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의 티벳 民族問題中國은 12억에 가까운 人口 중에 漢族이 절대다수(92퍼센트)를 차지하고 그밖에 9천 여만 명의 55개 少數 民族으로 구성된 실질적인 多民族國家 이다. 비록 少數 民族은 人口의 점유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中國 領土의 절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少數 民族問題는 中國의 國家安保에 중요한 요인이 되고있다.티벳 民族은 오랜 세월 獨立적인 統治權을 향유하였던 民族이고 中國의 심장부와는 지리적으로 멀리 격리된 험준한 산악 지대에 살고 있으나 풍부한 지하자원과 삼림 자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티벳은 中國과 領土 분쟁에 있는 印度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中國의 중요한 군사적, 經濟的 요충지이다.그러나 티벳 民族問題는 언제 폭발할는지도 모르는 休火山 같은 존재이며 中國 安保에 있어 항상 불안감을 주는 화약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첫째, 中國은 티벳의 獨立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티벳 民族도 자체 獨立 능력이 없다. 둘째, 中國政府가 티벳 民族에게 고도의 自治權을 부여하지 않는 한 이 問題는 中國의 국내외 政治的 불안 요인으로 상존 한다'는 두 가지 가정에서 中國의 티벳民族問題 의 原因과 過程 그리고 向後 展望을 설명해 보려 한다.目 次1. 問題의 提起2. 中國의 對少數 民族 原則3. 漢族과 티벳 民族 關係4. 中國의 對티벳 民族政策5. 向後 展望I. 問題의 提起舊蘇聯과 동구권의 붕괴로 인하여 이 地域을 중심으로 과거 제정러시아 또는 공산주의 철권 통치에 의해 강압되어 왔던 民族問題와 宗敎問題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새로운 국제적 불안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행히 현재 이러한 民族問題와 宗敎問題가 국내적 또는 국제적 분쟁으로 비화되고 있는 地域은 韓國과는 공간적으로 멀리 격리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직접 적인 영향은 끼칠 우려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 을 끼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하 中國)에서 이러한 問題의 개연성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간과할수 없는 사안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中國은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년 11월에 이르러서 少數 民族 에 대하여 공동항일투쟁의 원칙 하에 漢族과 연합하여 통일國家를 수립함으로써만이 少數 民族은 漢族에 대한 평등.自治權이 인정받는다는 주장, 즉 소수民族의 自決權을 부정한다는 논조가 나타났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24일 발표된 [聯合政府論]에서 毛澤東은 聯邦共和國의 구상을 전제로 民族自決權을 인정한다는 論調를 다시금 피력했다. 中國에 있어서 少數 民族 自決權의 요구에 대한 정당성은 반봉건. 반식민주의 투쟁의 경우에만 인정되었다.이러한 점에서 少數 民族의 自決權은 제국주의적 반식민지배하에 있던 中國에서 이탈하는 경우, 또는 中國이 반식민주의를 조장한다고 보았던 買辦官僚的 權力에서 이탈하는 경우에만 인정되었다고 본다. 처음부터 中國은 少數 民族의 自決權이 제국주의 세력이나 매판관료 세력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自決權의 정당성이란 결코 용인될 수가 없었다.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산혁명후 中國은 국내 少數 民族의 自決權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49년 10월 공산혁명의 완수는 결국 民族自決權의 정당성에 근거가 된 반봉건. 반식민지의 구도를 기본적으로 타파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산혁명의 완수 이후 自決權을 다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제국주의 세력의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가 된다는 논리였다. 이리하여 1949년 9월에 개최되었던 제1기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제1 차 회의에서 채택했던 [共同綱領]이나 1952년 8월에 정무원이 채택한 [民族地域自治 實施要綱], 그리고 1954년 9월에 채택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에서는 모두 民族自決權이란 단어가 사라졌고, 다만 民族地域自治란 단어가 강조되는 형태로 中國의 少數民族政策의 原則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규정에서 [民族地域自治]라는 것은 명백히 少數 民族이 中國에서 이탈권, 즉 自決權의 부정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1950년 4월에 中國政府는 몽골自治政府를 대표하는 [自治政府]라는 명칭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自治區 政府]란 명칭을로 中國의 少數 民族政策의 原則은 少數 民族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中國이 單一民族 國家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III. 漢族과 티벳 民族 關係1. 歷史的 背景티벳( 티벳,Tibet)라는 말은 몽골어로 "雪上의 居住地"라는 "Thubet: 한자로는 吐蕃" 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티벳은 원래 중부(U-Tsang), 동부(Kham), 북부지역 (Amdo)을 구성되어 있었으나, 공산화 이후 북부지역 전부와 동부지역 일부가 중국의 다른 지역에 편입되고 현재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한 티벳자치지구로 남아 있다. 티벳이 統一王國으로써 찬란히 역사에 나타난 것은 서기 약 7세기경 걸출한 英雄인 송첸 감포(Songtsen Gampo)가 국왕에 등극하면서 이다. 그는 분열되어 있던 各部族을 통일하고 강대한 統一國家를 수립하여 中國(당 나라) 및 네팔등 인접 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실시했다. 641년 唐太宗은 文成公主를 티벳 국왕에게 출가시켜 친화관계를 증진시켰다. 한편 네팔도 부리쿠티 데비(Bhrikuti Devi)公主를 감포王에게 출가시켜 티벳 국왕은 당, 네팔, 티벳 출신 왕비를 각각 1명씩 거느리는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그 후 당나라는 景龍4년(710년)에 金城公主를 티벳 國王인 치디 츠쿠 첸(704-755년)에게 출가시켜 화친 관계를 유지했다. 이 같은 관계는 한차례 파탄을 가져 왔으나 長慶 元年(821년)에 티벳이 당나라 조정에 화친을 청하여 당의 수도 長安에서 맹약을 결성하고 쌍방의 관계는 다시금 개선되었다. 이 화친의 경위를 새긴비문[長慶會盟碑]가 지금 티벳 수도 라사의 大昭寺 정문에 세워져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馬 寅: 1987) 티벳은 840년대에 란달마 王朝가 붕괴된 이후 각지의 貴族, 軍閥이 봉건적 할거를 시작해서 사분오열된 상태를 지속했다. 1253년 원나라憲宗 의 아우인 쿠빌라이가 軍隊를 이끌고 티벳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평정시켰다. 이때 티벳 佛敎(라마교), 라마교는 티벳어로 "스승(라마)"을 통하지 않고는 부처에 이를 수 없다는 독특한 논리를 가강제적으로 西歐 列强에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英國을 위시한 식민 제국들은 끊임없이 中國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실질적으로 自主權이 상실되고 일련의 불평등조약으로 광활한 領土의 상실과 많은 港口의 개항 그리고 국내 河川의 航行權 마저 서구 열강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변경 地方의 少數 民族들은 自主獨立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었다.1865년 金相印이라는 回族의 한 封建領主는 중앙아시아의 浩罕汗國의 아구뽀(阿古栢)와 결탁하여 新彊 地域에 침입했다. 2년후 아구뽀는 이 地域에 "체다살國"을 건립하고 天山 이남의 광대한 地域과 천산 이북의 일부를 장악했다. 이 地域에서 그에 의하여 살해된 非이슬람敎徒는 4만 명에 이르렀다. 아구뽀와 영.러시아의 제국주의가 결탁으로 영.러 상인들은 신강 地域에서 自由通商이나 창고의 건축허가를 부여받았으며 남부 新彊에서 인접國家로 통하는 도로의 통행권도 확보했다. 1876년 淸朝는 좌종당(左宗棠) 을 파견해서 아구뽀와 金相印을 격파하고 신강성을 건설해서 新彊과 中國 내륙과의 政治, 經濟, 文化 關係를 긴밀하게 만들었다.(馬 寅: 1987) 이러한 맥락에서 티벳은 中國 서남에 위치하며 英國 지배하의 印度와 접경해 있어서 軍事, 經濟的으로 매우 중요한 意義를 지녔기 때문에 영.러 제국주의 제국은 부단하게 宣敎師나 調査隊를 파견해서 지리를 탐사하거나 商貿視察團이라는 명목으로 티벳에 들어가서 활동을 했다. 침략자의 월경을 방지하기 위해서 티벳 民族은 파탕에 陣地를 구축했다. 칸파춈에서는 英國 조사단과 수 개월간 대치해서 일보의 越境도 허락하지 않았다. 티벳 地方 政府와 인민들은 티벳 商人과 英國人과의 무역을 금지시키는 한편, 찬또산(降吐山)에 陣地를 구축해서 변경을 방위했다. 1888년에 영국 침략자는 찬또산을 향해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티벳 民族은 화승총, 활, 칼, 투석기 등 조잡한 武器로 우수한 裝備를 갖춘 영국군과 싸웠다. 각지에서 전선에 집결한 티벳 民族은 1만 여명에 달했으며 완강하게 영국군의 越境 侵가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으나 [천안문사태]가 발생하자 北京을 제외한 유일한 계엄 선포 地域이 바로 티벳의 라사라는 점에서 티벳 民族의 漢族에 대한 반항감이 얼마나 잠재해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2) 티벳 民族의 抵抗티벳 民族은 中國이 자신들의 地域에 개입하는 問題에 관하여 강한 抵抗을 나타내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問題는 티벳이 人口 상으로 漢族의 이주민으로 급속히 대체되어 지고 있다는 점이다. 中國의 少數 民族地域에 대한 漢族의 개별적 이주는 수세기 동안 생활 실상이지만 이것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승리한 이후 國家의 지원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1980년초에서 지금까지 약 6백만 명의 漢族이 과거 티벳 地域이었던 암도(Amdo) 地方으로 이주해 왔다. 티벳은 이러한 과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1993년 친中國 성장인 기안케인 노르부(堅贊諾布) 조차도 티벳 人口의 4퍼센트도 안되는 漢族에 의하여 96퍼센트의 티벳 民族이 압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사실상 政府가 순수 티벳 地域에 근거로 발표한 숫자는 210만 명의 티벳人에 대하여 영구 거주하는 漢族은 불과 8만 명 이내이다. 이 숫자는 지금 공식적으로 다른 성에 분리되어 있고 漢族이 거의 차지하고있는 과거의 거대한 티벳 地域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또한 티벳에 주둔하고 있는 수많은 인민해방군과 경찰 그리고 그 가족들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 원래의 티벳 地域을 감안해 본다면 티벳 民族은 6백만 명인데 漢族은 750만 명이라고 티벳 망명政府는 주장하고 있다.漢族의 티벳 移住는 티벳 女人들에 대한 강제적 不姙과 落胎의 施術을 부수적으로 동반시켰다. 낙태는 6-7개월된 姙娠婦에게도 강제로 수술을 자행했고 트럭을 동원한 대량의 불임과 낙태 시술도 실시되었다. 티벳 내의 中國 政策 옹호자들은 티벳의 家族計劃 政策이 中國내 다른 地域보다는 훨씬 완화되고 있으며 티벳 農夫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자녀들을 가질 수 있어서 보통 3-5명의 자녀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있다.
서 론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 Robert Jermain Thomas, 1840 ∼ 1866 )라는 이름의 영국개신교 선교사가 대동강가에서 죽은지 어언 150년이 다 되어간다. 조선이라는 땅을 사랑하고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지만 그는 그의 선교사역에서 단 한 명의 조선인 개종자를 만들지 못했다. 또한 극심한 좌절을 경험하고 사역자의 삶을 일시 포기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삶은 현재 우리의 시각으로는 실패한 사역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이, 그의 사역이 결코 실패일수 없다.{"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이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이 말을 듣고 있던 마펫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영감님, 영감님이 토마스목사를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보다마다요. 제가 토마스목사를 죽였다니까요?""하나님께서는 토마스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영감님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위 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영감님도 예수를 믿고 전하 면 됩니다.""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그때 셔어먼호가 불타는 가운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던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다.""저도 어느 여관에 갔을 때 방안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있습니다. 여관주인을 불러서 연유를 알아보니 토마스목사가 포리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배포할 때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다가 도배를 했답니다. 그것을 여관주인인 최치량이 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관에 묵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예수 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제게 들려주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토마스목사에게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홍신길은 후 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교인이 되어 장로가 되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습니다."모퉁이돌 1999년 9,10월호1866년 9월 3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후 33년이 지난 1899년의 일이다.이렇게 토마스목사가 죽음앞 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뿌렸던 성경은 살아서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 그렇다 그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요 십자가의 사역인 것이다.그런 그의 삶을 먼저 살펴보자.본 론선교사로 헌신로버트 토마스는 1840년 9월7일 웨일스의 라야더(Rhayader)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59년 영국의 명문 런던대학교 뉴칼리지 ( New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를 졸업하였다. 그는 1863년 6월4일,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으로 고향 교회인 하노버교회(Hanover Chapel)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는 그 다음달 21일, 곧장 그의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떠났다.그는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지원자에 대한 문답에서 그 자신의 소명에 관한 답변을 하였다. "나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강력한 체질과 품격을 갖추며 외국어를 숙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그러한 인물을 선교지에서는 요청한다고 확신했기에 자기 부정의 정신을 가지고 이 선교의 길에 오르려고 한 것입니다. .... 나는 이교의 잔멸과 회심을 향한 선교사로 하나님께서 직접 나를 임명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고난과 연단폴메이스(Polmaise)호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하였으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토마스의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과 함께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자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의 사방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들을 통해 카톨릭의 수난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의 관심이 조선을 향해 내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된 것이 이때였다고 한다. 그는 산동성 지푸에서 잠시 세관으로 취직하여 있었는데, 거기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스(Alexander Williamson)을 만나게 되어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조선에서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으로 피난을 온 조선인 천주교 신자 두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조선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조선을 향한 꿈그는 세관에 사표를 제출하고 런던선교회에 복직을 타진하고, 그 회답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4일, 한국으로 가는 배 한 척을 만나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싣고 지푸를 떠나 서해안의 자라리(紫羅里)에 도착했다.그는 거기서 무려 두 달 반을 보내면서 주로 카톨릭 교인과의 접촉을 통해 충분한 한국어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서울에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작은 배를 타고 한강으로 향했지만 심한 폭풍우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만주 해안 피즈우에 표류하여 결국 북경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엇다.북경에서 그는 런던선교회에서 경영하던 북경대학의 학장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 선교의 꿈을 접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당시 조선에서는 병인박해의 칼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프랑스 정부는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묻기위해 로즈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로즈사령관은 한국어 통역으로 토마스가 승선해 주기를 부탁하였고 토마스는 당장 여기에 동의하였다.그러나 인도차이나에서 발생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가 긴급 출동하면서 토마스목사의 조선행은 좌절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가 많은 물건을 싣고 한국에 상업차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윌리암슨의 뜻에 따라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제너럴 셔면호에 통역겸 안내자로 편승하여 그토록 사모하던 선교지 조선으로 향했다. 이것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서를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 ..... (런던선교회)이사들이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하여 아무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해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복음의 씨앗{그림 북한에 있는 제너널 셔면호 방화 그림 북한의 김일성의 아버지가 주도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그의 선교계획은 순탄치 않았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널 셔면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가면서 평양으로 항진하였다. 제너럴 셔면호는 상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배 모양이 비록 병선과 비슷하지만 통상이 목적이고, 따라서 상해할 마음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평양 관리들은 교역의 개방이나 종교의 전파가 다 금지되고 있으니 곧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면호는 조선정부의 퇴각명령에 불복하면서 계속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수심을 측량하거나 정박하기도 하면서 이를 말리던 중군(中軍) 이현익을 나포하여 본선에 감금하는 무모를 범했다. 셔먼호에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이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사상자도 생겼다.그러던 중 대동강의 수위가 갑자기 줄어 셔먼호는 양각도 서쪽에 좌초된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평양의 수비군은 시탄 운반선 서너 척에 화약과 인화물을 가득 실은 다음 배를 엮어 매어 상류로부터 불을 질러 셔먼호 쪽으로 내려 띄웠다. 셔먼호는 화염에 휩싸이고 배에 불이 붙자 선원들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다. 이 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을 쳐 나왔다. 이 토마스 목사를 포교가 칼로 쳐죽임으로써 토마스목사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요, 진정한 의미에서는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이 때가 186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 되는 해였다.
서 론어거스틴은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는 원리. 그는 진리에의 두 가지 길을 믿고 있다. 하나는 신앙에 의한 길, 또 하나는 이성에 의한 길이다. 즉,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터툴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종합된 것을 본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고대 문명은 기독교의 것으로 변형되어 소화되었던 것이다.전통적 신앙은 역사적 신앙이라고도 부르고 이것은 권위의 방법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이것은 신앙으로 얻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더 가하여져서 더 깊은 지식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지식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신자와 영지주의자를 구별하는 것과 같다.어거스틴 사상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요소는 '카톨릭주의'이다. 그의 신학의 방법으로서 신앙의 길, 즉 권위의 길을 취하는 면이 바로 이 카톨릭주의의 면이라 하겠다. 그의 카톨릭주의는 도나티스토 논쟁을 통하여 나타났다.우리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경건을 서방 교회의 전체적 분위기 속에서 본다.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먼저 그의 '참회록'으로 표현되었고 다음에 그의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하여 '어거스틴주의'로 발전하였다.본 론1. 생 애어거스틴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서방교회의 아버지이다. 그의 사상은 중세 시대를 지배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캐톨릭의 반동종교개혁 둘 다가 어거스틴에 대한 재발견이었다.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은 354년 오늘날 알제리인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인 부친과 정통 그리스도인인 어머니(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371년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 카르타고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철학(진리)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뒷날에 그는 당시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자신이 기독교를 향하여 내디딘 첫 걸음으로 인정하였다.373년부터 382년까지 어거스틴은 진리와의 회심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386년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정원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딱 두 번의 회심 기념일-하나는 사도 바울의 회심 기념일(1월 25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 어거스틴의 회심기념일(5월 5일)이다-을 봉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전적으로 새롭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해 부활절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노바 교회당에서 암브로즈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388년에 어거스틴은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감독이 없는 마을은 조심스럽게 피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책을 맡게 될 위험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91년에 어거스틴이 히포(Hippo)를 방문하고 있을 동안 그를 알아보고는 강제로 장로로 임명하였다. 396년에 감독이 사망하여 어거스틴은 그를 계승하였다. 그는 430년 사망할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있었다.2. 어거스틴의 신학일반제 1 절 기독교관어거스틴은 회심 이후에 교회의 권위에 순복하였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회심 이후로 철학적 사색에 대한 어거스틴의 근본적 태도는 변화되었다. 전에는 철학이 이성적 수단인 사색의 활용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회심한 후로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기독교의 신조와 일치되는 선에서 이해하였다.어거스틴은, 믿음에 기초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복종과도 일치되는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와 신 플라톤주의를 종합시킨 형태를 취한다고 인식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신 플라톤주의나 철학의 전반 분야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기독교만이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양자가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뿐이었다.어거스틴은 두 가닥의 사상을 하나의 종합 형태로 결합시켰다. 그 중의 하나로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과, 그의 선행적 은혜와, 그리고 그가 친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써 결과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상은 [카리타스-큐피디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이 카톨릭 교회의 밖에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다. 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둘째로, 어거스틴은 외적 조직으로서의 현실적 교회와 성도들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불가시적 연합에 속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외면적으로만 교회에 속해 있는 자들과 진정한 의미로 교회에 속된 자들을 구별하였다.셋째로, 어거스틴은 예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였다. 불가시적인 사랑의 연합은 예정된 성도의 단체와 일치되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는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고 인내의 은사를 받은 전자(前者)만이 참된 교회의 일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카톨릭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자들도 다소간 있을 것이다.제 3 절 죄와 은총관1) 죄 -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죄란 정신의 죄로서 시작한다. 아담은 스스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했고, 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외면하고 타락하게 된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에 의해 멸망당할 자의 무리에 속해 있다. 어린 유아로서 죽었던 사람이라도 멸망을 받는다. 신의 특별한 은총의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2) 은총관 - 어거스틴의 죄 개념에 대응한 것이 그의 은총개념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다. 신이 어떤 인간을 선택하고 어떤 인간을 멸하느냐 하는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없다. 일하고 있는 분이 단지 신뿐이다. 신이 결단하고, 신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더나아가서 용서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최고선에의 현실적인 참여로 본 것이다. 영은 우리들의 그릇된 욕구 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현 세계와의 관계를 정신과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1부(1권∼7권) 고찰삼위일체의 통일과 동등은 성경에 나타났다. 보냄을 입은 성자나 성령은 보낸 성부와 동등하고, 삼위일체 자체는 본성에서 불가견하고 불가분리하게 일한다(1권-4권).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 곧 낳으신 분과 나오신 분은 서로 그 본질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경에 본질적으로 언급된 곳이 있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언급된 곳이 잇기도 하기 때문에 서로 구분해야 하고, 하나님과 신과 관련된 본질은 항상 불변하다(5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24)고 해서 아들이 성부를 지혜롭게 하거나 능력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자신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과 본질인 것 같이 하나의 능력, 지혜이다. 참된 본질에 있어서 아들보다 성부가 크지 않고 둘이 합해도 성령보다 크지 않고 셋이 합해도 하나보다 크지 않다(6권-7권).이것으로 그의 전반부 교리 진술이 끝난다. 여기에서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사상을 검토하고 이 교리를 논증하려는 것보다 성서에서 기정 사실로 되어 있으며 정통교회가 이 교리를 전승하여 온 것임을 확인한다.2부(8권∼15권) 고찰1. 신앙과 지성삼위일체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공헌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는데 있다. 이 유비(Analogies)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절대적인 유일성과 삼위의 진정한 구별에 대한 신비를 우리가 보다 낫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심화시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흔적(Vestiges)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고 비물질적이고 변함이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이해력으로자를 연합시키거나 혹은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으로 분석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사랑하는 성부, 사랑을 받는 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성령의 흔적이 사람의 구조 안에도 남아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흔적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첫째 것이 둘째 것을 낳고 세째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피조적 형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헛되이 찾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초월하여 계신다. 우리가 아무리 나무, 둥치, 가지들을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도 이것들 속에 있는 본질은 지식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명도 없다. 짐승들의 경우는 그 본질 속에 생명은 있으나 지식이 없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장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삼위일체를 보다 환하게 알고 볼 날이 올 것이다.3. 내적 사람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론의 형상(Lmago)그가 특히 인간의 내적 활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 자리가 내적 사람의 최저 심부라고 할 수 있는 영혼(soul, Anima)이며 만약 사람이 신과 상봉한다면 이 영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적 사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분석 검토한다.1) 존재(esse), 지득(nosse), 의욕(velle)나는 알고 또 의지하는 자로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또 의지하는 것을 알고, 또 존재하고 아는 것을 의지한다. 즉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가 반드시 무엇을 알며 또한 알려고 의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 당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하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므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