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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트주의자가 보는 대중문화
    엘리트주의자들은 왜 대중문화를 저급하다고 생각하는가?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 문화 비판론은 이미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한 것으로 이는 고급문화를 지지하던 당시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높은 가치로 인정되었던 개인의 자율성이라든지 독창서, 그리고 집단규범의 거부 등 휴머니스트적인 기준에 의해 인도될 때 실현되는 이상적인 삶을 위한 표현이요 요구이다. 이러한 기준이 고급문화의 창조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모든 사람들을 이상적 삶으로 인도하게 된다든가 또 사회 전체에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또 다른 면에서 대중 문화 비판론은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문예비평가 저술가들 혹은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문화적 민주주의의 경향에 불만을 느끼는 수많은 사회비평가들-몇몇 사회학자를 포함하여- 이 과거 엘리트주의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표현이요 요구이기도 하다.산업화되기 이전의 유럽사회는 문화적으로 고급문화와 민속문화의 두 종류의 문화로 나뉘어져 있었다. 민속문화는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가내 공업적이었으며 당시 농부들이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진 마을에 살던 농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민속문화 내용은 쉽게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가시적인 것은 아니었다.그에 비해 고급문화 수용자는 도시에 사는 엘리트들-법관이나 귀족, 성직자, 혹은 부자들-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교육을 받았고 오락이나 예술에 경제적 여유가 많은 자들, 또 그들을 위해 문화를 생산하는 소수의 창조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보호를 받는 문화인 것이었다. 당시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모두 권력 주변에 가까이 있었으며 일부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그들을 고용한 후원자들의 지위와 특권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민속 문화가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문화이고 지역적으로 고립된 문화였기 때문에 고급문화만이 한 사회의 공적, 그리고 가시적 문화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경제적인 변화,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따라 시골사람들은 도시로 흘러가게 되었고 거기서 자유시간을 마련하고 예술과 오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실수입을 갖추게 되자 그들은 한 때 농촌에 근거하면서 가졌던 민속문화를 버리고 상업적 대중문화의 고객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 대중문화는 곧 그 수에 있어서 고급문화 창조자나 내용물을 능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급문화는 오직 유일한 공적문화와 가시적 문화로서 누렸던 독점적 위치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부유한 고급문화 후원자들의 경제적 자원과 권력이 약화되면서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은 특권층의 귀족사회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지지해 줄 새로운 수용자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그 결과로, 고급문화는 소위 문화시장에서 대중문화와 경쟁적인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급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스럽고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보였다. 권좌의 세계와 그 주변에서 물러나면서 그들의 위신, 지지의 기반, 특권 등은 감소되었다. 거대한 대중 예술시장의 발흥은 그들 고급문화 창조자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기준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했을 뿐 아니라 신분이나 교육정도가 낮은 문화 수용 공중에게 문화의 적정기준을 세울 수 있었던 문화 통제 능력마저 상실함을 의미하였다.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은 심각하고도 급격한 신분과 권력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사회적 몰락의 위험에까지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고급문화 창조자들의 사회 계층적 몰락현상으로 그들의 후원자의 사회였던 엘리트 세계에서는 반동적인 정치, 사회 운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소설이나 기타 저술을 통해서 구질서의 몰락을 비판하는 소리를 높였을 뿐 아니라 대중문화 비판론에 연결되어 이른바 분노의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맨 처음 비판론이 발생한 것은 유럽이며 비판론자의 대부분은 유럽인이거나 그들 자신들이 유럽 엘리트의 후예라 자처하거나 유럽 엘리트를 모방하려는 미국인들인 것이다. 그 미국적 대중 문화 비판론은 술이나 섹스 나중에는 대중적 희가극이나 영화를 비판하는 십자군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빈곤한 사람들 특히 유럽으로부터 이민 온 가난한 사람들이 청교도적 기준에 맞지 않는 부도덕한 생활을 갖는다고 비난하는 미국 와스프의 엘리트들과 보조를 나란히 하여 미국적 대중문제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들 비판론은 체계화된 이론으로는 발전되지 못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개혁주의나 반이민주의의 정치저술에서나 드러나는 것이었다. 최근 수십 년 간 대중 문화 비판론자들은 두 종류의 정치적 입장으로 분류된다. 한 부류는 보수주의자들로 예컨대 유럽의 자크 에률, 엘리어트, 레비스 및 오르테가 이 가세트나 미국의 반 덴 하아그, 러셀 커크 등이다. 다른 부류의 비판론자들은 사회주의적 경형의 사람들이라 하겠는데 이들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대중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대중 문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론은 비록 정치적 민주주의나 사회, 경제적 평등주의를 적대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과는 좀 다르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다소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 이들 두 비판론은 다같이 대중 문화의 위력을 두려워하고 문화적 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두 비판은 고급문화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는 대중문화와 그 대중문화를 제공하는 매스 미디어 기업이나 이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수용자로부터 고급문화를 보호하여야겠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이분법이 가진 문제점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이분법이 가진 문제점 중 하나는 고급문화에 속한 자들이 대중의 심미적 능력을 낮게 보는 노골적인 경멸이다. 미디어가 수용자를 마치 파블로프 실험의 개처럼 수동저긴 존재로 만들며 미디어가 원하는 바의 어떠한 종류의 감정이나 지식도 주는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본다.두 번째 문제는 오늘날의 전체 고급문화 내용이 오늘날까지 존속되어온 과거의 고급문화와 비교해 보아 보다 훌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고급문화는 페리클레스시대의 아테네 문화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문화나,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 등과 같은 고급문화 황금기의 문화수준에 도달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이 비교해 보려는 논자들은 고급문화 황금기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 속에서 살았으며 이러한 빈곤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피, 땀이 지배 엘리트층을 유지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뒷받침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 엘리트들의 후원으로 그 고급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는 점은 물론 잊고 있다. 그러한 비교론은 또한 고급문화가 존속된 정도에 따라 그 사회의 질적인 우수 정도를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비판론은 사회가 추구하는 주요한 목표란 가장 좋은 고급문화의 창조를 가능케 하도록 보장하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목표, 예컨대 일반 사람들의 복지 같은 것은 사회 목표로서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핵심적으로 얘기한다면 대중 문화 비판론은 오직 고급문화의 이익에만 편중한 그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를 위하는 데에만 사회의 힘과 자원을 최대로 배분하여 스스로의 이익만 도모하고자 하는 주장인 것이다. 고급문화 옹호자도 누구나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기 이익을 우구하기 위해 이를 마치 공중의 이익처럼 위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사회가 전체적으로 고급문화 부분만의 번영을 꾀하려는 노력으로만 조직될 수는 없다.마지막 문제점은 한 한 사회의 문화가 이른바 창작자 지향성의 문화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문화 내용이든 간에 두 가지 관점- 창작자의 관점과 사용자의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창작자의 관점 지향적 평가에서는 문화가 수용자를 만족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고 문화란 오직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그렇지만 수용자의 관점 지향적 평가에서는 문화를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 문화가 수용자의 원망과 필요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가에 의의를 두는 관점인 것이다. 고급문화는 창작자 지향적 문화라 할 수 있으며 고급문화의 심미적인 판단이나 비평적 기준은 이 창작자 지향서에 근거하고 있다. 창작자의 의도만이 결정적인 것이고 수용자의 가치는 거의 관계없다고 보는 창작자 지향의 비평은 수용자들의 압력으로부터 창작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예술가들의 창조 작업을 더 용이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이는 모든 예술 창조자들이 어느 정도는 그들의 수용자들에게 반응하면서 창작 작업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너무 간과함이 없지 않다.
    사회과학| 2002.11.05| 4페이지| 2,000원| 조회(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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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대대회
    제 1차 文代大會와 문예정책의 성립제 1 절 제 1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약칭 제1차 文代大會)1949년, 공산군은 북경을 비롯한 연해의 주요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천하통일이 가시화되자 공산정부 수립의 기초작업을 시작했다. 당선전부는 毛澤東이 당제7기 2중 전회에서 발표한 담화에 따라 문예계 재건 활동을 추진하였다. 郭沫若과 茅盾을 중심으로 한 문예계는 文藝作品評?委, 演出委, 展覽委, 章程 및 重要文件起草委 등 4개 전문위원회를 조직했다.1949년 7월 2일부터 19일까지 제1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文代大會)가 소집되었고, 개막식에서 총 주석으로 선출된 郭沫若이 정부수립 이후 중국 신문예의 방향을 제시한〈신중국의 인민문예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자〉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문예운동의 성격;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 반봉건혁명.?문예계의 통일전선;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무산계급 지식분자와 혁명적 소자산계급 지식분자의 연합을 구성.?문예공작자의 임무; 인민대중의 환영과 옹호를 받는 문학예술가.7월 6일, 周恩來의 〈중화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에서의 정치보고〉는 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최초의 신중국의 문예정책이다. 이것은 과거 3년 동안의 국내전쟁에서의 승리상황보고와 앞으로 문예계가 지향해야 할 정책의 제시였다. 문예계의 정책은 다음과 같다.?단결 문제; 과거에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새로운 정부 하에서 일치 단결.?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문제; 문예공작자들은 공장, 농촌, 병영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익히 알고 난 후에야 인민의 주체인 그들을 창작의 대상으로 삼음.?보급과 향상 문제; 현재 보급성의 문예작품은 아직도 매우 거칠고 조잡하며 매우 저급하여 마땅히 개선, 향상되어야 함.?舊文藝의 개조 문제; 구문예의 개조를 중시, 내용부터 개조하고 점차 형식도 개조하여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통일, 구문예의 많은 동지들과 신문예의 간부들과 단결하여 공작을 진행.?전체 국면의 관심을 가지는 문제; 모든 문예공작자는 신민주주의와 신중국 건설 초기의 어려운 창조 과정에 처해 있다는 것 명심.?조직 문제; 이번 문대대회에서 대표들은 조직을 만들어야 함.제 1차 문대대회의 성과모택동과 주은래의 지도하에 전국 문예공작자들을 단결시키는 계기를 마련.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과 연안문예강화에서 발표한 문예의 목적과 정신의 재확인으로 신중국 인민문예의 기본방향으로 삼음.새로운 시대의 문예는 인민의 문예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봉사해야 함.전국성의 문예계 조직인 중화전국문화예술계연합회와 산하 각 협회를 조직하여 전국의 문인작가들을 당선전부라는 영도기관의 휘하에 두게 됨.제 2 절 제 1차 문대대회의 방향제1차 문대대회가 결속된 후, 문예계에서 제기된 몇 가지 문제중 대표적인 것이 다음 세 가지이다.‘신정부 수립 후에도 문학예술작품의 주인공은 반드시 노동자, 농민, 병사여야만 하고 소자산계급의 지식인은 안 되는가?’, ‘문학예술 창작에서 반드시 예술성보다 정치성이 앞서야 하는가?’, ‘과거 구시대의 문학예술작품을 모두 계급론적 창작방법으로 개작하여야 하는가?’ 이상 제기된 문제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문예작품의 주제 논쟁제1차 문대대회가 폐막된 지 한달 후 상해의 《문회보》에서 〈소자산계급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다. 제1차 문대대회에서 “문학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되 먼저 혁명의 주체인 노, 농, 병을 위해 봉사하고 문학예술로 위대한 인민을 창출해내라”는 창작 방향이 발표되어, 이것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가 논쟁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은 전쟁 기간에 후방 도시로 피난, 은신하여 혁명의 주체인 인민의 생활, 사상 감정 등을 인식하거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은 下鄕과 入伍를 요구하였다. 이 논쟁은 4개월만에 끝났으나 이후에도 문예계의 과제로 남았고 또한 적지 않은 작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2) 문예작품의 정치성과 예술성의 관계42년 연안문예좌담회의 담화에서 모택동은 문예비평의 기준은 정치적 내용과 예술적 형식의 통일을 주장. 50년 1월, 당시 신정부의 초대 문화부장관에 취임한 모순은 〈현재 창작상의 몇 가지 문제〉라는 보고에서 정치와 예술은 양자 모두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정치성을 우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순의 보고가 발표된 후, 문예계에서는 즉각 반발이 나타났다. 그 예로 阿壟의〈경향성을 논함〉이라는 글과 張懷端의〈정면 인물과 반면 인물을 논함〉이라는 글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예술성과 정치는 일원론적인 것?문학적 경향성은 곧 당성이니, 일종의 계급성이고 사상성이다.?예술 작품의 경향은 엥겔스가 말한 것과 같이 반드시 상태와 행동에 드러나야 한다.阿壟의 의견이 발표되자 이에 대해 陳涌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왜곡과 위조를 반대한다〉라는 제목으로 반박했다. 그로 인해 논쟁이 강렬해져 10월에 〈문예창작과 정치임무의 결합을 논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더 이상 작품의 예술성을 논하지 못하게 단속했다. 결국 신정부의 문예정책은 42년 연안문예좌담회의 담화에서 발표된 공산장의 문예정책과 비교해서 전혀 진전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정부에서는 문예비평이 존립하기 어려움을 공공연히 제시하고 있다.3) 반역사주의 창작경향에 대한 논쟁구문예의 개조문제는 이미 30년대 초 좌익작가연맹에서 ‘대중문예운동’으로, 40년대에는 ‘민족형식론’으로 거론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연안문예좌담회 이후로 구문예의 개조 또는 그 형식을 빌린 새로운 문예의 창작이 활발히 시도되었다. 이것은 제 1차 문대대회에서도 다시 거론되었다. 문대대회 직후 작가들은 章回소설의 개혁 문제를 토론하였으나 상반된 의견이 나오는 등 구문예와 전통문예의 계승문제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구문예의 개조운동은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으로 각계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중 희극계에서는 역사극의 기본정신은 중국사회의 발전사를 반영하는데 있다는 楊紹萱의〈희곡개혁에서 역사극과 고사극 문제를 논함〉이라는 구극개혁론을 발표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반역사주의적 창작 경향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楊紹萱은 자신의 신극이 비판의 대상이 되자, 그는 그의 극본을 비판한 사람들을 정치투쟁으로 이끌려고 했으나 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극에 대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더구나 51년 5월 수상 周恩來의 〈희곡개혁업무의 원칙〉이라는 보고에서 반역사주의 풍조를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있은 후, 문예창작에서 황당한 반역사주의적 작품은 크게 감소되었다.
    인문/어학| 2011.01.31| 3페이지| 1,500원| 조회(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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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대혁명의 전개
    문화대혁명의 전개제 1절 五?一六 通知◆ 5월 7일 모택동은 임표에게 편지(五?七 指示)를 보냈다.-내용: 군부는 혁명기와 동일하게 군사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공작, 경제건설 등에도 참가하라 ⇒정부의 모든 권한을 임표에게 부여한다는 것◆ 5월 16일 본 회의에서 五?一六 通知를 채택하고 즉시 공포했다.-주요내용첫째 당내 반당분자의 숙청: 팽진이 조장으로 이끌던 5인 문화혁명소조를 해체하고 그 들이 발표한 을 취소한다.둘째 무산계급 영도권의 탈취: 반당?반사회주의의 모든 학술 권위자들의 자산계급적 반동적 입장을 철저히 폭로하고 학술계?교육계?보도계?문학예술계?출판계의 자산계급 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하여 이것들의 문화영역에서의 지도권을 탈취하 지 않으면 안된다.※ 이 에서 처음으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이의 발표와 함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는 반역사적 대중운동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임표는 북경시장 팽진을 비롯하여 중앙선전부장 육 정일등이 반당집단을 형성하고 반혁명을 획책하였다고 하여 이들을 궤멸시켰다.그리고 이날 북경 시당위의 서기이며 의 필자이고, 의 공동 집필자인 등척이 체포 살해되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중운동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최고 지식 계층이라고 하 는 교수와 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학술계의 권위자들을 무산계급의 적으로 지목◆ 5월 25일 강생이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관계자와 학생들을 사주해 대학의 간부와 교수 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만들게 하는 소동을 일으키자 모택동은 그 대자보를 높이 칭찬하 고는 즉시 전국에 알리라고 지시하여 6월1일에 각 방송국과 에 발표되었다.제 2절 11중전회와 대중운동1966년 8월 1일부터 12일까지 공산당 제 8기 11차대회(11중전회)가 소집되었다.8월 8일 본회의에서는 을 통과 시켰다. 이 에 담긴 문화대혁명의 목적은 『당내의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당권파와 투쟁하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 ‘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되어있다.1) 홍위병(紅衛兵)운동(1) 홍위병의 구성◆ 문화혁명초기에는 혁명간부의 자녀들만이 기타 홍오류의 홍위병을 대표하여 권력을 행 사할수 있었고 그 외 기타는 이름뿐인 홍위병이었다. 이렇게 볼 때 홍위병 조직은 처음부 터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공산주의 순수혈통이라는 특권층의 조직 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8월 18일 문화대혁명을 경축하는 군중집회가 북경 천안문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임표는 연설에서 “실권파와 학술권위 그리고 사구(四舊: 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을 타파하자”고 선동했다.(2) 홍위병의 광란8월 20일 홍위병들은 ‘파괴의 광란’을 시작했다.◆ 대학교수?문학가?예술가?과학자?종교인?민주당파의 인사 등 사회저명인사들을 잡 아 내어 우귀사신(牛鬼蛇神:온갖 못된 짓을 한 악인)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게 하고 모욕 을 주고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자료들을 모두 파괴했다.8월 24일 모택동으로부터 인민의 문학가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았고, 문학예술계의 원로 로 존경을 받던 저명한 소설가이자 희곡작가인 노사(老舍)와 유물사관 연구의 대학자인 이달(李達)이 홍위병의 핍박으로 살해되었다.◆ 10월 9일 중앙공작회의를 소집진백달(陳伯達)은 이라는 보고를 했는 데 주요내용은 홍위병운동이 더욱 강화되어 당과 정부내의 반모택동노선을 제거해야한다 는 것이었다. 이후로 당과 정부고위층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3) 노농적위대(勞農赤衛隊)와 공인조반파(工人造反派)의 등장◆ 부모가 흑오류(黑五類)에 속해서 홍위병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임표가 홍위병에 대한 청년들의 반감을 무마시키기 위해 홍위병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자기를 멸시했 던 각 지역의 당과 지방정부를 공격하자 각 지역의 당과 지방 정부는 자위책으로 그들 에게 동조하는 노동자?농민?상인들을 규합하여 적위대를 조직하였다.◆ 어디에도 소속되니 못하는 가장 하층이라고 할 도시의 임시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들 끼리 규합하더니 공인조반파를 조직하였다.◆ 북경으로 전국 각지의 홍위병들이 몰려들어 집회를 하자 수도 행정 및 모든 업무가 정 지 되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홍위병의 집회를 봉쇄하려하였다.2) 상해 1월 혁명과 공총사(工總司)◆ 11월 19일 왕홍문이 노동자를 규합하여 공총사를 조직하여 상해 시당위에 단체의 승 인을 요청하자 거절하자 기차를 세우고 드러누워 시위를 하자 승인해 주었다. 공총사 는 막강한 세력으로 상해 시당위와 시정부, 적위대를 압도하자 상해는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1월 3일 신문 문회보(文匯報)와 해방일보(解放日報)를 탈취하고 모든 공 공기관을 접수했다.(1월 혁명)◆ 2월 5일 상해 총공사는 30여개의 조반파들을 규합하여 상해인민공사를 조직하였다. 이 것은 당원로들에게 큰 충격이였다. 그래서 2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당원로들이 모여 당 이 취해야 할 역할에 대해 격론을 전개했다.당원로인 담진림(譚震林)은 임표에게 편지를 보내 강청을 則天武后에 비유하는 등 강력 히 비난하고 이의 중지를 요구하자 임표, 강청 등은 도리어 노간부들의 행위를 二月逆 流라고 비판했다.3) 무한(武漢)사건과 홍위병 운동의 종말◆ 무한사건은 무한의 저명한 당원로인 요주(陶鑄)와 왕임중(王任重)이 실각되면서 무한 시 당위의 권위가 상실되자 무한군구(武漢軍區가) 중심이 되어 북경에서 파견된 홍위병과 지방 조반파의 연합과 대치하는 상황으로 무한군구는 무한에 거주하는 공산당원 중 85% 가 모여 만든 백만웅사와 함께 대항하였다. 이 사건으로 주은래는 중앙문혁소조의 왕력 등과 모택동은 왕동흥 등과 함께 무한으로가 사건을 수습한 사건으로 사상자가 18만 4천 여명이나 되었다.◆ 중국의 국내 정세가 소란하자 아시아 각 국에서 중국을 규탄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그리 고 중앙 문혁소조의 행위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사회여론이 나쁘고 세력이 너무 커지 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극좌파를 해임하고 조반파의 해산을 종용 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이 불응하자 홍위병을 탄압했다.
    인문/어학| 2011.01.31| 3페이지| 3,000원| 조회(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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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혁명기
    문화대혁명기의 국내외 정세제1절 진보도(珍寶島) 사건과 당9전대회진보도 사건- 1969년 4월 1일 중?소 국경인 흑룡강성의 진보도(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일어난 양국 국경경비대의 무력 충돌사건. 1950년대 말 이후 중?소 대립이 가장 첨예화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 국경경비대가 진보도가 중국령이라 주장하고 거기에 주둔한 소련 국경경비대를 기습, 31명을 살해하고 이를 점령하였으나, 소련의 계획적인 대규모 반격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소련은 극동 및 몽골의 주둔 병력을 증가하고 군관구를 신설하여 대중공전비(對中共戰備)를 강화하였고 중국 또한 국경군구(國境軍區)의 병력을 증가하였다.당9전대회- 결과적으로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제2절 임표의 반란 미수 사건반(反)모택동 쿠데타를 음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지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제3절 핵무기?인공위성의 개발과 대서방 외교정책의 대전환소련은 1957년 10월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계최신과학무기 개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는 강력한 군사무기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안을 제시했다. 모택동이 소련의 이러한 정책 전환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1960년 들어서면서 마침내 양국의 우호관계는 결렬되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핵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며 과학무기 개발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모택동은 세계 군사대국의 하나로 부상하자 공산권보다는 더 넓은 서방세계의 국제무대를 선택했다. 흐루시초프가 제기한 평화 이행안을 수정주의라고 통렬히 비난하던 모택동이 소련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중국은 1971년 4월에 일본 나고야에서 있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미국대표선수들을 북경으로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가져, 이른바 핑퐁외교라는 새로운 국제외교 용어를 만들어 내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어 7월 15일에 워싱턴과 북경에서 동시에 닉슨의 북경방문을 발표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1972년 9월에는 일본의 전중(田中)수상을 북경에 불러들여 에 조인하고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대만 정부와의 단교를 발표했다. 이어 세계 각국이 연이어 중국과 수교를 신청하면서 중국은 구제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반면,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중국이 미국?일본과 수교하자 북한과 인도차이나 공산권 특히 미국과 전쟁 중이던 월맹으로서는 불과 1년여 전에 아시아 공산권이 단결하여 미제국주의와 일본군국주의에 맞서 싸우자고 앞장서서 다짐하던 모택동이 이렇듯 배신한 것에 분노했으나 이념보다 국익이 앞서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제4절 사인방(四人幇)과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사사사 삿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인방(四人幇)-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홍문(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교(張春橋), 정치국 위원인 강청(江靑)?요문원(姚文元)등 4인의 소위 반당집단(反黨集團) .비림비공운동- 비림정풍(批林整風)운동과 비공(批孔)투쟁을 결합시킨 말로,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 것이고, 임표의 반혁명수정주의 노선’ 역시 극기복례를 통하여 지주?자산계급의 전제(專制)‘를 복귀시키려는 것이라고 공격하였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당내의 반모?강청집단(反毛江靑集團)에 대한 사인방(四人幇)등 문화대혁명파의 반격으로, 새로운 적대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제5절 모택동시대의 종언천안문사건- 1976년 1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 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주은래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북경의 민중은 손에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 하였다. 주은래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북경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의 강청과 측근인 요문원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모택동 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등소평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국봉(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해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되는 등의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이 시기 문학개관 및 결론문화대혁명이 1970년대 초까지 진행되자, 문단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1966~1971년, 임표, 강청 반혁명집단이 문화전제주의와 문화허무주의를 대대적으로 실시한 관계로 인하여 5년 남짓한 사이에 중국에는 문학작품이 한 편도 나오지 못했다. 날이면 날마다 어록가(語錄歌)를 부르고, 충성무(忠誠舞)를 추며 ‘본보기극’을 구경하는 것이 8억 인민의 문예생활의 전부였다. 1972년에서 4인방이 타도되기 전까지의 작품은 다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4인방 및 그 「파벌분자」가 획책하고 조작해 낸 「음모문학」, 혹은 이들에 의해서 기만당하거나 정세에 부응하여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가치는 이 시기의 문예가 정치화?도구화되었으며, 창작심리가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4인방의 박해를 피하고, 현실생활 속에 아직 존재하고 있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 반영한 작품이다. 서로 숨어서 돌려보거나 아니면 아예 발표조차 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천안문사건 폭발 전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요컨대 혼란한 동란의 와중에 처했었다 하더라도 10년간의 문단을 하나의 공백으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 비록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지라도 작품이 전혀 창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72년 이후에는 각종 장르에 걸쳐 작품발표가 점차 많아졌으며, 문학적 환경이 호전되었고, 이론비평 또한 이에 부응하여 어느 정도의 발전은 있었다. 특히 시나리오나 희곡 분야에서는 약간의 토론도 있었다. 물론 작품은 농후한 시대적 색채를 띠고 있었고, 평론 또한 맹렬한 정치적인 투쟁을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시초》나 당시에 발표되지 못했던 소수의 원로시인들이 쓴 작품은 이와는 판이한 문학적 현상에 속한다. 「천안문 시가」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무명의 작가들은 현실 문제를 가슴아파하여, 투쟁을 위해 붓을 들고, 가슴 가득한 의분을 사실대로 쓸 뿐, 기교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것의 제재?주제?형식?풍격은 모두 당시의 창작 동기 및 예견한 효과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비록 일부 작품들은 조잡하기까지 하지만, 감정이 진실하여 진정으로 인민의 뜻을 반영했다고 평가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도 있다. 예술적 특색은 일반적으로 감정이 순박하고, 의경이 장려하고, 리듬이 곱고 낭랑하며, 표현형식과 수법이 다양하다. 슬피 통곡하는 중에도 격분함이 담겨 있고, 함축 속에서 예리함이 빛나기도 한다. 한 마디 말에 두 가지 관련된 뜻을 담고 있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사고를 일깨워 준다. 그리고 이것들은 주은래를 깊이 추모하는 반면, 4인방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비가와 격문이 상호 융합된 작품이 많다. 이러한 군중의 시가는, 내포한 것은 단순하지만 기백은 오히려 호방하여, 4인방을 교란시켰다. 이것은 또한 「천안문 시가」의 예술적 특징과 정치적인 역량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시가 창작이 문화대혁명 후기에 눈에 띄게 활발해진 반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우수한 소설은 오히려 매우 드물었다. 이 기간 중 요설은(姚雪垠)이 완성한 역사소설《이자성(李自成)》제 2부는 매우 값진 수확이었다. 문화대혁명 전에 씌어져서 후일 개작한 장양(張揚)의 《두 번째 악수(第二次握手)》는 문화대혁명 기간중 필사본 형식으로 널리 퍼졌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래 드물게 보이는 문화적 현상이다. 문화대혁명 전에 씌어지고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출판된 여여청(黎汝淸)의 《산마다 붉은 단풍 가득(萬山紅遍)》, 이심전(李心田)의 《반짝이는 붉은별(閃閃的紅星)》등은 긍정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제재?주제?인물?기교? 면에서 결코 참신한 의의는 없다. 이러한 작품은 비록 「계급투쟁의 강령」과「삼돌출」창작원칙의 영향을 받았으나, 생활을 날조하거나 도식적인 설교로 일관하거나 인물의 개성이 부족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범람했던 예술적으로 조잡하게 마구 만들어 낸 작품들과는 다르다. 10 년간의 극문학은 처음에는 궁지에 몰렸다. 문화대혁명이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4인방이 8억인민에게 보라고 선동하고 조직한 「본보기극」외에 연극의 창작은 거의 없었다. 광의적인 의미의 산문은 양적으로 많이 창작되었다. 왜냐하면 산문은“정세에 맞춰 적시에 작전에 투입되는 경기병”으로 간주되었고, 최상의 선전도구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개인숭배 사상과 아첨으로 가득찬 「송양문(頌揚文)」과, 「주제선행론」을 앞세워 마음먹은 대로 사실의 진상을 왜곡하고 거짓을 보고하는 「보고문학」등이 있다. 이러한 문장은 항상「생활보다 우선적인 것」, 「예술적인 진실」, 「생활의 본질의 반영」이라는 핑계로 시류에 따라 눈치보며 행동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것을 「혁명」으로 여기고 있다.
    인문/어학| 2011.01.31| 4페이지| 3,000원| 조회(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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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문학] 한국의 설화 민담 전설 야담
    1. 설화의 개념 및 특징설화는 글자의 뜻 그대로 ‘이야기’를 말한다. 그 이야기는 공동집단 사이에서 형성되어 입으로 전승되는 구전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구전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이 다 설화의 개념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또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나 경험적 현실에 관한 이야기도 ‘이야기’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설화는 실제로 있었던 것 같은 그럴 듯한 이야기이지만 사실적 이야기 그 자체는 아니다. 설화는 기본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설화의 구전적 성격은 그 전승의 일정한 법칙, 즉 이야기의 틀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설화가 입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는 이야기의 일정한 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설화는 형식적으로는 이야기 구조를 전승 근간으로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흥미성과 교훈성이 전승 원리가 된다. 이러한 존재의의는 설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 갈래임을 보여준다. 설화는 우리 민족의 초기형성기부터 민족적 집단의 공동생활을 통한 공동심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그 속에는 민족의 언어, 문화, 역사, 신앙, 관습, 세계관, 그리고 소망과 낭만, 웃음과 재치 또는 역경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 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설화의 전반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구전성이다. 설화는 입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몸동작이나 노래 등과는 무관하며 보통의 말로써 이루어지되 그 전승은 이야기의 일정한 구조에 의존하게 된다. 설화의 구전은 이야기의 핵심 구조를 근간으로 하여 기억 , 재생, 전승된다. 그 과정에서 화자의 관점과 능력에 따라 나름대로의 수식이나 세부적 내용들이 생략되거나 덧보태져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설화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 변모되면서 전승된다는 특징을 지닌다.둘째, 산문성이다. 설화는 보통의 말로써 구연되며, 규칙적인 율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야기되어지는 어느 부분에 율문, 즉 노래가 들어가는 정도이다. 설화의 이런 점은 같은 구비문학 장르인 서사민요 ,서사 무가, 판소리 등의 율문 이루어진다.다섯째, 화자로서의 무자격성과 수련의 비전문성이다. 설화의 화자는 화자로서의 자격 제한이 없고 일정한 수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기억된 구조에 힘입어 누구나 화자가 될 수 있다. 화자에 자격 제한이 없으므로 설화는 구비문학 갈래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계층의 향유층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구비문학의 화자나 청자로서 적극적인 열의나 관심을 갖지 않던 양반과 지식인도 설화는 즐겼다.여섯째, 문헌정착 용이성이다. 설화는 구비문학 갈래 에서 문자로 정착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많이 가진다. 이는 설화가 양반이나 지식인 등을 포함하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헌으로 정착되어도 변질될 가능성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일곱째, 보편성이다. 설화는 인류가 문자를 갖기 훨씬 이전부터 형성된 이래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져 민중 속에서 유전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설화의 발생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고대설화가 문자로 정착된 것은 고려 때부터라 하겠으며,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한 수많은 신화·전설이 수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바로 설화의 보고(寶庫)라 일컬을 만한 것이다. 그 밖에 고려 전기에 박인량(朴仁亮)의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이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고, 그 일문(逸文) 10편이 《삼국유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태평통재(大平通載)》 등에서 보인다.2. 신화신화는 이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 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신화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 역시 각각 다르다. 여러 학자들의 신화에 대한 정의를 요약, 정리해보면 신화는 다음의 세 가지 각도로 규정할 수 있다.①신(神)에 관한 이야기②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는 이야기③신성시되는 이야기무든 신화는 신성시되고, 신성시되지 않는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신성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것을 포괄적이고 규범적 의의를 갖도록 차원을각하는 집단의 것이다. 이 집단을 벗어나면 같은 신화라 하더라도 의의가 달라지거나 신화가 아니다. 한국인은 희랍신화를 신화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신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대부분 문헌에 기록된 형태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기록된 신화는 거의 건국신화이다. 단군신화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수로왕신화 등이 한국의 대표적 건국신화이다. 이 가운데 단군신화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성립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른 건국신화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인간계로 내려와 곰이 사람으로 변신한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조선을 세우고 1,500년 동안 다스린 뒤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3. 전설전설은 일정한 민족 혹은 지방에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인데 신화가 신격중심이라면 이것은 인간과 그 행위를 주제로 한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전설에 있어서도 인간의 생활은 많은 경우 신적 존재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특히 영웅 전설에서는 주인공 자신이 거의 반신격화(半神格化)되는 수가 많다. 또 전설은 역사와 같이 객관적 진실성을 가지는 이야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관적으로 진실한 것과 믿을 수 있는 사상(事象)을 내용으로 하는 점이 신화와 공통된다. 신화와 다른 점은 전설이 그 내용과 관련된 개별적 증거물을 동반하여 구체성을 갖는다는 점과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전설의 특징을 설명하면 이야기의 연대, 사건의 장소, 주인공 등이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체험과 진실성이 표현되어 있으며 하천, 섬, 사찰 등에 대한 형성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전설의 종류는 전승의 장소, 발생동기, 설화 대상 등에 따라 나눌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발생 동기에 따라 나눈다.1) 설명적 전설 : 자연 사물이나 풍습 등을 설명하기 위해 꾸며진 설화. 사물의 기원이나 성질을 일정한 연관 사실을 끌어 나라의 정감록에 근거하는 정 도령 전설이나 미륵 신앙과 관련된 각종의 설화가 여기에 속한다.4. 민담구술(口述:口碑, 口傳)문학 또는 민속문학이라고 불리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서 산문 서사문학(散文敍事文學)의 테두리에 드는 것을 통틀어 ‘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학계에서 더러는 설화(說話)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한국 민속의 현장에서 원래 민담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야기’ 또는 ‘옛이야기’ ‘전해오는 이야기’ 등으로 불리어 왔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이바구’라 하기도 하였다. 이 옛이야기에는 동화는 물론, 지역전설 이외에 야사(야담)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밖에 일화(逸話)나 우화(寓話), 우스갯소리, 그리고 성인들 사이의 성(性)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민담은 민속문학이다. 그것은 민담이 민중 사이에서 창작되고 민중 사이에서 전해진 서사문학임을 뜻하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진 서사문학임을 뜻하고 있다. 이같이 지은이와 듣는이(즐기는 이), 양쪽에 걸친 민중성(民衆性)과 구전성은 민담이 지닌 양대 특성이다. 이 가운데 지은이의 민중성은 무명성(無名性)과 관련되어 있다. 민담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게 그저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 옛이야기이고, 동시에 들은 그대로를 남들에게 전해 주는 옛이야기이다. 지역성과 시대성, 그리고 전하는 사람의 개성이나 생활사 등에 의해서 변화를 일으키면서 민담은 전해져 가되, 그 변화의 밑에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하지 않은 보편성을 흔히 규범형식(規範形式)이라고 부른다. 민담을 신화·전설·동화로 가르는 것은 민속학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적인 3분법이다. 민담은 신화의 신성성과 위엄성, 전설의 신빙성과 역사성 등이 거세되고 흥미 본위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따라서, 민담은 전설이 지녔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증거물을 갖지 않는다는 특색이 있으며 그처럼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인 제한성을 벗어나 제재나 내용것도 민담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다. 민담은 대체로 동물 설화, 본격 설화, 소화로 구분하지만 본격 설화와 파생 설화로 구분하기도 한다.1) 동물 설화 : 동물담이나 자연 설화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동물에 관한 이야기나 동물이 행위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포괄한다. 동물의 유래를 이야기한 것이나 동물을 통해 우화(寓話)를 펼친 것이 모두 여기에 속하며, 우리 나라의 '구토 설화'나 '장끼전', '서대주전'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이다.2) 본격 설화 : 주인공의 출생에서부터 행복한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설화를 말한다. 부분만이 이야기될 때는 파생 설화라고 한다. 본격 설화는 현실담과 공상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경험적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를 다룬 설화가 현실담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가 공상담이다.3) 소화 : 웃음을 야기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 한국민담은 골계적 성격이 강한 과장된 이야기나 어리석은 사람을 비웃는 치우담, 사람을 골려 먹는 사기담이 주류를 이룬다. '봉이 김선달'등은 한국적 소화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해학적 성격이 강하다. 소화는 그 종류를 다시 나누어 과장담(誇張談), 모방담(模倣談), 치우담, 사기담, 경쟁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4) 신화에서 소설로 발달하는 과정:설화(신화, 전설, 민담) - (판소리) - 고대 소설 - 현대 소설(신소설)예) 연권녀, 효녀지은 설화 - 심청가 - 심청전 - 강상련방이 설화 - 흥부가 - 흥부전 - 연의 각암행어사, 열녀 설화 - 춘향가 - 춘향전 - 옥중화5. 야담, 등과 같은 책의 표제로부터 그 명칭이 유래된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의 총칭이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하여 민간에서 전해온 이야기로 정의된다. 야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야사보다는 허구성이 중시된다는 점이 구별되며 넓은 의미로는 설화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야담은 민간에서 구전되던 설화적 모티브들이 결합되어 생성된 것이며, 문자로 정착문이다.
    인문/어학| 2003.12.04| 5페이지| 1,500원| 조회(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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