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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논쟁평가 평가A+최고예요
    머 리 말본 문1.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의 전개과정 ----- 3 p(1) 식민지근대화론 -------- 3 p(2) 수탈론 ------------ 9 p2.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의 대립 ------- 10 p3. 총체적 관점에서 본 일제시대 --------- 12 p맺 음 말참 고 문 헌'식민지 근대화론'이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넓게는 최근의 동남아 신흥공업국가에서 보여지듯이 세계사적으로 과거 피식민국가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통칭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가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어갔다는 것을 이른다. 이 용어는 '식민지 수탈론'에 대칭되는 말로서, 종래 일제 하에서 일방적으로 수탈당하기만 했다는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식민지 자본주의화론' '식민지 개발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식민지 미화론' 등을 지칭해서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최근 우리 학계에서 부쩍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과제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가 부문별 혹은 개별적인 연구에서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우리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일제강점기에대한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은 식민지시대의 근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반대편에서는 이를 ‘식민지근대화론’을 넘어 식민지미화론 내지는 심지어 신식민사관으로 간주했고,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극심한 경제적 피해를 주장하는 관점을 ‘원시적 수탈론’으로 비난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상대방의 이름짓기(식민지근대화론 혹은 수탈론)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들의 주장을 문맥에서 분리하여 다른 의미로 왜곡한다고 비난한다. 결국, 식민지시대의 성격규정을 둘러싼 학문적 영역의 근대성 논의가 이 시기를 보는 관점의 도덕성 문제, 즉 도덕적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논쟁의 부정성과 결착상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료이미지 혹은 역사과정을 이해하는 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1983년 마르크스 몰후 100년을 맞아 일련의 학술회의를 통해, 당시 겨우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국자본주의에 대해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 현대의 세계사 인식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의 필요를 느꼈고, 또 일본의 명치유신과도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중진자본주의라고 하는 일반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1984년 7월 김영호 교수와의, 1986년 여름에는 안병직 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사학자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1986년 12월에는 안, 김 교수와 일본연구자 8명으로 경도에서 조선근대경제사의 심포지엄을 행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그 성과를 공간하였고, 1989년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일련의 공동연구와 학회를 계속하였다.중종촌은, 1987년 8월 4일 '낙성대연구실'에서 보고한 바 있고 그 뒤에 문장화한 자신의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NICs 4개국(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요인을 그들이 갖는 공통점에서부터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말하자면 그들 4나라가 다 같이 식민지였으면서도 다른 독립국가였던 나라들보다 먼저 '근대화'를 달성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공통점은 4개국이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 외에 첫째 식민지화에 의하여 구사회=전근대적 사회 경제구조가 꽤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었다는 것, 둘째 그 위에 본국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보다 깊이 만들어졌다는 것, 셋째 그 과정에서 본국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했다는 것-식민지자본주의의 형성-인데, 한국과 대만이 특히 이 세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동아시아 NICs의 중요한 역사적 조건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식민지가 되어 구사회가 철저히 파괴되고 식민지 본국에 더 철저히 종속화되어 본국으로부터 더 산미증식계획의 효과 위에서 1930년대부터 일질을 비롯한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독점자본에 의한 공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경제는 20년대까지의 종속경제가 한층 강력하게 일본경제에 종속되어 갔고 식민지자본주의가 공업부문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진출한 독점자본으로 재조일본인자본과 조선인자본이 공업 상업 금융 등에서 급격하게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 점이 간과되고 일본독점자본의 수탈과 전시체제로 조선인자본의 몰락이 강조되어 왔으며 일본 독점자본은 일본본국경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내에서는 그 관련산업은 발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공업화는 확실히 일본 본국으로부터 진출하여 온 일본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그 진출에는 조선경제가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조건-앞에서 언급한 식민지적 원축의 진행에 더하여, 인프라스트럭처, 유통조직의 발달 및 관련된 부문의 최소한의 설립 등-이 필요함과 동시에, 진출 자체가 그러한 관련부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공업화는, 물론 일본본국까지도 포함하는 조선경제전체를 끌어들이면서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30년대의 공업화에서 조선경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식민지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여기까지가 그가 낙성대연구실에서 발표한 '식민지 자본주의 형성'과 관련된 논문의 요지다. 이는 종래의 식민지 수탈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것으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수면하에서만 움직이던 주장을 수면위에 떠올린 셈이며, 이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과 한국의 학계에서도 뒷날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불려지는 학문적인 소용돌이가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1960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산업국들 NICs 의 경제발전은 미국 학계의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NICs 중 한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를 거친 나라들이 경제성장에 성공함에 따라 이들의 성장과 식민지시계에서 제시되고 있는 「침략과 개발」이라는 한국근대사의 구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침략과 개발」을 경제학적 개념으로 일원화시키면, 「수탈과 개발」이 될 것이다."그는, 현재 한국이 근대화(중진화)를 끝내고 현대화(선진화)를 바라보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근대화는 모방활동에 의해 가능하나 선진화는 '창조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창조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운동에 대한 상찬'을 강조하는, 독립운동만을 특권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식민지적 개발은 물론 한국민의 근대민족으로서의 자기변신활동전체가 일괄적으로 무시되거나 반민족적인 것이라고 매도되기 일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독립운동사의 강조가 일제 강점기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 있어서의 경제발전과 근대사연구〉에서 근대경제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개발'의 측면, 즉 '식민지개발'과 '조선인의 자기개발'로 나누고 다음과 같이 검토, 정리하였다.종래 학계에서는 일제시대를 정체적 빈곤한 시기로 보았으나, 그는 빈곤하지만 동태적인 시대로 파악한다. 일제시대의 국내총생산(GDP)은 1912-37년간에 4.15%씩 성장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세계자본주의제국의 성장율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이와같은 높은 성장율의 원인은 식민지화과정을 통한 새제도의 수립(화폐개혁 재정개혁 및 토지조사사업)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인프라스트럭처의 건설이 충실하여 화물수송량이 급격히 증가하고(1930년 594만톤에서 1944년 3,102만톤으로),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45%의 곡물생산량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토지개량사업과 근대적 농법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종래 군수공업만 발달하였다고 비판하던 '공업화'도 사실은 '생산력확충부문'이 주내용이었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분업체제와 자본 및 기술 공급을 통해 일본 경제권에 깊숙히 포섭되었으며, 그 결과 무역 및 공업생산지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는 것간의 통치가 유익했다'고 횡역의 소리들을 연발하는 등의 현실에 심히 자극"되어 "조선총독부… 등에 관한 그 모든 수법을, 실무면을 통하여 잘 아는" 자신이 붓을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그 뒤 많은 저술들이 나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수탈론'적 시각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신용하에 의하면,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으로는 한국을 일본 경제발전을 위한 식량 공급지,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 공급지, 일본 공업제품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 판매시장, 일본 자본수출에 의한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지, 일본을 위한 노동력의 공급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여 착취 수탈하는 것이었고,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민족형성 요소들을 말살하기 위하여 언어, 문자(한글), 민족사, 성명(창씨개명), 민족의식, 민족교육을 말살하고 일본어 사용 강제정책, 일본숭배사상 주입정책, 일본역사 주입정책, 일제의 황국신민화(황국신민화)를 위한 서약정책 동방요배정책 일본신 봉숭정책 등을 강제하였다는 것이다.수탈론적 시각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수탈론에서는 실학시대 이래 내재적으로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을 일제가 강점하여 그 자생적인 자본주의 맹아를 잘라버리고 수탈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적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강만길은 일제 식민지배정책의 기본이 민족 부르즈와지의 성장을 막고 민족자본의 축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민족 부르즈와지는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이 되고 민족자본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점에 서서 그는 일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였다. 가령 토지정책의 경우, 문호개방 이후 성장해 오고 있던 자작농 상층부를 제거하고 농민의 대부분을 영세소작인화하는 한편 친일적인 지주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토지조사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는 농업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로 그것이 저지되고 오
    인문/어학| 2000.11.30| 15페이지| 무료| 조회(4,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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