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원의 개관 ………………………… 42. 학습 과제 분석 ………………………… 43. 수업 실천 계획 ………………………… 71. 진단 평가 문제 ………………………… 102. 개인별 문항 분석 및 성취도 ………………………… 113. 분석 및 대책 ………………………… 124. 심화 교정 학습 ………………………… 121. 교수 - 학습 과정안 ………………………… 152. 학습자료 ………………………… 171. 형성 평가 문항 ………………………… 412. 개인별 문항 분석 및 성취도 ………………………… 433. 분석 및 대책 ………………………… 444. 심화 및 보충학습 ………………………… 441. 이원 목적 분류표 ………………………… 472. 평가문제 ………………………… 481. 좌석배치표 ………………………… 56UCC를 통한 정보 재구성 능력과 역사적 실천력 신장1. 교수 ? 학습의 설계가. UCC 학습이란?우리가 살아갈 21세기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시대로 새로운 유목민(Nomad)이 등장하여 이동성이 점차 빨라지고 있는 격변기에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육도 교수 중심에서 학습 중심으로, 폐쇄적 교육이 아닌 개방적 탈 제도교육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UCC(user created content) 학습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는 학습자 또는 교수자가 직접 개발한 콘텐츠를 사용한 교수 학습을 말한다. 그 방법은 인터넷, 디지털카메라, 휴대 전화 등 정보통신 분야의 발전에 맞추어, 학생 또는 교사가 통신 분야의 여러 매체(媒體)를 이용하여, 수업의 국면에서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 ? 재구성 하는 것이다.역사 수업에서 UCC를 제작하는 주체는 교사 혹은 학습자일 것이다. 주체가 교사일 경우, 교사들은 UCC 자료를 통해 수업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가꿀 수 있고, 수업 장면에서 활용될 수 있는 효과적인 교수 방법 강구에 더욱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양하면서도 적절한 자료의 제시가 필요한 역사 수업에 있어, 질적 측면의사회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세계사와의 관련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파악하도록 지도한다. 특히, 학생들이 폐쇄적?저항적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고 개방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세계의 다른 민족과 함께 세계의 발전과 인류 문화의 발달에 기여할 수 있는 자세를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6) 학습내용에 따라 문답학습, 토의학습, 탐구학습, 사료학습, 인물학습, 멀티미디어의 활용과 현장 답사 등의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을 통하여 학생들의 능동적인 학습 참여를 도모하며, 학생들이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두고 자기 주도적 학습력을 신장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라. 내용 구조도Ⅲ.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일제 식민통치와민족의 수난3?1운동과대한민국임시정부무장 독립전쟁의 전개사회?경제적 민족 운동민족 문화수호 운동20세기전반의 세계3 ? 1 운동 이전의 민족 운동국내 항일민족 운동민족실력 양성 운동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정책일제의 침략과 국권의 피탈3 ? 1 운동의 전개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활동민족 협동전선 운동국학 운동의전개식민 통치 체제 의 구축과 전개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1920년대 만주 지역 독립군의 활동노동운동과농민 운동교육과종교 활동경제 수탈과민중의 생활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사회 각계층의 자각문학과 예술활동전쟁 동원과군 위안부 징용대한 민국임시 정부와한국 광복군국외이주 동포의 활동 과 시련3. 수업 및 실천 계획단계차시소단원학습내용주학습매체주학습형태지도상 유의점진단1진단평가준비학습선수(8)·사전(2)학습진단평가지개별학습진단학습문항분석 개별적으로 지도선수학습 결손 내용의 교정 및 예습 정도 확인전개2일제의식민통치와민족의수난일제의식민통치와민족의수난20세기 전반의 세계일제의 침략과 국권피탈ppt자료학습지동영상연표개념학습연표학습시청각학습당시 세계의 전반적 상황을 서로 연계시켜 이해 할 수 있도록 격려3식민통치체제의 구축과 전개ppt 자료학습지연표개념학습탐구학습각 시대의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 하도록 함4본시경제 수탈에 대한 보충설명을 한다.-식민 통치 체제 구축과 전개에 관한 내용.·당시 일제치하의 민중들에 관한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학습목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2분20초)·교과서의 학습범위(p156~163)를 제시하고, PPT를 통해 학습목표를 제시한다.ㆍ주변을 정돈하고 자세를 바르게 한다ㆍ지난시간에 학습한 내용을 상기하며, 질문에 대답한다.ㆍ영상자료와 보충설명을 시청하고, 학습내용에 대해서 인지한다.ㆍ식민지시대의 민중의 삶을 알고, 선진국 건설의 인재가 되기 위한 학습이 중요함을 깨닫는다.·PPT·동영상 자료ㆍPPT전개(40)?1910년대의 일본의 국내외적 상황?모둠별 UCC영상 발표?1모둠일제치하의 농민의 삶·PPT를 통해 일제가 식민지 경제수탈 정책을 시행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전 차시 때 부과한 과제에 대해서 발표를 지시 한다.·1모둠의 UCC영상을 재생하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한다.-토지조사사업(1910), 산미증산계획(1920),소작쟁의(1930)의와 관련된 농민의 삶을 극화하여 구성한 영상을 보여준다.(4분)·교사가 제시한 파워포인트를 보면서 설명을 듣는다.·교사의 지시대로 1모둠부터 차례로 4모둠까지 발표한다.·영상을 집중하여 시청한다.-상영 전 1 모둠의 발표자가 UCC영상의 제작의도와 의미에 대해서 발표한다.·PPT·학습지·UCC동영상1. 교수 - 학습 과정안지도단계학습내용교수-학습활동학습자료 및유의점교 사학 생전개(40분)?1모둠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2모둠일제치하의 산업침탈?2모둠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3모둠군위안부 문제?3모둠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4모둠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4모둠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1모둠의 발표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 발문을 통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소작쟁의, 전쟁동원의 목적과 이로 인한 결과를 알게 한다.?2모둠의 UCC영상을 재생하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한다.-산업침탈 내용을 뉴스 형식으로 제작하여 보여준다.(4분)?2모둠의 발표에 대하여 칭찬과 함께 발문을 통해 회사령철폐, 중공업 및 군수공업 육성-아내의 하루)(소작도 잃고, 절망적인 상태. 옥수수랑 콩깻묵만 먹다가, 어젯밤 첫째가 못 먹어 퉁퉁부어 하루 종일 거의 실신해 있는게 못내 걸려, 마지막 비상금을 들고, 쌀을 사러 장터로 간다.)(시장에는 마지막 남은 쌀을 사기 위해, 여러 사람이 싸우고 있어 아비규환이다. 그중 두 아낙의 싸움이 특히 두드러진다.)쌀 판매상 : (큰 소리로)자자, 이건 한 가마에 50원이오. 사기 싫음 말어!군중1 : 쌀구경이 나랏님 구경보다 힘들구만. 무슨 놈의 쌀값이 그리 비싸.이것이 당췌 몇 배로 뛴거여!! 다 일본놈 갖다 주니 그런거 아니여!!!!!(옆에서 몸싸움이 벌어진다.)아낙1 : 이 여편네야. 아까부터 내가 사려고 기다리던 쌀이야. 못내놔.??아낙2 : 쌀에, 이건 누구 쌀이오~ 하고 이름 써져있든? 절대 못줘. 이 쌀은 내꺼야.(뒤에서 5원을 들고 이 상황을 보던 아내는 아무말도 못하며 돌아간다 토지조사령1. 소유권의 주장은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한다.2. 불복자에 대해서는 증거주의를 채택한다.4. 토지의 지주가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그 주소, 씨 명 또는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 사표, 등급, 지적 결 수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한다.5. 토지 소유자나 임차인, 기타 관리인은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안에 토지의 사방 경계의 표식을 세우고 지목 자번호 및 민유지에서는 소유자의 씨명, 명칭을, 국유지는 보관 관청명을 써야 한다. 1912. 8. 13참고2> “토지소유권을 확립하여 재정의 기초를 세우겠다.”재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토지 소유권을 정하는 방법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지 면적은 뿌리는 종자의 수량에 따라 두락이라 하거나, 우경(牛耕) 1일을 표준으로 하여 일경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지방에 따라 넓고 좁기가 고르지 않다. 토지 재산권은 대전회통과 몇 년 전에 발표한 토지 전당 규칙, 토지 가옥 증명 규칙, 국유 미간지 이용법, 토지 가옥 소유권 증명 규칙 등으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 이와 유곽으로 가고요―.☞ 다음 노래들을 통해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을 느껴 보자.** 내용정리 **1. 조선땅 빼앗는 토지조사사업 - 1910년대(1)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 : (토지조사사업)(1912-1918)① 명분 : 토지 소유권 보호, 토지 생산력 증진② 목적 : 전국적 토지 약탈 → 식민통치의 기반 마련(토지세 안정적 확보)③ 과정 : 토지 조사령 반포 → 기한부 (신고제)④ 문제점 : 홍보부족, 절차 복잡, 신고 기피 - 공공기관 소유 토지, 문중 토지 등 신고 불가능④ 결과 : 전 국토의 약 40% 탈취→약탈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 이민 노동자에게 헐값으로 불하 ?소작인의 (도지권) 부정, 영구 임대 소작권 부정→농민 경제 파탄→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농민의 국외 이동 증가, 지주의 사유권인정→지주층의 토지소유강화.2. 쌀 수탈을 목적으로 한 산미 증식 계획 -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1) (산미증식계획)(1920-1925, 1926-1934)① 목적 : 일본 공업화 추진에 따른 부족한 식량 착취② 명분 : 토지와 수리 시설, 종자 등의 개량을 통해 농민 생활 안정③ 결과 : 증산량은 목표에 미달, 그러나 미곡 수탈은 목표대로 수행④ 수리조합비, 종자 개량,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 농민에게 부담식량 부족으로 만주산 잡곡으로 연명→ 농민은 이중의 고통3. 일본의 조선 지배(1) (회사령)(1910) : 기업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함, 허가조건 위반시 총독의 해산 명령⇒1918년 조선인회사 63개, 일본인 회사 289개 허가(2) 회사령 폐지(1920)① 일본 자본이 조선에 자유롭게 들어 올 수 있도록. 제사, 면방직, 식료품 등 중소 자본이 중심.(3) 산업 침탈 강화(20년대)①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 철폐 → 직물, 의류, 기계 등 유입으로 조선의 공업 기반 타격② 신은행령 발표 → 조선인 은행 강제 합병 ⇒산업 전반에 대한 지배 강화(4) 산업 침탈의 결과① 1920년대 조선 전체 자본 가운데 70%가 렸다.
《중세 스콜라 철학》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스콜라 철학의 일반적인 개념2. 각 시기별 발전과정1) 초기 스콜라 신학2) 중기 스콜라 신학3) 후기 스콜라 신학3. 보편논쟁 : 실재론과 유명론4. 보편논쟁과 교리와의 관계5. 신앙과 이성의 문제1) 신존재 증명Ⅲ. 결 론【 참고문헌】Ⅰ. 서 론중세는 기독교 철학이 중심이 되어 모든 사상이 신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시기이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로마 국교로 승인(313)되고, 교부철학자들)에 의하여 교리를 갈고 닦은 기독교는 마침내 중세사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의 사도들이나 초대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그 자체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복음에 대한 여러 가지 공격들에 대항하여 유대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를 변호하고,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에게는 기독교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이교도의 사상보다 더 참다운 예지와 심오한 사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또한 영지주의 등 이단사설들을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 교의를 체계화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증대되었다.그런데 사도들이나 초대 교부들의 저작 속에서 이미 희랍 철학으로부터 채용된 용어나 관념들, 구성방식 등을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초대 교부들이 기독교 교의들을 체계화할 때 플라톤주의적 사상)을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가 계시를 전제로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하려는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에도 신앙으로 수납된 계시의 내용을 철학으로부터 빌어 온 용어들로 이 교의들을 서술하고, 그 교의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을 논리적 추론에 의해 전개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콜라 신학이다. 즉 스콜라 철학이란 중세의 교리를 진리로 삼고 이를 전제로 하여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럼 지금부터 기독교의 신앙과 고대 희랍의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론을 결합시켜 이것을 완성, 합리화시킨 스콜라철학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그 다음 세기에 다시 학문적 풍토가 조성이 되고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신학은 보편의 문제, 신의 존재 증명, 신앙과 이성의 영역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골몰했다. 그 당시 서방 신학계의 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포함한 변증법을 이용하여 그들의 신학 활동을 발전시켜 나갔다.이 시기에는 아랍과 유대의 철학이 발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들의 활발한 연구는 12-13세기에 이르러 스콜라 신학을 꽃피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뛰어난 사상가로는 Avicenna를 들 수 있는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를 결합한 창조론의 견해는 13세기에 이르러 스콜라 신학에 있어 격론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 철학에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Moses ben Maimonides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견해는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에는 보편문제와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느냐에 따라 의견이 엇갈렸는데 특히 보편 논쟁은 Boetius에게서부터 출발하여 몇 세기 동안 스콜라 신학의 중심 문제로 부각하였다. 극단적 유명론자로는 Roselin을 들 수 있으며 실재론자로는 성 빅토 수도회의 창시자인 샹포의 윌리엄을 들 수 있으며, 이 양극단의 입장을 절충한 사람으로는 Peter Aberard를 들 수 있다. 보편 논쟁에 관해서는 따로 논하기로 한다.2) 중기 스콜라 신학(12세기 중엽 - 13세기 말)초기 교부시대, 특히 터툴리안에서 보듯이 신학과 철학의 극단적인 구분은 12세기 이래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13세기의 학자들에게 철학과 신학은 동일하거나 적어도 조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기독교가 이교도의 사상과 구별되는 자체의 철학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3세기의 학자들은 명실공히 신학적 체계를 이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파악한 신학바 주의주의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지였지 그의 이성이나 마음이 아니라고 하여 이성보다 의지를 앞세웠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성육신과 십자가형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라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오캄에 이르러 신앙과 이성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실재론의 본질인 전칭명제(보통명사)의 실재를 강력히 배척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봉자였던 그는 그 철학자의 원리들을 두려움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적용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는 스콜라 신학자들이 채택한 논리와 이성을 통해서는 기독교 신앙 내용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존재 역시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기독교 교의들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를 통해 스콜라주의가 긍정하고 있는 위대한 교의들의 확실성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던 노력이 실패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셈이 되었다.3. 보편논쟁 : 실재론과 유명론보편논쟁은 스콜라철학 시대 전반을 걸쳐 가장 중요하게 논의된 문제이다. 보편자의 문제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활동했던 보에티우스가 포르피리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에서 제기된 문제를 거론한 이후 500년이 지난 후에 다시 큰 논란이 되었다. 그이유는 그것이 교리적인 문제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문제의 논점은 정신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은 개체적이고 무수한 반면 정신 내에 있는 대상은 단일하고 보편적인데, 바로 그 인간 사유의 대상과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 이나 책 과 같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관에 의해 관찰하는 현실적이고 개체적인 사람이나 책을 가리킬 때 쓰인다. 우리가 '철수 나 영희를 보지만 보편자인 사람 을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개체를 볼 때 우리의 정신은 그것을 어떤 종(種)으로 수세기에 걸쳐 보편논쟁이 오랜 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던 이유는 보편과 개체의 문제가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의 교리 및 그 체계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정통 교리와 부합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할 정도로 교리의 근거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보편의 문제에 있어 실재론과 유명론은 기독교 교리와 관련하여 너무도 큰 중요성을 가졌다. 실재론은 정통 기독교 교리의 근거를 확보해 줄 수 있으나 유명론은 기독교의 근간 교리를 뿌리 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예를 들어 원죄설을 설명하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실재론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원죄설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은 개체로서의 죄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 해당하는 인간의 대표로서 범죄한 것이며,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의해 이미 인간 혹은 인간성의 실체가 영향을 받고 오염되었으며 그 후의 모든 세대는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5장에서 대표자, 즉 보편의 원리로 원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따라서 실재론이 부정된다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단순히 그들 개체로서의 범죄로 끝나게 되어 그들의 범죄로 인한 인간성의 타락과 능력 상실, 그리고 죄의 유전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바꿔 말해 유명론에 따르면 낱낱의 죄만이 실재적이기 때문에 원죄는 인간의 목소리에 의해 전달된 인위적인 빈 말에 지나지 않게 된다.교회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어떤 확실한 유사성을 가진 개별적 제도들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모든 개별 교회들 이전의 이상적인 형태이며 개별 교회는 교회의 본성을 예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톨릭 교회는 단순한 신자의 집회가 아니라 신자에 선행한 권위적 실재로서 진실로 신이 만든 제도이다. 그러나 개별자만이 실재적이라는 유명론에 따르면 참된 보편적 교회는 있을 수 없으며 교회는 한낱 인간이 만든 제도에 불과한 것이 됨은 물론이고, 보편교회는 다만 단순않는다. 왜냐하면 이성과 믿음은 둘 다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충돌할 수 없으며, 감각기관과 이성을 통해 도달된 지식은 계시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 믿음으로써 터득한 진리와 모순 될 수 없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신적 계시 가운데 포함된 몇몇 진리들을 증명할 수 있으며, 이성이 증명을 꾀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신비들의 경우에도 초이성적 혹은 초합리적인 것이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증명이 가능하다.14세기 Duns Scotus와 William of Ockham에게는 신의 존재는 신앙의 문제이며, 이성의 영역은 경험세계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철학의 주제와 관심사는 신학의 그것과는 구별되었다. 종교적 지식은 철학에 의해서 획득될 수 없으며 신의 조명 혹은 계시의 산물이라고 하였다.1) 신존재 증명어떤 의미로든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인정하는 한에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존재 증명이라는 하나의 논증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세 스콜라 신학에 있어 신존재 증명과 관련해 두드러지는 신학자는 안셀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이다.(1) 안셀름의 신존재 증명안셀름의 신존재 증명 방법은 일반적으로 본체론적 증명이라고 불리 운다. 그는 하나님이 절대적 완전자, 즉 그 이상으로 큰 존재는 생각될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된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단순히 정신 안에 관념으로만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는 즉시 더욱 완전한 존재, 즉 단순히 정신 안에 관념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현실적인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주여, 숭고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결코 나는 나의 이해력을 숭고함과 비교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로는 내 마음이 미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한 이해할 수 .
1910년대 일제의 침략정책과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1. 머리말2. 국내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3.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과 특징4.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도의 전개 양상과 특징5. 맺음말1. 머리말포스트모던 역사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문화사나 미시사, 일상생활사 등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여성사나 하층민, 소수인종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에 입각한 역사서술은 기존의 지배층 위주의 역사나 제도사에서 벗어나 민중의 역사, 생활사 등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그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서술은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보다는 관점이나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지난 날의 잘못된 역사를 합리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하며,) 개별 인간들의 미시적인 내용만을 다룸으로써 개인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장기 지속적 특성을 지닌 구조의 틀을 간과할 수 있다.그래서 이 레포트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방식을 벗어나 기존 한국 역사학의 방법을 따라서 일제 강점기 중 소위 ‘제1기’라고 불리 우는 시기(1910~1919) 때) 나타난 일제의 통치 방식과 이에 대한 저항의 모습인 국내·국외 독립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인간 삶의 큰 영향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다시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 시대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2.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경술국치 이후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 모색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제로 倂呑하여 식민지로 만든 뒤, 한국 민족의 끈질긴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무단 통치 정책을 강행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군사 계엄 통치로서 근간을 이루고 있던 것이 헌병경찰제였다. 1910년 9월 10일 반포된 에 의해 창설된 헌병경찰제도는 헌병이 일반 경찰의 업무를 장악하고 그를 지휘 통솔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한말에 이미 한국1719)에 만들어진 舊양안을 토지소유권 사정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럼으로써 일제는 1719년 이후 국유지와 미간지에 발생된 농민의 私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보다 많은 토지를 국유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해서 일제는 1919년 2월 현재 102만여 정보의 미간지를 포함한 총 137만여 정보의 토지를 국유화하였다.) 일제는 이 토지를 직접 경영하거나, 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불이흥업주식회사 등 식민 농업 회사와 일본인 이주민에게 불하하여 소작제로 경영케 함으로써 식민지 농업 수탈을 감행해 갔다.안정적 식민지 지배를 위한 통치기반의 구축이라는 토지조사사업의 둘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지주 우대 정책이었다. 일제는 기존 봉건지주의 기득권을 인정한 위에 소작지에 발생한 소작인의 채권적 권리인 賭地權을 부정하여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강화해주었다. 나아가 소작지에 대한 소작인의 관습상의 경작권마저 부정하여 지주의 고율 소작료 징수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봉건지주는 그대로 식민지 지주로 온존되어 식민통치체제 안정의 사회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다. 반면에 농민 대중은 국유지에 형성된 사적 소유권과 소작지에 발생한 도지권, 그리고 미간지를 개간하여 소유할 수 있던 개간권이 부인되어 자영농민으로의 성장이 봉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으로 소작지를 경작할 수 있던 관습상의 경작권과 국유임야에서 땔감이나 퇴비의 재료를 구할 수 있던 入會權 조차 박탈되었다. 이제 한국 농민은 완전 무권리 상태의 소작 농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따라서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한 대규모의 토지 약탈과 농민의 諸권리 부인은 한국 농민 대중의 항일의식을 고조시켜 갔고, 그러한 객관적 조건은 3·1운동이 발발하자 농민대중이 자발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대중운동으로 확대시켜 간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직후부터 일제는 한국인의 완전한 일본인화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식민 교육 정책을 펴나갔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1911년 8월 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914년 府·郡·面 통합을 계기로 신분적·경제적인 지위가 떨어지는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덕망·자산·세력을 기준으로 면내 영향력 있는 인사를 면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통치의 동반자로 면장들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洞·里를 통폐합하여 향촌 말단의 자율적인 기반까지 흔들어 놓음으로써 지방사회에서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갔던 것이다.)1917년 6월 면제와 면제시행규칙이 공포되고, 같은 해 10월부터 시행됨으로써 면은 법적으로 식민지 행정의 말단 기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자치적 洞·里는 면으로 흡수되었는데, 그것은 농민에 대한 일제 식민 통치 권력의 관철과 직접적 지배체제의 수립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과 특징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은 1910년대 무단 통치의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한말부터 의병전쟁을 전개해 왔던 의병부대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다수의 의병부대가 중국 만주와 노령 연해주로 이동하였지만, 未해산 잔류 의병부대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지역에서는 延基羽 의병부대와 姜基東 의병부대가 각각 20~30명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포천지방을 중심으로 산악지대에 출몰하면서 1911년 2월까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또 蔡應彦 의병부대와 李鎭龍 의병부대도 황해도와 경기 북부지역에서 일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 우편차를 탈취하는 등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鄭敬泰 의병부대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인근 지방 농민들과 연계를 맺으며, 울진·양양·봉화등지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고 통신시설을 파괴하였다. 이밖에도 소맥산맥을 중심으로는 李康錫·李學魯 의병부대, 함경도에는 朴永信 의병부대, 평안도에는 韓應貞·金在化·洪錫俊 의병부대, 전라도에서는 李錫庸·鄭世昌·金學俊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펼쳤다.) 이러한 未해산 잔류의병부대의 유격전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3·1운동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그것은 3·1운동을 평화적 만울러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일본인 고관과 친일부호 및 친일 관리 등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그리하여 경북 漆谷의 친일부호인 張承遠과 충남 牙山의 친일관리인 도고면장 朴容夏 등을 처단하다가 3·1운동 바로 직전인 1918년 6월 일제에 의해 발각 붕괴되었다. 이와 같은 대한 광복회의 혁명적 활동과 공화주의 이념은 3·1운동 과정에서 전국에서 행해진 친일파 응징과 일제 식민 통치 기관 공격 등 폭력적이며 혁명적인 대중적 시위운동의 주체적 역량으로 작용하였다.1910년대에 각급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비밀리에 행해졌던 민족 교육 운동도 3·1운동을 추진·전개하는데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일제는 1911년 8월 23일 을 반포하여 한국 민족의 ‘충량한 국민화(황국신민화)’를 획책해 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 민족은 가능한 모든 공간에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즉 한말부터 민족계몽운동을 펴왔던 南宮檍은 1910년대에 ≪조선이야기≫라고 하는 역사책을 지어 培花여학교 학생들과 尙洞 청년학교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교육하였다. 그리고 無窮花 刺繡를 창안하여 가사시간에 무궁화 모양으로 한반도를 수놓게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한 시도 잊지 않도록 하였다.또한 1916년 開城의 韓英書院과 好壽敦 여학교에서는 이라고 하는 애국 창가집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가사는 “일본의 곡식은 먹지 않고 의연히 굶어 죽은 최익현의 절개를 우리는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등 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민족의 영웅에 관한 것들이었다.결국 1910년대 각급 학교에서의 민족 교육운동은 3·1운동의 전파와 확산에 학생층이 전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주체적 역량이 되었다. 초기 추진 단계에서부터 교사와 학생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중운동으로 3·1운동을 폭발시키고, 각지에 3·1운동을 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자기 고장의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하여 전개하고, 나아가 시위대를 선도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할 동력으로쳤다. 1910년대 해외독립운동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여름을 전후로 하여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1910년대 특히 전반기의 특징은 해외각지에서 각각의 한인사회를 통합한 자치기관적 성격의 조직이 결성되어 당국의 승인을 받아 한인사회의 제반문제를 통일적으로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즉, 미주지역의 대한인 국민회, 러시아 지역의 권업회, 북간도 지역의 간민회가 그 대표적인 한인 자치기관의 위치를 확보하였던 것이다.우선 미주지역을 보면, 미주 한인 사회의 통일적 중앙기관으로서 1910년 5월에 출범한 대한인 국민회는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의 지방총회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미국 정부는 1914년 4월 이후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를 한인을 대표하는 독립적 자치기관으로 공인하여 한국의 영사관업무를 비롯한 한인관련 제반업무를 담당케 하였다.)러시아지역의 경우에는 1910년 8월의 ‘한일합병’ 반대운동으로 러시아 당국이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합병반대운동’을 주도한 이범윤 등을 이르쿠츠크로 유배조치 하는 등 일시적으로 탄압적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미국과의 연계를 의심받은 합법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국민회에 대신하여, 권업회가 러시아 당국의 공식승인을 받아 1911년 12월 19일에 창립되었다. 권업회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한인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입적장려사업, 실업활동, 인구조사 등 자치업무를 하였으며, 기관지로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다.)미주지역이나 러시아 지역에 비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커서 상대적으로 민족운동세력이 약했던 만주지역의 경우 북간도 지역에서는 한민교육회(1910년 3월), 간민교육회(1910년 9월), 간민회(1913년 2월)이 중국당국의 공식승인을 받아 한인자치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간도지역에서는 경학사 (1911년 여름), 부민단(1913년 가을)이 조직되어 한인자치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경학사와 .
훈족의 위대한 지도자『아틸라』우리들에게 한편 친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기만한 이름 훈족과 아틸라, 훈 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하며 당시 유럽 인들을 공포로 몰고 갔던 유목민족으로, 5세기 전반 ‘아틸라’라는 위대한 전사의 등장으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2001년에 딕 로리감독에 의해 만들어지고, 제라드 버틀러가 아틸라역을 맡은 영화 는 서기 5세기 유럽 정치권력의 두 축인 훈 족과 로마제국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아틸라를 소재로 한 서양의 소설과 오페라 ? 영화 등과 달리 아틸라를 인간적이고 용맹하며 지혜로운 인물로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작품이다. 또한 제라드 버틀러라는 배우가 영화를 보게 만든 한 요인이기도 헸다. 에서는 안젤리나 졸리의 상대역으로 등장하여 인상 깊은 연기를 보였으며, 특히 에서는 팬텀역으로 등장해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가장 큰 옥에 티를 말해보면 우선, 제목이 이다. 원제는 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마도 를 의식해서인지 제목을 이렇게 지어버린것 같다. 검투사는 검투경기장에서 싸움을 일삼는 노예를 지칭하는 것인데, 아틸라가 로마의 노예였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또 다른 옥에 티는 ‘아틸라’역을 맡은 제라드 버틀러가 전형적인 서양의 잘생긴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당시의 고트족의 사가나 아틸라에게 사신으로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나오는 아틸라의 모습은, ' 땅딸보에 작은 키, 지나치게 큰 머리에 거무스름한 피부, 너무 깊이 들어가서 작아 보이는 눈, 납작코, 성글게 난 턱수염, 떡 벌어진 넓은 어깨, 균형 잡히지 않은 몸매, 맵싸보일 정도로 넘쳐 보이는 기력, 위압적인 걸음걸이와 태도, 맹렬하게 눈망울을 휘두르는 버릇, 성마르고 고함을 잘 치며 사나운 성미 '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서에 나온 아틸라의 용모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모습으로써 영화 속에서의 서양적인 미중년과는 좀 거리가 멀다. 영화 속에서 실제 아틸라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무수한 조연급들로 등장한 훈족 전사들에게서나, 혹은 차라리 아틸라의 수하인 오레스테스의 모습이 어울리는 것 같다.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4세기 경, 로마 제국에 접한 유라시아 평원에 새로운 민족이 등장했다. 궁술, 승마, 그리고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유명한 유목민 훈족이었다. 부족들 간의 느슨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훈 족은 로마에게 귀찮기는 하나, 위협적이지는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들을 통합, 제국을 건설함으로서 이들은 로마의 적수로 떠올랐다. 이 지도자가 바로 훈 족의 아틸라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족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훈 족이 전투력으로 주변 부족들을 약탈하는 생활에 안주하고 있을 때, 아틸라는 로마 제국을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갈구했다. 그는 제국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 냉혹하게 버려진 소년 아틸라는 빠르게 성장했다. 삼촌인 루아의 양자가 됐을 때, 아틸라는 이미 단련된 전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의붓 형제 블레다는 그의 라이벌이었다. 그들의 증오는 블레다가 노예 소녀 엔카라에 대한 아틸라의 마음을 알아챘을 때 극에 달한다. 그들은 정치적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 원한까지 지게 됐고, 아틸라는 예언자인 갈렌과 함께 복수를 논한다. 갈렌은 모두가 무시하는 난쟁이였지만, 아틸라는 그녀를 친구로 대했다. 갈렌은 아틸라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운명을 타고났으며, 다들 그를 다시는 등장하기 힘든 훈 족의 전설로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곧 훈 족을 통합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녀는 아틸라에게 신이 당신을 선택하셨으니 때를 기다리라고 이른다.아틸라는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눈에 띈다. 아에티우스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제국과 고락을 함께 한 장군으로, 제국의 번영을 위해 헌신했으며, 로마의 유일한 구원자이기도 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과 우호관계를 쌓고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들의 관계는 미묘한 것으로, 상호 신뢰와 호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세계를 나눠 가질 수 없다는 경쟁 심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로마로 불러내 야심이 큰 공주 아너리아를 만나게 한다. 하지만 아틸라는 자신의 민족과 함께 해야 함을 깨닫는다. 루아 왕이 독살 당하자, 아틸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블레다와 결투를 벌여 승리한다. 엔카라를 되찾고 부족의 지도자가 된 아틸라는 그의 지배 아래 훈 족이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는 예언을 실현코자 한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엔카라가 출산 도중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아틸라는 주변의 나라들뿐 아니라 다른 훈 족들까지 정복하며 세력을 넓혀 나간다. 아틸라는 정의나 연민보다는 '내게 무릎 꿇는 자는 살리고, 저항하는 자는 죽여라!'라는 자신의 신조를 따랐다. 결국 그는 로마보다 더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와 핀란드에서도 공물을 보내왔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거액의 돈을 바쳤다. 이제 남은 지역은 서로마 제국뿐, 아틸라의 친구이자 적수인 아에티우스의 나라였다. 아틸라의 세력이 커져갈수록, 암살 시도가 빈번해졌다. 아틸라는 사랑했던 엔카라와 너무도 닮은 여인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 여인이 숨기고 있는 음흉한 계획은 알지 못한 채... 마침내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고, 아에티우스와 서구 문명의 향배를 가를 최후의 결전, '샬롱의 전투'를 치른다.
근대 중국의 비밀결사(秘密結社)200112582 장우연Ⅰ. 머리말주윤발, 장국영, 양조위 등의 이름을 들으면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단어는 “홍콩영화”이다. 특히 90년대 초반 “영웅본색”시리즈와 “천장지구”시리즈를 필두로 ‘홍콩느와르’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내면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범죄조직의 대명사가 있는데 바로 “삼합회(三合會,triad)” 이다. 삼합회는 동남아시아 굴지(屈指)의 범죄조직으로서, 마피아, 야쿠자와 함께 새계의 3대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신문의 외신 난에도 등장하는 삼합회는 중국의 대표적인 비밀결사의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서 비밀결사는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범죄조직 혹은 정치결사가 아니라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위한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탄생하였다.역사적으로 중국의 비밀결사는 중국 역대 왕조의 민중반란 혹은 20세기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가 권력은 이단적이고 비합법적인 비밀결사를 금지했지만 비밀결사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계속 지속되어왔으며, 그 뿌리는 현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 비밀결사의 역사와 현재는 중국의 전통이 현대 중국에서 어떻게 지속되고 변화하는가, 또한 그 과정에서 민중의 생존방식은 어떻게 변모하였는가 등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본 발표문에서는 중국 비밀결사의 큰 흐름인 교문(敎門)과 회당(會黨)의 역사를 알아보고, 역사적 흐름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비밀결사’의 계통중국 민간 비밀결사를 지칭하기 위하여 현재 흔히 사용하고 있는 ‘비밀사회’(秘密社會)나 ‘비밀결사’(秘密結社)라는 용어들은 사실 중국이 근대로 접어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20세기 초 서구의 ‘secret society'를 일본인들의 번역을 매개로 하여 도입한 용어였다.따라서 본 발표문에서 ‘비밀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단체들을 敎(이단적 종교결사)와 會(세속적 결사) 라고 이러한 지역적 차별로부터 북교남회(北敎南會)라는 관습적 용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19세기 중기 이래 전 중국에 걸쳐 종교 결사와 세속적 결사가 서로 결합하는 사례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20세기가 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한 상황을 보인다.그러나 이 모든 지리적 혼합과 특정 조직간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비밀결사는 원리적으로 종교결사(교문)와 세속적 결사(회당)라는 상이한 두 체계를 유지해 왔다.Ⅲ. 敎門계열 비밀결사-백련교의 난교문의 뿌리를 백련교에서 찾는다면 모든 종교결사의 기원은 사실 백련교의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련교는 元末 그때까지의 불교의 이단유파 백련종(白蓮宗) 및 제반기타종교, 즉 明敎, 미륵교(彌勒敎), 등의 영향 하에서 형성된다.백련이라는 명칭은 南宋초 출현한(1133)바로 이 백련종에서 취하여 왔던 것이지만, 백련교의 등장은 원말의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元朝는 한족에 대하여 몽고인 우위라는 종족 차별정책을 실시했고, 원말의 생활수준은 지극히 악화일로를 걸었다. 한족 하층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말세론과 구세주의에 귀를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백련교는 ‘彌勒佛下生’)을 기치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말에 홍건적(紅巾賊)이 조직한 거의 모든 반란과 집단행동은 백련교에 의해 지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원말기를 기점으로 백련교는 이제 불교와 기타 종교의 단순한 교리상의 이단파임을 넘어 민중적 ‘종교결사’로 재탄생하게 된다.명 중기에 이르면 교문계 비밀결사는 유민(遊民)을 기반으로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발전해 갔다.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뿐만 아니라, 그와 기원상의 관련을 갖지 않는 다수의 새로운 결사들이 출현했다. 萬曆(1573~1620)말기에 종교결사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고 당국은 이를 통제하기에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모든 종교결사들이 백련교라고 비난받았지만, 그리고 그 결사들이 어느 정도 종교적 특성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 결사들의 교리와 신앙은 남 송기관핍민반(官逼民反)'을 표방한 교군(敎軍)은 명확한 정치강령 없이도 민을 불러모으는 매력을 가져, 1796년정월, 호북성 서남부 일대에서 시작된 백련교 봉기가 섬서, 사천, 감숙, 하남 등 화북 5성으로 급속히 파급되었다.?백련교 반란군[이하 교군(敎軍)으로 칭함]은 이주민, 소작인[佃戶], 용공(傭工)출신 위주였으나 부유한 지주도 일부 가담하였다.비밀 종교결사의 특성상 동향· 혈연적 유대나 종교적 사제관계로 결집된 경우가 많았으며, 각 집단을 이끈 중심인물끼리는 상하관계는 물론 강력한 횡적 연대도 없었다. 따라서 교군은 통일된 조직과 공동의 전략목표를 확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각 집단별로 개별행동의 성향이 강하였고 전투도 주로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식량사정이나 전투의 패배 혹은 지도자의 죽음등으로 조직이 무너지면 이합집산이 심하였다. 반면, 이를 진압하는 정부 측에서 보면 뚜렷한 주력이 없으므로 반군 세력의 근절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청조는 백련교 반란 초기에는 귀주.호남 등지의 묘족 반란 진압에 진력하느라 대응이 미흡하였으나, 건륭제 사후 가경제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부패의 상징인 화신(和?)을 처형하고 군기를 숙정하였다. 만주 주재의 정예를 불러들이고 만주인 액륵등보(額勒登保,경략대신), 몽골인 덕릉태(德楞泰)를 중심으로 군의 지휘계통을 정비한 후 교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관군이 호북, 섬서의교군을 토벌하고 사천성 교군을 압박하자 일부 교군은 유구화(流寇化)하여 감숙 동부와 위하(渭河) 분지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사천, 호북의 교군이 연계하였을 때 10만이 넘었던 교군 수는 1801(가경 6년) 경에 수 천 혹은 2,3만 정도로급감하였고, 많은 교군 조직이 각개격파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흩어지는 교군에 대한 철저한 추격전을 벌이는 한편, 보채(堡寨)와 같은 전략촌 구축과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통해교군에 대한 식량, 인력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토착민을 유급의 응모병으로 종군[향용(鄕勇)]시키 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주족 통치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이성결배를 통한 단체의 결성은 순치(順治)(1643~1661), 강희(康熙)(1661~1722)치세 부터 성행했지만, 이 또한 원초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그러한 단체는 자신을 명명하기위한 어떤 이름도 갖지 못했다. 각종 이성결배 조직들은 옹정(擁正)시기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조직명칭과 체계화된 조직들을 구성하게 되면서 ‘비밀결사’로서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속에서 모든 회당계 비밀결사들의 개조(開祖)로 간주되는 天地會가 乾隆 26년(1761)에 등장했다.천지회는 청의 강희제 시기 소림사 승려들이 ‘反靑復明’의 기치아래 모인 이성결배(異性結配)의 조직으로서, 강희제 중엽 이후 사회경제의 발전과 모순) 속에서 점차 반청복명의 성격은 점차 쇠퇴하고 당시 사회모순에 의해 나타난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성격이 점차 두드러지게 된다.따라서 천지회는 異性의 의제적(擬制的) 혈연관계를 조직의 유대로 삼고, 본래는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자위(自衛) 혹은 적극적인 이익 확대를 위해 반체제적인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는 전투적인 집단이었다. 여기에 강희연간에 ‘異性結社’행위를 모반율로 처리하는 등의 왕조의 가혹한 방침은 상호부조적인 결사가 점차 반체제적인 정치결사의 성격을 갖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천지회는 18세기말 대만의 임상문 사건(1786~1787)으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으며. 복건(福建)과 대만 일대에서 광동(廣東) · 광서(廣西) · 강서(江西) · 운남(雲南) 등지로, 더 나아가 동남아 지역으로 까지 전파되었다. 천지회 관련사건은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아편전쟁이후부터 특히 태평천국운동(1851~1864)이 일어나면서 대량 발생하게 되며, 교문과 대규모 융합 · 침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천지회는 또 다른 회당 결사인 哥老會)를 탄생시키면서 중국 전체로 확산되었다.회당은 교문보다 정치지향성이 강했으며 더 지속적이었다. 특히 가로회였다. 사청의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에 이어 武昌 봉기를 시작으로 각성이 청 왕조로부터 독립을 하는 과정에서도 회당은 중요한 역화을 하였다. 이러한 회당 결사의 ‘反靑復明’이라는 이상이 이 시점에서 현실로 구체화되게 된다.Ⅴ. 敎門과 會黨의 차이점과 공통점-비밀결사의 개념정의교문계와 회당계 결사는 조직상, 성원의 사회 성분상, 그리고 내부 담론의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직의 면에서. 교문은 가부장제의 원리에 기반을 두며, 최고 지위의 계승은 교주와 특정 신도 간 뿐만 아니라 교권을 대대로 확보하기 위하여 교주와 그 후손간에도 이루어진다. 반면 회당은 나이에 상관없이 결배형제를 통해 회원을 충원했는데, 이러한 점은 회원간의 관계는 교문보다 더 평등한 색체를 보인다.조직의 구성원으로 보았을때는 교문의 일반성원들은 농민 특히 아직 자신의 촌락공동체를 떠나지 않은 빈농층의 다수였다. 반면 회당의 구성원은 보다 많은 파산자와 모든 종류의 유랑민들이 가담했다. 따라서 청조말기로 갈수록 농촌사회의 해체는 가속화되는 현실은 회당계 결사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마지막으로 담론의 측면에서. 교문계는 각종 신에 대한 신앙을 기반으로 종파적이고 천년왕국적이며 사망후에도 좋은 내세가 보장된다고 약속한다. 반면 회당은 민중 신앙의 요소들이 발견된다고 해도 종교적 담론은 전혀 중요한 위치를 자지하지 못한다. 그들에게서 강조되는 것은 세속적 이익이며 회원간의 상호부조야말로 가장 중요한 담론이었다. 요컨대 회당계 결사에서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사회학적 차원의 의미가 지배적이다.하지만 이러한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 두계통의 결사조직이 갖는 공통점이다. 우선 비회원(일반사회)에 대한 조직상의, 의식상의 비밀성을 지적할 수 있다. 결사의 기반인 촌락공동체에는 공개되지만, 촌락공동체 외부에 대해서 그 고유의 비밀성은 언제나 유지되며, 비회원의 비밀의식이나 행사참석은 허용되지 않았다.다음으로, 혼합주의(syncretism)를 들 수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