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의 검토◁{《目次》1. 서론2. 비문의 해석3. 정복활동4. 고구려의 천하관5. 고구려의 수묘제1비석의 수묘제 관계 기사 2수묘인의 임무3수묘제 시행의 사상적 배경 4 수묘인의 임무6. 결론1. 서론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의 재위 22년간(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왕위를 물려 받은 장수왕이 즉위 2년(414)에 고구려 수도 국내성 동쪽(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에 세운 기념비다.광개토대왕릉비 문에는 전문 1,802자가 4면에 가득 새겨져 있었으나 1,500여 년이 경과하는 동안 지금은 여러 글자가 마멸되어 1,700여 자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일본 제국주의 군부와 관학에 의하여 征韓論 의 대의 명분이 되었기 때문에 한·중·일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비문의 수묘인연호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등장하는 지명과 缺字補入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여기서는 광개토대왕비를 해석해 보고, 陵碑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인 정복활동과 고구려의 천하관, 그리고 수묘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 중 정복활동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다음 보고서 주제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때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2. 비문의 해석해석문에서 - 로 표시된 부분은 결자로 내용을 알 수 없게 된 부분이도, (추모왕은) 등으로 된 것은 해석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추모왕은 을 보충해 넣은 것이다. ( ) 로 표시된 것은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다.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로, 어머니를 하백여랑으로 하여 태어나셨다. 알을 깨로 나셨는데, 나실 때부터 상스러운 덕이 있으셨다.-어가가 남으로 순행하도록 명하여,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되, 나는 하늘이 낸 사람(아들)으로, 어머니는 하백여랑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다.8년 무술에 왕명으로 편사(兵車25)를 보내어, 백신(숙신) 토곡에 관병(觀兵)하였다. (관병중에) 막사라성의 가태라곡 남녀 300여인을 약탁했다. 이 이래로 (高句麗에) 조공하고 (高句麗를) 섬겼다.9년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백제와 왜가 화통하므로)왕이 (그것에 대비하여)평양으로 순시하여 내려가TEk 그런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어 말하길, 「왜인이 신라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를 허물어 부수고 있습니다. (신라는) 노객으로 (왕의)신민이 되었으므로, 왕께 와서 명령을 청합니다.」하니, 태왕은 은자하시어, 그 충성을 아끼어 (高句麗의)사신을 파건하여 딸려서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알렸다.10년 경자에 왕명으로 步騎 5만을 신라를 가서 구하도록 파견하였다. (高句麗軍이) 남거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도착하기 까지) 그 중간에 왜가 가득하였는데 관군(高句麗軍)이 이르자마자 왜가 물러갔다. (물러가는) 왜를 배후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임나가라에서) 성들을 공략하자, 성들이 즉시 귀복하므로 신라인을 안치하고 지키게 했다. 신라성인(신라에 服屬한 성으로 왜구에 점거되어 있었던) (염)성을 공략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졌는데, (염)성안의 (성민)10명 가운데 9명은 dhoff 따르기를 거부하여 죽었으므로, 신라인을 안치하고 지키게 했다. 신라성은 -(신라에 복속되어 있던 성들이 왜구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황이나 수복과정 등이 기록되었던 부분으로 추정되며, 여기에 백제와 왜의 관계가 기술되었을지도 모름) -왜의 나머지(또는 백제와 왜)가 무너져 도망하였다. ( )성을 공략하여, 신라인을 안치하고 지키게 하였다.오래도록(지난 날) 신라의 매금(왕)이 몸소 온 일이 없었다. ( )( )( )( )하는 (섬기는) 것을 논의했다는 것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게 신라왕 매금이 가복(신하)으로서의 임무를 다할 것을 청하고 조공하여 왔다는 내용으로 추정됨)-14년 갑신에 왜가 불궤하여, 대방지역에 침입하여 輯安에 서 있는 廣開土王陵碑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광개토왕의 구체적인 정복활동을 이 능비의 碑文을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魏書』 丹傳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광개토왕 최초의 활동은, 永樂 5년(395년)의 稗麗 에 대한 것이었다. 王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鹽水 에까지 이르서 牛馬群羊 이 수도 없는 部落 6, 7백 營 을 쳐부수고 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는 것이다.이에 대하여는, 종래 鹽水 를 鹽難水= 佳江으로 보고 稗麗 를 遼東이라느니 奉天의 동남이라느니 한 설도 있었다. 이와 같이 광개토왕의 활동 범위를 되도록 좁게 잡은 경향은 이 밖의 다른 여러 구절에서도 흔히 보이던 일이지만, 이와 같이 좁게 잡는 견해는 대개 논거가 설득력이 약할 뿐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앞에서 말한 廣開土境의 전모와도 점점 거리가 떨어지는 것임을 미리 지적해 두어야 겠다.* 永樂 6년의 百濟 征討광개토왕은 영락 6년(396년)에 친히 水軍을 이끌고 殘國(百殘一百濟) 을 거쳐, 백제왕의 항복을 받고 그 王弟와 大臣 10인을 포함한 포로 1천을 이끌고 개선하였다.「능비」는 이 영락 6년條에 앞서서 백제 정토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難解로 이름난 倭以辛卯年來度海破… 운운의 구절이다.*永樂 8년의 ?愼 征討다음은 영락8년(398년)條다. 이 해 광개토왕은 偏師 를 보내 息愼土谷 을 관하게 하고 몇 개 지역의 남녀 3백명을 妙得 하여 이로부터 이 지역이 朝貢論事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이 영락 8년의 정토 지역에 해당하는 문자를 息愼 이라 읽는다면 그것이 곧 ?신임은 당연하며{) 『史記集解』五帝紀 등.국내의 연구자들도 이 점은 일치하여 인정해 오던 터이다. 고구려는 그 훨씬 전부터 엄신을 복속시켜 왔으며{) 李進熙, 『廣開土王陵碑의 硏究』, 1972, 附錄고구려가 숙신을 고래의 세력권 내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관하여 그 복속 관계를 재확인한 것일 것이다.*永樂 10년의 百濟·伽倻·倭 征討다음은 영락 10년(400년)條다. 이부분은 비문 전체.종래의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능비에 보이는 왜의 활동은 영락 원년(391)으로부터 영락 14년 혹은 영락 17년까지의 만 13년간 혹은 만 16년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나의 해석을 따르면, 그것은 영락 9년으로부터 영락 14년까지 만 5년간이 된다.그러나 그것이 만 5년이간이건 만 16년간이건 간에, 왜가 결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潰滅되었다는 것이 능비의 내용인 것이다. 그것은 2세기 이상에 걸쳐 常設된 것처럼 말하는 소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 허구임을 또 한번 밝혀 주는 것이 된다.4. 고구려인의 천하관천하라는 말은 하늘 아래의, 또는 天子의 권위하에 있는, 온 세상을 뜻한다. 이 온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 자기 나라의 위치가 어떠하며, 나아가 인접 집단과 비교해 자기 족속의 특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인식을 담은 것이 天下觀이다.고구려에 내려오는 동명신화가 5세기의 왕실의 기념물인 능비나 그리고 귀족의 묘지에서 고구려왕실의 시조인 주몽의 전승으로 나타나 자기 나라의 신성한 내력과 왕실의 존엄성을 밝히는 상징이다. 특히 이 시기 고구려왕의 초월적인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함에 따라 일광은 皇天·天帝 및 日月로 표현되었다.{) 武田辛男, 「牟頭婁一族과 高句麗王權」,『朝鮮學報』99·100, 1981이에 의할 때 一神 또는 天帝의 아들인 주몽의 자손으로 고구려왕은 天孫이 되며, 地母神인 河伯女의 아들로서 주몽이 지니는 농업신적인 성격 또한 고구려왕에 체현되어 이어진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고구려왕은 천손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온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이며, 또한 天上과 地上을 매개할 수 있는 최고의 司祭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바이다.5세기 고루려인은 자기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이 천하라는 용어와 그리고 陵碑나 이어서 살필 中原碑에서 보이는 天帝·皇天·朝貢·年號·華夷 등의 개념과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만큼 고구려인의 天下觀은 중국인의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天下觀의 기저는 중부지방 등의 주요 지역은 4세기 말 이후 고구려 영내로 병합되어져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 귀속되어졌으므로, 5세기 당시에 고구려의 전 영역내의 주민들간에 그러한 면이 충분히 진전되었다고는 상정키 어렵겠다. 이러한 天孫國 의식은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대화와,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고구려국의 현실적인 위치와 인접국과의 관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5. 고구려의 수묘제광개토왕의 號 중 국강상 은 그의 능묘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다. 故國之原 에 묻힘으로써 고국원이라고 이름한 16대 고국원왕을 일명 국강상왕이라고 하였음에서 국강상은 국원이라는 지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의 號에 그의 葬地名을 넣은 것을 통해 당시 고구려 왕실에서 선왕 곧 광개토대왕의 묘역과 능묘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것이 호의 첫머리에 나온다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비문에는 광개토왕릉을 지킬 수묘인데 관해 생전에 취한 조치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왕이나 광개토왕릉비를 세운 長壽王의 입장에서 중요했던 것의 하나가 광개토왕릉을 수호할 수묘인에 관한 부분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여기서 광개토왕릉비의 내용 중 수묘인 관계기사를 검토하고 그를 통해 고구려의 수묘제 운영의 실태, 수묘인의 사회적 성격, 수묘제 실시의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1비문의 수묘인 관계 기사광개토왕 이전에는 각지의 구민의 일부를 차출하여 수묘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왕들도 생전에 자신의 수묘인을 지정하였다. 수묘인의 출신지 및 숫자를 새긴 비석이 없어 수묘인이 착오되었다. 수묘인은 매매되기도 하였다.한편 광개토왕은 수묘제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구민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그 대신 신래한예 중에서 자신의 수묘인을 뽑을 것을 유연으로 명령하였다. 선왕들의 묘에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 수묘인의 출신지 및 숫자를 기록하여 착오를 막도록 하였다.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