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론제1절 연구목적제2절 분석의 틀제2장 베트남 전쟁을 전후한 국내·외 상황제 1절 국제적 환경제2절 국내적 환경제3장 한국의 베트남 참전의 결정 요인-최고정책결정자로서의 박정희제4장 월남 파병 결정 과정제5장 결론을 대신하며-월남파병에 대한 평가제1장 서론제1절 연구목적1960년대의 월남참전은 우리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파병이었으며,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대한 사건이었다.그런데 한국의 월남참전 결정이 순전히 미국의 강압적 요청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었는가? 또는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외화를 획득하기위한 자발적인 것이었는가? 그리고 월남파병으로 인한 정치·외교·경제·군사적 이익은 무엇이었으며 과연 파월한국군은 용병이었는가? 하는 의문들은 자주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제시되었다.한국의 월남참전원인을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미국으로부터 똑같은 요청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outh 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의 회원국이고 지리적으로도 한국보다 가까운 필리핀 태국 대만 등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소규모의 병력만을 파견하였는데 SEATO 회원국도 아닌 한국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파병을 결정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강압 때문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다.제2절 분석의 틀대외정책을 분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흔히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외교사적 접근법(diplomatic history approach)과 외교정책 분석법(foreign policy analysis)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외교활동 관련문서를 철저히 검토한 후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하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고, 후자는 당시의 복잡한 외교활동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성(regularities)이나 패턴(pattern), 또는 경향성(trends) 등을 찾아내거나 당시 외교정책의 결정교인 등을 밝혀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함으로써 향후 외교정 특정의 행위를 했다면 그 국가의 목적에 입각한 가치극대화의 수단임에 틀림없다.특별외교정책결정으로서의 월남파병은 합리적 정책 결정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이해하기 쉽기에 우선 베트남 전쟁을 전후한 국내외 상황을 알아보고 최고정책결정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인식을 알아본 뒤, 파병 결정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다. 후에 종합적으로 합리적 정책 결정 단계로 월남파병을 평가해보겠다.제2장 베트남 전쟁을 전후한 국내·외 상황제 1절 국제적 환경한국이란 나라의 국경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국 정부관리들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어 선택을 제약하거나 또는 확대하게 되므로 이 당시 외교정책을 설명하려면 당연히 국제 환경의 실상과 변화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특히 1960년대의 한국은 오늘날에 비해 국력면에서 상대적으로 허약했기 때문에 대국에 비해 국제적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960년대 이후에는 국제체제의 변수가 다른 변수(개인적 변수, 정부적 변수, 경제적 변수, 사회적 변수)보다 대미외교정책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한국의 대미외교정책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대한반도 정책의 변화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는바, 이는 당시한국의 안보와 번영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정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국제환경은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1)국제정치정세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정치체제는 미소대결상태에서 점차 평화공존으로 전환되었다.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화현상은 다극화현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자유진영 내에서 서구국가들과 일본이 부상하기 시작했고, 공산진영에서는 중소분쟁이 발발하고 동구국가 중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동맹 세력이 출현하여 유엔 내에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한반도 주변 정세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미국과 소련 외에 중국과 일본이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중소분쟁에서 1960년대 후반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인해 갈등을 빚을 때까지 핵무장에 박차, 미국을 비롯한 전승 제국의 전후 조치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이 엄청난 비극을 걷어줄 책임이 미국에 또한 있다는 것을 알 때, 미국과 한국의 거리는 새삼스럽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우리는 미국을 좋아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제도가 그렇고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이 그렇고, 공침으로부터 우리를 방위한 것이 그렇고, 경제 원조를 주어서 그렇다.그보다도 우리가 미국을 더욱 좋아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은혜를 주었으면서도, 우리를 부려먹거나, 무리를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다. 미국은 그같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대상이다.첫째,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야한다.둘째, 민주주의의 이상과 경제 원조의 정신적인 의욕은 높이 사는 바이나, 그렇다고 이를 통하여 한국 사회로 하여금 일률적인 미국화를 기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셋째, 군사·경제면에 걸친 미국의 원조는, 이왕에 줄 바에야 우리의 뜻에 맞도록 하여달라는 것이다.지금 우리의 관심은 경제 재건 하나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과업의 수행을 위하여 온갖 고통을 참고 있다.미국은 차제, 과감하고도 대폭적이 원조를 함과 동시, 그 정책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여야 할 때라고 믿고 있다.최고정책결정자로서의 박정희는 1오기에 가까운 고집과 강한 집념 2세심한 주의력3권위주적 경향을 성격상의 특징으로 갖는 박정희의 행태는 크게 두가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하나는 모범생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자립성향이다. 모범생 성향은 선생은 훈계·명령하고 학생은 이에 경청·복종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것이 정치의 영역까지 확장되어 박정희로 하여금 권위주의적 결정을 내리게 하고 이에 대한 야당정치인·지식인·학생들의 반대를 불허하게 만들며 당내의 불충대해서는 엄격한 제재조치를 취하도록 했다.본 보고서의 주제인 베트남 파병은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던 한국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정예 병력을 해외 파견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여기서 박정희가 베트남전쟁의 성격주의 전략의 일환이라고 인식하였다.둘째, 제 2 전선론에 입각한 한국안보의 관점이다. 소위 도미노 이론에 입각하여 베트남의 적화는 한반도 안보에 직접 연결된다는 인식이다.1965년 연두교서에서는 반공 자유우방에 대한 공산침략이 우리나라의 안보에 직결된다. 같은 해 1월 26일 파병에 즈음한 담화문에서는 월남이 공산화될 경우, 자유세계의 대공전선에 혼란과 차질이 생김을 물론 한반도를 포함한 전태평양지역에 급진적 도발행위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를 불사를지 모를 하나의 불씨를 미연에 꺼버리자... { 『박정희 연설집』, 65년 1월 26일.고 하였다.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중공 등 공산주의의 팽창에 따른 위협이 아닌 베트남을 제 2전선이라고 간주하여 휴전선에 따른 한국의 안보와 직결시키는 위기의식이 표명된 바 있다.셋째, 한미관계의 맥락에 따는 미국의 대한전략 및 대한 안보공약, 한미동맹관계 측면에서의 인식은 어떠한가?1967년 4월 파병의 불가피성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약 우리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추측으로는 주한미군 2개사단이 월남으로 갔을 것이다. 당신 월남, 미국정부가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 그 결과로 휴전선에는 힘의 공백이 생기며 북한의 침공 찬스를 주게 된다. 또한 정치, 심리적 불안으로 외국인의 한국차관도 꺼리게 된다. 우리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느냐?...우리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 『박정희 연설집(부록)』,65년 1월 17일 대전 유세.라고 하면서 파병으로 인해 오히려 파병전보다 국방력이 강화되어 현역 1개 사단을 새로 증편했고 예비 3개 사단을 현역사단과 똑같은 장비로 보충했다고 자랑하였다.곤경에 처한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을 도운다는 일반적 견해는 이따금씩 표명되고 있으나 상기 연설에서는 보다 진솔하게 한국 생존의 안보를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를 시키지 않백 문제 등을 근거로 신중론을 피력하였다.또한 야당의 윤보선의원도 파병을 정치문제와 관련시켜가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론들은 참전에 대한 박정희의 강경한 의지와 미국 측의 설득, 야권내의 분열로 의사결집을 못했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이때 박정희 정부는 대미외교협상에 국회의 파병동의 반대론을 협상의 수단으로 사용한 일면이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국회 민주 공화당의 소장파를 대표한 차지철의원은 박대통령의 충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반대론을 제기하였다. 대미외교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한 박정희 정부의 은밀한 사전계획이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이기종, 한국군 베트남참전의 결정요인과 결과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1). p107한국의 최정예 전투부대를 파견한 3차 파병은 파병규모나 성격에 있어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새로운 양상을 부여 하였다. 제 3차 파병에 이르러 반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요구조건이 구체화 되었다.미국은 적을 찾아내어 적의 병참설비와 기지를 파괴 하는 수색섬멸작전을 대월남 전략의 기둥으로 채택하였다. 이 전략에 의해 한국 대대의 추가요청을 요구 하게 되었다.이러한 전략적 필요에 따라 대두된 한국군의 참전문제는 1965년 3월15일 미국을 방문한 이동원 외무장관과 러스크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검토되었고 1965년 4월6일 미대통령 특사 해리만의 내한으로 이루어진 한미회담에서 실질적 결정이 이루어졌다.5월18일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 대통령사이의 정상회담은 최고수준의 확인행위에 불과했다.박-존슨 회담에서 확정된 한국 전투사단의 참전 결정은 1965년 6월과 7월 사이에 구체적 조건을 놓고 협상되었다.1.한국에서의 현 한-미 병력 상한선의 유지2. 3개의전투 예지사단에 장비수당을 지급하고, 한국 방위태세의 약화를ㄹ 막기 위해 17개 정규사단에 화력, 기동전, 통신능력을 행상시킬 주요 품목 제공3. 한국군 배치 이전과 동등한 수준의 원조계획 자금의 제공...7. 한국의 교체 병력과 장비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