의 가정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만찬을 준비하면서 가족간의 의사소통과 사랑의 확인이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며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중국인의 음식 문화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음식의 특징은 만찬을 통해 드러난다. 중국음식은 우선 하나의 재료로 수백 가지의 음식을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음식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리의 수일수도 있지만 내포하는 의미가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은‘주사부’가‘금영’과 결혼 발표를 할 때 만찬에서 가족에게 음식을 하나씩 올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담배를 서로 권하는 것도 친밀함의 표시이므로 피우지 못하더라도 권하는 사람의 성의를 최대한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주사부’가 세 딸로 고민을 할 때‘금영’의 양모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는 담배를 피지는 않아도 불을 부쳐준다든지 계속적인 청취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로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 자리가 그만큼 서로가 친할 수 있고 더 다정한 관계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에서는 전통적인 음식문화를 통해 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3. 애절한 사랑과 홍콩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영화-첨밀밀중국 본토인에게 있어 홍콩은 분명 꿈의 도시이다. 그들은 홍콩의 거점을 마련하려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정작 홍콩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서방세계에 비빌 구석을 찾아 나선다. 그들에게 더 이상 홍콩은 꿈의 도시가 아니다. 그들은 본토인이 그러하듯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 미국으로 날아간다."그는 날 잊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잊지 않았어." 라는 의 대사는 홍콩인들과 서구 세계의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래로, 홍콩인들은 서구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 그들에게 97년 7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그들은 껍질만 중국인일 뿐 알맹이는 이미 서구의 것으로 가들 채워졌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홍콩 밖의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소군에게 홍콩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요리기술)을 전수했던 홍콩인 주방장이 뉴욕으로 떠나는 사실이나, 소군의 고모가 미국 영화배우 윌리엄 홀든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그와의 관념적인 재회를 꿈꾸는 낙으로 사는 모습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영화의 장면들이다.당 등 90년대 대만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세 남녀는 이 공간을 오고가며 마주치거나 몸을 숨기고 소리를 엿듣는다. 의사 소통을 거부하고,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섹스, 빈 아파트의 공간은 사회의 구조에 편입할 방법을 갖지 못한 소외된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이다. 25분간 지속되는 침묵의 도입부는 를 이끌어 가는 힘이 바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이며, 닫힌 커뮤니케이션이다.보금자리가 부재한 이들은 삭막한 현실이 주는 외로움 속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현실을 그리 쉽게 그들에게 따스함을 주지 않는다. 그들 간에는 대화가 단절되어 있었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지만 결코 삶의 주인공이 되지못하고 현실의 둘레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에 만나본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현실의 낯설음이 배어버려 처음만나는 이와 외로움을 나누고 있었다.메이는 자신의 집에 있는 욕실에서 피로를 풀기위해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따스한 물은 점점 식어가고 추위를 느낀 그녀는 따스함을 느끼기 위해 뜨거운 물을 틀지만 가스가 다한 가스보일러는 더 이상 물을 데워주지 않는다. 메이의 집은 그녀에게 따스함을 주는 공간이 아닐뿐더러 그녀에게 따스함을 주는 그 어떤 이도 그녀의 언저리에 존재하니 않는다.소강은 어떠한 외로움을 갖고 있는가? 소강은 불타는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생수 한 병을 다 비우고 그것도 모자라 수박 한통을 사온다. 수박을 공중에 던졌다 잡기를 반복하던 그는 갑자기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칼로 수박에 눈과 입의 모양을 파내고는 볼링공인양 손가락을 끼워 굴린다. 구르던 수박은 벽에 부딪혀 깨져버리고 그는 수박이 마치 여성인 듯이 수박의 속을 마구 탐하고 자신을 애무하듯이 수박껍질로 얼굴을 문지르는 것이다.영화의 주인공들은 공통된 상황에 처해있다. 따뜻한 보금자리로서의 집이 없다것이다. 메이는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침실, 주방 등 생활하기엔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인문/어학| 2004.01.05| 9페이지| 1,0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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