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예배는 곧 신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한다면 신앙이 바로 설 수 없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는 그 분이 계심과 그 분이 나를 살리시며 인도하심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시간이 예배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배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오늘날 자주 듣는 소리가 예배의 갱신 이다. 많은 사람이 필요성을 느끼고 공감하는 소리다. 예배가 갱신이 필요하다는 이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소유자이거나 시대의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하는 이들일 것이다. 현장에서 목회자를 내조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현상이며, 그렇기에 많은 목회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켜보기도 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취향대로 흘러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필자가 알고 있는 목회자는 하나님을 랩송으로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학생부 예배에서 랩을 시도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에 한 아이에게 어땠는지 물었더니 대답이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서태지 오빠의 노래하는 모습이 예배시간 내내 떠올랐다.이렇듯 예배의 갱신을 부르짖는 이면에는 예배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예배의 갱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가장 좋은 예배의 형태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해답은 없다. 그렇기에 본 소고에서는 현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두 분의 신학자의 주장을 요약발췌하고 이와 더불어 시대별로 예배에 대해 간략하게 다룬 후에 이를 바탕으로 결론부분에서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2. 김연택, 정인교 신학자의 주장1) 김연택{) 김연택, 『건강한 교회와 예배』,(서울;프리셉트,2000),p360법론을 창출하는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교리와 신앙은 불변하지만 전도의 방법론은 변화시킨다. 또한 문화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혁신적인 목회방법과 사역방법론을 추구하며 과감하게 접목시키고 있다.미국의 혁신적인 교회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탁월하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1990년대에 분석한 교회 사역의 특성과 개성은 20세기말의 성장하는 교회들의 특성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한국교회가 1990년대에 혁신적인 사역을 한 교회들의 공통점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연구한다면 21세기 교회 사역에 많은 도움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 미국의 교회들은 어떠한 전략과 철학으로 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가를 1990년의 사역철학과 방법론과 비교한다면, 앞으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할 교회 사역의 방법론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며 미국교회를 집중조명하고 있다.저자가 말하는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사도적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불신자 전도를 중심으로 사역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전도에 사역 목적을 두고 있으며,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특징은 목회자의 설교나 교회의 사회적 관심 또는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역의 동기와 목적을 복음 전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들도 교회가 의도적으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해야 하고, 교회 사역의 초점을 전도에 두는 사도적인 교회가 되어야만 다 시 교회의 부흥을 경험할 수 있으며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오늘날 교회에서는 예배에 대한 관심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에 예배를 의미하는 용어가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예배의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나 성막과 수밖에 없다. 예배의 혼란은 스타일과 본질의 용어에서 오는 것이다. 예배는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고상한 활동이며 이것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예배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반응이기 때문에 전체교회의 공동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자라는 사실이다.예배의 목적에는 양면성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경배하는 신앙적인 면과 신자들의 예배에 함께 참여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모습과 자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전도적인 면이 그것이다. 예배가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신앙적 응답의 표현이지만, 불신자들도 그 예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고전14:23-25).저자는 현대교회의 예배 내용과 구조, 스타일 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있다고 말한다. 그 첫째는 예배의 내용이 반드시 성서 신학적인 입장에서 조명되고, 복음의 내용에 따라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배의 구조에 있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고 성례를 통해서 감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는 예배의 스타일은 예배의 내용과 구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의 내용은 복음이고 구조는 복음을 기억하고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구조는 모든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교회가 미국교회와 비교되는 것은 약한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예배 인도자이다. 미국교회는 예배인도자에게 필수적인 것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예배의 순서를 담당하는 것 외에는 예배에 대한 철학이나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배 스타일의 문제이다. 예배는 하나다양한 전략에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있다. 어떤 융통성과 조정과 변화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러한 전도의 전략과 방법을 흑백논리로 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도를 교회의 우선적인 사역으로 생각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교회전도사역은 구도자 예배를 신설하는 것이다고 저자는 말한다.저자는 아직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의 구도자 예배를 따라가기에는 아직 시기 상조이므로 굳이 제안한다면 구도자 예배의 요소로 찬양, 환영, 성경읽기, 간증, 헌금, 드라마, 메시지 찬양의 순서이다고 말한다. 순서의 차이는 있을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드라마가 있는 것이 메시지에 효과적이다는 것이다.한국교회가 열린예배 또는 구도자 예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윌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의 사역이 한국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열린예배(이하 구도자 예배는 모두 열린예배로 통일한다)는 반드시 드라마 사역이 있어야 한다고 한국교회는 오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열린예배가 성공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앞서 말한 미국의 두 교회중 한 교회는 드라마를 하지 않는다. 즉 드라마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드라마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마지못해 오는 구도자들이 현실의 문제들이 드라마를 통해서 반영된다고 하면 거부감을 줄이고 목회자의 메시지를 더욱 잘 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드라마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잘 준비되지 못한 드라마는 차라리 시도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잘 준비된 드라마는 어떤 형식의 예배나 사역의 목적, 어떤 대상에 초점을 두어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면 그 말을 듣지만,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한다. 그렇기에 목회자의 위치가 중요하다. 목회자는 구도자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며, 예배 전후에 구도자들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은 음악, 설교, 드라마, 진행속도, 순서의 변화, 조명, 음향 시설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사랑의 메시지와 소망의 메시지가 항상 전파되는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2) 정인교{) 정인교,『예배학 원론』,(서울;솔로몬,2000),p234. pp213-229요약.예배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말은 종교개혁을 통해 예배의 갱신을 가져온 개혁자들에 의해 먼저 제기 되었다. 중세 카톨릭의 예전 중심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일대전환을 가져왔지만 그들은 이런 개혁과 갱신의 결과에 안주함으로 생명력을 잃은 의식 으로의 고착을 끊임없이 경계했던 것이다. 갱신이라는 말은 새롭게 한다는 말인데 기존의 불완전을 새롭게 하는 것과, 만족하지만 그것에 안주하고 의례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저자는 말한다.저자는 오늘 우리가 예배의 갱신을 이야기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시키지 않고 그것에 충실하려는 노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회중을 고려함으로 예배를 회중에 적합한 방식으로 새로움을 더해가는 데 열린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종교개혁이후 개혁자들이 보여주었던 예배들은 예배신학의 부재와 혼란, 그리고 또다시 생명없는 의식으로의 복고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서 예배 갱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빈야드, 구도자예배등의 형태가 출현하게 되었다.지금까지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매우 다양했다. 그래서 교회들이 일치를 성취하려면 세례와 성만찬 그리고 사역 에 있어 서로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 하에 리마문서는 세례 성만찬 사역을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었다. 결과로 리마문서는 기념, 임재, 희생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리마예식서는 크게 개회의 예전, 말씀의 예전, 그리고 성찬예전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리마예식은 그 본래의 작성의도대로 온 교회의 연합과 하나된 예배를 지말한다.
배영수, 『서양사 강의』, 서울;한울아카데미, pp177-205요약.14∼15세기 이후 프랑스 혁명에까지 이르는 약 5세기 동안, 유럽역사에서 시기는 지리상발견과 르네상스, 종교개혁, 절대 왕정의 설립과 붕괴라는 급격한 변화로 점철되었다. 이 시기에서 검토되어야 할 주제는 르네상스로 시작된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발전, 종교개혁 이후 갈등과 분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된 종교적 사유, 국민 국가의 통합에 입각한 정치, 사회적 사유의 발전이다.이탈리아 도시에서 시작된 인문주의 모든 분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육성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세적 교회관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절대왕정이 심화되면서 자연법 사상은 군주권의 자의적인 행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절대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영향을 보였다.이상의 변화동향은 17∼18세기 계몽주의에서 종합되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 및 전개라는 상황에서 비롯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란 중세의 봉건제와 도시의 자치정부체제가 혼합된 성격을 띠었다. 르네상스는 교황청의 통제능력의 상실과 각 국가들의 상호경쟁의 속에서 이에 합당한 가치체계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고 참주의 후원 속에서 국가의 운영을 위한 정치, 외교 및 행정에 필요한 언어와 수사학의 기술을 제공하였다.르네상스는 동로마제국의 몰락으로 활발히 유입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고전주의와 또, 협조와 상호 경쟁의 심화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행위의 중요성이 강조된 인문주의의 양태를 띠고 나타난다.르네상스가 시도한 고전의 부활은 그 정신과 내용에서 이전의 시대와 상이한 보다 세속적이고 대중적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시대와 고대라는 시대와의 거리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산출해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고전학자들과 유사했다.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새로운 가치기준, 즉,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다. 인문주의적인 가치관에는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이고 도덕퇴기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북서 유럽의 르네상스를 자극했다. 북서 유럽의 르네상스로 크게 성장한 속어 문학은 각국의 국가적 통합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그러나 이탈리아의 세속적인 것과는 달리 북서유럽은 그리스도교적 성격이 강했다. 이것은 실용적이던 북서유럽인들의 기질 차이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들어 인문주의의 비판과 관용의 정신은 종교적 열정과 독단에 밀려나고 말았다.인문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동반했다. 근대과학의 발전에 대한 르네상스의 가장 큰 기여는 수학 분야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자연과학의 발전에 분위기를 돋우어 준 산파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오히려 학문보다는 기술의 발전인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활판 인쇄술의 발명이다.르네상스는 새로운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탐구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원죄의식에 반(反)하는 인간권위에 대한 개념을 제공했다. 특히 로크의 인식론은 정치 윤리적으로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 선험적인 본유(本有)관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단시 경험적인 감각과 이성의 능력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지식을 축적한다는 것이다.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정념과 같은 윤리적 촉구의 원천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의 관계에 대하여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러한 윤리학적 논의는 다시 쾌락과 고통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쟁을 초래했다. 그리고 극단적인 결정론으로 귀결되었다.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발전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진보관에서 절정에 달했다. 계몽주의는 과학혁명에서 확립된 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했지만, 또 한편 절대왕정의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진보적인 태도는 역사서술에 대한 관심을 중대시켰으니, 그들은 또한 역사 서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의 역사에 대한 사유는 딜렘마를 동반했다.계몽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합리적인 자연관과 인간관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면서 계몽주의는 쇠퇴하게 되었다. 근대 유럽발전시킨 요인은 보다 현실적인 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이 군주권의 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종교개혁가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자로서 하층집단의 봉기로부터 기존의 세속권위를 방어했다. 초기 자본주의로의 길을 걷고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더욱 촉진시켰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이 교세를 회복하려는 자체 개혁작업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종교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종교분쟁은 때로는 프로테스탄트의 가톨릭 사이에서 벌어지는 초민족적외관을, 때로는 민족간의 경쟁이라는 외관을 띠었다.비록 교회의 통일은 깨어졌지만 종교분쟁의 소용돌이를 겪고 다시 강화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지성의 증진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세속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가치체계의 수립을 촉구했으며, 특히 세속적 사유의 발전을 자극했다. 논쟁은 이신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신론은 종교적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인간에게는 자연에 의해 주입된 자연종교, 곧 공통된 신념체계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 핵심은 '제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로서, 수학적으로 정리된 자연으로부터 그 건축가인 신에 대한 추론이 이루어졌다. 이는 정통 그리스도교에 근본적인 도전을 가했는바, 이성 앞에서 계시가 방어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 것이었다. 여기서 모든 철학적 설명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 제시되었으며, 성서는 역사적 근거가 결여된 혼돈으로 치부되었다.이신론은 영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청교도혁명의 성공과 자본주의의 발전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후 대륙으로 건너가 네델란드, 독일, 미국 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신론은 조직과 지도력이 미비했으며, 무엇보다도 무지하고 무비판적인 민중에 대한 감정적 충격 결여되어 있었다. 이후 많은 논쟁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도와 이신론자들 사이에서는 '자비로운 신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세계를 고안했다'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졌다.회의주의 역시 이신론과 그리스도교에 극단적 도전을 가했다. "내가 무엇을 알지 못했다. 16세기의 종교 분쟁과 17세기의 합리적인 기준에 의한 시험을 거친 뒤 그리스도교는 다시 신비주의의 형태를 띠고 보다 화해적인 태도로 나타났다.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수립 및 이에 따른 왕권의 강화는 정치사상의 발전을 자극했다. 정치적 사유의 주체는 당시 사회의 주요 집단을 이루면서 세력의 역학관계를 이루고 있던 귀족과 부르주아였다. 따라서 정치사상은 왕권의 강화에 대한 정당화와 견제를 동시에 내포하면서 발전하였다. 요컨대 주권론,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수용했던 근대 자연법 사상이 근대 서구 사유의 두 흐름을 이루게 된 것이다.주권론과 자연법 이론 중 보다 먼저 발전한 것은 역시 전자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과 상호 경쟁은 정치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북서 유럽의 종교개혁은 세속의 통치자들을 교회의 개입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광범위한 사회대중도 동원했는데, 이는 재세례파등의 원시적 공산주의에서 신성한 왕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사유를 촉진했다.무엇보다도 자연법 사상에는 개인적 권리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는 부르주아의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여기서 국가는 단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표명되었다.전반적으로 현실적이었던 계몽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오류를 명확히 파악했지만, 군주들과 교유하면서 특혜를 누렸다. 그들의 날카로운 비판도 기존의 체제를 적당히 유지시키는 선을 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계몽전제주의의 이념, 곧 개혁은 활발하고 개명된 주권자인 계몽전제군주에 의해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계몽전제군주를 지원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정부조직의 합리화, 세금 감면, 무역에 대한 부담 제거, 법률의 합리화 등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계몽전제군주는 계속 전쟁과 정복을 추구했고, 정치 및 교회 권력의 남용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침묵될 수밖에 없었다.경제적으로 볼 때,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역사는 중상중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주된 관심절대주의 사회의 위기와 함께 다시 한계에 직면했다. '무한한 이성의 능력'이란 개념은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성의 동의어 내지 신 및 그 자비로움의 명백한 증거로 간주되던 자연은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탐구될 어떤 것과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탐닉 속에서 향유될 또 어떤 것으로 분열되었다.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합리주의의 정신적, 지적 의미는 지대하다. 특히 이를 종합한 계몽주의는 서구 문명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던 가치 및 신조들을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이 속에서 역사 의식이 성장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사 및 과학적 문제에 대한 재사고를 촉구했다.로널드 웰즈, 한인철역,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서울;한국기독교대학협의회,pp81-94요약.르네상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서양 문명사에 관한 커다란 논쟁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는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논쟁이 많은 이유는 르네상스인문주의에 얽힌 주제들이 서양 문명의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그 이야기의 의미를 우리 시대에 재평가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논쟁이 기독교적 해석과 세속적 해석 사이의 논쟁이든,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 내에서의 여러 해석들 사이의 논쟁이 든간에, 중세 시대의 기독교 세계로부터 현대 세계의 세속성으로 변화한 것에 대한 해석(이것이 '진보'인가 아니면 '퇴보'인가)에 문제의 초점이 달려 있다.르네상스의 명칭은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세계의 발견, 인간의 발견'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 미슐레이다. 그는 로마의 화려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의 고대 세계의 부활은 서양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기간의 시작을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세 기독교 세계의 '저 세상성'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르네상스는 세속적이며 '이 세상적'인 정신을 유발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중세의 소박한 신앙 구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깨어졌으며, 그 이후에는 순진한 중세 시대의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는 깃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이었다.
3월9일 강사 : 유석성(서울신대 윤리학과 교수)제1강: 평화통일과 한국교회의 역할평화 통일과 한국 교회의 역할유석성한반도가 평화 통일이 되어야 하는 한다는 것은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대두된다.통일의 당위성으로는 첫째, 남북한 이질화 현상 극복, 둘째, 동질성 회복, 셋째, 민족역량 낭비 방지 및 한민족 번영, 넷째,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주의, 다섯째,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통일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또한, 통일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단일 국가를 이루었던 경험이 있던 분단국가들이 재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민족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5대 기본 원칙으로는 첫째, 자주의 원칙, 둘째, 자주의 원칙,셋째, 평화의 원칙, 넷째, 민족 대단결의 원칙, 다섯째, 인도주의적 원칙 등이다.한반도 통일의 바람직한 방향은 1995년 8월 15일 기독교 교회 협의회의 "1995년 평화와 통일의 희년 선언"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함께 사는 통일(공생적 통일), 서로 배우며 닮는 통일(수렴적 통일), 새롭게 만드는 통일(창조적 통일) 등이며 이러한 통일을 위한 실천과제로는 평화와 통일에 관한 신앙고백 운동, 남북민간의 화해운동, 인도적 삶의 회복운동, 남북의 나눔과 더불어 사는 운동, 남북선교와 하나의 민족교회 형성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한다. 한반도가 통일 될 경우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갈등양상이 나타날 것이다. 통일이 되어도 갈등구조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통합이나 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남북한 갈등관계는 구조적이며 가치 체계적이기 때문에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갈등구조가 완화되거나 해소되도록 진력해야 한다.통일의 의미와 통일의 방안1) 통일의 개념통일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통일은 역사적으로 단일국가를 이루었던 경험이 있던 분단국가들이 재통일을 이루는 것 두가지의 원칙은 남,북정부가 꺼끄랍게 생각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민간에게서 나온 성명중에서 최고의 것이다.내용은 한반도에서 핵을 제거, 군비축소(기독교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미군철수문제,오늘날의 기독교의 통일문제는 북한돕기운동이다. 보수교단이 우선적으로 하고 있다.90년대 들어와서 보수교회가 통일문제 가장 앞장서고 있다.남북나눔운동은 92년태동 93년에 정식으로 했다. 보수주의자와 복음주의가 앞장서서 진보주의자들도 흡수시켜서 연구위원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선언에서 미국철수문제가 가장큰 힘이 되기도 했다.한국기독교를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90년대 통일운동은 많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에 어렵기는 하지만 지금도 계속적으로 남북교회의 만남을 가지고 있다. '새민족 공동체 형성을 위한 우리의 사명'이란 주제로 활발한 의견교환과 토론을 벌였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알수도 있었다.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서 공식석으로 국제적으로는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기독교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앞장서고 있다.4.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4차 기독교 국제협의회의 개최-함께 희년을 -한반도 통일의 법적 장애물 제거 방안 -남북 기본합의서 실천방안-비핵화 실현과 군축방안 -인도주의문제 해결의 방안질문)1)북한의 교회문제(있기는 하지만 이념의 문제는 많은 것 같다)2)중국의 근접지역의 북한주민문제, 탈북자들(훈련이 필요, 기독교계가 앞장서야)3)한국의 기독교 나눔운동의 실체와 현대의 북한에 투자에 대하여,,(현대의 투자가 염려된다, 반면에 큰투자가 있기에 교회에 투자의 가치가 희석되어버리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4)한국교회가 할수 있는 한계가 있을터인데 얼마만큼을 해야하는가? (그들의 필요를 지금은 채워주는 것이 선교의 필요부분이라고 생각한다)5)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대하여? (지금은 조사하는 단계정도로 본다. 실효는 아직 없는 것 같다. 한기총에서는 이해관계로 이상하게 흐로고 있기도 한다)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의 당면과제이만열 교수1할 수 없을 것이다.북한의 개혁 개방은 북한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 변화란 북한 사회의 운영구칙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문제는 경제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메카니즘과 권력의 메카니즘이 서로 중돌할 여지가 많은 것에 있다. 이러한 면에서 북한은 현재 양 메카니즘의 충돌이 생길경우 권력 메카니즘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권력 메카니즘의 우위가 지속될 경우 유능한 인력이나 주요 자원이 당이나 군무를 선호하게 되므로 북한에서 근본적인 개혁, 개방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북한의 개혁, 개방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 전문가가 힘을 얻고 선호되도록 남한은 도와야 한다.북한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할 가능성변화를 강제당하게 하는 경우혹은 스스로 변화할 충분한 유인동기가 있는 경우이다. 북한은 현 경제위기로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으나 체제의 경직성이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북한의 체제 변화는 전체적인 시스템의 전환보다는 개혁과 개방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시스템의 전환에 비해 개혁과 개방은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형태의 전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점진적 개혁은 비용의 최소화, 부작용의 제거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시장기능의 왜곡, 부정 부패의 심화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급진적인 개혁은 반대파에 대한 효율적인 제압 가능성이 크다. 시장기능의 활성화 등의 장점은 있으나 비용부담의 확대, 정치적 부담등이 문제가 될 수 있다.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1. 개혁과 개방을 강요하는 전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험부담이 있다. 아마 역기능적으로 강요당하면 당할 수록 미사일 개발이나 핵무기 개발들을 더욱 가속화시킬 위험성이 있다.2. 개방에 대한 인텐시브를 제공하는 전략이 있다. 개혁 경로를 가르쳐 주거나 필요한 기숙이나 재정, 혹은 시장들을 제공하여 개혁, 개방을 쉽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 필요가 있다.3. 두가지 전략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방법이다. 이론적으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남조선 종교인들이 조국통일을 의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하며 그들과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전술적인 발언이지만 남북종교인들과의 단결을 강조한 것은 남북한 교회협력과 선교협력에 긍적적인 면이다.북한에는 1988년 봉수교회와 1992년 칠골교회가 세워져 있다. 북한 기독교 연맹이 선전한 바에 의하면 가정교회가 520여개소, 기독교 신자가 1만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교민들은 노동당 통일전선부 6과에 가정성분, 투철한 반 종교사상, 김부자에 대한 충성 등을 엄격히 검토하여 선발된 당원들로서 당 간부들의 가족이나 친인척들이 대부분이다.봉수교회는 450명, 칠골교회는 150명이 예배 드릴 수 있도록 건립되어 있다. 현 봉수교회는 300명이, 칠골교회는 150명이 출석하고 있다고 한다.북한교회는 북한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신봉해 왔다. 주체사상에서의 문제점은 신을 부정하면서도 인간을 신과 같다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특히 주체사상은 수령론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는데 1991년 5월 북미기독자 회의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연구소장인 박승덕이 밝힌 바에 의하면 "수령은 인민주체들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로서 궁극적인 주체, 곧 하나님을 대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이들의 영생론은 '육체가 죽으면 정신이 영원히 살고, 개인이 죽으면 그 업적이, 조국이 영원히 산다는 논리'라고 설명했다.한국교회는 북한교회가 지금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복음적인 교회로 변화되도록 기도하면서 도울 필요가 있다. 또한 지하 교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절대적 복음으로 부장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영친운동을 벌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북한선교의 긍정적인 면북한이 기독교를 탄암한 것은 정죄 받아야 할 마땅한 행동이어었지만 선교의 장애요인인 미신, 편질, 협소한 민족주의를 없애버린 것은 앞으로의 북한선교, 남북교회 협력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더욱이 북한이 의 논문'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고 철학적 원리를 저으이한다.2) 주체사상의 사회역사 원리-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는 역사의 주체와 역사의 본질, 그리고 역사발전에 미치는 요인에 관한 것이다.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는 사회역사 발전에서 인민 대중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하여 밝혀준다.(1)인민 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다. (2)인류역사는 인민 대중의 지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3) 사회 역사적 운동은 인민 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다. (4) 혁명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 대중의 자주적 사상의식이다.3) 주체사상의 지도 원칙(1)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여야한다. -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wkl주,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2) 창조적 방법을 구현하여야한다. - 인민 대중에게 의거하는 방법, 실정에 맞게하는 방법, (3) 사상을 기본으로 틀어쥐어야한다. (4) 주체사사으이 독창성Ⅲ. 기독교시각에서 본 주체사상의 인간 개조론 분석.1.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의 가능성.형성과정에서 고찰한것과 같이 주체사상은 혁명전략으로 출발하여 통치 이데올로기로 굴절되었으며, 나중에는 윤리의 이데올로기화를 통하여 종교적으로 변신되었다.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의 가능성은 바로 종교적 변신으로서 굴절과정으로부터 나온다. 오늘 북한에서는 '신격화" "신조화" "절대성" " 무조건성" 으로 이루어진 수령에 대한 "충실성의 4대원칙" 이 모든 사람들 이 행해야할 규범으로 제시되고 있다.2. 주체사상의 인간개조론과 기독교의 비교1) 주체사상의 인간론과 기독교의 인간론(1) 주체사상의 인간론과 기독교 인간론의 유사성.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내적 성질로서가 아니라 외적 연관속에서 고찰하였다는데 주체사상의 인간론과 기독교 인간론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2) 주체사상의 인간론과 기독교인간론의 차이.- 주체사상은 인간의 기원문제에 관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 유물론 사상을 그하다.
Ⅰ. 서론대개 B.C.3000년 경부터 고대근동의 지혜문학-특히 애굽의 지혜문학- 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이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부분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고대근동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우리가 아는 한, 애굽인의 최초의 정착은 주전 5천년 경에 시작되어 계곡을 따라 농업사회로 발전되었다. 이 민족을 곧 그들의 땅을 관개하는 방법을 배웠고 주전 4천년대 말에는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G. 허버트 리빙스톤,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김의원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0),p412.애굽인은 우선 42개 구역으로 그리고 두 국가, 즉 상애굽과 하애굽으로 조직했다. 현명한 민족인 그들은 달력과 기하학의 체계를 고안하였다. 전(全) 애굽을 통치한 최초의 통치자는 상애굽, 티니스의 메네스였다. 그는 나일 델타의 남부끝인 멤피스에 수도를 세움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강력한 구왕국(舊王國)은 적어도 500년간 통치했고 엄청난 피라밋을 건축했다. 이 시기에 다음 2천 녕 동안 애굽의 사고를 특징지울 삶에 대한 관점이 결정되었다. 구 왕국 다음에는 1세기 또는 그 이상의 암흑기가 따랐고, 그 후에 테베스에 주요 수도를 가진 봉건적인 중왕국(the middle Kingdom)이 일어났다. 아브라함의 애굽 방문) 창12:10-20은 이 시기 초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애굽의 고전 문학의 황금시기였다.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옮기면서 애굽에 이르렀고, 예수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한 곳이 바로 애굽이다. 그래서 애굽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애굽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본 소고는 애굽(이집트)의 역사와 종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Ⅱ. 개론고대 이집트라 함은 나일강의 제일(第一)폭포지대에 있는 오늘의 아스완으로부터 북향하여 지중해에 이르는 약 600마일의 경작가능한 지역을 말한다. 고대 희랍 사가 헤로도투스들이 양떼를 치는 베두인들을 싫어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창 46:34이스라엘인들이 삼각주의 동쪽 고센땅에 정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두인들은 준 역사를 통하여 그 고센 땅 지역에서 목축에 종사하였다. 오늘날에도 아랍 베두인은 팀사호(Lake Timsah)와 삼각주 사이 Wadi Tumilt 지역에 정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목축지는 큰 고랭이 속 식물, 파피루스 및 관목 수풀들로 덮여 있다.이집트인들이 유목민 베두윈과 그들의 양이나 연소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싫어하였지만 많은 가축들은 이집트 자테 내에서 사육하였고 또 그 수량도 많았기 때문에 그 가축들이 수출품이 되었다.이집트 힉소스 침략자들은 말(馬)을 이집트로 도입하였다.(BC 1700년경) 그리하여 이후 이집트는 그 준마들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왕상 10:28-29참조.당나귀는 이집트에 들어오는 카라반 동물이었다.이집트는 가까운 절벽들로부터 석재를 천연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음으로 메소포타미아보다 더 큰 유리점을 가졌다. 수메르와 바빌론이 진흙 벽돌로 신전들을 건립하던 것에 반하여 이집트에서는 주요 건물의 공사에 시내산의 광산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고 누비아는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매장되어 있는 금의 보유지(保有地)였다.이집트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30왕기로 나뉘고 있으며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메네스(BC 2980) 밑에서 통일된 때로부터 알렉산더의 정복시기(BC332)까지이다. 이집트 역사를 종합하여 연대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선사시대: 주전3 천 년경까지 이름주전 4천 년에서 주전 3천 년까지왕조 이전의 세 문화형태, 최초의 농경, 이때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별도로 출 현주전 3천 년에서 주전 2천 년까지최초 왕조시대:BC2850-2650년경.고왕국 또는 피라미드 시대(BC2650-2200년경): 처음으로 이집트 문화가 꽃핀 시기제 일 중간기시대:(BC2200-2050년경)주전 2천 년에서 주전 1천 년까지중왕국(BC2134-1786년경): 이집트 문화가 두 번째로 흥한 시기제2 예언자들로부터 혹독한 견책과 경고와 심판의 예고를 받는다.다윗 왕이 에돔을 정복하였을 때 에돔의 어린 세자 하닷을 파라오 쪽에서 이집트로 피신시켰다가 장성하게 되어 왕족 결혼을 시킨 일이 있다.) 왕상 11:18-22.솔로몬 왕 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게셀을 탈취하여 그것을 혼인 지참금으로 주고 자기 딸과 솔로몬을 결혼시켰다.) 왕상 9:16;3:1;7:8팔레스타인의 서남쪽에서 이집트가 경찰역할을 하고 또 강력한 이스라엘과 손을 잡음으로 이집트는 경제적 이익과 국가 안전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집트의 경찰행동은 파라오 시아문의 고고학적 승전 장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NBD345a.이집트 왕 쉐숑크 Ⅰ(성경의 시작:왕상11:40)는 신왕국시대의 파라오 왕들처럼 강력한 공세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솔로몬을 우방으로 보지않고 적으로 간주하였다. 물론 솔로몬의 집정시 직접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솔로몬의 대적자였던 여로보암을 이집트에 정치 망명객으로 받아들여 보호하여 주었다.) 왕상 11:29-40.그러다가 솔로몬 사망후 르호보암 때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 귀국하여 결국 북방 이스라엘로 분리 통치하게 되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이 췌약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집트는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쉐숑크는 팔레스타인을 침입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복하였다고 한다.) 오아상 14:25-26; 역대하12:2-12성경의 구스인 누비아에 이집트 문화를 배경으로 한 왕국이 건립되었다. 이 누비아의 왕 샤바카(BC716-702)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의 왕조를 차지하게 되었다. 샤바카는 앗시리아와 화친하였으나 그 후계자들 중에는 앗시리아를 대항하거나 공격하는 왕이 있었다.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주넌 701년에 유다의 히스기야 왕을 공격하였을 때 누비아의 새로운 왕 이티오피아 왕 파라오 쉐빅투는 어리고 철부지한 자기 동생 디리하카를 보내어 앗시리아에 대항하게 하였으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왕하 19:9; 사37:9; NBD346.이 다음으로도 디르하카는오히려 중립을 지키므로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597년 예루살렘 탈취에 지장이 없었다.그러나 느고 이후 이집트의 왕 호프라(BC589-570)는 중립적 자세를 버리고 유다왕 시드기야를 지원하러 진군하였다. 시드기야는 호프라의 도움을 믿었던지 바빌로니아에 반역하였던 것이다.) 겔17:11-21; 렘 37:5.그러나 호프라는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를 목표로 전세를 전향하는 것을 보자 겁이 나서 예루살렘과 시드기야가 멸망당하도록 방치하고 이집트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하여 이집트 군대와 호프라가 돌아간 후 주전587년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집트가 다시는 유다를 비롯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 보호에 나서지 못하도록 이집트에 쳐들어갔다. 이때는 호프라가 이집트를 통치하지 않고 아흐모세Ⅱ(아마시스)(BC570-526)가 이집트의 왕이었다. 아흐모세 Ⅱ와 느부갓네살은 무슨 화친 조약을 맺었던지) 렘 46:13 이하. NBD346쪽.그 이래 맹방(盟邦)으로 지내며 새로 일어나는 메디아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힘썼다. 그러나 주전 525년 페스리사의 왕 캄비세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패망하고 유다는 오히려 페르시아의 관대한 보호지배 아래에서 바빌론 포로들이 돌아오고 성전재건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학개서와 에스라, 느헤미야서 참조.Ⅳ. 이집트의 종교) 최의원, 『현대구약신학논문집』,(서울;은성,1988),p278. pp9-34.이집트의 종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종교 중 하나이며, 범신론의 성격을 띤 다신 종교이다. 많은 신이 있었으나 지방에 따라 8신(헬모폴리스지방), 또는 9신(헬리오폴리스)이 가장 높은 자리에 놓였다. 선사시대에 무덤을 만든 관습을 살펴보아 그때부터 이집트에는 저승에 관한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시신 매장의 형태는 죽은 사람이 북쪽 하늘의 별에 간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이집트의 종교는 그 나라가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면서부터 충실한 모습을 갖추었다.p9 이집트의 왕 바로는 사람의 몸을 입은 신00년경에 이르러 아툼신은 레신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아툼신이 언덕 위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다의 어두움에 밝은 빛을 던져준 것을 뜻한다.아툼신은 혼자 자기 몸에서 한 쌍의 신, 곧 슈(Shu, 마른 공기)와 테프누(Tefnu, 습기)를 만들어냈다. 아툼신은 슈와 테프누신을 떠나 보낸 뒤 기쁨에 사무쳐 울며 눈물을 흘렸다. 그 위에 슈와 테크누신 사이에서 겝(Geb, 땅)과 눗(Nut, 하늘)이 태어났다. 다시 이들(겝과 눗 사이)에서 5신(Isis, Osiris, Nephtys, Seth, Horus)이 태어났다. 끝으로 태어난 그 5신은 우주의 질서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지는 않았으나 먼저 태어난 다른 신들과 함쳐져 헬리오폴리스의 9신(Ennead) 사회를 이루게 된다.3. 멤피스 신화이집트의 여러 신화 중 멤피스 신화는 가장 잘 알려진 신화이다. 멤피스는 이집트 제일 왕조의 수도였다. 프타라는 신은 그 도시의 수호신이었는데, 그 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의 가장 조직적인 신화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프타 신화는 주전 700년경 샤카바라는 바로의 시대에 기록되어 문헌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문헌에 실려 있는 신화의 내용은 그로부터 약 2천년 전에 태어나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타의 우주신화는 가장 오래되고 동시 가장 뜻깊은 것이기도 한다.이 신화에서 프타신은 그의 마음과 그의 혀, 또는 말을 가지고 다른 아홉 분의 신을 창조하였다. 그 9신을 멤피스의 신들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프타는 가장 오랜 신이며, 동시에 다른 신들을 만든신이 된다. 프타가 아툼신을 제인 먼저 만들었다고 하나 흔히 프타와 아툼을 동일시 한다. 멤피스의 9신들은 세상 모든 것, 곧 땅 위에 있는 초목들, 돌들, 흙과 땅에 돋는 모든 것이 스며 들어 그런 것들을 통하여 자신들은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은 곧 하나의 신 프타의 생각에서 다른 모든 신과 세상 만물이 태어났다는 이론이다.멤피스의 신화에서 인간은 태양의 신 레의 눈물에서 태어났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다. "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