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종교개혁의 개념종교개혁은 16∼17세기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반 카톨릭적인 교회개혁운동으로 이 운동을 통해 오늘날 프 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 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본격적인 종교개혁은 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 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Ⅱ. 종교개혁의 원인 및 시대적 배경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면죄부판매 등의 카톨릭의 타락과 십자군원정 실패와 아비뇽유수로 인 한 교황권의 실추,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한 이성적인 종교관, 중세사회의 봉건제도 붕괴로 성장한 자본주의 의식과 교회의 금욕사상의 대립, 마지막으로 절대왕조의 흥기와 더불어 일어난 북유럽국가 의식의 성장으 로 교황의 실질적 권위의 제거 등이 있다그렇다면 이런 원인들이 발생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중세 말의 유럽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 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좋든 싫든 중세봉건사회와 밀착하였고, 따라서 봉건사회의 붕괴는 카톨릭 교회의 중세적인 존립기반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 정치적 배경종교개혁으로 인해 중세 기독교 세계가 와해되고 민족 국가로 진전되었다. 이 때는 하나의 기독교 세계 에서 민족 국가로 와해되는 시기였다. 종교개혁은 이 국가주의에 의해서 성공할 수 있었고 종교개혁에 의해서 국가주의가 더 발전되었다. 중세와 같은 단일한 국가, 종교가 지배하고 있을 때는 종교개혁은 불 가능했다. 와해되는 상황이었기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과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국가 단위 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는, 이른바 ‘노예의지론(奴隸意志論)’은 자유와 예속의 변증법적 구조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일반론인 목적 지향적 자유론과 구별된다.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자유는 더 이상 미래의 것이 아 닌 선취적(先取的)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내적으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외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이웃 에 봉사하는 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2) 시대배경원인은 중세 말 이후 중앙 집권적 국가가 성립되고 이것은 국민주의 사상에 의해 지지되었다. 신흥 시 민계급은 교황의 과세에 불만을 품고 국왕이 교회재산을 몰수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농민들도 봉건 영주로서의 교회와 수도원의 착취에 불평을 품었고, 가톨릭교회는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갔다. 르네 상스 휴머니즘은 신앙에 대한 존엄성을 잃게 하여 르네상스 교황의 타락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 연구를 발달시켜 경건한 신앙심을 일으켰으며, 다시 교회와 교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일으켰다.독일에서는 황제권이 약하여 교황의 착취가 심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의 반감도 유달리 높았다. 중세 말 기이래 신비주의가 성행되고 독일 인문주의가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교황권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사원의 수축비를 짜내기 위해 면죄부 (Indulgence)를 판매시켜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냈다.(3) 루터의 종교개혁카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작센의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1483-1546)가 당 시의 학풍에 따라 학자의 일반적 토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95개조 항의문을 통해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 다. 이러한 루터의 95개조 항의문{) 95개조 항의문: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며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문에 붙인 95개조 의 라틴어로 된 의견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문이 들어 있다.제1조-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스트라스부 르그에 있을 때 칼뱅은 마르테리츠라는 사람과 성찬논쟁을 벌인다. 이때 칼뱅은 성찬에 관한 논문을 썼 는데 루터는 이 논문을 보고 칼뱅을 극찬하였다.1541-55년은 칼뱅에게 어려운 투쟁의 시기였다. 1543년 반대파가 다시 득세하여 칼뱅이 다시 쫓겨날 처 지에 놓였다. 마침 그때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일어난다. 반대파는 은근히 세르베투스를 지원하였으나 의 회의 최후 결정은 세르베투스를 처형할 것으로 결론지어 진다. 이는 만약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르베투 스를 살려둔다면 카톨릭 진영으로부터 제네바는 반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이단으로 비난받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에 반대파는 약화된다.(2) 시대배경칼뱅 이전에도 복음주의자, 종교개혁자는 있었다. 에라스무스나 루터와 같은 경우 칼뱅보다 먼저 종교개 혁에 뛰어들었고 이들로 인해 종교개혁이 널리 퍼지며 성직자들의 지위는 크게 동요되기 시작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이 파급되는 와중에 칼뱅은 아버지의 권유로 보수주의적 카톨릭 신학공부를 그만두고 오 를레앙과 브르제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써 칼뱅은 인문주의적인 사상으로의 전환을 맞게 된 다. 그가 복음주의로 전환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1532년에 쓴 {세네카 관용론 주석} 에서 라틴어로 본문비평을 해서 정리를 하고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여기엔 복음주의 를 강조하는 신앙의인 이나 성서만으로 란 구절은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가 1532년 이후에 회심 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직접적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한 것은 파렐을 만나고 나서이다. 당시 프랑스와 독 일이 전쟁을 하고 있어 이를 피하고자 제네바를 경유하여 가다가 제네바의 급진적 종교개혁자인 파렐을 만난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다.한편 파렐과 칼뱅이 만났을 때 제네바는 나름의 내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제네바는 남쪽에 공 작이 다스리는 사보이라는 큰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 4분의 1에 달 하였고 국외 망명자도 많았으며 단죄자도 많았다. 이어 메리 사망 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즉위 하자 영국교회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엘리자베스는 엔 볼랜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국가 통일 의 입장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타협을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영국의 독자적인 감독 교회제도의 확립이다. 그는 1559년 의회에 헨리 8세보다 온건한 수장령을 승인케 하여 영국유일의 지상 의 지배자임을 확인하였다.이로써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고 의원, 관리 등 모든 성직자도 수장령에 따른다는 서약을 해야만 하였다.1559년에 '예배형식통일법'이 전술한 바와 같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42개조가 39개조로 개정되었고 1571 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현재까지 영국교회의 신조의 기준이 되고 있다.(4) 결과영국의 종교개혁은 신앙상에 있어서의 교리문제로 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복합적인 배경에 의해 일 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교회 재일치가 논의되고 있으나 너무나 오랜 세월의 분열은 많은 어 려움을 낳고 있다. 후일 영국 국교회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교회가 되어 후일 일 어난 퓨리탄 혁명에 의해 영국의 참된 종교개혁은 마무리되었다.Ⅵ. 스위스·프랑스 종교개혁(1) 스위스의 종교개혁츠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 철거 등 휴머니즘적 동기에 바탕을 둔 가톨릭적 미신타파 운동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용병제 폐지와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첨가되었다.그가 처음으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든 것은 1523년의 ‘취리히 토론’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취리히의 콘스탄츠 주교구로부터의 독립과, 여러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개시하였다. 또한 그 는 세속의 정치적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것이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 라는 속권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진 교회는 뒤에 제네바의 칼뱅파 교 회와 합동 세 명의 종교개혁자들의 경우를 보면 츠빙글리는 인문주의적 입장이고 루터는 인문적인 것과는 상반되고 칼뱅은 이 두 사람의 중간이었다.♣ 참 고 자 료{루터파와 칼빈의 공통점1성서 중심주의2신앙주의3교회와 교황권을 부정{Luther와 Calvin의 차이점루터아니즘(Lutheranism)칼비니즘(Calvinism)성격내성적·보수적(마음속의 신앙심)혁신적(진정한 개혁을 추구)교리신비주의적(상제화체설)이론적·논리적(「기독교 강요」)정치보수적·국민적(제후와 결합)세계시민적(시민과 결합)경제중농주의중상중의사회사회계급을 인정 신앙 앞에서 평등-보수적개인평등을 추구{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차이점르네상스종교개혁배 경남유럽적·Latin적인 풍토와 기질(명랑·감정적)북유럽적·German적인 풍토와 기질(침울·이성적)성 과외면적인 인간발견과 해방내면적인 자기발견의 해방업 적감성적인 예술분야내성적인 자아비판, 비판적 학문강 조 점자기주장이 강하다.이성을 중시, 현세중심이타(利他)적인 자기희생,신앙을 중시, 내세 중심인간본성원래 착하다.타락하고 사악하다.문 화Hellenism적, 낙관적인 자기긍정,고전고대 재발견, 세속적인 문화운동Hebraism적, 비판적인 자기 부정,원시기독교로의 복귀,종교적인 사회개혁 운동{종교개혁 이후 각 교파의 특징구 분루 터 파칼 뱅 파영국 국교회카 톨 릭교 리성서·신앙 지상주의철저한 성서주의, 예정설·장로제도칼뱅파의 영향,국가 교회주의교황 지상주의사 회현실긍정,현 신분질서 용인정·교 일치의 공화주의적 신정정치,군주권 부정정·교일치, 국왕이수장, 교회는 국가의지배 감독정·교일치, 로마교황이 수장, 사회국가에 대한 지도직업관세속직업도 사제직과동일하게 존중금욕주의, 근면장려,부 축적 정당화신·구 양파의중간적 입장세속 직업경시지지층반교황, 반황제파의제후, 부유시민지식인, 상공시민 계급귀족, 대상인,보수적 농민교황파, 황제파전 파북부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영국아시아, 아프리카,중·남아메리카. 루터파 종교개혁의 확산루터파는 규율
서 론개화사상은 19세기 후반의 대내·외적 위기 의식이 팽배하고 전통적인 봉건사회가 해체되며, 서구 열강의 자본주의가 침략해 오는 것에 대한 대응체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근대화와 근대자주 국가 건설을 위한 자주 국권 수호, 민권신장을 이룩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는 근대주의 의식의 근대변혁 사상이다.1860년대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나타난 통상 개화론은 개항을 전후하여 새로운 사상적 줄거리로 이어졌으니 이것이 개화사상이었다. {) 김운태, 1987. 한말개화사상과 그 운동의 전개 , 평민사강재언, 1981. 한국의 개화사상, 비봉출판사이원재, 1998. 조선근대 초기개화사상의 연구, 한양대출판원안으로 실학사상, 특히 북학파의 사상을 계승한 개화사상은 밖으로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무운동{) 중국의 근본을 지키되 서양의 문물은 받아들이자는 운동과 일본의 문명 개화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문호개방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들을 통해 일본의 발전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우리 나라도 일본의 신 문물을 배우고 섭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개화사상은 특히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 온 젊은 관료층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이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들은 사상적으로 박규수나 유대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밖에 일부 유생들 가운데서도 개화사상에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과 군사기술, 그리고 산업조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서 이를 도입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아울러 정치·사회제도의 개혁까지 거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양 근대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니, 이는 전통적인 유교윤리는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적{) 동양의 정통적 정신을 지키되 서양의 새로운 문물은 받아들이자는 이론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광린, 1973. 개화당연구, 일조각이원재, 19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개화파의 형성 = 개화사상을 소유한 집단으로서 개화파는 대체로 187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 정부의 개화정책 실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하였다. 갑신정변 당시의 회고를 근거로 충의계 설립시기라고 보는 1874년에서 1879년 사이 박규수, 오경석의 영향 하에 사상적 결사가 성립되고, 이들이 1879년 이후 유대치(유홍기)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치적 결사로 전환되었다. 특히 김옥균, 박영효 등이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킨 1879년은 개화파 성립의 결정적 계기로 간주되었다.{) 강재언, 1970. 한국근대사연구초기개화파로서 북학과 개화사상을 계보적으로 이은 인물로는 박규수가 주목된다. 그는 1860년대 연행사절로 청나라에 가서 신 서적을 구입하면서부터 서양사정에 눈을 떳고,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서양세력의 위력을 느끼게 되었으며, 1872년 제 2차 사행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국 통상론을 주장하면서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계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화사상은 아직 서양문명의 이기를 수용한 어양론으로서 동도서기론에 머무를 단계였다. {) 이원재, 1989. 초기개화사상연구 - 민족문화사한편 초기개화사상의 형성에는 중인층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관 오경석은 직업상 여러 차례 중국을 드나들면서 북경의 양무 관료들과 접촉하고 신 서적들을 구입, 의관인 친구 유대치(유홍기)와 김옥균 등 양반 양반자제들에게 전하여 개화사상 형성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1년 신미양요 때부터 본격적으로 개국을 주장하였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수역으로 참여하였다. {) 김하원, 1994. 초기개화파의 대외인식 - 오경석을 중심으로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서 북학을 계승하였으며 개항조약에도 참여하여 북학에서 개화로의 전환의 상징적 존재로 주목되었다.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온건파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으나 가문의 자제들로서 화려한 문벌 배경을 가진 젊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 정옥자, 1990. 개화파와 갑신정변■ 개화파의 활동 = 이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 것은 당시 계도가인 민씨 척족의 핵심 민영익의 천거를 통해서였는데, 민영익은 당시 고종의 개화 의지를 막후에서 보좌해온 장본인이었다. {) 연갑수, 1993. 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 - 1894년 농민전쟁 연구 (3) - 역사비평사시찰단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개화를 결심하고 적극적으로 개화파를 등용하였다. 고종과 집권 척족 세력들은 개화 추진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 설치, 일본시찰단과 영선사 파견, 서양 각국과의 수교 등 1880년대 개화 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행해졌다.한편 김옥균 등은 왕실의 지원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을 방문, 근대화의 실상을 목격한 후 본격적으로 문명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갑오개혁에 핵심 이론가로 활약하는 유길준은 서양의 법과 제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론에서는 상당히 신중한 동도 서기론적 태도를 취했다. {) 유영익, 1986.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 - 한림대논문집 4 - 인문사회과학편박규수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게 대항하려면 중국처럼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기기(대포·화륜선 등)를 채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양반 자제 가운데 젊고 유능한 청년 김옥균·박영효·박영교·홍영식(洪英植)·서광범·김윤식(金允植) 등을 모아서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담고 있던 연암문집을 비롯하여, 그가 중국을 통해 터득한 견문과 서구사회의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가르쳤다. 때마침 1869년 박규수가 한성판윤 겸 형조판서로 임명되자, 그 해 말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은 사상적 동지로서 뜻을 모으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다수의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공부하게 하여 정치집단으로서의 개화파가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북촌(당시 고관 양반들의 집단 거주지)의 양반 자제로서 약관 20세에 문과에 말경에는 그 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다.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강화되는 가운데 민씨 정권은 지금까지의 개화정책을 후퇴시키고 친청보수화정책(親淸保守化政策)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의식은 날로 높아져 갔고, 이를 타개하려는 방법을 두고 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리되었다.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의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 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청과는 종래 대로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론(洋務論)적{)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임개혁입장과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는 달리,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 기술문명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기에 몰린 개화당은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 사이의 안남[安南:Annam]문제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 에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의 개혁 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은 곧 이은 청군의 무력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신 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조약. 제 2차 한일 협약.이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전국적인 국민운동이 전개되었다. 언론이 일제에 의해 통제되어있는 상황에서도 황성신문{) 1898년 (광무2년)에 창간된 국한문 혼용의 일간신문. 장지연·남궁 억·나수연 등이 의 판권을 넘겨받아 이름을 고쳐 일간 신문으로 내놓았다.은 조약체결의 실상을 보도하고 장지연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 을 게재하여 국민의 항쟁을 호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정간 당한 뒤에도 · 등이 계속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각 지방의 조약 폐기운동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야의 인사들은 연이어 조약을 파기할 것과 매국 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으며,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상가는 철시하였다. 특히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 뒤를 이어 조병세·홍만식 등 순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한편 열사들에 의한 항일의거가 계속 일어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은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있었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하였다.(1908)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사망케 하였고(1909),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1909).이와 같이 한민족의 저항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으로 확대·계승되어 갔다. 이러한 민족운동이 특히 뚜렷한 움직임으로 연결된 것이 무력으로 일제와 항전한 의병의 항일구국전쟁과 개화사상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배양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이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활동 = 고종 31년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이 진행된 이래 조선의 정치·사회는 대내적으로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린 상태였다. 18사건.
(1) 영국 혁명◑ 신분제 의회 :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하에서는 봉신이나 고급 성직자들이 국왕의 회의에 참석하여 자문에 응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를 주종 제도에서의 충언의 의무라 하였다. 따라서 봉건 제후들도 그들의 신하를 의무적으로 봉건회의에 참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니, 이 회의에서는 친목적 문제 외에 전쟁과 평화의 문제, 새로운 신하의 서임, 또는 신하의 결혼 등 중요한 정책과 문제들이 제기, 토의되었다. 이러한 봉건적 관습이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신분제 의회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중세 말에 관료제 정비, 군대 확충, 궁정의 사치 등으로 왕실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국왕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과세액을 증진시킬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소집된 것이 성직자, 귀족,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였던 것 이다. 이 회의에 모인 대표들은 국왕의 과세에 협조하는 대신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왕권을 견제하게 되었다. 중세 말 이후의 여러 변화로 국내외적 정치가 복잡해짐에 따라 국왕은 조세 이외에 내정 및 외교상의 문제에도 신분제 의회의 자문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영국의 의회, 프랑 삼부회, 독일의 제국 의회, 에스파냐 코르테스 등이 바로 이 신분제 의회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시민 혁명의 발생나는 법률과 체제가 인간 정신의 진보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 정신이 점차 발전되고 더욱 계몽되며,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며 풍습과 의견이 환경의 변화와 함께 변화함에 따라서 제도도 또한 진보하고 시대와 병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문명된 사회를 야만인적인 선조들의 지배 밑에 두도록 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 어렸을 때 입던 외투를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근 유럽을 피로 물들게 하였던 것은 이러한 생각이었다. 그들의 군주들은 점차적인 상황의 변화에 현명하게 양보하고 진보적인 개선에 대해 진보적으로 대처하는 대신에 낡은 악습에 얽매어 그 뒤에 자신들을 숨기고 밑에1646년 6월 왕당파의 근거지인 옥스포드가 점령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찰 스 1세를 영국 의회에 넘겨주었고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마침내 처형되고 말았다. 영국은 군주제 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의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 즉 청교도였기 때문이다.진정한 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오로지 신에게만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군주는 법률을 제정하여 이에 효력을 부여하는 존재로서 법률을 초월한 자다. 국가의 다른 모든 권력자들은 국가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으며, 군주에게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다. - 제임스 1세의 에서☞ 제임스 1세(재위 기간: 1603∼25)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는데, 영국 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가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왕위에 올랐다. 위의 글은 그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있을 때 쓴 논문으로, 여기에 담긴 그의 정치적 견해는 그의 아들 찰스 1세에게 계승되었다.◑ 권리 청원 : 제임스 1세 시대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국왕과 의회 사이에 긴장은, 결국 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기간: 1625∼49) 때에 폭발하고 말았다.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하고 기부금을 내지 않는 귀족은 감옥에 넣고 세금을 못내는 가난한 사람들은 군대로 끌고 가고, 경비를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민가에 분산시켜 먹고 자게 하였다. 찰스 1세는 전쟁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개최하였다. 의회에서는 찰스 1세의 전제 정치에 반발하여 왕에게 을 제출했는데 중요한 내용은 1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2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3국민은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4평화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없다 등이며 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헌정 발달상의 3 대 문서중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소 제정하였다. 그 해 5월에 발표된 이 선언은 바로 앞의 결의와 법률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크롬웰(Cromwell ; 1599∼1658) : 영국 동부의 젠트리(부농층) 출신으로 경건한 청교도였다. 의원으로 의회 내의 독립파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New Model Army)를 이끌고 국왕군을 무찔러 혁명의 주도권을 잡았다. 신흥 자본국가와 자영 농민을 중핵세력으로 하는 독립파는 48년 의회를 독점하고 49년 국왕을 처형하여 '자유 공화국'을 선언 하였다. 53년 통치 장전을 제정하여 크롬웰은 종신 호국경이 되어 독재 정치를 하였다. 58년 그가 사망하자 엄격한 청교도적 정치에 실증을 느낀 국민의 환호 속에 60년에는 왕정 복고가 이루어 졌다.◑ 항해 조례 : 는 크롬웰이 지배하던 시기에 발표되었지만, 그는 이 조례의 제정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발상을 한 것은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다.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에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영국상공업과 해운업을 육성하려는 것으로 주된 내용은 (1)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에 상품을 운반하는 선박은 영국이나 식민지 소속 선박이어야 하며 (2) 유럽 내의 상품을 영국에 수출하는 경우 영국 또는 상품 원산지 소속 선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전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이 승리하였다.우리 나라의 해운업은 신의 고마우신 섭리와 보살핌에 의해 우리 나라에 평안과 복지를 가져다주는 중대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확장시키고 장려하기 위하여, 지금의 의회는 그 권위를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사항을 제정한다. 즉 1651년 12월 1일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지이건 다른 나라의 식민지이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각 지역이나 또는 그 각각에 딸린 섬에서 자라나고, 생산되고, 제조되는 물자들이 우리 나라에, 혹은 우리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다른 지역이나 식민지에 수입되는 경우에, 그것을 운송하는 선박은 그 정식 선주가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이거나 그 식민지의 백성이어야 하고, 또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국왕으로 영접되었으나, 크롬웰과 싸워서 패배하고 재차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프러텍터리트 붕괴가 있은 후 멍크의 실력에 의지하여, 1680년 브레다 선언 직후 귀국하여 왕정 복고를 실현시켰다. 클래렌던을 중용하고, 국교 재건, 기타 브레다 선언을 파기하는 정치를 강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외 정책에 있어서는 특히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수행하고, 경제 정책에서는, 크롬웰의 정책을 답습하였으며, 생활을 위하여서는 왕령까지도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래렌던 실각 후에는 커밸에게 정무를 담당시켰으나, 중요 문제는 직접 다루었다(이를테면 도버 밀약). 이러한 보수적·전제적인 태도가 의회를 자극하여, 심사율과 인신 보호율의 성립을 보게 되고 카톨릭 교도 배척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과학 진흥에 뜻을 두어 왕립 협회의 창립에 협력하였다.◑ 심사령(Test Act, 1672) : 찰스 2세 때 영국 의회가 제정한 종교 관계의 법령. 1661년 기사 의회를 통과한 클래랜던 법전은 카톨릭 교도 및 비국교도의 억압을 기도한 점에서 국왕의 카톨릭시즘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그런데 찰스 2세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의 도버 밀약에 따라 1672년 특별 사면권을 행사하고 비국교도에 대한 형벌을 정지하는가 하면 또한 카톨릭 교도의 해방을 획책하였다. 의회는 이에 강경하게 반항하여 이를 철회하도록 강요하고 심사령을 성립시켰다.(왕권에 대한 의회의 우위). 이로써 모든 문무관은 영국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화체설(化體說) 반대 선언에 서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고 사실상 카톨릭 교도 및 그 밖의 비국교도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이것은 자주 정치상 의 분쟁을 일으켰으나 1828년에 폐지, 다음 해에 카톨릭 해방령이 발포되기에 이르렀다.◑ 인신 보호령(1679) : 영국에서 찰스 2세 때 발포된 법률로 왕정 복고에 의해 옹립된 찰스 2세가 반동적이고도 의회를 무시하는 처사가 많았으므로 이에 대항한 의회측에 의하여 발포되었다. 그를 악화시켰다. 1628년 6월 Edward Coke가 기초한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승인했지만, 다음 해에 의회가 '국왕이 교회 정책을 변경할 수 없는 한 관세의 승인을 거부할 것'을 결의한 것에 대해 11년간 의회 없는 전제지배(無議會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종교 면에서도 청교도를 절대왕정의 저항체로 규정하여 탄압하였며 1637년 Calvin的 장로교회가 주도적이었던 스코틀랜드에 영국교회 예배 의식을 강요했는데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이 개혁에 반대하여 전쟁을 준비했고 Charles 1세도 이에 대해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준비에 필요한 재정 충당을 위해 11년만인 1640년 4월에 의회(단기의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3주만에 해산되었다가, 스코틀랜드 군의 영국 침입 이후, 11월에 다시 의회(장기의회: long parliament, 1640-1653)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의회의 다수가 청교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왕의 측근을 탄핵, 투옥하고 절대주의 권력 기관을 폐지하도록 왕에게 요구하면서, 1641년에 '대간주서(The Grand Remonstrances)'를 채택했다. 이 기간에 Strafford의 수탈에 반대하여 시작된 봉기로, 국민군 지휘권이 문제가 되어 1642년 8월에 의회가 왕당파에 대항한 8년간의 내란이 발생했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청교도 혁명의 직접 원인은 결국 국왕의 절대권 행사에 대한 의회의 저항이라 할 수 있는데 재정 궁핍 해결을 위한 과세 문제와 청교도 탄압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관습법을 무시한 불법적 과세 남용은 중산층 시민까지 자극하여 청교도와의 합동 전선을 유발시켰던 것이다.Ⅲ. 영국 혁명 연구사영국혁명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살펴봄에 있어서 최초로 등장하는 두 학파가 '휘그(Whig)파'와 '토리(Tory)파'이다. 먼저, 휘그파는 혁명시 의회파의 전통을 계승한 지방파로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반권위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런던의 대상인과 도시의 중하층인 그리고, 농촌
Ⅰ. 들어가며사람들은 누구나 예뻐지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구는 비단 여성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남성과 남성 전용 화장품을 보게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인간들의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화장은 옛날부터 존재하였다. 화장의 기원을 살펴보면 미화 수단뿐만 아니라 신분을 표시와 보호 수단 등 다양함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미화수단으로서의 화장에 대해서 삼국, 고려, 조선, 현대라는 흐름을 통해 전반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삼국시대의 화장1. 신라시대의 화장신라 임금이었던 박혁거세는 아름다운 남자였으며, 그의 왕비는 빼어난 미녀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를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은 몸매와 얼굴이 남달리 아름다웠으나 다만 입술이 닭의 주둥이와 같은 결점이 있으므로 북천에 데려가 목욕시켰더니 그것이 빠져 완벽한 미인이 되었다고 한다.이것으로 볼 때 신라시대에 분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으며 미남·미녀였던 그들이 더욱 아름답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또한 신라시대의 한국인들은 깨끗한 몸과 단정한 옷차림을 추구하였고 아름답게 치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미의식의 추구로 인하여 화장품과 화장술의 발달이 뒤따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불교의 전래와 화장불교의 전래와 신라인의 불교 신봉은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1 불교의 교리가 향을 신성시하고, 종교의식에 향을 반드시 사용하는 점, 그리고 목욕재계 를 중시하는 사상으로 인하여 향의 대중화와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2 불교는 특정인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표방하여 남녀노소는 물론 신 분의 구애없는 신자로 포용하였기 때문에, 향수·향료를 신라인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2) 화장과 화장구1 가체중국의 가체보다 장발이고 미발이라서 중국 당나라 여인들이 매우 탐냈다고 한다.이 때문에 국가간의 교역품으로 역시 사치해졌을 것이다. 또한 현재 출토되어 있는 신라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고 사용된 것들이다. 이로 보아 통일 이전에 엷은 화장 위주의 화장 경향이 통일 이후에 다소 화려해진 듯하다.3. 고구려시대의 화장고구려 사람들이 신분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달리 치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5-6세기경에 축조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수산리 고분벽화의 귀부인상을 살펴보면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어 있다. 쌍영총 고분벽화의 여인상과 비교해 보면 수산리 고분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 혹은 시녀로 보임에도 연지화장을 한 모습이다.이 밖에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관 장식, 귀고리, 반지, 팔지, 머리핀(비녀) 등을 살펴볼 때 유물이 많지 않으나 고구려인의 미의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4. 백제시대의 화장백제사람들의 두발형의 다양함을 볼 때 옷치장과 화장 역시 신분에 따라 달리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일본의 옛 문헌 >화장할 줄 모르고 화장품도 만들 줄 몰랐던 일본인들이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의 화장기술과 화장품 제조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그러나 백제 사람들이 사용한 화장품의 종류라든지 화장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지극히 한정된 내용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 문헌 >백제 인들의 화장 경향을 시분무주{) 분은 바르되 연지를 바리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 인들이 엷고 은은한 화장을 좋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렇지만 백제인이 평야지대에 일찌기 정착하여 축적한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중국과 문물교류를 하였을 것이고,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여러 가지 옥의 종류와 형태들이 신라의 그것과 유사하므로 화장문화 역시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믿어진다.Ⅲ. 고려시대 화장통일신라시대에 한국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다소 과 체(體)의 합일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이상적인 여인상이 전시대와 달라졌다.이런 이유 때문에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분 바르고 연지를 그리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으며, 화장한 모습이 화장하기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 보이면 야용(冶容)이라고 하며 경멸하였다. 그러나 누구든지 깨끗한 옷에 청결한 신체를 간직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빗질을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 > 에 소개된 「면지법(面脂法)」겨울에 얼굴이 거칠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 새지 않도록 두껍게 봉하여 네 이레 두었다가 얼굴에 바르면 트지 않을 뿐 더러 운지고 옥 같아진다. 얼굴과 손이 터서 피나거든 돼지발기름( 趾脂)에 괴화(槐花)를 섞어 붙이면 낫는다.이를 통해 피부의 청결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화장품과 화장구백색피부 호상은 남자들 역시 여자와 마찬가지여서 양반 남자들이 분세수를 하였다. 남자들도 향낭을 패용 하였는데, 관리들 특히 승지(承旨)의 향낭 패용은 의무사항이었다. 평상시에는 피부손질 위주인 담장(淡粧)을 주로 하였다.그리고 거울[銅鏡], 족집게, 모시실(얼굴 면도에 사용하였음), 양칫대, 수건, 휘건(머리 묶는 데 사용), 경대, 빗, 대야 등의 화장구와 백분, 연지, 머릿기름, 밀기름, 향수, 미안수 따위의 화장품 등 모두 20여 가지가 등장한다. 이로써 이백-이백오십년 전의 우리나라 여성들이 여러 가지의 화장품과 각종 화장구로 화장했음을 알 수 있다.제조기술 측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화장품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되었다.백분(白粉)의 경우, 분꽃을 집주변에 심어 거둔 씨앗을 그늘에서 말려 맷돌로 빻고 체에 쳐서 만들었다.연지도 홍화를 직접 재배하여 꽃잎을 거두었고, 이를 말려 빻고 비비고 체에 치는 과정을 반복하여 제조하였다.예전에는 한 집안에 여러 대(代)의 가족이 거주하는 대가족제도였으며,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하여 이웃에 살기 예사였으므로 노동력이 풍부하였고, 분업(分業)이 다. 이 무렵에는 하얀 얼굴에 반듯한 이마의 잔털을 제거하고 박가분을 물에 개어서 하얗게 발랐다.화장품은 요즘처럼 화장품의 기증이 세분화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20년대에 동아부인상회에서 제조 발매한 연부액은 살갗을 부드럽게 하는 모범적 부료요, 모범적 수크림으로서 미안수로 손등약으로 바르라 하였고, 겨울연부액 은 세수한 얼굴에, 일한 뒤 손등에., 분바르기 전에, 얼굴 터진데, 기티 얼굴의 잡병에 바르도록 권하고 있으며, 조선부인약방의 금강액 은 여드름, 주근깨, 마른 버짐, 어루턱이에 특효약이라 하였고, 유백금강액 은 최량의 미백소로서 세안후에 한 방울만 바르면 희고 고운 미인이 된다는 등 복합기능을 강조하였다.2. 1930년대이 때에는 이러한 화장품 외에도 가내수공업 규모로 생산된 상표 없는 상품들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었다. 좌상은 시장에서, 손수레 행상들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고객이 원하는 양만큼 덜어서 판매하였다. 크림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북을 둥둥 쳤기에 동동구리므(구리므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 라는 말이 생겨났다.신식 화장품과 아울러 신식 화장법도 도입되었다. 신식 화장법은 재래 화장법에 비하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수의 향내와 비누의 향내가 강렬해졌다. 종래의 쪽머리에서 파마 머리로 바뀌고 치마와 소매의 길이가 짧아졌다. 세칭 뾰족구두(하이 힐)를 신고 양산을 받쳐든 차림이 신 여성의 맵시로 등장하였다.그런데 이와같은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이 기행 및 접대부들에게서 먼저 유행되었고, 일부 신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여염집 여자들에게서는 반발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종래 기생등 직업여성의 치레와 여염집 여자의 치레 구분이 더욱 심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여염집 여인들의 화장색조는 종전보다 더욱 엷어졌다. 한창 젊고 건강할 무렵에는 뺨과 입술이 저절로 물갇고 생각하여 연지 바르고, 얼굴이 희어야 귀티있다고 여겨 분세수하고 백분을 발랐으며, 눈썹 모양에 따라 운에 혁신적인 전환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정부의 화장품산업 육성책으로써 특정 외제품 판매금지법으로 국내에서 손쉽게 판매되던 외제화장품과 불법수입이 다소 줄어들었지만 70년대까지도 무역을 통한 수입보다는 불법수입품이 수입화장품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또한 이 시기에는 부분 화장술이 대두되었는데, 부분 화장품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입술연지로 60년 이후 시장에 출하되었고 62년부터는 아이섀도, 파운데이션, 매니큐어, 마스카라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이밖에 특수화장품으로는 파마 액, 피부표백제, 염모제 등이 출하되었다. 65년을 전후로 외국에서의 화장품관계 정보가 유입되어 새로운 원료의 개발과 화장품 개발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맞이했으며 친유성타입의 제품연구 등 피지막의 역할을 대신하는 물리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정부의 국산 화장품 보호정책에 따라 화장품 산업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색조화장품을 생산했다.부자연스러운 하얀 분 화장에서 자연스런 피부표현으로 바뀌고, 기초 화장을 중심으로 한 피부 표현에 역점을 두고 수정 화장이 더해져 세련된 느낌을 주긴 했으나 인조 속눈썹의 사용으로 꾸민 듯한 느낌을 주었다. 영국 영화의 상영으로 오드리 햅번 등 영화 스타의 모방이 헤어, 화장, 복식에 유행했다.5. 1970년대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메이크업 캠페인으로 색채 화장에 대한 거부인식을 불식시키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되었다. 샴푸, 보디제품, 팩제품 등 화장품 시장의 급성장, 의상에 맞추어 화장하는 토털코디네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이 시기부터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1972년에 복고풍의 의복이 유행하게 되자 화장에 있어서도 복고풍이 나타났다.1976년에는 패션과 함께 동양무드가 가미된 화장이 선보였고, 색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한 색조 올리브 그린, 크림 베이지, 브라운, 오렌지, 블루, 더블, 핑크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8년부터 미용 캠페인의 영향으로 메이크업이 토탈패션의 한 부분으로 조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으며행했다.
△종교개혁△들어가면서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을 때에 교회당 안에 울려퍼지는 소리와 더불어 중세 카톨릭 교회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교황의 일방적인 독재아래 미신적인 신앙으로 시달림을 받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중세 말기에 지식인들이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중세인들에게는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를 듣기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주시는 평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바로 이러한 요구를 루터가 충족시켰던 것이다.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서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북부지방에 이르기까지 전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 16세기 내내 유럽은 대변혁을 맞이 하였다. 이 사이에 국가는 점차적으로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지금까지의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하였으며,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교회의 확장과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등 사회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 났었다.그리고 공격을 받은 카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들을 반격할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더욱 폐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개신교들이 미처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교황권 옹호와 해외선교에 힘을 쏟는 교단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일과 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수 있다. 고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 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묫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비텐베르크의 루터후기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고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선제후 프레데릭도 챨스 5세의 삼촌으로서 자신의 영지내에 대학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할려고 하였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마을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모집했다. 그러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프레데릭은 새로운 교수진을 초청하기를 원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루터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 했으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를 요청받고 어거스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도 하였으며 1511년에는 교단의 업무차 로마를 방문하였다.그의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거룩한 계단에 이르러서 전통에 따라서 무릅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토록 거룩했다는 로마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서 중세적인 제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지 못하도록 했다.그런데 갑자기 루터가 사라졌다. 프레데릭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 시킬것을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였으며, 루터는 바르크부르트에 피신해서 융거 게오르그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했으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영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어떤 의미에서 제2의 영적 고뇌기간이었다고 할수 있다. 루터의 이 기간은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여 동안 영적인 고뇌의 기간을 가졌던 것과 동일한 준비의 기간 이었다.크게 움츠릴수록 더 높이 뛸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개혁에도 적용될수 있었으며, 아마도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 기간을 허용해 주셨는지도 모른다.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 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푸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아우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수 없게 되었다.1)칼슈타트의 개혁운동중세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경건주의적 신앙운동줌으로서 자신의 역활을 충실하게 감당했다.10세때에 베젤에서 바젤로 옮겨서 라틴어 문법, 음악, 그리고 변증학을 배웠다. 1498년에는 베른 대학에 입학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알려졌던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 1500년 부터 2년 동안 쯔빙글리는 비엔나로 옮겨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다. 1502년에는 다시금 바젤로 돌아와서 성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며, 1506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 하였다.글라루스의 쯔빙글리쯔빙글리는 1506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사제로 임직 되었으며, 글라루스의 목회자가 되어 부임 하였다 10년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했고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들을 공부 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그는 글라루스 목회자로서 자연히 용병으로 싸우는 글라루스 연대의 연대소속 목사로 두차례나 이탈리아로 갔었다, 이때부터 쯔빙글리는 용병제도의 위대성을 설교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스위스의 죄악, 악덕, 불신앙성, 외국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데 대해서" 와 "황소의 우화"을 통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공격 하였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이며, 풍자적 이었다. 이곳에서 쯔빙글리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 수사학자, 인문주의자, 도덕주의자라고 말하는것이 옳을 것이다.아인지델른의 쯔빙글리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서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1516년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가로 알려 졌으며, 교부들의 책을 읽었고, 면죄부의 해악성을 설교 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민들에게 마리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쳤으며, 교황청의 악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1516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취리히의 쯔빙글리쯔빙글리는 적이 많았다. 그것도 교리적인 면 보다는에 충분 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그러는 사이에 1536년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 하였으며, 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 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이듬해 1537년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 공중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등 4가지 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 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